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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야기 스크랩 운보 김기창
다원(김명현) 추천 0 조회 195 12.09.14 22: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김기창  

                                                    

            

                                            雲甫 金基昶

                                 1913.2.18 - 2001.1.23 

 

 

                        

                                  충북 청원에 있는 <운보의 집>과 그의 동상

 

 글 / 이규남 (수필가)

 

"예술이란 늙어 나이를 먹을수록

하늘과 대화를 나누며 어린이 세계로 복귀해야 한다. "

 

이 말은 1991년 제5회 인촌상 수상 소감에서

78세의 귀머거리 화가 김기창 화백이 한 말이다.

 

베토벤처럼 아무것도 들을 수 없지만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이루어낸 불굴의 화가 김기창.

현대 화단에서는 그를 한국 현대 미술의 미스터리, 혹은 전설이라고 부른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17세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바보 인간이란

별칭을 들으면서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정열적으로 그림을 그려낸 그의 삶과 예술은 한마디로 경이로울 따름이다.

 

 

 

서울의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기창은 7세 때 장티푸스를 앓다가 

고열로 청신경에 이상이 생겨 청각을 잃어 16세가 되어서야

겨우 승동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던 그가 할 수 있는 건 낙서를 하듯 공책에

새와 꽃 등을 그려넣는 것이었다. 

그때 그의 어머니는 김기창이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일제때 중학을 나와 교사를 할 만큼 식견이 높았다. 

한편 운보는 어머니가 후실이었던 탓에 

아버지의 도움은 전혀 받아본 적도 없었다.

그의 어머니 한윤명 여사는 운보 17세 되던 1930년,

당시 어진작가로 명성이 높던

이당 김은호(金殷鎬) 화백을 찾아가 사사를 부탁하게 된다.

뒤에 김은호 화백은 당시 운보의 첫 인상을

 "상서로운 길조인 봉황새 한 마리가 성큼성큰 걸어들어오는 듯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독락도

 

                                               밤새(부엉이)

 1972, 종이에 수묵채색, 99 x 182 cm

 

다음해인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 전에 <판상도무> 곧 그네뛰기가 입선되어

"18세 장애소년의 영광"으로 장안의 화제를 일으키었고,

이어서 제11회, 12회에 <수조>와 <녀>가 각각 입선, 연 3회 입상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화단에 화려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19세 된던 해 유일의 후견자이자  가정교사였던

어머니 한윤명 여사가 셋째 아이를 낳고 산후로 고생하다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졸지에 두 동생과 할머니를 부양할 소년가장의 운명을 젊어지게 된 김기창.  

그러나 한번 타오르기 시작한 그의 예술혼은 식을 줄 몰라

제14회 선전에서 <엽귀>, <금운> 두 작품이 동시에 입선되고,

10월에는 협전에서도 <금>과 <추일>,<석류> 세 작품이 입선되는 영광을 누리고,

제16회 선전에서 <고탑>으로 드디어 특상을 받게 된다.

그는 사부 이당에게 큰절을 올리고, 이어 어머니 산소를 찾아가

똑 같은 큰절을 올리고는 감격하여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도하 신문에는

"벙어리에 귀머거리인 24세의 소년 가장이 가난과 신체적 장애를 이기고

얻어낸 의지와 예술투혼의 승리"라고 격찬했다.

제17회에서는 <하일>로, 18회에서는 <고완>으로, 19회에서는 <하일>로

다시 특상이자 총독상을 받아 4회 연속 특상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워 영예의 절정을 누린다.  

 

 

한편,

1941년에는 기도잇슈라는 동경미술대학 3학년의 여학생이 특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가 나중에 운보의 영원한 연인이자 아내가 된 우향 (雨鄕) 박래현(朴來賢)이다. 

평안남도 강서 출생으로 부호의 딸이었다.

미모에 재질을 갖춘 부자집 일등규수가 어떻게 가난뱅이 장애인 총각에게

반하게 된 것일까. 인연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

 

1949년 1월 27일 남산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민속학자 송석하의 주례로

"작업을 위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헤어진다."라는 조건으로

둘이는 결혼식을 올렸다. 우향의 결혼은 반은 사랑이고 반은 연민과 동정이었다.

 

인사동에 두 사람의 호를 딴 <운향화랑(雲鄕畵廊)> 을 열어

운보의 전성시대가 열린다.

그들은 생전에 부부전을 20회나 열어 놀라운 활동을 보였다. 

미국에서는 <예수성화전>을 열어 동양인의 예수를 그려 대호평을 받고,

귀국 후 여주 세종대왕 기념관에 모실 어진을 그려 봉안하고,

만원권 초상화를 그려 역사에 불멸의 족적을 남긴다.

