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은 교회개혁이며 예배개혁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신칭의 교리에 근거한 교리중심의 개혁자였다면, 칼빈의 일차적 관심은 오염된 예배의 개혁과 회복에 있었습니다. 그가 1544년 로마제국회의에 제출한 "교회 개혁의 필요성" 이란 변증서에서 그가 왜 교회개혁에 참여하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너무나도 많은 잘못된 의견들에 의해 손상되었고 너무나 많은 불경하고 부정한 미신들로 왜곡됨에 따라,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이 흉악한 오만무례로 모욕당하고 그의 거룩한 이름이 더럽혀졌으며 그의 영광이 발아래 짓밟히고 있다. 오호라, 모든 기독교 세계는 공개적으로 우상숭배에 의해 오염되었고, 사람들은 그 대신 자기들의 허구를 숭배하고 있다. 수천의 미신들이 지배하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시대에 전통적인 예배가 오랜 동안 익숙하여 그들을 설득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였으며, 설령 이론적으로 동의한다 할지라도 실제적인 문제에서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이는 오늘날도 개혁하려고 할 때 장애물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 작업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고 여러 모양으로 난자당하고 있는데, 만일 우리가 미소나 짓고 침묵한다면 배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개도 자기 주인에게 함부로 하면 즉시 짖어대는데, 우리가 침묵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그토록 모독적으로 경멸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칼빈은 예배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며 예배가 타락하고 오염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다는 단순하고도 명백한 원리에 따라 예배의 회복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 회복에 그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참된 예배와 그릇된 예배를 구별했습니다. 로마교회의 우상숭배가 그릇된 예배의 전형이라고 생각하고 집중적으로 우상예배를 비판하였습니다. 참된 예배는 롬 12:1-3 이 가르치는 영적 예배로서,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예배가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에게 영으로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II.viii.17).
칼빈이 지적한 그릇된 예배의 세가지 유형.
첫째는 사람의 생각을 가르치는 예배이다.
사람의 계명을 가르치는 예배(마 15:9, 사 29.13-14),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가르치는 예배(골 2.4-8),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실질적으로 그 시대의 정신과 민족적 전통, 또는 교파적 전통(장로의 유전) 등 인간의 생각을 가르치는 예배를 잘못된 예배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그는 골2:23의 "자의적 숭배"(will worship, ethelothreskeia)를 가장 전형적인 그릇된 예배로 규정하였습니다. 혹독한 금욕주의, 종교적 철저성, 그것이 전혀 주님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종교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종교성과 영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추구하는 종교적 노력과 예배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철저하고 인간적으로 존경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에게는 그릇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리새인의 예배이다(26).
칼빈은 "바리세인의 누룩"(마 23.3, 16.6)을 조심하라고 경계한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율법의 해석자로서 모세의 자리에 앉아 권위를 주장하며 스스로 본을 보이지 않으면서 지식만 팔고 있는 삯군이 인도하는 예배가 바로 그릇된 예배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예배를 좌우하는 것은 예배 인도자라는 점에서 이 지적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경배하지 않는 형식적이고 지식적인 차가운 죽은 정통의 예배가 여기에 속합니다.
셋째는 연극적 예배다( 현21C 유행하는 구도자예배 ).
분위기와 의식은 우아하고 화려하며 음악과 설교는 장엄하지만, 인도자는 연극배우와 같이 연기를 함으로서 신의식과 외경심이 결여된 예배는 잘못된 예배다 고 하였습니다. 이런 예배는 교인들이 예배를 즐기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은 없습니다. 순간적인 엑스타시가 있지만,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그 경험 자체를 소중히 생각하고 흠모할 뿐이며, 그 체험은 마음의 열기를 고조시키는 종교심리적 조작에 의한 유사경험일 뿐입니다.
칼빈은 이러한 거짓 예배를 교회에서 정화하기 위하여 성상철거, 미신타파, 단순한 성경적 예배로의 복귀, 말씀에 대한 강조, 예배자가 이해할 수 있는 서민적 언어사용을 통하여 경건하고 순수한 영적 예배를 드림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오늘날의 개신교회 예배는 칼빈의 예배개혁을 통하여 정착된 형태이지만 처음 모습과는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칼빈의 교회개혁이후 예전운동은 개신교회에서 점차 의식주의적인 경향으로 역류하게 되었는데 건축양식이나 예배음악, 예배인도자의 의복등이 중세 교회의 것으로 다시 복귀되는 경향이 나타났고, 종교개혁에서 폐지된 중세의 개념들이 다시 살아나고 의식적 복구의 징후(Sign of liturgical refurn)가 짙게 나타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역사의 반복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배의 갱신은 상실된 예배의 기본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지 예배를 중세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예배가 형식을 벗어난 구도자 중심의 자유로운 예배가 영적인 진정한 예배인 것처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구도자 예배는 예전적인 요소들을 무시하고 기존의 예배형식에서 탈피해서 청중에게 접근하려는 시도인데 문제점은 인간 중심적이라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회중을 중심한 예배이며 참석자들이 고객이 되고 그 취향에 맞는 예배를 고안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로이드 죤스 박사가 말한 것처럼 강단에 서 있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변자로서 거기 참석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이지 그들에게 담화하거나 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빈야드운동의 예배는 자유롭다 못해 무질서에 가깝습니다. 은사운동인 빈야드 운동의 교회는 형식과 의식을 초월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이러한 예배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라고 인정할 수없습니다. 교회 성장학이 예배 신학을 앞설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나답과 아비후(레10:1-2)와 사울(삼상13:8-14)등과 같이 잘못된 방법으로 예배드리는 것과 계시된 방법대로 드리는 예배일지라도 그 태도가 옳지 않는(말1:6-10), 무성의하고 형식적인 예배(사1:11-15)가 잘못된 예배입니다.
