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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선산 금오서원(金烏書院)원생들의 물음에 대한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의 대답
이장희 추천 0 조회 10 14.04.30 19: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선산 금오서원(金烏書院)원생들의 물음에 대한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의 대답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 지난날 금오서원을 창립할 당시에 온 고을 사류들이 본부(本府)에 정문(呈文)하여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또 조정에 아뢰어 금오산(金烏山) 밑에 사당을 세웠습니다. 그 당시에 향선생(鄕先生) 진락당(眞樂堂) 김취성(金就成), 구암(久庵) 김취문(金就文) 감사(監司), 송정(松亭) 최응룡(崔應龍) 감사(監司) 등이 야은(冶隱) 길재(吉再)선생, 신당(新堂) 정붕(鄭鵬)선생, 송당(松堂) 박영(朴英)선생 등 3현을 봉향하자고 논의하고 아울러 정언(正言) 이맹전(李孟專)을 함께 넣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뒤에 이맹전을 넣자는 논의는 도로 잠잠해지고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을 넣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그와 같은 논의가 결정되기 전에 김취성과 김취문은 다 세상을 떠나, 고을 사류들이 이러쿵저러쿵 여러 말을 하다가 결국 야은 길재, 점필재 김종직, 신당 정붕, 송당 박영 4현을 함께 봉향하였고, 조정에서 금오서원으로 사액이 내려왔습니다. 임진왜란 뒤에는 선산읍 남산(藍山)의 남쪽 낙동강 가로 옮겼으므로 마땅히 그 편액의 이름을 고쳐야 할 것 같은데 조정에서는 또 옛 이름대로 사액을 하였습니다. 지금 과연 고쳐달라고 청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답〕 서원을 지금 이미 옮겨 세웠는데도 조정에서 내린 사액이 옛 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면 아마도 사유를 갖추어 계품하여 조정의 조처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문〕 농암(籠巖) 김주(金澍)선생의 사적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아 당초 서원을 세울 당시에 함께 봉향하자는 논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고을 어른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에 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용암(龍巖) 박운(朴雲)이 응교(應敎)벼슬을 하는 김진종(金振宗)과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그는 곧 김주선생의 5대손이므로, 반드시 그 집안에서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지만 남들은 모르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암 박운은 김진종에게 물어본 결과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죽은 사실을 알고 항상 존경하여 탄복하였으며, 이따금 그의 자제들에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박연(朴演)과 손자 박수일(朴遂一)이 그들이 들은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고 벗들과 항상 그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 내용이 한두 명의 노인이 전하는 말과 서로 들어맞았다고 합니다. 요즘 이와 같은 설이 크게 나돌아 김주선생의 절개가 더욱 드러났습니다. 지금 김주선생을 서원의 봉향하는 대상에 함께 포함해 넣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답〕 김주선생의 사적은 나도 일찍이 들은 적이 있는데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듣지 못하여 항상 유감스러웠습니다. 지금 김주선생을 흠모하는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나에게 물어온 일에 대해서는 감히 어떻게 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문〕 김주 선생의 선조는 대대로 주아리(注兒里)에서 살아왔는데, 어떤 사람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선생이 신곡(新谷)의 농암(籠巖)으로 터를 잡아 이사하였다 하고 그 자손도 그렇게 말합니다. 요즘 고을 사람들은 농암(籠巖) 선생이라 부르고 있으며, 해평인(海平人) 윤근수(尹根壽)는〈농암전(籠巖傳)〉을 짓기까지 하여 그 사적이 이미《동사찬요(東史纂要)》에 수록되었습니다. 그 호는 선생이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고 뒷사람이 별다른 근거도 없이 농암이라 불렀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만일 서원에 모신다면 이 호를 위판에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답〕 칭호를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고을의 제현들이 함께 상의하고 또 예를 아는 사람에게 널리 물어 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문〕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선생은, 당초에 서원에 함께 모셔야 한다는 것을 모른 것은 아니었으나 그분을 받드는 것이 당시의 금기에 저촉되는 이유로 인해 감히 못하였는데,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유감스러운 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제는 사육신(死六臣)의 자손이 조정에 녹용(錄用)되는 것이 허용되었으니, 비록 감히 조정에 요청하지는 못하더라도 고을 내부에서 서원에 함께 모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답〕 서원이 이미 국가의 학당이 되었는데 조정에 청하지 않고 사적으로 봉안한다는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문〕 하위지 선생도 칭호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분이 살았던 마을의 이름을 따라 연봉(延鳳)이라 불러야 한다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답〕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문〕 정언(正言) 이맹전(李孟專)은 노산군(魯山君) 단종(端宗) 당시에, 장래에 참화가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과감하게 물러나 당달봉사를 가탁하고 일생 동안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습니다. 재능을 숨겨 은둔한 그 의리는 옛날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것도 있습니다만 그 사적이《여지승람(輿地勝覽)》,《청백전(淸白傳)》,《이준록(?尊錄)》에 대강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 김주(金澍) 선생, 사간(司諫) 하위지(河緯地)와 함께 봉향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답〕 정언(正言) 이맹전을 함께 모시자는 논의는 처음부터 있었으니 여러분들이 함께 의논하여 봉안하더라도 안 될 것은 없습니다만, 당초에 그 논의를 도로 중지한 본의를 또한 깊이 따져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고루한 식견에다 문견이 넓지 못해 그 사이에 감히 간여할 수 없습니다.