 

 

운보는 1969년에서 74년까지 국전 심사위원을 지내며,

이때 홍대에도 출강하게 되었는데,  홍대의 어느 제자는 

"운보는 어느 작가에서도 느끼지 못하는 뜨거운 호소력으로 불덩어리 채

울려오는 원동력이 가슴을 흔들어 놓는다."라고 평하고 있다.

운보는 1974년 이후 민화 취미에 몰두,

 이 후 소위 "바보 화풍"을 열어가게 된다.

<새벽 종소리>, <산곡>, <정자>, <거문고>, <산문> 등 일련의  작품들로

대표된다. 

한편, 부인 우향은 단독으로 미국으로 떠났다가 간암으로 57세에 

운보의 곁을 영영 떠나고 말았다.

  

운보는 그녀의 영혼을 달래줄 꽃길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불과 2개월 동안에 80여 점을 그렸는데,

이것이 <십장생>, <바보 화조>, <바보 수렵도> 등으로  대표되는

유명한 <바보 산수화>다.

 

여기서 '바보'의 의미에 대하여 미술평론가 최병식 교수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바보란 천진이나 무위에 근거하는 소요 개념이 바탕에 깔려있다.

시각화 된 정형체만이 아니라 물성과 형상의 본질 속에 흐르는

원초적인 순수성을 읽고 무위적 자유 해방을 누리는 세계다."

 

1979년에는 은사 김은호 화백마저 87세로 운보의 곁을 떠나고,

막내 딸 영까지 속세를 던지고 수녀원으로 들어감에 따라

운보의 인생관에 큰 변동을 가져오게 된다.  

1987년에 청주 근처에 <운보의 집>을 짓고 거처를 옮겨,

자연과 어린이의 세계로 완전 복귀 하면서 새와 동물들을 기르고

어린이들과 어울려 동심으로의 즐어움을 누린다.

그리고 정신적인 또 하나의 변동은

처음 감리교회에서 장로교회로 갔다가 다시 카톨릭으로 귀의하게 된다.

 

남양주군에 1300평 대지에 <운보 복지원>을 지어

청각장애자들을 위한 훈련원을 개설 하고, <농아복지원>과 <운보의 집>을

운영하면서 가난의 적수에서 모은  전 재산을 장애자를 위해

깨끗하게 사회에 투척하였다.

 

 

그의 위대한 예술 생애를 정리해 보면,

1977년에 은관 문화 훈장, 1981년에 국민장 모란장,

1982년에 예술원상 미술부분 수상, 86년에 5.16 민족상,

서울시 문화상, 91년 인촌상 , 89년 예술원 정회원,

88년 세종대학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 수여 등등.

 

운보의 화보 발간에 붙인 시인 이은상의 헌시를 감상하며 끝을 맺는다. 

 

어려서 이당헌 찾아 스승 앞에서 먹을 갈고

깃을 펼치면 하도 찬란해 봉새 났다 기리더니만

오늘은 여의주 머금은 용의 모습 완연하다.

 

그의 분신 우향을 잃고 한 밤에 우는 두견이러니

 고독과 정한 한 가슴 안고 혼자 지키는 예술의 세계

자제와 침묵 속에서 새 경지를 열었네.

 

젊은 날의 그림 속에는  시와 낭만이 흐르더니만

이젠 유한에서 무한을 찾고 순간에서 영원을 그려

달관의 선실에 앉아 무아경을 주무르는가?

 

 

 작품 감상

 

                                                      정청 (1934)

종이에 채색 193 × 130  

이 작품의 주인공은 운보가 어머니를 잃은 해, 집안에 세들어 살게 된

기생의 딸이자 그의 첫사랑 이소제를 그린 것이다.

푸른 한복을 곱게 입고 부채를 든 여인이 이소제이고

그 옆에 있는 소녀는 그의 누이다.

이 작품은 선전에서 입선했던 명작으로 

 이소제는 운보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의 손발 노릇을 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 작품 외에 여러 작품의 모델이 되어 주었는데

그만  스무살이 채 못되어 폐결핵으로 죽고 말았다.

 

 

 

가을 (1935)

비단에 채색 170.5 × 109

1930년대 우리나라의 가을 시골풍경을 그린 이 작품은

입체감이 느껴질 정도로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다.

막내 동생을 등에 업고, 가을 추수에 한창 바쁜 부모님의 점심을 나르는

오누이의 건강하고, 정겨운 모습이 너무도 소박하다. 

이 시기에 운보는 지극히 향토적인 소재를 화폭에 많이 담았다

 

 

 아기 예수 탄생 (1952)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김기창은 예수 그리스도 시리즈 30여편을 그렸다.

그런데 모두들 한결같이 한복을 입고 황색 피부를 가지고 있다. 

