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류인석의 학문 3. 류인석의 위정척사사상 | 4. 류인석의 국내 구국항쟁 5. 류인석의 연해주 구국항쟁 6. 맺는말 |
1. 머리말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유라시아 대륙의 동남쪽에 자리를 잡고 5천년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창조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편안히 앉아서 얻은 것이 아니라 대륙과 일본으로부터 수많은 침략을 받으면서 우리의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서 얻은 유산이다.
우리 민족은 외적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봉착하면 강인한 정신
으로 생명을 초개같이 여기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구국항쟁을 전개하였다. 국가는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하여 국방제도에 의하여 군사와 지휘자를 양성하였다가 외
적의 침략이 있을 때 적과 싸운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이 위기를 당하였을 때 국군의 힘이 부족하게 되면 의기 있는 백성들이 누구의 지시나 권유 없이 스스로 목숨을 걸고 싸웠던 민병을 의병이라고 한다.
의병은 급조된 민병이기 때문에 오합지졸과 같은 병졸을 통솔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서 이항로 선생의 학통을 계승한 위대한 학자로서 의병대장이 되어 20여 년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한 대한13도의군도총재 의암 류인석 의병장이 있었다.
류인석 장군은 타고난 천품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가 되어 제자를 양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으로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봉착하자 1895년 12월 24일 잡았던 붓을 던지고, 갑옷을 입고, 칼을 잡고, 강원도 영월에서 의병대장이 되어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화서학파의 종장(宗匠)인 의암 류인석선생이 의병대장이 되어,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하였으니 모든 국민이 의병이 되어 국가와 민족을 구하자는 격문을 보냈다는 소문이 퍼지자, 각처에서 3천여 명의 의병이 구름같이 모였다. 류인석 대장은 의병을 휘몰아 제천, 청풍, 단양, 충주 등을 점령하고 친일군수들과 관찰사를 처형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군의 반격으로 류인석 장군은 충주성을 빼앗기고, 제천으로 퇴진하여 주위의 여러 개의 군(郡)과 현(縣)을 통치하며 3개월간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장기렴이 거느린 관군의 공격으로 대패하여 어쩔 수 없이 중국으로 이동하여 요동벌판을 헤매면서 의병기지를 건설하고 의병을 양성하며 구국항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세력이 중국까지 침투하게 되자 다시 귀국하여 주로 황해도, 평안도지방을 중심으로,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하였으니 우리는 목숨을 걸고 구국투쟁을 하자는 취지로 강학(講學)을 하였다. 의암이 강의를 하면 적어도 수백 명, 많으면 천여 명이 모였다.
일제는 류인석 장군을 체포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었으나 류인석 장군은 그들보다 항상 앞서 피신하여 결국 체포하지 못하였다. 류인석 장군은 어쩔 수 없이 1908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가 풍찬노숙을 하면서 최시형, 이범윤을 도우며 그들과 같이 구국항쟁을 전개할 준비를 하였다. 먼저 의병규칙을 제정하고, 관일약〔愛道,愛國, 愛身, 愛人〕을 제정하여 대한13도의군을 조직하고 13도의군도총재로 취임하는 등 활발한 구국투쟁을 준비하였다, 한편 안중근으로 하여금 조선침략의 원흉이요, 동양평화를 파괴한 이등박문(伊藤博文)을 포격케 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등 활발한 구국항쟁을 하였다.
류인석 장군을 비롯한 수많은 우국지사들과 의병들이 목숨을 걸고 구국항쟁을 하였으나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병탄하였다. 그리고 모든 의병들에게 체포령을 내려 이상설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들이 체포되었으나 대한13도의군도총재 류인석 장군은 수종자 몇 명과 러시아 운산(雲山)으로 피신하였다가 중국으로 가서, 1915년 1월 27일 중국 관전현 방취구(현재 요령성 보달원향 고령지촌 고려구)에서 하늘을 원망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육신은 떠났으나 그의 의병정신은 영원한 등불이 되어 빼앗긴 나라를 찾는 길잡이가 되었다.
2.류인석의 학문
류인석은 1842년 1월 27일 강원도 춘천부(시) 남면 가정리 우계에서 고흥류씨 류중곤의 집에서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건장한 사내아이로 출생하였다. 자를 여성(如聖), 이름을 인석(麟錫), 호를 의암(毅菴)이라고 하였다.
인석은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총명하고 글씨 쓰고 글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의리 있고, 용감한 인물로 성장하였다. 어린 인석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글씨를 쓰고 공부를 하는 특별한 아이였다. 어머니 젖을 먹으면서도 어머니 가슴에 글씨를 썼다. 의암은 뛰어난 수재로 아이들과 놀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여 이미 8세에 소학을 읽었다. 14세가 되어서는 시문도 잘 지었다.
인석은 14세 때 먼 친척인 류중선에게 양자로 입양되어 양부모가 계시는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자잠 마을로 이주하였다. 인석의 양증조부 류영오(柳榮五)는 일찍이 고관직을 지내다 사직하고, 가평군 설악면 자잠에 자리를 잡고 생활하면서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에 거주하는 당대 최고의 대학자인 화서 이항로(華西李恒老)선생 에게 자제들과 인척 아이들을 공부시켰다. 인석도 14세에 화서 이항로선생의 제자로 입문하여 1855년 3월부터 화서문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화서선생은 인석을 만나보고 그 인품을 크게 칭찬하며, 자기의 욕심을 극복하고 예의범절을 배우라는 뜻으로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글을 써주셨고, 의암(毅菴)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화서문하에는 의암보다 23세 위인 중암 김평묵과 10세 위인 성재 류중교가 화서의 문인으로 이미 이름난 학자로 성장하고 있었다. 타고난 천품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던 의암은 당대 명성이 높았던 화서의 문인이 되었고 중암, 성재와 같은 특출한 선배 학자들의 밑에서 함께 수업하였으므로 학문이 일취월장하였다.
