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병을 이겨내고 피워낸 축복의 꽃
임창원•김화자 가정
1. 아빠, 엄마 어딨어? 2. 통일교를 찾아가다 3. 직장에서 찾은 신앙 4. 은혜의 눈물을 흘리다 5. 만물보다 못한 인간 6. 7일 금식 7. 몰래 찍은 도장 8. 임지에서의 생활 9. 자녀를 앞세운 활동 10. 자녀들을 축복시키다 11. 천보가정을 위해 고향에 오다 12. 나의 결심
1. 아빠, 엄마 어딨어?
나(김화자)는 8남매 중 여섯 번째 셋째딸로 태어났다. 아들 셋, 딸 다섯인 형제자매가 많은 집이였다. 아버지의 성함은 김홍상, 어머니의 성함은 윤봉석이다. 부모님은 동네 궂은일을 다 할 정도로 성품이 좋으셨으며 집이 길가에 있어 지나가는 행인의 밥을 챙겨주거나 잠도 재워주셨으며, 동네 아기들이 아프면 거의 우리 아버지가 고쳐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의사 자격은 없지만 동네 의사를 자처하시면서 모든 이에게 봉사를 많이 하셨다. 아버지는 12가지 재주를 가지신 훌륭한 분이셨다. 성격도 곧고 못하시는 일이 없으셨다. 그런 믿음의 터 위에서 나는 자라났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많이 아팠다. 원래부터 몸이 약했기에 내가 세 살 때에 주위 사람 모두가 내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제대로 살 수 없는 팔자라면 일찍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버지는 추운 겨울날 윗목에 나를 밀어 놓았다. 식솔(食率)이 많아서 경제적, 의료적 생활이 힘든 상황에서 제 구실을 못하는 자식이 반가울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나절이 지나도 내가 죽지 않고 버둥거리며 숨이 붙어 있자 아버지께서는 다시 꽁꽁 언 내 몸을 아랫목에 묻어 살렸고, 그래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바둥거리다가 출생신고를 1년 늦게 하게 되었다.
기가 막히게도 나는 어린나이에 주마담(走馬痰)이란 희귀한 병으로 시달렸고, 또 부모님을 몹시 괴롭혔다. 그때 우리 집 재산은 나의 병원비로 많이 지출되었다. 주마담은 양성혈관암으로도 불리는데, 유독성 사혈(死血)이 전신의 혈관을 쫓아다니면서 일정한 장소가 없이 여기저기에 메추리알처럼 툭 삐져나오며 발병하였다가 또 갑자기 스르르 사라진다. 일종의 희귀병이며 현대의학으로도 치료가 힘든 병이다. 전생에 무슨 잘못이 있는지, 태어날 때부터 희귀병에 걸렸으니, 나는 참 사나운 팔자를 타고 났다. 부모님은 착하게 사셨는데, 왜 나는 그런 불행한 병을 안고 탄생했는지? 또 부모님도 고생을 하셔야 하는지? 하늘부모님의 오묘한 생명 탄생 신비를 알 수가 없다.
“세 살 때 사건을 또렷이 기억한다.”고 하면 안 믿겠지만, 나는 지금도 세 살 때의 기억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나는 수술을 받기 위해서 꽃 그림이 그려진 비닐 책상보가 깔린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다. 살아날 가망성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히 모르는 애매한 상태에서 큰 수술을 받기 위해서였다. 수술을 할 적에 수술대 위에서 울면서 “아빠, 엄마 어딨어?”라며 소리를 악악 질렀다. 그런 나를 안타깝게 보신 아버지께서 “너희 엄마 저기서 너를 지켜보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며 나를 위로해 주셨다. 수술하는 동안 끝까지 나를 지켜보고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틀림없이 엄마는 나를 차마 보지 못하시고, 병실 밖 모퉁이에서 한없이 울고 계셨을 것이다.
수술 후, 엄마가 누렇고 꺼칠꺼칠한 담요로 나를 둘러업고 집으로 돌아갈 때, 나는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엄마 왜 울어?”라고 물었다. 엄마는 응답이 없었다. 억장(億丈)이나 되는 큰 아픔이 엄마의 가슴을 가득 채웠을 것이며, 그래서 어머니의 할 말을 삼켰을 것이다. 같이 걸으시던 아버지의 눈에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만큼 그 사건이 내게는 큰 충격적이었기에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을 한다. 어린 나이에 주마담이란 병으로 일곱 군데나 수술을 하여서 그런지, 아니면 그 때의 후유증 탓인지, 칠십이 다 되어가는 지금껏 아프지 않은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시름시름 아프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용케도 축복의 꽃을 피웠다. 나와 부모님의 아픔과 눈물과 고통을 자양분(滋養分)으로 하여서 축복가정이라는 꽃을 피워내게 되었다.
