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밤에 핀 수선화
서동철은 당수 5단의 승단증을 받아가지고 청도관을 나섰다. 그의 뒤
를 균형 잡힌 몸에서 탄력이 넘치는 두 사내가 따르고 있었다.
"부장님, 안녕하세요?"
문 앞에 서 있던 한 여자가 서동철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까딱했다.
"......누구신지......?"
서동철이 뜻밖의 여자를 의아하게 그러나 거만스러운 눈길로 빠르게
훑었다.
건물을 드나드는 남자들의 눈길이 모두 여자에게 쏠리고 있었다. 금
녀의 집처럼 되어 있는 당수도장 본부에 여자가 나타난 것도 이색적인
데다, 그 여자는 남자들의 눈길을 한눈에 끌만큼 예쁘고도 멋쟁이였다.
"어머 , 서운해라. 저 모르시겠어요?"
여자가 방싯 웃으며 큰 눈을 살짝 흘겼다.
"글쎄요......, 이게......"
서동철은 눈에 많이 익고, 알 듯 말 듯한 여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기
웃거렸다. 어느 술집 여급인가, 어느 요정 아가씬가 그러나 그동안 하
룻밤 잠자리를 같이한 여자들이 숱한데 그중에서 어떤 한 여자의 얼굴
을 기억해 내기란 쉽지 않았다.
"저 남미미예요, 영화배우."
서동철은 비로소 여자를 알아보았다.
"무슨 일이오, 이런 데까지."
금방 태도가 싸늘해진 서동철의 말은 무뚝뚝하기 그지없었다.
"부장님한테 빚 받으러 왔어요. 4년 묵은 빛이요. 돈이 아니니까 염려
하지 마시고 커피 한잔할 시간만 내주세요."
여자가 야할 만큼 매력적인 웃음을 지었고,
"이거 허튼 수작하지 말어."
서동철이 고약한 눈길로 내쏘았다.
서동철 옆에 선 두 사내는 가늘게 휘파람을 불며 한쪽 다리를 까딱거
리기도 하고, 먼 데를 보는 척하며 여자를 힐끔거리기도 하면서 비죽비
죽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듣던 대로 아주 거만하시군요 4년 전, 아니 벌써 5년 됐나? 강원도
로 갔던 일 설마 안 잊었겠지요? 그 일 때문에 제게 빚진 게 있어요."
"뭐요? 그게 무슨 소리요?"
강원도의 세월은 서동철의 뼛속 깊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요즈음도
꽤나 자주 그때의 꿈을 꾸고 있었다. 그때의 고생도 고생이었지만 그 일
로 집안이 엉망이 된 것은 견딜 수 없는 아픔이고 울분이었다.
"그러니까 커피 한잔 사달라는 거예요."
서동철의 흔들린 마음을 간파한 여자가 자신 있게 말했다.
"좋시다. "
서동철이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큰길에는 차가 겹겹이 밀려 있었다. 날마다 벌어지는 데모 때문이었
다. 저쪽 화신백화점 앞에서는 함성이 터져오르고 있었고, 뭉게구름 같
은 연기도 피어오르고 있었다. 경찰들이 쏘아대는 최루탄이었다.
서동철은 이제 데모라면 정나미가 떨어졌다. 4 .19때 당해서 이제는
데모대 가까이 가는 것도 싫었다. 만약 다시 그때처럼 나서라고 한다면
미리 피해버릴 작정까지 하고 있었다. 그때 경험으로 얻은 것은 권력이
라는 것이 그렇게도 허망하게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과, 뜻을 합친 사람
들의 힘이 그렇게도 무서울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야, 너희들 먼저 가."
서동철이 종로를 등지고 발길을 돌리며 두 사내에게 일렀다.
"형님, 우리 울짱으로 가시지요. 혹시.......
한 사내가 속삭이듯 하며 재빨리 새끼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이 구역
주먹패에서 미인계를 쓰는 게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만큼 주먹패끼리
세력다툼은 심했고, 그동안 그들 세계는 은밀하게 5 .16 이전 상태로 거
의 복원되어 있었다.
"염려 놓고, 가서 극장이나 잘 지켜."
서동철은 부하들을 보내고 가까운 다방을 찾아 들어갔다.
"나 여기 있는 것 어떻게 알았수?"
서동철은 자리에 앉으며 부하의 염려를 슬쩍 확인하고 있었다.
"네에, 극장으로 갔다가 안 계시길래 매표소 미스 양한테 물었어요.
