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엘리스항으로부터 남쪽으로 가다보면 ‘락랜드 카운티’가 나온다. 여기는 미국 독립구단 락랜드 보울더스(Rockland Boulders)의 홈구장 프로비던트 뱅크 파크가 있는 곳이다. 락랜드 구단은 메이저리거를 꿈꾸는 세계 야구선수들의 마지막 희망이자 꿈의 지푸라기로, 이 구단에서 성공하면 마이너리그를 거쳐 메이저리그 승격의 마지막 기회를 잡을 수 있지만, 실패하면 야구선수로서의 생명이 끝나고 만다. 그래서일까. 독립구단 락랜드는 만남과 이별, 성공과 좌절이 교차하는 또하나의 엘리스섬이다.
그런 락랜드에 새로운 도전자가 찾아왔다. 그는 37살의 ‘너클볼러’ 허민 고양 원더스 구단주였다. 초교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엘리트 야구팀에서 한 번도 뛴 적이 없는 비선수 출신의 허민이 머나먼 뉴욕까지 날아온 덴 이유가 있었다. 100년 전(前) 엘리스섬에 도착한 이민자들처럼, 그 역시 오랜 꿈을 이루려고 뉴욕 땅을 밟은 것이었다. 그리고 허민은 꿈을 이뤘다. 미 독립구단 선발투수로 생애 첫 공식 경기 마운드에 올라 힘차게 공을 던진 것이다.
<스포츠춘추>가 ‘행복한 너클볼러’ 허민을 뉴욕에서 만났다.
![]() 허민 원더스 구단주가 미국 독립구단 락랜드 선발투수로 데뷔전을 앞둔 장면(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9월 1일(이하 한국시간). 뉴욕 지역 언론사의 기자들은 락랜드 선발투수 허민의 데뷔전을 취재하려고 일찌감치 구장에 나와 있었다. 뉴욕의 야구팬들도 ‘아시아의 너클볼러’를 보려고 앞다퉈 프로비던트 뱅크 파크를 찾은 터였다. 구단 역시 허민의 데뷔전을 축하할 요량으로 입장하는 관중에게 ‘민새니티(Minsanity)’가 새겨진 티셔츠를 나눠주고 있었다.
‘민새니티(Minsanity)’는 허민의 이름인 '민'을 따와 만든 신조어였다. 락랜드 홍보 관계자는 "NBA 뉴욕 닉스의 중국계 포인트가드 제레미 린이 등장했을 때 크게 유행했던 ‘린 새니티(Lin Sanity, 린에게 미쳤다)’를 차용해 ‘민새니티(Minsanity, 민에게 미쳤다)'가 새겨진 티셔츠를 만들었다"며 "뉴욕에서 (허)민은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유명 인사"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는 유명 인사였다. 뉴욕의 방송사와 신문사들은 “허민은 세계 게임산업계에선 ‘한국의 스티브 잡스’로 불리는 천재 사업가이자 청년 재벌이며 한국 유일의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의 구단주”라고 상세히 소개하고서 “독학으로 너클볼을 익혀 8월 말 락랜드에 입단한 독특한 야구선수”라고 전했다.
한국의 천재 사업가이자 청년 재벌이 미국 독립구단에 투수로 입단했으니 미국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할만 했다. 특히나 미국에서도 희귀한 너클볼러이기에 허민에 대한 미국 야구팬들의 궁금증은 갈수록 증폭됐다. 물론 허민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은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 독립구단 구단주가 미국 독립구단에 선수로 입단했으니 당연했다. 이날 한국의 한 스포츠 케이블 채널이 허민의 데뷔전을 생중계한 것도 대중의 궁금증을 풀어주자는 차원이었다.
경기 전, 허민은 기자에게 “8년 동안 이 순간을 위해 너클볼을 익혀왔다”며 “어떤 결과가 나오든 더 큰 꿈을 향한 도전은 계속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마운드에 오르기 전 “홈플레이트가 가까워 보인다”며 밝게 웃던 허민을 보며 데뷔전 성공을 예감했다. 아니 이미 마운드를 밟은 순간 그는 절반의 성공을 거둔 승리자였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는 데뷔전에서 선발투수로 나와 3이닝을 던져 5피안타 4볼넷으로 5실점했다. 팀이 패하는 통에 데뷔전에서 패전투수의 멍에를 썼지만, 그는 아웃카운트를 9개나 잡으며 자신의 꿈을 향한 첫 번째 계단을 순조롭게 올랐다.
![]() 생애 첫 공식경기 마운드에 오른 허민. 비선수 출신에서 주목받는 너클볼러가 되기까지 8년이 걸렸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고맙습니다. 먼 곳까지 오셨는데, 더 잘 던졌으면 좋았을 텐데…일단 경기 내용은 마음에 썩 들지 않지만, 데뷔전을 통해 여러 교훈을 얻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허민 구단주님의 프로 데뷔전일뿐만 아니라 생애 첫 공식경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과거 서울대 야구부에서 선수로 뛰지 않으셨나요?
서울대 다닐 때 야구부원이긴 했는데요. 부상 때문에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어요. 사회인이 돼서도 투구하긴 했지만, 불펜 투구나 시뮬레이션 투구였지 정규이닝으로 진행된 경기는 아니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이 제 생애 데뷔전이자 공식경기이자 정규 게임이었습니다(웃음).
