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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 憬. 婉. 獨島 茶禮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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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 정 약용 스크랩 自撰墓誌銘(集中本) 1 / 茶山 丁若鏞
오심/이길선 추천 0 조회 30 15.12.10 00: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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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많아 1.2로 나누었다>

 

 

 

自撰墓誌銘(集中本) 1 / 茶山 丁若鏞  

 

 

此洌水丁鏞之墓也 本名曰若鏞 字曰美庸 又曰頌甫 號曰俟菴1] 堂號曰與猶2] 取冬涉畏?之義也

父諱載遠 蔭仕至晉州牧使 母淑人海南尹氏3] 以英宗壬午六月十六日 生鏞于洌水之上馬峴之里 時惟乾隆二十七年也

이 무덤은 열수(洌水) 정약용(丁若鏞)의 묘이다. 본 이름은 약용(若鏞)이요, 자(字)는 미용(美庸), 또 다른 자는 용보(頌甫)라고도 했으며, 호는 사암(俟菴)이고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인데, 겨울 내를 건너고 이웃이 두렵다는 의미를 따서 지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재원(載遠)이며 음사(蔭仕)로 진주 목사(晉州牧使)까지 지냈다. 어머니는 숙인(淑人) 해남 윤씨(海南尹氏)로 영조 임오년(壬午年:1762) 6월 16일 약용을 한강변의 마현리(馬峴里)에서 낳았다. 이때는 청나라 건륭(乾隆) 27년이었다.

 

1]사암(俟菴) : “백세이사성인이불혹(百世以俟聖人而不惑)” 즉 뒷날의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함이 없다라는 뜻의 ‘기다림’의 의미가 있다. 어떤 성인에게도 자기 학문은 질책받지 않으리라는 확신의 뜻도 있다.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유배지(流配地)가 다산(茶山)이었기 때문에 뒷사람들이 부르게 되었으며, 자신이 사용하던 호로는 열수(洌樵)?철마산초부(鐵馬山樵夫)?여유병옹(與猶病翁)?다산초부(茶山樵夫)?탁옹(?翁) 등을 사용하였다.

2]여유당(與猶堂) : ‘여유(與猶)’의 뜻은 제2부에 실린 ?여유당기(與猶堂記)?를 참조 바란다. 노자(老子)의 말에 “여(與)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여! 사방이 두려워하는 듯하도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취한 것이다.

3]해남 윤씨(海南尹氏) : 다산(茶山)의 어머니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이요,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였다.

 

 

丁氏本貫押海 高麗之末 居于白川 本朝定鼎 遂居漢陽 始仕之祖 承文校理子伋 自玆繩承 弘文館副提學壽崗 兵曹判書玉亨 議政府左贊成應斗 大司憲胤福 江原道觀察使好善 弘文館校理彦璧 兵曹參議時潤 皆入玉堂

自玆時否 徙80]居馬峴 三世皆以布衣終 高祖諱道泰 曾祖諱恒愼 祖父諱志諧 唯曾祖爲進士也

정씨(丁氏)의 본은 압해(押海)로 고려 말에 배천(白川)에서 살다가 이씨조선을 세울 무렵부터 드디어 서울에서 살았다. 맨처음 벼슬을 한 선조는 승문원(承文院) 교리를 지낸 자급(子伋)으로 이때부터 쭉 이어져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수강(壽崗), 병조 판서 옥형(玉亨), 의정부 좌찬성 응두(應斗), 사헌부 대사헌 윤복(胤福), 강원도 관찰사 호선(好善), 홍문관 교리 언벽(彦璧), 병조 참의를 지낸 시윤(時潤)은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갔었다.

그 이후부터 세상이 어긋나자 마현에 이사와서 살았는데 3세를 모두 포의로 마쳤다. 고조의 이름은 도태(道泰), 증조의 이름은 항신(恒愼), 조부의 이름은 지해(志諧), 오직 증조만이 진사였다.

 

80]朝本에는 從.

 

 

鏞幼而영悟 頗知文字 九歲有母之喪 十歲始督課 五年之間 先考閒居不仕 鏞得以是讀經史古文頗勤 又以詩律見稱

十五而娶 適先考復仕爲戶曹佐郞 僑居京內 時李公家煥以文學聲振一世 ?夫李承薰又飭躬勵志 皆祖述星湖李先生(瀷)之學 鏞得見其遺書 欣然以學問爲意

약용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제법 문자를 알았었다. 9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했고 10세부터 비로소 과예(課藝)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후 5년 동안 아버지께서 벼슬을 하지 않고4] 한가히 계셨는데, 이 때문에 나는 경전(經典)과 사서(史書)?고문(古文)을 매우 부지런히 읽었으며, 또 시율(詩律)을 잘 짓는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었다.5]

15세에 결혼을 하자 마침 아버지께서 다시 벼슬을 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이 되셨으므로 서울에서 셋집을 얻어 살게 되었다. 이때 서울에는 이가환(李家煥) 공이 문학으로써 일세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자형인 이승훈(李承薰)도 또한 몸을 가다듬고 학문에 힘쓰고 있었는데, 모두가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아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약용도 성호 선생이 남기신 글들을 얻어 보게 되자 흔연히 학문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4] 다산이 6, 7세 때에 다산의 아버지는 경기도 연천(漣川) 현감을 지냈었다.

5]?사암연보(俟菴年譜)?에는 이 무렵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을 만들었다 했는데, 삼미(三眉)의 뜻은 유년시절에 마마를 앓아 눈썹에 마마 자국이 있어 눈썹이 셋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正宗元年丁酉 先考出宰和順縣 厥明年 讀書東林寺

庚子春 先考移醴泉郡 遂游晉州至醴泉 讀書廢?中

壬寅秋 栖奉殷寺 習經義之科

癸卯春 爲經義進士 游太學 內降中庸講義八十餘條 時鏞友李檗 以博雅名 與議條對

理發氣發 檗主退溪之說 鏞所對偶與栗谷李文成(珥)所論合 上覽訖 ?稱之爲第一

都承旨金尙集 出語人曰 丁某得褒諭如此 必大振矣

정조 원년 정유(丁酉:16세, 1777)에 아버지께서 화순(和順)현감으로 나가시게 되어 나도 따라가서 그 이듬해에는 동림사(東林寺)6]에서 독서를 했다.

경자년(庚子年:19세, 1780) 봄에 아버지께서 예천(醴泉)군수로 옮기셨으므로 진주(晉州)에 들러 노닐다가 예천으로 가서 쓰러져가는 관청집에서 공부를 했다.

임인년(壬寅年:21세, 1782) 가을에는 봉은사에 머물면서 경의과(經義科)의 과목을 공부하였다.

계묘년(癸卯年:22세, 1783) 봄에는 경의과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태학(太學)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때 임금이 중용강의(中庸講義) 80여 조목에 관하여 답변토록 과제를 내려주셨는데 이때 나의 친구 이벽(李檗)이 학식이 넓고 품행이 고상하다는 이름을 얻고 있어서 함께 과제에 답변할 것을 의론했다.

이발기발(理發氣發)의 문제에 있어서 이벽은 퇴계의 학설을 주장했고 내가 답변한 내용은 문성공(文成公)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학설과 우연히 합치되어서 임금이 다 보시고 난 후 매우 칭찬하시고 1등으로 삼아주셨다.

도승지(都承旨) 김상집(金尙集)이 밖에 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정아무개는 임금의 칭찬을 받음이 이와 같으니 크게 이름을 떨치리라”고 했었다.

 

6]동림사(東林寺) : 화순읍(和順邑) 북쪽 5리 지점 만연리(萬淵里)에 만연사(萬淵寺)가 있었고 그 동쪽에 조용하게 꾸며진 곳으로 경전에 대하여 제법 잘 알던 중이 살고 있던 절이 동림사(東林寺)라 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만연사만 있다. ?동림사독서기(東林寺讀書記)? 참조.

 

 

甲辰夏 從李檗舟下斗尾峽 始聞西敎見一卷書 然專治儷文 習表箋詔制 蒐輯累百卷 太學月課旬試 輒被高選 賞賜書籍紙筆數賜 對登筵如近臣 固未暇馳心于物外也

丁未以來 寵賚益蕃 而數就李基慶江亭肄業 基慶亦樂聞西敎 手?書一卷 其貳 自戊申也

己酉春 鏞以表文泮試居首 賜第殿試居甲科第二人 付禧陵直長 大臣抄啓隸奎章閣月課

갑진년(甲辰年:23세, 1784) 4월 이벽을 따라 두미협(斗尾峽)으로 배를 타고 내려가다 처음으로 서교(西敎)에 대하여 듣고 한 권의 책을 보았다. 그러나 변려문(騈儷文)의 학습에 온 마음을 기울여 공부하고 표(表)?전(箋)?조(詔)?제(制)7]를 익히며 그런 글들을 여러 백권 수집을 하면서 태학에서 달마다 내리는 과제와 열흘마다 보는 시험에 높은 점수로 뽑혀 서적이나 종이?붓 등을 자주 하사받기도 하고 경연에 올라가는 가까운 신하처럼 임금께서 자주 면담하도록 해주시어 그 밖의 일에는 참으로 마음을 기울일 겨를을 내지 못했었다.

정미년(丁未年:26세, 1787) 이후로는 임금의 총애가 더욱 높아갔고 자주 이기경(李基慶)의 정자(亭子)에 나가 과거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기경도 서교 듣기를 즐겨하여 손수 한 권의 책을 베껴놓기까지 했는데 그가 두 마음을 먹기는 무신년(戊申年:정조 12년, 1788)부터였다.8]

기유년(己酉年:28세, 1789) 봄에 나는 성균관에서 보던 시험에 표문(表文)으로써 수석하여 임금 앞에서 실시하는 대과에 응시, 갑과(甲科) 2등으로 합격하여 희릉 직장(禧陵直長)으로 발령을 받고 대신들의 품의로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뽑혀 규장각(奎章閣)에서 매월의 과제에 답변을 올리게 되었다.

 

7]표(表)?전(箋)?조(詔)?제(制) : 모두 임금께 올리던 글의 문체, 임금이 내리는 글의 문체임.

8]이해에는 서교를 탄압하자는 상소가 빗발쳤고 서교에 관한 책을 압수해 불사르기도 했으며, 채제공이 정승으로 들어간 해이며 남인 자체 중에서 공서파(攻西派)가 분리해나가기 시작함. 홍낙안?목만중?이기경 등이 한 동아리가 됨.

