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화연구 제81호(2018.11.30),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pp.137-175.
http://doi.org/10.17948/kcs.2018..81.137
호남남인 윤선도의 관계망*
고영진**
1)
목 차
1. 머리말
2. 혈연적 관계망
3. 지역적 관계망
4. 학문적 관계망
5. 관료적 관계망
6. 맺음말
국문초록
이 글은 17세기 대표적인 호남남인(남인계 호남사림)이었던 윤선도의 관계망을 살
펴본 것이다. 윤선도의 관계망은 다양하지만 크게 혈연적, 지역적, 학문적, 관료적 관
계망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윤선도집안은 고조인 윤효정 대 해남에 사회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호남의 대표적인 사족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해남윤씨는 윤선도 대에 와서 문중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1702년 족보가 편찬되기도 하였다. 윤선도의 혈연적 관계망은 중기에서 후기
로 넘어가는 조선사회의 과도기적 모습을 친족관계의 측면에서 잘 보여준다. 윤선도집
안은 호남의 서남해안지역에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서울 중앙과의 지역
관계망을 구축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윤선도와 그의 가문의 지
* 이 논문은 2015년도 광주대학교 대학 연구비의 지원을 받아 수행되었음.
** 광주대 관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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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적 관계망은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 걸친 지방 재지사족들의 생존 전략과 변천 과정
을 잘 보여준다.
윤선도의 학문⋅사상적 맥은 북인 또는 북인계 남인과 연결된다. 그러나 그의 학문
적 관계망은 이들 뿐만 아니라 이황학파와 당색이 옅은 서인계 인물까지 연결되었는
데 이는 호남남인의 학문적 특징이기도 하다. 윤선도는 집안과 문중의 재산을 유지⋅
경영하고 지방 재지사족으로서의 기반을 다져나가는데 지방관들과의 관계망을 적극적
으로 활용하였다. 중앙과 지방에 걸친 윤선도의 관료적 관계망은 조선 중기 향촌에 기
반 한 재지사족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지배적 위치를 유지·발전시켜 나가려
고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조선시대 혈연적, 지역적, 학문적, 관료적 관계망 등 이 4개의 관계망은 서로 중층
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다양한 관계망들은 윤선도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윤선도는 학문적 관계망을 통해 호남남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혈연적
관계망을 통해 해남윤씨집안의 결집을 도모하였고 지역적 관계망을 통해 서울 중앙과
의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관료적 관계망을 통해 집안의 재산을 유지하고 지방 재지사
족으로서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또한 윤선도와 그 집안의 관계망을 통해 우리는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조선사
회의 과도기적인 모습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향촌에 기반 한 지방의 재
지사족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지배적 위치를 유지⋅발전시켜 나가려고 했는
지, 그 생존전략과 변천과정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주제어: 호남남인, 윤선도, 혈연적 관계망, 지역적 관계망, 학문적 관계망, 관료적 관계망.
1. 머리말
17세기 대표적인 호남남인(남인계 호남사림)이었던 윤선도는 정치가와 사
상가, 문학가로서 중앙 정계와 향촌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
다. 그는 일개 진사로서 1616년(광해군 8) 당시 대북정권의 최고 권력자였
던 이이첨의 전횡을 대놓고 비판한 「丙辰疏」를 올리면서 중앙 정계에 자신의
이름을 뚜렷하게 각인시켰다.
그 이후에도 갑술양전과 북벌정책, 자산서원 훼철 문제와 예송 등 정치적
으로나 사회경제적으로 중요한 현안이 있을 때마다 상소를 올려 자신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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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면서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그
로 인해 모두 3번에 걸쳐 15년간의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1628년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에 임명된 것을 계기로 관직생
활을 시작하여 공조좌랑, 한성서윤, 세자시강원 문학 등을 지냈으나 1635년
성산현감 때 양전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상소로 인해 파직 당하면서 고향
으로 돌아갔다. 이후 효종이 즉위하자 17년 만에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으나
서인의 견제와 비판 속에 결국 나아가고 물러나기를 반복한 끝에 1658년 공
조참의를 끝으로 총 10년에 못 미치는 관직생활을 마감하였다.