3이닝 5피안타 4볼넷 5실점을 기록했지만, 미국과 한국에선 “대단한 투구였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한국 야구인들도 “허민 대표의 너클볼이 그렇게 좋을지 몰랐다”고 하더군요.
솔직히 오늘 경기는 그간의 불펜 투구와 시뮬레이션 투구를 모두 합쳐 가장 좋지 않았던 투구였어요. 너클볼 제구가 너무 안 됐어요. 타자들도 적극적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계속 공을 기다리고. 여기다 우리 홈구장의 우측 펜스가 90m 조금 넘거든요. (입맛을 다시며) 그쪽으로 타구가 가면 홈런이 많이 나오는데 공교롭게 오늘 맞은 홈런도 그쪽으로 가버렸어요.
사실 데뷔전을 보면서 ‘몸이 정상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무릎, 어깨, 팔꿈치가 정상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무릎이 좋지 않았던 게 문제였어요. 미국에서 한창 훈련하다가 무릎을 다쳐서 치료 차 한국에 다녀온 적이 있거든요. 그때 진통 주사를 맞긴 했는데 확실히 힘을 모아 세게 던지는 게 쉽지 않더군요. 팔꿈치, 어깨에도 진통 주사를 맞은 상태인데요. 어쩌면 그것보다 미국 취업비자가 늦게 나와 심적으로 시달린 게 악재가 된 것 같아요. (한숨을 내쉬며) 어쨌거나 그걸 극복하고 잘 던졌으면 좋았을 텐데….
"너클볼은 구속보단 공의 변화가 우선" 데뷔전 첫 투구공을 선물받은 허민(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데뷔전에서 구단주님의 너클볼을 보며 그전에 봤던 너클볼과는 다소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광판에 찍힌 너클볼 구속이 59마일(시속 95km)이나 되더군요. 원래 그보다 구속이 낮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원래 제 너클볼은 시속 80km대였어요. 너클볼 구속이 오른 스토리가 있어요.
뭡니까.
이번에 미국 와서 제 에이전트인 앨런 네로 씨 소개로 새로운 너클볼 코치를 만났어요. 그 코치도 저처럼 멕시코 독립리그에서 뛰었던 분이에요. 그분이 저한테 하는 소리가 “지금 던지는 너클볼보다 구속이 빨라야 한다. 그러려면 하체를 써야 한다”면서 제 투구 매커니즘을 완전히 바꿔 놓으셨어요. 처음엔 그분 지도를 따랐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저한테는 그 매커니즘이 맞지가 않았어요. 프로야구 보면 ‘선수와 코치의 궁합이 잘 맞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전 그런 이야기 들으면 ‘그런 게 어딨어. 선수만 잘하면 되지’했는데 직접 경험해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웃음).
어떤 식으로 잘 맞지 않았던 겁니까.
저는 원래 너클볼 그립을 잡을 때 손가락 끝을 공에 올려놓는 스타일이에요. 제 너클볼 스승님 필 니크로 씨와 비슷하죠. 우린 투구할 때 손가락을 튕기듯이 미는 게 아니라 손가락을 쫙 펴면서 자연스럽게 공을 뿌려요. 그렇게 던지면 손가락으로 미는 것보다 구속은 덜 나와도 공의 변화가 심해지죠. 하지만, 제 코치는 R.A 디키처럼 포크로 공을 찍듯 손톱으로 공을 누르고서 힘차게 밀라고 했어요. 그러면 구속은 더 나오거든요. 이번 데뷔전에서 너클볼 구속은 이전보다 10km 정도 더 나오긴 했는데 공의 변화는 확실히 덜했던 것 같아요.
그 코치가 구속 증가 필요성을 제기한 이유가 있을 듯싶은데요.
올해 미국 와서 첫 투구를 미국 대학팀 상대로 했어요. 그때 짐 마샬 같은 유명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절 보러 오셨어요. 류현진 선수 에이전트인 스캇 보라스도 왔죠. 그때 보라스는 FA였던 카일 로시를 보려고 왔는데, 그 경기 제 상대 투수가 바로 로시였어요.
결과가 어땠을지 궁금한데요.
최악이었어요. 그때 제 투구를 보고 마샬이나 제 코치나 “80km 너클볼은 안 된다. 90km은 넘어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그때부터 코치가 ‘그립과 폼을 바꾸라’고 했고, 한동안 그렇게 따랐죠.
너클볼 그립과 폼을 바꾼 이후 구위가 좋아졌습니까.
그 다음 경기에서 대학팀을 상대로 2이닝 2탈삼진 무안타를 기록했어요. 상대 대학팀에서 난리가 났죠. ‘저런 너클볼은 처음 봤다’고. 아, 그런데 그땐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나 에이전트가 아무도 안왔어요. 보라스도 안 오고(웃음). 그런데 그땐 제 원래 투구폼으로 던졌어요. 사실 제 코치도 독학으로 너클볼을 배운 사람이고, 누굴 가르치는 일도 처음이라서 제게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모르더군요. 그래도 일단은 그 코치의 말을 다시 듣기로 했죠.
이후 경기 결과는 어땠습니까.
텍사스 레인저스와 애리조나 루키팀을 상대로 던졌는데 각각 5이닝 2실점, 4이닝 1실점을 기록했어요. 그때 비공식적으로 모 구단으로부터 '우리 팀에 연습생으로 입단하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았어요. 그러다 에이전트 소개로 독립구단 락랜드를 알게 되고, 테스트를 받게 됐죠.
