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은 관훈클럽의 요청으로 관훈저널 2019년 봄호에 게재한 회고록 '시대의 쓰나미를 넘어'이다.
관훈저널의 고정 목록인 '미니회고'에 실린 이글은 2백자 원고로 130매, A4용지 (10포인트활자)로 16매가 넘는 양이어서 읽는 분들은 좀 지루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회고록이란걸 처음 쓰다보니 새삼 깨닫는게 많았다. 비하인드스토리도 많이 곁들여쓰려했으나, 사람들 이름을 거론하기가 쉽지않았다. 회고록을 쓰려면 우선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야함을 알았다. 또 내 기억에도 틀린 내용이 많다는 점에 놀랐다. 사람 두뇌의 한계를 실감했고 이는 만시지탄이나마 성찰의 좋은 계기가 된 것같다.
기억의 창고를 구석구석 비추어보면서 과거를 라운드 업 해본건 비단 과거에 대한 정리뿐 아니라 현시점에서 내 발 앞에 표지석 하나를 박음으로써 나의 미래에 대해 의미있는 전망을 할 수 있게 된 느낌이다.
가능한 사적인 스토리와 감정을 배제하고 특징적인 시대상, 그리고 언론가치를 둘러싼 도전과 갈등에 관련한 사실들을 주로 간추렸다. 그리고 물론 내 관점으로 평가했지만, 읽는 이들이 현대 한국 언론사의 한 단면을 일별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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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쓰나미를 넘어
(김지영 전 경향신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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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해 관훈저널 봄 호에 취재여담을 게재한 바 있다. 학원안정법 관련 보도, 그리고 이 보도로 인해 안기부(현 국정원)로 연행돼 고문을 받았던 이야기다. 1985년 7월 25일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한달 여 뒤인 8월 29일 오후.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인 김충식이 긴박한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를 해왔다. 안기부에서 쫓고 있어 피신해야겠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이채주 편집국장과 이상하 정치부장은 이미 안기부로 연행돼갔다고 했다. 바로 그날, 동아일보 2판에 실린 ‘불시착 중공기 조종사 대만 보내기로’란 기사를 당시 외교부에 출입하던 김충식 기자가 정부발표 이전에 송고했다는게 구실이었다.
김충식은 그날 내 집으로 피신했다.
그는 대학시절 문학청년회를 함께 했던 친구. 몇 개 대학 회원들 중 우리 둘이 일간지 기자가 되었고, 둘은 같은 시기에 사건 기자와 법조 기자, 그리고 정치부 기자를 지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출근하고 그는 우리 집에서 은거해 있었다. 결국 김충식은 나중에 회사 동료들과 통화한 끝에 안기부로 자진 출두했다. 그 역시 심한 고문을 당했음은 물론이다. 인연이 겹쳐 얽힌 그와 나는 같은 시기에 안기부 지하 고문실 경험마저 공유하게 됐다. 친구가 똑같이 겪었다는 점이 드물 뿐, 5공화국 당시 언론계는 물론 각계각층 인사들이 툭하면 영장도 없이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다.
< 수습 때부터 겪은 언론 유린 >
나에게 안기부 고문의 경험은 그러나, 입사직후부터 어렴풋하게 예감하던 그 무엇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기도 했다. 나는 1979년 가을 ㈜문화방송·경향신문 ‘통합 6기’ 공채로 입사했다. 시험을 본지 열흘 뒤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됐고, 합격자 발표 뒤 수습교육이 시작하자 곧 12·12 군사반란 사태가 발생했다. 나라 전체가 그러했지만 머릿속은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불안했으며 불길했다. 마치 내 자신이, 곧 해일이 집어삼킬 해변에서 아무것도 모른채 헤매고 있는 아이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그 뒤 시차를 두고 구체적인 현실의 모습으로 엄습했다. 그 첫 번째가 계엄사령부 언론검열단에서 검열을 받은 경험이다. 편집국과 보도국을 오가며 6개월간 수습교육을 받던 중 편집국 교육때 자주 ‘검열당번’을 맡았던 것이다.
서울특별시 청사 1층 대회의실에 마련된 계엄사령부 언론검열단. 전면에는 낮은 무대가 있고 무대 쪽은 장막이 가리고 있다. 장막 앞을 따라 담당 분야별로 1인용 책상들이 줄지어 가로로 배치돼있고 책상마다 군복이나 사복을 입은 이들이 앉아 있다.
시계바늘이 오전 11시를 넘어 정오를 향해 가는 시간. 손에 시쇄용 신문대장을 접어 든 석간신문 기자들이 속속 들어선다. 기자들은 도착한 순서대로 담당관을 찾아 이 책상, 저 책상 앞에 줄을 선다. 마치 숙제검사를 받으려고 선생님 앞에 줄을 선 초등학생처럼. 모두 체념한 사람처럼 무표정하고 말이 없다.
검열관들은 대장의 구석구석을 꼼꼼이 살펴보다가 붉은 연필로 ‘주욱-’ 줄을 긋거나 돼지꼬리 표를 그린다. 그리고 주문을 써넣는다. 이럴 때 가끔 검열을 받던 기자들이 무언가 설명을 하기도 하지만 잘 통하지 않는다. 이 경험은 일찍이 기자직을 꿈꿔온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신문기자가 되기 위한 교육기간에 군인들에게 검열 받는 일부터 배우다니··· . 검열이 끝나면 사무실 구석에 설치된 전화기로 회사 데스크에 검열결과를 보고했다.
언론 검열은 보도지침에 따라 특정 기사를 단속하거나 보도하지 못하게 하는 행위다. 하지만 특정 기사를 보도하라는 ‘역검열’도 자주 했다. 대표적인 예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동정, 신군부의 방침 발표 같은 것들이다. 언론반의 또 다른 주요 업무는 각 언론기관의 주요 인사들을 접촉해 회유하거나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공작이었다. 그들은 언론인을 접촉하고 나면 회유공작 결과 분석표에 해당 언론인의 정치성향을 써넣고 비고란에 ‘양호’ ‘협조희망’ ‘적극’ ‘경계’ ‘소극’ 등으로 분류해놓았다.
나는 시청 검열단에 갈 때면 궁금한 것이 있었다. “저 무대 장막 뒤에는 누가 있을까?” 알고 보니 그 유명한 강보좌관, 즉 강기덕 보좌관이 상주하고 있었다. 보안사 언론반 반장으로 계급은 준위, 본명은 이상재. 한국 언론사와 언론인의 생사여탈권을 1980년부터 한동안 휘두른 그는 나중에 집권당인 민정당의 ‘실세’ 사무차장까지 지냈다.
검열뿐이 아니었다. 수습기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시대의 쓰나미가 연속적으로 들이닥쳤다. 1980년에 들자 ‘서울의 봄’이라 하여 온 나라가 민주주의 시대를 갈구하며 들떠 있었지만, ‘봄의 싹’을 짓밟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신군부세력의 음모는 따로 진행되고 있었다.
언론사마다 기자들이 나섰다. ‘검열철폐’ ‘자유 언론실천’을 내세우고 제작거부 투쟁을 벌였다. 경향신문에서도 선배 기자들이 신문제작 참여를 거부하고 연일 편집국 토론회를 벌이면서 회사 옆의 옛 러시아공관 터에서 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곧 이어진 5·18 학살과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나는 선배에게 광주 현장에 보내달라고 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기도 했다. 선배는 “수습이 감히 어딜···”하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언론인 711명에 대한 강제해직과 구속기소가 잇따랐다. 신군부세력은 6월에 국회를 해산하고 초헌법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전권을 장악했다. 8월16일에는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토록 했으며 바로 11일 뒤에는 전두환을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체육관선거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한다. 그리고는 종전의 유신헌법을 개정, 국회기능을 대신할 국가보위입법회의를 설치했다. 12월에는 사법부가 아닌 문공부 장관이 언론사 등록을 취소시킬 수 있도록 한 언론기본법을 입법회의에서 통과시켰다. 곧 헌법을 고치고 1981년 2월 25일, 임기 7년 단임제 12대 대통령으로 다시 전두환을 체육관선거로 선출한다. 5공화국의 출범이었다.