미스 양 야단치지 마세요. 제가 꼬셨거든요."
여배우 남미미는 큰 눈으로 사르르 눈웃음을 쳤다.
"어저 말해 보슈."
그 매혹적인 눈웃음을 내치듯 서동철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담배를 빼
물었다.
"그러니까 저어......, 아까 빚 받으러 왔다는 건 급한 김에 빨리 관심
끌려고 한 말이구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제가 그때 부장님을 도와드
린 일이 있으니까 부장님도 저를 좀 도와주십사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이죠, 그때 부장님을 강원도로 빼려고 윤 사장님께서 저를 부르셨는
데, 아니, 직접 부르신 게 아니고 천 감독님이 불러서 윤 사장님 일이니
까 도와야 한다면서 어떤 대위의 술 시중을 들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
대위가 기분 째지게 술을 마셨는데, 일이 잘 풀려 윤 사장님이 아주 좋
아하신다는 거예요. 그 일이 알고 보니 부장님을 강원도로 빼는 거였어
요. 근데 있잖아요 이번에 윤 사장님께서 제작하시는 (순정의 꽃)에 저
좀 써주세요. 주연이야 바라지도 않구요, 조연이면 돼요. 주연은 윤 사
장님하고 감독님이 정하는 거지만 조연 하나쯤은 부장님 힘으로 할 수
있잖아요. 그런 일 내세워 윤 사장님 찾아갈 수도 없고, 천 감독님이 이
번에 감독을 맡은 것도 아니고, 생각다 못해서 부장님한테 부탁하기로
용기를 냈어요. 저 좀 밀어주세요. 기왕 이 바닥에 들어온 것, 저도 좀
크고 싶어요. 여동생이라 생각하고 좀 봐주세요. 예? 부장님."
숨가쁘게 말을 마친 남미미는 손수건으로 콧잔등이며 이마를 누르랴
보리차 마시랴 두서가 없었다.
서동철은 그런 남미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남미미가
내키지 않은 고역을 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여동생이라고 생각하
고 좀 봐달라는 말에 가승이 찡해져 있었다. 빽을 쓰는 데 돈 다음으로
효과가 있는 게 미인계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일에도 미녀까지
동원되었다는 것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새롭게 윤 사장님이 고맙고, 앞
에 앉아 있는 남미미가 색다르게 보였다.
"알았어. 내가 힘써 보지."
서동철은 이제 거만기라고는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잔을
들었다.
"어머 고마워요, 부장님 따주시기만 하면 연기 열심히 할게요."
남미미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며 눈물마저 글썽해졌다.
"그래, 열심히 해. 그 얼굴이면 주연도 할 수 있겠는데 언제까지 조연
노릇만 할 순 없잖아 자, 그만 가지."
서동철이 몸을 일으켰다.
아유, 멋져. 의리 한번 끝내준다!
남미미는 뒤따라 일어나며 날아갈 것 같은 기분에 어깨를 떨었다.
"커피값 여기 있어요."
남미미가 계산대 앞으로 먼저 나섰다.
"이거 남자 폼 구기게 하지 말어."
서동철이 남미미를 가볍게 밀어냈다.
정말 멋져. 싸나이 중에 싸나이야.
남미미는 큰 눈으로 서동철의 옆모습을 새삼스럽게 바라보며 가슴에
서 묘한 바람이 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서동철이 택시에 오르면서 일렀다.
"청계천4가."
"모르쇼? 종로 쪽으론 못 가요."
운전수가 짜증스럽게 내쏘았다.
"알아요. 원남동쯤 가서 내려주쇼."
"빌어먹을, 대학생 놈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맨날 데모야."
운전수가 가래를 돋우어 창밖으로 내뱉었다.
"형씨, 거 돈벌이 좀 안 된다고 그리 막말 함부로 씹어뱉지 마슈. 대학
생들이 비싼 등록금 내놓고 공부하기 싫어서 데모하는 거요, 지금? 입이
가죽 모자라 뚫어논 구멍 아니니까 말을 하려면 제대로 하고, 뭘 잘 모르
겠거든 그냥 닥치고 계슈. 정치 제대로 하면 좆 빤다고 대학생들이 얻어
터지고 매운 까스 먹어가면서 데모하냐 그런 말씀이야. 알아들으셔?"
서동철은 유일표에게 들은 말을 제 나름으로 상소리를 섞어 내뱉으며
운전수를 노려보았다. 그 얼굴이 몹시 사나웠다.
