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 본 창조론과 진화론 / 이 중 표 2
3. 緣起·無我(空)·業報
창조론과 진화론은 모순 대립하지만 인과율적으로는 같은 기반 위에 있다. 창조론과 진화론에 내재해 있는 인과율은 직선적 일방적 인과율이다. 직선적 일방적 인과율은 원인에서 결과로의 방향이 한 방향이다. 즉 원인은 결과를 낳지만 결과는 원인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가 없다. 이를 도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A 벒 B 벒 C 벒 D 벒 ...
이러한 인과 페러다임에서는 제일 원인 A가 무엇인가를 놓고 대립하지 않을 수 없다. 창조론은 A를 창조주인 신이라고 주장하고 진화론은 물질, 또는 물질에서 최초로 발생한 생물이라고 주장한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은 양자가 이러한 직선적 단일방향 인과 페러다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붓다가 당시의 사상적 대립에 대하여 의미는 한 가지라고 이야기한 것은 바로 당시의 사상들이 직선적 일방적 인과론에 의지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이 대립하는 근본 이유는 이들의 기반인 직선적 인과율이 본질적으로 실체와 동일성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동일율과 모순율을 기본 원리로 하는 논리학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동일율은 A는 A이다는 형식의 명제로 표현되는 공리(公理)로서 A가 자라서 아무리 변해도 그 본질은 절대로 동일하므로 A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동일율은 모든 변화하는 것에서 불변하는 것을 인정하고, 복잡한 것의 통일을 인정하고, 유동(流動)하는 것에서 부동(不動)하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성립되는 원리로서, 본질의 자기동일성을 인정하는 원리이다.
모순율은 동일율의 반면을 말하는 원리로, A는 A 아닌 것이 아니다는 형식의 명제로 표현된다. 즉 동일한 사물에 대하여 동일한 사실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모순율이다.
직선적 인과율은 이러한 동일율과 모순율을 기본으로 하는 논리학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기동일성을 가진 실체라는 개념은 동일율에 의해 성립한 것이다. 그리고 직선적 인과율은 이러한 실체를 전제로 하여 실체들의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직선적 인과율에서는 제일 원인이 되는 근본실체를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은 이러한 동일율과 모순율에 근거하여 인과관계를 사유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인간 생명은 신의 창조라는 창조론과 자연적 진화라는 진화론의 명제는 먼저 인간 생명은 본질에 있어서 불변의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동일율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동일성을 지닌 인간 생명을 신이 만들었다면 자연적인 진화일 수 없고, 자연적인 진화라면 신의 창조일 수가 없다는 모순율에 의해 두 이론은 모순 대립을 피할 수 없다.
만약 동일율에 의해 불변의 자기동일성을 지닌 실체로서의 인간 생명이 실재한다면 우리는 모순율에 의해 창조론과 진화론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에 동일율을 인정할 수 없다면, 즉 불변의 자기 동일성을 지닌 실체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동일율에 근거하는 모순율 또한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아울러 동일율에 근거하고 있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주장도 무의미한 것이 된다.
붓다는 이러한 직선적 인과율을 비판하고 연기법(緣起法)이라는 새로운 인과율을 제시했다. 붓다는 인과관계를 직선적 일방적 관계로 보지 않고 상호관계로 본다. 이것과 저것은 상호의존관계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이것이 저것의 존재원인이 아니다. 따라서 연기론 의하면 근본 실체나 제일 원인은 없다. Sayutta-Nikya 12. 20.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연기인가? 비구들이여, 태어남을 인연으로 하여 늙어 죽는다는 법은 如來가 세상에 나타나든 나타나지 않든 그 界, 즉 法의 住性, 定性, 條件性은 常住한다. .... 여기에는 객관성과 필연성과 불변성과 조건성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연기라고 부른다.
이 경에서 이야기하는 住性은 상호인과의 법칙이 존재함을 의미하고, 定性은 그 법칙이 불변의 결정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며, 조건성은 그 법칙이 여러 조건들의 상호관계의 법칙임을 의미한다. 붓다는 이러한 상호인과 관계에 있는 사물을 法(dharma)이라고 부른다. 법은 관계에서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에 실체성이 없다. 즉 空이다. 물질도 법이고, 정신도 법이다. 이러한 法은 문법적으로 명사적이라기보다는 동사적이다. 붓다에 의하면 명사적 의미의 존재는 진리에 무지한 중생들이 허구적으로 조작하여 분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촛불은 기름이 연소하는 현상이지 실재하는 사물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름이 연소하는 현상을 볼 때 촛불이라는 존재가 기름을 태우면서 타고 있다고 착각한다. 붓다는 <잡아함 335경>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비구들이여, 보는 놈(眼)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사라질 때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보는 놈은 부실하게 생기며, 생기면 남음 없이 사라지나니 業報는 있으나 作者는 없다.
