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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68) 2024. 6. 5
다윗의 인구조사
사무엘하 24:1-9
사람들은 ‘다윗의 죄’라고 하면 우선 밧세바 사건을 떠올립니다.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고 있는 충직한 부하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나서 그 죄를 감추기 위해서 살인을 교사한 죄 말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은 다윗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무서운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결국, 아들 압살롬의 쿠데타로 그 심판의 말씀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말년에 또 하나의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다윗의 인구조사 사건’입니다.
<사탄의 충동질>
그런데 첫 절부터 난관에 부딪힙니다.
1절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두 가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진노하셨는지” 내용이 없습니다.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숨겨진 죄가 있거나 아니면, 압살롬의 반역(15:7-12)과 세바의 반역(20:1,2)에 보여주었던 백성들의 반역적인 행동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즉 그때에 이스라엘의 다수는 유감스럽게도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다윗 왕을 반역하고, 그를 대적하여 압살롬과 세바를 좇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저들의 반역죄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치려고 하시는데, 그 일을 위해 ‘다윗을 격동시켜서’ 인구를 조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 같이 해석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보다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본문이 있습니다.
대상 21:1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즉, 다윗이 이스라엘을 계수한 것은 사단이 다윗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합하면, 서로 상반된 내용이 아니라 사단이 다윗을 격동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지 않고 허용하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일종의 수사학적 표현).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성경에서 몇 번 찾을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애굽을 치시기 위하여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는 표현(출 7:3; 10:1)과 같은 맥락으로 봅니다.
또, 욥기에서도 사단이 욥을 칠 때에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욥 1:12, 2:6).
삿 9:23(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심판)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삼상 16:14(사울 심판)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왕상 22:20-23(아합의 심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그를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또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신약 성경에도 이러한 표현이 나옵니다.
살후 2:11-12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고의로 악을 조장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만 악한 무리를 심판하시기 위해 때로 사탄이 역사를 이용하시기도 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게 된 것은 사탄이 다윗의 마음을 충동질하자 다윗이 교만해져서, 거만한 마음을 품게 되었고, 인구조사를 하여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그 수많은 전쟁에서 다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용맹스러운 장수였거나 그의 용사들의 수가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강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노년에 이르러서 그는 이런 온전한 믿음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다윗의 범죄 이전에, 이미 이스라엘의 범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지도자가 잘못해서 그렇다고 비난하고 죄를 뒤집어씌우기 쉽습니다. 그래서 ‘잘되면 내 탓, 잘못되면 나랏님 탓’이라는 옛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 볼 때 하나님이 한 국가나 민족을 환난에 던지는 것은 위정자들의 잘못 이전에 그 백성들의 죄악이 크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무능한 지도자가 이따금 나라를 망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백성이 깨어 있다면 그런 위정자가 어디 제대로 발붙일 수나 있겠습니까?
현대사회는 더 국민들이 깨어 있음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투표를 통해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즉, 그 국민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가 들어서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지도자를 탓하기 전에, 국민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인구조사 명령>
사탄의 충동질에 넘어간 다윗은 요압을 불러 구체적인 지시를 내립니다.
2절 “이에 왕이 그 곁에 있는 군사령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이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백성의 수를 내게 보고하라 하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는 전체 이스라엘 영토를 의미하는 관용어입니다. 단은 최북단 도시이고, 브엘세바는 최남단에 있는 도시입니다. 즉 한국식으로 하면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말과 같습니다.
물론 인구를 조사하는 그 자체가 악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모세 시대에도 세 번의 인구조사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인구조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후에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실시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각 지파와 종족과 가문에 따라 정확히 계수하기 위함이었습니다(민 1:1-3). 그리고 싸움에 나갈 수 있는 20세 이상의 남자의 수를 계수하였습니다.
두 번째 인구조사는 바알브올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인 및 미디안 창녀들과 음행하였을 때 염병으로 이만 사천 명이 죽은 후에도 인구조사를 하도록 하셨습니다(민 26:1).