"예, 예, 손님 말이 맞습니다."
운전수는 완전히 기가 꺾여 있었다.
창으로 달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보름달이 되어가고 있는 덜 여문 달
은 남산 위에 해맑게 떠 있었다. 나뭇가지마다 돋아나고 있는 새 잎사귀
들이 달빛을 흠뻑 받아 낮에보다 더 고왔다 그 그림자가 합숙소의 유리
창에 여리게 어려 있었다.
"오늘 공부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질문 있는 사람 하세요."
이상재는 책을 덮으며 스무여 명의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넝마주이인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피곤에 절어 있었다.
"예, 선생님, 앞으로 세상이 달라질 거라고들 하는데 상업학교하고 공
업학교 중에서 어느 쪽으로 진학하는 게 더 좋습니까?"
"여러분, 이건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앞으로의
진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다 아다시피 지금 정부에
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산업화라고도 하는 그
계획을 한마디로 하자면, 지금까지 농업국가였던 우리나라를 공업국가
로 바꿔 우리가 잘살아보자는 계획입니다. 그래서 지난달에는 구로동에
수출산업공단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의 많은 공장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만들어 외국에 수출해 돈을 벌기 위해섭니다. 그런 공장들은
앞으로 많은 기술자들을 필요로 할 것이고, 기술을 가진 사람은 고등학
교만 나오더라도 취직하기가 쉬워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답은 나온 셈
이지요? 여러분들은 당연히 공업학교에 진학해야 합니다."
이상재는 학생들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즐거워
성심껏 답변했다.
"공업학교는 수학을 잘해야 되잖아요. 근데 수학이 잼뱅인 사람은 어
떡하구요."
한 학생이 불쑥 말했고, 서너 명이 쿡쿡 웃었다.
"예, 수학을 잘하는 게 좋지요. 그런데 수학을 잘 못한다고 실망할 건
없어요. 수학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어요. 그
러나 정 안 되는 사람이라도 크게 걱정할 건 없어요. 공업학교를 못 가
더라도 이 세상에는 직업이 수없이 많으니까 다른 길을 택해 얼마든지
당당하게 살 수 있으니까요. 자아, 우리 다같이 힘을 내고, 오늘은 이만
끝냅시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학생들이 다함께 목소리 맞추어 인사를 했다. 그들은 대학생 선생님
들이 자신들을 위해 아무런 보수도 없이 애쓴다는 것을 잘 알아 예의를
깍듯하게 갖추었다.
교무실로 겸용하는 이용진 대장의 방에는 먼저 수업을 마친 유일표가
돌아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허진은 어떻게 된 거지?"
이상재가 나무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글쎄, 아무래도 무슨 사고 난 것 같은데. 동대생 김중배 사망 여파로
오늘 데모가 굉장했고, 경찰들 진압도 다른 때와 달리 강경했어. 오늘
최초로 학생들 돌을 막아내는 둥근 방패까지 등장했으니까. 꼭 영화에
서 본 로마병정들 같은 게 그 꼴이 가관이었어."
유일표는 담배연기를 코로 내뿜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경찰들이 그렇게 강력하게 나오는 건 김중배가 죽은 걸 정부에선
4 .19 때 김주열의 죽음처럼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 아니겠어? 사실 정
권이 그런 위기에 몰릴지도 모르고."
김중배라는 학생은 데모를 진압하는 경찰에게 부상을 당해 끝내 이틀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글쎄, 지금 정권은 이승만 정권하고는 다를걸. 이승만은 군대를 잘 쓸
줄 몰랐지만 현 정권은 군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 여차하면 또 계엄
령이니 뭐니 선포해 대고 군인들이 즉각 서울로 몰려들 거야. 그동안에
잘 봤잖아. 그 방면에는 이골났어."
"하긴 그렇지. 근데, 허진이 혹시 잡혀간 것 아닐까? 체포된 학생들이
엄청 많다던데."
"그럴지도 몰라, 집에 가봐야 되지 않겠어?"
"그래야지. 그 친구 심정은 이해는 하는데, 이번 데모에 너무 열성인
것 아닌가?"
이상재가 가방을 들며 고개를 갸웃했다.