이처럼 나와 부모님과의 인연은 병치레와 아픔과 눈물이 주된 것이었다. 남들은 건강하게 태어나서 축복을 받으면서 사는데, 나는 그와 반대의 팔자를 타고났다. 무슨 전생의 업보인지 알 수가 없다. 아직도 빌빌거리며 살고 있으면서도 축복가정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주 쓰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내게는 “세살 병치레 여든까지 간다.”는 것으로 바꾸어야 할 형편이다. 그리고 “짧고 굵게 살라.”는 명언이 내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빌빌거리면 오래 사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이 또한 나의 운명인가? 아마도 내가 어릴 적부터, 아니 태어날 때부터 하늘은 나를 축복가정으로 찾아 세우기 위해 나에게 모진 시련을 주셨다. 그리고 하늘이 선택하신 자로서의 삶을 살도록 안배를 해주셨다.
2. 통일교회를 찾아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도 계속 몸이 아파 동네사람들 사이에서는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였다. 의사가 왔다갔지만 계속 병이 낫지 않고 차도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엄마는 무속인을 찾아가 물어보았다. “딸이 타고난 운세가 엄마와 맞지 않아서 몸이 아프니까 집을 떠나게 하고 수양어머니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말을 들으셨다. 그 이후로 엄마는 내게 “빨리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마침 충주 봉방동에 있는 직업학교에서 봉재공과를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봉재공과에 들어갔다. 엄마의 말을 실천했다. 뭔지 모를 아픔과 설움이 내 가슴에 고여 있었고, 그것을 이기기 위해 6개월 동안 열심히 배웠다. 1등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양재학원에 들어가 8개월 동안 공부를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이 공부하는 여성이 통일교회를 욕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나는 그 여성의 이야기를 들으며 “너는 통일교회에 가보았어?”라고 물어보니 그 여성은 “나는 통일교회 앞집에 살고 있지만 가 본적이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가보지도 않고 왜 욕을 하느냐? 내가 통일교회에 직접 가서 보고, 나쁜 교회인지 좋은 교회인지를 알려주겠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내 스스로 통일교회를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그때 김희주 목사님이 계셨을 때였다. 목사님은 나를 너무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그러나 나는 아직 교회에 다닐 생각이 없었다. 단지 통일교회가 나쁘지는 않고 좋은 교회라는 이미지만 마음에 새기고 돌아 왔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 친구에게 “통일교회를 다녀와서 알려줄게.”라고 말을 하였는지 알 수 없다. 신기할 뿐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나의 생각이 아닌 나를 이끌어주는 배후가 있어 그렇게 당당하게 이야기 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쌍한 나를 구원해 주시려는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 그리고 조상들의 협조와 역사(役事)가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3. 직장에서 찾은 신앙
그러는 와중에 나는 양장점(洋裝店)에 취업을 하게 되었고, 그곳이 공교롭게도 통일교인의 집이였다. 나는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도 주인이 통일교인 것을 몰랐다. 그 분은 양장점에 찾아오는 손님에게 옷을 많이 팔려는 욕심보다는 워싱턴 모뉴먼트 대회나 여의도 대회 등을 이야기하는데 집중하였다. 돈을 버는 것보다도 새 소식을 전하기에 몰두해 있었다. 그 당시 한국사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얘기,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을 나는 듣게 되었다.
나는 한국 사람이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에서 그런 어마어마한 대회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부흥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왠지 마음이 이끌렸다. “왜 나에게는 통일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나요?”라고 묻자 주인은 “넌 너의 주관이 뚜렷하여 내가 이야기해도 참석하지 않을 것 같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번에는 부흥회에 참석하고 싶다.”는 의견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통일교회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통일교인의 집에서 양장 일을 하면서 통일교회의 세계적인 활동 상황을 듣게 된 것, 이것이 어찌 단순한 일이겠는가? 하늘의 큰 은혜와 인도하심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의 희귀병 주마담(走馬痰), 집을 떠나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운명, 통일교인의 집에서 일하게 되며 참부모님의 엄청난 구원사역을 듣게 된 것, 이런 것들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나와 우리 가족을 살리려는 오묘한 하늘의 은혜였고 자비였고 배려였다. 나의 지긋한 병으로 인하여 내가 먼저 축복가정이 되었고, 가족들도 축복가정으로 인도할 수 있게 되었다.
