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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의 역사, 유물, 유적, 문화, 민속, 설화, 민요
〔고대〕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군의 동진강 하구 해안단구 취락지에서 민무늬토기의 파편과 함께 깬돌칼·돌도끼·돌화살촉 등이 출토되었다. 이는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현상으로서 초기 농경문화의 형성을 입증해 준다.
고인돌이 부안을 비롯해 고창지방에 밀집되어 있고 동진강·만경강을 거쳐 내륙지방에 산재해 있어 청동기문화가 해안으로부터 내륙으로 전파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54소국 중 지반국(支半國)이 부안지역에 있었다.
백제시대에는 [개화현(皆火縣)]이라 칭했으며,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한 뒤 신라 땅이 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는 [부령현(扶寧縣)] 혹은 [계발(戒發)]이라 하여 [고부군(古阜郡)]에 예속시켰다.
〔고려〕
고려 초에 감무를 두었는데 [보안현(保安縣)]이 이에 예속되었다. 보안현은 본래 백제의 [흔량매현(欣良買縣)]이었는데, 신라 때 [희안(喜安)]으로 개칭되어 고부군에 이속되었다. 고려 때 보안으로 고쳐졌으며 한때 낭주(浪州)라 불리다가 보안감무가 겸임하게 되었다.
이 지방은 해안선을 낀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염창산성을 비롯한 13개의 크고 작은 성과 계화도봉수대·격포리봉수대, 그리고 진(鎭)과 포(浦)가 많이 산재해 있다. 또, [제안포(濟安浦, 옛이름 撫浦)]에는 고려시대의 12조창 중 하나인 안흥창(安興倉)이 있어 임피현의 진성창과 함께 전라도 지방의 세미를 경창까지 운송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보안면 유천리 도요지는 고려청자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고려 말 우왕대에 이르러서는 보안과 부령현에 각각 감무가 설치되었다. 경상도와 전라도에 자주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가 1355년(공민왕 4) 7월에 검모포(黔毛浦)에 침입하여 조운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명나라 사람 [장인보(張仁甫)] 등 6명을 도강(都綱)으로 삼아 각각 당선(唐船) 1척과 전졸 150명을 주어 전라도 조세를 운반하게 했으나, 왜구와 싸우다 크게 패하여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1376년(우왕 2) 왜선 50여 척이 웅연(熊淵)에 내박하여 적현을 넘어 침입, 동진교를 부수어 조운이 중단되었으나 상원수 나세(羅世)와 변안열(邊安烈)이 적병 1천여 명을 행안산(幸安山)에서 격파하였다.
〔조선〕
1414년(태종 14) 보안현을 [부령현]에 병합했다가 1415·1416년에 통합, 분리되어 두 현의 이름을 따서 [부안현]이라 개칭하였다. 1417년 [흥덕진(興德鎭)]을 폐하고 부안에 이속시켜 부안진이라고 개칭했으며, 병마사를 두어 판사를 겸임하게 하였다. 1423년(세종 5) 첨절제사로 바꾸었다가 곧 다시 현감을 두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부안현의 호수는 323호, 인구는 1,662명이었다. 정유재란 때는 의병장 [채홍국(蔡弘國)] 등이 동지를 규합, [정유이창동맹(丁酉吏倡同盟)]을 맺고 호벌치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유(李瑜)]의 부인 김씨도 남편의 전사를 보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싸우다가 순절했고, 이 밖에 많은 의병이 활약하였다. 1608년(선조 41)에 정유재란 당시 불타 버린 부안향교를 지금의 서외리에 재건하였다.
이 고장은 실학의 대가인 유형원(柳馨遠)이 태어난 곳으로 보안면 우동리에 유적지가 있다. 1862년(철종 13)에 전라도 각지의 민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호남선무사(湖南宣撫使) 조구하(趙龜夏)의 행렬을 부안농민들이 가로막고 관리를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근대〕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이 지방의 농민들은 백산(白山)에서 봉기하여 관군에 대항하였다. 1895년 갑오개혁 때 지방관제 개편으로 군이 되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부군에 속했던 백산·거마·덕림 등이 부안으로 이속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곳에서는 3월 30일 부안읍 장날을 이용해 [은희송(殷熙松)] 등이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4월 18일에는 줄포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1943년 부령면이 부안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1읍 10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근대 인물로는 1905년 을사오적을 처단해야 한다고 상소하고 계화도에 은거하여 후진 양성에 힘쓴 전우(田愚)와 전생애를 항일투쟁과 육영사업에 바친 [이영일(李永日)], 한국의 대표적인 전원시인 신석정(辛夕汀),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한 고제신(高濟臣)과 김환(金桓) 등이 있다.