락랜드 테스트에서도 결과는 좋았던 것으로 압니다.
첫 라이브 피칭에서 5이닝 무실점을 기록했어요. 다음엔 5이닝 2실점을 기록했죠. 우리 팀 3, 4번 중심타자를 다 삼진으로 잡았어요.
5이닝 무실점, 5이닝 2실점이면 꽤 수준급 투구였는데요. 그때 입단이 결정된 겁니까.
구단 사람들은 다 좋다고 했어요. 그런데 감독만 “너클볼 구속이 느리다. 조금 올려야 한다”면서 제 입단을 보류시켰어요. 원래는 8월 초 입단 예정이었는데, 3주 동안 테스트 보면서 입단을 기다려야 했어요.
역시 구속이 발목을 잡았군요. 한편으론 답답했겠습니다.
니크로 선생님은 현역시절 시속 50km서부터 110km까지의 너클볼을 던지셨어요. 하지만, 110km짜리 너클볼은 노볼 투스트라이크에서 될 데로 되라는 심정으로만 던지셨지 평소엔 거의 사용하지 않으셨어요. 저는 어쩔 수 없이 너클볼 구속을 올려야 했죠. 왜냐? 제 생사여탈권을 감독이 쥐고 있었으니까요.
앞에서 너클볼 구속 향상이 마이너스로 작용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너클볼 구속을 높이려고 코치 말대로 손톱으로 공을 쥐고 밀어 던졌는데요. 확실히 그렇게 던지니까 제구에 일관성이 없었어요. 예전부터 니크로 선생님은 “그렇게 던지지 마라”고 했거든요. “그렇게 던지다 손톱이 부러진 너클볼러가 있다”고하셨어요. 이젠 예전 니크로 선생님식의 그립으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다시 예전 그립으로 돌아가면 제구는 잡힐지 몰라도 구속은 떨어질 게 자명한데요. 시속 80km대 너클볼로 메이저리그에서 성공을 거둔 투수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죠. 예외가 한 명 있다면 니크로 선생님이었죠. 니크로 선생님의 현역시절 너클볼 구속이 주로 80, 90km대였어요. 그런데 정말 공이 변화무쌍했었어요. 저도 80km대에선 변화가 심한 편이에요. 그래서 내년 시즌엔 포심 패스트볼 구속은 시속 110km로 올리고, 너클볼은 80km대를 유지할 생각이에요.
‘물리학의 법칙을 뛰어넘는 너클볼의 세계’ 허민이 너클볼 그립을 잡고서 밝게 웃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스스로 평가할 때 구단주님의 너클볼은 어떤 특징이 있다고 보십니까.
타자들이 제 공을 못 치는 이유는 공이 가다가 갑자기 떠오르기 때문이에요. 정말 너클볼이 잘 들어갈 땐 물리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힘들 만큼 공이 춤을 춰요. 저 말고 다른 너클볼러들도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을 거예요.
여담입니다. 일반인도 너클볼을 배우면 구단주님처럼 투구할 수 있습니까.
있죠. 그런데 한참 걸리죠. 저처럼(웃음). 너클볼이 진짜 예민해요. 제가 정말 예민한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궁합이 맞나 봐요. 너클볼은 던지는 순간 힘 배분이 아주 미세하게 잘못돼도 공에 회전이 먹게 됩니다. 그럼 제대로 날아가지 않죠.
한창 너클볼이 좋을 때 구단주님 너클볼 회전수는 어느 정도나 됩니까.
저는 한 바퀴에서 두 바퀴 정도 돌아요. 공에 새겨진 마크가 보이는 채로 날아갈 때도 있어요. 어떨 땐 움직임없이 그냥 날아가기도 해요. 잠시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물리학의 법칙을 벗어나는 공이 가기도 해요. 그런 너클볼을 던지면 모든 피로가 단번에 사라지죠(웃음).
너클볼 그립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공을 잡고 던질 수 있나’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확실히 제구에도 문제가 있을 듯싶고요.
너클볼이 무회전으로 날아가면 사실 어디로 공이 떨어질지 몰라요. 너클볼을 잘 모르는 지도자들이 “좌·우 코너워크를 하라”고 하는데, 좌·우 코너워크가 되면 그건 너클볼이 아니죠. 어디로 갈지 모르는 게 너클볼의 운명이죠.
그럼 너클볼러들은 어떻게 제구합니까.
‘포수 헬멧을 보고 던져라’ 이게 너클볼러들이 찾은 제구의 법칙이에요. 일단 포수 헬멧을 보고 던지는 게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갈 확률이 가장 높아요. 그리고 또 한가지 말씀 드리면 오른손 너클볼러는 무조건 1루쪽 투구판을 밟아야 해요.
대개 오른손 투수들은 3루쪽 투구판을 밟는데요. 너클볼러들은 다르군요.
그렇죠. 오른손 너클볼러들이 3루쪽 투구판을 밟으면 제구 자체가 안 돼요. 오른손 너클볼러 대부분이 1루쪽 투구판을 밟는 게 그 때문이죠. 하지만, 미국 투수 지도자들도 그걸 몰라요. 저한테도 “어이, 민. 왜 자꾸 3루쪽 투구판을 밟는 거야. 1루쪽을 밟고 던져” 그래요. 제가 대꾸하면 잘리니까 코치들이 보고 있으면 3루쪽 투구판을 밟아요. 안 볼 땐 원래 하던 식으로 밟고(웃음).