4. 은혜의 눈물을 흘리다
1975년, 국제기동단이 온 때였다. 부흥회가 시작되어 준비찬송 성가 11장, 6장, 13장, 21장을 부르는데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펑펑 흘렀다. “난 왜 이제 이곳에 왔을까?” “나도 진작 들어왔어야 했는데, 나는 언제 선지선열처럼 일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며 “난 여기를 꼭 다닐거야!” 하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이 발생한 것은 나의 마음이 아니라 어떤 보이지 않는 하늘의 힘, 조상과 선령들의 역사에 의한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부흥회가 열리는 3일 동안에 나는 부흥회의 시간을 기다렸다. 생명나무와 타락론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은혜로운 시간 속에 7일 수련을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인류사회 질서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성 문화이다. 성적 타락의 원인과 결과, 앞으로의 대안, 등 이런 내용들은 나를 사로잡았다.
5. 만물보다 못한 인간
부흥회가 끝나고 바로 청주교구에서 열린 7일 수련회에 참여하였다. 그곳에는 축복을 받기 위해 젊은 남녀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밥상이 없어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그릇을 올려놓고, 빙 둘러 앉아 김치와 된장찌개, 그리고 쌀이 반쯤 섞인 보리밥을 먹었다. 조선시대 문화에 의하면 밥상을 준비하지 않고 바닥에 먹는 것은 머슴이나 하인의 식사 방법이었다. 그런 방법으로 우리들은 모여서 식탁을 대했다. 그런데 밥상의 형식은 초라했지만, 음식 맛은 최상이었다.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중생 부활한 황홀한 기분으로 식사를 하니까 모든 것이 천국 맛이었다.
나는 평소에 비위가 약해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소리를 듣거나 냄새를 맡으면 구토가 나오는 성향을 가졌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러한 초라한 식탁에서 전혀 신체의 거부 반응이 없었다. 신기하여 내가 놀랄 지경이었다. 어떤 중학생이 남이 먹다 흘린 음식을 주워 먹는 장면을 우연히 보았다. 평소 같으면 내가 곧 구역질을 할 상황이지만, 전혀 그렇지를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저 사람은 남이 흘린 음식을 주워 먹는지 이해가 안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원리를 들으면서 그 이유를 깨달았다. 강의를 듣다 보니 “만물보다 못한 인간의 입장으로 떨어진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만물을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강의를 들었다. 감동을 넘어서 충격을 받았다. 나도 그 다음부터는 남이 떨어뜨린 음식을 남들보다 먼저 주워 먹었다. 구역질은 커녕 더 맛이 있었고, 희열을 느꼈다. 우리 식구들의 식사는 초대기독교인들의 식사보다도 당연히 더 좋았다.
성서 사도행전 2:43-47을 보면,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이 식사를 하면서 모두가 만족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박해 상황에서 몰래 숨어서 신도들끼리 나누는 빵 맛은 너무나 맛있었다.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식사를 나누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 그런 분위기는 자연히 신도들을 단합시켰고, 필설로 표현하기 힘든 박해와 고난 상황을 이겨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 모습이 통일교회에서 재연되었다. 통일교회 목사님은 잘 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열정적인 강의를 하셨다. 에너지가 소모되어서 탈진할 경지로 보였다. 목숨을 걸고 강의를 하셨다. 특히 섭리적 동시성 시대에서 서양사와 한국사를 비교를 할 때에는 너무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을 듣고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노래도 많이 불렀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광야를 달리는 사나이’ 노랫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많은 강좌 중에서 특히 타락론과 부활론, 재림론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서서히 말씀이 내 마음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말씀이 나를 끌어당기면서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도록 인도하였다. 말씀의 신비한 힘을 실감하였다.