2. 세속화와 근본주의화의 문제
현대 교회의 세속화의 문제는 세속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받아들여 새로운 기독교 가치를 정립하려는 자유주의 방향으로 가는 문제이며, 교회의 근본주의화 문제는 성경적인 근본만 지킬 것을 주장하여 영적인 영역은 인정하고 육적인 활동들은 세속적인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우를 범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공예배가 성경적 세계관 안에 살아 있지 못함으로 인하여 객관적인 진리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하나의 종합 예술 작품처럼 취급하려는 듯 하나 분명히 말해 예배는 '창조적인 예술 작품'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힘써 알지 못하고 하는 말입니다.
히스롭(D.H. Hislop)은 그의 책 "Our Heritage in Public Worship(공중 예배에서의 우리의 전통)"에서 비유를 들어, 개혁주의 예배의 기본 틀은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것(up ward)"이라기보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틀(down ward)"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예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과 하나님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예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은 크게 다르게 나타나게 됩니다. 자유주의 예배와 근본주의 예배는 여론 조사에서 그 결과가 잘 나타났습니다. 미국 성인의 28%가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조지 바나의 여론조사). 주일마다 예배드리는 기독교인 중에도 오직 25%만이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고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코람데오(Coram Deo = Before the face of God)의 영적예배가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가 되고 절대적 객관적 진리가 상실되고 있다는 현실을 설명하는 조사 자료입니다.
설교가 짧을수록 좋다고 하던 영국교회를 염려한 스펼젼 목사의 예견대로 오늘날 영국교회는 텅빈 교회가 되었고 사람이 좋아하는 예배와 찬양을 마음대로 만들어 이용하는 미국의 결과는 이렇게 불신앙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배의대상이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도 일부가 되어야한다는 사고를 가지고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고 우리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람도 서비스를 받자, 즐겁게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정말 위로부터 내려오는 성령과 진리로 주어지는 기쁨이라면 매우 좋지만 그렇지 아니한 기쁨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 예배는 교회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고안한 것이 아니며 전적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 예배는 하나님의 창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대속의 십자가사역, 부활사역, 성령의 중생과 성화사역 등을 근거로 한 하나님의 구원계시에 의존한 기독론적 예배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3. 영적 예배의 문제
예배당 예배의 문화적인 면은 예배의 부분적인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예배 안에 있다가 예배 밖으로 나가는 삶을 사는 자들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공식적인 예배와 비공식적인 예배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것과 집에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 둘이 모두 행해지는 예배가 있었으며 그로인해 흥미로운 결합이 있었습니다.
공식적이고 엄숙한 예배와 비공식적이고 활기있는 가정 모임 예배는 언제나 건전한 것입니다. 조직적인 것과 비조직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과 자발적인 것을 양극화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교회에는 그 둘이 다 필요합니다. 그들은 몹시 기뻐함(agalliasis)과 순전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공적 예배는 엄숙한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활기 없는 따분한 예배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는 것과 기뻐하는 것을 함께 가진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었습니다. 예배는 기쁨과 경외감의 결합의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에 대하여 바울은 롬12:1에서 영적인 예배로 해석하고 있고, 칼빈은 해석하기를 나를 위해 예배하는 것과 나를 위해 찬양하는 것, 나를 위해서만 생활하는 것을 중지하라는 것, 거룩하심에 모욕이 되는 예배와 삶을 배제한 것을 영적예배라고 구체적으로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칼빈주석). 구약시대에도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섬김은 성막과 성전예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고 백성의 전 삶을 포함하였습니다.
성령님은 인간이 고안 해 낸 일체의 예배행위를 거절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예배의 알파와 오메가가 되십니다. 하나님 통치영역은 하나님을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며 생활하는 장소이며, 성령의 전에서 영적예배를 드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4. 문화적인 문제
예배의 문제에는 본질적인 문제와 문화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절대적으로 갱신 되어야하나 문화적인 문제는 상대적으로 갱신 되어야합니다. 그러나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중첩된 경우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이교적이고 무속적이며 세속화된 형태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예배문화의 문제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예배의 본질에 대한 지식 부족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속문화를 비판하면서도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 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예배에도 나타납니다. 전통적인 예배에 익숙해져 있는 장년들과 현대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청소년들에게 문화적인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문화 충돌을 없애기 위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동시에 다양한 영적욕구를 만족시키는 역동성있는 예배가 필요합니다.
예배드리는 내용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순서(glorifition), 예배드리는자를 말씀으로 양육하는 즉 덕을 세우는 순서(edification), 감동과 기쁨을 나누는 순서(attraction)가 필수적입니다. 한국교회가 표면상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경배하는 것같이 보이나 그 내면에는 인간 중심의 복받기와 마음과 육체의 병을 고치기등의 목적을 가지고 모인 무리들(이 부분에서 아멘 소리가 큼)을 위한 예배로 변질되어 간다는데 예배 본질적인 문제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정용섭 박사는 한국교회 예배에 샤마니즘적 요소와 불교적인 요소와 형식주의와 분파주의적인 유교적 요소가 나타나 있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적인 제사의식과 우리나라 전래의 조상숭배 제사 의식과 무속신에게 행하는 종교의식등이 섞여서 한국교회의 예배가 혼합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무속신앙인들은 신의 뜻대로 행하지 않을 때에 무서운 벌을 주는 무서운 신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들에게는 신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거룩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 영향으로 수요예배, 심야기도, 새벽기도 등에 참석하지 못하면 화를 당할 수도 손해 볼 수도 있다고 습관적으로 인식하고 의무적으로 참석하고 있으며 또한 예배 참석자들은 예배행위가 마치 무당들이 굿하는 것을 구경하듯이 참여자가 아닌 구경꾼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가 아니라 예배를 구경하는 사람, 