그는 1638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있던 임금을 문안하지 않았다는 이유
로 영덕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이후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고 금쇄
동과 보길도를 오가며 자연과 벗 삼아 지내며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 등
주옥같은 문학작품을 지어 국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윤선도는 직접적인 스승은 없었으나 사림집안의 가학적 전통을 이어받았
으며 학문⋅사상적 맥은 북인 또는 북인계 남인, 호남에서는 서경덕-정개청
계열과 연결되었다. 그는 정개청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학문적으로 그의 영향
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학문이 북인 또는 북인계 남인의 자장 속에 있었던
것만은 아니며 이황의 영향도 받았다.
그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예학⋅의학⋅풍수⋅지리⋅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학문의 박학적⋅실용적 특징은 가학으로 전해져 아들
윤인미와 손자 윤이석을 거쳐 증손 윤두서에게서 활짝 꽃피웠으며 정약용에
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윤선도집안은 고조인 윤효정이 해남 정씨집안의 사위가 되어 막대한 재산
을 물려받음으로써 해남에 사회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후 윤구⋅윤행⋅
윤복 등 아들 3형제가 과거에 합격한 이래 윤선도의 손자인 윤이후까지 6대가
내리 문과에 합격함으로써 호남의 대표적인 사족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윤선도집안은 대규모 간척산업 등을 통해 부를 축척해 나갔으며 이러한 정치
적⋅경제적 배경을 바탕으로 향촌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지금까지 윤선도 또는 윤선도집안을 네트워크(관계망)의 관점에서 살펴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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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는 거의 없다. 아마도 윤선도의 손자인 윤이후의 친족연결망을 살펴본 것
이 유일할 것이다.1) 그밖에 윤선도집안의 가계와 혼맥,2) 학문3) 등을 간헐적
으로 다루거나 윤선도 자신의 교유인물들을 간단하게 다룬 연구4) 등이 있다.
이 글은 호남의 대표적인 사족가문 출신으로 호남남인이었던 윤선도의 다
양한 관계망을 혈연적, 지역적, 학문적, 관료적 측면으로 나누어 종합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이를 통해 호남 사족가문, 호남남인의 중심인물로서, 조선 중
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변동기를 살았던 그의 모습이 보다 선명히 드러날
것이다.
2. 혈연적 관계망
윤선도집안인 해남윤씨는 시조가 윤존부이다. 그러나 시조부터 6세손인
윤환까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7세손인 윤녹화 대부터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중시조로 불리는 8세손 윤광전 대에 해남윤씨는 윤광전이 함양박
씨와5) 혼인하게 되면서 강진에 터를 잡고6) 신흥 무관 집안으로 부상하는 계
기를 마련하였다.
해남윤씨가 다시 한 번 중흥을 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12세손 윤효정 대였
다. 윤효정은 해남의 토호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던 정귀영의 사위
가 되어 그 재산을 물려받음으로써 해남에 재지사족으로서의 사회경제적 기
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그는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4촌 동서 최부에게7) 학문
1) 백광렬, 「조선후기 ‘양반지배네트워크’의 성격과 구조변동―상층양반의 친족연결망을 중심으로」,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17.
2) 정윤섭, 녹우당―해남윤씨 댁의 역사와 문화예술―, 열화당, 2015.
3) 이종범, 「海南尹氏家의 學問과 朋黨정치」, 韓國服飾 제27호,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2009.
4) 元容文, 孤山尹善道의 詩歌 硏究, 국학자료원, 1996.
5) 咸陽朴氏의 부 朴環은 大護軍을 지냈으며 조부 朴之良은 고려 후기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에서
공을 세워 원으로부터 武德將軍과 金牌印을 하사받고 判三司事에 올랐다. 安承俊, 「16-18世紀 海南尹
氏家門의 土地⋅奴婢所有實態와 經營―海南 尹氏古文書를 중심으로―」, 淸溪史學 제6집, 청계사학
회, 1989 참조.
6) 윤광전이 처가 데리고 온 노비 1口를 아들 尹丹鶴에게 증여한 것을 기록한 「奴婢許與文記」를 보면
윤광전이 강진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7) 崔溥는 윤효정의 장인 鄭貴瑛의 형인 鄭貴瑊의 사위였다.