6. 7일 금식
7일 수련이 끝나고 심정이 하늘에 닿아 곧바로 7일 금식을 실시하였다. 평소에는 전혀 생각도 못한 금식을 하게 되었다.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달라고 외치는 육신과 내 믿음과 신념과의 치열한 영적 싸움이 있게 되었다. 예민해진 후각이 음식이 있는 곳을 알려주지만, 나는 끄떡도 안 했다. 내 육신의 욕망을 콱 눌렀다. 배는 고프지만, 승리자로서의 쾌감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금식 6일째 되는 날이 어머니 생신이었다. 어머니의 생신에 참석하여 금식을 계속하고 있자 가족들이 마구 나무랐다. “음식도 먹지 않을 거면서 왜 왔냐? 음식을 먹고 힘을 내어서 열심히 잘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느냐? 통일교회는 다른 교회가 안 하는 것을 시키는구만, 그래서 이단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냐?” 등의 말로 핀잔을 하였다. 나는 그저 미소로 답했다. 말을 하면 더 오해가 생길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금식 중에도 전혀 힘들지 않고 힘이 펄펄 났다. 매일 교회를 나가고, 성지에 오르며, 굳건히 7일 금식을 은혜롭게 마쳤다. 내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교회 식구들의 기도 정성과 조상들과 선영들의 도움 덕분에 승리하였다. 금식 중에 가장 먹고 싶은 것은 김치였다. 시큼한 김치 맛 냄새가 향긋한 냄새로 변화하여서 내 코를 유난히 자극했다. 입 안에는 군침이 돌기도 했고, 그러면 이에 맞장구를 치듯이 배 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음식을 들여보내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나는 반석처럼 일제 동요하지 않았다.
금식을 통해 새삼 음식의 고마움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교회에서는 금식 마지막 날 밤 12시에 목사님께서 기도를 해주시고, 배, 요구르트, 두부, 죽을 끓여주셨다. 식구들과 함께 기도를 하며 만물에 대한 감사함과 교인들의 따듯한 마음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7일 금식을 하는 도중 어떤 사람이 아버님 꿈을 꾸었다고 이야기 하는데 나는 한 번도 아버님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 나는 하늘이 선택한 사람이 아닌가 보다. 교회를 다니지 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역시 철부지 신앙이었다. 7일 금식을 한 만큼 좀 더 성숙해져야 하는데, 제 자리 걸음을 걷고 있었다. 그러자 마음의 중심이 흔들렸고, 교회에서 은혜를 느끼기가 힘들었다. 마음의 문을 닫았으니까 당연히 천상(天上)으로부터 내리는 은혜와 감동이 생길 리가 없었다. 7일 동안 굶주린 상태에서는 은혜가 넘쳤는데, 배불리 먹고 교회로 갔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뜨거움을 못 느꼈다.
그러자 이런 내 모습이 측은했는지, 3개월이 지난 후 꿈을 꾸게 되었다. 1975년 여의도 구국세계대회 집회 때 나누어 주셨던 참아버님 얼굴이 새겨진 양철 뺏지의 모습 그대로 나타나신 참아버님을 뵈었다. 그런데 누가 돌로 얼굴을 때렸는지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참아버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나를 반갑게 쳐다보셨다. 나에게 벌떡 일어서라고 격려하시는 것 같았다. 3일 동안이나 동일한 꿈을 꾸게 되었다. 신기하였다. 그러자 마음이 열리고 “나도 하늘이 선택하셨구나.”는 생각이 들었고, 열심히 교회를 다녀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참아버님의 이마에 돌을 던진 사람이 바로 불신과 무지 상태에서 배신의 생각을 가졌던 나 자신인 것 같다. 내 무지와 불신과 배신의 생각이 참아버님의 존안(尊顔)에 피를 흘리시게 한 것이다. 생각할 때마다 송구스럽고 창피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개인마다 복잡한 사연을 가진 많은 통일교회 식구들에게 일일이 찾으시고 위로를 해 주시기 위해 참아버님은 얼마나 힘드실까?”는 생각을 해 보았다. 당신의 일을 하시기에도 벅차셨을 것인데, 나와 같은 자녀를 찾아오시느라 이중 삼중의 고통을 당하시는 참부모님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 꿈을 통한 계시가 없었다면, 나는 7일 금식을 잘 끝내놓고서 오히려 통일교회를 벗어날 뻔 했다. 선배들께서 자주 은혜를 받기 전후에는 반드시 시험이 닥치게 된다는 증언을 했는데, 그것을 실감했다.