현재 마이너리그엔 너클볼러가 있습니까.
몇 명 있어요. 그 중 한 명이 ‘스티븐 라이트’라고 올해 마이너리그에서 빅리그로 승격한 너클볼러가 있어요.
라이트가 빅리그로 승격했다면 여전히 메이저리그에선 너클볼러의 수요가 있다는 뜻인데요. 구단주님과 비교할 때 라이트는 어떤 너클볼러입니까.
그 친구 너클볼은 디키와 비슷해요. 너클볼 구속이 시속 130km까지 나와요. 그런데 라이트도 빅리그에 데뷔할 때 폭투만 4개인가 기록했어요. ‘무슨 저게 투수야’하는 분도 계실 테지만, 너클볼러에게 볼넷, 몸에 맞는 공, 폭투는 헤어지고 싶지만, 결코 헤어질 수 없는 친구에요. 팀 웨이크필드도 볼넷 4개로 밀어내기 점수를 주곤 했거든요. 그나마 디키가 볼넷이 적은 편이죠. 제구가 좋고, 공도 빠르고. 그래서 너클볼러들이 디키를 ‘하드 너클볼러’라고 불러요.
![]() 니크로 형제. 형인 필 니크로(사진 오른쪽부터)와 동생 조 니크로. 이들은 너클볼의 선구자들이다. 두허민은 필 니크로의 너클볼 그립과 비슷하다. 구속과 공의 변화도 필 니크로쪽에 가깝다 |
그러니까 구단주님처럼 느린 너클볼은 ‘소프트 너클볼러’, 디키처럼 빠른 너클볼을 ‘하드 너클볼러’라 한단 말씀이지요?
그렇죠. 전자는 대충 이해가 가실 테고. 하드 너클볼러 계보를 잠시 말씀드리면.
네.
하드 너클볼러의 아버지가 바로 필 니크로 선생님의 동생 조 니크로에요. 형인 필이 너클볼로 리그를 평정할 때 동생인 조는 강속구를 고집했어요. 니크로 형제의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너클볼을 가르쳤지만, 큰 아들만 따르고 작은 아들은 너클볼을 싫어했대요. 그런데 조가 빅리그에서 계속 죽을 쒔나봐요. 하루는 형인 필을 찾아와 속성으로 너클볼을 배웠대요. 그후 너클볼을 던졌는데 속성으로 배워선지 구속이 형보다 빨랐어요. 따지고 보면 그게 하드 너클볼러의 시작이었던 셈이죠. 결국 형인 필은 개인 통산 318승, 동생인 존은 221승을 거둬 메이저리그 형제 통산 승수 1위에 올랐어요.
그렇군요.
(뭔가 생각이 난 듯) 만날 니크로 선생님이 절 보면 “브라더(brother, 형제여)”하고 부르셨어요. 그분 연세를 생각하면 전 아들이나 손자뻘밖에 안되는데 왜 자꾸 “브라더”하고 부르는지 궁금했죠.
저도 갑자기 궁금해지는데요.
그래서 하루는 궁금해서 “선생님, 왜 절 ‘브라더’라고 부르십니까”하고 물었어요.
뭐라고 답하던가요.
(조용한 목소리로) “조가 2006년 뇌 동맥경화증으로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네. 조를 잃은 슬픔이 너무 컸어. 그러다 자네를 만나면서 조금씩 아픔을 치유했다네. 자네에게 너클볼을 가르칠 때면 그 옛날 조가 생각나. 자네는 내겐 또 다른 조야.”
아….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확’ 나더라고요.
“돈으로 입단? 1년 동안 입단 테스트 받으러 다녔다.” 독립구단 입단 과정 허민이 락랜드 구단 사장(사진 왼쪽), 감독, 단장과 데뷔전을 치르고서 기념촬영을 한 장면. 락랜드에서 허민은선수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좋은 동료이자 멘토였다. 락랜드는 허민을 내년 시즌 캠프부터 초대한 상태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구단주님의 락랜드 입단 소식을 듣고 많은 이가 깜짝 놀랐습니다. 비선수 출신이 미국 야구단에 입단한 것도 화제였지만, 38살의 나이로 미국 야구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물론 일부에선 “허 구단주가 막강한 재력을 활용해 미 독립구단에 유임승차한 것”이라며 색안경을 끼고 보기도 했습니다.
저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미국은 아시겠지만, 돈 있고, 빽 있다고 구단에 입단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에요. 설령 미국이 아니더라도 한국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돈 좀 있다고 삼성 2군에 입단할 수 있겠습니까? 실력이 떨어지면 당연히 안 되겠죠. 여기도 그래요.
제가 미국 독립구단이나 마이너리그 구단에 도전하려고 미국으로 넘어온 게 지난해 8월부터에요. 올 초엔 기온이 40도가 넘는 애리조나에 개인 캠프를 차리고서 하루 종일 체력훈련과 기술훈련에 매달렸어요. 그리고 정말 많은 구단을 찾아가 입단 테스트를 받았어요. 락랜드에 입단할 때도 3개월 동안 테스트를 받았으니까요. 만약 제 너클볼이 좋지 않았다면 락랜드가 아니라 락랜드 할아버지라도 절 받아주지 않았을 거예요.