〔현대〕
1963년부터 시작된 계화도 간척지공사가 마무리되어 1978년부터 계화도에서 쌀 추수가 시작되었다. 이 지역에는 간척공사로 수몰된 임실군 주민이 집단이주하였다. 1983년 2월 15일 계화출장소가 [계화면]으로, 진서출장소가 [진서면]으로 각각 승격했으며, 1987년 1월 1일 [산내면]이 [변산면]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1994년 12월 1일에 [동진면] 당산리 일부를 계화면 북창리로 이관하는 면간 경계를 조정하였다. 또한 1997년 8월 1일에는 정읍시와, 1998년 8월 1일에는 김제시 및 정읍시와의 시군간 경계조정이 있었다.
〔선사유물·유적〕
선사시대유적으로는 변산면의 대항리패총(전라북도 기념물 제50호)과 하서면 석상리의 부안구암리지석묘군(사적 제103호)을 비롯해 보안면 영전리, 상서면 감교리, 하서면 백련리 등지에 고인돌군이 있으며, 보안면 상입석리에는 보안입석(전라북도 민속자료 제6호)이 있다.
〔관방유적〕
성곽으로는 조선 태종 때 축성된 부안진성(扶安鎭城)과 상서면 감교리의 우금산성(禹金山城, 전라북도 기념물 제20호) 등이 남아 있다. 성지로는 백산면 용계리의 백산성지(白山城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31호), 주산면의 사산리토성지·소산리산성, 고려시대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계화면 창북리의 염창산성(廉倉山城)·수문산성, 동진면 당상리의 구지산토성지, 행안면의 역리산성 등 13개의 산성이 있다.
이 군은 예부터 해안선을 낀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제안포·검모포진(黔毛浦鎭)·격포진(格浦鎭)·여섭포(勵涉浦)·위도진(蝟島鎭) 등 진과 포가 많다. 또, 북쪽의 만경지역과 남쪽의 점방산(占方山)을 연결하는 계화도봉수대·월고리봉수대·점방산봉수대 등도 있다.
〔불교문화재〕
불교문화재로는 진서면 석포리에 내소사(來蘇寺, 옛이름 蘇來寺)를 비롯해 692년(신라 신문왕 12) [부설선사(浮雪禪師)]가 창건한 월명암(月明庵), 상서면 감교리에 개암사(開巖寺)·개암사대웅전(보물 제292호) 등이 현존한다. 절터로는 변산면 중계리의 부안실상사지(扶安實相寺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77호)와 등운사지(登雲寺址)·영은사지(靈隱寺址)·백운사지(白雲寺址) 등이 있다.
특히, 내소사일원(전라북도 기념물 제78호)은 경관이 빼어나며, 경내에는 고려시대 대표적인 동종인 내소사고려동종(보물 제277호)이 있다. 그 밖에 상서면에 있는 청림리석불좌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3호)과 내소사삼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내소사설선당과 요사(來蘇寺說禪堂─寮舍,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상서면 감교리에 있는 개암사동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6호) 등이 유명하다.
〔유교문화재〕
유교문화재로는 부안읍 서외리에 부안향교대성전(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93호), 서원으로는 부안읍 연곡리의 도동서원(道東書院)과 옹중리의 옹정서원(甕井書院), 상서면 가오리의 동림서원(東林書院)과 감교리의 청계서원(淸溪書院), 보안면 영전리의 유천서원(柳川書院)이 있고, 사우로는 부안읍의 노휴재(老休齋), 계화면의 계화재(繼華齋), 하서면의 효충사(效忠祠) 등이 있으며, 이밖에도 위도면 진리에는 위도관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01호)가 있다.
