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면적은 16000㎢이며, 서·북·동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지가 전체 면적의 1/3을 차지한다. 또한 온난 습윤 기후에 속하여 사계절이 분명하다. 봄·가을이 짧은 반면, 겨울과 여름이 비교적 길다. 연평균 기온은 13℃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506㎜이다. 인구는 약 1,090만 명이며, 그 중 시내에 거주하는 인구는 500만 정도이다.
중국의 수도인 북경은 30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고대 전국(戰國) 시대에 잠시 연(燕)나라의 수도였다가, 원나라 때 몽고족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북경을 수도로 정한 이후 거의 1000년 동안 수도로서의 입지를 지키고 있다. 오늘날의 북경은 발달된 현대적 도시이다. 중국의 정치, 문화, 과학, 상업 등의 중심 도시이자 과거의 모습을 잘 지키고 있어 관광 도시로서도 유명하다.
■ 한국 교회와 인연 깊은 북당(北堂)과 남당(南堂) 성당
북경에 있던 4개 성당 중 2개로서 북당 성당은 파리외방전교회 회원인 퐁트니라 청 성조의 학질을 고친 공로로 서안문 밖의 땅을 하사받아 1701년 건축을 시작, 1703년에 완공하였다. 1601년 마테오릿치의 북경 선교 이후 이곳에는 4개의 성당이 건립되었는데 각 성당들은 건립된 위치에 따라 동당, 서당, 남당, 북당등로 불렸다. 그 중 가장 먼저 건립된 것은 남당으로 1601년 마테오릿치가 명의 신종에게 선무문 안의 땅을 하사받아 건립한 후 1644년 아담 샬이 이를 개축하였다.
남당 다음으로는 1628년 아담 샬이 거쳐하던 동안문밖에 동당이 건립되었고 1703년에는 북당이 건립되었으며, 이어 1723년에는 라자리스트회원 페들리니에 의해 서직문 대로에 서당이 건립되었다. 이들 4개의 성당은 북경의 명소로서 많은 외국인들이 찾는데 특히 남 동당은 조선 사신들의 숙소인 옥하관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 사신들이 서양 선교사들과 접츅을 가져 서구 문명을 배우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조선에는 서학이 전래되었다.
1644년 아담 샬과 만난 소현세자를 비롯하여 1631년 정두원, 1720년 이명, 서학 등을 젙래한 인물들이다. 남당과 동당이 조선 사신들과 서양 선교사들이 접촉한 곳이었음에 비해 북당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직접적 계기가 된 곳으로 1784년 이승훈이 이곳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란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고 귀국 교회 창설을 주도함으로써 북당은 한국 천주교회와 매우 밀접한 곳이 되었고, 이후 조선교회의 밀사들은 북당을 통해 조선교회의 상황을 보고 하였다. 북당을 제외한 3개의 성당은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파괴되었다가 남당과 동당은 새로 건립되었다. 현재는 북당만 남아있다.
◆ 북당 (北堂 )
북당은 명말 청초(明末淸初) 북경에 건립된 4개의 성당 가운데 본래의 형태가 남아 있는 유일한 천주당이다.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 드 퐁타네(Jean de Fontaney, 洪若翰, 1643-1710) 신부가 키니네를 사용하여 강희제(康熙帝)의 학질을 고쳐 준 공로로 하사받은 서안문(西安門) 밖의 부지에서 1701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703년 12월에 봉헌하였다. 이에 앞서 프랑스에서는 1684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중국 전교권을 인정받은 뒤 예수회 선교사 중에서 드 퐁타네를 비롯하여 모두 5명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보호권을 주장하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방해로 마카오를 경유하지 못하고 1687년말에 영파(寧波)에 도착한 후 이듬해 천진(天津)을 경유하여 2월 8일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중에서 부베(Bouvet, 白晉) 신부와 제르비용(Gerbillon, 張誠)신부는 북경에 남아 궁정에서 봉사하였으며, 드 퐁타네 신부와 르 콩트(Le Compte, 李明) 신부, 비들루(Visdelou, 劉應) 신부는 지방 전교에 착수하였다. 그러다가 강희제가 하사한 부지 위에 북당(北堂)을 건립하여 전교의 본거지로 삼게 되었다.