계엄은 해제되고 언론검열은 없어졌지만 정부는 문화공보부 안에 아예 홍보조정실이라는 상설 언론 통제기구를 설치했다. 그리고는 매일같이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내보냈다. 홍보조정실은 1987년 6월의 민주화 항쟁 이후 없어졌다. 나중에, 1988년 국회 언론청문회 때 나왔던 당시 이광표 문화공보부 장관의 진술에 따르면 제5공화국 기간 동안 홍보조정실이 내보낸 보도지침의 매체 반영률은 평균 70%였다. 매체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사실상 정치권력이 마음 먹은 대로 매체가 제작된 것이다.
국민들은 국내 신문과 방송의 뉴스를 잘 믿지 않았다. 외신을 믿었고, 웬만한 식자들은 주간 타임지나 뉴스위크지를 보고 있었다. 어떤 사실이 틀림없음을 입증하는 근거로 사람들은 흔히 ‘외신에 났대’라고 말하곤 했다. ‘신문에 났대’ 나 ‘방송에 났대’가 아니었다.
기자로서 활동한 27년간 수많은 일과 사람을 겪었지만, 지면 제약상 기억을 압축해 편집할 수 밖에 없겠다. 언론가치가 도전을 받은 일과 시대상이 예민하게 반영된 일, 그중에서도 직접 겪은 일들 몇가지를 중심으로 술회해보기로 한다.
언론과 정치권력, 또는 언론과 자본권력과의 갈등은 숙명적이다. 그렇다 해도 수습기자 시절부터 시작해 정치·경제 권력과의 갈등 또는 충돌로 언론 가치가 훼손되는 일을 너무나 많이 보고 또 겪었다. 우리 동기생들은 1980년 5월말로 수습기간이 끝났다. 기자 동기생 8명은 신문과 방송으로 나뉘어 4명씩 배치됐다. 신문은 나와 고영신 김종두 김학순, 방송(MBC)은 김재철 박석태 정성환 한병우. 나는 경찰서를 출입하는 사회부 사건기자로 첫 보직을 받았다.
그리고는 83년 말까지 4년 가까이 사건기자로서 서울시내 각 경찰서 라인을 담당했다. 그 뒤 사회부에서는 법조, 사건기자들을 지휘하는 시경 캡틴, 공항·노동청·환경청·보사부 등 행정부처에 이어 사건데스크와 사회부장을 맡았다. 사회부와 정치부를 오가며 정치부에서는 총리실과 민정당·민추협·신민주공화당 등 여야 정당, 국회팀장을 거쳤다. 국제부 차장으로 2년쯤 일하기도 했고 뜻밖에 경제부장 발령을 받기도 했다. 논설위원과 편집국 부국장을 거쳐 편집국장 직을 수행했고 마지막으로 편집인을 지냈다. 편집국 밖의 직무라면 노조위원장, 그리고 1년간의 미국 연수가 있다.
< 인권은 없어도 ‘곰권’은 있는 나라 >
첫 출입처는 동대문경찰서(현 혜화경찰서) 라인. 청량리경찰서, 태릉경찰서 관내 지역을 포괄한다. 이 라인에는 대학과 병원도 많았지만 창경원이야말로 독보적인 출입처였다. 당시 전국에서 가장 큰 동물원이 있었고 봄철에는 밤 벚꽃놀이가 펼쳐지던 창경원은 서울의 대표적 유원지였다.
당시 정치는 빈사상태였다. 국회는 해산됐고 정당과 정치인들은 지리멸렬했으며 신문에서는 정치 기사라 할 만한 게 없었다. 정치면은 군부권력의 의지와 방침을 전하는 뉴스 중심이었다. 그러다보니 매체들은 강력사건이 발생하면 매우 크게 다루었다. 언론사 중에는 기자들에게 ‘생활기사’를 많이 발굴하라고 독려하는 곳들도 있었다. 또 동물에 관한 기사도 많이 다루었다.
동대문 라인의 기자들은 저마다 데스크의 주문으로 창경원의 동물 이야기를 발굴하기에 바빴다. 동물들을 의인화해 재미있게 쓴 기사는 언제라도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 마련이다. 하지만 독재정권 치하에서 사람들이 고문 받거나 죽어도 잘 취급하지 않는 언론매체들이 동물이 죽었다거나 새끼를 낳았다는 등의 동물이야기는 읽을거리로 돋보이게 다루었다. 시대의 희극 같은 비극이었다.
나도 창경원을 부지런히 다녔다. 하루는 동물 박제 전시관을 우연히 들어가 봤다. 2층·3층에진열된 조류 박제들에게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는데, 이름과 포획 시기, 장소 등 내용이 모두 일본어가 아닌가. 일제 강점기때의 것 그대로였다. 종류별로 개체 수를 세다 잊어먹기를 거듭하며 어렵사리 실태를 파악했다. 기사를 써서 데스크에 제출했더니 데스크는 크게 만족한 표정이었다. “한글날 톱기사로 쓰자고!”
그런데 한글날을 앞둔 어느 날 데스크가 부르는 것이었다. 전두환이 8월 27일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당분간은 정부나 공공기관을 비판한 기사는 일체 쓸 수 없다는 보도지침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기사 못쓰게 됐어”하며 원고를 휴지통에 던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도 모르게 “안돼요!”하면서 휴지통 속에서 원고지를 건졌다. 눈물이 쏟아졌다. 고생하며 취재한 일이 억울하기도 했지만, 순수한 취재의욕을 권력이 짓밟는 게 분했던 것이다.
동물 기사라면, 나는 곰과 관련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을 두 차례 취재했다. 역시 동대문 시절이다. 1981년 5월 어느 날 오후, 부장이 직접 전화를 했다. “경기도 광주군에서 곰이 사람을 물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서울 인근의 야산에 야생곰이 살고 있다···? 사실이라면 큰 기사였다. 급히 광주군으로 내달려 나물 캐러 갔다가 곰에게 물렸다는 아주머니를 찾았다. 다리 상처와 농가 맞은편 산을 촬영하고, 곰의 동선을 그래픽으로 그려 다음날 신문(경향은 당시 석간)에 기사와 함께 게재했다.
경향신문 사회면에 곰 기사가 나가자 적요하기만 했던 광주군은 전국에서 몰려든 수많은 취재기자들로 북적거렸다. 경찰도 대거 출동했다. 경찰이 이 골짜기 저 계곡으로 곰을 쫓고 곰은 달아나기를 1주일째, 전국의 신문·방송은 연일 곰 사건으로 지면과 뉴스시간을 채웠다. 곰은 결국 경찰의 M16 소총에 맞고 숨진다. 신문·방송은 다시 ‘죄 없는 곰’을 ‘무지막지하게’ 살해한 과정을 자세히 소개하고 그런 경찰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전문가들 사이에 벌어진 ‘야생곰이냐, 탈출한 사육 곰이냐’는 논란도 중계했다.(나는 당시 인근 지역에 번성하던 곰 사육장에서 탈출한 곰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2년 뒤인 1983년 5월. 김대중 씨는 미국에 쫓겨가 있고, 김영삼 씨는 자택연금 중 단식투쟁을 하던 때였다. 김종필씨 역시 가택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언론은 이들 3김을 비롯한 정치지도자의 동향을 일체 보도하지 못했다. 가령 YS의 장기단식투쟁에 대한 보도는 사회면 2단 이하, 그나마 ‘단식’이라는 제목은 뽑지 말고 ‘정치현안’으로 표현하라는 게 정부의 보도지침이었다.
