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돌로리스의 신성한 노래
정희승 수필가(dukechung@hanmail.net)
정승윤 작가의 산문집 나 홀로 간다는 독창적인 산문 미학을 담아낸 역작이다. 이는 자신이 정립한 미학 규범에 따라 확고한 의지와 주관을 가지고 책을 썼다는 의미다. 한 편의 글로 말하고 싶은 것도 있지만, 한 권의 책으로 말하고 싶은 것도 있는 법이다. 또한 수필사에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영성이 가득한 책이다.
1. 사이 존재
정승윤 작가는 사이를 중시하는 사이 존재다. 이는 고대 서양 사유의 특징인 실체론보다는 동양 사유 특징인 관계론에 더 많이 의존한다는 의미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사이 안에 존재한다. 때-사이(時間), 빔-사이(空間), 사람과 사물 사이(世間)에. 사람은 사이를 벗어날 수 없다. 하이데거가 현-존재(Da-sein)를 사이 존재로 규정한 것도 ‘거기(Da)’가 곧 사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 세계를 좀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개론만으로는 부족하다. 작가가 작품을 창조할 때 무의식적으로 들어서게 되는 사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시간 관점에서는 일관되게 순간에 집중한다. 순간瞬間은 말 그대로 ‘눈 깜짝할(瞬)’ ‘사이(間)’이다. 눈과 관련이 있으므로 순간에는 공간성도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때’를 뜻하기도 한다. 순간은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결절점인 셈이다. 산문집에는 한결같이 순간을 포착한 매우 짧은 글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작가가 의식적으로 인식론적 전환이 이루어지는 깨달음의 순간이나 시적 순간에 집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간 관점에서는 어떤가? 우리가 체험하는 공간은 수학 공간이나 뉴턴 공간과 달리 균질하지 않다. 장소성과 풍수를 논하는 것도 공간이 균질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사방四方과 천지天地로 이루어진 육합六合 내에서 주체가 행동할 때, 앞과 뒤, 좌와 우, 위와 아래는 공간의 성격이 전혀 다르다. 공간이 비균질성을 띠는 것은 무엇보다도 두 팔을 지닌 인간이 지표면 위에서 앞을 보면서 직립보행 하며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이 지점에서 언어로 표현되기 전에 주체의 몸(의식)은 대립항 ‘사이’, 곧 ‘와’의 자리에 있다는 점을 강조해두고 싶다. 그러니까 언어로 표현된 대립항에서는 위치만 있고 부분을 갖지 않는 두 항 사이에 주체의 의식이 ‘있었다’는 뜻이다. 흥미롭게도 지표면 위에서는 뒤돌아서면 앞과 뒤, 좌와 우가 바뀐다. 심지어 마주보는 상대는 나와 반대로 인식한다. 그러나 위와 아래는 전혀 그렇지 않다. 어떤 관점을 취하든, 어떤 자세를 취하든, 변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변하지 않는 방향이다. 종합하면 체험공간은, 관점에 따라 방향이 상대적으로 변하는 수평면과 항상성과 보편성을 지닌 수직축으로 도식화할 수 있겠다. (더 자세한 사항은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의 『인간과 공간』을 참조)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글쓰기 방법으로 육상경기 종목에도 없는 ‘멀리높이뛰기’를 시도하였다고 고백한다. 참으로 독특한 작법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멀리’는 수평면에, ‘높이’는 수직축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작가의 무의식은 ‘멀리’와 ‘높이’ 중 어느 쪽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일까? 많은 작품이 말해주듯, 두말할 나위 없이 높이다. 멀리 조망하기 위해서는 높이 올라야 하는 법이다. 작가에게 이 수직축은 특별한 상징성을 갖는다.
그러면 사이에 존재하는 작가의 심상은 어떤 모습일까? 무척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허공」이란 작품을 통해 가늠해볼 수 있다.
주위는 캄캄하다. 나의 존재 역시 캄캄하다. (…) 구름이 흐르면 시간이 흐르고 시간이 흐르면 공간이 열리고 마침내 유명幽明의 근원인 달이 모습을 드러낸다. 달은 구름이 흐르면서 닦아 놓은 명철함 같다. 혼돈의 어둠 속에서 드디어 밝은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구름이 달을 가리면서 세상은 다시 무명의 어둠으로 빠져든다. 나는 조용히 어둠 속에서 구름이 흐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사실은 달도 없고 구름도 없으며 시간의 흐름도 없음으로 인하여 허공만이 오히려 장엄한 것이다. (「허공」 부분)
작가는 자신의 존재가 ‘캄캄하다’고 진술한다. ‘혼돈의 어둠’이라고 바꾸어 표현하기도 한다. 분별지인 대립항을 상기하면, 『장자』에 나오는 혼돈 우화를 연상케 한다. 전체적으로 ‘달을 본성으로 삼고(月爲性) 구름을 마음으로 삼네(雲作心)’ 하는 구절과 유사한 이미지를 바탕에 두고 있다. 그러나 달과 구름과 시간 흐름 역시 위爲이고 작作일 뿐 본래 없는 것이고 오로지 허공만 장엄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자신의 존재가 캄캄한 허의 장엄함이란다. 허가, 위에서 언급한 ‘위치만 있고 부분을 갖지 않는 사이’와 친연관계에 있다는 점이 참으로 흥미롭다.
