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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1장>
5 너희는 마지막 때에 나타내려고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있느니라.
6 그러므로 필요하다면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잠시 슬퍼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크게 기뻐하는 것은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써 단련될지라도 없어져 버리는 금보다 훨씬 더 귀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8 너희가 그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며, 지금도 그를 보지 못하나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이 영광으로 가득 찬 기쁨으로 즐거워하나니
9 이는 너희 믿음의 결과, 곧 너희 혼들의 구원을 받음이니라.
필자가 성경 해석을 할때 항상 강조하는 몇 가지가 있다. '교리적 해석'이 최우선적인 것이고 영적, 역사적 해석은 교리적 해석을 뒷받침하는 '살'과 같은 것이다. 교리가 '뼈대'이므로 교리가 무너진 상태에서는 바른 영적 해석도 잘 나오지 않는 것이다.
5 너희는 마지막 때에 나타내려고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고 있느니라.
성경에서 '마지막 때'는 기본적으로 다니엘의 칠십째 주(7년 대환란)을 가리킨다. 대환란이 아닌 경우 대환란에 가까운 교회시대 끝의 시대를 말하기도 한다. 셋째로 이상 두 의미와 전혀 상관없이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대(교회시대)를 마지막 때라고 한다.
그러나, 오 너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그 말씀을 닫고 그 책을 봉하라. 그 때에는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달릴 것이요 지식이 증가하리라.” 하더라(단 12:4).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나니, 마지막 때에 어떤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리라(딤전 4:1).
단 12:4에서 '그 책을 봉하라'는 것은 요한계시록이 기록되기 전까지 다니엘서가 봉해져 있다는 말인데, 다니엘서의 짝은 요한계시록이므로 서로를 맞춰보면 둘 중 하나가 없으면 해석이 되지 않는단 뜻이다.
단 12:4의 '마지막 때'는 벧전 1:20에서의 '마지막 때'와 같은 의미로서 '초림과 재림 사이'의 때를 말한다. 성경이 '마지막 때'를 여러가지 의미를 담아 말씀하기 때문에 무천년주의자들은 대환란이 특정 7년이 아니라 교회시대 1900여년 동안 지속되어 왔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실로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미리 정해지셨으나 너희를 위하여 이 마지막 때에 나타나셨으며(벧전 1:20)
필자가 성경 해석을 하면서 두번째로 강조하는 원칙이 있는데 성경은 '한 단어'로 두 세가지 의미는 기본적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그 이상 많을 경우도 허다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성경에서 '새'는 진짜 공중을 날아다니는 날짐승인 새를 의미할 수도 있고 날짐승으로 비유된 공중 권세일 수 있다.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아서 어떤 사람이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더니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었느니라.”고 하시더라(눅 13:19).
네 생각으로라도 결코 왕을 저주하지 말고 네 침실에서나마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이는 공중의 새가 그 음성을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퍼뜨릴 것임이라(전 10:20).
겨자씨 한 알은 큰 나무가 될 수 없지만 되었다. 이 나무는 비유적으로 로마 카톨릭을 말하는데 그 가지에 깃들인 공중의 새들은 마귀, 악령들을 말한다. 이 비유 자체가 나무에 빗대어 어떤 거대 종교를 묘사하고 있으므로 문자적 새가 깃드는 게 아님은 당연지사이다.
전 10:20은 비유가 아닌데 '왕이나 부자'는 대환란 때의 '열 명의 마귀 왕들', '악한 부자들'을 의미하므로 공중의 새들은 악령들인 것이다. 날짐승과 공중의 새들은 사람의 말을 엿듣거나 전파하지 못한다. 새로 비유된 마귀들이다.
이런 것은 <향상된 계시>의 급에도 못 들어가는 상식에 가까운 분별인데 이조차도 개역성경과 칼빈주의로 인해 뇌가 굳어버린 교단 교인들은 대개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개'를 목사라고 천편일률 해석하는 신'chun'지들의 말장난에 속아버리는 것이다.
성경의 마지막 때는 여러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는 '주의 날'이 '천년왕국 끝의 우주적 불심판'을 의미할 수 있고, 아마겟돈 전쟁 날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주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그의 음성을 발하시리니, 이는 그의 진영이 매우 크고 그의 말씀을 실행하는 분은 강하심이라. 주의 날이 위대하고 심히 두려우니 누가 그것을 견뎌 낼 수 있으리요?(욜 2:11)
의심의 여지없이 욜 2:11의 '주의 날'은 아마겟돈에 주님의 군대가 내려온 날이다. 대환란이 아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내리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타버릴 것이라(벧후 3:10).
