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로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땅 논산. 육군훈련소와 딸기밭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약간만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가 몰랐던 깊고 웅숭한 곳들이 가득하다. 유교의 본향답게 곳곳에 자리한 서원과 고택. 돌아다니다 보면 절로 옷깃이 여며지고 정신이 또렷해진다.
돈암서원 숭례사 들어가는 입구의 꽃담. 김장생의 사상을 전각에 새기듯 또렷하게 각인했다.
조형적으로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글자 한자 한자에 담긴 뜻도 깊고 의미 있다.
여행이란 마음에 무늬를 새기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루든 열흘이든 1년이든 여행을 다녀오면 마음에는 여행에서 얻은 무늬가 또렷하게 남는다. 마음 한구석에 새겨진 그 무늬는 미술관의 어느 그림 앞에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고, 석양의 어느 사원 앞에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낯선 이들과 나눈 대화에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고 홀로 걷던 새벽의 어느 숲길에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충남 논산은 마음에 깊고 단정한 무늬를 새길 수 있는 여행지다. 돈암서원의 예쁘고 영롱한 무늬 앞에 서 있노라면 그것과 똑같은 무늬가 마음에 돋을새김된다.
예의 가치는 선을 행하는 것
논산을 찾았을 때는 늦여름이었다. 가을이 머지않아 소매로 파고드는 선선한 바람이 그럭저럭 시원하다고 느껴질 때였다. 배롱나무는 붉은 꽃을 잔뜩 피우고 있었다. 늦여름 풍경을 아름답게 채색하는 것은 배롱나무다. 꽃이 피면 100일을 간다고 해 목백일홍이라고도 한다. 고택이나 서원, 누각 앞에는 어김없이 배롱나무가 진분홍꽃을 피우고 있다. 논산에 들어서자마자 연산면으로 내처 달렸다. 돈암서원(遯岩書院, 사적 제383호) 담장이 얼른 보고 싶었고, 그 담장 너머 등불을 켠 듯 환하게 피었을 배롱나무가 궁금했다. 논산은 충청도 유교의 본산이다. 예학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과 우암 송시열, 명재 윤증 등 조선의 정치와 정신문화를 이끈 선현들이 논산에서 태어났다. 이런 까닭에 논산에는 서원과 향교가 많다. 노강서원은 조선 헌종 13년(1672)에 건립된 사원으로 윤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고, 충곡서원에는 백제의 마지막 충신인 계백 장군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서원의 대부분이 문인을 주향으로 모시는 데 반해 계백이라는 무인을 주향으로 모시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향교로는 연산향교, 은진향교, 노성향교 등이 있다. 돈암서원은 논산에서 가장 큰 서원이다.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손되지 않고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문원공 사계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조선 최고의 예학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돈암서원 정경.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을 모신 사원답게 그 모습이 기품 있고 단정하며 엄격하다.
김장생은 구봉 송익필과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워 17세기 조선 예학(禮學)을 정비한 예학의 대가다. 예학이 대두된 배경에는 임진왜란, 인조반정, 정묘호란 등으로 혼란한 사회 분위기가 있었다. 거듭된 전란으로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신분제는 위태로워졌으며, 각종 범죄도 늘어갔다. 김장생은 무너지는 사회 질서를 확립할 대안으로 예(禮)를 제시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법전의 정비와 예학의 정립은 일상의 삶의 원칙과 기준을 정한다는 점에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장생이 주장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예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의 형식은 시간과 장소 그리고 대상에 따라 변한다.’ 그는 예의 가치는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데 있으며, 인간의 우열을 가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역할을 다해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예의 원리와 실천이 현대에도 여전히 큰 울림을 준다는 사실이, 그 예지가 놀랍다.
낙관을 찍어놓은 듯 멋스러운 꽃담
돈암서원 응도당. 지붕 아래에 눈썹처마가 있는 특이한 구조다. 세찬 바람과 따가운 햇살을 막아 공부에 정진할 수 있도록 했다.