〔도요지〕
도요지로는 고려백자의 요지로 알려진 보안면의 부안유천리도요지(사적 제69호)와 주산면의 사산리와요지(전라북도기념물 제40호), 소산면의 백자요지, 진서면의 부안진서리도요지(사적 제70호), 보안면의 우동리분청사기도요지, 상서면의 감교리분청사기도요지 등이 있다.
〔가옥〕
고가옥으로는 줄포면 줄포리에 부안김상만가옥(金相万家屋, 중요민속자료 제150호)이 있다.
〔문헌〕
하서면 청호리에 고희외문중유물(高曦外門中遺物, 보물 제739호), 보안면 우동리에 부령(부안)김씨종중고문서(扶安金氏宗中古文書, 보물 제 900호)가 보관되어 있다.
〔무형문화재〕
무형문화재로는 위도면 대리의 풍어제(위도띠뱃놀이, 중요무형문화재 제28호)가 있다.
〔천연기념물〕
천연기념물로는 도청리호랑가시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122호), 격포리후박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123호), 중계리꽝꽝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124호), 중계리미선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370호)이 변산면에 집중되어 있고, 이 군에서만 볼 수 있는 변란(邊蘭) 등이 자생하고 있다. 또한 변산면 격포리의 채석강(彩石江, 전라북도 기념물 제28호)·적벽강(전라북도 기념물 제29호) 등지는 자연경관이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기타〕
부안읍 서외리의 부안서문안당산(중요민속자료 제18호), 동중리의 부안동문안당산(중요민속자료 제19호)·남문안당산(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8호), 내요리의 돌모산당산(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9호), 계화면 궁안리의 쌍조석간(雙鳥石竿,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7호), 백산면의 죽림리석장승(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0호), 변산면 격포리에 수성당(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58호) 등 민간신앙과 관련된 문화재가 있다.
이 외에도 보안면 남포리에는 채홍국 등이 중심이 되어 정유이창동맹을 맺고 왜병을 맞아 싸운 사실을 기리는 정유재란호벌치전적지(전라북도 기념물 제30호)가 있다. 그리고 하서면 백련리에 왜몰치(倭歿峙), 보안면 우동리에 반계선생유적지(磻溪先生遺蹟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 계화면 계화리에 간재선생유적지(艮齋先生遺蹟址, 전라북도 기념물 제23호), 하서면 청호리에 고홍건신도비(高弘建神道碑,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1호), 부안읍 봉덕리에 이매창묘(李梅窓墓,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 등의 유적이 있다.
〔교육〕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1414년에 창건되었다가 1608년(선조 41)에 지금의 부안읍 서외리로 이건된 부안향교가 문헌상 최초의 교육기관이다. 1534년(중종 29)에 김구(金坵)가 세운 도동서원과 1694년(숙종 20)에 설립된 옹정서원·동림서원, 그리고 1708년(숙종 34)에 설립된 청계서원과 1711년(숙종 37)에 설립된 유천서원 등은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폐지될 때까지 많은 유생을 교육시켰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김기중(金祺中)이 1909년 사립 영신학교(私立永信學校)를 최초로 설립했으며, 이는 뒤에 줄포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 1910년 사립 영명학원(私立寧明學園)으로 개교한 부안국민학교는 1912년 부안공립보통학교로 되었다가 뒤에 부안남초등학교와 부안동초등학교로 분리되었다. 중등교육기관은 1946년 부안공립초급중학교, 1949년 부안농업중학교(지금의 부안중학교), 1951년에는 부안농림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2005년 현재 초등학교 25개 교(1개는 분교), 중학교 13개 교, 고등학교 7개 교가 있다.
〔문화〕
사회·문화 기관으로는 부안군립도서관과 부안군공공도서관이 군민의 교육·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으며, 부안문화원은 각종 지방문화예술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종교〕
2004년 현재 종교단체으로는 불교사찰 20개, 천주교성당 10개, 원불교교당 4개, 개신교교회 115개, 천도교교당 1개, 유교교당 1개, 기타종교교당 6개 등이 있다.
〔민속놀이〕
이 고장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줄다리기와 농악놀이가 있다. 음력 정월보름날 당산제의 전희(前戱)로 행해지는 줄다리기는 당산을 감을 동아줄로 남녀가 편을 갈라 행한다. 여자편이 이기면 그 해에 풍년이 든다 하여 경기중에 노인들이 회초리로 남자들의 종아리를 때려 힘을 못 쓰게 하기도 한다.