 

 

庚戌春 鏞與金履喬 薦入翰林爲藝文館檢閱 尋有人言 自引不仕 升司憲府持平 司諫院正言 月課居首 賜廐馬文皮以寵之

辛亥冬 內降毛詩講義八百餘條 鏞所對 獨得多算

御批有曰 泛引百家 其出無窮 苟非素蘊之淹博 安得如是 條條評? 悉踰所期

時有湖南權尹之獄 惡人洪樂安等 謀欲因此盡除善類 乃上書于樊翁 謂聰明才智搢紳章甫 十之七八 皆溺81]于西敎 將有黃巾白蓮之亂 上令樊翁 坐公署 召睦萬中洪樂安李基慶等査其虛實

基慶對曰 其書間有好處 臣與李承薰 嘗於泮中同看其書 若論看書之罪 臣與承薰 當同被威罰

卽又馳書于鏞 言其所對有權衡 欲與之求成

 

경술년(庚戌年:29세, 1790) 봄에는 약용이 김이교(金履喬)와 함께 추천을 받아 한림(翰林)9]에 들어가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그러나 곧 사람들의 말이 있어 스스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10] 다시 사헌부 지평(持平), 사간원 정언(正言)에 승진하고 월과(月課)에 수석하여 말과 호랑이 가죽을 하사받는 등 총애를 받았다.

신해년(辛亥年:30세, 1791) 겨울에 내각(內閣)에서 모시강의(毛詩講義) 800여 조를 내렸었는데, 나의 답변이 제일 많이 채택되었었다.

임금이 비평한 말씀에 “백가(百家)의 이론을 인용하여 나타낸 주장이 무궁하다. 진실로 평소에 쌓아둔 박식한 공부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러한 내용을 얻었겠는가”라고 하시며 조목마다 잘했다고 평가해 주시어 모두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았었다.

이 무렵 호남에서 권(權)?윤(尹)의 옥사(獄事)11]가있었는데 악인(惡人) 홍낙안(洪樂安) 등이 이 사건을 핑계삼아 착한 무리들을 모두 제거해버릴 것을 꾀하려고 하여 번옹(樊翁)12]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총명한 재주와 지혜로 보란 듯한 관료와 선비들의 열 명 중 7, 8명은 모두가 서교(西敎)에 빠져 앞으로 황건(黃巾)?백련(白蓮)의 난리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임금께서 채제공으로 하여 조사하는 관청에 앉아 목만중(睦萬中)?홍낙안?이기경 등을 불러다 그 허실을 조사하게 하였다.

이기경이 답변하기를 “그 책 속에는 좋은 곳도 있습니다. 저와 이승훈이 옛날에 성균과에서 공부할 때 함께 그 책을 읽었습니다. 만약에 책을 읽은 죄를 논하게 된다면 저와 승훈은 마땅히 똑같이 엄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했었다.

곧바로 또 나에게 편지를 보내서 답변했던 내용에 대하여 말하기를 “임금께 대답한 말에 저울질이 있었다. 풀려나게 하려고 한 것이다”라고 했다.

 

9]한림(翰林) : 예문관(藝文館)의 별칭. 궁중의 문한(文翰)을 맡아보던 영예스럽던 벼슬이다.

10]이때 공서파(攻西派)에 몰려 지금의 충남 서산군에 있는 해미(海美)로 10일간 귀양갔다 왔다.(俟菴年譜 참조)

11]권(權)?윤(尹)의 옥사(獄事) : 신해사옥(辛亥邪獄)을 말하며 권상연(權尙然)?윤지충(尹持忠) 사건.

12]번옹(樊翁) :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호가 번암(樊巖)이므로 암(巖) 대신 옹(翁)을 써서 번옹이라 하였다. ?번옹유사? 참조.

81]朝本에는 游.

 

鏞召李致薰語之曰 泮中看書 是實就理 宜對以實 欺君不可也

致薰曰 密告旣自首 獄詞雖違實非欺君也

鏞曰不然 密告非正獄詞 乃告君也 朝廷唯獄詞是觀 巨室名族家家公議 可畏也 今聖明在上 相君佐理 及是時潰癰 不亦可乎 他日雖悔 無及也 致薰不聽

乃承薰獄對 言基慶誣人 遂蒙白放 於是 李基慶以草土臣 上疏?大臣査事不公證 泮中看書事益詳

 

내가 이치훈(李致薰)을 불러다가 말하기를 “성균관에서 그 책을 읽은 것은 실로 심리를 받아야 할 것이다. 마땅히 사실로써 답변을 해야지 임금을 속이는 일은 옳지 못하다”라고 했더니,

이치훈이 말하기를 “임금께 비밀히 아뢰었으니 이미 자수한 거니까 옥중에서 피고가 답변한 것은 사실에 위배되더라도 임금을 속인 것까지는 되지 않는다”라고 해서

내가 “그렇지 않다. 밀고라는 것은 정식의 재판은 아니나 답변한 내용은 곧 임금께 고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오직 옥중의 답변 내용만 관찰하지만 훌륭한 집안과 이름 있는 족당에서의 집안마다의 공론도 무서운 것이다. 지금 어지신 임금이 위에 계시고 정승이 잘 도와 처리하고 있으니 이런 때에 종기를 따내버림이 옳지 않겠는가. 나중에 비록 후회한다 해도 손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했지만 이치훈은 끝내 듣지 않았다.

그리고는 이승훈이 감옥에서 조사받을 때 이기경이 무고(誣告)했다고 말하자 마침내 죄가 없다고 풀려나오고 말았다. 이러하자 이기경은 초토신(草土臣)13]으로 상소하여 조사한 일이 불공정했다고 대신(大臣)을 헐뜯으니 성균관에서 서서(西書)를 읽은 일이 더욱 상세하게 드러났다.

 

13]초토신(草土臣) : 상(喪)을 당해 복(服)을 입고 있을 때의 벼슬아치.

 

 

上怒投基慶于慶源 旁觀者快之 鏞曰毋然 吾黨之禍 自玆始矣

鏞以時 往基慶家(時在蓮池洞) 撫其幼子 及其母祥 以千錢助之

乙卯春 邦有大赦而基慶未放 鏞謂李益運曰 基慶雖心地不良而訟則負屈 一時之快 異日之患也 不如入告以釋之 益運曰吾意如此 遂入告如所言 上特放基慶

임금께서 화를 내시고 이기경을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유배를 보내자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우리 편의 화란이 이로부터 시작하리라”라고 말했다.

나는 때때로 이기경의 집을 찾아가서(그때 연지동에 있었다.―原註) 그의 어린 자식들을 어루만져 주었고 그의 어머니의 소대상(小大祥) 제사 때에는 천전(千錢)의 돈으로 도와주었다.

을묘년(乙卯年:34세, 1795) 봄에는 나라에서 대사면이 있었으나 이기경만은 석방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이익운(李益運)에게 말하기를 “이기경이 비록 마음은 불량하나 송사(訟事)에는 당해낼 사람이 없습니다. 일시적으로는 통쾌한 일이나 다른 때의 우환이 될 것입니다. 들어가 상감께 고하여 풀어주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라고 했더니, 이익운도 “내 생각도 그러하다”라고 하고는 곧바로 상감께 올라가 말한 대로 고했더니 임금께서 특별히 이기경을 풀어주게 하셨다.

 

 

基慶還旣久 稍入朝班 知舊無與立談者 鏞獨敍寒暄如平日 所謂 故也無失其爲故也

乃於辛酉之獄 基慶主謀 必欲殺鏞而後已

然對洪義浩諸人 語及鏞 必泫然流涕 雖大計所驅 而其良心未泯也

이기경이 풀려온 지 꽤 지나자 점차로 조정에 들어와 벼슬하게 되었는데 아는 친구로서 그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만이 홀로 옛날처럼 안부와 날씨를 물으며 평상시처럼 지냈다. 이른바 “친구란 친구로 삼았던 것을 없앨 수 없다”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이기경은 그가 주모한 신유사옥에서까지도 기어코 나를 죽여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홍의호(洪義浩) 등 나와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을 대할 때에 이야기가 나에 대해서 나오면 반드시 철철 눈물을 흘렸다고 하니, 비록 큰 계획을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한가닥 양심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 같다.

 

 

厥明年壬子春 鏞選入弘文館爲修撰 赴內閣修?和詩卷

四月先考捐館于晉州 聞急至雲峰戴星 旣月反柩于忠州 旣葬 反哭于馬峴 上數問存沒

是年冬 城于水原 上曰己酉冬舟橋之役 鏞陳其規制事功以成 其召之使于私第 條陳城制

鏞乃就尹?堡約 及柳文忠(成龍)城說 採其良制 凡?樓敵臺懸眼五星池諸法 疏理以進之 上又內降圖書集成奇器圖說 令講引重起重之法 鏞乃作起重架圖說以進之 滑車鼓輪能用小力轉大重

城役旣畢 上曰幸用起重架 省費錢四萬兩矣

 

신해사건 이듬해인 임자년(31세, 1792) 봄에 내가 선발되어 홍문관에 들어가 수찬이 되고 내각에 가서 ?경화시집(?和詩集)?14]을 만들었다.

4월에는 아버지께서 진주 임소에서 돌아가셨다. 병보를 듣고 급히 진주로 가던 중 운봉(雲峰)에서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분상했다. 다음달에야 관을 모시고 와 충주(忠州)에 장사를 지내고 마현의 가묘(家廟)에 혼백을 모셨다. 임금께서도 자주 안부를 물어 오셨다.

이 해 겨울에 수원(水原)에 성을 쌓는데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기유년(28세, 1789) 겨울에 한강에 부교(浮橋)를 놓을 때 약용이 그 방법을 아뢰어 주어 일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었다. 그에게 명하여 집에 있으면서 성곽 제도에 대해 조목별로 올려바치게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가 윤경(尹?)의 ?보약(堡約)?과 유성룡(柳成龍)의 성설(城說)에서 도움을 받아 그중에서 좋은 방법을 따다가 초루(?樓)?적대(敵臺)?현안(懸眼)?오성지(五星池)의 여러 방법을 이치에 맞게 밝혀 임금께 올렸다. 임금은 또 내각에 있는 ?도서집성(圖書集成)?과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보내 무거운 물건을 끌어올리고 세우는 인중기중(引重起重)의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셨기에 내가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작성하여 올려바치고 활차(滑車)와 고륜(鼓輪) 등을 써서 작은 힘으로 크고 무거운 물건을 운반할 수 있게 했었다.

성 쌓는 일을 끝마쳤을 때 임금이 말씀하시기를 “다행히 기중가(起重架)를 사용하여 4만 냥(兩)의 비용을 절약했다”라고 하셨다.

 

14]?경화시집(?和詩集)? : 임금의 시에 화답하여 지은 시를 모은 시집.