"허진으로서는 어쩔 수 없을 거야 자기 할아버지와 집안을 생각하면
그 심정이 어떻겠어. 일본놈들이 백배사죄하며 돈을 싸짊어지고 와도
시원찮을 판인데, 오히려 이쪽에서 사죄 같은 건 상관없이 어서 돈이나
좀 달라고 매달리는 형국 아니냔 말야. 그러니 자기 할아버지가 짓밟히
고 모독당하는 것 같고, 괜히 헛된 일 한 것 같고, 또 엉망이 된 집안 꼴
을 보면 얼마나 기막히겠어, 우리가 허진의 심정을 다 알 수는 없는데,
어쩌면 죽고 싶은 심정으로 데모를 하는지도 몰라."
유일표는 밖으로 나서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허진을 볼 때마다 이 세상의 정의고 진실은 무엇인가, 그런 것
이 과연 있기는 있는 것인가, 많이 회의하게 돼 ."
"정의와 진실은 현실 속에서 끝없이 패배한다. 다만 긴 역사 속에서
승리할 뿐이다."
"어쭈, 철학과 헛 다니는 건 아니네. 그거 누구 말이야?"
"몰라. 그저 줏어들은 소리야."
"근데, 최주한이는 어떻게 된 거야? 오늘도 안 나왔으니."
"모르겠어. 싫증이 난 건지 지친 건지. 제 공부도 바쁘고, 그럴 때도
됐으니까."
"그렇지만 대장님이 출감할 때까지는 나와야 되지 않겠어? 기죽어 있
는 저애들도 딱하고, 대장님처럼 사는 분도 있는데."
"그렇긴 한데. 내가 만나볼게."
큰길로 나오자 이상재가 시간이 없다고 서두르며 택시를 잡았다.
피곤한 몸을 택시에 부리고 눈을 감으며 유일표는 이용진 대장을 생각
했다. 그분은 출감하려면 아직 서너 달이 남아 있었다. 그 미제 물건은
자기를 도와준 사람의 옥바라지를 하려고 손을 댄 것이었다.
남대문시장 일대에서 날품팔이 지게질을 하다가 그의 집안 내력을 알
게 된 주먹패의 왕초가 자리잡아 준 것이 지금의 재건대였다. 그런데 정
치깡패로 몰린 그 왕초는 5 .16 직후의 혁명재판바람에 휩싸여 8년형을
받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왕초의 부하 몇 명과 함께 은밀하게 옥바라
지에 나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왕초를 줄곧 '범털(차입금이 많은 죄수)'
을 만들기 위해 그들은 돈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손을 댔다.
그런데 그는 조사 과정에서도, 재판을 받으면서도 끝내 공범자나 보급
선을 대지 않았다. 혼자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1년 실형을 받고 말았다.
"사람 사는 게 별게 아니야 내 걱정 말고 거기나 잘 좀 지켜줘."
허진과 면회를 갔을 때 그분이 담담하게 웃으며 한 말이었다.
유일표는, 깡패들이 즐겨 쓰는 말이라고 해서 천시하는 느낌이 강한
'의리'라는 말을 자꾸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제 물건 밀매가 불법
이든 어쨌든 간에 그분의 모든 행위가 그렇게 남자답고 인간적일 수가
없었다.
"그 형님 의리 한번 정말 미제요. 주먹 쓰는 우리가 못 당하는 판이니
까. 하여튼 어떤 개뼉다귀든 여기 와서 집적거리고 까불면 바로 연락해
요. 어떤 새끼들이든 뼈다귀를 추려놓고 말 테니까."
불량기 내밴 청년들이 가끔 찾아와 재건대를 둘러보고 가고는 했다.
이용진 대장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도 그들이었다.
허진은 머리에 붕대를 친친 감고 누워 있었다.
"도대체 경찰이라는 게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모르겠어. 오늘은 영 인
정사정없이 발악을 하더라니까."
허진이 쓴 표정을 지었다.
"이런 데모에 앞장섰으면 내빼기를 잘하든지, 달리기에 자신이 없으
면 앞장을 서지 말든지. 넌 이 형님한테 한참 배워야 해."
유일표가 언짢은 얼굴로 연거푸 혀를 찼다.
"이거 왜 이래. 경찰봉에 머리가 터져 피를 흘리면서도 잡히지 않고
적진을 탈출한 몸이야. 넌 그런 경험 있어?"
허진이 유일표의 말을 맞받아치며 눈총을 쏘았다.
"아이구 참 역전의 용사시다. "
유일표가 어이없어 했고.