우리는 행위의 주체, 즉 작자가 행위를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의 주체를 자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붓다는 이러한 행위의 주체의 존재를 부정한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눈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인지하는 자아, 행위하는 자아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의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다. 따라서 행위하는 실체는 없고, 오직 행위를 통해 상호 영향을 받는 관계, 즉 업보만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연기설이라는 상호인과율에 의해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을 이원화된 실체로 보지 않고, 행위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관계로 이해한다.
이러한 붓다의 무아설은 자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것은 불변하는 실체(作者)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나 행위를 통해 변화해 가는 업보로서의 자아는 있다는 것이다. 즉 착한 사람(작자)이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착한 일(業)을 하면 착한 사람(報)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아설의 근본취지이다.
인간의 본질은 영혼도 정신도 물질도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인간의 본질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삶에 의해 스스로를 이룬다. 즉 인간의 본질은 업보이다. Majjhima-Nikya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모든 중생은 업의 소유자이며, 업의 상속자이며, 업에서 나온 것이며, 업의 친척이며, 업을 의지처로 한다.
행위의 주체를 자아로 보는 생각에서 우리는 세계를 주체와 객체로 나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대립한다. 주체는 객체가 될 수 없고, 객체는 주체가 될 수 없다. 주체는 행위를 통해 객체와 관계한다. 그러나 여전히 주체와 객체는 별개의 사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에서 행위를 통해 주체와 객체가 서로 영향을 주며 변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체적으로는 대사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외부의 사물이 내 몸으로 들어오고 나간다. 내 몸은 이렇게 외부의 물, 공기, 음식 등이 들고 나는 가운데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외부의 사물을 차단하면 몸은 간 곳이 없이 사라진다.
정신도 외부와의 접촉을 통해 변화하며 유지된다.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는 어떤 정신적 작용도 나타나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행위를 통해 나타나고 유지된다. 따라서 업보를 자아로 보는 세계관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서로 인연이 되어 존재한다. 주체가 없으면 객체가 없고, 객체가 없으면 주체도 없으며, 나아가 주체라고 할만한 것도 없고, 객체라고 할만한 것도 없다. 이와 같이 무아설에 의하면 주객의 분별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불교는 이러한 연기설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윤리의 토대를 제공한다. 모든 존재는 업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함께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의 자각은 우리에게 나와 남, 인간과 자연은 하나라는 自他不二의 의식을 갖게 한다. 즉 업보로서의 자아는 자신의 신체나 자신의 정신이라는 좁은 자아의 틀에서 벗어나 모든 존재로 확장된다. 이러한 자아의 확장은 남을 사랑하고 자연을 보호하는 삶을 가져다줄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삶을 모든 것을 내 몸으로 보는 同體慈悲의 실현으로 본다. 이것이 불교윤리의 핵심이다. 인간의 존엄은 이러한 윤리의 실천을 통해 그 업보로서 성립한다. 인간은 자비의 실현, 즉 윤리적 실천을 통해 존엄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지 본래부터 존엄한 존재는 아닌 것이다.
4. 시스템 이론과 새로운 진화론
불교의 연기설은 현대의 시스템 이론이나 진화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일맥상통한다. 프리쵸프 카프라(Frijof Capra)는 생명의 그물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짧게 요약한 시스템적 사고의 특성들은 모두 상호의존적인 것들이다. 여기에서 자연은 서로 연결된 관계들의 그물망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특정한 패턴을 대상으로 식별해 내는 것은 인간관찰자와 그의 앎(인식)의 과정에 달려 있다. 이러한 관계의 그물망은 그에 상응하는 개념과 모형들에 의해 기술된다. 그리고 그 중 어느 것도 다른 것에 비해 더 근본적이거나 궁극적이지 않다.
이러한 시스템적 사고와 불교의 연기설은 직선적 일방적 인과론을 탈피하여 인과를 상호의존적으로 본다는 공통의 기반을 갖는다. 그리고 사물보다는 관계를 중시하며 부분보다는 전체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카프라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궁극적으로 - 양자물리학이 입증해 주었듯이 - 부분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부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의 직물 속에 나타난 하나의 패턴일 뿐이다. 따라서 부분에서 전체로의 전환은 대상에서 관계로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 시스템적 관점에서 우리는 대상들 자체가 보다 큰 연결망 속에 묻혀있는 관계들의 연결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스템 사상가에게 있어서 이 관계는 일차적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시스템적 사고에 의하면 사물은 없고 관계만 있으며, 이 관계들의 그물망은 부분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붓다의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생각과 일치하며, 自他不二의 사상과 상통한다. 이러한 시스템 이론이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설명되지 않는 자연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과학적 사고와 종교적 사유가 대립하지 않고 상호 보충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직선적 일방적 인과론을 버리고 인과를 상호관계로 본다면 과학과 인문학은 결코 대립하지 않으며, 모든 모순대립은 종식될 수 있는 것이다. 진화론도 다윈의 생각과는 크게 다르게 이해되고 있다.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맹목적이고 우연한 돌연변이가 새로운 진화를 이끈다는 생각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지금까지의 진화에서 나타난 커다란 격차는 별개의 진화 계통을 통해 이미 갈고 닦아져 있던 정교한 구성요소들 간의 공생적(共生的) 합병에 의해 달성된 것이다. 새로운 생물형태가 등장할 때마다 매번 다시 진화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돌연변이로 생겨나서 자연 선택에 의해 유지되어 온 기존의 모듈modul(주로 박테리아로 밝혀진)들이 함께 협력하는 것이다. 이들이 연합하거나 합병하여 새로운 생물, 자연 선택에 의해 작용하고 작용 받는 전혀 새로운 복합체를 만들어낸다.