 

 

癸丑夏 蔡文肅(濟恭)以華城留守 入爲領議政 上疏復論壬午讒人

金鐘秀謂壬子聯箚後復提此事者 逆也 攻之甚力

上出示英考金?之詞 以昭莊獻世子出類之孝 事得已 時 洪仁浩對韓公(光傅)亦攻文肅之疏語多妄發 知舊搢紳章甫 齊聲攻洪 此所謂甲寅事也

洪疑我主論 遂與之有隙 其後稍自釋疑 而吾黨慘烈之禍 蓋權輿乎此矣

계축년(32세, 1793) 여름에 문숙공(文肅公) 채제공이 화성유수(華城留守)로 있다가 영의정이 되어 들어와 상소를 올려 다시 임오년의 참소했던 사람15]에 대하여 논했는데,

김종수(金鍾秀)가 말하기를 “임자년(1792)에 연명으로 올린 차자(箚子) 후에 다시 이 문제에 대하여 제기하는 사람은 역적이다”라고 하며 몹시 공격하였다.

임금께서 영조대왕의 금등의 말씀(金?之詞)을 꺼내 보이면서 장헌세자의 뛰어난 효도를 명확히 밝혀주어 일이 끝나게 되었다. 이때 홍인호(洪仁浩)가 한광부(韓光傅)공에 대항하여 역시 채제공의 상소문을 공격하였는데, 말 중에는 망발이 많아 친히 지내던 관료나 선비들이 모두 입을 모아 홍인호를 공격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갑인년(33세, 1794)의 사건이었다.

홍인호는 자기를 공격하는 일에 주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나인 줄 의심하고 마침내 틈이 나게 지냈으나 그 뒤에 의심은 조금씩 풀렸지만 우리 당(黨)의 참혹한 화란은 대개 이 사건에서 움트고 있었다.

 

15]임오년은 다산이 태어난 해인 1762년인데 사도세자(思悼世子)가 벽파의 모함으로 뒤주 속에서 굶어죽은 해. 그때 세자를 참소했던 사람들임. 벽파를 칭한다.

 

 

甲寅七月服? 授成均館直講 八月差備邊司郞 十月復入玉堂爲校理修撰

方直宿館中 忽被旨黜爲露梁鎭別將兼壯勇營別牙兵將 中夜投刺于寢殿 其實命爲京畿暗行御史也

時 徐相家人有居麻田者 謀以鄕校之地 獻于相門以爲佳城 詐云地不吉 脅鄕儒移學宮 已毁明倫堂

鏞廉知之則掩捕以懲之 又觀察使徐龍輔 於七重河沿邑 ?粟爲錢徵高賈 且曰是衿82]川治道之費也 欲輕?得乎 於是 小民怨之曰苦哉華城也 果川亦有路 奚爲乎衿83]川 謂上數幸寢園故 有此煩費也 鏞歸而奏之

 

갑인년(1794) 7월에 아버지의 복을 마치자 성균관 직강으로 제수받았으며 8월에는 비변사(備邊司)의 낭관을 맡고 10월에 다시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校理)?수찬(修撰)이 되었다.

마침 관청에서 숙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임금의 명령으로 노량진의 별장(別將) 겸 장용영(壯勇營)16] 별아병장(別牙兵將)으로 쫓겨났는데 밤중에 임금의 침전(寢殿)으로 불리어 들어가 보니 그건 경기 암행어사를 시키는 명령이었다.

이때 서정승(徐相)17]의 집 사람으로 마전(麻田)에 살던 사람이 있었는데, 꾀를 부려서 향교(鄕校)의 땅을 정승의 집에 바쳐 묘지로 삼으려고 “땅이 불길하다”라고 속이고 고을 유림들을 협박하여 향교를 이전키로 해서 이미 명륜당(明倫堂)을 헐어버렸었다.

내가 이 사실을 탐지해내고 곧바로 체포해 처벌해버렸다. 또 관찰사(觀察使) 서용보(徐龍輔)가 강가에 인접한 7개읍에서 관청 곡식을 팔아서 돈을 만드는 데 너무 비싸게 팔고 있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이 돈은 금천(衿川)의 도로를 보수할 비용이다. 싼 값으로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18] 이에 힘없는 백성들이 원망하면서 말하기를 “괴롭구나, 화성이란 곳이여. 과천에도 길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금천으로 지나는가”라고 하고 있었으니, 이는 임금이 자주 아버지의 묘소를 다니기 때문에 번거로운 비용까지를 물게 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암행을 마치고 돌아와 이 사실을 올려바쳤었다.

 

16]장용영(壯勇營) : 정조 15년 수원에 설치했던 군영(軍營)이다.

17]서정승(徐相) : 서용보(徐龍輔).

18]정조는 수원에 아버지의 묘소가 있어 종종 그곳에 행차했는데 실제로는 금천(衿川)은 들르지 않고 과천(果川)으로 지나갔지만 그러한 핑계를 삼아 탐학질하고 있었던 것 같다.

82] 朝本에는 矜.

83] 朝本에는 矜.

 

 

內醫康命吉爲朔寧郡守 地師金養直爲漣川縣監 皆?寵犯法貪?無忌憚 鏞劾奏之得照律

十二月 上議以明年追上徽號于莊獻世子 爲乙卯是莊獻誕生之回甲也 因亦上號于太妃太嬪 設都監于禮曹

蔡文肅公爲都提調 鏞與權坪爲都廳郞 時 朝臣議徽號八字 無金?彰孝之義 上欲改議 無以執言 密咨于文肅

李家煥曰 所上有開運字 此是石晉年號 宜以是言之

上大悅 遂命改議 乃上之曰 章倫隆範 基命彰休 章倫隆範是金?意也

 

내의(內醫) 강명길(康命吉)은 삭녕(朔寧)군수, 지사(地師) 김양직(金養直)은 연천(漣川)현감으로 있었는데 모두가 임금이 총애를 믿고서 법을 어기고 거리낌없이 탐학질을 했었다. 내가 이들을 탄핵하여 임금께 올려바쳐 의법 처리되도록 하였다.

그해 12월에 임금께서 의론하시기를, 명년에 장헌세자에게 존호(尊號)를 올려바쳤으면 한다고 하셨다. 을묘년(1795)은 바로 장헌세자의 회갑의 해여서 역시 태비(太妃)나 태빈(太嬪)에게도 존호를 올리기로 하고 예조(禮曹)에 그 문제를 전담하는 도감(都監)을 설치하였다.

채제공이 도제조(都提調)가 되고 나와 권평(權坪)이 도청랑(都廳郞)이 되었다. 이때 조신(朝臣)들이 올려바칠 휘호(徽號) 여덟 자를 의론해 놓았는데 그 내용에는 영조께서 내려주신 금등(金?)에 담긴 세자의 효성스러웠던 점을 빛나게 해주는 점이 없었기 때문에 임금께서는 바꿀 의론을 생각하면서도 흠잡을 말이 없어서 은밀히 채제공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이가환이 말하기를 “올려바친 여덟 자 중에는 개운(開運)이라는 두 글자가 들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석진(石晋)19]의 연호이니 당연히 그 이유를 대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20]

임금이 매우 기뻐하고 바꾸도록 명령하여 올려바쳤으니 ‘장륜융범 기명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였다. 바로 이곳의 장륜융범이란 금등의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21]

 

19]석진(石晋) : 중국 5대 때의 후진(後晉)을 말하며 찬탈한 석씨(石氏)가 세운 진(晉)이어서 그렇게 호칭한다.

20]여기서 정조?채제공?이가환?정약용 등은 시파(時派)로 어떻게 해서라도 사도세자의 무고함을 밝히고 그때 영조를 잘못 보좌해서 사도세자를 죽이게 한 벽파(僻派)의 입장을 곤란케 하려는 뜻이 있었지만 조정 대신들의 대부분은 노론 즉 벽파 사람들이 많아 풍파를 일으키지 않고 일을 세심하게 꾸미던 정조의 입장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21]여기서의 글자 한 자에 따라 사도세자의 역사적 평가가 나오고 이는 바로 당시의 정치적 파당에 막심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이때만 해도 다산 일파가 약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기도 한다.

 

 

大提學徐有臣 撰玉冊文 又不言金?85]事 應敎韓光植疏論其疎謬

上以韓疏下于都監諸臣 令議改84]撰當否 或點改一二句可乎

時 都監提調閔鍾顯沈?之李得臣李家煥 皆沈吟無定議

鏞曰 凡表箋詔誥之類 若其字句有病 略略刪潤焉可也 今玉冊不言金?事 是命脈都誤 不得不改撰 無以遺君父憂也

都提調蔡公遂請改撰焉 事旣竣將封而獻之 吏白曰 太嬪宮玉冊金印將書之曰 臣謹封乎 抑不臣也

蔡公令博考儀軌 皆不得所據 日中不決 遑遑不知所爲 鏞進曰 臣謹封可矣 蔡公目攝之欲毋妄言

대제학(大提學) 서유신(徐有臣)이 옥책문(玉冊文)을 지었는데 또 금등의 일을 말하지 않았다. 당시 응교(應敎)이던 한광식(韓光植)이 상소를 올려 옥책문의 소루함을 논했었다.

임금께서 한광식의 상소문을 도감청의 여러 신하들에게 내려보내고 다시 짓는 일이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를, 혹 몇개의 글귀만 고쳐도 될 것인가를 의론하라고 하셨다.

이때 도감 제조(都監提調)인 민종현(閔鍾顯)?심이지(沈?之)?이득신(李得臣)?이가환 등이 모두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아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무릇 표(表)?전(箋)?조(詔)?고(誥)의 종류란 만약 글귀에 잘못이 있다면 약간씩 깎아내도 괜찮으나 지금의 옥책에다 금등의 일을 말하지 않았음은 기본 줄거리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니, 부득이 다시 지어서 임금께 근심을 끼쳐 드리지 않는 게 좋겠다”라고 했었다.

그러자 도제조(都提調) 채제공이 다시 짓기를 청하기로 하였다. 다시 짓는 일이 끝나 올려바칠 때 궁리(宮吏)가 말하기를 “태빈궁(太嬪宮)에 바칠 옥책과 금인(金印)에 글을 쓸 때 신근봉(臣謹封)이라고 쓸 것인가 아니면 신(臣)이라고는 하지 말아야 할 겁니까”라고 물었다.

채제공이 여러 책이나 의궤(儀軌)를 살펴보라고 했으나 근거가 될 만한 것을 찾지 못하고 낮이 다 되도록 결정을 못한 채 우왕좌왕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기에 내가 말하기를 “신 근봉이 옳습니다” 했더니, 채공이 눈빛으로 망언을 못하도록 암시해 주었다.