5월 21일, YS가 단식중일 때였다. 경향신문 1면에 설악산 마등령 바위 밑에서 밀렵꾼이 쏜 총에 맞아 신음하고 있는 반달곰 사진과 기사가 게재됐다. 역시 제보를 받아 사진부 조명동 선배와 지방부 강웅희 선배가 취재했다. 두 선배가 마등령에서 1보를 보낸뒤 내가 후속 취재팀장으로 지명돼 취재 및 사진기자 3명과 함께 설악산 마등령으로 올랐다. 그러나 곰은 그날 숨을 거두었다. 또다시 전국의 매체들이 곰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이때 YS의 대변인격인 김수한 씨(전 국회의장)가 곰 사건에 대한 성명을 발표했다.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받고, 정치지도자가 단식으로 죽어가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언론이 한 마리 곰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렇게 나라가 떠나가도록 떠드니, 이 땅에 인권은 없어도 곰권, 수권(獸權)은 있단 말인가”
젊은 기자는 팩트의 가치만 보았지만, 시대의 현주소를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이 성명에 가슴이 저렸다.
< 군부정권 치하 강력사건의 메시지 >
당시에는 강력사건이 많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강력사건이 많기도 했지만 정치기사와 공안사건 기사는 정부의 통제로 실종되고 강력사건 기사와 화제성 기사는 대서특필됐던 것이다. 사회적 파문이 컸던 것이라면 이윤상군 유괴납치살해 사건, 원효로 윤노파 일가족 3명 피살 사건, 여대생 박상은 양 피살 사건, 우 순경 총기난사 사건, 을지병원 남편 독살사건 등이다.
또 내가 사건기자를 떠난 1984년 초 이후 발생한 1980년대의 큰 강력사건이라면 서진룸살롱 사건, 화성 연쇄살인사건, 지강헌 일당 탈주사건, 구로동 샛별룸살롱 사건 등이 있다. 1980년대 강력사건의 특징은, 범행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갈수록 범행수법이 잔인해지고 인륜을 파괴하는 경향이 강해졌다는 것이다. 또 상대적 빈곤이나 차별에 대한 분노가 범행동기가 되는, 사회경제적 강력범죄가 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가령 1988년 10월 8일 미결수 12명이 집단 탈주한 사건은 주범 지강헌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또 하나 당시 강력사건을 말할 때 빠트릴 수 없는 대목. 경찰이나 검찰이 진범이라고 기소한 피고인 가운데 증거 부족이나 불법구금,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 문제가 돼 무죄선고가 내려진 사례가 많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건이 윤노파 일가족 3명 피살사건과 여대생 박상은 양 피살사건이다. 그 이전과는 완연히 다른 법원의 판결 경향이었다. 법원의 엄격한 증거주의와 절차주의 요구가 잇따르면서 (아이로니컬하게도)군사독재 기간인 이때 수사기관의 강압수사에 경종을 울리고 인권의식 고양과 수사기법 선진화를 앞당겼다.
먼 훗날, 당시 판사로 재직했던 한 법조인을 만나 들은 이야기다. “재판에서 확실한 증거와 절차를 강조한 것은 비단 수사와 기소를 맡은 검경만이 대상이 아니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민주주의 질서와 절차를 짓밟는 집권 군부세력에 경고를 보내고 싶었던 판사들의 이심전심이었다는 것이다.
위의 강력사건 중 내 담당이었던 것은 박상은 양 피살사건과 을지병원 남편 독살 사건이었다. 그중 을지병원 사건은 여러모로 나에게 인상이 깊은 사건이다. 두 번째로 중부경찰서 라인을 출입하고 있던 1983년 4월 26일 아침, 교통사고로 을지병원에 입원해있던 염필수씨(38)가 독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충격은 컸다. 염씨는, 누군가 어린 아들을 통해 전해준 우유를 마신 뒤 숨졌고, 옆 병실 환자는 구토를 하며 중태에 빠졌다. 병원 내에서는 아직 개봉하지 않는 우유팩들이 발견됐다. 극약인 청산가리를 탄 우유와 요구르트였다. 게다가 바로 얼마 전 17일에는 천호동 강동카바레에서 한 종업원이 화장실에 놓여있던 음료수를 마시고 숨졌던 터였다. ‘아무나 먹고 죽어라’는 식의 ‘불특정 다수를 노린 범죄’. 이때 처음 등장한 언론 표현이다.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여론이 뒤숭숭해졌다.
을지병원 부근에는 서울의 사건기자 대부분이 몰렸다. 나는 처음부터 부인 김모씨(38)에 의심이 갔다. 영안실에서 신문들을 챙겨 이 사건 속보를 열심히 보는가 하면, 내가 몇 가지를 묻는데 심적으로 불안한 듯 말을 하면서 다리를 떠는 것이었다. 이튿날인 27일 오후, 중부서의 ‘길통’(길병국) 형사계장과 부인 김씨가 동시에 사라졌다. 나는 직감적으로 길통이 어디론가 부인을 데리고 가서 심문하고 있으리라 판단했다. 땅딸막한 키에 대머리, 쏘아보는 눈빛, 찍으면 거의 맞힌다는 ‘육감수사’의 대가로 명성이 자자한 길통이 아닌가. “사건이 예상보다 일찍 끝나는군···?”
나는 후배 기자들에게 중부서 관내의 호텔과 파출소 숙직실을 다 뒤질 것을 주문했다. 당시 경찰은 중요 용의자를 이런 곳에서 강압적인 심문을 하는 게 관행이었다. (우리 팀이 찾진 못했지만 결국 알고 보니 길통은 풍전호텔에서 심문하고 있었다)
병원 영안실 주변에서 후배들과 연락을 주고받던 나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지원 나왔던 시경 강력계 형사 세 명이 나란히 골목을 빠져나가는데, 걸음걸이가 한없이 느긋했다. “끝났구나!” 나는 단정하고 쫓아갔다. 그들 중에는 내가 아는 지용담 형사도 있었다. 형사들이 을지로 대로변에 세워둔 승용차에 타고 문을 닫으려는 순간, 나도 뒷좌석으로 올라탔다. 중부서로 간다는 그들에게 “나도 그리로 가니 좀 태워 달라”고 했다. 형사들이 중부서 현관에 도착해 건물 안으로 들어 설 때, 나는 지형사의 허리춤을 잡아 기둥 뒤로 세게 끌었다. “어...김기자 왜 이래요?” “지형, 끝났지? 부인이 왜 그랬대? 증거물은···?” 순간 나를 잠시 응시하던 지형사가 나직이 말했다. “보험금 때문이고...(부인의) 가게 천장에서 쓰다 남은 청산가리가 나왔어” 요즘은 드물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친족을 살해했다는건 충격적인 일이었다.
“지형, 고마워요!” 지방판 마감시간 오후 5시 반이 지나고 있었다. 경찰서에서 좀 떨어진 점포를 찾아 전화기를 확보, 기사를 부르기 시작했다. “을지병원 독살사건은 보험금을 노린 아내의 범행이었다...”
곧 경향신문은 특종기사를 싣고 부산으로 발송됐고, 밤 10시 국회내무위에서 박배근 시경국장이 범인 검거소식을 보고했다. 곧 중부경찰서 서장실에서는 최재삼 서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같은 내용을 발표했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취재기자, 사진기자들로 중부서 서장실은 아수라장이었다.