그리고 출애굽 마지막에 인구조사를 또 하였는데(출 30:11-16) 이때는 속전(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20세 이상 성소 유지를 위해 반 세겔을 속전을 내야 했음).
그렇습니다. 인구조사 자체가 범죄는 아닙니다.
그럼 왜 다윗의 인구조사는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다 짐작하시듯, 다윗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인구조사였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의 동기를 보신 것입니다.
<요압의 충언>
다윗의 명령을 들은 요압은 다윗의 마음의 동기를 알아챘습니다.
3절 “요압이 왕께 아뢰되 이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오늘 우리는 신실한 모습의 요압을 만나게 됩니다.
요압은 다윗에게는 필요악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다윗의 악역을 대신 다 감당해주면서, 철저하게 자신의 실속을 챙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다윗의 명령을 대놓고 어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눈 밖에 나 다윗의 ‘37인의 용사들’의 명단에서도 누락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요압의 눈에도 인구를 조사하려는 다윗의 동기가 선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조심스럽게 조언을 합니다. 해석하면 “왕의 하나님께서 내 주인이신 왕의 눈앞에서 백성이 백 배나 늘어나게 하시기를 빕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도대체 왜 이 일을 하시려는 것입니까?”라는 말입니다. 즉 지금 굳이 인구조사를 해야 할 아무런 명분이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한편, 정세에 대단히 민감했던(19:5-7) 요압은 백성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다윗의 명령에 반대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즉, 주변 이방 나라들의 경우 인구조사는 주로 과세와 징병의 목적으로 시행되었기 때문에, 자칫 이번의 인구조사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오해와 원성을 살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던 것입니다.
때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이는 꼭 바른 사람, 똑똑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요압같은 간사한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에도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case by case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제일처럼 알아보고 놀란 이도 바로 사탄의 졸개, 귀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선한 존재는 아니지만, 그들의 말은 옳았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위선을 싫어하셨지만, 그들의 가르침에는 순종하라고 하셨습니다.
늘 자신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배울 것이 있다면, ‘어린아이에게도 배워야’ 합니다.
<다윗의 고집>
한번 교만에 빠진 다윗은 헤어날 줄을 모르고 더욱 인구조사를 재촉하고야 말았습니다.
4~7절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 사령관들을 재촉한지라 요압과 사령관들이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 앞에서 물러나/ 5 요단을 건너 갓 골짜기 가운데 성읍 아로엘 오른쪽 곧 야셀 맞은 쪽에 이르러 장막을 치고/ 6 길르앗에 이르고 닷딤홋시 땅에 이르고 또 다냐안에 이르러서는 시돈으로 돌아/ 7 두로 견고한 성에 이르고 히위 사람과 가나안 사람의 모든 성읍에 이르고 유다 남쪽으로 나와 브엘세바에 이르니라.”
요압의 충언에도 다윗은 오히려 재촉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재촉했다’라고 되어있지만, NIV 성경은 ‘overruled’(뒤엎다, 무효로 하다)라고 표현합니다. 왕의 권위와 힘을 앞세워서 요압의 충언을 깔아뭉개고 완전히 꺾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오던 다윗의 모습이 아닙니다. 요압은 다윗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군대 사령관들과 함께 요단 동쪽으로 건너갑니다. 아르논 계곡에 있는 아로엘부터 시작하여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며 인구를 조사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의 지명을 모르기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동해안을 돌아 정동진에 갔다 남쪽으로 틀어 포항으로 해서 제주도로...’라고 하면 한국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그게 뭔가?’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명을 기억할 필요 없이, 간단히 생각하면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동쪽에 있는 요단강을 건너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며 죽 돌고 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인구조사를 한 결과는 이렇습니다.
