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경상록자원봉사단 문화유적답사 계획
일시 : 2014년 11월 6일(목)
장소 : 영주 일원
★ 반월당(08:00) →(124.0km. 2시간)
★ 영주무섬마을(10:00 도착. 관람 1시간30분. 11:30 출발) → (24.7km. 50분)
★ 소수서원. 선비촌. 소수박물관. 금성단(12:20 도착. 점심1시간. 관람 1시간30분. 2:50 출발) → (14.7km. 30분)
★ 부석사(3:20 도착. 관람 1시간30분. 4:50 출발) → (26.8km. 40분)
★ 영주가흥리마애삼존불상. 영주가흥리암각화(5:30 도착. 관람 30분. 6:00 출발) → (124.3km. 1시간40분)
★ 반월당(7:40 도착)
♧ 현지 사정에 따라 변동될 수 있습니다.
♧ 답사 신청 등 상세한 내용은 대경상록자원봉사단사무실로 문의하십시오.
무섬마을(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문수면 수도리는 아름다운 자연과 고가(古家)가 그대로 보존된 전통마을이다. 수도리는 이름 그대로 내성천(乃城川)이 마을의 3면을 감싸 안고 흐르고 있으며 그 가운데 섬(島)처럼 떠 있는 마을이다.
안동 화회마을을 연상시키는 이 마을은 휘감아 도는 강을 따라 은백색 백사장이 펼쳐지며 맞은편에는 소나무, 사철나무 등이 숲을 이룬 나지막한 산들이 강을 감싸 안고 이어진다. 또, 강위로는 견실한 다리가 놓여 마을과 마을을 잇고 있다.
수도리는 고택과 정자로 이루어진 전통마을로 옛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해우당(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2호)과 만죽재(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3호)는 옛 선비들의 단아한 격식이 느껴지는 고택이다.
소장문화재 : 해우당고택(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2호). 만죽재고택(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3호). 영주 수도리 김덕진가옥(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7호). 영주 수도리 김뢰진가옥(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8호). 영주 수도리 김위진가옥(문화재자료 제360호). 영주 수도리 김규진가옥(문화재자료 제361호)
영주 수도리 김정규가옥(문화재자료 제362호). 영주 수도리 박덕우가옥(문화재자료 제363호). 영주 수도리 박천립가옥(문화재자료 제364호)
소수서원(紹修書院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소수서원은 건립 당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불렸는데 그 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습니다. 사액서원이라 함은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합니다. '소수(紹修)'라 함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하였음'이란 뜻으로 학문 부흥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명종임금은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이 서원은 풍기군수였던 신재(愼齋)주세붕(周世鵬)선생이 고려 말 유현(儒賢)인 회헌 안향(安珦)선생의 연고지에다가 조선 중종 37년(1542) 사묘(祠廟)를 세우고 안향 선생을 주향(主享) 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안향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학사(學舍)를 세워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데서 비롯되었다. 중종 39년(1544)에는 안축(安軸)선생과 안보(安輔)선생을 배향하였으며, 명종원년(1545) 안향 선생의 후손 안현이 경상감사가 되어 서원의 사당을 참배하고 각종 경비를 지원하였다.
명종 4년(1549)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경상감사 심통원(沈通源)에게 서원의 편액과 토지 · 노비를 하사해 주도록 계청(啓請)하자, 감사 심통원이 조정에 계청함으로써 이듬해 명종5년(1550) 5월 왕명으로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이 서원의 이름을 『소수紹修』 라 지었으니,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였음"(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이란 뜻이다. 명종임금이 손수 『紹修書院』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 하였으니, 곧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공인된 사립고등교육기관(私立高等敎育機關)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인조 11년(1633)에는 서원을 창건한 주세붕 선생을 추향(追享)하였다. 회헌 안향(1243∼1306)선생은 고려 원종 원년(1260) 진사과에 급제한 후 우사의(右司議)등을 거치면서 문교진흥에 진력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朱子學者)이다.
신재 주세붕(1495∼1554) 선생은 많은 저서를 남겼고 황해도 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경내에는 강학당, 일신재 · 직방재, 학구재, 지락재, 서고, 문성공묘(文成公廟)등이 있고,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58호)등 중요유물과 각종 전적(典籍)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경내에는 이곳이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보물 제59호) 등의 불적(佛蹟)이 남아 있다.