욜 2:11과 벧후 3:10의 '주의 날'은 전혀 다른 주의 날이다. 아마겟돈 전쟁 직후에는 하늘들이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녹아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은 땅에 보좌를 세우고 통치하신다. 그것이 천년왕국이다. 그러나 천년왕국 끝에 가면 벧후 3:10의 일이 일어날 텐데 민족들의 최후 반란 후에 그렇게 된다.
그런데 왜 둘 다 '주의 날'인가? 상식으로 보면, 똑같은 말이니까 똑같은 사건이어야 되지 않는가? IQ 200을 넘기지 못하는 인간의 두뇌로는 딱 거기까지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의 IQ로 성경을 재단하는 것만큼 무가치하고 어리석은 짓은 없다. 성경은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고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인간의 상식으로 재단해서 오류를 지적할 것은 불신자가 하는 짓이다. 불신자만이 아니라 성경을 많이 연구한 신학자들도 말씀 자체를 진지하게 믿지 않으면 성경을 대함에 있어 불신자보다 나은 점이 없게 된다.
성경은 한 단어로 여러 의미를 말씀할 수 있다. '시온'은 땅에도 있고 셋째 하늘에도 있다. 땅에 예루살렘이 있는데 하늘에도 새예루살렘이 있다.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하여 성령의 인도하심대로 연구하고 공부하면 뇌가 잘 녹슬지 않는다. 유연한 사고방식을 기르는 것과 관련있기 때문이다. 요새는 아이들 EQ를 개발한다, 감수성 개발한다고 쓸데없는 사교육, 조기교육 엄청나게 시키는데 성경을 이렇게 가르쳐 보라, EQ고 IQ고 엄청나게 성장할 것이다.
신chun지든, 칼빈주의자들이건, 무천년주의건, 배교한 신학자들이건 공통점이 있는데 그들은 '하나에 하나' 밖에 대응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뇌가 굳어있고 자기들의 산술능력(1+1=2)을 벗어나는 방정식은 격렬하게 반발하고 거부한다. 즉 자신들의 일차원적 사고능력을 벗어나는 모든 성경 구절은 그들에게 '이단'이 되어 버린다. 그들은 어려운 한자 말을 많이 쓰거나 히브리어, 헬라어로 쉬운 진리를 가려 버리고 논쟁하기를 즐긴다. 쉬운 진리가 쉬운 보통 말로 청중 앞에 드러나는 것은 '학자들'에게 있어서 견딜 수 없는 수치이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공교육에서 진화론으로 뇌가 세척되었고 교단 교회에서는 '영적 진화론'에 물들어 버렸다. 마귀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성경 역시 진화된다'고 가르쳐 놓았다. 시대가 바뀔수록 위대한 학자들의 공헌으로 성경은 개선되고 좋아진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러니 KJV1611과 한글킹제임스 성경에 오롯이 담긴 옛적 진리들은 뇌가 세척된 그들에게 배척되고 이단시되는 것이다.
6 그러므로 필요하다면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잠시 슬퍼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크게 기뻐하는 것은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써 단련될지라도 없어져 버리는 금보다 훨씬 더 귀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8 너희가 그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며, 지금도 그를 보지 못하나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이 영광으로 가득 찬 기쁨으로 즐거워하나니
9 이는 너희 믿음의 결과, 곧 너희 혼들의 구원을 받음이니라.
6-7절, 교회시대에 성도들이 시험과 믿음의 시련으로부터 얻는 소득(성과)은 그것이 '금처럼 나타나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나타나실 때, 즉 공중 휴거의 날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받는 것이다. 그 칭찬과 존귀와 영광은 '영적인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뭉게 구름같이 피어 올라서 사라지는 환상이 아니다. 역시 개역성서와 칼빈주의와 알레고리 신학으로 뇌가 세척당한 사람들은 셋째 하늘에 꼬마 유령 캐스퍼 같은 뭉게 구름 인간들이 둥둥 날아다니는 줄로 착각한다. 셋째 하늘에는 '유령들'이 살지 않는다.