호남남인 윤선도의 관계망 141
을 배우고 생원시에 합격하면서 사림집안으로서의 틀도 갖추어 나갔다. ‘해
남’이라는 본관을 갖게 된 것도 이때였다.8)
윤선도집안은 윤효정의 아들 중 윤구, 윤행, 윤복이 연이어 문과에 합격하
고 이어 윤구의 아들인 윤홍중과 윤의중, 윤홍중의 아들인 윤유기(양자),9)
윤유기의 아들인 윤선도(양자),10) 윤선도의 아들인 윤인미, 윤예미(3남)의 아
들인 윤이후(양자)11) 등 6대가 내리 문과에 합격함으로써 호남의 대표적인
사족가문으로 자리 잡았다.12) 윤선도집안의 주요 인물들의 관직 현황을 보
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 <표 1> 윤선도집안 주요 인물들의 관직 현황13)
8) 이 때문에 해남윤씨 집안에서는 윤효정을 ‘得貫祖’로 칭하기도 한다.
9) 윤유기는 윤의중의 차남으로 큰 아버지 윤홍중의 양자로 들어갔다.
10) 윤선도는 윤의중의 장남인 윤유심의 차남으로 윤유기의 양자로 들어갔다. 본래 윤유기는 윤선
도의 친 작은아버지였다.
11) 윤이후는 윤의미의 차남으로 윤예미의 양자로 들어갔다. 윤선도의 차남인 윤의미 또한 윤유심
의 장남인 尹善言의 양자로 들어갔다.
12) 윤선도집안의 가계는 논문 후미에 있는 <그림 1>을, 윤항, 윤행, 윤복 집안의 가계는 <그림 2>
에서 <그림 4>를 참조.
13) 관직은 海南尹氏族譜(壬午譜), 1702에 기록된 그대로 적었다.
대수 이름 관직
9대조 尹祿和진사
8대조 尹光琠司醞直長令同正
7대조 尹丹鶴軍器小尹
6대조 尹思甫贈左通禮
5대조 尹種護軍
5대조 尹耕贈兵曹參議
종고조 尹孝義將仕郞
종고조 尹孝禮參奉
종고조 尹孝元定陵參奉
고조 尹孝貞生員. 贈戶曹參判
증조 尹衢문과. 부교리
종증조 尹衖생원
종증조 尹行문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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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문의 번성을 기반으로 해남윤씨는 윤선도 대에 와서 4대 봉사를
확립하고 堂內親을 넘어 문중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1702년
(숙종 28) 최초로 족보가 편찬되었다. 조선시기를 보면 17세기 중엽을 분기점으
로 친족체계가 성리학적 종법의 영향을 받아 친가⋅적자⋅장자 중심으로 변화하
고 부계 친족의 문중이 성립되기 시작하는데14) 윤선도집안도 이러한 전환기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7촌 재당숙인 윤유익이15) 3대까지만 봉사하고 고조와 고조모의 신주를 遞
遷하려고 하자 윤선도는, 당시 사대부들이 상제례를 모두 주자가례를 따르
고 4대 봉사를 지내는데 3대까지만 봉사하면 필시 사림의 기롱을 받고 禮家
에 죄를 얻을 것이라며 강력히 반대하였다.16)
또한 손자 윤이후의 사돈인 이만봉이17) 조부의 명을 빌미로, 적자가 없이
죽은 형 이화봉의 후계로 庶子를 삼으려 하자 윤선도는, 그것이 嫡統을 뺏는
14) 이해준, 「조선후기 ‘문중화’ 경향과 친족조직의 변질」, 역사와 현실 제48호, 한국역사연구회,
2003.
15) 尹唯益은 尹復의 장남인 尹剛中의 차남으로 형인 尹唯謙이 남자 후손이 없이 이이첨의 복심으로
인조반정 때 사형 당하자 집안의 제사를 주관하였다.
16) 尹善道, 「答族叔書」, 孤山遺稿 권3下.
17) 李萬封은 尹爾厚 처의 둘째 오빠이며 조부인 李而遠은 윤선도의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종증조 尹復문과. 감사
양조부 尹弘中문과. 예조정랑
친조부 尹毅中문과. 좌참찬
양부 尹唯幾문과. 강원감사
생부 尹唯深음사. 禮賓副正
숙부 尹唯順(庶子) 奉事
본인 尹善道문과. 예조참의
자 尹仁美문과. 성균관 학유
자 尹直美(庶子) 學官
손 尹爾錫음사. 典簿
손 尹爾厚문과. 지평
증손 尹斗緖진사
호남남인 윤선도의 관계망 143
일이며 사림의 공론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이만봉의 아들을 형의
양자로 입양시켜 제사를 받들게 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18) 윤선도 본
인과 그의 양부도 큰집에 양자로 들어갔다. 한편 윤선도는 손자인 윤이구의
혼인에 親迎을 행하기를 사돈집에 청하기도 하였다.19)
1649년(인조 27) 해남윤씨가문은 윤선도의 주도 아래 6대조 윤사보와 5대조
윤경 부부에 대한 墓祭를 행하는 일을 협의하여 文券(立議)을 만들었다. 이 문권
에는 墓祭式을 만들고 묘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內外孫으로부터 자금을 갹출하
여 墓位畓을 설정한 내용 등이 담겨져 있는데 이 합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다음의
<표 2>와 같다.
