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517 (월) -
- 경허스님 이야기 ① - 불교이야기 (6-1)
이번 주 금요일인 5월 21일은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가장 좋아하고 또 존경하는 “경허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올리겠사오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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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일화(逸話)를 올리려니 이야기가 길어져서 두 번에 나누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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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허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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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鏡虛)스님(1849~1912)”은 조선시대 잠자던 우리나라 불교를 다시 일으키신
근세 최고의 선승(禪僧)으로 존경받는 스님이십니다.
* 잘 아시다시피 조선은 왕조 개창(開倉) 이래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쓰는데 이는 통상
조선개국공신인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이 쓴 “불씨잡변(佛氏雜辨)”을 통하여
고려 말에 보여준 불교의 윤리적 문제와 사회적 폐단을 거론하며 불교의 혁파(革罷)를
강력히 주장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며 따라서 계획적인 불교 정비 사업이
진행되었는데 이것이 조선왕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입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것이 국가의 재정과 인적인 자원을 확보하려는 현실적인 요구에서
일어났던 것이며, 결코 사상적인 극복에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는데
즉, 유학(儒學) 자체를 진흥시키려는 적극적인 사상운동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불교의
현실적인 폐단인 경제적 세력을 몰수하는 데 주요한 목적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불교를 계속 믿어왔고 또 왕실에서도 태조나 세조, 또 명종 때의
문정왕후 등의 불교 옹호론자와 중흥정책 그리고 영조, 정조 때의 문예중흥정책 등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청허 휴정(淸虛 休靜)” 등의 명승(名僧)도 배출합니다.
경허스님은 1849년 전주에서 아버지 “송두옥(宋斗玉)-또는 두식(斗植)”과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속명(俗名)은 “동욱(東旭)”이고
법호(法號)는 “경허(鏡虛)”, 법명(法名)은 “성우(惺牛)입니다.
* 정확히 설명 드리기는 어렵지만 제가 알기로는 “법호(法號)”는 스님들의 일종의
“아호(雅號)”이고 “법명(法名)”은 불교에 입문할 때 종문(宗門)에서 받는 이름인데
스님들을 부를 때에는 따로 구분하지 않고 평소 부르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허(鏡虛)”, "만공(滿空)“, ”경봉(鏡峰)“, ”청허(淸虛)“스님 등은 법호이고
”성철(性徹)“, "휴정(休靜)"스님 등은 법명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성철스님의 법호는 “퇴옹(退翁)”입니다.
스님은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9세 때에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올라와서 경기도
청계산 청계사에 가서 계허(桂虛)대사에 의하여 머리를 깎고 계(戒)를 받았습니다.
14세 때 마침 한 선비가 절에 와서 여름을 지낼 적에 여가로 글을 배우는데,
눈에 거치면 외우고, 듣는 대로 뜻을 해석할 만큼 문리(文理)에 크게 진취가
있었다고 합니다.
* 경허스님의 어머니와 형님도 모두 스님이 되십니다.
그해 가을에 계허스님의 천거로 계룡산 만화화상(萬化和尙) 문하에서
내외전(內外典 = 불경과 불경 이외의 다른 서적)을 모두 섭렵하였는데 23세에
이미 계룡산 동학사 강사(講師)로 추대되어 명망을 떨쳤으며 사방에서
학인(學人)들이 물처럼 몰려왔다고 합니다.
대중들의 요청으로 동학사 강원의 강단에서 강의를 하다가 어느 여름 날,
은사(恩師)인 계허스님을 뵈러 가던 길에 폭우를 만나 비를 피하던 중,
호열자(虎列刺=콜레라)로 인하여 사람들이 다 죽어가고 있는 현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 “호열자(虎列刺)”라는 말은 원래 중국어의 “호열랄(虎列剌)”을 우리말로 고칠 때
”어그러질 랄-剌(수라 ‘라’ 라고도 읽음)“의 글자 획을 잘못 보아서 “찌를 자, 또는
가시 자-刺(칼로 찌를 ‘척’ 이라고도 읽음)“으로 읽은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 한자의 왼쪽에 “묶을 속-束”을 쓰면, 즉 네모가 모두 막히면 “랄”이고 네모 중에서
밑변이 막히지 않은 것이 “자”입니다.