이 사건이 내 뇌리에 깊이 각인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잊지 못할 형사, 지용담 때문이다.
동대문 경찰서에 출입할 당시 만난 그는 나와 동갑인지, 한 살 아래인지 그랬다. 그는 소매치기를 잡아 제압하는 과정에서 소매치기의 장이 파열돼 치료비와 보상비를 대느라 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위로를 건넸고 점차 각별하게 대하는 사이가 됐다. 을지병원 독살사건에서는 그를 따라붙어 특종을 했고, 내가 시경캡으로 갔을 때 시경 강력계 소속이던 그를 다시 만났다. 나중에 내가 사건 데스크를 맡아 일을 할 때 그는, 가끔 경향의 후배 사건기자들에게 내 안부를 물으며 요긴한 정보나 사진자료를 슬쩍 건네곤 했다.
나는 “지형사와 소주라도 한잔 해야지···”하고 마음을 먹었으나 차일피일 미루거나 잠시 잊어비리거나 했다. 그러길 몇 년째, 언젠가 최중락 전 총경(드라마 수사반장을 자문한 수사의 고참 베테랑)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나는 지형사의 안부를 물었는데 “아까운 사람이지, 몇 해 전 수영을 하다 심장마비로 갔어···”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나는 콧날이 시큰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국민들이 경멸하는 언론과 사법부 >
사건기자로 바쁘게 일을 하는 와중에도 늘 자책감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언론계에서는 친여매체들을 중심으로 ‘반정부 세력’에 맞서 권력의 대리전을 치르고 있었다. 사설·칼럼과 해설, 특별기획 등 각종 포맷의 보도물을 통해 ‘운동권’ 세력에 대대적 공습을 퍼붓기도 했다.
당시는 지금과 같은 노트북이나 휴대폰은 물론이고 ‘삐삐’ 조차 보급되지 않던 시절이다. 기사를 써서 회사에 두고 나오거나 내가 기자실에 있지 않는 이상, 외부에서 기사를 송고할 때는 그 수단이 주로 붙박이 전화 아니면 공중전화였다. (물론 취재차량에는 비상용 무선전화가 있었지만 기사를 송고하기에는 불편했다. 동전을 한 웅큼 교환해 공중전화를 쓰기도 했다). 대개는 취재현장 인근의 점포나 사무실에 들어가 양해를 구하고 전화기를 빌려 쓰곤 했다. 이럴 때 점포 주인으로부터 거절당하거나 비아냥을 듣는 일이 많았다.
일반시민·노동자·지식인들, 심지어 정부나 여당의 취재대상 조차 경멸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시위현장, 대학가 취재 때는 노골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신문사 편집국에는 보도내용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이에 응대하는 것은 큰 고역이었다.
경향신문은 MBC와 별도 법인으로 분리됐다.(TBC는 KBS로 흡수되고 동아방송은 문을 닫는 등 전국 64개 언론사가 23개로 줄어들었다). 군부 정권은 1980년 11월 언론장악 시나리오에 따라 언론 통폐합을 자행했는데 신문과 방송은 분리하거나 그중 하나는 없앤다는 게 원칙중 하나였던 것이다. 경향신문은 사단법인으로 회사형태가 바뀌었다. 그렇지 않아도 ‘친여매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던 경향은 법적으로도 정권의 족쇄를 차게 됐다. 사단법인인 언론사는 문공부의 감사를 받게 돼있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의 역사는 현대사의 영욕, 또는 부침과 그 궤를 함께 해왔다. 창사 이후 한동안은 정론지로서 자랑스러운 역사를 유지해왔다. 1946년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창립한 뒤 양질의 제작 시설과 신문제품, 뚜렷한 중도노선으로 많은 독자를 확보했다. 이어 1959년 이승만의 독재체제에 반대노선을 분명히 하면서 부수가 20만부를 기록할 정도로 국민적 신뢰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곧 이승만 정부에게 낙인이 찍혀 강제로 폐간조치 되었고 4·19 이후 복간된다. 1963년에는 명동극장 사장이던 이준구에게 넘어갔다가 1966년에는 기아산업으로, 다시 1969년에는 신진그룹이 인수한다. 경향신문은 이때부터 점차 정권과 자본가 계급을 대변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어 1974년 박정희 정권의 계획으로 MBC와 통합, 회사명도 ㈜문화방송·경향신문으로 달라졌으며 ‘친여매체’라는 꼬리표가 붙기 시작한 것이다.
1984년, 법조를 출입하면서 보니 법원과 검찰 역시 숨을 쉬지 못하고 굴종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 안기부·보안사·정보사·치안본부(현 경찰청) 등 각 정보사찰기관의 기관원들은 행정부와 국회·정당, 언론사, 각급 기관과 단체, 대기업은 물론 사법부와 검찰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모든 주요 조직에 출입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보를 입수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존재 그 자체가 감시와 통제 역할을 했다. 설사 그렇더라도 음지에서 움직여야 할 그들이 공개적·공식적으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중요한 행사나 기자회견이 있을 땐 카메라가 촬영하고 있는데도 버젓이 수첩에 메모를 해가며 취재활동을 했고 이같은 모습은 뉴스화면에 그대로 나가기도 했다. 겉으로 보면 기자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기자들은 그들을 ‘관선기사’, 줄여서 ‘관선’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법원장실과 판사실도 거리낌 없이 제 집 드나들 듯이 출입했다. 판사들도 기자와 마찬가지로 집권세력의 주문대로, 때로는 눈치껏 판결을 하면서 역사와 국민을 배반하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단군 이래 최대 어음 사기사건이라는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재판 중이었다. 전두환 체제가 국민 탄압의 바탕위에 자리를 잡아가려는 이 무렵에는 대형 경제사건도 많이 발생했다. 이·장 사건 외에 김철호의 명성 사건, 이진 사건, 영동개발진흥 사건, 범양사건, 이복례 사건 등이다. 그와 함께 5공 체제 수호와 관련된 공안사건, 인권사건이 많았다.
< 버려진 대통령 직선제 기사 >
정치부 발령을 받아 중앙청(총리실)을 출입한 것은 1985년이었다. 중앙청 출입 기자들은 총리실과 총무처와 법제처, 그리고 남북관계를 담당했다. 당시 타사 기자들 중 훌륭한 기자들이 많았지만 현재 국무총리인 동아일보 이낙연 기자는 기억에 뚜렷이 남는 이다. 명석하고 부지런했으며 위트도 뛰어났다. 특히 그는 문장에 관해서는 자신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매우 엄격했다. 판문점에서 각종 남북회담이 있을 때마다 총리실 출입 기자들은 현지에서 취재를 하고 순번제로 ‘풀’기사를 작성했다. 삼청동 남북대화 사무국으로 연결된 전화회선의 제한 때문이었다. 이때 그와 함께 자주 풀 기사를 검토했는데 문장배열 순서, 표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문장에 엄한지 알 수 있었다.
그해 9월엔 제1차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이 성사됐다. 서울에서는 워커힐 호텔이 거점이었다. 북한측 숙소와 행사장, 프레스 센터가 모두 이곳에 마련됐다. 북한 예술단이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할 때 내가 순번상 풀 기자였다. 북한 예술단은 가무를 하면서 검무도 추었다. 풀기사를 작성해 취재본부에 넘기고 나중에 내가 보낸 기사를 각 신문에서 확인해보니 누군가 기사를 고쳐 놓았다. “북한 예술단원들은 검무를 추면서 칼 끝을 관객들에게 겨누어 섬찟하게 만들기도 했다”는 어이없는 대목을 삽입해 놓았던 것이다. 공안 당국의 짓이었다.