돈암서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응도당이 눈에 들어온다. 서원 건물로는 규모가 제법 큰 편이다. 응도당을 자세히 보면 천장과 지붕의 모습이 조금 특이하다. 지붕 아래에 작은 지붕을 덧댔는데 이를 눈썹처마라고 한다. 응도당에는 양쪽으로 눈썹처마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아줄 뿐 아니라 누마루에 비치는 여름 햇살도 가려준다. 응도당을 지나 숭례사로 발걸음을 옮긴다. 사실은 숭례사 꽃담을 보기 위해 나선 걸음이다. 숭례사 들어가는 입구의 좌우 꽃담은 김장생이 설파한 예학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흰 벽에 낙관을 찍은듯 전서체로 새긴 글씨를 보노라면 어쩌면 이렇게 멋스러운 꽃담을 지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 아름다운 모양도 탄성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글씨에 담긴 생각과 사상은 겉모습의 아름다움을 뛰어넘는다.
돈암서원 숭례사 들어가는 길의 꽃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담장 가운데 하나다. /
논산은 충청도 유학의 중심지다. 수많은 사원과 향교가 자리한다.
담에 새긴 열두 자의 글씨는 ‘서일화풍(瑞日和風)’, ‘지부해함(地負海涵)’, ‘박문약례(博文約禮)’. 김장생의 사상이 여기에 오롯이 담겨 있다. ‘서일화풍’은 ‘좋은 날씨 상서러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단비’라는 뜻.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지부해함’은 땅이 온갖 것을 다 실어주고, 바다가 모든 물을 다 받아주듯 모든 것은 포용하라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박문약례’는 지식은 넓게 가지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는 의미다. 지식은 넓을수록 좋지만 그것이 단지 지식으로만 그치고 행위와는 무관하게 되지 않기를 경계한 것이다. 이때의 예는 도덕적 행위 규범을 말한다. 500년 전의 주장이고 이론이지만 지금 들어도 전혀 낯설거나 구태스럽지 않다. 오히려 요즘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것만 같다. 일상생활에서도 사소한 예가 사라지고 큰 소리와 이기심이 판을 치는 세상. 김장생의 가르침은 현대에서도 적용 가능한 지침일 뿐 아니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교과서인 듯하다.
선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돈암서원의 꽃담과 김장생의 가르침을 가슴에 품고 명재고택으로 향한다. 조선 숙종 때 선비 명재 윤증(尹拯, 1629~1714)의 고택이다. 고택이라는 명칭에 선뜻 수십 칸 저택을 상상했다가 실제로 보고는 실망할지도 모른다. 사대부 집이지만 행랑채도, 울타리도 없이 소박한 것이 특징이다. 작은 연못 건너 평범해 보이는 대문과 사랑채, 아담한 마당과 대청마루, 광채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명재고택은 1709년 윤증의 장자인 윤행교가 윤증의 말년에 지은 것으로 현재는 13세손인 윤완식 선생이 고택을 지키고 있다. 명재는 재야의 백의 정승이었다. 대사헌, 이조판서, 우의정 등 수많은 벼슬이 내려왔지만, 단 한 번도 곁눈을 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한때 자신의 스승이자 당시 조정을 장악한 노론의 거두 송시열에 맞서 끊임없이 비판의 상소를 올렸다.
명재고택의 단아한 담벼락. 고졸한 선비의 기품이 그대로 드러난다. /
명재고택 앞마당에 줄지어 도열한 장독들.
고택 앞마당에도 배롱나무 꽃이 한창이고, 고택 앞에는 항아리 수백 개가 도열해 있다. 왼쪽 장독대 뒤쪽으로는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앞쪽 저 멀리로 계룡산이 아스라하다. 명재고택에는 항아리 그대로 전해지는 전독간장이 유명하다. 종가만의 전통 비법으로 만드는 간장 한 숟가락이면 아픈 배가 낫는다고 전해진다. 명재고택의 아궁이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키가 무척 작은데 이는 보릿고개 당시 굴뚝의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배고픈 사람들이 이 연기를 보고 힘들어까 봐 배려한 것이다. 명재고택의 주인들은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들의 선행 덕택에 소실의 위기도 여러 번 넘겼다. 동학란 때는 동학군이 부잣집을 불태울 때 마을 주민이 나서서 고택을 보호했다. 동학군은 마을 주민의 이야기를 듣고 불을 황급히 껐는데, 지금도 대들보에 당시 불에 탄 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도 미 공군이 명재고택을 폭격하려 했지만, 당시 조종사가 명재고택의 도움을 받은 사람이어서 폭격을 막았다고 한다.