 

84] 朝本에는 政.

85] 朝本에는 ?.

 

 

閔沈兩公曰 何哉

鏞曰 今玆玉冊玉寶金印諸物 都監諸臣 以其名 上之于太妃太嬪則 朝廷於太嬪 平日不稱臣 今亦不臣可也

今我諸臣 承上命 造此玉冊諸物 上之于大殿 大殿自以其孝誠 獻之于太妃太嬪 今我於大殿何爲不臣

蔡公大悟曰 善 一座稱善 是日諸郞官胥吏 觀者咸以爲快議 遂定

後數日 蔡公語之曰 臣與不臣關係極大(謂於追崇之義有嫌) 吾始聞君言大驚 及聞其釋義 乃豁然也

 

민(閔)?심(沈) 양공이 말하기를 “왜 그런가”라고 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지금의 옥책?옥보(玉寶)?금인의 여러 물건은 도감청의 여러 신하들 이름으로 태비나 태빈에게 올리는 것이라면 조정에서 태빈에게만은 보통 때 신(臣)이라고 칭하지 않기 때문에 이번의 일도 신이라고는 않는 게 옳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신하들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이 옥책 등의 물건을 만들어 대전(大殿)에 계시는 임금께 올리는 것이고 임금이 스스로 효도하는 정성으로 태비와 태빈에게 올려바치는 것인데 지금 우리가 대전의 임금에게 왜 신이라고 안해야 하는 겁니까”라고 했더니,

채공이 크게 깨닫고 “좋다”라고 하니, 그 좌석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잘되었다고들 했었다. 이날 여러 하급관리 및 궁중에 근무하는 궁리들로 그 일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통쾌한 논리라고 해서 의론이 결정되었다.

그 뒤 며칠 후에 채공이 말하기를 “신(臣)이라고 하는 것과 신(臣)이라 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큰 문제요,(追崇하는 것으로 여겨 혐의받을 것을 말함이다.―原註) 내가 처음 그대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는데 말뜻을 해석해낸 걸 듣고서야 마음이 풀렸구려”라고 하였다.22]

 

22]당시의 궁중에는 영조의 계비인 태비(太妃) 정순왕후(貞順王后) 김씨(金氏)가 있었다. 이 김씨는 벽파로서 계비(繼妃)로 들어온 후 사도세자와의 사이가 나빠 여러 차례 세자를 모함하였고 친정아버지 김한구(金漢?)와 그 족당들과 함께 나경언(羅景彦)을 사주하여 세자의 비행을 모함 상소하여 죽게 했던 장본인들이었다. 김씨(金氏)가 정조의 할머니로 왕실의 웃어른인데다가 김씨를 옳다고 믿으며 정권의 주도권을 잡은 많은 벽파 관료들이 좌지우지하고 있는 판세에 정조의 어머니인 태빈(太嬪)은 조정의 신하들이 신하라고도 칭하지 못하는 지경에 있었다. 사실 다산 일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태빈의 위치를 높이고 가능하면 사도세자를 추숭하여 왕으로 호칭받게 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세력판도가 그걸 용납해 주지 않았다. 그러하지 못함이 채제공의 말에서 여실히 엿보이는 내용이다. 사도세자는 고종(高宗) 때에 이르러서야 장조(莊祖)로 추숭받고 태빈 홍씨도 경의왕후(敬懿王后)로 추숭되었으니, 고심참담한 남인 시파들의 아픔이 어떠했나를 알 수 있다. 아들이 임금이요 남편이 왕세자로 대리 임금 노릇까지 했던 왕실의 엄연하 대비(大妃)로 뭇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존숭을 받아야 할 처지임에도 그럴 수 없었음은 노론 정권에 몰려 남편은 죽고 폐사제빈으로 서인(庶人)이 되었고 당시에도 계속 노론 정권하에 몰려 있던 나약한 왕실의 운명을 상징해 주는 듯 태빈의 문제는 늘 말썽거리였었다. 사도세자의 형 효장세자(孝章世子)는 10세에 죽었지만 진종(眞宗)으로 추존되었고 그의 빈 효순왕후(孝順王后) 조씨(趙氏)도 엄연히 왕후로 추숭되어 대접받던 일을 생각하면 시파와 벽파 즉 다산 일파와 벽파와의 싸움은 다산 일파의 참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도 했다.

 

 

時內閣學士鄭東浚 稱86]疾家居 陰執朝權 招納四方貨賄 貴臣名卿 每夜集百花堂?會 中外側目

鏞常欲擊東浚 草疏曰 內閣之設 卽殿下述先美振文治 而兼寓經遠之謨者也

凡在臣僚 孰不欽仰 第其選授或非其人 寵待有踰其分則 驕侈以萌 謗議以興

如閣臣鄭東浚之引疾家居 不效夙夜之勞 人莫不疑怪其事

況其第宅踰制 行路指點 此在閣臣恐非好消息

伏願殿下 稍加裁抑 使之謹拙守分則 非但朝野解惑 抑亦自家之福也 甲寅冬 再入玉堂 皆卽遞去不果上

乙卯春 東浚事發自裁 遂已之

이 무렵에 내각학사(內閣學士) 정동준(鄭東浚)이 병이 났다는 핑계로 집에서 지내며 음흉하게 조정의 권한을 잡아보려고 사방의 뇌물을 긁어 모으고 귀신(貴臣)과 명경(名卿)들이 밤마다 백화당(百花堂)에 모여 잔치를 베풀고 있자 안팎으로 눈을 찌푸리게 되었다.

내가 늘 정동준을 공격하고 싶어 상소문을 초해 놓기를 “내각을 설치한 것은 임금께서 옛날의 아름다움을 이어받고 문치(文治)를 펴나가게 하자는 것이며 또 원대한 경륜을 계획하려 함입니다.

무릇 신하로 있는 사람으로서 누가 그 일을 흠앙치 않으리요. 그러나 그 인원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더러는 적합치 못한 사람이 뽑혀서 임금의 총애를 분수 외로 받게 되자 교만심과 사치하는 마음이 움터 비방의 소리가 일어나게 되었으니

각신(閣臣)인 정동준과 같은 사람은 병을 핑계삼아 집안에 머무르면서 아침 저녁으로 공부하고 몸 닦는 일도 하지 않으니 그 일을 괴이하게 여겨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그의 저택은 규제를 벗어나 지나가는 사람마다 손가락질을 하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각신으로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좋은 소식이 될 게 없으리라 싶어 걱정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임금께서는 조금씩 억제해 주시고 분수를 지킬 수 있게 해주신다면 조정이나 조정 밖의 의심을 푸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행복일 것입니다”라고 적어놓았는데 갑인년(33세, 1794) 겨울에 두번째로 옥당에 들어갔고 곧 자리가 바뀌는 바람에 상소를 올리지 못하고 말았었다.

그러다가 을묘년 봄에 정동준이 일이 발각되어 자살해버려 마침내 그만두었다.

 

86] 朝本에는 移.

 

 

正月 特除司諫 尋擢爲通政大夫同副承旨 以都監勞也

二月 上陪太嬪及率郡主縣主 幸華城 一日 命鏞治裝莫知攸職 後數日 特除兵曹參議 以侍衛從焉

在華城與宴?和 寵遇頗摯 旣還 令於兵曹直中半夜 作七言排律百韻

及奏稱旨上命館閣諸學士閔鍾顯沈煥之李87] 秉鼎等 批評以進

令內閣學士李晩秀朗讀 加御批御評 ?諭隆重 賜鹿皮一領以寵之

上謂近臣曰 予將處鏞以館閣故 先爲之示意也

이 해 정월에는 특별히 사간(司諫)으로 임명되고 이어서 통정대부(通政大夫)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으니 도감(都監)의 노고 때문이었다.

2월에 임금께서 태빈을 모시고 부왕(父王)의 소생인 여러 누나 및 누이동생들과 함께 화성에 납시는데 하루는 약용에게 명하시기를, 따라갈 채비를 하라 하셔 무슨 직책을 주시려나 했더니, 며칠 후에 특별히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제수하시고 시위(侍衛)해서 따라오도록 하셨다.

화성에 있으며 연회석상마다 임금의 시를 화답해 지었는데 총애를 주심이 융숭했었다. 환궁한 뒤 병조에서 근무중인데 밤중에 칠언 배율(七言排律) 100구를 지어올리라 하셔,

올렸더니 칭찬해 주시고 예문관과 규장각의 여러 학사(學士)들인 민종현?심환지(沈煥之)?이병정(李秉鼎) 등에게 비평하여 올리라고 명령하고,

내각학사 이만수(李晩秀)에게 낭독하게 하시고는 임금의 비평을 곁들여 장려하고 깨우쳐 주심이 융숭하시고 사슴가죽을 하나 하사해 주시며 총애해 주셨다.

임금께서 가까이 있는 신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앞으로 약용에게 관각(館閣)의 일을 맡기려고 먼저 그 뜻을 보인 것이다”라고 하셨다.

 

87] 朝本에는 季.

 

 

是年春 鏞爲會試一所同考官 旣唱名 南人爲進士者五十餘人

時輩謬謂鏞行私濟其黨 上聞之大怒 据他事下獄 至十餘日責諭震疊 謂放恣無忌

又諭曰 平生不復秉朱筆 又令銓曹勿擬官職

後數日 上御春塘臺試士 特命鏞爲對讀官 鏞惶恐不知所爲

上諭蔡弘遠曰 予後知之 南人與選者皆二所 丁鏞一所也 無行私事

令入處奎瀛府與李晩秀李家煥李益運洪仁浩徐俊輔金近淳曹錫中等 共撰華城整理通考 鏞所掌特多

旣數日 上苑百花盛開 上於映花堂 下騎馬 內閣臣蔡(濟恭)以下十餘人 及臣鏞等六七人 皆騎內廐馬扈從 循宮牆一? 還至石渠門下馬 轉至籠山亭 曲宴

凡禁苑中水石花卉之勝 ?案圖書之秘 無不窺者 旣又移?至瑞?臺 上發射令諸臣觀 向夕引至芙蓉亭 賞花釣魚 令鏞等汎舟太液池 應敎賦詩 宣飯訖 賜御燭歸院

 

이 해 봄에 약용이 회시(會試)23]의 일소(一所) 동고관(同考官)이 되었는데 합격자를 발표하고 보니 남인(南人)으로 진사가 된 사람이 50여 명이었다.