의암이 18세 때에 과거를 보러 가다가 과거장 입구에서 6세의 어린아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서 음식을 사 먹이고, 고아인 것을 알고 과거시험도 포기하고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19세 때에는 마을 사람의 소가 의암의 논에 들어가서 벼를 뜯어먹자 의암은 아무 말 없이 소를 끌어다가 시원한 곳에 묶어 두었다가 주인에게 끌어다 주었다. 또한 깊은 밤에 뜰 앞 배나무에 올라가 배를 훔치려는 도둑이 있었는데, 의암은 도둑이 놀라 떨어질까 염려하여 문을 열어 소리를 내지 않고 다만 인기척을 내어 도적이 다치지 않고 천천히 도망가도록 하였다. 이상과 같이 의암은 성인군자가 아니면 시행하기 어려운 일들을 어린 시절부터 시행하며 성장한 특별한 아이였다.
18세기 영국에서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한 서구열강들은 동양으로 진출하였다. 특히 프랑스는 천주교를 앞세워 조선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대원군은 천주교를 수용하지 않고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고 프랑스 신부들을 처형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1866년 무력으로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프랑스는 “너희가 우리의 선교사 9명을 처형하였으니 우리는 너의 백성 9천명을 처형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고종의 섭정으로 조선정부를 움직이던 천하의 실력자 대원군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은 어찌할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다가 화서 이항로선생을 불러 의견을 듣기로 하였다.
의암은 75세의 노학자 화서선생을 모시고 상경하였다. 화서선생은 “지금조정에서는
화친을 하자는 의견과 싸우자는 의견이 분분한데, 화친을 하면 우리는 금수가 되고 싸움을 하면 국가와 민족을 수호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 화서선생의 제자 양헌수가 프랑스함대를 강화도에서 물리쳤다. 고종은 화서선생을 승지로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귀향하여 제자를 양성하다가 2년 후, 77세로 서거하였다.
대원군은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라는 비석을 전국 각처에 건립하여 영원히 후손들에게 경계하도록 하였다. 1871년에 미국상선이 대동강에 나타나서 화친을 요구하자 주민들이 불을 질러 소각한 신미양요가 일어났는데, 이것은 척화비의 내용을 실천한 실례였다.
국가의 운명이 달린 중대한 결정을 초야에 묻혀 제자를 양성하는 화서선생에게 묻고 그 의견을 즉시 받아들였다는 것은 당시 화서선생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25세의 청년 의암은 천하의 대원군을 비롯한 조정대신들과 임금이 결정하지 못하는 중대사를 단숨에 결정하는, 스승의 강인하고 의연하며 옳다고 생각하면 주저함 없이 실천하는 모습을 보며 훌륭한 학자의 능력은 어느 권력자보다도 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도 스승과 같은 위대한 학자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다음의 의암의 시문을 보면 당시 의암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의암은 국가와 민족이 온전히 보전되어 위정척사의 화맥(華脉)이 영원히 계승되기를 기원하면서 서울〔漢城〕의 진산(鎭山)인 삼각산을 시제로 시를 지었다.
“만 길도 더 되는 삼각산 높은 봉우리 하늘아래 왕성을 보호하고 있네.
풍운이 언제나 산중턱에 감도니 일월도 여기서 그 빛을 잃었네.
대지의 변화는 종말이 있어도 중원의 문물은 여기에 전해있네.
억 천년 지나도 봄빛이 의구하니 바라노라 국가와 민족이 영원하기를.”
의암 류인석은 천품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노력마저 특별하였고 화서선생과 같은 스승 밑에서 스승과 같은 대학자가 되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화서성생은 의암이 27세 때 별세하셨으나 의암은 중암 김평묵, 성재 류중교 같은 학자를 모시며 54세까지 공부하여 화서학파를 대표하는 종장(宗匠)으로서 제자를 양성하였으니 학문의 깊이와 양을 짐작할 수 있다.
의암선생은 873수의 시문을 비롯하여 상소문(上疏文), 정사(情辭), 서(書), 잡저(雜著), 서문(序文), 기문(記文), 제발(題跋), 격문(檄文), 제문(祭文), 비문(碑文), 묘갈문(墓碣文), 행장(行狀), 어록(語錄), 우주문답(宇宙問答), 도모편 상·중·하(道冒編上·中·下), 부록(附錄) 등 57권의 방대한 문집을 남기셨다.
의암선생의 57권의 문집 중에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저서는 『우주문답(宇宙問答)』이다. 우주문답은 40개의 문제를 본인이 묻고, 본인이 대답한 글로 5개의 문답은 총론이라고 할 수 있고, 35개의 문답은 각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누구도 할 수 없고 의암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명문이다.
13도의군도총재인 의암류인석은 일제에 의하여 나라를 강탈당하고, 일제가 의병들을 체포할 때 수종자 몇 명과 운사(雲山)으로 피신하여, 1913년에 『우주문답』을 저술하였다. 의암은 『우주문답』에서 조선말기사회 전반에 대한 폭넓은 식견을 문답식으로 서술하였는데 그 목적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고, 보수파 유학자의 현실관과 세계관이 잘 드러나 있다.
『우주문답』에서 첫째 문제인 <우주에서 중국이 중심이 되는 이치>라는 주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문(問): 천지(天地)를 우(宇)라하고, 고금(古今)을 주(宙)라 하는데, 우주(宇宙)의 대세 를 들려주겠는가?
답(答): 잠간 동안에 일어나는 눈앞의 일도 말하기 어려운데, 우주대세(宇宙大勢)를 어찌 감히 알아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치에 근거하고 형세로 미루어 옛 것을 바탕으로 해서 새 것을 헤아린다면 말할 수 있다.
천하의 대세는 진퇴(進退)하고. 고금의 대세는 굴신(屈伸)하는데. 굴신이란 성쇠(盛衰)요, 진퇴는 강약(强弱)을 이름인데. 성쇠와 강약은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늘은 바깥이고 땅은 가운데 있는데, 하늘은 조화(造化)하고 땅은 형상을 이루니, 천지가 열려 운행함에 조화와 형성(形成)은 빠르고 늦음이 있고, 먼저 함과 뒤에 함이 있다. 하늘은 하나인데, 천체의 운행과 기후의 변화는 빠름과 치우침이 있고, 느긋함과 급함이 있다. 땅도 하나이다. 땅의 형세〔區形〕와 위치〔局勢〕에는 가운데와 변두리가 있고, 멀고 가까운 곳이 있다. 땅의 중심이 되어 하늘의 정도(正道)를 만나면 조화하여 이루어짐이 (다른 곳보다)이르고 앞서며, 땅의 변방이 되어서 하늘의 치우침을 만나면 조화하여 이루어짐이 늦고 뒤진다. 급하고 멀수록 더욱 늦고 뒤지는 것이다.