보안면 우동리의 줄다리기는 암줄과 수줄을 마련하여 고를 만들고 비녀목을 꽂아 연결하며 경기 전에 신랑·신부 한 쌍이 암수줄 위에 올라서서 혼례식을 올리는 의식을 한다. 그런 다음 마을의 남녀가 모두 참여하여 줄다리기를 한다.
정초에 이루어지는 걸궁굿은 곤장·영기(令旗)·나팔·새납·꽃나부〔舞童〕·대포수·꽹과리·징·장구·소고로 농악대를 조직하며 당산굿·우물굿·길굿·마당굿·성주굿·조앙굿·도둑잽이·구정놀이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 걸궁굿은 마을의 안태와 풍농을 기원하고 공동체의식을 강화하는 집단놀이로 3∼5일간씩 계속된다.
〔동제〕
이 고장의 당산제 중 규모가 큰 것은 위도 대리의 띠뱃놀이이다. 정월 초사흗날 산신제를 시작해 보름날 마을 뒷산 절벽 위에 있는 당집에서 원당제를 지내고 마을로 내려와 줄다리기와 주산돌기, 바닷가에서 지내는 용왕제, 마을의 모든 재액(災厄)을 띠배에 실어 멀리 보내는 액띄워보내기의 순서로 진행되며, 마을의 태평과 풍어를 빈다. 섣달부터 제관과 화주를 정하고 부정맥이의 모든 금기사항을 철저히 지킨다.
부안 읍내의 당산제는 세 곳에서 행해진다. 읍성의 동문·서문·남문 안에 세워져 있는 석조형신간(石鳥形神竿)의 오리당산과 그 하위신(下位神)인 석장승 한 쌍씩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행한다. 이 석간신체(石竿神體)들은 1689년(숙종 15)에 세워진 것으로 상단에 오리 모양의 새가 한 마리씩 앉아 있는 것이 특이하다.
서문안 당산제는 정월 초하룻날 밤에 유교식 제의로 제사를 지낸다. 동문안 당산제와 남문안 당산제는 보름날 낮에 지내는데, 농악을 치고 줄다리기를 하여 흥을 돋우며 무당의 고사와 소지(燒紙)로 축원을 한다. 제관을 정하고 금기사항을 지키는 일들은 모두 비슷하다.
〔설화〕
이 고장에 전해 오는 설화로는 〈팔장사(八壯士)와 왜몰치 전설〉·〈장자터와 선돌 전설〉·〈고홍달에 얽힌 이야기〉·〈수성당할미 이야기〉·〈군도(群盜)와 허생원 이야기〉등이 대표적이다.
〈팔장사와 왜몰치 전설〉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견한 여덟 장사가 왜몰치고개에 미리 나무성을 쌓고 장군봉 위에 큰 바위와 돌을 모아두었다가 왜군이 침입하자 왜몰치로 유인해 화공(火攻)으로 몰살시켰다는 이야기이다. 현재까지도 야방모퉁이·장군봉·특무재·팔장사묘 등의 이름이 전한다.
〈장자터와 선돌 전설〉은 마음씨 고약한 부자가 자기를 찾아온 도사를 구박하여 집과 재산이 하루 아침에 장사못으로 변하고, 착한 며느리는 도사가 지시한 금기를 지키지 않아 선돌〔立石〕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현재에도 장자터 방죽·웃선돌·아랫선돌 등의 지명이 전하고, 며느리의 화석이라 칭하는 선돌이 보안면 상입석리에 남아 있다.
〈고홍달에 얽힌 이야기〉는 성균관에서 공부를 마친 고홍달이 귀향길에 김제의 홍산역 근처에서 옥황상제의 시녀인 절세미인을 만나 노곡리에 성수정을 짓고 8년간 꿈 같은 세월을 지내는 내용이다. 현재 정자터에 주춧돌과 선녀가 마셨다고 전하는 옥녀샘이 남아 있다.