사실 구단주님은 여느 선수들과는 사정이 다를 수 있습니다. 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이자 부호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구단이나 에이전트 모두 ‘과연 허 구단주가 열악한 독립구단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란 우려를 했을 듯싶군요.맞아요. 앨런이 그러더군요. “미국 독립구단에 가서 바닥부터 생활할 수 있겠느냐”고. 기존 선수들과의 관계서부터 팀 적응까지 걱정이 말도 못하게 많으셨어요. 하지만 왠걸요. 우리 팀 보셨죠. 선수들과 정말 잘 지냈어요. 선수들이 제게 이메일도 보내고, 문자메시지도 보내 오고, 오늘은 한 선수가 제 기사가 난 신문을 오려서 선물해주더군요(웃음).
물론 그런 건 있을 거예요. 대부분의 독립구단 선수는 오프 시즌이면 다른 리그에서 뛰거나 새 시즌이 시작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다른 일을 하며 돈을 벌잖아요. 그건 저도 같아요. 조금 다른 게 있다면 그들보다 좀더 많은 돈을 번다는 정도죠.
데뷔전이 끝나고 “실전투구를 많이 했으면 이렇게까지 감각이 무뎌진 상태로 투구하진 않았을 텐데”하는 아쉬움을 토해내셨습니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원더스 구단주면 원더스 선수를 상대로 훈련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원더스 구단주니까 언제 어디서고 마음만 먹으면 경기에 뛰고, 감독님께 지도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양손을 흔들며) 아니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현실적인 두 가지 걸림돌이 있어요.
두 가지 걸림돌? 그게 뭡니까.
제가 원더스 경기에 뛰면 누군가의 기회를 빼앗게 됩니다. 제가 설령 잘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원더스 경기에 등판하면 한 번이라도 더 프로구단에 자신의 능력을 보여줘야할 선수들의 등판 기회가 줄어들어요. 두 번째는 감독님과의 관계에요. 전 누가 뭐래도 김성근 감독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런 감독님께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아요. 생각해보세요. 만약 구단주인 제가 선수로 뛴다면 감독님께서 얼마나 불편하시겠어요. 저는 그래서 원더스에서 선수로 뛰는 걸 한 번도 고려한 적이 없어요. 일본 독립구단이나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뛰는 게 낫죠(웃음) 허민의 사인을 받으려고 그의 주변에 몰려든 관중(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야구계에선 사실 이번 데뷔전 투구를 보고 “허 구단주가 원더스 선수로 데뷔하는 게 아니냐”는 예상이 많았습니다.
제 뇌 구조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지만, 전 원더스와 제 야구를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해요. 원더스를 창단한 건 제 방식대로 도네이션(기부)을 한 것뿐이에요. 제가 야구를 좋아해서 원더스를 창단한 걸로 아시는 분이 많은데 그건 아니었어요.
그래요?
물론 야구를 다른 스포츠보다 좋아하는 건 사실이죠. 하지만, 축구나 핸드볼 등 다른 스포츠단을 만들어서 도네이션할 수도 있었어요. 그럼에도 제가 야구 독립구단을 창단한 건 야구가 도중에 탈락할 확률이 가장 높은 종목이었기 때문이에요.
음.
결정적 계기가 된 게 제 개인 트레이너에요. 그 친구는 고교 시절 봉황대기 준결승에서 결승타를 치고, 대학 4년 내내 주전으로 뛰었던 유망주였어요. 그 정도 유망주면 다른 스포츠에선 직업 선수가 될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야구는 아니에요. 그 친구도 프로 진출에 실패했어요. 그 친구를 보면서 결심했죠. ‘좋은 스승과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독립구단을 만들자. 그곳에서 실패한 야구선수들이 마지막 꿈에 도전하도록 도와주자’라고요. 지금 우리 팀 선수들 보세요. 정말 엄청나게 실력이 늘었어요(웃음).
![]() 허민 기념 티셔츠를 입은 뉴욕 야구팬들. 그들은 기자가 기념 티셔츠를 입지 않고 있자 "오늘 한국인 너클볼러의 투구가 한국으로 생중계된다. 한국 야구팬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자"며 직접 티셔츠를 챙겨와 기자에게 전해줬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애초 제안했던 건 “당신이 10억 원 정도 투자하면 본전은 챙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KBO에서도 독립구단의 연착륙을 위해 여러 수익 보전책을 제시하려 했던 것으로 아는데요. 그러나 정작 지난해 원더스가 쓴 운영비는 50억 원 가까이 됐습니다. 거기다 원더스는 KBO의 수익 보전책마저 정중히 사양했고요.
2011년 KBO에서 보내주신 제안서를 읽어 보니까 ‘10억 원 정도 투자하면 적자는 보지 않을 수 있다’고 돼있더군요. 하지만, 그런 내용은 처음부터 제 관심 밖이었어요. 생각해 보세요. 1년에 1억 원 아니 10억 원을 번들 제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 제가 KBO에 “도네이션 차원이면 구단을 만들고, 그 차원이 아니면 안 하겠다”고 말씀드렸죠. 그때나 지금이나 원더스를 바라보는 제 입장은 같아요. ‘내가 야구를 하는 것과 원더스 운영은 별개’라는 겁니다.