대지(大地)에 중국(中國)이 있으니 중국은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풍기(風氣)가 일찍 열리고, 사람과 나라가 먼저 생겨서 지극히 오래되었다. 외국은 변두리에 있기 때문에 풍기가 늦게 열린다. 그래서 나라가 뒤에 이루어지며 오래지 않아 차질이 생긴다. 이것은 그 이치와 형세가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구의 모양이 둥근 달걀과 같은데 어찌 중심과 변두리가 있겠느냐고 한다. 이것은 달걀이 둥글지만 염통 · 배 · 날개 · 발이 모양을 갖추고 있어서 스스로 그 중심과 변두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중국은 나라 한가운데 있어서 그 행하는 바가 상달(上達)인데, 상달이란 도리(道理)에 통달하는 것이다. 외국은 치우쳐서 변두리에 있는 나라로서 그 행하는 바가 하달(下達)인데, 하달이란 형기(形氣)가 이루는 것이다. 상달은 중국의 장기(長技)요, 하달은 외국의 장기이다. 상달 · 하달의 장기가 서로 달라지 게 되는 것은 풍기(風氣)와 품격(稟格)이 서로 달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크게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옮겨가거나 바꿀 수 없다. 중국은 이미 천지가 처음 열릴 때부터 문(文)을 이룸이 오래되었다.
복희(伏羲) · 신농(神農) · 황제(黃帝) · 요(堯) · 순(舜) · 우(寓) · 탕(湯) · 문(文) · 무왕(武王) 등의 임금이 나와 상달의 극치를 이루었고, 한(漢) · 당(唐) · 송(宋) · 명(明)이 그 법도를 이어나가 설(偰) · 익(益) · 이윤(李尹) · 주공(周公) · 공자(孔子) · 증자(曾子) · 자사(子思) · 맹자(孟子) 등의 신하가 나와 선비로서 상달(上達)의 교화를 펴고, 학문을 밝히시니 앞의 성인(聖人)과 뒤의 철인(哲人)이 그 규정(規程)을 쫓아 윤리(倫理) · 예악(禮樂) · 제도(制度) · 문물(文物) 및 도덕(道德) · 경숭(經術)이 크게 성하여 빛났다. 이것이 상달하여 중국이 되는 까닭이다.
3. 류인석의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
위정척사사상은 옳은 것은 지키고 그른 것은 배척한다는 새로운 유교적 정치윤리사상이다. 북방민족의 침략으로 한민족(漢民族)과 중화문화(中華文化)가 위기에 봉착하자 주자(朱子, 1230~1300년)는 한민족의 독립과 문화적 자존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유교(儒敎)의 전통성을 강조하고, 존화양이(尊華攘夷) 춘추대의로 이민족(異民族)을 응징할 것을 역설함으로써 중화 민족적 화이의식(華夷意識)을 근간(根幹))으로 한 위정척사사상을 체계화하였다.
주자는 한민족과 한민족의 유교문화(儒敎文化)는 정(正)이요, 침략하는 다른 민족과 문화는 사(邪)라고 규정한 위정척사사상을 정립하였다. 한족(漢族)의 중국(中國)은 지구의 중심에 있고, 중국의 중화문화(中華文化)는 지구상에서 최고의 문화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주자는 중국문화는 형이상학적인 정신문화고, 중국 이외의 민족은 동이(東夷), 서융(西戎), 북적(北狄), 남만(南蠻)이라고 하고, 그들의 문화는 형이하학적인 물질문화라고 정리하였다.
주자의 성리학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수입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학자들은 백운동 서원을 창간한 안향(安珦1243~1306)의 영향이 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고려 말 목은 이색선생(牧隱李穡1328~1396)이 원나라에 가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척불론(斥佛論)을 강조하고,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 신유교역사관(新儒敎歷史觀), 즉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국가이념(國家理念)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1392년 7월17일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왕조를 건국하고 억불숭유책(抑佛崇儒策)을 국가이념으로 정하자 목은의 성리학 사상은 더욱 빛을 보게 되었다. 그 제자였던 정몽주(鄭夢周)를 거쳐 조선중기 퇴계 이황(退溪李滉)과 율곡 이이(栗谷李珥)같은 대학자가 배출되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조선의 성리학은 전성기를 이루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과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국가와 민족이 위기를 맞았던 조선에서는 위정척사사상이 더욱 강조되었다. 특히 효종과 함께 북벌론을 주장한 조선성리학에 대가인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선생은 위정척사사상을 더욱 강조하였다.
그러나 성리학(性理學)은 존화양이(尊華攘夷)라는 중화사상(中華思想)에 매몰되어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불과 할 뿐이고, “기호학파(畿湖學派), 영남학파(嶺南學派)”, “노론, 소론, 동인, 서인, 남인, 북인”이라는 파벌을 조성하여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을 야기시키는 원인이라고도 하였다. 이에 청국의 고증학의 영향으로 다산 정약용 같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위대한 학자가 출현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서세동점과 일제의 침략은 송 대의 북방민족의 침략과 다름이 없었다. 유교문화권에 천주교라는 이질문화가 들어와서 전통문화를 파괴하자 화서 이항로선생은 국가와 유교문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위정척사사상을 강조하였고, 의암선생은 위정척사사상을 더욱 소중히 하였다. 조선후기 중국은 이미 국가를 여진족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나라도 청국이었고, 문화도 청나라의 문화가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중국의 중화문화를 그대로 보유하고 있으니 조선이 소중화 문화국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조선침략으로 시작된 병인양요와 일본이 무력으로 협박하면서1876년에 체결한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자 화서학파 유생들은 이를 결사반대하면서 위정척사사상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지리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던 중국은 하(夏)나라 은(殷)나라. 주(周)나라 3대의 제왕과 공자, 맹자, 정자, 주자 등에 힘입어 훌륭한 문화의 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조선도 단군과 기자에 의해 일찍이 훌륭한 문화의 기틀을 열었고 그 후 선왕들의 선정으로 이를 계승하여 위로는 다스림이 밝게 되고 아래로는 풍속이 아름답게 되었다.