이에 시배(時輩)들이 어긋난 소리로 내가 사심으로 자기 당을 구제했다고 말하니, 임금께서 들으시고 매우 성을 내시며 다른 일을 가지고 하옥(下獄)하여 10여 일에 이르게 하고 심하게 꾸짖으며 방자하고 거리낌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유시하기를 “평생에 다시는 시험관 노릇 하지 말라” 하셨고 또 이조(吏曹)로 하여금 관직을 주지 못하게까지 하셨다.

그런 후 며칠 뒤에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서 과거 시험을 보이는데 특별히 나를 대독관(對讀官)으로 삼았다. 약용이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니

임금이 채홍원(蔡弘遠)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뒤에 알았다. 남인으로 함께 뽑힌 사람이 모두 이소(二所)에서였으며 정약용은 일소(一所)를 맡았다. 사심으로 한 일이 없었다”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규영부(奎瀛府)에 들어가 근무하며 이만수?이가환?이익운?홍인호?서준보(徐俊輔)?김근순(金近淳)?조석중(曺錫中) 등과 함께 ?화성정리통고(華城整理通考)?를 편찬하라 하셨으니 내가 담당한 분야가 특별히 많았었다.

며칠 후에 상원(上苑)에서 백화가 만발하자 임금께서 영화당(映花堂) 아래서 말을 타시며 내각의 신하 채제공 이하 10여 인과 나와 6, 7인도 모두 말을 타고 따르라 하여, 임금을 호위하며 궁궐의 담을 돌아서 석거문(石渠門)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농산정(籠山亭)으로 돌아 들어가 물굽이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모든 궁궐 안 동산에 있는 수석(水石)?화훼의 뛰어난 경관과 궁중에서 사용하는 책상, 비장된 도서 등 구경하지 않은 게 없었다. 또 임금이 행차를 옮겨 서총대(瑞蔥臺)에 이르러 활을 쏘시며 여러 신하들에게 구경하게 하였고, 석양 무렵쯤 부용정(芙蓉亭)에 이르러 꽃을 구경하고 고기를 낚았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태액지(太液池)에서 배를 타고 시를 읊게 하셨다. 저녁밥을 마치고 궁중에서 사용하는 초(燭)를 하사받고 모두 돌아왔었다.

 

23]회시(會試) : 문무과(文武科)의 초시(初試)에 합격한 사람들이 서울에 모여 보던 시험. 여기에 합격하면 생원(生員)이나 진사(進士)가 되며 대과(大科)에 응시할 자격을 얻는다.

 

 

後數日 上幸洗心臺賞花 鏞又從焉 酒旣行 上賦詩 令諸學士?和

內侍進彩?一軸 上命鏞入御幕中 寫詩 鏞於榻前抽筆 上以地勢不平命安軸于御榻上 寫之 鏞頓88] 首不敢進 上?命之 鏞不得已如命揮毫點墨 上皆逼視之 稱善 其見待如此

며칠이 지나서 임금이 세심대(洗心臺)에 행차하여 꽃을 구경하셨는데 내가 또 따라갔었다. 술이 한 바퀴 돈 후 임금께서 시를 읊으시고 여러 학사들에게 임금의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짓도록 하셨다.

내시(內侍)가 채전(彩?) 한 축을 올려바치니 임금께서 나에게 임금이 계시는 장막 속에 들어와 시를 베끼도록 명령하셨다. 내가 임금님 바로 앞에서 붓을 뽑아들고 글씨를 쓰려는데 임금께서 지세가 고르지 못하니 두루마리 종이를 임금님의 책상 위에다 편편하게 놓고서 글씨를 쓰라고 하셔 내가 머리를 조아리며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더니, 임금께서 급히 독촉하여 내가 마지못해 명령대로 책상 위에 놓고 글씨를 썼다. 임금께서 모든 글자를 바싹 다가서서 보시고는 잘 썼다고 칭찬해 주셨으니 나를 대해 주시던 일이 이와 같았었다.

 

88] 朝本에는 頻.

 

 

夏四月 蘇州人周文謨 變服潛出 匿于北山之下 廣揚西敎

進士韓永益知之 告于李晳 鏞亦聞之 晳告于蔡相公 公密告于上 命捕將趙圭90] 鎭 掩捕之 文謨逸 執崔尹等三人 杖殺之

睦萬中等 煽動浮言 欲因此盡陷善類 陰嗾朴長卨

上疏論李家煥誣云 丁若銓庚戌對策 以五行爲四行 而家煥擢之爲解元

上覽對策 察其誣 下諭以辨之 流長卨于四裔 而惡黨蜚語日甚 時宰勢家習聞其說 謂李家煥等 實其根? 不可以不罪也

上苦之 秋黜家煥補忠州牧使 鏞補金井驛察訪 李承薰投配禮山縣

其日下諭曰 渠若目不見非聖之書 耳不聞悖經之說 無罪渠兄何登公車 渠欲爲文章則 六經兩漢 自有好田地 其必務奇求新 至於狼狽身名 抑何嗜慾

雖云?跡不綻得此梁楚卽其斷案 設已向善 因此自拔 在渠無非玉成 前承旨丁鏞 金井察訪除授 當刻登程 ?圖生踰江漢之方

金井在洪州地 驛屬多習爲西敎 上意欲令鏞曉喩以禁之也

 

여름 4월에 중국의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변복을 하고 몰래 들어와서 북악산 아래 숨어서는 서교(西敎)를 몰래 펴고 있었다.

진사 한영익(韓永益)이 그걸 알아내서는 이석(李晳)에게 말하자 나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 이석이 채상공(蔡相公)에게 알리자 채공이 임금에게 은밀히 아뢰고는 포도대장 조규진(趙圭鎭)에게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주문모는 놓쳐버리고 최인길(崔仁吉)?윤유일(尹有一) 등 3인을 붙잡아 장살(杖殺)해버렸다.

목만중(睦萬中) 등이 선동을 하고 뜬소문을 퍼뜨려서 이 사건을 트집잡아 착한 무리들을 완전히 구렁텅이에 빠뜨리려 하고는 음험하게 박장설(朴長卨)을 사주하여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상소문에서 이가환을 무고하였으니, 내용인즉 “정약전(丁若銓)이 경술년의 회시 때 지은 책문(策文)의 답변에 오행(五行)을 사행(四行)으로 하였어도 이가환이 뽑아서 회원(會元)으로 했다”라고 했다.

임금이 그 대책문(對策文)을 읽어보시고 무고임을 살피시고 유시를 내려 잘잘못을 가리고는 박장설을 육지의 끝 변두리로 유배시켰다. 그러자 악당(惡黨)들이 유언비어를 날마다 퍼뜨리니 당시의 재상, 세력 있는 집안에서 이런 일을 귀에 익게 들어서 말하기를 “이가환 등이 주문모 사건에는 참으로 밑바탕이니 죄를 주지 않으면 안된다”라고들 했다.

임금이 괴로워하시다 가을에는 이가환을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좌천하고 나를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하여 임명하고 이승훈은 예산현(禮山縣)으로 유배를 보내며

그날 유시를 내리기를 “그가 만약 눈으로 성인의 책이 아닌 걸 읽지 않고 귀로 상도에 어긋나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죄없는 그의 형(若銓)이 벌을 받았겠느냐? 그가 만약 뛰어난 문장을 쓰고 싶었다면 육경(六經)과 양한(兩漢)의 문장이 좋은 모범이 될 터인데, 기이(奇異)를 힘쓰고 새로운 것만 찾다가 몸과 이름을 낭패보기에 이르렀구나! 무슨 버릇인가!

비록 그의 행적이 완전히 탄로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건의 깊고 얕음을 캐냈으니 그 죄가 판명된 것이다. 만약 선으로 마음이 향해 그가 이로 인해 스스로 뉘우친다면 그에게 있어서는 다 훌륭한 인재로 되는 길이다. 전 승지 정약용을 금정찰방으로 제수하니 즉각 출발해서 목숨이나 살아 한강을 넘어올 방법을 도모케 하라”고 하셨다.

금정(金井)은 홍주(洪州)에 있는 곳으로 역속(驛屬)들이 대부분 서교를 믿고 있었다. 임금께서 나로 하여금 잘 회유시켜 금지시키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89] 朝本에는 函.

90] 朝本에는 奎.

 

 

鏞至金井 招其豪 申諭朝廷禁令 勸其祭祀 士林聞之 謂有改觀之效

於是 請木齋李(森煥) 會于溫陽之石巖寺 時內浦名家子弟 若李廣敎 李鳴煥 權夔 姜履五等 十餘人 亦聞風來集 日講洙泗之學 校星翁遺書 十日而罷

又訪北溪尹就協 方山李道溟 皆有志之士也 

내가 금정에 도착하여 그곳의 세력가들을 불러다가 조정의 금령(禁令)을 거듭거듭 설명해 주고 제사지내는 일을 권고하였더니, 사림(士林)들이 듣고는 사태를 바꿀 만큼의 효과가 있었다고들 했었다.

이 무렵에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에게 청하여 온양(溫陽)의 석암사(石岩寺)24]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때에 내포(內浦) 지방의 이름난 집안의 자제로 이광교(李廣敎)?이명환(李鳴煥)?권기(權夔)?강이오(姜履五) 등 십여 명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어 매일 수사(洙泗)의 학문을 강론하고 성호 선생의 문집을 교정하면서 열흘 만에 마쳤다.25]

또 북계(北溪) 윤취협(尹就協)과 방산(方山) 이도명(李道溟)을 방문하였는데 모두 뜻이 높은 선비들이었다.

 

24]석암사(石岩寺) : 석암산(石岩山)에 있는 봉곡사(鳳谷寺)를 말한다.

25]이 사실은 다산(茶山)의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 ?봉곡사술지시서(鳳谷寺述志詩序)? 등을 참조.

 

 

冬以特旨 內移 時李鼎運 出爲湖西觀察使 前使柳? 捕李存昌 謂鏞與聞其謀 欲歸功於鏞 使得自拔

上聞之 密諭鼎運 飭到界卽具奏聞 令鏞得因此遂開進途

李益運又傳 上諭 令鏞條擧事實 以付鼎運 鏞曰 不可 士君子立身事君 雖捕澄玉施愛 尙不足據以爲功 況此小? 又未嘗發謀?策 今?然鋪張 以捕捉?君之惠 死不敢爲也 乞無遵上旨 使我愧死 益運憮然而去 蓋以此?旨云

其後金履永 又補金井察訪 還白鏞在金井 誠心?? 且居官廉謹

沈煥之奏曰 丁鏞因軍服事 特命停望 至今未解 其人旣可用 且於金井多所?? 請復收用 上允之

겨울에 임금의 특명으로 내직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이때 이정운(李鼎運)이 충청도 관찰사가 되어 나갔다. 전 관찰사 유강(柳?)이 이존창(李存昌)을 체포하여 말하기를 그 일을 나와 함께 모의한 일이라 하였으니, 공로가 나에게 돌아가 발탁되게 하려는 뜻에서였나 보다.