8~9절 “그들 무리가 국내를 두루 돌아 아홉 달 스무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9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인구조사에 들어간 시간은 정확하게 9개월 20일입니다. 절대로 적지 않은 시간입니다. 게다가 이 일에 요압을 비롯한 군대 사령관들이 총동원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만일 외적이 침입해오거나 아니면 다른 중대한 사건이 벌어졌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말 꼭 필요한 일이었다면 물론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급하지 않은 일에 그렇게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다가는 반드시 역풍을 만나게 됩니다.
그 수가 무려 13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80만 명이었으며, 유다 지파만 50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역대상 21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110만 명이고 유다는 47만 명으로 나오는데, 여기와 수의 차이가 납니다. 요압은 다윗의 명령을 못마땅하게 여겨 레위 사람과 베냐민 사람은 계수하지 않았습니다(대상21:6). 또 일부는 인구조사를 마치기도 전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서 그 수를 기록하지 못했다고 되어 있습니다(대상27:24). 또 이 수가 그 당시 기록되지 않고 구전되다가 후일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대상27:24).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닙니다. 9절에서 인구조사의 동기가 분명히 나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9절 “요압이 백성의 수를 왕께 보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만 명이었더라.”
어떤 숫자를 세었습니까?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 즉 20세 이상의 군인으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의 수를 세었다는 겁니다. 다윗은 자기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사들, 군인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군인 숫자가 많을수록 ‘내가 이 정도다.’라고 세를 과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생각해 보면 다윗이 숫자로 밀어붙여 전쟁에서 승리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적의 대군이 밀려와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 이겼지, 자기들이 숫자가 더 많아서 이긴 적은 없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 순수한 신앙인일 때 골리앗을 맞서 싸울 때 유명한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b).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7).
어마어마한 장수 앞에서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어린 시절 하나님만 의지하던 목동으로서 담대히 믿음을 외쳤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힘들 때 위험할까요, 아니면 잘 나갈 때 위험할까요? 어려움이 왔을 때가 위험할까요, 아니면 성공을 거둘 때가 위험할까요? 우리는 모두 성공을 원합니다. 누가 실패를 원합니까? 실패하고 싶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직장을 찾는 것도, 사업을 하는 것도, 다 성공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참 신기하게도 사람은 성공할 때, 잘 나갈 때 위험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잘 나갈 때는 모든 권력과 권한이 자기 손에 있어서 그것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과시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명언도 있습니다. “실패를 견디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성공을 견디는 사람은 적다.” 실패했을 때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오히려 잘되는 경우는 많습니다. 그러나 성공했을 때 더 정직하고 성실하게 해서 더 잘되는 경우는 참 적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쫓기고 도망 다닐 때, 광야 굴속에 있을 때, 이리저리 도망갈 때 하나님을 향한 그의 영혼이 순수하고 맑았습니다. 하나님과 아주 가깝고 밀착된 관계 속에서 살았습니다. 험난한 자기의 삶이 오히려 자기를 맑게 만들고 별처럼 빛나게 만드는 놀라운 은혜였다는 것을 깨닫고 여러 시를 썼는데 우리 시편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정말 주옥같은 시들입니다.
그런데 다윗도 성공하고 넘어집니다. 이미 한 번 넘어졌던 것을 봤고, 오늘 또 넘어지는 것을 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를 비롯하여 직분자들이나 교회에 오래 다니는 사람일수록 공로주의에 사로잡히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고전3:21~23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23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눅17:10)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꾸 잊어버리고 ‘내가 뭔가가 되었나 보다’라고 자꾸 으스대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특히 뭔가를 잘했는데 문제가 생기거나 알아주지 않을 때‘ 내가 한 게 얼마인데, 내가 헌신한 세월이 얼마인데 이럴 수 있는가?’ 하며 자꾸 섭섭해지고 서운해지는 것을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의 연륜이 오래될수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은 어떤 상황이든지, 특히 어떤 성공을 이루었을 때도, 마지막까지 믿음의 길, 겸손을 길, ‘좁은 길’로 한결같이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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