창건 유래 : 고려후기의 학자 회헌 안향(고종30년(1243)∼충렬왕32년(1306)이하 회헌이라 함)은 나라가 매우 어려운 시기에 사십여 년 간 벼슬길에서 두 차례나 왕을 수행(隨行), 원나라에 다녀오는 등 국사에 이바지한 공헌도 공헌이려니와, 그 중에도 회헌 선생다운 바는 문교(文敎)와 유학(儒學) 진흥에 있음은 이를 나위도 없으리라. 당시는 불교 · 신도(神道)의 그늘에 쇠잔해만 가는 유학을 일으킴에 힘써, 퇴락한 문묘(文廟)를 수리, 중국에서 공자와 72제자의 상(像)을 그려다가 모셨고, 교육재단인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그리고 중국에서 정주학(程朱學)을 도입하여 연구하고, 장려하는 등, 시들었던 유학에 활력의 샘줄기를 터놓은 분이 회헌이다.
신재(愼齋)주세붕(이하 신재)은 당대의 석학이며 도학자로서, 선현(先賢) 회헌을 우리나라 도학의 비조(鼻祖)로 우러러 오던 터에, 중종36년(1541)5월, 풍기군수에 부임, 3일 만에 회헌의 고향 순흥을 찾았다.(그때 順興府는 금성대군사건으로 폐지되어, 풍기군에 병합되어 있었음) 신재는 그 길에 순흥읍터에서 북쪽으로 약3리쯤인 숙수사지(宿水寺址)에 들렀다. 숙수사는 회헌이 소년시절 글 읽던 곳으로서, 신재의 기록에는 폐지(廢址)라 했으니, 그때는 이미 절은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있었던 듯하다. 경내에는 마치 거북이 엎드린 형상으로 자리한 영귀봉(靈龜峰)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숙수사터는 소백산에서 근원한 죽계(竹溪)의 맑은 여울이 바로 무릎 밑에 못을 이루고, 동쪽으로 물을 격하여 마주한 연화봉(蓮花峰)기슭 푸른 절벽이 못물에 그림자를 드리워, 그 산수풍광이 중국의 여산(廬山)에 못지 않는다고 신재는 찬탄(贊嘆)했거니와, 거기는 늘 흰 구름이 골짜기에 서려있다고 하여, 신재는 이름하여 白雲洞이라 명명 했다.(順興誌엔 「본래는 船乎洞」이었다고 함) 백운동을 거닐면서 거기 회헌을 제사하는 사당을 세우기로 뜻을 정한 신재는 그때 영남에 심한 흉년으로, 어려운 상황임을 무릅쓰고 서원창건 계획을 서둘렀었다.
이듬해(중종37년) 8월 15일 역사를 시작, 土地神에 개기(開基)제사를 지내고 터를 다듬는데, 한자 남짓 땅 밑에서 놋쇠가 1백20근이나 나오는 기적(奇蹟)이 있었다.(그것으로 祭器와 많은 서책을 마련하여 서원에 비치했다.) 사당이며 강당 등 30여 칸이 완성된 것은 그 이듬해(중종38년)였다.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본받아 白雲洞書院이라 이름하고, 그 8월11일 회헌의 위패와 함께 그 영정(影幀)을 봉안했으며, 또 그 이듬해 중종39년(1544)년 9월 1일에 안축 · 안보(安軸 · 安輔:회헌의 三從孫,고려 충렬∼忠穆王때의 학자 名臣)를 배향(配享)하고, 해마다 봄 가을 제사를 받들게 했다.