∎ <표 2> 坡山先祖 墓位畓 立券(1649년 立議) 참여자 명단20)
18) 尹善道, 「與李進士萬封書 辛丑」, 孤山遺稿 권4; 「答李進士萬封書 辛丑七月」; 「答李進士萬封書 壬寅
二月」.
19) 尹善道, 「與李師傅襑書 丙戌」, 孤山遺稿 권4.
20) 「己丑年五月二十九日坡山先祖墓位畓立券」, 古文書集成 3 해남윤씨편, 한국학중앙연구원, 1986.
이름 관직 관계
尹善道通訓大夫前世子侍講院文學본인
李垶通訓大夫前行兵曹正郞尹孝貞의 사위 李鶴의 증손(8촌)
嚴鼎耈通訓大夫前行吏曹正郞尹衢의 사위 李潑의 동생 李洁의 외손(7촌)
尹善繼幼學尹復의 증손자(8촌)
尹善昌幼學尹復의 증손자(8촌)
尹善覺幼學尹復의 증손자(8촌)
尹俊慶幼學尹種의 6대손(13촌)
尹東老幼學尹孝義의 5대손(11촌)
尹邦壽幼學尹孝仁의 5대손(11촌)
尹仁美生員윤선도의 장남(1촌)
李榮仁幼學尹衖의 아들 尹寬中의 사위 白振南의 외손(9촌)
尹一遇幼學尹孝元의 5대손(11촌)
尹再遇幼學尹行의 고손(8촌)
白明憲幼學尹衖의 아들 尹寬中의 사위 白振南의 손자(9촌)
尹回天幼學尹孝義의 6대손(12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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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단을 보면 대부분 5대조 윤경의 후손들이지만 윤경의 형인 윤종의
후손인 윤준경도 들어있어 해남윤씨의 경우 문중 형성 초기, 그 범위가 12촌
까지였음을 있음을 알 수 있다.21) 또한 친손뿐만 아니라 이성, 엄정구, 이영
인, 백명헌 등 외손들도 참여하고 있어 후대의 부계 혈연 중심의 문중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또 하나의 특징은 해남윤씨의 문중화 작업을 윤경의 직계 종손인 윤효인
집안이 아니라 막내인 윤효정의 후손인 윤선도집안에서 주도한다는 것이다.
윤선도집안은 합의에 윤선도, 윤선계, 윤선창, 윤선각, 윤인미 등 모두 5명이
참여하였으며 묘위답도 제일 많이 제공하는데 특히 윤선도는 총 89.5두락
가운데 20두락을 무상으로 제공하였다.22)
해남윤씨가문의 문중화, 姓貫집단으로서의 조직화 작업은 1702년 최초의
족보인 海南尹氏族譜가 편찬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 족보 편찬 작업 역시
윤선도가 주도하다가 그의 외손인 심단이 이어받아 마무리하였다.
이 족보는 자녀를 남녀 구별 없이 나이순으로 기재하고23) 내외손은 물론 외
손의 외손까지 수록하였다.24) 이는 심단이 족보 서문에서, “무릇 아들의 아들
은 손자가 되어 同姓인데 딸의 아들은 그 역시 손자가 되나 異性이다. 비록 내
외의 구별은 있겠지만 그 시작에서 보면 한 배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어서 그
天屬의 은혜는 실로 양자 간에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족보가 異姓을
同姓과 같이 수록하는 까닭이다”라고25) 밝히고 있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26)
21) 문중의 개념과 범위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최재석은 공동조상의 제사를 위하여 조
직된 집단으로 6-8촌 규모의 부계혈연조직을 문중으로 보았으며, 이해준은 17세기 중엽 이후 향촌
단위에서 入鄕組(中始祖, 派祖)를 정점으로 자신들의 族的인 지위 확보를 위해 활동하는 집단을 문중
으로 보았다. 이 글에서는 대체로 이해준의 견해를 따라 堂內親(8촌) 이상의 부계친족집단을 문중으
로 보았다. 崔在錫, 「朝鮮時代의 門中의 形成」, 韓國學報 제32집, 일지사, 1983; 이해준, 朝鮮後期
門中書院 硏究, 경인문화사, 2008 참조.