훌륭한 문화의 맥을 이어오던 중국은 17세기에 북쪽에서 내려온 여진족인 청나라에게 멸망하여 훌륭한 문화는 사라지고, 조선은 중국으로부터 훌륭한 문화의 맥을 전수받아 천하에서 유일하게 당당한 소중화국이 되었다. 중국에서 명나라가 멸망하여 단절된 훌륭한 문화를 조선이 보존함으로써 조선이 소중화의 문명국이 되었다.
의암은 중화문화의 근거를 단군에서 찾고 있으며 조선이 중화문화권으로 완성되는 시기를 효종이 송시열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던 시대부터 중화문화를 민족전통문화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의암은 철저하게 개화를 반대하였다. 일본과 서양을 하나로 보면서 과거 어떠한 오랑캐보다도 강하게 비판하였다. 개화는 그들이 조선을 침범해 오는 것으로 생각하여 곧 망국의 시초라고 생각하였다. 의암은 조선의 변란의 책임이 일본과 개화파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여 개화세력을 일본 침략자들과 동일시하여 비난하였다. 의암의 이러한 반개화론은 이후 의병항쟁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고, 중국문화의 맥락은 어떠한 형태로라도 계승된다고 주장하였다. 의암의 중국문화 보존의지는 후일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기지를 중국 오도구에 건설한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4. 류인석의 국내 구국항쟁
조선시대에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크게 일어났던 의병은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였을 때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임란의병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과 명나라의 지원군만으로는 침략자 일본군을 막아낼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 유림, 승려, 농민, 상인, 포수 등이 일어나 왜적에 대항하였는데 이들을 의병이라고 하였다. 의병들의 구국운동은 왜군에 큰 타격을 주어 국가위기를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876년 무력을 동원하여 협박하면서 강제로 병자수호조약을 맺고 합법을 가장하여 조선을 서서히 침략하던 일제는 1894년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김홍집을 비롯한 친일파 관료로 내각을 구성하였다. 친일 김홍집내각에 의해 갑오개혁(1894년 모든 제도를 개혁)이 추진되어 국민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특히 우리의 국모인 민비가 반대하였다.
일제는 그들이 조선점령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 침입해 우리의 국모인 민비(閔妃)를 시해하였다. 세계역사에서 다른 나라의 임금을 시해하는 경우는 있었으나 국모를 시해하는 경우는 없었다. 일본인들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또한 일제에 의해 1895년 11월 15일(음) 머리를 깎으라는 단발령이 공포되었다. 유교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하였던 조선사회에서는 육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머리칼 하나라도 훼손하지 않는 것이 곧 효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단발령은 유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강하게 반발하였다.
제천장담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있던 의암선생은 제자들과 사우(師友)들을 불러 놓고, 난세를 당하여 선비가 처신해야 할 3가지를 제시하였다. 1) 의병을 일으켜 적을 소탕한다(거의소탕=擧義掃淸), 2) 피해가서 옛 도를 지킨다. (거지수구=去之守舊, 3) 스스로 목숨을 나라에 바친다(자정치명=自靖致命) 이상 3가지는 각자 사정에 따라서 다를 것이니, 마음대로 선택하라고 하였다,
이춘영, 안승우 등이 1,0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원주군 지정면 안창리에서 거의하여 원주, 제천을 점령하고 단양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의병 중에는 밀정이 숨어들어 의병들을 해산시켰다. 의암선생은 싸움에서 패하면 도망가는 것은 가능하지만 전투에서 이기고 군사들이 도망가고 흩어졌다는 것은 반드시 밀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제자를 급히 보내 강원도 영월로 불러 모았다.
400여 명이 모였으나 대장 이필희 대장은 이미 신임을 잃었으므로 의병을 통솔할 대장이 없었다. 흩어졌던 의병을 불러 모았기 때문에 아무도 대장이 되어 통솔할 사람이 없었다. 제자들이 수차례나 의암선생이 대장이 되어 의병을 통솔해 줄 것을 건의하였으나 의암은 나이가 54세이고, 모친상을 당하고 있었으며, 학자로서 전쟁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고 거절하다가 제자들이 눈물로 호소하여 의암선생도 눈물을 흘리면서 어쩔 수 없이 1895년 12월 24일 강원도 영월 성루(城樓)에 올라 복수보형(復讎保形)의 깃발을 꽂고 의병대장이 되었다.
영월에서 의병대장이 된 류인석장군은 취임 직후 조선팔도 모든 고을에 고하는 격문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과 조선의 모든 관리에게 고하는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을 발송하여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의병을 일으킨 정당성을 밝히는 동시에 국가존망의 위급한 처지에서 전국의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물론 온 국민이 총궐기하여 우리의 국모 민비(閔妃)를 시해한 원수를 갚고, 우리의 문화와 제도를 지키며 삼천리 우리 강토를 회복하는데 동참하자고 호소하였다.
의병대장이 된 류인석 장군은 군사조직부터 하였다. 군사 10명을 1초, 10초를 1대로 하고, 초장과 대장을 두며, 중군장 이춘영, 후군장 안승우, 선봉장 김백선 등으로 의병조직을 하고 의병자세와 의병정신을 의병들에게 주지시켰다.
첫째 의병자세는 차렷 자세로, 눈을 크게 뜨고, 가슴을 펴고, 등뼈를 바르게 세우고,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똑바로 서는 것이었고(大安 活兇 硬脊 健脚), 둘째 의병정신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이정암의 의병책에 기록된 의병정신을 요약하여 <적과 싸울 때 이기고 지는 것과 죽고 사는 것을 생각지 말고 죽을 때까지 싸우는 정신이 의병정신> 이라고 하였다.(生死不顧, 勝敗不顧, 敵攻擊)
그러나 이때까지는 의병들 특히 선봉장 김백선의 포수부대는 의암의 의병자세나 정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김백선은 1894년 동학란 때 포수 4백 명을 모집하여 대장이 되어 동학란을 진압하는 공을 세우고 절충장군의 벼슬을 받았기 때문에 늘 선비들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류인석 장군은 400여 명의 의병들을 점검하여 의병 내부에 잠입하여 의병을 해산시키려는 친일지평현감 맹영재의 밀정 이민옥을 비롯해서 4명의 밀정을 찾아내어 추상같은 군율로 처형하자 모든 의병들의 표정은 변하였다.