그때는 통일교인의 통(統)자만 들어도 너무 반갑고 좋았으며, 목사님이 매일 보고 싶고, 교회에 매일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날마다 새벽기도와 성지기도를 빠지지 않고 다녔다. 하루라도 교회에 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일요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금요일 예배, 심방까지 모든 곳을 따라 다녔다. 내 정신으로 산 것이 아니라 하늘이 이끄시는 대로 살았다. 기독교인은 성령에 취하여 산다고 하지만, 나는 참사랑의 향기와 뜨거운 심정과 신선한 새 진리에 취하여 이끌려서 살았다. 김명대 목사님이 계실 때였다.
7. 몰래 찍은 도장
축복을 받기 위해서 부모님의 도장이 필요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 것을 싫어하시는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지 않았다. 불필요한 오해나 하늘 앞에 불경스런 말씀을 듣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께서 일을 하러 나가신 사이에 도장을 몰래 꺼내 서류에 찍고서 배필을 짝지워 주시는 약혼에 참여하게 되었다. 구리 중앙연수원에서 참아버님께서 나이별로 줄을 세어 놓으시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하셨다.
50명 정도의 사람이 남녀 한 줄씩 서 있었는데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고 “저 사람만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 순간, 아버님께서 벼락같이 “너!”라고 하시며 매칭을 시켜주셨다. 축복가정 부부 중에는 원수끼리 만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내가 그 범주에 들어갈 줄은 생각도 못하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 사람과 축복가정을 이루고 싶지 않아 그냥 도망을 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그 남자(남편)가 갑자기 아버님께 냅다 절을 하는 바람에 나도 그를 따라 그냥 엉겁결에 함께 경배를 드리고 나오게 되었다. 성도 모르고 직업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참아버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약혼식에 참여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도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단다. 그래서 약혼식장에 가기 전에 어떤 도사(道士)에게 가서 문의를 했다. 그 도사는 “올해 결혼할 운이니까 꼭 결혼을 하세요.”라고 했다. 남편은 “지금 사귀는 여자도 없는데 무슨 결혼을 하해요?”라며 그 도사와 다투고 나왔다. 그런 후, 교회에서 약혼과 축복 소식이 전달되어서 갑자기 7일 금식을 하고 약혼식에 참석하였다. 그래서 아직 건강이 온전히 회복이 안 된 핼쓱한 얼굴로 나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약혼식 때 참부모님께서는 서로 인연이 되는 사람들 머리 위로 조상들의 빛이 이어진다고 이야기 해주셨다. 그 만큼 참부모님은 영계를 아신 것이다. 나와 남편의 만남도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조상님의 협조가 있었을 것이다.
8. 임지에서의 생활
약혼을 한 후 전라북도 진안으로 5명이 임지 배정을 받아 모이게 되었다. 박정선 목사님이 시무하고 계셨으며 A타입 교회라 방도 작고 사택도 작았다. 여럿이 같이 산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신앙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곳에는 제1회 유치원생들이 모집이 되어 유치원이 운영되고 있었다. 우리 대원들은 유치원도 운영하고, 노인학교도 모집해서 120명의 노인 회원을 모집했다. 목사님이 교장을 맡고 내가 실무담당자였다. 무경험 상태에서 온갖 일을 치르느라 날마다 분주했다. 믿음과 사명감으로 닥치는대로 업무를 처리하였다. 내 젊은 열정을 아낌없이 쏟았다.
노인회장과 총무를 세워 열심히 했다. 노인 학생 중 집에 총각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월간 <통일세계> 한권을 전해주었다. 그 총각이 그 통일세계를 읽고 전도가 되어 열심히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그때의 인연으로 그가 6000가정 축복을 받고 지금도 열심히 활동을 하며 천보에 입적을 하고 자녀들도 모두 축복을 받게 되었다. 든든한 믿음의 자녀가 이룬 행복한 축복가정을 보면서 감사와 흐뭇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진안에서 정말 열심히 하여 18명의 사람들을 전도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자는 몇 명 되지 않아 너무 아쉽다. 좀 더 정성을 들였다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도 있다. 어쨌든 나는 최선을 다했다.
