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5:18-26
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성경에서 역사서로 분류되는 역대기는 이스라엘 역사 중 남 왕국 중심으로 서술하는 책입니다. 이 책의 기자는 선지자 에스라로 여겨지지만 이를 근거할 자료는 명확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역대기의 기록 시점에 대한 의견도 다양합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역대기가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다 이스라엘로 귀환한 이들을 위해 기록됐다는 사실입니다.
짧게 봐도 70년 이상을 바벨론에서 살다 귀향한 이들이 마주한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성벽도 왕궁도 성전도 다 사라진 채 없고, 황량해져 버린 옛터만 이들을 반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대기 기자는 펜을 들었습니다. 자칫 낙심을 넘어 좌절과 포기로 치달을 귀향민들 마음에 소망을 불어넣으려고 말입니다.
이 일을 위해 역대기 기자가 쓴 첫 단어는 ‘아담’입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시작해 긴 지면을 할애해 ‘족보’를 기록합니다. 왜냐하면 이 족보가,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이름 하나하나를 훑어가며 읽을 독자들 마음에 점점 새날 새 생명 새 영광에 대한 불씨를 지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오랜 역사를 주도하신 하나님이, 황량한 빈들 같고 무덤 더미와 같은 이 땅에 다시 새 역사를 써 내려가실 것이란 확신을 심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흐름 속 오늘 본문이 속한 역대상 5장에는 요단강 동편 지파들 계보가 담겨 있습니다. 사실 이 지역의 두 지파 반은 북 왕국 영향권에 속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도 엄연한 한 뿌리, 아브라함의 자손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역대기 기자는 이들 계보도 잊지 않고 역대기 한 면에 담습니다. 이들도 열두 지파가 다 모인 온전한 왕국 회복의 꿈속 없어선 안 될 조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지난 두 번의 새벽에 우리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계보를 훑었습니다. 이제 오늘 역대상 5장을 마무리할 우리 손에 들릴 건 나머지 반 지파. 요단 동쪽 땅 북쪽에 거주한 므낫세 반 지파의 계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역대기 기자는 이 흐름을 깹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사무엘서와 열왕기를 통해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온 독자들이 접한 적 없던 한 사건을 소개합니다. 그 일은 이렇습니다.
요단 동편 지파의 전쟁(18-22절)
(18) 르우벤 자손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에서 나가 싸울 만한 용사 곧 능히 방패와 칼을 들며 활을 당겨 싸움에 익숙한 자는 사만 사천칠백육십 명이라
므낫세 반 지파 계보가 나올 시점에 역대기 기자는 갑자기 요단 동편 두 지파 반 연합군 규모를 기술합니다. 그 숫자는 4만 4,760명이며, 이들은 능히 칼과 방패만 드는 게 아니라 활도 다룰 수 있는 강한 용사들이었습니다. 다만, 성경 역사를 잘 안다면 이 규모가 민수기에 기록된, 오래전 출애굽 직후 인구 조사 때보다 줄었고(13만 6,930명, 민26:7, 18, 34) 이후 다윗의 인구 조사 때보다(12만여 명)도 적다는 걸 압니다. 그렇다면 이 군대가 소집되어 계수된 시기는 분열 왕국 시기 중 한 때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럼에도 적지 않은 이 용사들이 모인 목적에 전쟁 말고 다른 건 없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거주할 땅을 완벽하게 정복하려고 말입니다. 이때 이들이 마주한 대상과 전쟁의 결과가 이렇습니다.
(19-20) 그들이 하갈 사람과 여두르와 나비스와 노답과 싸우는 중에 도우심을 입었으므로 하갈 사람과 그들과 함께 있는 자들이 다 그들의 손에 패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싸울 때에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응답하셨음이라
요단 동편 지파들이 싸운 대상은 하갈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하갈은 아브라함의 첩으로서 이스마엘을 낳은 여자입니다. 그래서 이 하갈 사람들은 이스마엘의 후예로 여겨지지만 이를 근거할 자료는 충분치 않습니다. 다만 명확한 건, 이들이 모압, 에돔 등과 함께 요단 동편 지파들의 오랜 원수였다는 사실입니다(시 83:5-6)
두 지파 반 연합군은 하갈 사람들을 위시한 적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이때 성경은 이 전쟁에 어떤 군사전략이나 병기들이 활용되었다고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들의 승리 비책으로 딱 하나를 꼽습니다. 바로 ‘부르짖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이겼습니다.
곧바로 살피겠지만, 이 전쟁의 규모는 상당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연합군을 도우셨습니다. 전쟁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건 공공연한 진리입니다(삼상 17:47). 그러니 이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은 요단 동편 두 지파 반의 승리는 당연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이들을 그냥 도우신 건 아닙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의뢰하고 부르짖었기에, 그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즉, 요단 강 동편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손에 든 칼과 창으로 적들을 찌르기 전 더 열심을 내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 자기 마음의 소원, 눈앞에 마주한 원수들로부터의 승리만 아니라 허락받은 땅의 정복과 그곳에서의 정착 나아가 평온 삶이라는 바람을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이들이 손에 든 진정한 무기였고, 이들이 선택한 가장 강한 연합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들은 승리를 얻었습니다.
