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의 일차적인 뜻은 ‘문인의 삶과 창작의 기억과 자취들을 간직하는 곳’이다. 한 문인이 태어났거나 오래도록 또는 일정기간 살았던 곳에, 그의 작품 활동 중의 유 · 무형 흔적들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문화시설이다. 그런데 요즘은 작가의 흔적이 전혀 다른 곳에 존재했을지라도 이를 보존하고 간직하기 위한 목적에서 조성된 별도의 종합적인 시설, 예컨대 한국현대문학관 등도 포함하고 있으며, 백담사 만해마을, 원주의 토지문학관도 문학관 범주에 들어간다.
우리나라에서 ‘문학관’이라 부르는 시설을 프랑스에서는 ‘작가의 집’ 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문학관은 전시 · 관람을 기본적인 틀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관람객의 참여를 배제하면서 철저한 보안장치 속에 갇힌 낡은 유물의 감상만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존의 박물관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문학관은 그 소장품의 성격상 애초부터 대중의 참여를 기본 요소로 한다. 그런 점에서 문학관은 단순히 문화와의 ‘접촉’이 아니라 문화에 대한 ‘참여’를 태생 조건으로 하는 문화기관이다.
문학관은 ‘문학의 저수지(貯水池)’다. 문인의 유품들이 그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에 있는 편운(片雲) 조병화문학관의 경우 소장자료 25종, 유품이 1천50여점에 이른다. 다른 문인들의 휘호 · 육필시, 자작 그림, 사진, 육필원고, 국내외 문인 · 독자들의 편지, 체육용품, 담배 파이프 · 가방 · 베레모 등 개인생활용품, 행사 참석 때 패용한 명찰. 신문 기록자료, 성적표, 53권의 저서 등을 보면 시인 · 화가 · 교육자 · 스포츠맨(럭비선수)으로 살다간 조병화(1921~2003) 시인의 생애가 떠올라 숙연해진다. 난실리는 편운이 태어난 마을이다. 이렇게 문학관은 당시의 문학을 잉태하고 살찌운 기억과 흔적을 모아 전시 · 계승하는 것만으로도 후대의 문학에 여러 충분한 자양분을 공급하게 된다.
우리나라 제1호 문학관은 1992년 부산에서 문을 연 추리문학관이다. 일본은 일본근대문학관(1962년), 프랑스는 빅토르위고박물관(1902년)이 최초다. 경기도의 경우 1993년 조병화문학관이 처음 개관된 이래 만해기념관(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양평군 서종면 수능리), 노작 홍사용문학관(화성시 석우동), 잔아 문학박물관(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청류재 수목문학관(안성시 보개면 동신리)이 문을 열었다. 박두진문학관은 안성도서관 내에 있다.
경기도의 인구 · 면적, 특히 멀리는 이규보 · 이율곡 · 정약용으로부터 근대엔 홍사용 · 변영로 · 이봉구 · 박두진 · 조병화 · 박팔양 등 한국문학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을 생각할 때 문학관이 너무 적은 편이다. 경기도가 마음만 먹으면 우리나라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문학관들, 예를 들면 근·현대문학관, 고대문학관, 시·시조문학관, 소설문학관, 수필문학관, 청소년문학관, 어린이문학관, 생태문학관, 남북통일문학관, 노동문학관 등을 세울 수 있는데, 아쉽다. 인구 백만이 넘는 전국 최대도시 수원시도 마찬가지다. 마산문학관 · 목포문학관은 있으나 수원시엔 문학관이 없다. 수원과 연고가 있는 작고 문인과 현존 문인이 상당히 많은데 문학관 건립 계획을 세웠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역사가 같은 뿌리인 화성시 · 오산시와 통합될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수원문학관 건립을 준비해야 된다. 아직 전체가 모이지는 못했지만 수원 · 화성 . 오산에 거주하는 시인들은 이미 수원시인협회를 창립했다.
오늘날 문학관의 총체적인 뜻, 사회성은 ‘문학의 광장’이며 ‘문화의 전당’이다. 사람들의 정서를 함양하여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전국 각처에 있는 문학관은 방문객들로 붐빈다. 문인 · 유족들이 건립한 문학관은 많지만 지자체들이 앞장선 문학관은 드물다. ‘문학이 시대를 바꾼다’는 말은 과장도 환상도 아니다. 문학, 문화를 숭상한 나라는 예로부터 번성했고 부강했다. 문학에 관심 많은 지자체장들이 많을수록 그 고장은 살기 좋은 사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