예배보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향아래서 교회예배는 성경이 가르치는 복을 현세적이고 동양적인 복과 동일시하여 하나님 경배가 목적이 아니라 복 받기 위하여 예배드리는 변질된 심성을 가지고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문제는 사람을 의식함으로서 죄와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가 줄어지고 듣기 좋은 말, 복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찬양대 찬송내용은 회중을 향한 음악회로 보일 정도로 세속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광고시간에도 사람중심의 자랑, 업적, 특정인 소개 등으로 세속화 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와 전도 집회와 각종 종교적 행사모임과 결혼 예식 등에서 예배라고 하나 사람중심인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눈만 뜨면 풍요의 신을 숭배하는 현대 사람들과 맘몬니즘의 신봉자들을 만납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는 자의 정신은 그러한 기독교 이전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 한국식 기독교의 토착화가 모르게 진행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적인 영향으로 말미암아 어떤 특징을 갖게 되면서 예배의 본질적인 문제까지 토착화 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예배는 성경적이요 신학적이어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중세 교회의 제도와 정치 및 신학의 개혁을 주창하면서 우선적으로 시도한 것이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소유한 예배의 개혁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장로교회가 일반적으로 예배드림에 있어서 축제 분위기가 없고 분위기가 무겁습니다. 예배를 구약의 제사로 생각하는 경향이 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이교도 들이 제사 드리는 것을 공로로 하여 복을 받고 저주를 면하기 위하여 무겁고 기쁨 없이 지옥에서 출장 나온 사람처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알프레드 깁스(Alfred P. Gibbs)는 오늘날 기독교의 공예배는 단지 기독교화된 유대교의 형태를 취하거나 엷게 가려진 이교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유대교의 제사장들이 구별된 옷을 입었듯이 목사 역시 그러하고, 유대교가 지상의 성소나 건물을 중시 했듯이 기독교계도 특정한 예배장소를 중시하며 그 건물을 교회라고 잘못 일컫고 그것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5. 예배 갱신 방향
현대문화속에서 교회의 예배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각성이 대두되면서 예배갱신, 예배개혁, 혹은 예배회복을 추구하는 운동들이 일어나고, 그에 따른 예배의 변화가 한국교회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입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교회는 전통적인 예배에 만족하였고 문제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통적인 예배에 불만이 표출되었으며 사경회의 전통이 오순절적 부흥회와 기도원운동, 은사 집회등으로 전환되면서 성령운동은 교파를 초월하여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었고 통성기도나 철야기도, 심야기도와 같은 기도와 각종 예배가 뜨거워야 된다는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80년대에 찬양과 경배를 통해 예배를 변화시키고 활성화시키려는 노력이 진행되었고, 가스펠송이 크게 확산되었습니다. 기성교회는 처음에 이를 금지하거나 제한하였으나, 점차 복음송 세대의 성장과 함께 수용하게 되고 드럼과 대형스피커가 강단으로 진입하기에 되었습니다.
80년대의 교회성장운동은 목회자 세미나의 홍수시대를 열었고 각기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였습니다. 90년대는 세기말적 위기감과 새로운 밀레니엄에 대한 기대로 사회의 대세인 정보화와 테크놀로지의 수용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대교회들은 테크놀로지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비용을 들여가면서 교회전산화를 추진하였고, 위성중계 시스템을 설치하여 위성교회들을 만들어 멀티미디어 예배와 사이버 교회가 선을 보이고, 대중문화 사역이 확산되고 예배에 대중적인 음악 이외에도 연극이나 무용 등의 예술적 장르를 도입하는 시도가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은 시도들은 선교의식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지만 모두 예배의 위기를 느끼기 때문이었습니다.
틸리히는 "종교는 문화의 실체이며,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Theology of Culture)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문화적인 면을 강조한 것으로서 한국인은 한국인의 언어와 정서로 예배드릴 때 가장 효과적으로 예배드릴 수 있으며, 현대인은 현대적 방식으로 예배드릴 때 그의 마음을 가장 잘 표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다른 세대 문화가 공존한다면 예배에도 그러한 현실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공동체 구성원들의 문화가 무시되면 점차 예배는 적용성을 상실하고 활력과 역동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예배의 양면성을 고려하지 않고 문화를 생각없이 받아드리면 인간의 종교적 만족이라는 한 쪽으로 너무 치우치기 때문에 반드시 신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의 흠향과 영광에 있기 때문에, 아무리 예배 참석자들이 열정적 축제감을 느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열납이 없다면 결국 가인의 예배처럼 실패한 것이됩니다. 개혁교회는 이런 문제를 성찰하고 해결함에 있어서 칼빈의 예배론으로 부터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특정한 민족문화나 시대문화를 이상적 예배형식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배의 내용과 올바른 자세는 원리적으로 성경에 계시되고 지시되어 있으므로, 불변적 요소와 가변적 요소, 즉 본질적 요소와 문화적 요소를 구별하여 효과적인 예배를 드리는데 가장 적합한 효과적 문화적용이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예배의 주관적 요소와 객관적 요소
개신교회의 신학적 전통은 루터주의와 개혁주의(칼빈주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루터가 예배에서 하나님께 향한 감사를 강조한 점에서 루터교의 예배가 보다 주관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칼빈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순종을 강조한 점에서 개혁주의 예배는 보다 객관적인 면을 더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는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장로교회가 다수이기는 하나 예배에서 주관적인 면을 많이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주의의 영향이고 특징이기도 합니다. 피선교 교회에서는 복음주의적인 설교가 더 요청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회개와 중생과 헌신을 가르치는 복음주의적 설교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데 더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에서 주관적인 요소와 객관적인 요소가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예배에서 객관적인 진리를 많이 강조하면 주지주의(主知主義)에 기울게 되고, 주관적인 면을 지나치게 추구하면 감정주의에 빠지며 교리 없는 기독교를 주창한 경건주의적 약점을 드러내게 됩니다.
예배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격과 뜨거움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경성하여 경외함을 가지고 경청하는 차분함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생명력이 넘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게 해야 합니다.
역동성 있는 예배는 지나치게 주지주의 성격을 가진 전통적인 예배에 대한 반작용일수도 있습니다. 막연하게 인위적인 방법으로 감정을 고조시키거나 분위기만 조성하는 그런 류의 예배와는 성격이 다른 역동성을 가진 예배라야 합니다. 설교가 전도수준에 머무르거나 사회문제를 다루는 설교라든가 예수 믿어 복 받고 능력 받는 것만을 주제로 하는 강론이 아니라 설교를 통해 자신이 가진 문제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예배를 통하여 만남과 치유와 결단이 나타나며 예배로 인하여 변화의 삶을 체험하고 성장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증인으로서 사회에 빛과 소금으로 행하게 하는 그러한 역동성 있는 예배를 말합니다.