22) 문숙자, 「17세기 해남윤씨가(海南尹氏家)의 묘위토(墓位土) 설치와 묘제(墓祭) 설행 양상―친족결
합 장치와 종가(宗家)의 역할에 대한 고찰―」, 역사와 현실 제87호, 한국역사연구회, 2013.
23) 그러나 여성은 본인의 이름이 아닌 사위 이름으로 기재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재 방식은 조선
전기의 족보들도 마찬가지이다.
24) 처가의 경우는 처의 4조(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를 附註로 기록하였다.
25) 沈檀, 「序文」, 海南尹氏族譜(壬午譜).
26) 실제로 海南尹氏族譜 수록 인원 총 9294명 중 해남윤씨는 1707명(18.4%)이고 나머지 7587명
호남남인 윤선도의 관계망 145
또한 嫡庶를 구별하여 서자녀는 ‘妾子’, ‘妾女’로 표기하고 서자녀보다 적자
녀를 먼저 기재하고 있으나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자녀의 자손도 적자녀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기록하였다.28) 양자로 들어간 경우 친가와 양가 쪽에 모
두 기재하고 양가에서는 ‘繼子’로 표시하고 친가에서는 ‘出繼’로 표시하였다.
이를 볼 때 해남윤씨족보는 아직까지 조선 전기의 족보의 양식을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9) 이는 당시 해남윤씨가문이 부계 혈연
중심의 친족집단으로 완전하게 변화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윤선도의 혈연적 관계망을 살펴봐도 잘 드러난다. <표 3>
에서와 같이 그가 일상적으로 교류했던 친족들은 주로 8촌 이내의 부계친족
으로 모두 고조 윤효정의 자손들이었다. 집안과 鄕中의 일을 상의하고 문중
일을 주도한 것도 이들이었다. 반면 <표 5>와 <표 6>처럼 모계친족과 처족
과의 교류는 매우 적었다. 이는 16세기 대표적인 호남사림의 한 사람이었던
유희춘이 부계친족뿐만 아니라 모계친족, 처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
과는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30)
그러나 윤선도는 <표 4>에서 알 수 있듯이 부계 안에서 동성친족뿐만 아
니라 혼맥으로 연결된 다양한 이성친족과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의 외손
자였던 심주와 심단이 부친이 일찍 죽자 아예 윤선도집안에 와서 공부하고
성장하였으며 외가인 해남윤씨가문의 족보를 편찬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
한 것이 그러한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윤선도는 다른 외손
과 사돈집에게도 관심을 쏟고 교류하였다. 이는 동성친족 중심의 후대와는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윤선도의 활동과 혈연관계망은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조선사회
의 대다수는 他姓이다. 백광렬, 앞의 글 참조.
27) 嫡子女를 남녀 구분 없이 나이순대로 먼저 적고 그다음 庶子女를 남녀 구분 없이 나이순대로 적
었다.
28) 그러나 妾(측실)은 기재하지 않았고 庶子에 대한 기재 내용은 嫡子보다 매우 소략하였다.
29) 이남희, 「조선 사회의 유교화(儒敎化)와 여성의 위상―15⋅16세기 족보를 중심으로―」, 원불교
사상과 종교문화 제48집,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2011.
30) 고영진, 「양반관료 유희춘의 관계망」, 사회적 네트워크와 공간, 이태진교수 정년기념논총 간
행위원회, 태학사, 2009.
146 민족문화연구 제81호
의 과도기적 모습을 친족 관계의 측면에서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31)
∎ <표 3> 윤선도가 교류한 부계친족(同姓)32)
31) 윤선도집안이 18세기 후반까지 奉祀條를 제외한 재산을 자손들에게 남녀 구분 없이 균분 상속
하는 것도 이러한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라고 할 수 있다. 安承俊, 앞의 글 참조.