나는 그 뒤 한동안 남북 행사때 현장 취재팀장을 맡기도 했다. 그랬던 내가 나중에 이산가족으로서 북한의 고모를 만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한국전쟁 기간 중 행방불명되었다던 큰 고모. 그 고모가 북한에 살고 있으며 남쪽 혈육들을 만나겠다고 상봉을 신청했다는 것이다. 신문사 퇴직 후인 2010년 10월 30일부터 2박 3일간 금강산에서 있었던 제18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때 나는 집안 어른들을 모시고 가서 북한 고모를 만났다.
총리실을 떠나 민정당, 민추협, 민주공화당 등 정당을 출입하는 동안에도 물론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일화 한 가지만 적는다. 1987년 6월 항쟁에 굴복했던 정권의 6·29 선언(대통령 직선제 추진) 취재기다. 박종철 군과 이한열 군 사망으로 반정부 저항과 시위는 전 국민적 수준으로 확산했고, 전두환 정권은 벼랑 끝까지 몰리는 상황이 됐다. ‘과연 정부와 여당이 내놓을 시국 대책이 무엇인지’가 정치부 기자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였다.
6월 하순에 접어든 어느날, 나는 평소 한 군데 돌던 아침 식전(식사 전) 취재를 일찌감치 시작해 두 군데를 돌았다. 그날 식전 취재 때 각각 만난 정치인은 여당인 민정당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던 이들. 두 사람은 분명히 대통령 직선제를 추진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장소를 택해 ‘정부와 여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추진키로 했다’는 요지의 기사를 불렀다. 당연히 1면 톱 기사 꺼리였다.
그러나 그날 낮, 경향신문(당시 석간)에 그 기사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편집국 데스크 입장에서 그처럼 중요한 기사가 들어왔다면 취재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취재경위나 사실관계를 재차 확인하고 필요하면 보완지시를 하는게 상식적이다. 하지만 회사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어,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다 여기던 터였다. 나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날 데스크의 판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직선제를 추진하는 정부와 여당의 처지로 보자면, 극도의 보안을 유지해서 발표할 때의 극적인 효과를 노리려고 했을 것이다. 그같은 정권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어, 극적 효과에 김을 빼지 않으려고 후배 기자의 기사를 쓰레기 통에 던져버렸을까? 설마 그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고 싶다. 그날 저녁 귀사해 데스크 중 한 분에게 왜 그랬는지 물었더니 “잘못 된 일”이라는 응답만 돌아왔을 뿐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기자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정권과 시국에 대한 울화를 속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1986년에는 제도권 언론사 기자들이 1980년 제작거부 투쟁 이후 처음으로 시국성명을 잇따라 내놓는다. 경향신문 기자들은 5월 30일 아침 편집국에서 ‘언론현실에 대한 우리의 반성과 결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기자들은 편파보도 거부, 언론기본법 폐지, 홍보조정 불용, 언론인 불법연행과 구금 및 고문 근절, 기관원의 언론사 출입 금지 등을 촉구했다. 성명은 내가 낭독했다.
그해 9월에는 보도지침 내용이 ‘말’지에 폭로됐다.
민주화 항쟁이 한창이던 이듬해 1987년 6월에는, 서울역 앞에서 시위군중이 열차편으로 지방에 발송하려던 경향신문 뭉치를 발송차에서 내려 불태웠다. 경향신문, 또는 언론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어느 정도인지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에 경향신문 기자들은 22일 통절한 반성과 새로운 각오를 담은 ‘본지 소각사태에 따른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을 발표한다.
< 언론 격변기, 기자 무단해고와 한화의 경향 인수 >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 사회는 각 분야에서 큰 변화를 맞이한다. 각 산업 단위별로 노조를 일제히 설립했으며, 언론계도 마찬가지였다. 경향신문은 1988년 3월 18일 노조를 결성했다. 초대 위원장은 2기 선배인 이성수 기자. 나도 집행부에 참여했다. 수습기자 때부터 보고 겪었던 많은 충격과 굴욕과 절망은 나로 하여금 망설이지 않고 노조에 참여하게 했다. 민심과 소통하고, 저널리즘이 살아있는, 그래서 신문다운 신문을 구현하기 위해 벽돌 한 장이라도 놓고 싶었다. 나는 지면의 비평과 개혁을 임무로 하는 자유언론실천위원회(자실위) 간사를 맡았다.
정치부 기자일 때인데 노조 일과 취재 일을 병행하려니 몸은 피곤했고 잠은 모자랐다. 그래도 열심히 했고, 보람이 있었다. 주필을 비롯한 제작 책임자들과 평기자들이 매주 한차례씩 만나 신문제작 전반에 걸쳐 의견을 나누는 ‘편집제작 평의회’도 이때 처음으로 만들었다.
각오는 했지만,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많았다. 친숙하게 지내던 선배 기자나 간부들과 점점 사이가 벌어지는 것이었다. 정치부 안에서는 더 했다. 당시 정치부에서 노조에 적극 참여하는 기자로는 나와 후배인 이대근(현 경향신문 논설고문), 둘 뿐 이었다. 정치부 분위기는 대체로 “정치부 기자가 무슨 노조를···”이라는 것이었고 우리는 ‘왕따’의 느낌도 받았다. 편집국 각 부서가 마찬가지지만 정치부는 정치부대로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노조가 생기기 전에도 정치부 선배들은 가끔 정치부 신입 후배들에게 “당신 사츠마와리냐?”고 힐난하는 경우가 있었다. ‘기자초년생인 경찰서 출입기자처럼 아직 그렇게 서툴게 구느냐,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좀 알라’는 뜻으로 들렸다.
한편으로는 선배들이 이 말을 할 때, 정치부 기사의 특징을 함축하는 저널리즘적 반어법일 때도 있었다. 사회부 기자로서 성가를 올린 기자들 중에는 정치부로 가서는 맥을 못 추는 경우도 있다. 어떤 팩트(사실관계)를 추적하고 발굴해내는 데에는 발군이면서도 판세의 흐름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치부 경험이 좀 생긴 뒤 나는 그 말에 “눈 앞의 팩트에만 너무 집착하지 말고 큰 흐름도 보라”는 의미도 담겨있다고 해석했다.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매체 등록 요건이 완화하면서 신문과 방송 등 많은 매체들이 새로 생겼다. 한국의 2019년, 오늘날 디지털화 다매체 시대에 이르기까지 진행돼온 미디어의 대변혁은 이때부터 물꼬가 트였다고 볼 수 있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신문업계에서는 노조 활성화뿐 아니라 신문제작의 CTS화(컴퓨터 시스템화), 세로짜기 지면의 가로짜기화, 한글화, 증면, 지면의 칼러화, 석간신문들의 조간화, 편집 및 제작 조직의 개편 등 숨가쁜 변화의 바람이 몰아쳤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언론매체들은 군부 독재 정권의 새장 안에서 저널리즘의 본성이 마비된 채 갇혀 있다가 자유와 각성, 변화의 날갯짓을 하면서 새장 밖으로 비상했다. 하지만 또 다른 말로 하자면 피를 말리는 무한경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경향신문 노사는 회사형태를 사단법인에서 주식회사로 바꾸기로 합의했다. 정부의 감사를 받는 종전의 사단법인 형태로는 근본적으로 언론 본연의 역할을 수행할 수가 없을 뿐더러, 무한 경쟁 시대를 맞아 투자가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추진하기 위한 노사 기구로 ‘회사발전위원회’를 구성했다. 당시(1988년)만 해도 많은 대기업들이 경향신문과의 합작의사를 밝혀왔다. 이들 중 LG와 협상이 시작됐다. 하지만 협상은 막바지 단계에서 결렬되고 얼마후 다시 한화그룹에서 합작을 제안해왔다.