예배갱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먼저 바른 신학의 터 위에 세워진 예배, 예배의 축제적 의미 회복, 삶과 예배의 연결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예배가 단지 공 예배로 끝나지 않고 바울처럼 자신의 삶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영적인 예배까지 나아가도록 하는 예배가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예배 갱신의 방향에서 양극단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한 부류는 보다 더 예전적(例典的)인 형식을 갖추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고 또 한 부류는 형식을 벗어나 더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으로서 서로 대조적입니다.
예전적인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부류는 한국 교회의 예배는 집회이지 예배가 아니라거나 불완전한 예배로 규정하는가 하면, 자유롭게 예배하는 것을 주장하는 부류는 종래의 예배가 형식적이어서 생동성이 없고 감동이 없는 예배라고 단정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예배는 사경회 혹은 부흥회 집회 스타일의 예배가 그대로 정착된 것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예배진행자의 개인적인 인도에 예배가 많이 좌우되고 있는 점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지나치게 설교 중심의 예배라는 점에서 그러하며, 전체적인 예배의 성격과 분위기도 그러합니다. 한국 교회가 성례는 자주 행하지 않으면서 설교 중심으로 예배드림으로서 생긴 폐단도 없지 않습니다. 예배드리는 것은 곧 설교 말씀 듣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전(Liturgy)의 순서는 말씀을 듣기 위한 준비 행위처럼 잘못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림으로 갖게 되는 경건한 마음과 은혜를 받았다는 충족감은 그 날의 설교에 좌우됩니다.
그래서 예전과 설교, 설교와 성례의 균형을 갖추지 못한 예배로 말미암아 교인들은 교회 공동체의 지체 의식을 가지기보다는 좋은 설교를 찾아서 쉽게 교회를 옮기는 이기적인 교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런 교인들이 많아지게 되면서 회중교회 유형의 대교회들이 설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예배라는 뜻을 풀이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옳게 아는데 있습니다. 예전적인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의견도 맞고 생동감
없는 예배이므로 형식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견도 옳습니다. 예배의 형식을 갖추었으나 제사처럼 감격이 없는 것도 문제이고 행사마다 예배의 형식을 갖추고 경건의 모양은 갖추었으나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인간 냄새나는 자유함도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는 영적으로 의와 희락과 평강이 감격으로 표출되는 천상의 예배 그림자이어야 하며 그리고 가장 거룩하시고 고상하신 분이 예배에 참석해서 예배를 받으신다고 믿는다면 열린 예배일지라도 유치하게 드릴 것이 아니라 가장 높은 수준으로 주님의 거룩과 인격을 손상하지 않는 열림이 되도록 아주 조심해야 하며 예배자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으로 임하는지 검정이 먼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예배는 예배요소를 갖춘 1부로 경건하게 끝내고 사람을 중심한 나눔과 교제의 성격 모임은 2부 집회로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좋겠습니다.
계시 종교인 기독교 예배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소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고 아뢰는 요소로 구성됩니다. 말씀 청종이 없는 예배는 이방 종교의 예배입니다. 중세교회의 예전적인 기도에 치중하는 예배나 오늘날 일부 교회의 찬양에 치중하는 예배가 둘 다 말씀은 소흘히 하고 드림에 치중하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우리가 화답으로 드리는 기도와 찬양이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예배에서 비신학적인 부분은 갱신되어야 하고 문화적인 갱신도 신학적인 부분을 다치게 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조심스럽게 수용하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성경은 공동예배를 권장하고 있으며 성찬, 말씀, 기도, 찬송을 주된 내용으로 합니다. 초대교회는 성경적 예배를 유지하였으나 중세교회와 개신교회는 편중된 강조를 통하여 예배의 균형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가르침과 초대교회의 전통을 중시한다면 예배의 균형잡힌 회복이 필수적입니다.
6. 갱신해야할 예배요소
1) 성례의 회복
성례의 창시자-- 신 .구약의 성례의 창시자는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약속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모든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부와 복을 말씀을 통해 그리고 성례를 통해서도 공급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깨닫도록 전달될 때 그 말씀으로 인해 성례는 효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말씀이 물질적 요소에 부가되어 그것은 성례가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롬바르드는‘성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은혜의 가시적인 형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루이스 벌코프 박사는 ‘성례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규례로 감지될 수 있는 표징을 통해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은혜의 언약이 주는 유익이 신자들에게 제시되고 인쳐지고 적용되며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충성을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상징들은 그 자체로는 죽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생명력이 부여되며 성례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력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약속된 내용과 명령이 성례를 유효케 합니다. 성례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에 예와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 되며, 성례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일하시며 우리에게 임하시며 우리는 수종을 드는 것뿐이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례시 주어지는 은혜는 믿음에 기인합니다. 믿음을 따로 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믿음이 없다면 주시는 은혜를 전혀 받을 수 없습니다.
(1) 성찬의 회복
성찬의 의미는 주님의 희생을 회상하기보다는 주님의 언약을 확인하는데 있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우리가 감당치 못할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감당치 못할 일을 하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주가 피 흘려 사신바 된 주의 백성들이 떡과 포도주를 마심으로 언약성취에 대한 확신과 주와 하나됨의 특권을 향유하도록 하기 위함과 그리스도와 함께한 영적 잔치의 물적인 표현이 그 이유이었습니다. '주님의 만찬'(the Lord's Supper)은 '언약의 식탁'으로서 주님께서 그의 12제자들에게 직접 행하시고 그들 앞에서 제정하신 예전인 것입니다. 개혁교회의 성만찬은 성경을 통해 계시되는 말씀의 임재와 그 능력을 강화합니다. 개혁교회의 "주님의 만찬"을 일컬어 "거룩한 신비"(Holy mysteries)라고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한 표현입니다.