[변모 과정]
당시 북경에는 1650년 선무문(宣武門)안(자금성 밖의 남서쪽)에 건립한 남당(南堂)과 1655년 동안문(東安門) 밖에 건립한 동당(東堂)이 있었다. 한편 서당(西堂)은 라자로회(Lazaristae)의 페드리니(Pedrini, 德理格) 신부가 옹정제(雍正帝) 때인 1725년에 서직문(西直門) 대로에 있던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건립한 것이다. 남당은 1652년에 샬 폰 벨(J. A. Schall von Bell, 湯若望) 신부에 의해 확장되면서 순치제(順治帝)로부터 '흠숭천도'(欽崇天道)라는 편액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1690년에 북경이 포르투갈의 보호 교구로 설정되면서 전교 단체들 사이에는 알력이 생겨나게 되었고, 1640년대부터 계속되어 온 의례 논쟁(儀禮論爭)의결과로 옹정제 때부터 박해가 시작되면서 각 성당의 전교 단체마다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1773년 7월에 예수회가 해산되면서 북경의 선교 단체들은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때까지 남당과 동당은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 북당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 서당은 포교성성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이 관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783년에 프랑스 국왕과 포교성성에 의해 중국 선교사로 임명된 라자로회의 로(N.J.Raux, 羅廣祥) 신부 등이 1785년 4월 29일 북경에 도착하여 5월 8일부터 북당에 거처하게 되었다. 당시 북당에는 프랑스 예수회 회원인 그랑몽(J. J. de Grammont, 梁棟材) 신부 등 6명의 선교사가 남아 있었다. 그 후 가경제(嘉慶帝) 초기에는 남당과 동당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흠천감의 실권과 직예(直隸) ꋯ 산동성의 포교권을 장악하려고 하면서 서당의 이탈리아 선교사들이나 북당의 프랑스 선교사들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1811년 이후의 박해는 북경의 성당들을 다시 한번 변화시켰다. 먼저 서당 선교사들이 마카오로 추방되고 성당은 몰수되었으며, 동당은 가경제의 압류와 파괴로 인해 선교사들 모두가 남당으로 이전해야만 하였다. 남당은 1838년 이후 한때 러시아 정교회의 수중에 들어 간적도 있었다. 또 북당은 1819년에 프랑스 라자로회의 라미오(Larmiot, 南彌德) 신부가 마카오로 추방되면서 대신 포르투갈 라자로회의 세라(Serra, 高守謙) 신부가 관리하였으나, 1826년에는 세라 신부마저 마카오로 떠나면서 폐쇄되고 말았다.
이후 중국에서의 박해가 1844년의 황포조약(黃埔條約)으로 종결되면서 라자로회에서는 북당을 재건하였으나, 나머지 성당들은 폐허로 남아 있었으며, 그마저 1900년의 의화단(義和團) 사건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남당과 동당은 그 후 새로운 모습으로 재건되었다가 다시 파괴되었으며,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북당은 중국 공산화 이후인 1951년에 폐쇄되어 오랫동안 학교와 참고로 이용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와의 관계]
북경 시내에 있는 4개의 성당은 북경을 방문하는 외국 사신들에게 훌륭한 관광 명소였는데, 그중에서도 조선 사신들의 숙소인 옥하관(玉河館, 즉 南小館) 가까이에 있는 남당과 동당은 조선 사신들이 서양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 서학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장소가 되었다. 1644년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예수회의 샬 폰 벨 신부를, 1720년에 이이명(李頤明)이 쾨글러(Ignatius Koegler, 戴進賢) 신부를, 1765년에 홍대용(洪大容)이 할러슈타인(A. Haller-stein, 劉松齡) 신부를 만난 것도 모두 남당에서였다. 반면에 프랑스 선교사들의 전교 근거지였던 북당은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과 직접 관계가 있었다. 우선 1783년말에는 한국 최초의 신자가 된 이승훈(李承薰, 베드로)이 북당을 방문하고 예수회의 그랑몽 신부를 만났으며, 이듬해 초에는 그로부터 세례를 받고 귀국하여 그 해 말에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북당과 한국 천주교회와의 관계는 그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784년 말에는 이승훈이 밀사를 선발하여 그랑몽 신부에게 보냈는데, 이 밀사는1785년 4월(음)에 귀국하다가 체포되어 교회 서적과 편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또 1789년 말에는 한국 교회의 밀사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이 북경으로 가서 북당의 선교 단장인 라자로회의 로 신부를 만나 조건 세례를 받고 이듬해 귀국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1785년 초에 프란치스코회의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가 북경 교구장에 임명되어 남당에 부임하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북당보다 남당과 밀접해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관계가 1831년 조선교구 창설 때까지 지속되었다.