은진 미륵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
논산에는 돌아볼 만한 곳이 많다. 꼭 봐야 할 것이 관촉사의 ‘은진 미륵’이다. 정식 이름은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218호). 고려 때 세운 불상인데 거대한 크기와 독특한 생김새로 유명하다. 높이가 18m, 둘레가 9m를 넘는다. 크기로 따지자면 국내 미륵불 가운데 가장 크다. 귀 길이가 2.7m, 눈썹 사이 길이만 1.8m다. 생김새도 우리가 보아온 부처와는 여실히 다르다. 머리가 몸체에 비해 유난히 큰데 팔등신도 육등신도 아니고 삼등신이다. 눈은 길게 옆으로 찢어진 데다 부리부리하며 코는 넓적하고 귀는 축 늘어졌다. 머리에는 사각모 같은 갓을 썼는데 약간 괴이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자꾸 보고 있노라면 어딘지 모르게 친근해진다는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도 괜히 우스꽝스럽고 장난기가 가득해 보인다. 당시 은진 미륵이 얼마나 유명했는지, 논산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은진 미륵을 보았니”라며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다.
관촉사 은진 미륵. 머리가 커다란 특이한 형상이 보는 이를 미소짓게 한다. /
관촉사에는 윤장대가 있다. 한 번 돌리면 경전을 한 번 읽는 것과 같다고 한다.
아이와 함께 갔다면 연산면 충곡리에 자리한 백제 군사박물관에도 가보자. 연산은 계백 장군이 결사대 5,000명으로 신라군 5만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벌인 황산벌 전투의 현장이다. 충곡리엔 계백 장군 유적지가 남아 있는데, 예전부터 계백 장군 묘라고 전해 내려오는 허름한 분묘를 복원해놓고, 백제 군사박물관도 세워놓았다.
계백 장군 유적지에 자리한 황산벌의 요새
여정의 마지막은 탑정호다. 저물녘 풍경이 참 고즈넉한 곳이다. 호수를 일주하는 도로가 잘 나 있어 인근 주민이 드라이브를 하기 위해 자주 찾는다. 탑정호를 찾았을 때는 해가 질 무렵이었다. 호수를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새가 날아간 자리에 희미한 물 무늬가 졌고, 오늘 본 옛 선비의 맑은 정신과 고귀한 기품이 서린 서원, 양반의 너그러운 마음이 담긴 고택, 푸근하고 여유로운 부처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음 한구석에도 영롱한 무늬가 새겨지는 듯했다.
탑정호의 저녁. 붉은 노을이 호수를 잔잔하게 물들인다. /
탑정호에는 수변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잘 가꿔진 나무 데크를 따라 걸으며 호수의 정경을 감상할 수 있다.
Travel Tip
경부고속도로와 논산천안고속도로를 이용해 서논산나들목으로 나온다. 중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 지선을 이용해 논산나들목으로 나와도 된다. 논산 시내엔 조선호텔(041-733-1012), 아테네모텔(041-733-2868), 미라클모텔(041-732-0101) 등 숙박 시설이 많다. 탑정호 옆에 있는 레이크힐호텔(041-742-8851)과 연무읍 에버그린관광호텔(041-742-3344) 등도 있으며, 명재 고택(041-735-1215)에서도 숙박이 가능하다.
먹거리로는 연산면의 순대가 유명하다. 연산시장과 인근에 순댓집이 많다. 연산원조순대집(041-735-0367)은 이 지방의 전통 방식으로 순대를 빚는다. 탑정호 주변에는 민물매운탕집이 늘어섰다. 신풍매운탕(041-732-7754), 붕어마을(041-733-2308) 등이 현지인이 추천하는 곳. 연산에 자리한 고향식당(041-735-0407)은 도가니탕으로 유명한 곳. 힘줄 같은 것은 쓰지 않고 국내산 한우 도가니만 사용한다. 최근 모 방송 프로그램에서 ‘착한식당’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첫댓글 오~ 이런곳도 있었넹~
우리나라도 좋은곳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