오늘 이 새벽이 지나고 해가 뜨면, 기다리고 있는 문제를 마주할 교우님들 계십니까. 상황을 뚫고 나아가야 하는데 문제에 가로막혀 그 너머가 보이지 않아 숨이 턱 막히십니까. 기쁨의 함성보다 탄식의 한숨이 더 크게 나오는 일들이 이어지고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께 부르짖으십니다. 높으신 하나님께 과연 이런 걸 아뢰도 되나 고민하지 마십시다. 하나님 앞에서 내 체면을 생각하는 어리석음보다, 마음의 소원을 상세히 다 말하는, 마땅히 자녀로서 보일 수 있는 어리광을 부리십시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들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 예수님이 이 사실을 이렇게 확증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이어지는 말씀은 승리로 마무리된 이 전쟁의 결과입니다.
(21-22) 그들이 대적의 짐승 곧 낙타 오만 마리와 양 이십오만 마리와 나귀 이천 마리를 빼앗으며 사람 십만 명을 사로잡았고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으니 이 싸움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이라 그들이 그들의 땅에 거주하여 사로잡힐 때까지 이르렀더라
승전국은 전리품을 얻습니다. 각종 군수품과 양식 그리고 노예로 부릴 포로들이 그것입니다. 이때 연합군이 얻은 노획물 규모가 상당합니다. 낙타 오만, 양 이십오만, 나귀 이천. 그리고 포로 십만입니다. 또한 생포하지 않고 죽인 자가 이보다 더 많았다고 하니 적어도 적군이 연합군 수보다 많았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22절은 이 큰 승리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한 번 더 강조합니다.
이처럼 실로 전쟁은 하나님께 있고, 승리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오늘 우리 앞의 전쟁 같은 상황과 문제, 해결할 과업들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찾고 아뢸 수 있게 하나님을 향해 창문을 열라는 영적 과제이자 도약 발판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창문을 열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연합하십시다. 그렇게 문제해결과 승리의 보증 수표를 거머쥐는 교우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제 역대기 기자는 다시 본래 문맥으로 돌아와 요단 동편 남은 지파의 계보를 선보입니다.
요단 동편 지파 중 므낫세 반 지파(23-24절)
(23-24) 므낫세 반 지파 자손들이 그 땅에 거주하면서 그들이 번성하여 바산에서부터 바알헤르몬과 스닐과 헤르몬 산까지 다다랐으며 그들의 족장은 에벨과 이시와 엘리엘과 아스리엘과 예레미야와 호다위야와 야디엘이며 다 용감하고 유명한 족장이었더라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동편에서 거주한 곳은 갓 지파 북쪽 경계인 비옥한 땅 바산에서 시작해 계속 북으로 향해 바알헤르몬과 스닐을 지나 헤르몬산까지 이릅니다. 여기서 바알헤르몬은 신약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반석과 같은 신앙고백을 한 장소인 빌립보 가이사랴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또 우리말 성경엔 나오진 않지만, 70인역 성경은 므낫세 반 지파 북쪽 경계에 레바논까지 포함된다고 전합니다. 이처럼 므낫세 반 지파는 실로 넓은 땅을 차지했습니다. 혹자는 이 일이, 오래전 야곱이 요셉에게 한 ‘무성한 가지가 담을 넘었다(창 49:22)’는 예언의 성취로 보기도 합니다. 므낫세가 요셉의 장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4절에는 므낫세 반 지파 족장 일곱의 이름이 나옵니다. 물론 이 지파 계보에 속한 이가 여기에 그치지는 않겠지만, 이미 앞서 살핀 역대기 족보들에 상당한 축약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면 이는 그리 어색한 계보가 아닙니다. 또 역대기 기자는 이 일곱 족장이 다 용감하고 유명했다며 준비해 두었던 찬사를 아끼지 않습니다.
비록 성경 다른 곳에서 이들 배경 이야기를 찾을 수 없는 건 아쉽지만, 여기까지 역대기를 읽어온 독자들 마음엔 어느새 작은 꿈이 무르익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미 요단 서편에 본토 땅을 주시고 영광의 날을 허락하셨던 하나님께서, 동편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시며 선조들에게 풍성한 유업을 주신 사실을 마주했으니 말입니다.
이제 조상들처럼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기만 한다면, 옛 영광의 재현까진 아니어도 죽음의 흔적 가득한 이 땅을 새 삶의 터전으로 재건하는 것도 그리 먼일은 아니리란 생각이 피어오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기대감을 한껏 고양하는 이 장 마지막 내용은 다소 예상 밖입니다.
요단 동편 지파의 추방(25-26절)
(25)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
비옥하고 넓은 땅을 차지한 요단 동편 지파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들이 하나님께 범죄합니다. 그 내용은 다른 게 아닙니다. 자신들이 정복한 나라의 신들을 섬긴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간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다른 말로도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상숭배 말입니다.