임금께서 그 이야기를 듣고는 이정운에게 은밀히 유시하여 부임한 즉시 자세히 올려바치게 하였으니, 나로 하여금 그것 때문에 진로가 열리게 하려 했던 것이다.

이익운(李益運)이 또 전해주기를, 임금이 유시하기를 “약용으로 하여금 사실을 열거해서 이정운의 이야기와 부합하게 하라”고 하셨다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럴 수는 없다. 사군자(士君子)가 몸을 세우고 임금을 섬길 때 비록 이징옥(李澄玉)이나 이시애(李施愛)를 체포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런 것으로 자기의 공로를 삼지 않는 것인데, 하물며 그 따위 조그만 놈을 잡아서 그렇게 하겠는가. 그리고 그자를 체포하려 모의하거나 계획을 꾸몄던 게 없었는데 이제야 보라는 듯이 과장해서 찬양하여 임금의 혜택을 얻어내려 하는 일은 죽어도 못할 짓이다”라고 하여 임금의 뜻이라도 나를 부끄럽게 해주는 일에는 애걸해도 따르지 않았더니, 이익운이 겸연쩍은 듯이 가버렸다. 모두들 이것 때문에 임금의 뜻을 어겼다고까지 말하기도 했었다.

그후에 김이영(金履永)이 금정 찰방으로 보직을 받고 나갔다가 돌아와 내가 금정에 있으며 성심으로 계도하였고 또 직무 중 청렴하고 근엄하게 하였다고 아뢰자

심환지(沈煥之)가 임금께 상주하기를 “정약용이 군복사(軍服事) 때문에 특명으로 관리에 추천하지 못하도록 되어 지금까지 풀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 사람을 등용시키는 게 옳습니다. 또 금정에 있을 때 백성을 많이 계도하였으니 다시 임용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임금이 허락하셨다.

 

 

丙辰春 因刑曹錄啓下諭曰 近聞筵臣言 內浦一帶 爲外補察訪誠心敎? 有刮目之效 特賜中和尺 仍降御詩二首 令鏞?進

秋 上遣檢書官柳得恭 詢奎韻玉篇 義例于李家煥及鏞 至冬 召鏞入奎瀛府 與李晩秀李在學李翼晉91]朴齊92] 家等 校史記英選 數賜對議定書名 日賜珍膳奇味 以?之 又數賜米柴炭雉??橘之屬 及奇香珍物

十二月 除兵曹參知 尋移右副承旨 陞左副

병진년(丙辰年:35세, 1796) 봄에 형조(刑曹)에서 올린 기록 때문에 임금이 유시하시기를 “요즘 연신(筵臣)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포(內浦) 일대에 찰방으로 외직나간 사람이 성심껏 백성을 깨우쳐 괄목할 만한 효과가 있었다 하니 중화척(中和尺)을 특사한다”라고 하시고 임금이 지은 시 두 편을 내리시고는 나에게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가을에 임금께서 검서관(檢書官)26] 유득공(柳得恭)을 보내어 ?규운옥편(奎韻玉篇)?의 의례(義例)에 대하여 이가환과 나에게 상의하도록 하였으며, 겨울이 되자 나를 부르셔 규영부에 들어가 이만수?이재학(李在學)?이익진(李翼晋)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사기영선(史記英選)?을 교정하도록 하셨다. 출판할 책의 이름을 결정하는 데 자주 참여하도록 해주셨고, 날마다 진귀한 선물과 맛있는 음식으로 배불리 먹게 해주셨다. 또 자주 쌀이나 땔감?꿩?젓갈?홍시?귤 등 과일 및 아름답고 향기로운 보물들을 하사해 주셨다.

12월에는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제수하셨고 이어서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옮겨 좌부승지로 승진시켜 주셨다.

 

26]검서관(檢書官) : 규장각에서 서적의 교정과 편찬을 담당하던 관리. 유득공(柳得恭)?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 등이 4검서(檢書)로 특히 유명하다.

91] 朝本에는 翼李.

92] 朝本에는 齋.

 

 

丁巳春 賜對于大酉舍宣飯 下詢貨殖傳袁?傳疑義 承命就外閣 與李書九尹光顔李相璜等 校春秋左氏傳 又命爲泮試對讀官 下諭令秉朱筆考卷 皆異數也

六月再入院 爲同副承旨 乃上疏洞陳本末 以達其致謗之由

略曰 辭不迫切 謂之看書 苟唯看書而止則 豈遽罪哉 蓋嘗心欣然悅慕矣 蓋嘗擧而?諸人矣 其於本源心術之地 蓋嘗如膏漬水染根據枝?而不自覺矣 反覆說累千言

정사년(다산 36세, 1797) 봄에 대유사(大酉舍)27]에 불리어가서 식사를 대접받고 화식전(貨殖傳)?원앙전(袁?傳)의 의심나는 문제에 대하여 논의를 받고 답하였으며, 임금의 명을 받고 외각(外閣)에 나가 이서구(李書九)?윤광안(尹光顔)?이상황(李相璜) 등과 함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교정하였고, 또 성균관에서 보는 시험의 대독관(對讀官)이 되었다. 임금의 명령으로 고시관이 되었음은 딴 사람에 비하여 유독 자주 있던 일이었다.

6월에는 다시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가 되었는데 사직 상소28]를 올려 얽힌 문제의 앞뒤를 투철하게 진달하여 서교 문제로 비방받던 까닭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드렸다.

간략히 말하면 “말을 박절하게 않으려 해서 간서(看書)라고 하는 것이지 참으로 책만 보고 멈춰버렸다면 어찌 죄라고 하겠습니까. 애초부터 마음속에 기뻐서 즐거워 사모하듯 했고 처음부터 치켜세우며 여러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마음의 본바탕에 처음부터 기름이 엉키고 물들고 뿌리박고 가지가 얽혀 있듯이 했으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했습니다”라는 내용으로 반복해서 수천 마디의 이야기를 했었다.

 

27] 대유사(大酉舍) : 소유사(小酉舍)와 함께 왕실(王室)의 서고.

28]사직 상소 : 이른바 ?자명소(自明疏)?로 유명한 글이다.

 

 

上批答曰 善端之萌 ?然若春噓物茁 滿紙自列 言足感聽 筵臣亦多爲鏞言者 上爲之嘉? 會谷山都護使貶遞 上以御筆書鏞名 以授之 鏞陞辭

上曰 向來之疏 文詞善而心事明 誠未易也 正欲一番進用 議論苦多不知何故 且休?? 且遲一二年無傷也 行且召之 無用??然也 時時貴讒嫉者多 上意欲令鏞居外數年 以凉之耳

임금이 답변을 내리시기를 “착하겠다는 단서(端緖)의 움이 분명하여 봄에 만물이 솟아나는 부르짖음같이 모든 글 내용이 조리 있어 말을 듣고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라고 하셨다. 다른 연신(筵臣)들도 또한 나를 위해서 말해 주는 사람이 많았다.29] 임금께서 가상하게 여겨 권장해 주시려는데 마침 곡산 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가 잘못으로 바뀌게 되자 임금이 어필로 나의 이름을 써서 나에게 임명장을 주셨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상소한 글은 이야기 내용도 좋았지만 마음씨도 밝았으니 참으로 다시 변하진 못하리라. 정말로 한번 올리어 쓰고 싶었지만 의론들이 귀찮도록 많으니 무엇 때문인 줄 모르겠다. 그리고 근심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거두어라. 1, 2년이 더 늦더라도 괜찮을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떠날 때 다시 불러서 근심과 슬픔을 보이지 말라고 하심이었다. 그때 세력을 잡은 자로 참소하고 질투하는 자가 많아 임금의 뜻은 내가 몇년 외직에 근무하도록 하여 그 불길을 식히려 함이었다.

 

29]이상으로써 다산의 서교(西敎) 문제는 완전히 종결되어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고 상하간에 전비(前非)를 뉘우치고 정상으로 되돌아온 걸로 끝을 보았으나 정치적 모함에 걸려 파란곡절을 겪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先是 上令金履喬履載洪奭周金近淳徐俊輔等諸臣 爲史記選纂註 旣進 病其煩?93] 思欲刪正 至是上曰 谷山閑邑也 其往爲之 鏞受命而退 每簿書有暇 覃精?? 書旣成因內閣進之 李晩秀報曰 書奏稱旨

谷山之民 有李啓心者 性喜談民? 前政時 砲手保棉布一疋代徵錢九百 啓心率小民千餘人 入府爭之 官欲刑之 千餘人蜂擁啓心 歷階級呼聲動天

吏奴奮?以逐之 啓心逸 五營譏之不可得 鏞至境 啓心疏民?十餘條 伏路左自首

左右請執之 鏞曰毋 旣首不自逃也 旣而釋之曰 官所以不明者 民工於謀身 不以?犯官也 如汝者 官當以千金買之也 於是 凡京營上納之布 鏞親於面前度而受之

전에 임금이 김이교(金履喬)?김이재(金履載)?홍석주(洪奭周)?김근순(金近淳)?서준보(徐俊輔) 등 여러 신하로 하여금 ?사기선찬주(史記選纂註)?를 편찬케 하여 이미 올려바치었는데, 그 책의 내용이 번거롭고 어려운 탓으로 줄여서 바르게 하려던 생각이셨는데 이 때서야 임금이 말씀하기를 “곡산은 한가한 고을이다. 그곳에 가면 그 일을 해다오”라고 하셔 내가 명령을 받고 물러와 매일 공문서를 처리한 틈틈에 깊고 넓고 정밀하게 연구하여 휜 것과 뒤틀린 것을 바로잡아 완성한 후에 내각을 통해 올려바치게 했더니 이만수가 전해주기를 “책을 올리자 칭찬이 있었다”라고 했다.

곡산 사람에 이계심(李啓心)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백성들이 당하는 괴로움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지난번의 도호부사가 재직하고 있을 때 포수보(砲手保) 면포 1필 대금으로 돈 900문씩을 거두어들였는데 이계심이 백성 천여 명을 인솔하고 관청에 들어와 항의하자 부사가 벌을 주려 하니 천여 명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계심을 둘러싸고 계단으로 올라가며 소리를 지르니 천지가 동요하게 되었다.