한국교회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서십고 북당이 2008 북경올림픽을 앞두고 변신을 꿈꾸고 있다. 북경시 인민정부가 올림픽을 맞아 전세계에서 몰려들 가톨릭신자들을 위해 1949년 중국내륙 공산화 당시 압수했던 주교관과 수도원, 병원, 고아원 부지 10만여평을 지난 2004년 8월 북경대교구 외사처에 돌려주었다. 교구 외사처는 이에 따라 시당국으로부터 돌려받은 부지에 성역화를 위한 대대적 청사진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2004년 8월 1860년 이전 신축 이후 보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낡을 대로 낡은 성당 전면부 도색과 보수작업을 하였다. 이같은 구상이 올림픽 이전에 완료되면, 현재 북경 남당에서 주로 봉헌되는 외국인 미사를 북당에서도 지낼 수 있게 되고, 올림픽 때엔 세계 각국에서 북경을 찾을 가톨릭신자들이 미사를 봉헌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 북경 선무문 천주당 - 남당(南堂)
[남당의 성당 건축과 풍격]
前門을 지나 前門大街를 서쪽으로 걷다보면 오른쪽으로 멀리 서양식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조금은 주위와 부자연스러운 듯 지나는 사람을 낯설게 한다. 이 건물이 바로 宣武門 天主堂으로 북경 宣武門內 北順城의 천주교 성당이다. 宣武門大街 南側에 접해 있으며 북경 사람들은 北京城의 남부에 위치하고 北堂과 상대적 위치이기에 습관적으로 南堂이라 부른다. 남당이라는 칭호는 明末淸初 북당과 동당이 세워진 이후부터 남당이라 불려졌다고 한다.
남당은 중국식 불교사원의 山門형식과 유럽식의 건축양식이 융합되어진 성당이다. 남당의 주요 구성은 동쪽 정원의 주요 건축물인 성당과 서쪽 정원의 성모산과 성모마리아 상으로 되어 있고 성모산 뒤에 대주교와 신부숙소가 있으며 직원사무실은 대문의 동서 양쪽에 있고 부속으로 천주교 "天光"잡지 편집부와 天愛진료소도 교당 내에 있다.
남당의 큰문을 들어서면 성모산과 꽃에 둘러싸인 성모마리아 상을 만나게 된다. 자혜의 성모마리아 상이 교우를 마냥 축복해 해주는 듯하다. 성모상을 뒤로 동으로 난 달문을 지나면 바로 성당과 마주하게 된다. 이 대성당은 건축양식이 쉽사리 이탈리아의 대성당과 비슷한 반원 아치형의 로마네스크(미술사에 있어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의 시기) 양식의 건축물임을 발견하게 된다. (참고로 북당은 프랑스 노틀담 대성당과 같은 고딕양식이다.)
이 대성당은 남북으로 길게 놓여져 있으며 건물 전체를 암회색의 전돌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단지 성당 대문만을 붉은 색으로 처리하고 창문마저 회색으로 칠해 조금은 중후하게 느껴진다. 거기에 정면의 삼각형 벽면을 율동적인 선으로 처리하고 몇 가지의 행운을 상징하는 상감 문양들을 부조로 섬세하고 아름답게 장식하여 고아한 느낌을 더하였다. 성당의 앞뜰에는 푸른 잔디와 커다란 고목의 그늘이 드리워져 십자형의 작은 길을 둘이서 걷기에 적당한 은혜의 공간으로 만들어 준다.
성당의 좌우에 비석이 남아 있으나 많이 훼손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사료에 의하면 동쪽 비는 淸 順治14年(1657년)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청 세조, 順治 황제가 친히 남당을 위해 내린 <御制天主堂碑記> 이다. 주요내용은 순치 황제의 역법의 중시와 아담 샤알의 공적을 치하하고 그 종교신앙을 찬양하였으며 관직(卿秩,曆三品)과 칭호(通玄敎師,通美敎師)를 주어 고무하였다. 서쪽 비의 비문은 마테오 리치와 아담 샤알의 사적과 성당 건립의 역사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성당의 남쪽에는 서양식 건축의 門樓가 있으며 위에 십자가를 두고 있다. 이 문은 평소에는 열지 않으며 중대한 종교의식이나 미사가 있을 때 비로소 연다. 이 대문 한쪽에 성경 등의 서적과 성물을 파는 판매소가 있으며, 문루를 통해 이어진 긴 소로는 성당으로 바로 이어진다.