군사일은 전혀 모른다던 의암선생이 의병대장이 된 지 단 하루 만에 밀정을 찾아내어 자백을 받고 추상같은 군율로 처형하자 의병들은 류인석 장군은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볼 수 있는 신통력(神通力)을 가진 위대한 장군이라고 우러러보았다. 오합지졸과 같이 제멋대로 행동하던 의병들은 일거에 질서정연한 의병이 되어 수족(手足)같이 따랐다.
의병들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신통력을 가진 류인석장군이 영월에서 의병대장으로 등단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방에서 의병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3천여 명의 의병이 운집하였다. 그들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류인석 장군은 오합지졸과 같은 의병들에게 다시 한 번 의병자세와 정신을 교육시켰다.
“눈을 크게 떠라〔大眼〕. 가슴을 펴라〔活兇〕. 척추를 바로 세워라〔硬脊〕. 두 다리에 힘을 주어라〔健脚〕. 이 자세를 한마디로 말하면 ‘차렷’이다. 그리고 의병은 싸울 때 죽고 사는 것, 이기고 지는 것을 생각지 말고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 의병정신이다.”
류인석 장군은 추상같은 군율로 3천여 명의 의병들을 휘몰아 영월, 제천, 청풍, 단양, 충주 등지를 점령하면서 점령한 지방을 확실히 장악하기 위하여 개화정권을 지지하는 친일지방관 단양군수와 청풍군수를 참형하여 기반을 다진 후에 호서지방의 중심지요 전략적 요충지인 충주성을 공격하였다. 삼천여 명 의병의 기세에 눌려 충주성을 지키던 친일군대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을 쳤다. 1896년 1월 5일(양 2월 17일) 일거에 충주성을 점령하고, 관찰사를 처형하였다.
충주를 점령한 의병들이 기세를 떨치던 중 서울에서는 이완용을 비롯하여 러시아 세력에 의지한 친러파들이 1896년 2월 11일 임금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모셔간 사건인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났다. 그 결과 친일파 김홍집 내각이 실각하고 이완용 등의 친러파가 집권하였다. 이완용 정권은 단발령을 취소하고 의병을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와 같은 정국의 변동과 정책에 따라 각지의 의병들은 점차 해산의 기미를 보이고, 백성들의 호응도 점차 식어 버렸다.
그러나 류인석 장군은 의병해산을 거부하고 조정의 회유에 강력히 대항하였다. 이후 병력을 증강한 일본군과 친일관군들이 충주성을 공격하였다.
류인석 장군의 의병들은 일본군과 관군의 침공을 28차례나 막아내었으나 물자지원이 차단되고, 사상자가 늘어났다. 류인석 장군은 일단 충주성에서 철수할 것을 결정하고 제천으로 후퇴하여 인근 여러 개의 군을 장악하였다. 관군의 수령인 장기렴은 의병이 관아의 수령들을 처형하여 나라에 반역하였고, 민가에 피해를 끼쳤다는 죄목을 들어 의병진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류인석 장군은 ‘피맺힌 원수 일본이 물러나지 않았고, 역적의 무리인 개화파들이 섬멸되지 않았으며, 선왕의 옛 제도가 회복되지 않았고, 선성(先聖)의 도를 회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의병해산을 거부하였다. 의병들의 저항이 완강 하자 관군은 제천으로 향하여 의병진을 공격하였다. 구식 화승총을 갖고 있던 의병들은 불행하게도 굵은 비가 내리자 총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안승우 대장이 전사하고 의병은 패하였다. 일본군뿐만 아니라 친일관군이 도처에서 의병을 공격하여 국내에서는 의병운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류인석 장군은 중국으로 이동하여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고, 일군은 물론 관군과 도처에서 싸우면서 천신만고 끝에 평안도 초산까지 도착하였다. 강원도 영월에서 3천여 명으로 기세가 등등했던 의병은 겨우 240명만 남았다. 비록 초라한 의병이지만 중국에 가서 임진왜란 때와 같이 지원군을 받아 일제를 추방할 각오였다.
압록강을 건너서 파저강(혼강))을 따라 중국 회인현(환인현) 반납초구까지 도착하였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은 이미 비밀계약을 체결하고 회인현 현재 서본우는 해산을 명령하였다. 어쩔 수 없이 해산하게 된 의병들은 파저강을 눈물바다로 만들며 무기를 반납하고 해산하였다. 219명의 의병들은 제각기 흩어지고 류인석 장군은 측근 21명만 거느리고 봉천성 심양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최고의 실력자였던 원세개(袁世凱)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의암이 원세개(遠世凱) 원조를 청했던 것은 일본이 1592(임진왜란때)년 우리나라를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5. 류인석의 연해주 구국항쟁
류인석 장군은 통화현 오도구가 의병기지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이유는 오도구는 이미 많은 조선족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계속 조선인들이 이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오도구지역은 백두산의 지맥인 용강산맥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로서 주위가 산림이 무성한 산악지대이므로 산악유격전술에 유리한 지형이었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물이 풍부하여 농사를 지으면 의병들의 생계에 필요한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청국정부가 동변도 지구(동쪽 변두리지역)에 대한 개간을 권장하고 있었으므로 이 지역을 쉽게 개간할 수 있어 의병기지 건설에 유리하였다.