"야, 너 조심해. 그러다가 너의 유일한 재산 더 심하게 다쳤다간 큰일
나는 수가 있어. 김중배가 괜히 죽었냐. 그리고 말야, 아무리 데모해 봤
자 그놈의 회담은 정부 뜻대로 밀어붙이게 돼 있어. 데모 효과가 있다
면, 일본에 대한 우리 정부 입장을 좀 유리하게 해주는 걸까?"
이상재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허진이 앉음새를 고치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긴, 넌 데모로 회담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천만에, 이건 4 .19 데모하고는 달라. 정부에서는 그 돈을 어서 빨리 받
아와서 경제발전을 시켜야 우리 모두가 잘살 수 있게 된다고 선전하고
있고, 일반 대중들은 그 말에 귀가 솔깃해져 있단 말야. 그 증거가 바로
4 .19 때와는 달리 일반인들이 이번 데모에 호응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야. 넌 어떻게 생각해?"
"그거 제법 탁견인데? 어쩐 일이야?"
허진보다 유일표가 먼저 반응했다.
"나 같은 우생이 그런 걸 혼자 생각해 낼 수 있겠어? 이 교수, 저 교수
한테 물어서 비빔밥을 만든 거지."
"일표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허진이 언짢은 기색으로 물었다.
"글쎄, 그동안 데모를 하면서도 일반인들이 별 반응이 없는 걸 이상하
게 생각했었는데, 이 말 듣고 보니 꽤나 일리가 있는 것 같은데."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대중은 뜻밖에도 약삭빠른 데가 있으니까."
고개를 떨구는 허진의 얼굴이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이구, 이 밤중에 또 걸음 하게 했으니 이를 어쩌누."
허진의 할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녕들 하셨어요? 이것 좀 드세요."
허진의 여동생 미경이 쟁반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유일표와 이상
재에게 눈길을 보냈다.
"미경이 축하해 마침내, 드디어 , 끝끝내 정식 직원이 되고야 만 것."
유일표가 스스럼없는 농담조로 말하며 웃었고,
"네, 고마워요. 다 일표 오빠 덕이에요."
흰 얼굴이 가녀리면서 안온하게 생긴 허미경이 수줍어하며 인사했다.
"무슨 말을. 다 미경이가 열심으로 한 결과지. 근무는 경리관가?"
유일표는 말하고는 달리 지난달 미경을 소개했던 것에 가슴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비서실이에요."
"호! 사장님 신임이 대단하신 모양이네?"
"응, 사장님께서 우리 미경이를 아주 이쁘게 보시나 봐. 그 동안에도
쭉 잘해 주시고, 얼마나 고마운지 모를 일이야. 그게 다 우리 일표 덕이
지 뭐."
허진의 할머니가 모처럼 흐뭇하게 웃으며 유일표의 등을 어루만졌다.
"할머니, 그리 좋아하실 것도 없어요. 괜히 남들 눈총 받고......, 차라
리 경리과 같은 데가 낫지."
허진이 머리의 상처 부위를 만지며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에그, 그런 은혜 모르는 소리 하는 것 아니다. 넌 가끔 그런 엉뚱한
소리 하는 게 탈이야."
허진의 할머니는 허진의 말을 지워 없애듯 손까지 마구 내저었다.
이상재는 말없이 앉아서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1년쯤 전에
비해 허미경은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여고생의 단발머리가 긴
파마머리로 바뀐 것만이 아니었다. 파리하게 혈색 없이 그늘져 있던 얼
굴이 어찌 된 영문으로 발그레하게 윤기가 돌면서 성숙한 여자로 변해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식 사원이 되어 화장을 해서 그런가? 다시 살
펴보았지만 허미경의 희고 섬세한 얼굴에 화장기는 느껴지지 않았고,
더 아리따운 여자로 다가들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자신이 중학생이 되어 1년 만에 국
민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아니, 이게 누구냐? 너 이상재 아니냐. 안 클 줄 알았더니 1년 만에
몰라보게 컸구나. 하, 이거 참 신기하다. 한 뼘은 더 커버린 모양인데,
정말 세월이 그냥 흘러가는 건 아니로구나."
자신은 변한 것 같지 않은데 담임선생은 자신을 살펴보고 또 살펴보
며 신기해 했었다.
허미경도 1년 사이에 마술을 부리듯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 거였다.