아전과 관노배들이 몽둥이를 들고 쫓아내자 이계심은 달아나버려 오영(五營)에서 기찰하여 붙잡으로 해도 붙잡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부임차 곡산 땅에 이르니 이계심이 백성들의 괴로워하는 사항 10여 조목을 들어 기록하여 올려바치고는 길가에 엎드려 자수하였다.

옆사람들이 체포하기를 청했으나 내가 말하기를 “그러지 말라. 한번 자수한 사람은 스스로 도망가지 않는다”라고 하여 석방시키면서 말하기를 “관장이 밝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백성이 자기 몸을 위해서만 교활해져 폐막을 보고도 관장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에서 마땅히 천냥의 돈을 주고라도 사야 할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런 후에는 서울 군영에 상납해야 할 모든 포목은 내가 친히 면전에서 자(尺)로 재어 받아들였다.

 

93] 朝本에는 ?.

 

 

鄕校有五禮儀 載布帛尺圖 校之時用尺 差者二寸 於是按圖作尺 期合乎京營銅尺 以收民布 百姓便之 厥明年 布益貴 鏞乃出?需錢及官俸錢二千餘兩 貿布于浿西 以充京納 徵其賈于民 以償之 皆不過二百 民以爲家獲一犢矣

國法 凡倉穀必分巡以頒之 或至八九巡 鏞每一日 召數鄕之民 使一時盡輸 以減其煩費 簡其來往

戊午冬 收糧幾畢 掌財臣鄭民始 奏請?谷山米七千石 是年大登 米不過斛二百(十五斗) 乃詳定之價四百二十也 鏞條列利害 以報上司 趣民畢輸糧封倉以俟之

鄭公奏曰 國之爲國以紀綱也 臣等請之 殿下允之 監司布之 乃守令悍然不遵 何以國矣 請罪鏞以懲後

上取原報覽之曰 古者 掌財之臣 周知八路市賈賤則?之 貴則?之 法也 今卿 ?賤以貴 鏞之不遵 不亦可乎

곡산 향교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있었는데 그 책에는 포목을 재는 자의 그림이 실려 있었다. 그림의 자와 그때 사용하던 자와 비교해 보니 차이가 2촌(寸)이나 있었다. 그래서 자의 그림에 맞도록 새로 자를 제작하여 서울 군영에서 사용하는 구리자(銅尺)와 일치케 하여 면포를 거두어들였더니 백성들이 편하게 여겼었다. 그 이듬해에는 포목이 더욱 귀하게 되자 나는 칙수전(勅需錢)과 관봉전(官俸錢) 2천 냥을 풀어서 평안도에 가서 포목을 사다가 서울에 바칠 것을 충당하였고 그 가격을 백성들에게 징수해서 채웠으니, 모두 해야 한 집에 200푼이 넘지 않아서 백성들은 호마다 송아지 한 마리를 얻은 셈이었다.

국법에는 대개 창곡(倉穀)은 반드시 순차로 나누어 배급하도록 하였으나 더러는 여덟번?아홉번까지 나누어 배급하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매 초하루에 몇개 면(面) 사람들을 불러다가 한꺼번에 다 타가게 하여 그 번거로움과 비용을 줄여 주고 왔다갔다 하는 불편을 간략하게 했다.

무오년(1798) 겨울 환곡을 거두어들이는 일이 거의 끝났는데 재신(財臣) 정민시(鄭民始)가 곡산에서 쌀 7천 석을 팔(?)게 하도록 주청하였다. 이해는 대풍년이어서 쌀값이 1곡(斛:15말이다.―原註)에 200푼 정도인데 상정(詳定)한 가격이 420푼이나 되었다. 내가 조목별로 이해를 가려 상급 관청에 보고하고는 백성들을 독촉하여 양곡을 모두 수납하고 창고를 닫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민시가 다시 주청하기를 “나라가 나라인 것은 기강 때문입니다. 저희들이 주청하여 임금께서 허락하셨고 감사가 발표한 일을 수령(守令)이 성깔을 내고 따르지 않는다면 어찌 나라가 되겠습니까”라고 하여 나에게 죄를 주어 징계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께서 본래 올려바친 보고문을 가져다 읽어보시고는 “옛날에 양곡과 세금을 담당한 신하들은 팔도의 시장가격을 두루 알아 값이 싸면 사들이고 값이 비싸면 곡식을 방출하는 게 법이었다. 그런데 지금 경(卿)은 시장가격이 싼데 비싸게 팔라고 하니 약용이 따르지 않음은 옳지 않은가”라고 하였다.30]

 

30]다산이 곡산 다스리던 소문이 나자 이를 시기하던 무리들이 다산이 곤란을 당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凡戶籍期至 吏?民增戶 民爭輸賂以冀無增 以故 敗里日凋 富村日裕 民用不均 鏞先修砧基簿 作縱橫表 又作地圖 設經緯線以周知民虛實强弱 及地之闊狹遠近以故罷籍監籍吏 官爲之增減戶額 悉中情實 不數日而籍單齊到 無一人訴其寃者

每鄕甲薦報軍丁 鏞逆知其貧??? 卽應聲責之曰 某?新自某郡來鰥而? 何以應軍布 鄕甲錯愕 不敢復言 皆用砧基表以知之 非?術也

무릇 호적을 정리하는 해가 되면 아전들이 백성을 위협해 호구 수를 늘리도록 하고 백성들은 부산하게 뇌물을 바쳐 호구 수를 늘리려 하지 않기 때문에 본래부터 가난한 마을은 뇌물을 바치지 못해 호구 수는 늘어만 가서 마을은 갈수록 말라빠지고 돈이 있는 마을은 호구 수가 늘지 않으므로 더욱 부자가 되어 백성들의 살림이 균등하지를 못했다. 내가 먼저 침기부(砧基簿)를 수정하고 종횡표(縱橫表)31]를 작성하였으며, 또 지도를 그리고 경위선(經緯線)을 만들어놓아 백성들의 허와 실, 강하고 약함, 지역의 넓고 좁음, 멀고 가까움을 상세히 알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적감(籍監)?적리(籍吏)를 없애버리고 관장이 호액(戶額)의 증감을 실정에 맞도록 할 수 있었다. 며칠이 안되어 호적단자(戶籍單子)가 일제히 들어왔는데 한 사람도 억울함을 하소연해 오는 사람이 없었다.32] 향갑(鄕甲)이 군정(軍丁)의 명단을 올릴 때마다 내가 몰래 그 사람의 딱한 처지를 알아내 가지고는 즉석에서 소리내어 꾸짖기를 “모 농민은 새로 모 군(郡)에서 이사오고 홀아비인데다 절뚝발이 병신인데 어떻게 군포(軍布)를 물겠는가”라고 하면 향갑이 깜짝 놀라 다시는 그런 말을 못하고 말았다. 나는 이미 침기표(砧基表)를 보고 그 집의 사정을 알아두었던 것이지 특별한 술수(術數)를 써서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31]종횡표(縱橫表) : 다산의 ?호적의(戶籍議)?라는 글에서 가로 세로로 선을 그어 호적의 표준으로 만든 양식을 말한다. 이 논문에 의하면 아전 중에서 꼼꼼하고 신중함이 있는 10명을 골라 마을로 파견하여 종횡표에 따라 호적을 작성토록 했다.

32]?호적의(戶籍議)?에 보면 다산이 곡산 시절에 사용했던 것의 보기를 들어놓았는데 오늘의 주민등록표보다 더 명료히 알 수 있게 되어 있어 신분과 직업?재산까지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던 게 ‘종횡표’였었다.

 

 

節度使鄭學? 飭簽虛錄白骨之軍 鏞曰何哉 軍布莫良於虛錄 軍簽莫善於白骨 愼勿生事 鄭未喩 鏞曰有軍布之契 有役根之田 此戶布也 戶布者 國家之所欲?行而不能者也 民自爲之 何爲亂之 事遂已

建政堂修公? 乃取諸庫諸廳事例節目 悉毁棄之 新立條例 以行之 先是費用每? 再斂民戶 自玆充羨有餘裕 後尹 有欲改之者 吏民皆執不可 終不得改一條焉

절도사(節度使) 정학경(鄭學?)이 허록(虛錄)과 백골(白骨)의 군정(軍丁)을 뽑는 데 대해서 신칙하려고 하자 내가 말하기를 “왜 그런 일을 하려 합니까. 군포란 허록(虛錄)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군적은 백골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데 괜히 일거리를 만들지는 마십시오”라고 했더니, 정학경이 잘 이해하지를 못하자 내가 다시 말하기를 “군포계(軍布契)와 역근전(役根田)이 있는데 이는 호포(戶布)입니다. 호포란 국가에서도 곧장 시행하고 싶어하나 되지 않는 겁니다. 그것을 백성들이 스스로 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어지럽게 만들렵니까”라고 했더니, 그때서야 알아듣고 그만두어버렸다.33]

곡산의 정당(政堂)을 새로 짓고 다른 관청의 건물들을 수리했으며 모든 창고 모든 청사의 예규(例規)의 문서들을 파기해버리고 새로 조례를 만들어서 시행케 하였다. 전에는 관공서 비용이 부족하면 다시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였는데 이때부터는 충분히 남아 돌아갔다. 그 뒤에 부임한 사또들이 조례를 고치고자 했으나 아전이나 백성들이 물고늘어져 한 조목도 끝내 고치지 못했다고 한다.

 

33]황해도 지방에서 당시의 관행으로 허록과 백골의 부락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군포계?역근전 따위를 민간에서 만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목민심서? 곡부조와 평부조 참조.

 

 

戊午冬季 ?疾猝自西路至 鏞先寢疾 而邑中老者得則 必死 不數日而哭聲動四?

鏞勸民相療治以米粟?其急 又葬?其無主者

歲旣新 鏞方擁被 趣召?需監吏 令于白川江西寺 ?往貿鋪?紋席

僉愕不喩曰 勅使來乎 曰否 猶宜速往 吏往貿之 還到平山府 義州撥馬飛奔過之曰 皇帝崩 勅使來矣

吏旣回 一府大驚 鏞曰無異也 病自西方來 老人皆死 是以知之

무오년(37세, 1798) 겨울 12월에 괴상한 질병이 갑자기 평안도 쪽에서 들어와 내가 먼저 앓아 누웠다. 고을의 노인들이 걸리기만 하면 틀림없이 죽어갔는데 며칠이 못가 울음소리가 온 주변을 진동케 했다.

내가 백성들에게 권해서 서로 도와 병을 낫게 하거나 급한 대로 곡식을 풀어 주기도 했고, 또 주인 없는 시체들은 장사 지내서 매장시켜 주도록 했다.

새해(己未:38세, 1799)가 되자 내가 아직 요를 둘러쓰고 있으면서 칙수감리(勅需監吏)를 불러서 배천(白川)의 강서사(江西寺)에 가서 진 곳에 까는 화문석을 사오게 했다.