'행복한 너클볼러' 허민의 꿈
![]() 허민의 데뷔전을 축하해주려고 락랜드 홈구장을 찾은 이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데뷔전이 끝나고 원대한 목표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메이저리그 가야죠. 안 될수도 있겠죠. 그런데 전 안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재미난 이야기 하나 해드릴게요. 제가 고교 1학년 때 점심시간 중에 교탁 위로 올라갔어요. 애들 점심 먹고 있는데 제가 그랬어요. “야, 내가 나중에 사업할 건데 나랑 사업할 놈들은 지금부터 열심히 공부해라”라고요(웃음). 그땐 회사명도 ‘HM(허민의 이니셜) 사단’으로 정해놨어요.
친구들 반응이 어땠나요.
“뭐이리 시끄럽노. 야, 밥이나 묵으라”(웃음).
그럴 만도 했겠는데요.
그런데요. 저 보고 ‘밥이나 먹으라’고 했던 친구들이 정작 제가 사업을 시작할 때 창업 멤버로 왔어요. 다들 안 믿었지만, 전 사업을 시작했고 나름 성공을 거뒀어요. 제가 서울대에 간다고 했을 때도 반응이 똑같아요.
음.
고교 2학년 말이면 담임 선생님이 진학지도를 해주시잖아요. 제가 그때 “전 무슨 일이 있어도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가겠습니다”라고 했어요.
담임 선생님 반응은 어땠나요.
고1 때까지 성적이면 “알았다” 하셨을 텐데, 고2 때 동네 야구하면서 엄청 놀아 성적이 떨어졌거든요. 담임 선생님께서 “니가 무슨 서울대고? 다른 국립대나 가라”고 하셨어요. 돌아보면 제가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가겠다고 했을 때 아무도 제 말을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믿는 사람이 딱 한 명 있긴 했죠.
그게 누구였나요?
저만 절 믿었어요. 담임선 생님 말씀에 충격 받고 그날부터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공부만 했어요. 고교 졸업할 때 전교 7등으로 졸업했죠.
원하던 서울대 전자공학과엔 입학했습니까.
그해 제가 다니던 고교에서 서울대를 5명만 갔어요. 전교 7등을 했으니 전 못갔죠(웃음). 떨어지든 말든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쓰긴 했는데 결국 떨어졌어요. 재수할 때도 제가 서울대에 가겠다고 했을 때 아무도 안 믿었어요. 진짜 공부 열심히 해서 다음해 서울대에 합격했죠. 그뿐이 아니에요.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갔을 때도 그랬어요. 누구도 제가 당선하리라 예상하지 못했어요.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엔 왜 나간 겁니까.
그냥 해보고 싶었어요(웃음).
1990년대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웬만한 선거판을 능가했습니다. 풍부한 자금과 탄탄한 조직이 없으면 당선되기 어려웠지요. 구단주님은 자금과 조직을 두루 갖췄던 모양입니다.
들어보세요(웃음). 하루는 친구들이랑 당구를 치는데 제가 그랬어요. “야, 나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갈거다.” 친구들이 뭐라고 했는 줄 아세요?
또 비웃었나요?
당연하죠. “야, 저거 또 뭐라고 씨부리쌌노. 당구나 쳐라.”(웃음). 선거운동원은 저하고, 제 숙소 룸에이트, 고교 동문 후배 3명 합해 5명이 전부였어요. 제 룸메이트는 저 때문에 부총학생회장 후보로 출마했죠(웃음).
이런 세상에.
전 제가 당선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확신의 근거는 뭐였습니까.
그냥 확신이 있었어요. 전 총학생회장 선거 때 그 흔한 학내 연설도 하지 않았어요. 문과대나 공대 앞에 서서 지나가는 학우들한테 지원을 부탁하지도, 선거 띠 두르고 여기저기 인사 같은 것도 하러 다니지 않았어요. 아예 일반적인 선거 운동 자체를 하지 않았어요. 대신 고려대 방송반 친구 도움을 받아 제가 작곡한 노래를 직접 부르는 뮤직비디오를 찍었어요. 그리고 지금은 흔하지만, 처음으로 홈페이지를 만들어 그걸 통해 선거 운동을 펼쳤어요.
학내 반응은 어땠나요?
시쳇말로 난리가 났죠. 반응도 폭발적이고(웃음).
선거 결과는 어땠습니까.
후보자가 7명이었어요. 그게 운으로 작용했어요. 표가 갈리는 바람에 제가 최다득표자가 됐죠. 아, 그런데 다른 후보 측이 “학칙에 근거해 이 투표로 총학생회장을 확정할 수 없다. 2차 투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통에 결선투표까지 갔죠.
나머지 6명의 총학생회장 후보는 구단주님과는 다른 노선 아니었습니까?
그랬죠. 나머지 6명의 후보가 단일 후보자를 낼 게 분명했어요. 우린 선거 운동원이 5명밖에 없고. 우리 내부에서도 “여기까지 잘 왔다. 지금 결선투표하면 우리가 따따블 스코어로 진다. 큰 망신 당하기 전에 ‘여기서 위대한 도전을 마감하겠다’하고 사퇴하자‘는 의견이 나왔어요(웃음).
그래 사퇴했습니까.
천만에요. 전 투표하면 제가 될 것 같은 확신이 여전했어요. 결국 결선투표에서 제가 7표 차로 이겼어요.
단 7표 차요?