승공강의를 하루에 3군데씩 30군데 강의를 하였다. 처음에는 협회에서 준 강의 초안대로 읽기에 바빴지만 3번의 강의를 하고 나니까 내 머릿속에 강의초안이 모두 입력되었다. 자연스럽게 더 이상 강의 초안을 보지 않고도 그 동네 분위기에 맞는 적절한 말이 턱턱 나왔다. 역시 하늘이 함께 해주심을 느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강의가 있었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500명의 예비군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승공강의를 한 것이다. 25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나의 강의를 듣고 숙연해지는 예비군들의 모습을 보며 하늘의 역사가 함께 함을 느끼게 되었다.
김현희의 칼(KAL) 비행기 폭파사건이 있었던 때였기에 승공강의는 더욱 사람들의 마음속에 와 닿았고 감동을 주었다. 귀한 강의가 되었다는 평가와 칭찬을 받았다. 그때 강의 진행을 위해 경찰 서장의 공문(公文)이 각 이장에게 전달되어 이장이 마을 주민들을 모아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관공서의 협조는 정말로 고마웠다. 속히 세상을 복귀하기 위해서 관공서와의 긴밀한 협조체계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실제로 앞으로도 조속한 천일국 안착을 위해서 정부와 관공서와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가 갖는 행정(行政) 기반(基盤)을 최대한 활용하여야 효과가 상승할 것이다.
하루 3번의 강의로 인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을 알리기 위해 직접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 일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내 체질에 딱 맞았다. 농번기여서 사람들이 모이지 못할 때면 마을 회관의 마이크를 통해 승공강의를 토해내기도 하고, 모를 심는 주민들에게 울면서 “이 나라가 공산화 되면 모심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소리치며 강의를 한 적도 있다.
승공강의가 끝난 후 교회로 돌아가는 길에 목사님의 차가 고장이 나서 모든 대원이 새벽 한시까지 자동차를 밀며 교회로 돌아 온 적도 있었다. 나는 성가 19장의 말씀처럼 ‘하늘의 용사’가 되어 참부모님께서 찾아 세우신 성약의 진리를 외치면서 용진(勇進)하였다. 새벽기도를 하기 전, 다른 사람이 나보다 먼저 냉수목욕을 할까봐 후다닥 남들보다 더 빨리 일어나서 새벽 3시에 정성을 드리며 냉수 목욕을 하기도 하였다. 달콤하고 곤한 잠을 떨치고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았고, 갑자기 차가운 냉수를 몸에 끼얹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지나고 나면 심령의 깊은 곳에서 희열이 솟아올랐다. 피와 땀과 눈물이 요구되는 정성의 결실로써 지극한 기쁨이 주어지는 것을 체험했다.
한번은 기성교회 부흥회에 참석하였다. 부흥회 도중 참아버님을 욕하는 목사가 있었다. 그는 임지활동에 참여한 우리 5명의 대원 전도사들을 보며 자신이 비판한 것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다면 부흥회 끝난 후 사무실로 찾아오라고 하였다. 그의 말 대로 부흥회가 끝나고 우리가 사무실로 찾아가자 우리와 대화를 나누던 그 목사는 “통일교 전도사들 같은 교인이 우리 교회에 3명만 있으면 우리 교회는 크게 발전할 것이다.”며 아쉬워한 적도 있었다. 그 때는 통일교인 통자도 내놓기가 겁났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대원들은 하나같이 가슴 속에 뜨거운 불길을 품은 젊은 성화(成和) 용사(勇士)였기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임지생활은 많이 바쁘고 힘들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때의 생활이며,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열정적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준 그 시간이 있어 지금의 내가 계속 신앙인으로 남아지게 된 것 같다. 지도자는 그를 따르는 자들을 때로는 고통과 시련 속으로 던져 넣어야 한다. 제자들을 그저 편안하게 살게만 하면 안 된다. 참부모님은 우리들이 의미있게 살게 하시기 위해 임지 동원이라는 고통으로 몰아내셨다. 죄악 역사를 탕감하는 제물로 삼으셨다. 나는 참부모님의 지시대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지나고 보니까 힘들었지만 그 때의 기간이 내 생애에서 큰 의의를 남기게 되었다. “훌륭한 스승을 만난 제자는 덩달아 훌륭한 생애를 살게 된다.”는 교훈이 딱 들어맞았다. 참부모님을 만나서 축복을 받은 것이 내 생애 최고의 기쁨이고 영광이다. 축복은 내게 힘, 희망, 행복의 원천이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통일교회와 인연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희귀병의 고통에 짓눌려서 낙오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당연히 부모님도 눈물과 고통으로 얼룩진 삶을 사셨을 것이다.