도대체 왜 이들이 승리를 안겨주신 분, 신들 위의 신인 하나님께 등 돌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제 좀 배부르고 살만하니 하나님 없어도 잘 살 수 있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문제 앞에선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이들이 문제가 없자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들의 범죄 결과는 이렇습니다.
(26)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 가에 옮긴지라 그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으니라
하나님은 간음한 이들을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앗수르 왕의 마음을 일으키셔서 이들을 치셨습니다. 여기서 앗수르 왕 불과 디글랏빌레셀은 같은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은 앗수르 왕 불, 곧 디글랏빌레셀을 통해 요단 동편 지파를 징계하셨습니다. 그렇게 이들은 모든 영토를 빼앗긴 것만 아니라 포로로 끌려가고 맙니다.
더욱이 성경은 이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오늘’은 역대기가 기록된 시점입니다. 남 왕국 유다 사람들은 고향에 돌아왔지만, 끝내 이 두 지파 반은 귀향하지 못했습니다. 이방 땅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생사도 확인할 수 없게 돼버린 것입니다. 실로 비참한 말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역대상 5장이 끝납니다. 이때 이 마지막 절을 읽는 독자들은 호흡을 고르고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껏 고취되고 뜨거워진 마음을 일 순 식힐 뿐 아니라 등골 서늘해질 정도로 날 선 하나님 심판이 두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을 두고 오래전 선지자 이사야도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이사야 64: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등 돌리고 하나님 이름을 부르지 않을 때, 하나님도 그에게서 얼굴을 돌리십니다. 아니 아예 숨기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멸망하게 두십니다. 부르짖을 땐 응답하시지만, 그렇지 않을 땐 이토록 가차 없으십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우리에게도 섬뜩한 건 죄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우리 본성이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 등 돌렸던 두 지파 반처럼 말입니다.
더욱이 찜찜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역대기를 처음 읽은 독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소망과 경고를 동시에 받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론 잠시 마음을 재정비하며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고 대각성 집회까지 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이들은 다시 포로가 되고 맙니다. 이토록 생생하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되짚어 본 이들이, 다시 하나님께 등 돌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역대기가 빛바랜 책으로 남지 않고 오늘 우리 손에까지 들린 건 이 책이 끝내는 소망의 책으로 자리했기 때문입니다. 역대기 속 긴 족보가 역대기에서 끝나지 않고 신약 첫 페이지까지 계속 이어진 것이 그 증거입니다. 또한 우리는 역대기가 소망의 책일 수밖에 없는 단서를 오늘 본문에서 이미 만났습니다.
(20b) 이는 그들이 싸울 때에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응답하셨음이라
하나님은 자신을 향해 부르짖는 백성에게 응답하십니다. 다만, 사람들은 응답받고 나면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더는 찾지 않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토록 못난 우릴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바로 우릴 위해 온 우주에서 가장 격렬하고 치열한 싸움을 앞두고 하나님께 부르짖은 한 이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심으로 말입니다.
(마가복음 15: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역대기의 족보가 향하는 신약 속 한 사람 예수님이 하나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그를 버리심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그를 버려야만, 하나님을 찾지 않고 등 돌린 이들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세대만 아니라 다가올 모든 세대, 오늘 우리까지 말입니다.
오늘 본문 속 요단 동편 지파들 자취가 담긴 역대기는 우리에게 여기까지 보여줍니다. 아들을 버리면서 우릴 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 동참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희생을 말입니다. 그러니 이 오래전 기록을 곱씹는 우리는 그때 그 귀향민들처럼, 아니 그들이 받은 것 보다 더 큰 소망과 확신을 얻습니다. 때론 폐허와 무덤더미 같은 우리의 자리, 가정, 직장, 사회, 이 나라가 끝내는 하나님 나라로 일궈질 것이란 소망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기 사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때 하나님께 버림받음이란 응답을 받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우리 모든 걸음에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혹 우리가 하나님께 낙심한 채 등을 돌리고 엠마오로 향하더라도 말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 진정한 왕이신 우리 주님 예수님과 함께 왕의 연대기에 기록될 한 날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오늘 말씀 속 요단 동편 지파들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듣고 응답하심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아가 하나님께 등 돌리는 이들이 처할 결국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우리도 그때 그 지파들처럼 하나님께 자주 등을 돌립니다. 다만, 이런 우리가 오늘도 사는 건 우릴 위해 하나님이 온 우주 가장 의로운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우릴 사랑하셔서 아들을 버린 하나님의 사랑과 이 모든 일을 감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돌이키게 하옵소서. 우리가 엠마오로 향하더라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진정한 왕,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요단 동편 지파들이 하갈 사람들을 위시한 적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2. 역대기 기자가 르우벤과 갓 지파 계보를 소개한 뒤 므낫세 반 지파 계보가 아닌 이들 연합군의 전쟁사를 기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3. 바벨론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온 귀향민들이 오늘 본문을 읽고 깨달은 건 무엇인가요?
4. 요단 동편 지파들처럼 하나님께 등 돌리는 우리가 오늘까지 포로가 아닌 자유민으로 사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작성: 이종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