32) 윤선도의 혈연관계는 해남윤씨족보를, 교류내용은 고산유고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이름 관계 관계 설명 교류 내용
尹毅中조부(2촌) 생부 尹唯深의 아버지.
관서경시관에 임명되어 은산현의 객관에
서 조부의 시에 次韻.
尹唯幾부(1촌) 양부. 丙辰疏 올릴 때 서신, 제문.
尹唯順庶叔(3촌) 윤의중의 庶子. 배를 타고 장사하는 것에 대한 서신.
尹縡재당숙(7촌) 尹行의 손자. 수령에게 학교 선생으로 추천.
尹積재당숙(7촌) 윤행의 손자. 수령에게 학교 선생으로 추천.
尹唯益재당숙(7촌) 尹復의 손자.
4대 봉사에 관한 서신. 형 尹唯謙이 이이
첨의 복심으로 인조반정 때 사형 당함.
尹善養庶弟(2촌) 양부 尹唯幾의 庶子. 柳希奮의 사위.
윤선도의 贖錢에 관한 서신 등
여러 편을 주고 받음.
尹善下庶弟(2촌) 생부의 庶子. 노비 쟁송에 관한 서신.
尹善覺8촌 동생 윤유익의 아들. 鄕中의 일에 대한 서신.
尹善好8촌 尹衖의 증손자. 묘제 관련 문중 일 실무.
尹善繼8촌 윤복의 증손자. 해남현감에게 학교 선생으로 추천하는 서신.
尹機文8촌 윤행의 증손자. 윤적의 아들. 부친 죽음 위로하는 서신.
尹機章8촌 윤행의 증손자. 윤적의 아들. 부친 죽음 위로하는 서신.
都正妹庶妹(2촌)
손아래 누이(양부 윤유기의 庶女).
남편이 平昌都正 李萬壽.
누이의 부고 소식을 듣고 가슴이 찢어진
다는 내용의 편지를 윤선양에게 보냄.
尹仁美자(1촌) 첫째 아들.
유배지에서 자신에 대한 비난 해명하는
서신. 가훈 내용의 서신.
尹義美 자(1촌) 둘째 아들. 25세에 죽어 挽詞.
尹禮美자(1촌) 셋째 아들. 유배지에서 서신.
尹尾兒자(1촌) 첩자. 8세에 죽어 애도함.
尹爾錫손자(2촌) 윤인미의 아들. 공부 열심히 하라는 서신.
尹爾久손자(2촌) 윤의미의 아들. 26세에 죽어 挽詞.
尹爾厚손자(2촌) 윤예미의 아들. 공부 열심히 하라는 서신.
호남남인 윤선도의 관계망 147
∎ <표 4> 윤선도가 교류한 부계친족(異姓)
이름 관계 관계 설명 교류 내용
河娘종증조모(5촌) 윤복의 처(측실), 晋州 河氏. 挽詞.
嚴愰의
처
대고모부 동생
의 사위(6촌)
윤구의 사위 이발의 동생 이길의
사위.
挽詞.
申湜고모부(3촌) 윤의중의 둘째 사위(庶女의 남편). 가묘를 유배지로 옮겨오는 일에 대해 서신.
尹鞏고모부(3촌) 윤의중의 첫째 사위. 가묘를 유배지로 옮겨오는 일에 대해 서신.
鄭雷卿
고모의 孫壻
(5촌)
고모부 윤공의 손자인 尹瘠慶의 사
위. 鄭維岳의 부.
碑銘.
金克惺
姊夫(매부)
(2촌)
손위 누이(생부 尹唯深의 딸)의 남
편. 壬午譜와 分財記에는 金應福으
로 나옴.
挽詞.
沈光沔사위(1촌) 첫째 사위. 挽詞.
李保晩사위(1촌) 둘째 사위. 과거 공부에 더 정진하라는 서신.
李翼老사위(1촌) 庶女의 사위. 시 次韻.
沈詻사위의 당숙
(6촌)
첫째 사위 심광면의 당숙. 안부 서신.
鄭世規자의 사돈(2촌) 윤의미의 장인.
정치 현안 등에 대해 여러 편의 서신을 주
고받음.
李元鎭자의 사돈(2촌) 윤예미의 장인의 형. 제주목사 때 서신.
李袤자의 사돈(2촌) 尹直美(서자)의 장인. 혼례 등 여러 서신을 주고받음.