자연환경이 의병기지 건설에 적합하고 인적자원이 풍부한 통화현 오도구를 의병기지로 선정한 류인석 장군은 거처하는 부근의 산기슭에 망국단(望國壇)을 쌓고,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이곳에 올라 공자묘(孔子廟)를 향해 원수를 갚고 소중화(조선)를 회복시켜 달라고 기원하였다. 또한 국내에 있는 동문 사우들을 통화현 오도구로 이주시키기 위해 1896년 11월 7일 고국으로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오도구 지역에는 조선인 이주민이 이미 만여 명이나 살고 있었고, 아직 개간되지 않은 땅에 몇 만호가 더 수용될 수 있습니다. 토지가 비옥하여 한사람이 농사를 지으면 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일 년 농사를 지으면 3~4년은 먹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인심이 후한데 그 중에는 의기가 있는 사람들이 있어 그들과 함께 모이고 영웅들을 모으면 일을 도모할 만합니다.”
류인석 장군은 현지 이주민을 계몽하여 그들의 애국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예의를 지키게 하였다. 아울러 의병들의 생존을 위하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가축을 사육하도록 하였다. 구국투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던 1900년에 중국에서는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의화단운동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중국 농민들이 곳곳에서 ‘중국 영토에서 왜놈들을 내쫓자!’라고 하는 구호를 외치며 교회당에 불을 지르고, 철로를 파괴하는 등 폭력과 살상이 난무하였다. 류인석 장군의 의병활동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국내의 친일세력들은 류인석 장군이 의화단과 작당하여 조선을 침입해온다는 모략을 하였다. 중국의 혼란한 정세와 친일세력의 모략까지 받은 류인석 장군은 요동 땅에서 더 이상의 구국항쟁 활동이 어렵게 되어 1900년 7월 귀국하였다.
류인석 장군은 러시아로 망명할 때까지 약 8년간 황해도와 평안도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중화를 존중하고 이적을 물리친다는 ‘존화양이(尊華攘夷)’ 사상과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배척한다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에 입각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는 강회활동과 향약운동으로 일제침략에 대응책을 강구하고, 나아가 국권회복을 위하여 모든 국민의 의거를 구상하고 도모하였다. 또한 항일자주의식을 고취하는 의식화운동을 전개하였다.
류인석 장군의 강회활동은 서북일대에서 주로 이루어졌는데. 첫째 화서의 문인이요 서북지역의 유명한 유생인 태천출신 박문일과 박문오 형제가 진작부터 강학을 통해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이 같은 학문적 유대를 류중교에 의해서 더욱 발전시켰으므로 서북지역은 화서학파의 동문인 류인석을 맞이할 인맥적 토대가 마련되고 있었다. 둘째 류인석 장군이 전기의병 때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의병봉기를 구상한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는 무장봉기를 할 수 있는 유리한 지역으로 벌써부터 이 지역을 지적한 바가 있었다. 그러므로 류인석의 의병봉기에 대한 의지는 끝난 것이 아니고 다만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당시 강회활동은 의병 재봉기를 위한 준비과정이었으며, 후일 류인석 문인들이 주도한 을사의병‧ 정미의병 봉기에 정신적인 배경이 되었다.
일제가 1904년 8월 22일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일제침략에 구체적으로 대응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던 류인석 장군은 국권회복을 위한 거국적인 의거를 구상하고 이를 실행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다른 세력들의 동의를 받을 수 없어 형식적이고, 시위적인 의병봉기는 성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백성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것이며, 민족역량의 소모라 생각하여 조용히 의(義)를 지키면서 항일투쟁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905년 우리의 주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일제가 강제로 체결함으로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의병항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항일구국투쟁은 종전보다 더욱 치열하게 확산되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류인석 장군을 추종하는 자(주로 제자들)들은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건의하였으나 류인석 장군은 극심한 각기병을 앓고 있어 직접 나서지 못하고 그의 문인사우들에게 의병항쟁을 지원토록 하였다.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을 밀파하여 회의에 참석하도록 했다.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밀사 일행은 일본 측의 방해로 뜻을 이룰 수가 없게 되자, 신문기자들에게 일본의 한국 침략상을 낱낱이 폭로하고 한국을 지원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제는 7월 12일 내각회의에서 고종에게 밀사문제에 관한 책임을 묻고, 일본정부가 앞으로 한국내정의 전권을 장악하기로 결정하는 동시에 고종은 황태자에게 왕위를 양위하도록 할 것 등을 이토통감에게 지령하였다. 결국 고종은 어쩔 수 없이 7월 19일 새벽 황태자로 하여금 국정을 대리케 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순종황제 즉위식이 거행되었고 4일 후엔 ‘정미7조약’을 조인토록 하여 일제가 한국의 국권을 장악하여 차관통치가 시작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7월 31일 일제가 작성한 군대해산 조칙이 발표가 되었다.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 고종의 폐위, 정미7조약 체결, 군대해산 등 일련의 사태로 인해 항일독립투쟁이 치열해졌다.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방승환 참령의 자결로 인하여 결국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서울에서의 시위대 항일구국투쟁은 실패하였으나 그 해산병들이 지방으로 내려가 의병에 가담하여 투쟁하였다. 전국적인 의병들이 서울로 진출하여 일본군과 전면전을 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일제의 압박은 더욱더 심해져 결국 국내에서는 항일의병투쟁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변해갔다.
류인석 장군은 의병과 일제의 병력이 정면충돌해서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러시아로 망명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국내의병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장기적인 항쟁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류인석 장군은 몸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구국투쟁을 위한 근거지를 마련하고 장기적인 의병항쟁을 기획하였다. 특히 서울진공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전국의 의병부대가 지속적으로 서로 호응하여 일제로 하여금 지배체제를 조직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라 하였다. 그 세부적인 계획으로 백두산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한 뒤 장기전에 돌입한다는 계획이었다. 백두산의 지리적 유리함을 강조하고 서북지역에서의 인적, 물적 기반을 조성하는데 유리함을 강조하였다. 또 유사시 청나라 또는 러시아의 지원을 요청하기에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이후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북간도와 서간도의 산악지역이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은 류인석 장군의 구상이었다.
류인석 장군은 의병근거지 개척에 대한 성공여부는 인재와 물적 자원에 달렸으니 유림들이 도와줄 것을 당부하였다. 한편 국외에서 항일투쟁을 할 근거지를 확보하는 동시에 국내의병들도 국내에서 근거지를 구축하고 항쟁에 나설 것을 아울러 촉구하였다. 류인석 장군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일제를 피해 부산 동래로 이동하여 배를 타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이때에 수종자는 60여 명이었다.