당시 학내 양대 산맥이 있었는데, 한쪽이 다른 한쪽이 밉다고 절 밀었다고 하더군요(웃음).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면 장래 정치인이 되기엔 그보다 좋은 이력서도 없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국회의원 비서관 하다가 공천받아 (국회의원에) 출마하라”는 조언을 수도없이 받앗어요. 출마 제안도 엄청 받았죠. 하지만, 다 거절했어요. 왜인줄 아세요?
저도 궁금하군요. 마음만 먹으면 누구보다 사회적 명성을 누릴 수 있으실 텐데 항상 몸을 낮추는 구단주님을 보면서 저도 그점이 궁금했던 차입니다.
총학생회장이 되고 나서 소위 ‘정치’란 걸 해봤어요. 1년 ‘딱’하고 내린 결론은 하나였어요. 제가 정치로 사회를 바꾸는 건 역부족이라는 거였어요. 그리고 그때 생각한 게 ‘좋은 회사, 좋은 조직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잘해주자. 그래서 사람들이 다니고 싶어하는 회사로 키우고, 더 좋은 성과를 내자. 그러면 다른 회사들이 분명히 우리 회사를 벤치마킹해 우리 같은 회사를 만들 것이고, 그런 회사가 늘어날수록 그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의 행복 총량도 증가할 것이다.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거였어요.
전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좋은 회사를 만들어 그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들이 만든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하시는 분들도 행복해질 바랍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제가 너클볼을 던지는 이유도 하나에요. 행복하고 싶다는 것. 그것뿐입니다.
이번 데뷔전을 치르고. 행복하셨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결과가 안 좋아서 아주 행복하진 않았어요(웃음). 그래도 일반인이 선수로 데뷔했으니 행운이었던 셈이죠. 그리고 앞으로 나갈 목표도 확실히 세울 수 있었어요. .
고교생 허민의 세 가지 꿈 '너클볼러' 허민의 든든한 조력자들. 신언준 트레이너(사진 왼쪽부터)과 허민 그리고 하송 원더스 단장(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자신이 했던 말은 어떻게든 현실로 만들어오셨습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너클볼러가 되겠다’는 결심은 언제 어떻게 한 겁니까.
음, 그것도 사연이 있는데요. 하루는 같이 사업하는 친구들과 게임을 했어요. 그때 제가 갑자기 “애들아, 내가 너클볼을 연마해서 언젠간 프로야구 선수가 될 거다”라고 했어요.
하하. 이번에도 친구들 반응은 과거와 같았습니까.
“이게 미친나. 야! 게임이나 해라”하는 거예요(웃음). 사실 전 고교 때 세 가지 꿈이 있었어요.
세 가지 꿈이요?
네. 먼저 ‘훌륭한 기업가가 되자.’ 두 번째는 ‘가수가 되자.’ 세 번째 꿈이 바로 ‘프로야구 선수가 되자’였어요. 지금 훌륭한 기업가가 됐는진 모르겠어요. 여전히 그 과정을 밟고 있죠. 가수는 버클리 음대를 갔다 왔으니까 이제 앨범만 내면 됩니다.
잠깐. 노래는 잘 부르십니까.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래도 기계의 힘을 빌려야겠죠(웃음). 전 제가 직접 안 부르고, ‘토이’처럼 작곡만 해서 객원가수가 부르도록 할 생각이에요. 나중에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작곡은 그럴싸 합니다(웃음).
나머지 하나 남은 꿈이 바로 프로야구 선수였군요.
(고갤 끄덕이며) 그랬죠. 제 사업 파트너이자 오랜 친구가 야구를 무척 좋아했는데요. 그 친구가 제게 ‘너클볼’이란 구종을 알려줬어요. 그땐 심심풀이로 장난 삼아 던지곤 했죠.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한국 프로야구에서 유일하게 너클볼을 던졌던 장정석(넥센 매니저)씨를 만나 너클볼의 묘미에 빠졌어요. 그때 너클볼에 관한 논문이란 논문은 다 찾아 읽었어요. ‘아, 이거다’ 싶었죠. 나이 먹고도 너클볼을 던지면 꼭 한 번은 프로 마운드에 설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하지만, 당시 어깨 상태가 최악이었던 것으로 압니다.
맞아요. 그 이상이었죠. 고교 때 주말만 되면 친구들과 동네 야구를 했는데 한 번 던졌다 하면 투구수가 200개 이상이었어요. 그때 제 속구 구속이 시속 120km에서 130km 사이였어요. 무척 빨랐죠. 고교 야구부원들도 제 공을 잘 치지 못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어깨를 혹사하다가 큰 탈이 났죠.
고3 때 팔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어깨가 아팠어요. 하루는 아버지께 “도저히 팔이 아파 들 수가 없다”고 말씀 드렸더니 온탕에 가서 뜨거운 물로 어깨를 시프하라고 하시더군요. 아버지는 옛날에 야구하셨던 분이라, 뜨거운 물에 어깨를 담그면 좋지 않다는 걸 모르셨어요. (한숨을 내쉬며) 그날 이후 어깨가 완전 맛이 갔죠.
성인이 돼서도 어깨 상태는 그대로였습니까.
서울대 야구부에 입학했지만, 1학년 때부터 4학년 졸업할 때까지 한 경기에도 나가지 못했어요. 어깨가 아팠으니까요. 그러다 2006년 너클볼러가 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게임사를 팔고서 곧바로 어깨 수술을 받았어요. 너클볼이든 뭐든 공을 던지려면 고장난 어깨부터 수리해야 했으니까요.