산문집을 일별해보면 수많은 대립항이 발견된다. 삶과 죽음, 꿈과 현실, 가벼움과 무거움, 높음과 낮음, 육지와 바다, 밤과 낮, 하늘과 땅, 빛과 그늘, 기쁨과 슬픔, 말과 침묵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사랑의 슬픔」이란 작품을 살펴보자.
(…) 신이여 무엇이 본질인가요. 우주로 뻗어가는 뿌리인가요, 아니면 지하에 서 있는 침묵의 나무인가요. 무엇이 삶이고 죽음인가요. 신이여 왜 사랑의 뿌리를 주셨나요. 왜 기쁨과 슬픔을 자라게 하였나요. 왜 하나이면서 둘이게 하고 왜 서로 욕망하게 하셨나요. (「사랑의 슬픔」 부분)
수직 도식이 글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거꾸로 선 우주목宇宙木인 아슈밧타Asvattha를 중심축으로 놓고 다양한 대립항을 결속하여 텍스트를 직조하였다. 물론, 우주와 지하, 줄기와 뿌리,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등의 대립항들은 작가의 의식작용이 분비한 산물이다. 마지막 문장은, 분리된 둘을 이으면서 서로 욕망하게 하는, 사이 존재인 에로스를 떠올리게 한다. 대립항은 작품의 비밀을 해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코드다.
2. 신성한 노래
지상에서의 삶은 누구에게나 녹록지 않다. 사람마다 관점과 욕망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남쪽을 볼 때 너는 서쪽을 보고, 내가 아래를 볼 때 너는 위를 보게 마련이다. 서로 다른 관점과 욕망의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며 살다 보면 성공보다는 실패와 좌절을 맛보기 십상이다. 작가는 자신의 글이 슬픔이 가득한 실패자의 노래라고 고백한다. 원한과 울분, 후회 등도 언급하는데, 이는 도시에서의 삶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도시에서의 ‘곤비한 삶’의 애환이 담긴 서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 자연 사물에 대한 매우 짧은 시적인 글들이 산문집을 채우고 있다. 현재 제주도에서 자연에 둘러싸여 사는 영향도 있겠지만, 이는 다분히 의식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현대사회의 가차 없는 폭력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확고한 신념과 의지의 소산이 아니고서야 무엇이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작가는 도시와 자연, 이 두 세계의 사이 존재임이 분명하다.
사이를 논할 때 에로스를 빼놓을 수 없다. 에로스야말로 사이 존재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에게 에로스는 육체/영혼, 가변/불변, 감성/지성 등으로 분열된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중간자 역할을 한다. 감성적인 현실세계와 초감성적인 이데아계가 “미의 에로스”를 통해 연결된다. 에로스는 생식과 출산을 통해-육체와 영혼 모두 적용된다-자신의 결핍을 채워 불멸하려는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에서 포이에시스가 유래한다. 사이 존재인 작가도 예술성 높은 글을 분만하고 있으니 이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에로스는 수평으로만 통합하지는 않는다. 사랑의 사다리가 말해주듯, 점진적으로 수직 상승 운동을 하면서 현실계와 초감성계를 통합한다. 작가에게도 수직축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지상에서의 삶이 어둡고 무겁게 느껴질 때 높이를 꿈꾸게 마련이다. 신성한 빛은 늘 높은 곳에서 내려온다. 작품에 산, 나무, 하늘, 구름, 새, 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작가에게 수직축은 신성과 영성을 발하는 빛의 기둥이다. 이 기둥이 발하는 빛이 불교, 도교, 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적 빛깔로 분광하여 작품의 정조를 물들인다. 당연히 신화소도 자연스레 스며들 수밖에 없다. 수직축 관점에서 보면 작가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성스러움을 드러내는 시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작가는 산문으로 신성한 노래를 읊조리는 시인이다.