그곳에는 '몸들'(고전 15:40)이 있으며 천사들의 '몸', 예수 그리스도의 '몸', 영적인 '말들'(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하늘의 말을 탄다), 심지어 불병거들도 있고 '유니콘'(사 34:7)도 있다. 유니콘이 사실 재림 때 타실 흰 말이다. 그뿐인가? 모세의 몸과 엘리야의 몸, 에녹의 몸도 거기에 있다. 누가 셋째 하늘(하늘나라, 혹은 낙원)을 Ghost House라고 가르쳤던가? 조용기의 '사차원의 영적 세계' 같은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이 하품하는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성경을 믿어야 한다.
8-9절, 보지 못하였으나 믿는 사람은 복되다. 누구를 말하는가? 나사로나 니코데모인가? 그들은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들이 오순절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우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를 입고 영생을 누릴 것이다. 그러나 보고 믿은 다음 신약 구원을 얻지 못하고 죽었다면 그 사람은 신랑 친구인 침례인 요한과 같이 교회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교회와 이스라엘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한두가지 문제를 야기하는 게 아니다. 많은 성경 구절을 거짓말로 만들게 된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 도마야, 네가 나를 보았으므로 믿는구나. 보지 않고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고 하시니라(요 20:29).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목도하고 만나서 대화하고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들은 그들의 상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그의 말씀도 직접 듣지 못한 사람, 심지어 예수님의 사도들조차 만나보지 못한 20세기에 사는 거듭난 사람들이 주를 섬기는 상은 '보지 못하였으나 인내로 얻는 믿음의 상이다.
많은 오순절 은사주의자들은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환상 가운데 본다'고 말한다. 심지어 하늘나라도 오르락 내리락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의 상은 거기까지인 것이다. 마귀에게 미혹되었는가,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본 것인가가 중요한게 아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거듭난 사람들이라 해도 그들에게 하늘의 상은 없다. 자기들의 영원한 상을 반납, 포기해 버린 사람들이 잠깐 환상과 꿈을 보았다고 기뻐하는 것을 보라.
9절, 이것이 오늘의 핵심 구절이다.
<믿음의 결국>은 어떤 말인가? 개역성경이 교리를 혼잡케 하는 비수를 여기 감춰 놓았다.
결국:
1) ultimately 2) end up 3) in the end 4) after all 5) finally
결과: '종말', 종료'
믿음의 결과와 믿음의 결국은 다르다. 결과는 지금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미 산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한 사람은 '양심'에서 '영'에서, '생각'에서 '이성'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한다. 그에게 구원은 현실이고 아직 오지 않은 부활은 기정 사실이며 이미 확정된 것과 같이 여겨진다.
'믿음의 결국'은 '결국 가봐야 아는 것이지'에 연결된다. 그래서 개역성경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결국 죽어봐야 하늘나라인지 지옥인지 알수 있지'라는 칼빈주의의 '견인 사상'에 젖어 산다. 이것은 알미니안의 '끝까지 견뎌라'와 같이 통한다. 그 어느 쪽이든 외길 낭떠러지다. 칼빈주의를 배척하는 한국 교인들도 '끝까지 견딘다'(알미니안)가 칼빈주의에 있는 줄 잘 모른다. 그들은 '구원의 보장'만 혐오하고 배척하는데 실은 칼빈주의 견인관은 거저 그냥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게 아니다.
교인에게 끊임없이 견디는 '믿음과 행위'를 통해 결국 견인 구원을 시켜준다는 것이다. 구원파건, 감리교인이건, 침례교인이건(한국식 침례교), 오순절 교인이건 똑같이 '칼빈주의 견인론'에 세뇌되어 젖어 있다. 그들은 '믿음의 결국'인 구원을 받기 위해 '결국' 죽어봐야 확인될 것으로 안다. 실은 카톨릭도 '결국 죽어봐야 구원'에 젖어 사는데 그들은 보다 노골적으로 7성사를 지키고 교황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얻으려 한다. 이들이나 저들이나 교리의 골자는 똑같다. '행 - 위 - 구 - 원' 이다.
이 구절은 의심의 여지없이 구원을 '받음이니라'고 말하고 '결과'(end)라고 못박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성령을 받을 때 거듭나고 혼이 구원받는 그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한다. 이 구원은 두 번이나 세 번 받지 못하며 한번 받으면 끝이다.
이 구원은 '몸의 부활'이나 '칼빈주의식 견인'(거룩한 생활)과 상관없는 '한 지나간 사건'으로서의 성도의 기정 사실의 구원이다.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에 의하지 않고 그의 자비하심에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딛 3:5)
이런 구절에서는 '혼의 구원'이 과거의 사건으로 못박아 설명하기 때문에 행위구원론자들은 여기서 소득을 얻을 수 없다. 어떤 과감 무식한 행위구원론자는 헬라어 문법을 거짓으로 제시해서 구절의 의미를 바꾸려고 무의미한 시도를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의 보다 분명한 '행위구원' 구절로 달려가서 '성경이 성경을 대적해서 분란이 일어나게끔' 유도한다.