〈수성당할미 이야기〉는 서해의 수호신이며 일명 ‘개양할미’라고도 하는 할머니에 얽힌 전설이다. 이 할머니는 키가 어찌나 큰지 굽나막신을 신고 서해를 거닐면서 수심을 재서 어부들을 보호하고 풍랑을 막아주었다고 한다. 또, 딸 아홉을 낳아 팔도에 나누어주고 막내딸을 데리고 수성당에 들어가 살았다고 하는데, 이는 어로신앙의 대상신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변산의 〈군도와 허생원 이야기〉는 이런 내용이다. 옛날 변산에 악독한 도둑들이 모여 세력을 키워서 서울 남산골에 살고 있던 허생원을 새로운 두목으로 모셨다. 허생원은 도둑들을 설득하여 변산을 떠나 남쪽으로 여러 날 항해해서 지금의 대마도까지 가게 하였다. 도둑들은 그 곳에서 땅을 일구며 착하게 살아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밖에 무속설화로 〈조앙경의 천지창조설화〉·〈칠성님생성설화〉가 무가(巫歌)로 불리고 있으며, 많은 민담이 구전으로 전해 오고 있다.
〔민요〕
이 고장에 구비전승되고 있는 대표적인 민요로는 노동요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김매기노래〉·〈등짐노래〉·〈방아타령〉 등은 유장하고 가락의 변화도 다양하다.
“해 떨어지고 달 떨어지고/연잎전잎 시들어지고/큰 붕어 잔 붕어 꼬리를 치고/이쁜 큰애기 내품에 노는구나/(후렴)나이 나이 나이 어허 어허 어허어 어이 누우나/일흔일곱 살 먹은 늙은이가/일흔일곱 잔을 먹고/일흔일곱 뭇을 짊어지고/일흔일곱 잔등을 넘어 가는구나/나이 나이 나이 어허 어허 어허어 어이 누우나.” 이 〈등짐노래〉의 후렴은 느긋하다가도 빠르고 변화가 많아 흥겹다.
유희요(遊戱謠)로는 〈강강수월래〉·〈소리개살이요〉·〈기와밟기요〉·〈청어낚기요〉등과 위도의 〈띠뱃놀이요〉가 전해지고 있다. 〈띠뱃놀이요〉는 도서지역 당산제의 제의요(祭儀謠)로 〈에용소리〉·〈가래질소리〉·〈술배소리〉·〈배치기소리〉의 네 가지 노래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당초에 어로노동요(漁撈勞動謠)가 토속 무의(巫儀)에 흡수되어 제의요로 화한 것이다.
“에용 에용 에에용/에용 에용 에에용”, “어낭청 가래질이야/어낭청 가래질이야”,
“어와 술배로다/어와 술배로다”, “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어야”.
이 네 노래의 후렴들을 보면 힘차고 씩씩하여 의지와 신명의 강화, 힘의 집결을 촉진하는 활달성이 있으나
단조로운 것이 특징이다.
많은 민요가 부녀층에 의해 보존, 전승되고 있어서 부녀요(婦女謠)가 많다.
이는 시집살이요·길쌈요·연정요·유희요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강실도령요〉·〈녹사래기요〉는 부녀의 행실과 시집살이의 고달픔을 내방가사체로 길게 노래한 것으로서
부녀로 태어난 숙명적인 한, 인간적 욕구인 연정 등을 부드럽고 소박하게 읊고 있다.
“댕기 댕기 모본단 댕기/서룬냥의 근원 댕기/열닷냥의 떠온 댕기/
울어머니 꺾은 댕기/요내 솜씨 접은 댕기/우리 오빠 호령 댕기/
우리 형님 눈치 댕기/우리 동생 새암 댕기/우리 종년 욕심 댕기/
줌치 닷되 밖은 댕기/서광 닷되 물린 댕기/삼단 같은 요내 머리/
동백기름 살짝 발라/얼기 설시 빗겨내려/머리 끝에 질끈 매고/
담장안에 널을 뛰다…….”댕기 하나에 얽힌 가족관계의 감정표현이 섬세하고 진솔하다.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扶安邑誌
全羅北道誌 上·下(全羅北道編纂委員會, 1969)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79)
변산의 얼(부안군, 1982)
韓國地名要覽(建設部國立地理院, 1982)
韓國口碑文學大系(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3)
地方行政區域要覽(行政自治部, 2000)
地方行政區域要覽(行政自治部, 2003)
地方行政區域年鑑(韓國都市行政硏究所, 2003)
韓國地方自治白書(韓國言論人協會,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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