조선 말기 러시아령 연해주는 조선의 영세민들이 생계를 위해 이주하였던 곳이고, 19세기 후반 일제의 침략이 노골적이 되자 우국지사들이 몰려들어 1910년대에 고려인이 10여 만 명에 달하였다. 특히 연해주의 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는 1904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마치 호수에 물이 모이듯이 망명 항일투사들이 모여들어 항일투쟁의 근거지가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이미 수많은 고려인들이 거주하면서 고려인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연해주에는 이상설, 이위종, 이동영, 정재관, 이강, 안창호, 이종호, 이갑, 조성환, 이범윤, 홍범도, 이진룡, 안중근 등 요동지방이나 미주지역 또는 국내에서 활동하던 당대의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모여들었다. 연해주로 이토록 많은 우국지사들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1910년대까지는 다른 지역에 비하여 비교적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을 하기에 자유스러웠기 때문이다.
1908년 류인석장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범윤과 최재형이 의병활동을 하고 있는 연추 중별리로 이동하여 그들의 연해주 의병활동을 지원하는 한편 강력한 항일투쟁을 하기 위하여 국내외를 막론하고 모든 의병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병규칙’을 제정하여 이를 국내외 의병들과 류인석 장군과 관련 있는 인사들에게 통지하였다. ‘의병규칙’은 모두 35개 항목으로 되어있는데 그 중요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치는 것은 천추만대에 큰 의미를 갖는 것이며, 천하에 큰 업적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의 죽음은 있는 것이니 죽어서 절의를 세운다면 그 죽음이 얼마나 영광스러우며, 이 삶이 얼마나 보람 있겠는가. 우리는 죽고 사는 것을 염두에 두지 말고, 큰 의를 밝히며 큰 업적을 남기자.
2. 군대의 조직은 100명을 1대(隊)로 하여 제1대, 제2대라고 하며 대장(大將)-총영장(總領長)-대장(隊長)-분대장(分隊長)-십장(什長) 체계로 하고 각대에는 용감하고 담력이 있으며 통솔력이 있는 사람을 책임자로 한다.
3. 의병부대 운용에 대한 항목으로 단결, 기율, 화목, 신의 등의 기본덕목과 행형, 군례, 호령, 기밀, 상벌, 참수, 군수, 균등분배와 절약 등을 규정하였다.
4. 전술론에서 응징해야 할 대상, 전국적 의병봉기의 방안, 의병근거지론을 구체화하였다.
류인석 장군은 백두산의 맥이 이어지는 전국의 산악지대에 의병근거지 설치를 주장하였고, 각 산악지대에 의병근거지를 두고 의병을 분산 배치한 후 상호연락을 취하여 일제와 항전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의병규칙’은 1910년에 조직되는 조선 13도의군의 기본규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
류인석 장군은 의병규칙을 제정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의병에 대한 민중적 열기를 더욱 일으키고 금석같이 강한 의병을 양성하기 위하여 1909년 7월 ‘관일약(貫一約)’을 제정하였다. 관일약이란 모든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하기 위한 약속으로 관일약의 목적은 첫째 국권을 회복하고, 둘째 백성을 멸망에서 구하기 위한 것이고, 셋째 중국의 요순시대의 문화를 보존하는 것이다.
관일약의 실천강령은 첫째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愛國心), 도(道)를 사랑하는 마음(愛道心),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愛身心),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愛人心), 의 네 가지 마음을 일으키고, 둘째 모든 국민의 마음을 위의 네 가지 마음에 두어 모든 사람이 같은 마음이 되게 하며, 셋째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하여 금석(金石)이라도 끊고 뚫게 하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의병재기를 구체적으로 구상한 류인석 장군은 의병진 명칭을 13도의군으로 하고 대장을 ‘도총재’라 하여 13도의군 조직의 필요성도 언급하였다.
이 시기의 연해주 의병은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공을 자주 시도하여 그에 따른 군자금 모집과 부대의 개편을 서두르고 있었다. 연해주와 북간도의 모든 의병이 한 군단으로 통합하면 작전상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고, 이들 지역에서 한민족의 지원이 가능하게 되며, 아울러 러시아의 지지도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장군이 의병통합을 계획하여 의병규칙, 관일약, 의무유통 등을 작성하여 국내외에 홍보한 결과 1910년 6월 21일 류인석, 이범윤, 이남기, 이상설 등이 ‘13도의군’을 정식으로 조직하고, 도총재에 류인석을 추대하였다. 조선 13도의군의 조직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도총재: 유인석 창의총재: 이범윤. 장의총재: 이남기, 의무참모: 우병렬, 외무원: 정재관, 안창호, 이종호 의무장: 홍범도, 최우익, 이갑, 정순만, 외교통신원: 이상설, 장의군종사: 김정규 등
도총재직에 의암선생이 추대된 것은 그의 의병경력과 13도의군의 계획을 초기부터 구상해 왔기 때문이었으며, 13도의군의 군사조직은 이범윤과 이남기의 의병세력이 중심이었고, 이외 연해주 지역의 홍범도 의병, 간도 지역의 의병, 국내 이진룡 의병 등이 참여하였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연합한 이 조직에는 약 4,000여 명의 의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류인석 장군은 통고 십삼도대소동포(通告 十三道大小同胞)라는 통고문을 반포하여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최후까지 항일구국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류인석 장군을 비롯한 무수한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보람도 없이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한민족은 5천년 역사에 종말을 고하고 망국의 백성으로 전락하였다. 1910년 8월 24일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13도의군도총재 류인석 장군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달려갔다. 이곳에서 일제의 조선병탄을 규탄하고 그 무효를 선언하기 위해 ‘성명회’를 조직하였다. 성명회라는 명칭은 일본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통분한다는 뜻으로 대한의 국민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하고 성취한다는 뜻이었다.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이후 류인석 장군은 항일투쟁에 있어 무력으로 항쟁하기보다 열강의 여론에 호소하는 외교방략에 큰 비중을 두고 일본 정부와 각국 정부에 합방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성명회의 선언서를 보내기로 결의한 뒤 성명회선언서를 작성하여 서양열강들에게 발송하였다. 이 선언서는 이상설이 기초하고 류인석 장군이 수정 한 뒤 친필로 서명하여 발송하였다. 성명회선언서는 개항 이래 일제의 한국 침략정책과 실정을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설명하였고, 8,624명이 서명한 선언문으로 이후 줄기차게 전개된 항일독립운동 선언문의 원류가 되었다.