오 허황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인 줄 네가 알고자 하느냐?(약 2:20)
그들은 이런 구절을 제시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므로 끝없는 행함을 통해 생애 끝까지 구원을 받아 나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칼빈주의 견인관(구원의 보장을 왜곡한 칼빈주의의 제5조항)과 얼마나 어울리는가? 얼마나 청교도적이고 성결해 보이며 하늘 찬송이 울려나는 것 같이 환각을 일으키는가? 이들은 그런데 구절의 핵심을 항상 놓쳐버리고 말한다.
야고보서가 가르치는 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처음부터 '죽은 것'이라고 한다. 살았다가 죽은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죽은 믿음이었다. 죽은 믿음은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야고보서는 죽은 믿음을 가진 거듭났다 착각하는 불신자에게 쓴 것인가? 천만에, 야고보서는 유대인들에게 기록되었다. 확실히 말하자면 초대교회의 유대인 성도들에게 기록된 것이다. 순교한 야고보 사도가 이 서신서를 썼고 그는 교회시대 극초기에 죽어서 사도 바울 서신서를 전혀 모르는 채 야고보서를 썼다. 그의 교리는 사도행전 2장의 단계에서 멈춘 상태인 것이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에서 어떻게 설교했던가? '침례중생'을 가르쳤다. 물침례받으면 구원받는다, 이 시대에 타당키나 한 말인가? 그러나 그 당시 이스라엘 회중에게는 맞는 말씀이었다. 그때는 과도기였기 때문에 과도기적 교리가 있었고 사도들은 초자연적인 이적도 행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답변하기를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행 2:38).
사도행전 2:38을 근거로 물침례(혹은 세례)를 받으면 성령의 선물, 곧 성령을 받아 거듭난다고 가르치는 '영적인 천치들'이 오늘날도 있다. 주로 오순절 은사주의자들 중에 득실거리는데 그들의 교리는 주로 사도행전, 그것도 2장에 집중되어 있다. 그들이 핵심 교리로 주장하는 '방언'이 거기 나오기 때문이다. 어떤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이 너무 "외국어"처럼 보여서 거부하고 '고린도전서'로 숨어버린다.
물침례로는 아무도 거듭나게 할 수 없다. 로마 카톨릭이 1500년 넘게 줄기차게 주장해 온 것이 사도행전식 구원이다. 즉 죄인은 물침례를 통해 거듭나며 선행을 통해 구원을 유지하고 구원이 유효한지 사기였는지는 죽은 다음에 '최후의 심판석'(백보좌 심판)에 가서 판명난다는 것이다. 구원도 사기요, 교리도 사기요, 지식도 전부 사기인데 수억명이 속아서 그런 만화같은 종교를 믿고 있다. 그들을 비웃지 말라. 절대 비웃지 말라. 성경에 무지하면 누구나 교황과 추기경들만큼 바보가 될 수 밖에 없다.
야고보서 구절로 돌아가서 '죽은 믿음'은 이 시대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동떨어져 있다. '죽은 믿음'은 애초에 거듭나게 하지 못한다. 이 구절을 '행위구원'으로 뒤섞어 버린 후 지나가려 하는 못된 심보를 버리고 자세히 들여다 보라, 당신은 '죽은 믿음'을 갖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여전히 "영적으로 말해" 개와 돼지의 상태에 있지 '양'이 되지 못했다.
야고보서는 과도기 유대인 성도들, 또한 앞으로 올 대환란 유대인 성도들이 목숨걸고 지켜야 하는 서신서이다. 교회시대에 교훈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구절을 교리로 적용하고자 애쓰면 자신의 목을 비틀어 숨을 막는 꼴이 된다. 자기한테 해당되지 않는 구절을 억지로 적용하는 사람은 '영적인 자살'을 하는 사람이다.
참고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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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주님 감사합니다 형제님을 통하여 귀한 말씀을 주시고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결과와 결국이 이렇게 다른 해석이 있는지를 오늘 깨닫네요 말씀을 잘 나누어서 알기 쉽게 가르쳐 주시고 진리 안에서 날마다 자라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이 진리들을 깨달으며 주님 안에서 자라 가기를 기도 합니다^^*
저 역시 동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