모란도 아니고 장미는 더구나 아니고, 함초롬한 수선화 같은 그 모습에
서 몇 년 전 처음 보았을 때의 허미경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허
미경이 변한 만큼 할머니도 많이 변해 있었다. 마치 허미경이 할머니의
진기를 빨아먹고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 것처럼 할머니는 더 주름이
잡힐 곳도 없을 정도로 파삭 늙어 있었다. 몇 년 세월이 양쪽에다 일으
킨 변화는 옛날 담임선생의 말마따나 신기할 뿐이었다.
"야, 무슨 생각하고 있니? 시장한데 어서 사이다 마시고 빵 먹어."
유일표가 팔굽으로 이상재의 팔을 건드렸다.
"응, 그래. 그렇잖아도 배고프다. "
이상재는 얼굴이 화끈해지는 걸 느끼며 서둘러 빵을 집어들었다.
"그 회사는 여전히 잘되겠지? 서울 인구는 갈수록 불어나고 있으니까
말야."
유일표가 빵을 우물거리며 허미경을 쳐다보았다.
"네, 잘은 모르겠는데 정부 관계 큰 공사가 많아져서 정신없이 바빠요."
"경제개발인가 뭔가 덕인가 보지? 어쨌든 회사가 잘돼 나가야지."
유일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동생 선희를 생각하고 있었다. 선희도
이제 여상 졸업반이었다. 내년이면 취직을 해야 하는데 그게 잘될 것인
지 걱정이었다.
선희는 제가 먼저 여상을 택했었다. 어머니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
였고, 군대에 있었던 형은 그 소식을 듣고도 답장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
았다. 그 침묵은 형의 고통이었다. 자신도 어머니나 선희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 내일 재건대에 나갈 수 있겠냐?"
유일표는 일어날 채비를 하며 허진에게 물었다.
"그럼, 나가야지 이 꼴로 더 데모하긴 틀렸고."
"참 망할 세상이다. 왜놈들한테 큰소리도 못 치면서 바른 소리 하는
학생들은 왜 개 패듯 패느냔 말야. 나라 위해 한 일 다 헛일되고, 멍텅구
리 짓이었지."
허진의 할머니가 가슴 내려앉는 것 같은 한숨을 토해냈다.
허진이 유일표에게 눈짓했다.
"할머니, 저희들 그만 가봐야겠어요. 벌써 10시가 넘었네요."
유일표가 몸을 일으켰고, 이상재는 뒤따라 일어나며 허미경을 힐끔
훔쳐보았다.
산동네의 좁고 비탈진 골목마다 달빛이 가득가득 담겨 있었다. 뛰듯
이 빠르게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유일표를 향해 이상재가 물었다.
"비서실 근무라는 게 좋은 건가?"
"글쎄, 나쁠 것 없잖아? 사원한테 사장 빽이면 대통령 빽보다 낫잖아."
"그게 남자면 모를까 여비서라면 세상이 안 좋게 보잖아?"
"응, 대개 그렇게들 보는데, 미경이 경우는 달라."
이상재는 큰길에 이르러 다시 입을 열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너 내 하숙방에서 자고 가라."
"안 돼. 난 아침마다 물지게 져야 하는 신센 것 몰라?"
"형 있잖아."
"아니야 형한테 그런 일 시키고 싶지 않아."
이상재는 무슨 말을 할 듯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바삐 전차에 올랐다.
이튿날 국방부에서는 위수령을 발동했다. 그건 가장 효과적인 데모
진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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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강 = 제 2 부 유형시대 (4권)ㅡㅡㅡ 5. 밤에 핀 수선화
소슬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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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69
05.10.21 21:01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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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려웁게 살아가지만 못 배운 한을 풀어 주기위해 설립한 야간학교 눈망울이 또록 또록한 그들의 모습에서 미래의 희망을 느끼곤... 우정과 사랑.... 나날이 좋은날 되소서...
수리산에서 새삶님들과 아주 즐거운 주말을 보내고 왔습니다. 굴렁쇠1님께서도 내일쯤 가까운 산에라도 다녀오시지요.. 건강하시길...
소슬바람님 정말 추워 지네요 퇴근하고 이불속에서 잠시 쉬다가 이제 들어와 읽고 갑니다 감기 걸리는게 무서워 조심하고 있습니다 소슬바람님도 조심하시구요 .. 고마운 마음 두고 갑니다
어젠 정말 춥더니 오늘은 산행 하는데 참 좋은 날씨였습니다. 적당한 피곤으로 오늘밤은 숙면을 취할것 같습니다. 병아리님.. 행복한 휴일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