성찬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성찬은 가시적인 은혜이며 보이는 말씀입니다. 새 언약은 피로 인준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녀도 그리스도의 피가 없으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의식과 예식을 모두 종합한 분입니다. 주님은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극적인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우리가 철저하게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실제로 주님을 취하여 씹어보고 음미하여 마시며 그것이 우리의 한 부분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생명의 떡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가 없으면 살 수없고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주께로부터 온다는 진리를 항상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찬의 목적은 우리를 강하게 하고 우리에게 원기와 능력과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돕고 우리의 신앙고백을 사람들 앞에서 입증하는 의식입니다.
칼빈, 부쳐, 오이코람파디우스, 베자, 파렐, 쯔빙글리 그리고 낙스와 같은 개혁자들은 매주 1회 성찬이 집례 되기를 갈망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사도들의 전승에 따른 것이었으며, 이 성찬은 주일 아침 예배의 정규적인 순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찬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회중들은 성찬에 즈음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성찬을 받도록 요구되었습니다. 관료들에 의하여 칼빈을 비롯한 다른 개혁자들은 그들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연4회의 성찬만을 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찬이 집례되지 않는 날에는 찬송과 축도로 예배를 끝마쳤습니다.
칼빈은 말씀을 통해 친히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강조했으며 쯔빙글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가 모인 회중들의 기억속에서 기념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교회가 성찬식을 자주 행하면 예배와 설교가 그리스도 중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찬을 자주 행하면 우리의 예배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중심하는 것이 될 뿐 아니라, 보다 엄숙하고 차분한 예배가 될 것입니다.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성찬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약속하신 구원을 확인하는 은혜의 방편이라면 자주해야 합니다.
중세 카톨릭의 성찬에 대한 반감으로 일부 개신교회가 성찬을 1년 1-2회로 축소시키고 그것도 형식화하였는데 칼빈은 그러한 축소를 "마귀의 간계"라고 비판하고 최소한 매주 1회 거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기독교강요 IV.xvii.46).
성찬을 자주 행하지 않는 것은 권징 없는 교회가 되게 하는 요인의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수찬 정지라는 중한 징계가 유명무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일년에 두 번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 관례가 된 것은 선교사들이 지방 교회를 일년에 두어 차례씩 순방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찬상을 보로 덮는 관습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에서 유래된 것 같습니다. 혹자는 성찬상을 덮은 모습이 주님의 시신처럼 보여야 한다고 말하나 그것은 덮는 것을 신학화하려는 발상이 되는 것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성찬식에 집례자가 흰 장갑을 끼는 관례는 신구교를 막론하고 서양 교회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입니다. 중세 말기의 교회는 성찬식에서 한가지 순서를 위하여 이중 삼중으로 기도하면서 너무 지루하게 진행함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성찬을 기피하게 만들었습니다.
(2) 세례의 회복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공적인 선포입니다.
세례시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28:19)고 하신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에 연합하는 세례를 주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러한 뜻이 영어역(into the name of)이나 독일어역(in den Namen)에서는 그 뜻이 분명합니다.
개혁교회의 세례는 성경과 성경에 근거한 어거스틴의 입장인 '언약의 확인'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세례는 구원을 이루어 가는 회중의 거룩된 삶으로 이끄는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그 강조점을 두고 있는 예전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인 교회로의 입교식인 것이며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세례 뒤에 따라오는 열매로서 기대되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를 받은 자는 훗날 12세에 이르러 교리문답 과정을 받아야 하며 회중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개혁자들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전에 철저하고 강도 높은 교리문답 교육을 중요시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공동체의 언약인 세례는 언제나 공중 예배시에 집례 되었습니다. 개혁자들은 세례를 구약의 언약이었던 모세의 할례와 연속선상에 두었으며 세례시에 성령님께서 세례 받는 자에게 충만히 임하심을 보여주는 실제적인 표식이요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3) 말씀의 회복
칼빈은 죽기 전에 제네바에 있는 목회자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면서 그 자신의 설교와 가르침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내 가르침에 대하여 나는 충실하게 가르쳐 왔으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힘을 주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로 하여금 지금까지 충실하게 쓸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나는 성경의 단 한 구절도 그릇 전하지 않았으며, 내 지식이 닿은 한 구절도 잘못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혹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했거나 어렵게 연구했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언제나 단순하고 명확함을 겨냥하여 이러한 유혹을 물리쳤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칼빈은 설교할 때 성직자라고 생각하기보다 말씀사역의 종으로 생각하였으며 말씀을 살아있는 뜻으로 알았고 청중의 의지에 호소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고 실제적인 회개에 이르도록 하였습니다.
로이드 존스 박사는 탁월한 지성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었으며 설교의 절대적 중요성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생명을 주는 성경의 능력에 대한 신념과 성령의 주권에 대한 신념이 강했습니다. 로이드 존스 박사가 그의 뜨거운 강단영성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예배임재와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설교의 열쇠이며 설교자는 성령에 붙잡힌바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설교의 황태자로 불리고 있는데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군중들을 단 한 번의 설교로 사로잡았다는 점으로 증명이 됩니다. 그는 연구하고 체험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의 영적 체험담은 성경의 각장마다 하나님께서 임재 하신다는 고백입니다. 개혁주의 전통에서 강단영성의 원동력은 성경이며 말씀위에 성령의 강한 역사와 인도하심으로 말씀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영성 신학자 제람 바즈(Jerram Barrs)는 말씀증거방법을 제안했습니다. 첫째로 기독교가 만물의 존재 양식에 알맞은 진리라는 사실을 증거해야 하고 둘째로 기독교를 역사적인 진리로 선포해야하며 셋째로 진리가 현실 생활에 적합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하고 다섯째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하며 여섯째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교회의 확장은 말씀의 확장입니다. 루터, 츠빙글리, 칼빈, 낙스등은 모두 성경적인 설교자들이었습니다. 말씀은 불이요 방망이와 같습니다(렘23;28_29).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것으로 운동력이 있습니다. 선포된 말씀의 능력이 유럽을 변화시켰습니다. 설교는 예배의 핵심입니다. 칼빈과 그 후예들의 주된 관심은 '말씀의 선포'에 있었습니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며, 무한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불변하시는 분이시며 또한 그분은 지혜와 힘과 의와 거룩하심과 선함과 진실하신 인격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초기 제네바와 스코틀랜드의 개혁주의 예배가 언제나 예배의 시작 부분에서 '죄의 고백'(a general confession)이나 '참회의 시편'(penitential psalm)순서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자의 현주소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과 칼빈의 하나님의 절대주권의식은 개혁주의 예배의 깊은 뿌리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름심에 경외심을 보임과 동시에 지체함 없이 그의 범죄한 입술을 제하여 줄 것을 간구했으며,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명령하심에 자신을 헌신하였습니다.