문제는 정치권력이었다. 골프장을 하나 건설하려 해도 청와대에서 이른바 ‘내인가’를 하던 시절, 재벌기업이 전통 있는 종합일간지를 인수하려 하자 역시 정권은 방관하지 않았다. 6월 항쟁이후 국정, 또는 정국의 중요한 변수는 노동조합이었고 교사노노와 기자노조의 움직임이 변수의 핵심이었다. 교사노조는 이미 해고파동으로 전교조가 발족한 상태. 언론사 노조에 손을 댈 명분이 없던 차였다. 경향신문 초대 노조 집행위원들을 해고하라는 주문이 신문사 경영진에게 들어왔다. 이때부터 경향신문 내부 구성원들은 갈등과 반목에 휩싸였다.
경향 구성원들은 크게 둘로 갈렸다. “정권의 사주로 기자들을 부당하게 해고하는 일은 절대 안된다”는 측, 그리고 “회사부터 살리자”거나“일단 해고하고 합작 성사 뒤 복직시키자”는 측이었다. 당시 2기 노조는 후자 측을 대변했다. 1989년 12월 23일, 결국 5명에 대한 ‘해고 사유 없는 해고’ 방이 붙었다. 이성수 강기석 고영신 조성환 박인규였다. (고영신은 초대 노조 집행부는 아니었지만 노사 합동 회사발전위원회 노측 위원으로 참여했다) 내가 왜 해고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날 저녁 편집국장 석에서는 해고당한 기자들과, 해고에 반대해온 나와 선후배 등 20여명이 집단 농성을 벌였다. 나는 당시 시경 캡틴으로, 사건기자들을 통솔하고 있었기 때문에 젊은 기자들의 여론에 영향을 미친다 하여 합작을 우선시했던 간부들이 껄끄러워 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갈 무렵, 다른 국실의 동료 사원들 1백 여명이 들이닥쳤다. 오랫동안 애환을 함께 하며 가족처럼 지내온 이들이, 억울하게 강제해고 당한 동료들을 완력으로 사옥밖에 내팽겨쳤다. “사는 일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수습기자 시절부터 무도한 정치권력의 농단으로 많은 고통을 겪어왔지만 이젠 갈 데까지 가는 기분이었다.
한 달 여 뒤인 이듬해 2월 초순, 나는 당연히 노조위원장 선거에 출마하려 했으나 초대 노조 집행위원이 노조위원장을 하면 한화와의 합작은 안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안되겠다 싶어, 초대 노조 집행위원은 아니었지만 서로 소통이 되는 후배 김현섭에게 “1년만 수고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김현섭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1년간 많은 수고를 했다.
< 신문 체제 재편과 해고기자 복직투쟁을 함께 >
합작이 되고 이듬해 1월말, 노조위원장이 된 내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당연히 5인 복직투쟁이었다. 하지만 과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위원장 취임직후부터 신문제작 CTS화(컴퓨터 제작 시스템화)와 조간화에 대한 노사협상에 잇따라 몰두해야했다. CTS화는 기자들부터 원고지나 전화, 팩스와 같은 유서 깊은 송고수단 대신 랩탑(노트북)을 쓰게 되고, 납 활자를 뽑거나 이것으로 판을 만드는 문선부·정판부 직종 자체가 없어지는 등 많은 부서 업무가 크게 달라졌다.
조간화는 당시 석간신문 중 가장 빨리 추진했는데 이는 심상기 사장의 확고한 결심이었다. 이 두 가지의 동시적 전환은 신문사 종사자들의 일상과 체질을 바꾸는 혁명적인 일이었다. 그런 만큼 사내 직종 전환과 새 직무교육 시행에 급여 및 수당과 복지 체계·시설 등 거의 모든 체제를 재정비해야했다. 1차로 CTS협상이 끝난 3월에는 ‘해고5인 돕기 1차 성금 모금운동’도 벌여 4백56만원을 모아 전달했다.
5월, 이번엔 임금협상이었다. 한화 측은 당초 합작조건 중 하나로 ‘동업계 최고수준의 임금’을 내걸었다. 이 때문에 사원들은 기대가 매우 컸고 이는 고스란히 협상에 임하는 노조위원장 어깨의 짐이 되었다. 노사는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임금 16.2% 인상’으로 합의했다. 동업계 최고는 아니었지만 기록적인 대폭 인상이었다.
임금협상이 끝나면서 본격적으로 해고 5인 복직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관련 행사와 모임을 할라 치면 조합원, 비조합원 가리지 않고 새 경영진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는 것이었다. 한화와 합작만 하면 그 뒤엔 팔 걷고 복직운동을 하겠다고 그렇게들 ‘맹세’했건만···.
나는 방법을 바꾸었다. 회사 전체 40여개 부서의 노조대의원들로 하여금 매달 월급날로부터 일주일 이내에 성금을 걷도록 했다. 한 구좌는 5천원, 가령 8구좌는 4만원이었다. 성금 기탁자의 신분은 일체 익명으로 했다. 그러자 ‘해고 5인의 피값’을 받기 시작한 조합원, 비조합원 그리고 간부사원들까지, 많은 이들이 모금운동에 동참했다. 1백여 명으로 시작한 성금 참여인원은 몇 달 만에 6백여 명, 거의 전 사원으로 확산했다.
익명의 성금모금운동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우선 회사 측에 전 사원이 5인의 복직을 원한다는 무언의 강력한 메시지로 작용했다. 또 5인 생활비가 우선 중요하지만, 그런 계기를 통해 5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모아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나에겐 “5인과 회사 내 동료들의 마음을 엮어놓아야 5인이 복직할 때에 서로 뜨겁게 포옹할 수 있고 경향의 미래에 원동력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해 9월, 서울지법에서 5인 해고무효 확인소송 승소 판결이 나왔고, 노조는 곧 ‘5인 원상회복추진위’를 결성해 즉각적인 복직을 촉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후배인 강병국이 나의 뒤를 이어 노조위원장이 된 92년, 회사 측은 6월부터 차례로 5인을 받아들였다. 이들이 회사 안을 돌며 인사를 할 때는 나의 희망 그대로 동료들과 뜨거운 악수와 포옹을 하였다.
나를 이어 노조위원장으로서 많은 고생을 한 후배 강병국은 임기를 마친 뒤, 소속부서로 복귀했으나 불과 보름 만에 타부서로 다시 발령을 받았다. 노조 전임자는 임기를 마치면 소속부서로 원대복귀하는 게 노사 협약이기 때문에 회사 측은 이런 편법으로 보복, 또는 길들이기를 하려 했던 것이다. 회사 측의 부당인사에 항의하던 강병국은 결국 경향신문을 떠났다. 그는 사법시험에 도전, 40이 넘은 나이에 변호사로서 새 인생을 시작했다.
노조위원장일 때도 알았던 일이지만, 노조위원장을 마치고 나니 일부 동료 선배들이 새 사주가 파견한 경영진에게 잘 보이는 수단으로써 있지도 않은 나의 잘못까지 만들어 모함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모두 방전된 상태, 사람이 싫어졌고 기자와 신문사가 싫어졌다. 신문기자직을 그만 둬야겠다고 마음 먹고 당시 외신부장이던 표완수 선배와 소주잔을 놓고 상의했다. 표 선배는 완강히 말리면서 “그만 두지는 말고, 잠시 쉴 필요가 있겠다.”며 해외연수를 주선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미국 클리블랜드 대학에서 1994년 7월부터 1년간 ‘방문 연구원’으로 연수를 하며 가족들과 지냈다.