함께 선비를 기르기 위해 서당을 설치하고, 토지와 곡식으로 운영기금을 세울새, 고장 선비 進士 황빈(黃彬)이 벼 70석을 내어 도왔다. 고을의 生員 몇 사람과 고을 선비 김중문(金仲文)에게 관리와 운영을 맡게 하여, 여기서 학문을 탐구할 선비를 불러 모으매, 사방에서 많은 학도가 모여들었다. 신재가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으로 영전되는 명종1년 乙巳(1545)에 회헌의 후손인 설강(雪江) 안현(安玹)이 경상감사(慶尙監司)가 되자, 이 서원에 와서 사당에 참배하고, 선비를 공궤함에 불편이 없도록 시중들 하인을 늘리고 경비를 크게 돕는 등 서원의 설비를 충실히 했으며, 그로부터 본도의 감사들은 이 서원에 한 결같이 마음을 써, 감히 소홀히 하지 못했다.
영주 금성대군 신단(榮州 錦城大君 神壇. 사적 제491호.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70번지 일원)
금성대군신단은 소수서원에서 서북쪽으로 약 200m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15세기 중엽 세조의 왕위찬탈 뒤 사육신 등의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이 곳 순흥에 위리안치 되어 있던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이곳 순흥부사 이보흠 및 향중인사들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재차 꾀하다가 실패하여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그 후 숙종 47년(1719) 부사 이명희가 왕의 허락을 받아 그 유허지에 금성대군신단을 설치하였다. 영조 18년(1742) 경상감사 심성희가 단소를 정비하고 1980년에 재청과 주사를 단소의 전면에 건립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전면 사주문을 들어서면 주사·재청영역과 단소영역이 동북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재청은 정면 4칸반, 측면 4칸 규모의 ㄱ자형 집으로 건물 양쪽 끝에 ㄴ자로 담장을 설치하여 네모진 안뜰을 만들고 서쪽 담에 일각문을 내었다. 평면은 서향한 3칸 우단에 칸반 온돌방을 두고, 대청 좌단칸 앞쪽에 남향하여 2통칸과 1칸 온돌방을 배치하고 그 앞에 긴 쪽마루를 설치하였다.
주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ㄷ자형 건물이고, 일각문을 낸 동쪽 담 양단을 ㄷ자로 꺾어 건물과 접속시켜 내밀한 안마당을 형성하였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 익사에 1칸과 온돌방 칸반을 내달았고, 우측 익사 온돌방 칸반 앞에 부엌 1칸을 두었다. 단소는 전면의 금성단문을 들어서면 품자로 상단은 금성대군, 좌단은 이보흠, 우단은 순절의사의 단을 설치하였다.
금성대군의 단 좌측에는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가 세워져 있다. 제청과 주사의 상부가구는 간략한 3량가이고, 기둥 모두 네모기둥을 사용하였다.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단(壇) : 일반적으로 유교(儒敎)에서 제의를 거행하기 위한 시설 내지 건축물의 한 형태
소수박물관
영주 소수박물관은 유교와 관련된 전통문화 유산을 체계화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유교의 이상을 간직한 소수서원을 통하여 민족정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공간이다.
또 한 영주의 귀중한 유물과 유적을 체계적으로 보존 · 전시함으로써 지역문화의 활성화와 생동감 있는 역사 체험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 매김하게 될 것이다.
부석사(浮石寺.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화엄종찰 부석사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국보5점, 보물6점, 도 유형문화재 2점 등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10대 사찰중 하나입니다. 사찰 앞으로 펼쳐진 자연경관을 품안에 끌어안은 모습은 마치 부처님의 온화한 자비심처럼 모든 이의 마음을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합니다.
창건 유래 :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 해동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으뜸 사찰입니다.
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교학(華嚴敎學)을 펴기 위해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절은 신라 화엄종의 도량(道場)임에도 불구하고 본전인 무량수전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불(主佛)로 모셨고, 무량수전 앞에 안양문(安養門)을 세웠으니 『安養』은 곧 『極樂』을 일컬음이니 이 절은 바로 땅 위에 극락세계를 옮겨 놓은 격이 되는 것입니다. 부석사라 이르게 됨은 무량수전(無量壽殿)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돌'이라 부른데서 연유하였다고 합니다. 1916년 해체 보수시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 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 7년(1358) 적의 병화를 당하여 우왕 2년(1376)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우왕3년(1377) 조사당(祖師堂)이 재건되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경내에는 신라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石燈)(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보물 제220호), 삼층석탑(三層石塔)(보물 제249호),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제255호)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인 무량수전(無量壽殿)(국보 제18호), 조사당(祖師堂)(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祖師堂壁畵)(국보 제46호), 고려각판(高麗刻板)(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도유형문화재 제127호), 삼층석탑(三層石塔)(도유형문화재 제130호) 등이 있습니다.