어깨 수술은 팔꿈치 수술에 비해 예후가 좋지 않고, 재활할 때의 고통도 상당합니다.
어깨 수술을 받고서 한달 정도 깁스를 했어요. 그리고 반년 정도는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었죠. 불편했지만, 뭔가를 손에 쥐려면 뭔가를 손에서 놔야 하는 게 인생이니까요. 2007년 1월인가부터 본격적으로 공을 던지기 시작했어요.
‘프로야구 선수가 되자’고 마음 먹고서 어깨수술도 하고, 너클볼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 노력으로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가뜩이나 비선수 출신이기에 엘리트 선수들이 10년 넘게 흘린 땀을 단시간에 따라잡아야 하는 현실적 난제도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야구 안하고 사업에만 올인했으면 지금쯤 전 재벌이 됐을 겁니다(웃음). 진짜에요. 야구 시작하고 제 인생이 한순간에 바뀌었어요. 우선 친구들과의 만남을 끊었습니다. 지난해에도 시간 내서 사람 만난 게 딱 두 번뿐이에요. 정말 야구와 사업에만 올인하고 있어요. 제 일과는 고3 수험생의 시간표처럼 타이트하게 짜여져 있어요. 하루 4시간씩 기본 근력과 유연성 운동 그리고 투구 연습을 해요. 모든 웨이트 트레이닝은 프로선수들과 비교해 무게와 횟수만 조금 차이날뿐 다 똑같아요.
운동을 마치면 밤늦게까지 회사 일과 회의를 주재해요. 집에 돌아오면 완전 녹초가 되죠. 올해 미국에서 수많은 테스트를 보고 독립구단에서 뛸 때도 밤이면 호텔에서 화상 카메라를 통해 회사 일을 했어요. 아마 뉴욕에 있으면서 평균 3시간만 자고, 야구와 사업에만 몰두했을 겁니다.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 듯) 아, 그런데 제가 집에 와서 8년째 꼭 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집에서도 운동하십니까.
그렇게 운동하면 죽죠(웃음). ‘너클볼러’ 팀 웨이크필드의 투구 동영상을 꼭 보다 자요. 웨이크필드 경기 동영상은 전부 제게 있을 겁니다. 이젠 영상을 보면서 웨이크필드가 다음에 던질 공이 뭔지 다 알아맞출 정도에요. 하도 자주 봐서(웃음)
“이벤트 쇼라고? 50살까지 메이저리그 도전한다.” '너클볼러' 허민은 과연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을 수 있을까(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구단주님을 취재한 미국 기자가 묻더군요. “독립구단 데뷔전이 혹시 이벤트가 아니냐”고요.
저도 미국 기자분한테 그런 질문을 받았어요. “독립구단 데뷔전이 네 버킷리스트가 아니냐”고. 제가 뭐랬는지 아세요?
?
“장난해?”(웃음) 아마 한국 분들도 50%는 ‘저러다 말겠지’ ‘그만 하겠지’ 하실 거예요. 하지만, 데뷔전 치르고서 밤에 딱 2시간 잤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복기를 하고, 또하고 했거든요. 이게 중간에 그만둘 사람의 태도입니까(웃음)
락랜드의 시즌 일정이 끝났습니다. 다음해 5월까지 오프 시즌인데요. 다음해엔 락랜드에서 풀타임으로 뛰신다고 들었습니다. 다음 시즌 어떻게 준비하실 생각입니까.
12월까진 푹 쉬려고요. 메이저리그 선수들처럼 스트레칭에 열중하고, 그동안 뭉쳤던 근육을 풀 생각이에요. 그리고나서 내년 시즌 풀타임으로 뛸 수 있는 체력을 만들 계획이에요.
데뷔전 투구가 내년 시즌엔 어떤 교훈으로 작용할지 벌써부터 궁금합니다.
전 실패에 익숙한 사람이에요. 데뷔전에서 3이닝 5실점이면 완전 실패한 겁니다. 하지만, 전 제가 했던 수십 번의 실패 가운데 하나일뿐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제가 앞으로 10년 동안 선발투수로 뛴다면, 1년에 최소 20경기엔 등판할 것이고, 10년이면 200경기가 될 겁니다. 데뷔전 투구는 그 200경기 중 한 경기에 지나지 않아요. 절대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최종 목표는 역시 메이저리그 진출입니까.
사람들은 “이벤트다, 쇼다”할지 모르지만, 전 진지해요.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오르겠다는 다짐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메이저리그 공인구로 투구 연습을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전 끝까지, 될 때까지 도전할 겁니다.
지금까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오셨습니다. 이번에도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올인하실 생각이십니까.
박 기자님.
네.
불가능의 반대말이 뭔지 아십니까.
가능 아닙니까.
아니요. 불가능의 반대말은 가능이 아니라 도전입니다. 전 계속 도전할 뿐이에요.
언제까지 도전하실 계획입니까.
니크로 선생님이 47살에 현역에서 은퇴하셨어요. 최소한 그 나이 때까진 도전해보고, 만약 도전이 이뤄지면 니크로 선생님보다 3년은 더 던져야 하지 않나 싶어요. 네, 50살까지 도전해봐야죠. 이제 13년 남았네요.(웃음).
‘야구계의 워렌 버핏’, 허민
![]() |
기사입력 2013-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