그런데 사람의 일이란···. 이역만리 클리블랜드에서 내가 천주교 세례를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곳 교민 한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았는지 클리블랜드 한인 천주교회에 내 등을 떠밀어 넣었던 것이다. 6개월간 교리수업을 받고 나는 그 이듬해 4월 부활절에 세례를 받았다. 연수를 마치고 귀국할 즈음, 나는 ‘영육 간에’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했다. 천주교 신앙은 그 뒤 내 삶의 행로에 이정표가 되었다.
귀국한 나는 그때 심기일전을 한 힘으로 기자 생활 후반 10여년을 버텨냈던 것 같다. 귀국직후 나는 다시 사건데스크를 맡았다. 얼마 후에는 복직한 이성수 선배가 사회부장으로 와서 손발을 맞춰 일했다. 이 선배는 그때 뜻밖에 사주 측으로부터 ‘경향 개혁팀장’이라는 임무도 부여받았다. 새 사주 측의 사람 쓰는 정책에 많은 이들은 놀라기도 했다. 이 선배의 업무는 너무 무거웠다. 사회부장 책무만 해도 힘든데, 개혁팀장이라는 중책까지 맡은 그는 해고된 기자로서 외쳐온 자기주장을 실현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듯, 불철주야 일에 매달렸다. 퇴근 후 늦은 밤에 다시 사회부로 돌아와 기사 하나하나를 재점검하는 이 선배를 여러 차례 말리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우리의 걱정은 현실이 됐다. 이 선배는 뇌종양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경향신문에 다시 한번 거대한 쓰나미가 밀어닥친다. 한화가 결별을 선언한 것이다. 1997년 11월의 IMF사태에 이어 1998년 2월의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직후인 3월이었다. IMF사태로 인한 자체 구조조정 케이스였는데 “재벌의 언론사 운영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김 대통령의 언급도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 경향, 사원주주회사 전환과 논조 변화 >
사태수습 및 정리 팀장은 회사 고참인 홍성만 선배, 나도 차출당해 팀에 합류했다. 여러 대기업들이 신문사 합작의사를 밝히던 10년 전과는 세상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신문이 매력을 잃은 미디어 업종이기도 하지만 국가적 경제참사 와중에 투자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홀로서기는 불가피했다. 한화가 경영하는 동안 발생했다는 경향신문사 명의 부채 5천여 억원은 ‘20년 거치 30년 상환’(거치기간 중 이자는 광고로 대신했다)의 방법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사원들은 근무연한과 직급에 따라 퇴직금 중 일정액(내 경우 4천 6백여 만원)을 투자했다. 사원주주 회사, 이른바 독립언론의 출발(1998년 4월)이었다. 다시 시작하는 고난의 행군을 앞두고 임금삭감과 권고사직, 무급휴직 등 조처들이 잇따랐고 자발적인 퇴직도 이어졌다.
한화는 합작 8년만인 그해 3월말 경향을 떠났고, 9월엔 투병 중이던 이성수 선배가 이승을 떠났다.
당시 미디어들은 정치권력의 자장에서 경제권력의 자장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언론을 장악하던 독재권력이 물러간 뒤 무한경쟁 시대가 열렸고 기존 매체들은 광고 수입의 저하로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다. 또 디지털화와 다매체화, 즉 미디어환경의 대변혁이 닥칠 것이라는 전망도 많았다. 언론계 안팎에선 “곧 문닫는 신문사들이 나올 것”이라는 말들이 무성했다.
그 상황에서 홀로서기라니. 하지만 험한 세월의 파도를 누누이 몸으로 겪어온 경향신문 사람들은 생존의지가 강했다. 물러설 데 없는 벼랑 끝에서 불가피하게 홀로서기를 시작했지만 그만큼 결연하기도 했다. 미디어 업계의 구조 재편 시점에 신문 논조의 포지셔닝은 매우 중요했다. 물론 경향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소유구조가 사원주주 형태로 바뀌면서 제작노선과 지면논조는 주주사원인 기자들과 일반직 사원들의 생각을 따라갔다. 거기에는 오랫동안 유린당했던, 또는 외면했던 저널리즘을 되살리겠다는 염원이 강하게 묻어있었다. 자연히 진보매체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지만 구성원들이 오래된 관행과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 자기 정체성을 정립하기까지는 내부 갈등과 조정의 긴 시간이 필요했다.
사원주주회사 전환 후 나는 사회부장을 맡았다. 어떤 보직을 맡았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지 굳이 꼽아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사회부의 사건기자, 3차례나 발령받았던 사건데스크, 그리고 사회부장과 편집국장 시절이다. 참, 노조위원장 시절도 빼놓을 수 없겠다. 매우 힘들었고 또 그 가운데서 보람을 찾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사회부 사건데스크와 부장 시절, 후배들은 모두 능력이 뛰어났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열심히 했으며 서로 손발도 잘 맞았다. 묻혀져 가던 ‘이태원살인사건’ 수사를 심층적으로 정밀 분석함으로써 전면적인 재수사에 시동을 걸게 한 보도(조장래) 등 좋은 기사도 많이 발굴하고 특종도 많이 건졌다. 박승철, 정동식, 임은순, 이종탁 등 훌륭한 후배 데스크들과 이승철, 김동섭, 박래용 등 유능한 시경 캡틴의 공이 컸다.
편집국장이 된건 2003년 9월이었다. 아직 기자들 사이에는 진보라는 노선의 정체성에 대해, 또는 그것을 신문에 어떻게 구체화하는 게 바람직한지에 대해 생각이 일치하지 않았다. 나는 평소의 생각을 정리해 분야별 취재보도 10계명을 만들어 부서별로 기자들에게 설명했다. 정치개혁, 시장경제 불균형 감시, 역사 바로 세우기, 국제문제와 국익간의 공정 보도, 신자유주의 배격, 사회적 약자와 소수계층 보호, 환경생태 감시와 보호, 문화의 다양성, 새 미디어 시대의 소통 등···마지막 계명은 ‘그러나 권력에 복무하지 않고 저널리즘에 복무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언론이 진보 노선, 또는 보수 노선을 견지한다고 해서 진보 정권 또는 보수정권과 모든 관점에서 일치하는건 아니다. 언론의 길과 정치권력의 현실이 다르기 때문이다. 제작 10계명중 마지막 계명인 ‘저널리즘에 복무할 뿐’이라는 건 그래서 삽입한 것이다. 실제로, 진보라는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이라크 파병(2003년)과 기자실의 개방형 브리핑룸 제도화(2003년), 한미 FTA 협상(2006년) 등 일부 정책에 대해서는 경향신문 등 이른바 진보매체 모두가 진보적 명분에 맞지 않는다거나 졸속이라며 반대했다.
< 찌라시 아닌 품격 있는 진보지 지향 >
나는 진보를 견지하면서 신문 상품은 ‘진보 찌라시’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격조 있는 진보 신문을 만들고 싶었다. 콘텐츠와 함께 포맷이나 디자인도 관행적 틀과 경계에서 벗어나 자유롭고도 세련되게, 남들이 만들지 못했던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게 소원이었다.
취임하자 문화 분야와 주말 페이지인 매거진 X는 김택근 부국장에게 일임했다. 노련한 편집기자 출신이며 시인인 그의 감각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곤 정치부에 우선 기획물 한 가지를 주문했다. 청와대의 대통령 고위참모들과 경향신문 간부 기자들이 국정현안을 놓고 집단토론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우리 언론 역사상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은 초유의 기획이었다. 처음엔 난감해하던 정치부장(장화경)과 청와대출입기자(박래용)는 그러나 일을 성사시켰다. 10월 4일 오후 프레스센터에서 양측의 각 6명이 5시간동안 정치 경제 국제 사회 분야를 중심으로 국정현안에 대해 뜨거운 토론을 벌였다.