공예배는 주님이 그들 가운데 임재해 계심을 알고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심을 바로 인식하고 드려야합니다. 강론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려야 합니다. 내가 강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나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설교에 대한 개혁의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설교는 개혁교회에서 강화되었으나, 말씀을 읽는 것은 약화되었습니다. Sola Scriptura는 강조하지만, Tota Scriptura는 중시되지 않았습니다. 설교에 설교자의 주관적 주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치하고, 설교자의 경건이 부족하여 성령의 조명과 인도가 약하였습니다.
설교는 설법하듯 설교자 자신이 깨달은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그들 자신들을 위하여서가 아니고 백성들을 위하여 그들에게 전하도록 주신 말씀입니다.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을 찾으시고 말씀하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며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가 존귀하므로 예배를 인도하는 책무 역시 존귀합니다. 헌신 예배를 위하여 평신도에게 예배를 인도하도록 권한을 부여했으면 설교자에 못지않게 귀한 직임을 수행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굳이 차별할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예배 인도를 맡기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교회는 사역자가 세우고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교회를 크게 성장시킨 노하우(know-how)를 가졌다는 목회자들의 세미나에 교회의 사역자들이 참석하여 그 노하우를 배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이것은 비신학적인 것입니다. 이 말은 사역자가 계획도 세우지 말고 자기 계발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권적인 은혜와 능력과 경륜 속에서 교회를 세우시고 자라게 하신다는 것을 반드시 알고 믿음으로 목회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고 하였고 비두니아로 가는 것이 그의 선교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막으시고 마게도냐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마게도냐로 발길을 돌려 거기 첫 성인 빌립보에 이르니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 루디아와 그 가족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가족을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사도 바울는 "내가 모든 사도 보다 많이 수고 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과 고별하는 자리에서 한 설교에서 "아시아에 들어온 첫 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 . .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 .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18-20, 26-27)라고 눈물로 설교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신실을 알기 때문에 껄어 안고 헤어지기를 싫어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목회는 그 교회 각 지체들이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골1:28)입니다. 구원론적으로 확실하지 못한 교회는 결단코 주님께서 의도하시는 공동체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론에서 확신을 가졌던 시대의 교회들이 교회 역사상 가장 견실하고 영적 권세가 있는 교회들이었습니다. 사도시대의 교회들이 견실하였던 것도 바로 사도들로부터 받는 복음에 충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른 말씀사역이 '교회'라는 공동체 형성의 완전하고도 충분한 조건입니다. 교회가 복음의 말씀 사역에서 실패하게 되면 그 어느 것으로도 그 실패를 보충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다른 면에서 부족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말씀 사역에 있어서 온전하고 살아 있다면 그 부족은 앞으로 능히 메워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그 교회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는 교회'(행9:31)가 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고전 3:9),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라. . . "(고후 6:1)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의 말씀 사역을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가시는 방식을 취하시기 때문입니다.
설교 본문만을 읽는 것은 쯔빙글리에게서 유래하였습니다. 루터와 쯔빙글리와 칼빈은 율법과 복음 또는 계명과 순종의 생활에 대한 각자의 이해에 따라 십계명을 예배 순서의 어디에 두느냐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교인들로 하여금 윤리적인 성숙한 기독신자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서도 필요합니다.
(4) 기도의 회복
존 칼빈은 ‘기도는 매일 하나님의 은택을 입는 믿음의 주된 체험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는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밑뿌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기도는 단순한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존 번연은 ‘성령의 가르침과 도우심을 통해서 드리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드린 기도가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렘33:3, 시50:14-15, 마7;7-8).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롬8:26-27).
기도는 놀라운 영적 변화와 능력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일상의 필요를 얻으며(마6:11-17,7:8), 환난과 고난 중에서는 평안한 마음을 주시는 통로이며(빌4;6-7), 죄책감과 수치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는 능력을 얻으며(시51:1-15), 마음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의 능력을 체험케 하며(엡1:15-16),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의 뜻을 따라 많은 열매를 맺게 하며(골1:9-10), 거룩한 영성을 가지게 하고(딤전4;5), 질병을 치유하고 병든 자를 구원케 하며(약5:15), 기적과 복을 만들며(약5;15), 악한 자와 원수 마귀들을 물리쳐 승리케 합니다(엡6;18, 대하14:11-12, 20:3-5,22).
모든 주의 종들은 기도로 승리했습니다. 요셉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다윗도 엘리야도 다니엘도 예수님도 제자들도 바울도 기도로 승리했습니다. 기도는 주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성령님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루이스(C.S.Lewis)는 하루 중 어느 때나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기쁨으로 가득찬 삶을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 박사의 영성 강론은 기도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도를 되풀이 하시요, 아무 것도 당신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시오, 소원을 다해서 그에게 알리세요, 무엇보다도 먼저 포기하지 마세요, 긴급하게 구하시오, 끈질기게 구하시오, 대답을 받지 못하면 계속해서 찾으시오, 그래도 얻지 못하면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시오, 망치로 문을 두드리시오, 이사야가 말했던 것처럼 하시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사62:7).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는 2만명의 군대보다 탁월한 목사인 존 낙스의 기도를 훨씬 무서워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칼빈은 그의 경건영성의 실천적인 측면에서 올바른 기도자세를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과의 대화인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되 그에게 합당한 정신과 마음의 자세로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진심으로 부족을 느끼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로 자기 신뢰를 버리고 겸손하게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넷째로 확신 있는 소망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마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조건에 맞추지 못하면 우리의 기도는 응답없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회당예배의 장소는 기도처라고 불리워졌습니다(행16:13). 회당에서 교회로 넘어오는 과정에도 교회의 모임은 기도를 위한 모임이었습니다(행18:7-11,19:8-10). 기도회가 예배로 흡수됨에 따라 진정한 공동체적 기도가 약화되고 성직자의 전유물로 집중되었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사람의 희락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제일 되는 목적이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함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입니다. 공예배에서의 기도는 전적인 신뢰로 찬양과 감사와 회개와 간구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세월이 갈수록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그 사랑이 식어져가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가깝고도 친근한 교제를 상실하였으며 은밀한 기도의 열정, 즐거움, 달콤함, 충만함을 상실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놓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겉옷을 붙드는 것을 상실하였습니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리라"(레 2:11-13)--소금을 가리켜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고 표현한 것은 소금이 맛을 내고 오래 두어도 변질되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언약의 상징물로 지정되었으며, 모든 예물에 첨가되었습니다.