영주산 능선과 하늘 사이에는 구름이 있었다. 구름이 얼마나 가까운지 능선 위에 사람이 서 있으면 사람이 더 아득하게 보였다. (……)
영주산 능선에는 소뗴들이 있었다. 소떼들이 느릿느릿 풀을 뜯고 있었다. 영주산 소떼들은 맷돌처럼 풀을 씹었다. 영주산 오르는 길에는 여기저기 소똥이 흩어져 있었다.(……)
그 소 중에 한 마리의 뿔이 안으로 굽어져 있었다. 그는 관을 쓴 현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곧 제단에 오를 신성한 제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 그 나무 계단 위에 소똥이 놓여 있었다. 정결한 제물처럼 소똥이 놓여 있었다. (「영주산의 소」 부분)
이 작품도 구름, 영주산, 계단 등을 통해 수직 도식을 암암리에 드러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영주산에서 소가 풀을 뜯고 있는, 제주도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을 법한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가 진정으로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은 언어 기호가 명시하는 지시적 차원의 의미가 아니다. 표면적인 언어의 의미 이면에서 도래하는 비언어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심층의 의미가 언어를 초월하여 언어 바깥에 있지는 않다. 작가는 독자가 자신이 의도한 별자리를 읽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기표를 배치해두었다. 영주산-소-맷돌-제단-제물-소똥 등이 그것이다. 이 별자리를 읽어낸 독자라면 그 배경에 신화의 세계가 은하처럼 펼쳐져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영주산은 실제 지명이기도 하지만 삼신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렇듯 간접화에 의해서 의미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산문이지만 다분히 시적이라 하겠다.
이런 수직 도식을 드러낸 작품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산과 나무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도식과 무관하지 않다. 흥미롭게도 「물웅덩이」는 깊이로 드러낸다. 다음은 수평면 도식과 수직 도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사례이다.
아무리 희고 깨끗한 목련일지라도 어딘가에 흙의 빛깔이 묻어 있다. (……) 도대체 누가 이 한 줌의 흙에게 저렇게 높이 떠 있는 저 짧은 한순간의 광휘를 허용했단 말인가. 내 차라리 목련이 없는 척박한 땅에 숨어 살면서 먼 데서 목련이 피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한 줌의 흙을 쥐고서 봄 냄새를 맡으리라. (「목련」 부분)
목련은 쉽게 더러워진다. 아무리 희고 깨끗해도 어딘가에 흙의 빛깔이 묻어 있다는 표현은 그래서 설득력을 얻는다. 땅과 허공, 가벼움(목련)과 무거움(흙)이 수직 도식을, ‘땅에 숨어 살면서 먼 데서’는 수평면 도식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 좌표계를 사용하여 허공에 떠 있는 목련에 위치를 부여한다. 그래서 글의 눈이라 할 수 있는 ‘저 짧은 한순간의 광휘’가 흙과의 대비를 통해 보석처럼 빛나게 한다.
작가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성스러움을 산문으로 노래하는 시인임이 분명하다.
3. 호모 돌로리스(homo doloris, 슬픔의 인간)
마음 가장 낮은 곳에는 모든 감정의 물길이 모여드는 슬픔이라는 호수가 있다. 관점과 욕망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다 보면 아쉽고 안타깝고 섭섭하고 기쁘고 경이롭고 반갑고 두려운 일을 겪게 마련이다. 삶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의 물길은 슬픔이라는 호수로 모여든다. 슬픔이 복잡미묘한 뉘앙스를 띠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인간은 삶의 일회성과 유한성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것은 이별이 예정되어 있다. 어찌 슬픔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작가는, 자신의 글에는 문면마다 슬픔이 가득 차 있는데 자기 연민이라든가 자기 위로의 글에 그치는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자신의 슬픔이 모든 이의 슬픔을 반영하기에 누구나 공감하리라 확신한다.