청와대 측에서는 문희상 비서실장과 이정우 정책실장, 나종일 국가안보보좌관, 유인태 정무수석, 이병완 홍보수석, 조윤제 경제보좌관이 나왔다. 또 경향에서는 조성환 사회담당 부국장과 송영승 정치국제 담당 부국장, 장화경 정치부장, 이승철 국제부장, 노응근 산업부장, 서배원 경제부장이 참석했고 사회는 송 부국장이 보았다. 관련기사는 10월 6일 창간 57주년 기념 특집으로 1면과 4·5면에 게재했으며 넘치는 토론내용을 하루 더 게재했다.
사회부에서 취재해 2004년 2월부터 보도한 기획연재물 ‘잊혀져가는 독립 유공자들’도 각계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항일 독립운동가들은 몸바쳐 조국을 위해 싸웠으나 본인들이 잊혀져가는 것은 물론 그 후손들 대부분이 가난에 시달리며 살고, 많은 친일파 후손들은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부끄러운 우리의 현실을 고발했다. 사실 이 기획도 내가 주문한 것인데, 종조부(건국훈장 추서)로부터 비롯한 우리 집안의 이야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2004년 9월부터 장장 6개월간 25차례에 걸쳐 장기 연재한 심층기획물 ‘국가예산 대해부’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라살림의 바탕 즉 국민혈세가 어떻게 예산(주로 SOC 관련)으로 수립되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현장에서 쓰이고 있는지, 또 그 효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국회의 예산 수립과정부터 공사현장까지 샅샅이 분석, 전문가들과 함께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2005년 한국기자상을 수상한 이 기획은 조용상 사장이 제안했으며 권석천 조현철 정유진 기자가 땀을 흘려 만들었다.
아테네 올림픽이 열렸을 때 나는 보도의 기본틀을 생각한 게 있었다. 메달 순위 소식을 전하는, 단순히 스포츠 경기를 중계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코드로, 감동을 주는 스토리 텔링으로 기사를 쓰자는 것이었고 제작회의를 통해 주문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원하는 만큼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좀더 정밀하게 지휘하지 못한 내 탓이었다. ‘우생순’으로 회자했던 여자핸드볼 결승전은 정말이지, 사람의 애간장을 녹였다. 지방판 마감시간이 지났는데도 동점 끝에 연장전, 또 연장전을 거듭했던 것이다. 결국 신문이 쇄출된 뒤 ‘비리’를 저질렀다. 서울 지방경찰청에 부탁해 올림픽도로로 김포공항까지 가는 발송트럭을 경찰 오토바이가 호송해주도록 했던 것이다. 마음속으로 신문이 ‘공익상품’임을 애써 강조하면서.
지면 포맷이나 디자인을 관행에서 탈피한 시도로는 ‘기자메모’를 1면 톱으로 올렸던 일이 상징적이다. 하루는 제작회의에서 ‘여당인 열린 우리당 의장으로 취임한 신기남 부친과 야당인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의 부친 박정희 두 사람의 친일행적’에 관한 정치부 보고를 받았다. “기다리던 게 왔구나.” 생각하고 ‘1면 톱 기자메모’를 주문했다. 2004년 8월 19일자 ‘대한민국에 드리운 친일의 그늘’(양권모)이었다.
지면개편작업은 추가 비용을 투입하지 않으면서, 취재와 편집부터 윤전부사원에 이르기까지 제작공정에 참여하는 사내 인력으로 팀을 꾸려 연구했다. 기존 지면의 작은 약물이나 부호부터 100여 가지를 고쳤는데 가령 포스터나 플래카드 등에 자주 사용되는 거친 활자체는 지면에서 배제하도록 했다. 개편을 단행한 뒤 “기존 인력과 재료로 이렇게 바꿀 수도 있구나.”하는 반응들이었다. 좀 더 심층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의 지면 혁신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편집국에서 3명의 기자(김화균 최우규 김종목)를 차출해 팀을 꾸렸다. 이들이 펴낸 ‘혁신 백서’는 뒤에 온 편집책임자들에게 도움이 됐다는 말을 들었다.
< 정치권력에서 경제권력 품으로 간 언론 >
편집국장을 지낸 이들이라면 공통적인 애환이 있다. 편집국장은 신문 제작에 관해 전권을 행사하는 큰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회사 측에선 이같은 힘을 회사 경영에 활용하고 싶어한다. 대기업 등 큰 광고주들은 매체와의 관계에서 대단히 모순적인 존재다. 기자들에겐 주로 감시의 대상이지만 광고국의 처지에서는 잘 보여야할 수익원이다. 마찬가지로 편집국장도 기자이지만, 한편으론 회사 형편도 감안하라고 요구를 받는 간부로서 두가지 속성을 지닌 모순적 존재가 되기 쉽다.
하루는 한 대기업의 문제를 꼬집은 기자메모를 게재했다. 초판 신문이 나온 저녁, 여느 때와 같이 국(局) 서무에게 외부전화를 연결하지 말라고 이르고 국장실에 있었다. 헌데 해당 대기업 부사장인 홍보책임자가 직접 찾아온 것이다. 그러면서 기사를 조금만 고쳐달라든지 하는 부탁은 하지 않고 대뜸 꺼내는 말이 “마침 경향신문 올해 홍보예산을 조정중인데요···”였다. 나는 즉시 잘라 말했다. “홍보예산 문제는 모르겠고, 그 기사는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소”
요즘이라면 이 정도의 상황은 혹시 다반사가 아닐까? 과거에는 매체들이 정치권력이라는 외부 탄압에 굴복했지만 이제는 생존을 위한 광고수입 때문에 스스로 경제권력에 종속되고 있다. 미디어 환경의 급변으로 뉴스제작 진입장벽이 무너진 지 오래이고 국내에 등록된 인터넷 매체가 8천개쯤 된다. 소규모 1인 미디어도 수없이 많다. 매체는 접속자만 많으면 광고수입을 올리게 되는, ‘클릭수가 곧 돈’인 세상이 됐다. 신생 인터넷 매체뿐 아니라 신문과 방송 같은 전통매체들도 (자체 온라인 판을 중심으로) 클릭 수를 높이려고 앞다투어 선정적이고 부정확하고 불공정한 내용과 제목을 올리기에 급급하다. 전통 있는 신문들이 매일같이 기자 이름을 박은 광고를 대량으로 게재하면서 보도윤리를 정면으로 위반해도 이상하지 않은, 이상한 시대가 됐다.
생존이 우선이고 돈이 우선이다, 삼성 수사과정에서 드러난 대로 홍보책임자 장충기 사장에게 각 언론사 간부들이 다투어 충성편지를 보낸 것이 오늘의 현실을 잘 말해준다. 한국 언론은 정치권력이 강제로 가둔 새장에서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빠져 나왔지만 곧 다시 스스로 새장에 돌아간 것이다. 이념적 위기에 이어 산업적 위기로 한국 저널리즘은 깊은 위기의 수렁에 빠져있다.
회고록을 쓰다 보니 나는 아직 쓸 때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있는 대로 글을 다 쓰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하지만 또 분명히 알게 된 게 있다. 정치권력에서 경제권력으로, 간단없이 밀려드는 시대의 쓰나미를 맞으면서 우리는 그것을 넘겠다는 희망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 여정에서 이끌어주셨던 선배님들, 고락을 함께 했던 후배들, 이제 자주 만날 일은 없어졌고 짧은 회고록에서도 다 떠올리지 못했지만 그 이름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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