특히,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며, 조사당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유물전시관(遺物館展示館)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무량수전 앞 석등(石燈)(국보 제17호)
무량수전과 자오선상에 있다. 사각의 이중 기대석 위에 8각을 기본으로 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이다. 지대석은 4매석으로 상면에 3단의 기단받침을 각출하였다. 방형의 기단석은 각 측면의 2구씩의 안상을 배치하였고 상면에는 팔각으로 3단의 하대받침을 각출하였다. 하대석은 평면 팔각의 귀꽃을 갖춘 팔엽복변연화문대이다. 간주석은 팔각주이다. 상대석은 팔엽의 단판앙련인데 잎 안에는 보상화문으로 장식하였다. 화사석은 팔각으로 사면에 화창을 내었고 창 주변으로 문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있다. 다른 사면에는 각 1구씩의 공양미륵상이 배치되었다. 옥개석은 전각이 뚜렷하고 후대 석등들에 비해서는 옥개석의 두께가 얇고 날렵한 편이다. 옥개석의 밑면은 이단의 낮은 받침을 새겼고 절수구가 남아있다. 상면 합각의 우동도 뚜렷하다. 정상부에서는 팔엽의 단판연화문을 돌렸고 그 위에 2단으로 상륜받침을 두었다. 보주의 봉은 없어졌고 보주대만 남았다. 법주사, 해인사, 합천 백암리의 석등과 함께 대표적인 사천왕계 석등으로 신라 석등의 전형적인 예이다. 화사석 사면에 부조된 보살상이나 연화문, 받침각출 방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등 앞으로 배례석이 놓였다. 상면 중앙의 연화문은 이중원의 자방을 두고 주변에 8엽의 잎을 돌렸는데 사이에는 간엽이 새겨졌다. 통일신라 이후의 일반형에 속하는 배례석이라 할 수 있다. 석재의 재질이나 형식 등이 석등과 동일한 시기로 추정된다.
무량수전(無量壽殿)(국보 제18호)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인정되기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무량수전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원융국사비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7년(1016)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는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 (1376)에 원융 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깔고 단청을 하였고 1969년에는 번와 보수하였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 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취했다. 기둥 사이의 주칸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다. 지붕은 팔작 형식인데 지붕의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하여 완만하다. 예로부터 건물의 구조는 단면에 위치한 도리의 수를 셈하여 말하는데 이 집은 소위 9량집으로 외목을 제외한 도리가 9개나 되는 큰 건물이다.
면석과 갑석을 짜맞추어 만든 가구식 기단과 사갑석을 받치는 지대석이 돌출된 계단, 원형 주좌와 고막이를 가진 초석의 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기법을 계승한 것이다. 계단 동측면에 선각된 '충원적화면(忠原赤花面) 석수김애선'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의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 주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은 평면의 안허리곡(曲),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배흘림, 항아리형 보 등의 의장 수법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착시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고안되 고도의 기법들이다.
안허리곡은 보통 건물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을 말하는데 기둥의 안쏠림과 관계가 있다. 안쏠림은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운 것이다. 무량수전에서는 안허리곡과 안쏠림이 공포와 벽면에까지 적용되어 마치 평면이 오목거울처럼 휘어 있다. 귀솟음은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하는 것인데 수평 부재의 끝부분이 아래로 처져 보이는 착시를 막아준다. 기둥의 배흘림 역시 기둥 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인데 무량수전의 기둥은 강릉 객사문 다음으로 배흘림이 심하다.