먼저 성당을 들어서면 찾는 이에게 주는 첫 인상은 북당에 비해 화려하지는 않으나 매우 고졸하고 소박함을 더해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성당의 건축공간은 매우 넓으며 장방형의 십자가형이다. 주행랑과 횡단행랑이 교차하는 부분은 교차궁정이 사용되어지고 천정에는 커다란 원형의 돔을 얹었으며, 석조천정의 무거운 중량을 지탱하기 위해 벽체를 두껍게 하고 거기에 걸리는 경사진 하중을 횡단 아치와 떠받치는 벽, 기둥 등에 의해 내외로부터 보강하는 수단이 취해졌다. 로마네스크 건축에 창과 열린 문이 적은 것은 그 때문이다. 내부를 남북으로 길게 이어주는 아치형 주랑이 성당을 자연스럽게 독립적인 공간으로 나누어주면서도 나란히 연이어져 통일성을 이루기도 한다. 측랑과 현관사이에는 이층 계단을 통해 작은 樂樓로 이어지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건축구상은 많은 예배자들이 성당 내를 쉽게 순회할 수 있도록 배려된 것이다.
초기 건축과 달라진 것은 단지 성당내부의 14개 나무기둥이 이미 벽돌형식으로 바뀐 것일 뿐 사면에 水磨石으로 상감을 하고 위에는 아직 목각 부조의 花紋이 남아 있다. 성당의 북면 중앙에는 도금한 화문장식의 讀經臺가 놓여져 있으며 그 뒤로 커다란 "원죄에 물들지 않은 성모상"의 유화가 자리하고 좌우로 對聯 " 瑪利亞無原罪之始胎", "我等奔爾台前爲我等祈", -그 의미상 성마리아 이외 우리인류는 모두 원죄를 가지고 있으므로 단지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加護로서 미래에 영혼이 비로소 천당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성모화상 옆에는 두 폭의 천사상이, 그리고 앞 성대 위에는 봉헌을 위한 촛대 등의 제기가 놓여져 있으며, 그 서쪽 성대에는 예수의 성심을 표현한 예수의 화상이 있고, 그 양편에 "耶 聖心", "矜怜我等"의 문구와, 동쪽 성대에는 요셉이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큰 폭의 유화가 있고, 그 양쪽에 "大聖若瑟", "爲我等祈"의 여덟 글자가 눈에 띈다. 주성대의 위쪽에는 고딕양식의 한 특징인 오색찬연한 유리상감의 스테인드그라스 창이 있고 이 창을 통해 들어온 광선이 어두운 성당 내부를 엄숙하며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자아내게 한다. 성당 중앙에는 나무의자가 배열되어 있는데 이 은혜 충만한 공간에서 사오천명이 동시에 미사를 올릴 수 있다.
[남당의 탄생과 역정]
南堂은 明代에 최초로 세워졌는데, 명 萬曆 29년(1601년) 新宗의 허락에 의해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1552-1610)가 북경에서 선교활동을 할 때에 이 남당이 바로 그의 거주지였다. 1605년(만력33년) 마테오 리치는 북경에 거주하면서 宣武門 內에 땅을 사서 집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종교 활동을 위해 집 부근의 首善書院을 사서 성당으로 개축하였다. 선교를 시작한 이후 신자 수가 많지 않았기에 처음의 성당의 규모 또한 매우 작았다. 당시 그는 성당 내에 서양에서 가져온 성모마리아와 예수그림을 안치하였으며 십자가를 성대 중앙에 놓았다. 당시 이 성당의 특이한 외관과 서양식 내부 장식은 중국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자아내어 잦은 외부인의 방문이 있었다. 그는 방문객을 거절하지 않고 환대하였으며 자주 담소를 나누었기에 많은 친구가 생겨 천주교의 전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마테오 리치는 1582년에 중국에 온 이후 중국문화의 이해와 선교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으며 중문이름(利瑪竇)도 얻었다. 심지어 중국인의 성당 방문을 쉽게 하기 위하여 성당을 사찰로 칭하기도 하였으며 교칙마저 중국실정에 맞게 변통하였다. 또한 많은 사대부와 상층인사와의 교류를 통해 서양의 문물과 과학지식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하여 신자모임인 天主母會도 창립하였으며 신자 수도 점점 증가하여 1610년(만력38년)에 다시 아름다운 성당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宣武門 남당이다.
마테오 리치가 1610년 5월 11일 북경에서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1616년 南京敎案이 발생하였는데 이로인해 명 정부는 중국인 신자를 엄격히 금지하였고 북경에 거주하는 예수회 사람들을 마카오로 돌려보냈으며 남당을 관부로 귀속시켜 폐쇄하였다. 그러나 1629년(명 崇禎2년) 曆法을 새로 고치면서 천문역법에 정통한 게르만계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샤알 등을 참여케 하였는데 이로 인해 남당은 다시금 선교사의 거주지가 되었으며 종교활동도 가능케 되었다.