모든 생물은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여러 박테리아의 혼합물이며, 진화의 원리는 적자생존의 경쟁이 아니라 공생의 화합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또 생명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명은 화학 성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화학 물질들의 작용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다. 따라서 겁생명이란 무엇인가겂라는 질문은 언어적 모순이다. 문법에 맞게 대답하려면 명사, 즉 구체적인 사물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구상의 생명은 오히려 동사에 더욱 가깝다. 생명은 자신을 수선하고, 유지하며 다시 만들고 자신을 능가한다.
이렇게 생명을 동사적 의미의 자기생산적인 것으로 파악한 마굴리스는 생물이 자기생산의 과정에서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통해 생물은 지구에 생명을 부여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지구는 살아있다고 주장한다.
생물은 자기완결적이고 자율적인 개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생물과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정보를 교환하는 공동체이다. 숨쉴 때마다 우리는, 비록 느리기는 하지만 역시 호흡하는 생물권의 나머지 생물들과 연결된다. 생물권의 숨결은 매일 지구상의 밤인 쪽에서는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증가하고 낮인 쪽에서는 감소하는 것으로 표시된다. 일 년의 숨결은 계절의 변화로 나타난다. 북반구에서 광합성 활동이 활발해지면 남반구에서는 서서히 감소한다. 최대한의 생리학적 범위에서 보면 생명은 지구 표면 그 자체이다. 여러분의 몸이 세포들로 우글거리는 해골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지구는 단순히 생물들이 살고 있는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아니다.
모든 생명은 서로 인연이 되어 공존하는 가운데 진화하는 공동체로서 크게 보면 한 생명이라는 생물학적 관점은 과학이 인간의 윤리와는 무관한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생명이 한 생명이라면 우리는 모든 생명을 사랑해야 할 윤리적 의무를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5. 결어
필자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을 단순한 종교와 과학의 갈등으로 보지 않고, 자연과학의 발전에 의해 야기된 인간 존엄성의 파괴와 윤리적 위기에 대한 인문학적 대응으로 인식하고,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대립을 해소하고 윤리의 토대를 모색하려는 의도에서 불교의 연기론의 관점에서 창조론과 진화론을 살펴보았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생명의 출발점에 대한 상반된 주장이다. 우리가 사물의 시작과 끝을 논의하려면 시간적으로 시작과 끝을 지닌 사물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붓다가 깨달은 연기론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은 연기하면서 무상하게 변화하기 때문에 시간적 존속성을 지닌 사물은 없다. 모든 존재의 실상이 공하다면 존재의 시작과 끝을 논의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존재의 시작에 대한 논의로서 무의미한 사견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윤리의 토대를 제공하지 못한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기반은 직선적 인과율이다. 직선적 인과율은 실체와 동일성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고, 동일율과 모순율을 기본 원리로 하는 논리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교는 이러한 논리학이 근거로 하는 실체와 동일성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연기법이라고 하는 상호인과율을 주장한다. 상호인과율에서는 제일 원인이나 실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불교의 상호인과율에서는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을 이원적 실체로 보지 않고 영향을 주고 받는 상호인과관계로 이해한다. 즉 실체는 없고 관계만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업보(業報)는 이러한 상호인과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연기론적 세계 이해는 우리에게 윤리적 토대를 제공한다. 모든 것이 업보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면, 즉 나와 남, 인간과 자연이 분리될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남남에 대하여, 자연에 대하여 동체자비를 실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사이의 윤리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윤리, 즉 환경 윤리의 근거가 된다.
불교의 상호인과율은 현대의 시스템이론이나 생물학의 관점과 일치한다. 시스템 이론은 종전에 세계를 부분의 집합으로 생각했던 기계론적 세계관을 비판하고, 부분이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 나타난 하나의 패턴이라고 본다. 따라서 사물은 없고 관계만 있다는 것이다. 생물학에서는 진화를 직선적, 개별적으로 보지 않고, 공생적 합병으로 보며, 생명을 동사적 의미로 이해한다. 현대의 과학 이론과 불교는 인과율적 기반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사조는 과학과 종교,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결코 대립하지 않고 인간의 바른 삶을 밝히는 데 함께 공헌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며, 21세기는 그 가능성이 실현되는 시대가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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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나무마하반야바라밀다 !!!!!!!!!!!!! 좋은 공양 고맙고 고맙습니다.................._()_
_()_ 촛불은 기름이 연소하고 있는 과정이지 실체가 아닌 것처럼 지금 저는 실체가 없네요. 그렇다면 타고 있는 기름은.. 실체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