무량수전의 공포 형식은 기둥 위에만 배치된 소위 주심포계인데 매우 건실하게 짜여졌다. 주두 위에서 공포의 짜임이 시작되고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북방계통의 수법이다. 주두와 소로는 내반된 곡선의 굽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공포 사이 포벽에 뜬 소로를 가지고 있는 점은 이 집만의 특징이다. 무량수전 정면 중앙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내부 서쪽에는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국보 제45호)를 모셨다.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만 동향하도록 모신 점이 특이한데 교리를 철저히 따른 관념적인 구상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불상을 동향으로 배치하고 내부의 열주를 통하여 이를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일반적인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하고 깊이감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진입하는 정면쪽으로 불상을 모시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서는 드문 해결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집을 만든 대목(大木)의 뛰어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대들보 위쪽으로는 후대 건물과는 달리 천장을 막지 않아 지붕 가구가 잘 보인다. 굵고 가늘고 길고 잛은 각각의 부재들이 서로 조화 있게 짜맞춰진 모습은 오랫동안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와 같은 무량수전의 천장 가구에서 고저장단의 운율을 느낄 수 있다고도 하였다.
이렇게 천장을 노출시키려면 각각의 부재가 아름답게 디자인되어야 하고 또한 정확하게 짜맞추어야 하므로 품이 훨씬 더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목수들은 이러한 건물을 많이 지었다. 특히 고려시대 주심포 집들에는 천장을 가설하지 않은 것이 많다.
원래 내부 바닥에는 푸른 유약을 바른 녹유전을 깔아서 매우 화려하였다. 아미타경을 보면 극락 세계의 바닥은 유리로 되었다고 하는데 녹유전은 이러한 이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장엄 도구의 하나였던 것이다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 국보 제45호)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지금의 손모양은 조선시대에 불상의 파손된 부분을 고치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작은 부처를 달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당(祖師堂)(국보 제19호)
부석사 조사당은 무량수전 뒷산에 있는 건물로 이 절을 지은 의상조사의 진영을 안치하고 있다. 건물의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신종 4년(1201)에 단청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이 확실하다. 그 후 고려 공민왕때의 병화로 소실된 것을 우왕 3년(1377)에 원응국사가 재건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조선 성종 21년(1572)에 경연한 기록이 있어 이 건물의 변천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건물은 낮은 장대석 기단위에 있는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으로 헛첨자가 있는 주심포계의 건물이다. 창호는 전면 중앙에 출입문이 있고 그 좌우에 광창이 있다. 지붕은 전면이 겹처마이고 후면은 홑처마이며,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건물 내부의 입구 좌우에 보살상, 사천왕상 등 고려 말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는데 1918년에 벽을 떼어서 보장각내 유리창에 보존하고 있다.
부석사조사당벽화 (浮石寺祖師堂壁畵. 국보 제46호)
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조사당(국보 제19호) 안쪽 벽면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지금은 벽화가 있는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 유리상자에 담아 무량수전에 보관하고 있다.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백색·금색 등으로 채색하였으며, 각각의 크기는 길이 205㎝, 폭 75㎝ 가량이다. 양쪽의 두 천부상은 우아한 귀족풍으로 양감이 풍만하며, 가운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보는 건장한 모습이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후대에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에서 고려시대 불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건물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고려 우왕 3년(1377)임을 알게 되었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의상과 선묘의 구원의 사랑