한일합방 후 류인석 장군은 고종에게 연해주로 파천하여 세계의 공의(公義)를 일으켜 국권회복을 도모할 것을 상소하였고, 국내 지사들에게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전을 계속할 것을 촉구하였다. 연해주에서 13도의군 편성과 성명회 활동으로 부담을 느낀 일제는 제정 러시아정부에 압력을 행사하여 고려인들의 어떠한 형태의 배일운동도 금지한다는 합의를 받아냈다. 결국 러시아정부가 13도의군의 외교통신원이었던 이상설을 비롯한 간부들과 조선인 민족 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다.
다행히 13도의군도총재 류인석 장군은 수종자 약간 명을 데리고, 피신하여 잡히지는 않았고, 운산에 은거하였다. 13도의군과 성명회는 실질적으로 해체 당하였다. 이후 류인석 장군은 러시아 운산에 숨어서 천하의 명저라고 전해지는 우주문답을 저술하면서 권업회의 수총재직에 추대되기는 하였으나 명예직으로 그가 실제 항일투쟁에 직접 관여하며 활동한 것은 성명회의 활동이 마지막이라 할 수 있다. 첩첩산중인 운산으로 피신하여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었던 의암은 ‘우주문답(宇宙問答)’을 저술하였다.
70세가 넘은 노구에 고질적인 지병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가족이 있는 요동으로 들어가 중화의 도를 지키며 여생을 조국 독립운동에 바치기로 한 류인 장군은 가족이 생활하였고 부인의 묘소가 있는 중국 요녕성 평정산 난천자 고려구로 돌아와 잠시 머물다가 회인현 사첨자진 팔리전자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류인석 장군이 이곳 사첨자진으로 이주한 것은 1896년 처음 중국으로 건너올 때 중국의 후원을 얻어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고, 국모의 원수를 갚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큰 꿈을 앉고 240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사첨자진 반납초구에 도착하였으나 회인현 현재 서본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고 땅을 치고 통곡하며 피눈물을 흘렸던 곳이라는 이유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류인석 장군은 의병해제를 당한 반납초구에서 혼강 건너편 관전현 보달원진 고려구로 이동하여 산정(頂上)에 초막을 지어 취호여사(翠湖旅舍)라 하고 생활하였다. 이 취호여사에서 내려다보면 240명의 의병이 해산을 당하고 피눈물을 흘렸던 혼강과 반납초구가 보인다. 죽어서도 일제에 당한 원한을 잊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거주하면서 74세의 노구에 지병을 앓으면서도 학자의 본분을 잃지 않고 최후의 저술인 ‘도모편(道冒篇)’을 집필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6. 맺는말
1) 의암 류인석선생은 이색· 정몽주· 이이· 송시열· 이항로· 류중교선생의 성리학사 상과 위정척사사상을 계승하여 화서학파의 종정(宗匠)이 되었고, 문집 57권을 남 겼다. 57권의 문집 중 51권으로 편집한 우주문답(宇宙問答)은 류인석선생 문집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으며, 우주문답을 통해 류인석 선생의 성리학의 심오한 학문을 알 수 있는 조선후기의 위대한 성리학자였다.
2) 조선말기 일제의 침략으로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봉착하자 의병을 모아 위정척사 사상을 의병정신(적과 싸울 때 이기고 지고, 죽고 사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싸우는 정신)으로 승화시키고,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어 20년간 항일구국 투쟁을 전개한 지구상에 유일무이한 위대한 학자요 의병장이었다.
3) 우리의 역사에서 외적의 침략으로 국가와 민족이 위기를 당하였을 때 목숨을 걸 고 싸워 적을 물리치고 국가와 민족을 수호한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등 위대 한 장군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국가로부터 직위를 받고, 녹봉을 받으며 평시에 는 군사를 교육하고, 유사시에는 군대를 지휘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적과 싸 웠다. 그러나 류인석 장군은 직위나 녹은 고사하고 군대도 식량도 모두의병장이 책임을 져야하는 어려운 것이다. 거기다. 류인석장군은 국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죽을 때 까지 친일아군과 싸웠다. 쫓기고 도망 다니면서도 20년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구국투쟁을 한 류인석 의병장을 세계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장군이 라고 할 수밖에 없다.
4) 류인석 장군은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15년 1월 29일 74세 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육신은 떠나셨으나 위국충정의 거룩한 의병 정신은 영원한 민족의 등불이 되어 빼앗긴 나라와 민족을 찾는 길잡이가 되었다.
또한 류인석 장군의 의병정신은 독립 정신으로 계승되었고, 1940년 광복군 정신으 로 계승되었으며, 1948년 국군의 정신으로 계승되어 오늘날 70만 국군이 국가와 5천 만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있다.
5) 임시정부 백범 김구주석은 1946년 8월 17일 의암 류인석 장군 묘소를 찾아오셔 서 묘소 앞에 두 무릎을 꿇고 고유문을 낭독하시면서 마지막에 “고국에 돌아와서 선생의 옛 고향을 찾으니 감회가 어찌 새롭지 아니 하오리까. 향불을 피우고 무한 한 심사를 고합니다. 이 후생이 무었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소서” 하셨다. 백범 김구 주석의 고유문은 류인석 장군의 위상을 더욱 높이고 있다.
6)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화서학파의 종장으로 위대한 성리학자이며, 20년간 목숨을 걸고 구국 투쟁을 한 위대한 의병대장 류인석 장군은 문무를 완전히 겸비한 유일 무이한 한민족의 인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류인석 의병정신과 4애정신(애국·애 도·애신·애인)을 7천만 한민족성신으로 승화할 때 대한민국은 세계의 일등국가가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