“부모님의 명령을 받고 자기 위치를 떠나는 자는 낙제자가 된다. 하늘은 우리 자신이 감당 못 할 만큼 큰 책임을 추궁하고 계시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부족함을 느끼고 크신 힘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뜻길>,118쪽)
참생명과 참사랑의 근원이 되시는 이 말씀을 따라서 앞으로도 내게 주어진 사명을 외면하지 않고, 큰 실적을 만들어서 봉헌하기 위해 전력투구할 것이다. 몸이 아프고 불편한 것을 오히려 감사하고 극복해 나갈 것이다. 승리하는 성화 용사가 될 것이다.
9. 자녀를 앞세운 활동
임지가 끝난 후 결혼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나는 참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 위해 많이 노력하였다. 그러나 참부모님의 말씀을 따라 복종하며 살다보니 나에게 귀한 자녀도 생기게 되고 이 자녀들로 인해 하늘을 더욱 붙들게 되었다. 내 자녀는 내 자녀이기 이전에 하늘의 귀한 자녀라고 생각하며 정성을 들이며 양육하였다. 자녀가 없었다면 결혼생활에 여러 번의 위기가 왔었을 것이지만 자녀를 위해 살다보니 참부모님이 맺어준 인연이 진짜 인연이란 것을 몸소 느끼게 되었다. 160가정을 완성하기 위해 많은 활동을 하였다. 경로당을 방문하거나 밤 12시에 잠자는 집에 찾아갈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러던 중 철학관으로 활동을 나갔는데 철학관에 계시던 사람이 “당신은 참으로 훌륭한 스승님을 모시고 계시는군요.”라고 참부모님을 증거하는 일도 있었다. 360호 가정교회를 하라고 하실 때에는 어린 딸을 데리고 다니며 활동을 하였다. 어린아이를 앞세우고 남의 집에 가는 것은 혼자 가는 것보다 쉬웠으나 때로는 가기가 두렵고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래도 어린 아이가 들어가면 모두 좋아하며 꽁꽁 닫힌 사람들의 마음도 열리기 시작했다. 심령이 맑은 아이들을 대하는 어른들은 모두가 본심을 회복하게 되는가 보다.
어떤 때는 참부모님 집회 때 사람들을 인솔하여 행사에 간 적도 있다. 잠 한숨 자지 않고, 밥, 국, 반찬을 집에서 준비해서 사람들에게 대접하였다. 잠을 자지 못해 힘들었지만 참부모님 집회에 다녀온 사람들이 잘 먹고 말씀에 감동을 받았다고 말할 때면 힘들었던 기억이 모두 사라지고 보람을 느꼈다. 참아버님 살아계실 땐 사람들을 인솔하여 집회에 자주 참여했다. 그땐 힘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던 그때가 좋았던 것 같다.
나는 참부모님의 뜻길에 동참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아직 그 흔한 제주도 구경도 못 가봤다. 참부모님께서 부르시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지만 나를 위한 일에는 늘 소극적이었다. 만학도로서 2005년도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했다. 낮에 일하고, 야간에 학교를 다니며 합격하였다. 주경야독을 실제로 살았다. 쉽지 않았다.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이해를 못할 것이다. 딸이 나보고 대학교에 가서 계속 공부를 하라고 하는 것을 뿌리쳤다. “대학 다닐 돈으로 활동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며 대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잘 선택했던 것 같다. 대학 진학도 중요하지만 그 덕택에 천보가정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아 감사한다.
참아버님은 “가정교회를 하면 먹고 살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을 때, 나는 그 말씀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말씀은 사실이었다. 지금도 45년 넘게 뜻길을 따라가며 꾸준히 활동한 집에는 언제나 나에게 따듯한 밥이나 채소 또는 과일을 보내주었다. 그들이 나에게 베풀어 주는 것을 보고 360호 가정교회만 잘하면 먹고 살 수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지금도 사람들을 모집하던 그 때가 그립다.
10. 자녀들을 축복시키다
아버님의 말씀을 따라가며 내가 가장 잘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2세 아이들을 낳고 길러서 둘 다 축복을 받게 한 것이다. 바깥 세상으로 흘러가지 않고 참부모님의 말씀에 따라 2세 축복을 모두 받게 된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보람이다. 그러기 위해서 청평역사에 참여하여 아이들 축복을 위해 정성을 많이 드렸다. 조상해원과 조상축복을 하며 사랑나무에서 눈물을 흘리며 열심히 기도하였다.