귀족 가문으로 호화롭게 성장한 의상조사는 승려로 입문하여 입산수도를 했다. 그 후 서기 650년, 홀로 당나라 양주에 갔을 때 병을 얻어 양주성 수위장인 유지인의 집에서 치료하던 중, 그의 딸 선묘가 사모하게 되었다. 조사는 이를 법대로 대하여 제자로 삼았는데 선묘는 “귀국하실 때 꼭 들러주소서”하며 간곡히 부탁했다. 쾌히 승낙한 조사는 당나라 서울 장안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에서 수학하던 중, 당이 30만 대군으로 신라를 침법하려는 형세를 알고 급히 귀국하게 되었다. 조사는 귀로에 선묘의 집에 이르렀으나 마침 출타 중이라 길을 재촉했다. 한편 귀국 선물로 법의를 마련하고 손꼽아 기다리던 중, 그가 다녀 간 것을 알게 된 선묘는 조사를 뒤쫓아 산동성 해안에 다다랐다. 그러나 바다엔 흰 돛만 보일 뿐이었다. 하염없이 바라보던 선
묘가 선물을 바다로 던지며 “이 옷이 조사님께 이르게 해 주옵소서”하자, 해풍이 크게 일어 선물이 조사의 배 안으로 들어갔다. 선묘가 다시 “ 이 몸이 용이 되어 조사를 받들어 무사히 귀국하도록 해 주소서”하며 바다로 몸을 던지니 과연 용이 되어 귀국길을 호위했고, 조사는 무사히 귀국하여 국난을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조사는 왕으로부터 사찰 건립의 명을 받고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에 이르렀다. 지세를 살피니 과연 명산이나 이교(異敎) 500여명이 점령하고 막무가내로 자라를 양보해 주지 않았다. 이 때, 용으로 화신한 선묘가 법력을 써서 무량수전 서편의 큰 바위를 공중으로 3번 올렸다 내렸다 하니 무리가 겁을 먹고 굴복했다. 이 자리에 건립한 사찰이 부석사이며, 이때의 큰 바위를 부석(浮石)이라 불렸다. 한편, 선묘룡은 석룡이 되어 무량수전 자리에 안좌되어 부석사의 수호신이 되었다.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榮州 可興洞 磨崖如來三尊像 및 如來坐像. 보물 제221호. 경북 영주시 가흥1동 264-2번지)
영주시 가흥동에서 서천이 내려다보이는 거대한 암반의 최상부에 있는 마애삼존상이다. 측면에서 보면 삼존이 새겨진 돌이 암반과는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존 주변으로는 크기 20㎝내외의 사각형 흠이 있고, 삼존상 앞으로도 기둥자리로 보이는 흔적이 있어 이 마애상을 주존으로 한 시설물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은 높은 도들새김의 거대한 본존과 본존 쪽으로 약간 몸을 틀어 선 협시상으로 구성되었다. 본존상은 고식의 앙련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은 좌상이고 좌우에 역시 연화좌를 대좌로 서 있는 보살상이다.
본존은 소발이며 육계가 뚜렷하고 두터운 통견의에 시무외여원인을 하였다. 방형에 가까운 살이 오른 상호가 지역적인 양식을 보이고 양 협시도 동일한 경향을 보여준다. 광배는 상단이 뾰족한 보주형으로 중앙에 연화문을 두고 주위로는 2조선과 4엽을 간단하게 돌린 화문을 넣었다. 대좌는 무릎에 잇달아 복변의 연화문 8엽을 앙련으로 새겼고 환조에 가깝게 두터운 조각을 보여준다.
양쪽의 보살입상도 본존과 마찬가지로 높은 도들새김이며 향좌측의 보살은 왼팔을 어깨 위까지 들고 바른손은 배 앞으로 두었다. 향우측의 보살은 두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고 보관에는 보병이 확인된다.
협시상도 눈 부위의 파손이 심하다. 협시상의 팔목을 걸쳐 내린 천의 자락이나 두터우면서도 유연하게 처리된 옷주름선, 중량감 있는 신체 표현 등이 본존상과 마찬가지로 우수한 조각술을 보이고 있다. 영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통일신라 초기의 불교조각양식을 대표하는 상이라 할 수 있다.
영주 가흥리 암각화(榮州可興里岩刻畵.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8호. 경북 영주시 가흥1동 264-2번지)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나 동굴의 벽면 돌에 기호나 물건, 동물 등의 그림을 새겨놓은 것을 말하며, 풍요와 생산을 기원하는 주술행위의 결과물로 보고 있다.
가흥리 암각화는 가흥리 마애삼존불상이 있는 바위의 10m 아래에 새겨 놓았는데, 높이 1∼1.5m, 너비 4.5m로, 청동기 시대에 새긴 것이다. 청동 도구로 쪼아서 새기는 방법을 사용하여 3∼5개의 선을 옆으로 연결하였는데, 그 의미는 아직 알 수 없다. 이러한 수법은 고령 양전동, 울산 천전리 바위그림과 비슷하다.
참고 자료 : 문화재청 자료. 영주시청 자료 외 다수
첫댓글 김성호 문화해설사님(컴퓨터 카페 블로그 과정 담당교수님) 감사합니다. 위 계획을 내용 일부 추가, 재 공지를 하였습니다. 즐거운 문화탐방이 될 것이라 기대를 합니다. 고맙습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