* (예)
# “묶을 속”에서 밑변이 터 있는 글자
- 자(刺) : 자극(刺戟), 풍자(諷刺), 자수(刺繡), 자자(刺字-몸에 문신하다)
- 척(刺) : 척살(刺殺-칼로 찔러 죽임)
# “묶을 속”에서 밑변이 막혀 있는 글자
- 랄(剌) : 발랄(潑剌),
- 라(剌) : 수라(水剌 - 임금께 올리는 진지)
여기에서 생사(生死)가 참으로 무상(無常)함을 느꼈는데, 밤이 되어 하루 묵을 곳을
찾다가 어느 처사의 집을 찾아들게 되었습니다.
그 집에서 하루 머무는데 집주인 처사가 경허스님에게 말씀하시기를,
“스님 네들은 일생동안 시주만 받아먹고 살다가 죽게 되면 소가 된다는데...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 하는 말에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경허스님은 강원(講院)의 강백(講伯)으로서 모든 학인(學人)을 지도하고
부처님의 교리를 원만하게 모두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생사의 언덕에 큰 힘이
되지 못하고 실로 불교의 깨달음이란 실참실오(實參實悟)해야만 비로소 부처님의
지혜에 이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느끼고 그 길로 동학사로 돌아와 학인들을
모두 흩어 보내고 폐문(閉門)한 뒤 좌선(坐禪)을 시작합니다.
당시 영운선사(靈雲禪師)의 “나귀의 일이 아직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도래 한다
(려사미거 마사도래 - 驢事未去 馬事到來)“라는 법문을 화두로 삼고 두문불출
하면서 졸음이 오면 날카로운 송곳으로 살가죽을 찌르고 칼을 갈아 턱 밑에
대놓고서 수마(睡魔)를 물리치며 용맹정진하기를 3개월 만인 1879년 11월
보름 경 갑자기 다가온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라는 말이 허공에서
들려오며 대오(大悟)하게 됩니다.
그리고 홍주 연암산 천장암(燕岩山 天藏庵 -- 현재는 서산시 고북면 장요리
천장사)에서 보임하시던 중에 다음의 “오도송”을 읊으십니다.
* 다음은 경허스님의 “오도송(悟道頌)”입니다.
홀 문 인 오 무 비 공 (忽 聞 人 語 無 鼻 孔)
돈 각 삼 천 시 아 가 (頓 覺 三 千 是 我 家)
유 월 암 산 하 로 (六 月 岩 山 下 路 )
야 인 무 사 태 평 가 (野 人 無 事 太 平 歌)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문득 깨달아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다 나의 집일세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 천장사(天藏寺) :
산 속 아주 깊숙이 있어서 가기가 매우 어려운데 한번쯤 가 볼만은 합니다.
이로부터 20여 년간 천장사와 서산의 개심사, 부석사, 수덕사, 정혜사 등으로
다니며 호서(湖西)일대에 선풍을 크게 진작시키고 또 많은 기행과 일화를 남겼으며
그리고는 또 영호남의 해인사, 범어사, 송광사 일대에도 유력(遊歷)하면서 선원을
개설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선(禪)을 중흥시켰습니다.
그리고 오대산 월정사에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법회에서 법문하고
석왕사에서 오백나한 개분불사(改粉佛事)를 증명하고는 갑자기 자취를 감춥니다.
즉, 스님께서는 말년(1905년 57세)에 세상을 피하고 이름을 숨기고자 함경도
갑산(甲山), 강계(江界) 등지로 가서 박난주(朴蘭州)라고 개명하고, 머리를 기르고
유관(儒冠)을 쓰고, 바라문의 몸을 나타내어 만행(萬行 = 현실생활 속에서 중생과
함께하는 여러 가지 수행)을 하며 또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함경도 갑산(甲山)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1912년 4월 25일 새벽에
“임종게(臨終偈)”를 남긴 뒤 입적하였습니다.
이때의 나이 64세, 법랍(法臘) 56세이었습니다.