〔문〕 사예(司藝) 김숙자(金淑滋)는 학문과 도덕, 평생의 행사가《이준록》에 자세히 실려 있을 뿐 더 이상 다른 글에서는 상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길재에게 학문을 배워 점필재(?畢齋)에게 전수하였고, 또 전수해 내려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일두(一?) 정여창(鄭汝昌)두 선생에 이르러서는 도학이 우리 동방에 크게 밝아졌으니, 선생께서 끼친 공이 또한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선배들도 이미 도통(道統)이 전수해 내려온 순서를 논할 때 선생을 포함하였으니, 선현의 대열에 함께 포함하여 향사를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주천(舟川) 강유선(康惟善)의 상소 내용도 그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찌 감히 나의 어두운 소견으로 이 문제에 참여하여 논할 수 있겠습니까.《이준록》이 우리 집에 일찍이 있었으나 화재로 인해 없어진 뒤로는 그 책을 볼 길이 없고 선생의 사실에 관해 지금 잘 기억할 수 없는 처지이니, 더욱 감히 억지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문〕 진락당(眞樂堂) 김취성(金就成)은 학문과 도덕이 뛰어나고, 가정에서 효성과 우애를 극진히 한 행실에 대해 고을 사람들과 그의 자손 외에 선배들도 찬양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선생은 힘써 자신의 존재를 숨겼고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언어와 문자 사이에서는 특별히 상고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간혹 그 학문이 넓지 못하다고 혐의 롭게 여기는 자가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저서가 많고 적은 것으로 선현의 지위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니 지금 함께 서원에 모셔야 한다.” 합니다.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도학이 높고 스스로 깨친 공부가 훌륭하다는 소문을 어릴 적부터 듣고 평소에 깊이 흠앙하고 있습니다만, 어찌 감히 나의 어두운 소견으로 그 질문에 답할 수 있겠습니까.

〔문〕 용암(龍巖) 박운(朴雲)은 어릴 적부터 진락당(眞樂堂) 김취성(金就成)과 도의로 사귀는 벗이 되었고 효행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중년에는 송당(松堂) 박영(朴英)을 뵙고 크게 감복하여 마침내 스승으로 섬겨 그에게 학문을 배웠습니다. 만년에 퇴계 이황선생의 이름을 듣고 찾아가 뵈려 하였으나 결국 실행하지 못하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을 토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저술한《격몽(擊蒙)》1편(編),《자양심학지론(紫陽心學至論)》1편,《경행록(景行錄)》1권 및 잡저로서〈위생방(衛生方)〉과〈삼후전(三侯傳)〉 - 삼후는 제갈무후(諸葛武侯), 장중승(張中丞), 문문산(文文山)이다. - 등의 글을 퇴계에게 보내 정정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으며, 그가 죽자 퇴계 이황선생께서도 갈문(碣文)을 지어 그 행실을 찬미하였습니다. 그 조예의 천심(淺深)에 대해서는 뒷사람이 감히 함부로 논의할 수는 없으나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퇴계 이황선생도 이미 그가 도학에 종사하였다고 허여하셨으니 김취성과 함께 모셔와 봉향하는 것이 무방하다.” 합니다. 이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독실히 배우고 덕행을 닦은 것이 훌륭하다는 점은 항상 간절히 흠앙하고 있습니다만, 나는 후생으로서 견문이 고루하여 그 자세한 내용을 모르니 어찌 감히 그 질문에 답할 수 있겠습니까.

〔문〕 고을 사람들의 논의가 두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10현의 학문과 도덕에 대해 그 조예의 천심(淺深)과 고하(高下)를 모르는데 지금 모두 서원으로 모셨다가 만일 조금이라도 흡족하지 못하다는 물의가 일어난다면 도리어 미안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마땅히 서원에 봉향해야 할 인물 이외의 사람에 대해서는 별도로 향현사(鄕賢祠)를 세우도록 하자.” 합니다. 이 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다른 쪽에서는 말하기를 “이미 서원을 세웠는데 또 향현사를 세운다면 경중의 차별이 있게 되는데 지방 고을의 후생이 이들 선현의 수준을 품평하여 정하는 것은 미안한 일일 듯하다. 다른 고을의 서원에서도 절개 하나를 취해 모셔서 봉향하는 경우가 있는데, 우리 고을의 10현은 혹시 도덕이 높고 낮다거나 학문이 깊고 얕은 차이를 거론할 만한 소지가 있다 하더라도 다른 고을의 서원에 견주어 보면 부끄럽지 않다. 어찌 굳이 따로 사우(祠宇)를 세울 것이 있겠는가.” 합니다. 이 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서원이 나라의 사액을 받은 뒤에는 분명히 국가의 학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인물을 새로 봉안해야 할 일이 있을 때 먼저 조정에 계품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지레 봉안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물의가 만일에 조금이라도 흡족하게 여기지 않을 경우 도리어 미안한 일이 된다고 한 말은 매우 옳다고 봅니다. 서원에 봉안한 인물 이외의 사람은 별도로 향현사를 세워 봉안하자는 것은, 아마도 조정에 그 사유를 갖추어 계품한다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또 마땅히 향사할 만한 선현을 두루 포함하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여 이와 같이 부득이한 논의가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선현의 수준을 품평하는 뜻이 아닐 듯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섣불리 거행하기 어려우니 마땅히 더 깊이 생각하고 널리 의견을 물어 조처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문〕 10현을 만일 모두 서원으로 모신다면 그 자리의 순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 만일 대단히 곤란한 점이 없다면 연대로 순서를 정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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