개인적으로 슬픔에는 세 가지 슬픔, 곧 ‘먼 슬픔’과 ‘가까운 슬픔’ 그리고 ‘높은 슬픔’이 있다고 생각한다. 먼 슬픔은 삶의 일회성과 유한성을 자각하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아련한 슬픔을, 가까운 슬픔은 상실이나 이별 등으로 진한 멜랑콜리가 느껴지는 무겁고 어두운 슬픔을, 높은 슬픔은 자비를 의미한다. 굳이 범주화하자면 먼 슬픔과 가까운 슬픔은 수평면 도식과, 높은 슬픔은 수직 도식과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대다수 작품의 문면과 행간에서 느껴지는 슬픔은 먼 슬픔이다. 워낙 아련하고 희미해서 의식하지 않으면 느끼지 못하고 지나칠 만한 작품도 많다. 가까운 슬픔이 느껴지는 작품은 「쑥대머리」와 「비의 침묵」 정도일 것이다. 물론 먼 슬픔과 가까운 슬픔의 중간에 해당하는 작품도 존재한다. 애도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가까운 슬픔이 먼 슬픔 쪽으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높은 슬픔, 곧 자비가 느껴지는 작품은 어떤 게 있을까? 명시적으로 드러난 것은 「어쩌지 못할 슬픔」이다. 하지만 이 작품뿐이라고 예단하면 곤란하다. 산문집 전체를 높은 슬픔이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비는 ‘사랑과 어머니를 뜻하는 자慈’와 ‘슬플 비悲’가 결합한 단어다. 인도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한결같이 아껴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를 떠올릴 때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까루나(karuņā)’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자비(심)로 번역된다.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도 ‘자비’라는 의미를 지닌 ‘레헴rehem’은 본래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뜻이었다. 자비는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나약한 존재를 따뜻하게 포용하는 모성적인 슬픔이다. 삶의 부조리와 모순, 한계까지도 긍정하는, 높은 차원의 슬픔이다. 「어쩌지 못할 슬픔」은 이 자비를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어쩌지 못할 불행이라는 것들이 있다. 어쩌지 못할 슬픔이라는 것들도 있다. 나는 신에게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기도하지 않겠다. 어쩔 줄 모르는 신이라는 것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그 신과 함께 지하철 같은 걸 타고 싶다. 그 신의 어깨에 기대어 흔들리면서 마냥 어둠 속을 가고 싶다.(「어쩌지 못할 슬픔」전문)
아무리 신이라 할지라도 삶의 부조리를 없애주고 영생을 달라고 하면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 어쩌겠는가. 부대끼며 살다가 덧없이 사라지는 나약한 생명들을 그저 한없는 슬픔으로 사랑하는 수밖에. 더는 어쩌겠는가. 작가는 낮다고 생각하는 곳보다 더 낮은 곳까지 내려가, 지하철 같은 걸 타고, 어쩔 줄 모르는 신의 어깨에 기대어 마냥 흔들리며 가고 싶다고 말한다.
작가는 사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사물이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모든 작품은 인내가 낳은 산물이다. 허투루 쓴 작품이 하나도 없다.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고 아파하지 않고는 이런 숭고한 작업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도시와 자연 사이에 있는 존재, 그리고 신과 인간 사이에서 성스러움을 드러내는 존재, 이 둘을 교차시키면 교점에서 이 책을 관통하는 자비심을 연역해낼 수 있을 것이다.
4. 맺는말
지금까지 수평면 도식과 수직 도식을 통하여 작가의 독특한 산문 미학이 반영된 ‘멀리높이뛰기’ 작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런 뛰기를 하는 걸까?
작가는 자유로운 각도로 ‘멀리높이뛰기’를 하여 자신이 원하는 곳에 착지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자신의 글쓰기가 산문시라는 이름으로 시가 산문에게서 뺴앗은 영역을 일정 정도 되찾고자 하는 일이라고 고백한다. 오랜 진통 끝에 첫 산문집이 나왔다는 걸 염두에 두면, 자신만의 성을 구축하기 위해 얼마나 고투했는지 알 것 같다. 수필계로서는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작가가 착지한 곳이 무척 궁금해진다. 그곳은 도대체 어디일까?
산문시에 대응하는 ‘시산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산문적인 요소를 받아들였는데, 산문이라고 시적인 요소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는가? 작가는 이미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 있다. 작가의 처절한 고투로 산문에서 시산문의 존재가 한층 뚜렷하게 드러났다고 본다.
가능한 작가가 의도를 따라가 보려고 노력했다. 작가의 뜻이 잘 반영되었는지 모르겠다. 아쉬움도 남는다. 산문집에 실린 글들은 한결같이 매우 짧다. 이 짧은 형식에 주목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16세기 허균에 의해 소개되어 조선 후기에 유행한 소품문의 향기가 느껴졌다.
이렇게 영성이 가득한 책은 앞으로 접하기 어려울 것이다. 독서하는 내내 영혼이 맑아진 느낌이 들었다.
(에세이문학 봄호)
첫댓글 "이렇게 영성이 가득한 책은 앞으로 접하기 어려울 것이다."
제대로 평가 받으셨네요.
혜안을 가진 작가나 평자 모두 영혼이 맑은 분들입니다.
이 작품집으로 수상 하심하심을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장수의 높은 산이시니 그 그늘에 많은 생명들이 깃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