모두가 깜짝 놀라며 알아차리지 못하고 “칙사가 옵니까”라고 해서 “그렇지 않다”라 하고는 빨리 가서 사오기나 하라 하니, 아전이 가서 사가지고 오는 도중에 평산(平山)에 도착하였는데, 의주(義州)에서 파발말이 나는 듯이 달려가며 “황제가 죽어 칙사가 왔다”라고 하였다.

아전이 고을에 돌아와 소문을 내자 온 마을이 깜짝 놀라 야단법석이었다. 내가 말하기를 “이상할 것이 없다. 돌림병이 서쪽으로부터 왔으며 노인들이 다 죽는 것을 보고 알았다”라고 했다.34]

 

34]칙사 영접 잔치를 열기 위해 온 고을 백성들의 재산을 탕진하던 예가 자주 있었기에 백성들은 크게 걱정하고 있었지만 다산은 민폐를 줄이려고 미리 채비를 하고 칙사 오기를 기다렸다는 뜻이다.

 

 

春假銜戶曹參判 爲黃州迎慰使 留黃州五旬 上密諭 令鏞廉訪道內守令臧否 及?賓諸弊 以守令而察守令 亦稀有也

先是道內有疑獄二 鏞密奏之 上諭監司査審 監司李義駿差鏞行査 二獄皆決

會夏旱 上欲審理庶獄 念鏞獄詞稱旨 遂除兵曹參知 在道除同副承旨 入都除刑曹參議

旣登筵 上謂刑曹判書趙尙鎭曰 卿今老矣 參議年少頗聰穎 卿宜高枕一付之參議也

判書得此諭 凡庶獄疏決一委之 鏞多所平反

有一?枉罹獄旣老莫肯白者 鏞溯考初覆檢公案發其寃 上命直於曹庭給衣冠白放

봄에 임시로 호조참판(戶曹參判)의 직함을 띠고 황주(黃州)에서 영위사(迎慰使)가 되어 50여 일을 머물렀다. 임금께서 은밀하게 유시를 내려 나로 하여금 황해도 내 수령들의 잘잘못과 사신 접대로 인한 여러 폐단 등을 염찰(廉察)토록 하셨으니, 수령이 수령을 염찰토록 해주신 일도 퍽 드문 일이었다.

전에 황해도 내에는 해결치 못한 옥사(獄事)가 두 건이나 있었는데 내가 임금께 은밀히 올려바쳤더니 임금이 감사에게 유시하여 조사토록 하니 감사 이의준(李義駿)이 나를 차출해다가 조사케 하였기에 두 옥사가 모두 해결을 보았다.

마침 여름에 가뭄이 심하자 임금께서 여러 가지의 미결된 옥사들을 심리하고 싶으셔 내가 재판한 내용에 대하여 칭찬해 주던 일을 생각해내고는 마침내 병조참지(兵曹參知)를 제수하시고 올라가는 도중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바꾸고 서울에 들어가자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제수하셨다.

어전에 오르니 임금께서 형조판서 조상진(趙尙鎭)에게 말씀하시기를 “경은 이제 늙으셨소. 참의는 나이가 젊고 매우 총명하니 경은 마땅히 높은 베개를 베고 쉬면서 모두 참의에게 넘기시오”라고 하셨다.

판서가 이 유시를 듣고는 모든 일반 범죄 사건이나 판결지어야 할 상소사건을 위임하자 내가 옥사를 상당히 해결해내었다.

어떤 무식한 농부가 억울하게 걸려 옥사가 매우 오래 끌며 판결나지 않는 사건이 있었는데, 내가 초검(初檢)과 재검(再檢)의 조서를 검토하여 그 억울함을 밝혀냈더니, 임금께서 형조(刑曹)에 명하여 의관(衣冠)을 지급해 주고 석방하라고 하셨다.35]

 

35]다른 기록에는 함봉련(咸奉連)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논함봉련옥사계(論咸奉連獄事啓)? 참조.

 

 

 

武臣李聖師買一婢 及聖師死有訟 會有臺言激 上怒 上命執其孫某杖問一百下 天威震疊 令察其拷掠 一曹惶怯 鏞曰苟拷之酷死而已 殺士非聖意也 飭備數而止 奏言無罪 上意以解

有一奸民 重賣貢物 託云朱券在華城不可得 鏞鞫之曰 ??小民 敢欲憑華城爲城社得乎 兩日而朱券至矣

一日上曰 爾自海西來 宜陳痼? 鏞奏椒島屯牛事 上卽命下諭盡除牛籍 又奏勅使迎接諸弊 上曰李相時秀 新經遠接使 其往議之 遂命所費 皆報銷之

무신 이성사(李聖師)가 계집종 하나를 샀는데 성사가 죽어버리자 소송이 일어났다. 때마침 사헌부의 진언이 임금을 격노케 하여 명령하기를, 성사의 손자 모(某)를 잡아다가 장형(杖刑) 100을 내리도록 하니, 임금의 위엄에 눌려서 형을 집행하려고 하면서 형조 전체가 겁을 먹고 있기에 내가 말하기를 “참으로 고문을 참혹하게 하면 죽을 뿐입니다. 선비를 죽이는 것은 임금의 뜻이 아닐 겁니다”라고 하고 주의시켜 매의 숫자만 채우고 그치게 하고, 그의 무죄임을 말씀드렸더니 임금의 마음이 풀어졌던 일도 있었다.

간사한 백성이 한 사람 있어 나라에 바치는 공물(貢物)을 이중으로 팔아먹고 핑계대기를 “주권(朱券)이 화성(水原)에 있어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국문(鞫問)을 받게 하고는 “쥐새끼 같은 놈이 감히 화성에 빙자해서 성호사서(城狐社鼠)36]를 하려고 하니 되겠느냐?”라고 호령하니 이틀 만에 주권이 이르렀었다.

하루는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황해도로부터 왔으니 당연히 그곳의 고질적인 병폐를 말해야 한다”라고 하셔서 나는 초도(椒島)의 둔전(屯田)에 있는 소(牛)의 문제를 말씀드렸더니, 임금이 즉각 명령을 내려 모든 소의 장부를 없애버리게 하였다. 또 중국 칙사 영접에서 오는 여러 가지 폐단을 말씀드렸더니 임금께서 “정승 이시수(李時秀)가 새로 원접사(遠接使)로 나가니 그가 갈 때 의론하라”고 하시고 마침내 드는 비용의 모두를 문서로 적어서 보고하도록 명령하시었다.37]

 

36]성호사서(城狐社鼠) : 여우나 쥐새끼를 더 큰 피해 때문에 제거하지 못한다는 비유이다.

37]이처럼 관리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여 백성의 아픔과 그 시대의 병폐를 시정해 나가자 모함은 더 억세어져 형조 참의를 마지막으로 관계를 떠났다.

 

 

時 眷注日深 夜分乃罷 不悅者忌之 洪時溥謂鏞曰 子其愼之 吾?有爲玉堂吏者曰 丁公夜對未罷則 玉堂遣吏伺候憂不能寐 子其堪之乎

未幾 大司諫申獻朝 啓論權哲身 遂及鏞兄 啓未畢 上怒譴之

朝報無文 鏞不知也 臺臣閔命赫 又論鏞冒嫌行公 鏞引疾不出 踰月乃遞

무렵 임금님의 보살핌과 관심을 가져주심이 날로 깊어져 밤이 깊어서야 문답이 끝나고 하니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시기를 했었다. 홍시보(洪時溥)가 나에게 말하기를 “자네 좀 조심하게. 우리 청지기에 옥당의 아전이 된 자가 있는데 말하기를 ‘야밤에 정공(丁公)의 야대(夜對)가 끝나지 않으면 옥당에서 아전을 보내 엿보느라 걱정되어 잠을 자지 못합니다’라고 하데그려. 자네는 그런 걸 감당하겠나”라고 하였다.

며칠이 못되어 대사간 신헌조(申獻朝)가 계(啓)를 올려 권철신(權哲身)에 대하여 논죄하고 이어서 나의 형 약종(若鍾)의 일을 아뢰자 계가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성을 내며 꾸짖으셨다.

조보(朝報)에는 그런 내용이 없어 나는 그런 사항도 모르고 있었는데 사헌부의 대관(臺官) 민명혁(閔命赫)이 또 약용이 혐의(嫌疑)를 무릅쓰고 벼슬살이하고 있다는 상소를 올렸기에 나는 병이 남을 이유로 나가지 않아 달이 넘어 교체가 되었다.

 

 

冬有庶孼趙華鎭者上變 言李家煥丁鏞等 陰主西敎 謀爲不軌 韓永益爲其腹心 上察其誣 以變書宣示家煥等且曰 韓永益告北山事 安得爲腹心 閣臣沈煥之 忠淸觀察使李泰永 咸以爲誣事得已 趙華鎭 嘗求婚於韓 韓不聽 以其妹嫁鏞之庶弟鐄 以此謀殺永益 以及鏞也

上每讀一部書訖 太嬪具膳羞 爲洗書禮 以循閭巷童穉之俗 上爲賦詩令鏞?之

겨울에 서얼 출신 조화진(趙華鎭)이라는 자가 급변(急變)을 상고하니, 내용인즉 “이가환?정약용 등이 음험하게 천주교를 주장하며 궤도에 벗어난 짓을 음모하고 있고 한영익(韓永益)은 그들의 심복이 되어 있다”라고 했었다. 임금이 그것은 무고임을 살펴내고 그 변서(變書)를 이가환 등에게 돌려보도록 하고 또 말씀하시기를 “한영익은 북산사(北山事)38]를 올려바친 사람인데 어떻게 심복이 되겠는가”라고 하셨고, 내각의 신하 심환지(沈煥之), 충청도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이 모두 무고라고 하자 일은 끝나버렸다. 조화진이 전에 한영익에게 구혼을 했었는데 한영익이 들어주지 않고 그 누이를 나의 서제(庶弟) 약황(若鐄)에게 시집 보냈는데, 이런 일 때문에 한영익을 죽일 속셈으로 나까지 끌고들어간 것이었다.

임금이 책 한권 읽기를 다 끝마치면 태빈(太嬪)이 음식을 준비하여 세서례(洗書禮)를 하셨으니, 일반 민간들의 어린이들이 책을 다 배우면 책씻이하던 것을 따라서 하신 일이다. 이 일에 대하여 임금이 시를 짓고 나로 하여금 화답시를 짓게 하자 화답했었다.

 

38]북산사(北山事) :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북악산 밑에 숨어 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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