때로는 아이들이 반항도 했지만 “너희는 축복가정 2세이니 만큼 다른 마음을 먹으면 안 된다. 여자를 돌같이 보라.”고 강조하며 교육을 한 내 말을 지켰다. 다행이었다. 아들은 “난 엄마가 짝을 맞춰주지 않으면 절대로 여자를 만날 수 없다.”고 이야기 한 적도 있었다.
11. 천보가정을 위해 고향에 오다
경주에서 40년 넘게 생활을 하던 도중 계속 내 마음속 한 켠에 남아 있던 것은 “종족복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어느 날 강력히 그 생각을 따라서 그동안의 인연과 활동을 끊어버리고 내가 입교한 교회인 충주교회로 교적을 옮기게 되었다. 그동안 살았던 곳을 떠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결정을 하고 일을 추진하면서 하늘이 함께 하심을 느꼈다.
그동안 430가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였다. 마감 며칠을 앞두고 돌도 지나지 않은 손자와 딸과 충주 식구들과 함께 공동 활동을 하여서 천보에 입적하기 위해 열심히 서류를 작성하였다. 갑작스레 천보에 입적하게 된 것도 보이지 않은 배후에 조상과 선영들의 협조가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천보 입적은 3대가 함께 했기에 이룰 수 있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그 짧은 시간 안에 천보에 입적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참부모님이 함께 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배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
천보에 입적을 하고 나니까 모든 골치 아팠던 일들이 하나하나 풀리게 되었다. “참어머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며 시대에 맞게 따라가면 어머님의 운세가 우리에게도 온다.”고 하셨는데 정말로 그런 운세를 체험했다. 계속 팔리지 않던 집도 일사천리로 팔렸고, 열흘만에 짐정리를 하고 충주로 이사오게 되었다. 참어머님의 섭리에 따라 행하면 복도 따라온다고 하셨던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우리의 길은 그때 그때, 시대 시대에 맞게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러므로 비록 감당하기가 어렵더라도 실천할 때에는 꼭 참부모님의 운세가 함께 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왕 할 것이라면 남들보다 먼저해야 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자기 중심한 생각과 판단으로 안 된다고 겁을 먹지 말고 적극적으로 실천할 때 하늘은 역사하신다.
12. 나의 결심
지금은 2027을 향해 전력투구한다. 그 때까지 신충청국을 복귀하기 위하여 70명의 강사교육을 하는데, 나는 앞장서서 참석하여 열심히 교육하고 또 교육을 받고 있다. 앞으로 750만 노인들을 사랑하고, 43가정 실세화를 이루고, 신충청국 식구들이 전부 430가정을 완수하여 천보에 입적하게 하기 위하여 강사로 열심히 뛸 생각이다.
신통일한국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앞장서서 일할 것이며, 2027년까지 60개월 특별전도 기간으로서 효정의 마음을 가지고 휴먼식구들을 찾고 43가정 실세화를 실천하기 위해 매진할 것이다.
많이 모자란 점이 많지만, 그래도 참부모님께 충성하는 효정의 마음으로 6000가정 연합자서전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부족한 글을 쓰게 되었다. 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신앙길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참부모님, 참어머님 만수무강 하시옵소서!
첫댓글 정혁순님 댓글
김화자님의 자서전, 은혜롭게 잘 읽었습니다. 감동이 쓰나미처럼 밀려옵니다. 누구신지 잘 모르지만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정말 훌륭하십니다. 앞으로도 쭉 하늘부모님 참부모님 모시고 승승장구 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이숙희님 댓글
김화자씨의 자서전을 읽으며
우리의 인연과 삶은
우연이 아님을
다시한번
느낍니다
자서전을 썼다는
자체만이라도
하늘앞에 부끄럼 없는 삶이었고
천보가정으로서
실세화를
승리하기위한
모습 또한
응원합니다
김경옥님 댓글
마음속에서부터 뜨거운 불덩이가 솟아오르는듯합니다.
귀한 자서전 잘읽었습니다. 감동과 더불어 승리하신 천보가정의 삶이시네요. 자손만대 번창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김화자님 답글
부족해서 취소한 한글을 올려주셨네요 너무 부끄럽습니다
이태웅님 댓글
감명깊게잘보았읍니다
(굿)(굿)(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