* 경허스님은 마지막으로 일원상(一圓相)을 그리며 ○ 바로 위에 열반게송(涅槃偈頌
= 임종게-臨終偈)를 남기셨습니다.
심월고원 광탄만상 (心月孤圓 光呑萬像)
광경구망 부시하물 (光境俱忘 復是何物)
마음만 홀로 둥글어 그 빛 만상을 삼켰어라.
빛과 경계 다 공한데 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오.
그해 여름에 천화(遷化 = 입적-入寂) 소식을 듣고 제자 만공(滿空)스님과
혜월(慧月)스님이 열반지인 갑산에 가서 법구(法軀)를 모셔다 난덕산(難德山)에서
다비(茶毘)하여 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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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스님의 수제자로는 흔히 “삼월(三月)”이라고 불리는 혜월(慧月 : 1861년
~1937년), 수월(水月 : 1855년~1928년), 만공(滿空 = 월면-月面 : 1871년
~1946년) 스님이 있습니다.
경허스님은 “만공은 복이 많아 대중을 많이 거느릴 테고, 정진력은 수월을
능가할 자가 없고, 지혜는 혜월을 당할 자가 없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삼월(三月)의 제자들도 모두 깨달음을 얻고 나서 이들 역시 근현대 한국 불교계를
대표하는 선승들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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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사에서는 그만 두더라도 한국불교사에서도 신라의 원효스님(元曉),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스님(普照國師 知訥), 조선의 서산대사(西山大師),
진묵대사(震黙大師) 등과 더불어 경허스님도 어쩌면 재미있고 어쩌면 무언가를
깨닫게 해 주는 매우 많은 기행(奇行)과 일화(逸話)를 남기셨는데 일부에서는
경허 스님의 일화를 비방하고 험담하기도 합니다만 스님의 깊은 뜻과 또 중생과
함께하며 몸소 실천하신 일들이 워낙 커서 함부로 말하지는 못합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몇 가지만 올리는데 오늘은 먼저 세 가지만 올리고 나머지는
다음 편에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원효스님 : “신라시대 십성(十聖)” 중의 한 분이며 또한 잘 아시다시피 (김춘추-문명왕후
=문희) 사이의 둘째딸인 요석(瑤石)공주와 가까이 하여 설총(薛聰)을 낳는데
설총은 “신라 삼문장”과 또한 ”신라 십현“ 중의 한 분입니다.
- 신라 십성(十聖) : 아도(阿道=我道), 이차돈(異次頓=박염촉-朴厭觸=朴厭髑),
혜숙(惠宿), 안함(安含), 의상(義湘), 표훈(表訓), 사파(蛇巴),
원효(元曉), 혜공(惠空), 자장(慈藏) 등 통일신라 이전의 훌륭한
스님 10분을 말하는데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興輪寺)
금당(金堂)의 벽에 소상(塑像)으로 모셔져 있었다고 합니다.
- 신라 삼문장(三文章) : 설총(薛聰), 강수(强首), 최치원(崔致遠)
- 신라 십현(十賢) :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최승우(崔承祐), 최언위(崔彦撝),
김대문(金大問), 박인범(朴仁範), 원걸(元傑), 왕거인(王巨仁),
김운경(金雲卿), 김수훈(金垂訓) 등 10분의 현인
*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 우리나라 선종(禪宗)의 중흥조(中興祖)입니다.
* 서산대사(西山大師) :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이 스님은 법명(法名)은 “휴정(休靜)”, 법호(法號)는
“청허(淸虛)”인데 묘향산에서 오래 계셨기 때문에 “묘향산인(妙香山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라고 부릅니다.
* 진묵대사(震黙大師) :
조선 인조 때의 스님으로 석가모니부처님의 소화신(小化身)으로 불렸는데 술을 잘 마시고
신통력이 커서 많은 기이한 행적을 남겼으며 또한 모친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특히 술에 대하여는 “그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어서 “술입니다” 하면 마시지 않고
“곡차입니다”하면 마셨다고 합니다.