소금은 신앙의 순수성과 불변성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고 변치 않는 신앙을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어두워질 때 하나님께 나아가 마음속에 그분의 기쁨의 빛 을 환히 비쳐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기쁨으로 차고 넘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부패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소금과 같이 순수하고 불변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 다윗처럼 히스기야처럼 회개하며 기도합시다. 그러면 곧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 94:19)라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축도
목사가 축도할 때 양손을 드는 것은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취하는 자세입니다. 축도자가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여 마치 자신이 회중에게 축복을 내리는 듯 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축도는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이, 축도하면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백성을 축복해 주시기로 약속하시고 명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선포함과 동시에 그 뜻을 따라 축복을 비는 기원입니다. 그래서 서양의 교회에서는 주로 민수기 6장 25절과 26절의 말씀을 따라 축도합니다. “주(여호와)께서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주(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주(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한국 교회에서는 고린도후서 13:13절의 바울의 기원으로 축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있을지어다”라고 하는 말은 “...있기를 축원하나이다”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끝맺으면서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롬16:27)”이라고 하는 축원의 말을 “하나님께 ...있을지어다”로 번역한 것을 보면, 그 말이 단순히 기원한다는 말이지, 말하는 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어법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권위주의적인 어감을 나타태는 것이어서 잘못된 이해를 유발한다면 쉬운 현대 말로 표현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사야43:21에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라"
이사야61:11후반에는 "주 여호와께서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생하게 하시리라"고 하신 말씀을 발견하게 됩니다.
분명 찬송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찬송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나의찬송'이라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한정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만 찬송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찬송을 부를 수 없습니다. David R. Breed는 훌륭한 찬송가에 대하여 3가지 필수적인 품질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 하였습니다- 첫째 참된 찬송가는 감정과 표현이 다 충분히 영적이어야 한다. 둘째 찬송가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객관적인 표현이라야 한다. 셋째는 최선의 해석을 받도록 불러야 한다.
개혁신학자 John Murray는 칼빈처럼 구약의 시편을 찬송으로 사용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공중 예배 석상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영감 받지 못한 사람이 지은 찬송을 사용할 정당한 근거가 없다고 하면서 영감받은 시편을 사용하는 것이 분명히 권위가 있고 예배에 찬송하는 노래는 성경에 있는 노래로 국한해야 한다. 시편의 노래에 신적 승인과 허가를 확신한다고 하였습니다.
현대 개혁주의 신학의 뿌리인 커버넌트 신학교에서 예배신학을 가르쳤던 Robert G. Rayburn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음악적 증거의 훌륭한 복음송이 많다. 나는 모든 복음송을 모조리 비난한다는 인상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나는 적당한 시간에 그중 많은 것을 부르기를 매우 좋아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송은 목적과 내용이 성삼위 하나님을 찬양해하며 구원의 기쁨과 감사의 노래이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세상에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한 찬송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찬송이 예배를 위한 찬송이라면 복음송은 선교와 전도를 위한 노래로서 불려야 할 것입니다. 찬송을 부를 때 영적으로 불러야 하며 구원의 감격으로 불러야 하고 입술과 마음으로 불러야 하며 믿음으로 불러야 합니다.
세상 음악은 예배가 없는 타락한 가인의 칠대손인 '유발'이 만들었습니다(창세기4:21). 이 음악은 세상에서 사람들을 유혹하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왕성하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산으로 올라가면서 제자들과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거의 모든 주석서들은 부른 노래를 시 115-118편을 노래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유월절 음식을 다 먹은 후에는 할렐(Hallel) 시편들의 두번째 부분인 이 시편들을 부르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당시 회당의 예배의식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시편은 당시의 '찬송가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할 사실은 위에 열거된 예수님의 시편 인용이 예배적인 용도로 쓰인 것이 아니고 제자들과의 생활 가운데에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특히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니라' 하는 부분은 예식의 일부로 보다는 생활의 일부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이러한 생활의 찬양은 마리아가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는 천사의 계시를 받고 찬양한 것과 바울과 실라의 옥중 찬양, 엡5:19과 골 3:16의 공동체 내에서의 찬양 등은 어떤 예배적 틀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 여기에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고...찬양하고"의 말들은 꼭 예배의 용어로서가 아니라 생활 가운데에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권면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우리가 생활 가운데서 어떠한 노래를 부르고 다니느냐 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볼 수 있게 합니다. 우리의 생활 전부가 영적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음악'에 관한 논의 자체를 거의 맹목적으로 예배와 결합시키는 것에 대해 주의해야 합니다. 많은 시편들이 개인의 간절함과 절실함을 담은 것들입니다. 회중의 노래를 만드는 것은 문법이 아니라 신자들의 공감이었습니다. 이러한 찬양의 의미변화와 기능변화는 주목되어야 할 부분임에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는 '교회음악'을 생각할 때에 예수님이 생활을 통해 보여주신 찬양을 늘 함께 생각해야만 합니다.