명 왕조가 청 왕조로 바뀌는 과정에서도 그들의 지위는 변동 없이 남당을 지켰으며 새로운 왕조의 역법 개정사업에도 참여하였고 천문 역법기구도 세워 선교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북경의 신자 수는 만오천명에 달했다. 1650년(淸 順治7년)황제로부터 선무문 내 성당부근 땅 일부와 건립기금을 하사받아 새로이 성당을 중건하였다. 아담 샤알은 직접 성당의 초도를 그리고 구체적 시공계획을 세웠으며 성당은 1652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당시 이 성당은 천정에 돔을 두었으며 내부에 3칸의 거실과 5개의 성단을 두었다. 길이는 8丈 너비는 4丈4尺이며 정식 성당 이외에 동서로 천문대, 장서루, 儀器室, 사택을 두었다. 성당 준공 이후 아담 샤알은 비를 세워 이 일을 기록하였는데, 萬曆 때 서양선교사 마테오 리치 등이 중국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며 경전을 번역하고 서적을 집필하였고 특히 荷蒙은 청 왕조 때 서양의 과학을 이용하여 새로운 역법을 완성하였으며, 성내 선무문에 성당을 세웠는데 그 때가 天主降生 1650년, 大淸 順治7년, 庚寅년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남당 낙성이후 순치 황제가 친필로 쓴 '欽崇天道' 편액을 하사하였으며 1657년에 다시 어필 '通微佳境'이라는 문액과 천주당 비명을 내리며 아담 샤알을 높이 평가하였다.
남당 건립이후 順治황제는 1656-1657년간에 24차례나 남당을 방문하였는데 아담 샤알과 교분을 두텁게 하였다. 順治는 친히 아담 샤알을 '瑪法'(만주어로 尊師의 칭호)으로 칭하기도 했다. 황제의 은덕으로 남당은 북경의 주목받는 성지가 되었으나 1664년(康熙3년) 順治 서거 이후 아담 샤알은 투옥되는 변을 당했으며 남당 또한 훼손되었다. 아담 샤알은 출옥이후 1666년 동당에서 세상을 떠났으나 康熙황제 집정이후 점용 당했던 성당, 묘지부지가 천주교에 반환되었으며 順治황제가 준 아담 샤알의 관직과 칭호도 회복되었다. 1670년 康熙의 은혜로 남당과 동당이 새로 수리되었으며 종교활동도 다시금 허락되었다.
아담샤알 이후 벨기에 예수회의 베르비에스트가 강희의 은총을 받아 남당에 거하게되었다. 1675년에는 '萬有眞原'과 '敬天'의 편액을 받아 성당중앙에 걸었다. 1690년 북경을 주교구로 두었으며 康和之를 주교로 임명하고 남당을 주교구당으로 하였다. 그후 두 번의 지진으로 붕괴되었으나 1703년에 황제의 명으로 은 10만냥의 국고를 성당건립에 사용하였다. 남당 중건이후 강희는 대련과 편액을 내렸는데 '密合天行, 盡善盡美', '聲淸氣和'와 '云從高處望, 琴向靜中彈'이다.
그 후 로마교황이 중국천주교 신자의 제사와 공자의 숭상 등을 금지한다는 이유로 강희는 종교활동을 금하였는데 嘉慶년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청 정부가 금교령을 내렸으나 결코 천주교의 의미는 소멸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남당에는 선교사가 거주하였다. 1775년 3월 선교사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하여 순치와 강희가 내린 편액과 대련이 모두 소실하였는데 강희는 다시 국고를 내어 천주당을 중건하고 편액과 대련을 완전히 회복케 하였다. 道光년간에는 남당을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관리하였는데 당시 남당에 거주하는 일부 선교사들이 몰래 아편을 판매하였기에 남당을 조사하고 사택을 헐고 일부는 팔아버려 단지 빈 성당만 남게되었다.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中法 黃 條約(1844년)이후 천주교 금령이 해제, 1860년 (咸豊10년) 中法 北京條約이후 성당이 반환되어지며 선교를 위한 성당건립이 허락되어지고 먼저 남당이 반환되어진다. 영국과 프랑스의 중국침략이후 파괴된 성당이 그들에 의해 다시금 보수되어 사망자 위령을 위한 미사가 거행되기도 한다. 1900년(光緖26년) 의화단 사건으로 말미암아 남당은 다시 한차례의 비운을 맞게되나 곧 辛丑條約으로 인해 다시 중건되었는데, 당시 개축되어진 건축물이 현재의 남당으로 남아 있다.
■ 북경 시내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