* 위에서 “신라 10성과 신라 10현”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데 “부처님의 10대 제자”는
지난번에 소개해 드렸고 “예수님의 12제자”는 여러분이 모두 잘 알고 계실 터이고
혹시 “공자의 10대 제자”는 아시는지요?
- 공자의 10대 제자는 “십철(十哲)”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안회(顔回),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자로(子路), 자유(子游),
자하(子夏) 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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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허스님이 계시던 서산 연암산 천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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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화 - 1 ] 경전으로 도배를 하다.
북풍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산중에 초가를 짓고 그곳에서 겨울을 지내고 있던
경허스님은 추위에 오돌 오돌 떨다가 문득 옆에 있던 경전(經典)을 찢기
시작하더니 그것으로 문에 구멍 난 곳을 메우고 바람이 들어오는 벽에 도배를
하기 시작합니다.
비라보던 제자들이 너무나 황당해서 물었습니다.
“스님, 어떻게 경전을 찢어서 도배를 하십니까?”
그러자 경허스님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하였습니다.
“부처가 얼어 죽으면 경전이 무슨 소용인감?“
“............ ?”
* 이 이야기는 작년에 한번 소개해 드렸던 중국의 “단하 천연(丹霞 天然)” 스님이
너무 추워서 목불(木佛)을 쪼개어 땔감으로 하여 몸을 녹이고는 불속을 뒤적거리면서,
너무 놀라서 달려드는 스님들에게 ”보면 모르겠소? 나는 지금 사리(舍利)를 찾고 있는
중이오.“라고 해서 모두가 무언가를 깨닫고 함께 불을 쪼였다는 이야기와 느낌이
비슷한데 “천연스님”은 유명한 ”육조 혜능(六祖 慧能) - 청원 행사(靑原 行思)
- 석두 희천(石頭 希遷) - 단하 천연(丹霞 天然) “으로 이어지는 중국선사(中國禪師)의
한 맥을 이루고 있는 스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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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화 - 2 ] 단청불사
경허스님이 그의 제자 만공과 함께 길을 떠났는데 몇 푼 준비했던 노잣돈은 이미
가면서 술값으로 모두 탕진하고 빈털터리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주막이 보이자 경허스님은 주막의 방으로 들어가서 기세 좋게
술을 시켰습니다.
그리고는 만공에게 “종이와 붓을 꺼내라.”
만공은 스승이 시키는 대로 종이와 붓을 꺼내고 먹을 갈았습니다.
먹이 다 갈아졌을 때 경허스님은 종이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단청불사 권선문(丹靑佛事 勸善文)”
그리고 그 밑에 “절에 단청을 해야 하는데 적선하시오”라는 내용의 글을
그럴듯하게 만들어 쓰고는 만공에게,
“이것을 들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너라.”
만공은 열심히 동네를 다니며 시주를 받고 와보니 경허스님은 혼자서 즐겁게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추운데 고생했다. 너도 한잔 들거라.”
이렇게 둘은 몇 주전자를 비우고 기분이 좋아져서 술값을 치루고 나왔습니다.
동네를 벗어나자 만공이 따졌습니다.
"아니, 단청불사에 쓸 돈을 그렇게 술값으로 날리면 어떡합니까?“
“지금 내 얼굴이 어떤가?”
“붉으락 푸르락 합니다.”
“그럼 이보다 더 잘된 단청(丹靑)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아!!! 단청불사치고는 최고 걸작입니다.”
두 스님은 어깨동무를 하고 다시 길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 경허스님이 술(불가에서는 곡차<穀茶 또는 曲茶>라고 하지요)과 고기를 즐겨 드신 일은
유명한데 그러나 그 분을 “땡중”이라고 하거니 또는 “파계(破戒)”했다고 하는 분들은
없습니다. 그 사유와 행동을 보고서 판단해야 하는데 그 사유는 여기서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 다음은 경허스님에 대한 어느 스님의 말씀입니다.