(6) 예배당의 외양 변화
서양에서 예배당 건축은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부터 있었습니다. 유럽의 문화적인 전통 속에서 신학적인 이해를 따라 예배당 건축이 발전되어 온 것입니다. 동방 교회의 건물은 비잔틴 문화권에 속한 것이어서 서 유럽의 건축 양식과는 또 다릅니다. 서유럽의 교회 건물들은, 고딕의 바실리카(Basilika)식에서부터 중세의 로마네스크식, 고틱식, 르네상스식, 바로코식 혹은 네오고틱식과 현대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그 모든 양식들은 각기 그 시대의 정신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예배당들이 서구의 양식을 따라 건축되기 시작한 것은 1910년경부터입니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적인 배경은 서양의 역사와 문화적인 배경과는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시대정신을 대변하고 있는 역사적인 산물을 그대로 이식했습니다. 20세기의 새로운 건축 양식들은 비록 그것들이 서양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국제화되었기 때문에, 21세기는 기독교와 문화의 세계성과 시대성을 고려하면서 기독교적인 특색을 나타내는 동시에 고장의 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양식이 좋겠습니다.
예배당의 내부 구조 변화
예배당의 외부 구조는 서양 모방, 예배당 안의 구조는 한국적 특이한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예배당의 전면에는 성찬상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이를 제단(祭壇)이라고 불렀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여전히 제단이라고 합니다. 강단을 제단이라고 하여 신성시하는 데에서 한국 교회의 강단은 이중 혹은 삼중 강단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성전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이 성전입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약신학과 맞지 않는 카톨릭식입니다. 21세기에 들어와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성전인 성도가 거룩하여야지 건물이 거룩할 필요는 이제 없습니다. 학교강당도 좋고 빌딩도 좋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당이면 어디라도 좋습니다. 음향과 조명과 좌석등 예배자가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면서 교회의 목적에 맞도록 변화되는 것은 시대의 옷을 입고 선교하는 것입니다.
예배시 복장 변화
루터의 종교개혁 95개 조항에 까운 문제가 포함되었습니다. 특별한 사람인양 복장하는 것을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개신교에서 천주교처럼 변해가고 있습니다. 개혁된 복장을 다시 착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장이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7) 예배자의 예배 지각문제
예배자들은 예배 시간에 지각하므로 준비없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조사에 의하면 지각하는 사람이 계속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 문화에 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랜 기독교 문화를 가진 유럽과 미국에서는 예배자들이 늦어도 예배 시작 10분전에는 예배당에 나와 자리에 앉습니다. 예배가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는 축제임을 알고 있다면 시간 전에 미리 와서 자리에 앉아 예배에 감격과 기대를 가지고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면서 자신은 그 하나님 앞에 얼마나 미천한 자이며 부정(不淨)한 자임을 고백하며 지난 한 주일 동안 은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함이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잘못한 죄를 회개하며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어 주께로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8) 예배와 봉사의 우선순위 문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오는 큰 유혹 가운데 하나는 예배를 소홀히 여기면서 봉사한다고 열심히 다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12:30)는 위대한 계명을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보다 봉사가 앞서면 우상숭배가 되고 예배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준비는 거룩한 주님의 현존을 기대하고, 말씀과 성령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주의 영광을 보기 원하는, 하나님 만나기 원하는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준비되어져야 옳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가족 공동체로 모였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마틴 루터는 ‘내 집에서는 내 속에 뜨거움이나 활기가 없었는데, 교회에서 무리들이 함께 모였을 때 나의 마음속에 불이 붙었고 그 불빛이 비쳤다’고 증언하였습니다.
(9) 주일과 안식일을 분명히 이해해야
성경은 안식일(sabbath)과 주일(Lord's day)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안식일에 대하여 출애굽기 20장 10절에서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출23장12절에서는 ‘너는 육 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칠 일에는 쉬라’ 신명기 5장 13-15절에서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신약에서 안식을 해석하기를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게 보낸 편지 중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골2:16-17)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은 일하지 않고 거룩히 쉬는 것을 의미하면서 진정한 안식은 이 땅에서 누릴 수 없는 안식이고(히11:3-16),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천국 안식을 그림자로 경험하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일은 마지막 날(안식일)이 아니고 처음 시작하는 첫날입니다. 창세부터 예수 그리스도 시대까지는 안식일이 마지막 토요일이었으나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안식일에서 주일(첫날)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이 완성된 시대 사람들, 초대교회들과 사도들은 안식일의 주인(막2;28), 율법의 완성자(마5;17)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후 첫날 부활하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날에 예배를 드렸고 주일에 연보를 드렸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일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안식일이 시내 산에서 받은 옛 언약(율법)이라면 주일은 은혜로 받은 새 언약(말씀)입니다(롬6:14).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날이라면 주일은 옛 언약을 성취하신 주의 날입니다.
신약에서 우리 주님의 부활의 날을 거룩한 주일로 바꾸어 지키게 된 성경적 근거가 많이 있습니다. 계시록1장10절에서 요한에게 보여주신 환상도 주의 날이었습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여기서 주의 날은 문자적으로 주께 속한 날을 의미하고, 안식 후 첫날을 말하며(막16:2,눅24:1), 매주일 첫날(고전16:2)을 의미합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행20:7-11) - 이 내용은 사도 바울이 드로아 지역 초대성도들과 작별인사를 하기 전에 공식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렸고 공식적인 식사를 가지게 되었다는 내용이며 그 날이 안식 후 첫날 즉 주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16:2)-여기서 매 주일 첫날은 매 안식 후 첫날이며 오늘날의 주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전의 초대교회는 안식일에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으나(행15:21,18:4),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처음부터 부활을 기리며 안식 후 첫날에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행20:7).
그리고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고전11:20)의 말씀에서도 주의 만찬을 교회에서 교제하면서 나눈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행2;46,고후8:14).
폴 주이트(paul K. Jewett)는 주의 날이라는 연구 책에서 주의 만찬이라는 표현이 주일이라는 말보다 먼저 나왔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이 공중 예배의 절정인 이 만찬을 기념하기 위해 모였던 그들의 날이 이러한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고 주장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