아기 예수는 황소와 말 그리고 닭까지 있는 외양간에서

갓을 쓴 아버지와 두루마기를 걸친 어머니 곁에 누워 있다.

서양적인 소재를 한국적인 것으로 바꾸어 표현한 그의 상상력은

정말 놀라운 자유의지의 표현이다. 

 

 

 태양을 먹은 새 (1957)

새의 배는 둥글게 부풀어 올랐지만, 뱃속  태양의 빛은 변함이 없다.

아마도 태양으로 인해 새가 타고 있는 듯 하다.

새의 깃털과 눈이 매우 역동적이며 현대적인 감각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림 속 새의 부리나 날개는 다소 단조롭고 거친 듯한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운보가 아내와 뉴욕에 머물면서 그린 것이다. 

 

 

                                                 전복도(戰服圖) (1934)

비단에 채색 71.5 × 57.5

일제 시대의 화려한 수상경력을 자랑하듯이 이 시기 그의 작품 대부분은

일본 화풍이 짙게 배어 있다.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입꼬리, 섬세한 깃털의 표현,

화려한 의복의 색상이 그러고 화려한 일본식 부채가 그렇다.

전의가 느껴지는 무당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십장생 (1965)

비단에 채색 75.5×57.5

오래 살고 죽지 않는다기에 장생복락을 기원하면서 그린다는 십장생은

해,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 등이다.

이 작품에서는 재미있게도 소나무와 거북은 한글로, 불로초는 한문으로 씌여 있다.

매우 독특한 실험정신이 엿보인다.

사실 운보는 이 작품이 마음에 안들어 몇 번이나 찢은 후에 다시 완성했다고 한다.

 

 

 청산도 (1967)

비단에 채색 85 ×100.5

수묵화와 수채화를 아름답게 조화를 시킨 듯.

소의 등에 올라타고 좁은 시골길을 지나가는 황혼녘의 초동의 모습이다. 

한없이 푸르른 산과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 정겨운 풍경이다.

그가 꿈꾸어 오던 고향의 이미지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꿈꾸는 고향이다.

 

                                                         문자도 (1985)

적색 바탕에 검은 문자들의 조합을 만들어 문자 추상의 세계를 연 운보는

문자 추상화를  여러 시리즈로 제작하였다.

또 하나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 낸 것이다.

여러 문자들의 획을 이용하여 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역동적인 획의 흐름이 예술을 향한 그의 정열을 느끼게 한다.

 

                                                       군마도 (1996)

 비단에 수묵채색 177×278

 

강렬하면서도 역동감이 넘치는 말들의 여러 모습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구성하였다.

바람을 타는 갈기의 모습과 힘이 넘치는 등과 다리의 근육,

집념이 보이는 눈매 등이 어디선가 막 말의 울음 소리라도 들릴 듯,

당장 그림 속에서 뛰쳐나올 듯 하다.

도저히 83살의 할아버지가 그렸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아악의 리듬

 1967, 비단에 수묵채색, 86 x 98 cm

 

 

                                                세 악사

 1970년대, 비단에 수묵채색, 64 x 75 cm

 

                                                         춘정(春庭)

 1976, 비단에 채색, 64 x 62 cm

 

                                                                  

 1977, 비단에 채색, 61 x 69 cm

 

 

1984, 비단에 수묵채색 103.6 x 84.4 cm귀로

 

 

 1993, 비단에 수묵채색, 130 x 160.5 cm점과 선 시리즈

 1993, 종이에 수묵채색, 181 x 337 cm

 

 

                                                                  부엉이

 1976, 비단에 수묵채색, 120 x 83 cm

 

 

초저녁

 1974, 종이에 수묵담채, 128 x 131

 

                                      백운도(白雲圖)

 1978, 비단에 수묵담채, 82 x 105 cm

 

수묵 청산도

 1976, 비단에 수묵담채, 53 x 61 cm

   

 

 

                                                      보리타작

 1956, 종이에 수묵채색, 84 x 267 cm

 

  

동자(童子) 

 1932 비단에 채색 56 x 32.5 cm

 

 

 흥락도(興樂圖) 

 1957 종이에 수묵채색 221 x 168 cm

 

  

                                                   복덕방 

 1953~1955, 종이에 수묵담채 75 x 96 cm

 

 

 

 

 

군상(群像)

 1959 ,종이에 수묵담채 136 x 69 cm (4폭)

 

 

 

군작(群雀) 

 1959 , 종이에 수묵채색 142 x 319 cm

 

 

호박꽃 

 1959, 종이에 수묵담채 57.5 x 35 cm

 

                                                            금붕어 

 1960년대, 비단에 수묵채색 57.5 x 52 cm

 

 

고양이와 나비 

 1964, 종이에 수묵채색 98.5 x 50.3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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