“경허스님의 행동은 무애행(無碍行) 낱낱이 확철대오(廓徹大悟)한 대무심경지(大無心境地)
에서 나오는 것이니, 범부 중생의 상견(相見)과 사견(邪見)으로 시시비비하는 것은 마치
술잔으로 바닷물을 잔질하고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 그런데 한참전이기는 하지만 “신밧드 룸사롱 사건”이라고 해서 조계종의 알만한
지도자급들이 관련되어 있던 사건이 있었는데 여기에 연루된 분들은 지금도 잘 알려진
스님들인데 (그중 한 스님은 서울 강남의 모 사찰의 주지스님으로 최근 모종의 사건으로
말썽이 나서 있는 분이고 또 다른 분은 현재 매우 높은 자리에 계심) 참으로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두 분 모두 평소 처신에 문제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어찌 지도자급으로
올라갔는지 알 수가 없으며 어떠한 면에서나 경허스님과는 비교할 수도 없고
아니 비교라는 말 자체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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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화 - 3 ] 가자, 갈 길이 멀다
경허스님과 만공이 탁발(托鉢)을 나섰습니다.
운이 좋아서 그 날은 제법 묵직한 쌀자루를 얻어서 지고 오는데 이미 해는 서산에
지려고 하는데 절까지는 아직도 한참이 남았습니다.
경허스님은 무거운 짐에 힘이 부쳐서 비틀거리는 만공을 힐끔 보더니 어느 마을로
들어가서 마침 물동이를 이고 가던 아낙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낙이 비명을 지르자 동네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는데 경허스님은 냅다 줄행랑을
쳤고 만공도 깜짝 놀라서 죽을힘을 다하여 뛰었습니다.
뒤에서는 동네청년들이 몽둥이를 들고 따라오는데 만약에 잡혔다가는 멍석말이가
될 것이 너무나 뻔했습니다.
다행히 가까스로 청년들을 따돌리고 동네를 벗어나 절 가까이에 이르자
만공이 따졌습니다.
“스님,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습니까?”
경허스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아직도 쌀이 무거우냐?”
“죽어라 뛰느라고 무거운 줄도 몰랐습니다.”
경허스님은 쓴 웃음을 지으며,
“가자, 길길이 멀다.”
만공은 무엇을 깨닫기에는 아직 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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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스님의 이야기는 최인호 작가가 “길 없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소설형식을 빌어 발표한 바 있습니다.
*** 다음에 추가 일화가 다시 이어집니다. ***
감사합니다.
첫댓글 일전에 말씀하시던 스님이야기이군요. 정말 존경할 만한 분이란 생각이 듭니다. 다음 일화가 기다려 집니다.
고맙습니다. 경허스님 뿐만 아니라 많은 일화를 남기신 스님들의 이런 계통의 일화는 저 같은 우매한 중생들에게는 어쩌면 아슬아슬하기도 한데 어쨋든 무언가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비난을 하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비난받을만한 내용이기도 한데 어떻게 보는가는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이겠지요. 지금 계획으로는 다음에 일화 일곱가지를 더 올리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경허 스님 훌륭한 일생도 처음 듣는얘기지만 어디서 이러한 글들을 발췌하셨는지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동해안쪽 여행은 잘 하고 계신지요? 부럽습니다. 저는 관심이 있는 서적들, 즉 동식물 중 특히 식물이야기, 불교관련 이야기 등의 자료를 얼마간 가지고 있는데(그런데 이런 책들은 대부분 좀 비싸서 그리 많지도 않지만...) 경허스님에 대한 자료도 조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료 중에 소개해 드릴만한 내용이 많은데 언젠가 시간이 되면 한번 올려 보려고는 하는데 제 주변 사정이 요즘 그리 좋지 못해서 어떻게 되려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잘다녀왔슴다. 언제나 여러분야에 깊은관심과 해박한 지식 위에 이렇게 노력하시니. 우리 학당의 학장님 이신게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카페의 다양한 주제에 대한 높은수준 내용으로 우리의 품격을 한껏 높여주사 참 감사합니다.
지나친 과찬으로 많이 불편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글로 만들어 올리면 제가 평소 알던 것들이 다시 정리되는 좋은 점도 있기는 합니다만 속도가 느리니 항상 시간이 빠듯합니다. 그래도 당분간은 지금과 같은 페이스로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