安瑞翼자의 사위(2촌) 윤의미의 사위. 현안에 대해 여러 편의 서신을 주고받음.
李襑손자의 장인
(3촌)
윤이구의 장인. 친영에 대한 서신.
李袗
손자의 사돈
(5촌)
윤이구 장인의 동생. 전송시.
李襘손자의 사돈
(5촌)
윤이구 장인의 동생. 제주목사로 갈 때 서신과 전송시.
李養源외손(2촌)
둘째 사위 李保晩(이준경의 5대손)
의 아들.
공부 열심히 하라는 서신.
沈柱외손(2촌) 심광면의 첫째 아들.
사마시 합격을 축하하고 공부 열심히 하
라는 서신.
沈檀외손(2촌) 심광면의 둘째 아들.
사마시 합격을 축하하고 공부 열심히 하
라는 서신.
148 민족문화연구 제81호
∎ <표 5> 윤선도가 교류한 모계친족
∎ <표 6> 윤선도가 교류한 처족
3. 지역적 관계망
해남윤씨가 처음에 어느 지역에서 기원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지역과 관련한 구체적인 기록은 중시조인 8세손 윤광전 대부터 나온다. 이에
따르면 해남윤씨는 윤광전 대부터 강진 한천동에33) 자리 잡게 되며 10세손
윤사보 대에는 한천동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강진 덕정동으로34)
이주하였다. 그러다가 윤선도의 고조인 12세손 윤효정이 해남정씨 정귀영집
33) 현재 주소는 강진군 도암면 계라리 한천동이다.
34) 현재 주소는 강진군 도암면 강정리 덕정동이다.
이름 관계 관계 설명 교류 내용
洪得一동서(2촌) 윤선도 처(南原尹氏)의 언니의 남편. 시에 和韻.
李希顔동서(2촌) 윤선도 처의 동생의 남편. 동서 부인(처제)에 대한 挽詞.
尹衡彦장인의 조카 윤선도 장인의 형의 아들. 再從 林晶의 노비 사건 부탁하는 서신.
黃道明
동서의 아들
(3촌)
윤선도 처의 동생의 남편의 아들. 효종 산릉에 관한 서신.
黃道宏
동서의 아들
(3촌)
함경도 도사. 윤선도 처의 동생의
남편의 아들.
推刷에 관한 서신.
이름 관계 관계 설명 교류 내용
鄭光績이모부(3촌) 생모(順興安氏)의 동생의 남편. 손위 누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서신.
鄭世輔
이모부의 손자
(5촌)
이모부 정광적의 손자. 안부 서신.
尹明保表弟(4촌) 양모(綾城具氏)의 자매의 아들. 祭文. 윤선도와 같이 수학.
李而遠
孫婦의 외조부
(4촌)
소싯적부터 친구. 윤이후 처의 외
할아버지. 이준경의 증손.
墓碣銘.
李華封
孫婦의 오빠
(4촌)
윤이후 처의 첫째 오빠. 좌천에 대한 서신.
李萬封
孫婦의 오빠
(4촌)
윤이후 처의 둘째 오빠. 入後, 嫡統에 대한 서신.
호남남인 윤선도의 관계망 149
안의 사위가 되면서 해남 백련동에 정착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윤효정이 처가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동시에 아들 셋이 문과에 합
격하면서 윤선도집안은 해남에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하고 호남의 대표
적인 사족집안으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16세기 조부인 윤의중 대부터 18세
기까지 서남해안 지역에 대규모 海堰田 간척사업을 진행해 해남, 진도, 장흥,
강진 등의 해안지역에 전장을 소유하고 보길도, 노화도, 맹골도, 청산도 등
여러 섬을 경영하였다.35) 윤의중은 간척사업 등을 통한 재산 축적으로 중앙
에서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36)
윤선도집안은 윤홍중과 윤의중 대부터 서울에 집을 마련하고 경기도 광주
등지에 別墅를 두면서 지역적 기반도 확대해 나갔다. 아울러 윤의중 대까지
는 호남의 유력 사족가문과 혼인관계를 가지다가 윤의중의 아들 윤유심과 윤
유기 대부터 서울지역의 사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이는 이들
사돈 가문의 묘역이 모두 근기지역에서 있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37)
윤선도집안도 친조부인 윤의중과 친모인 순흥안씨, 친형인 윤선언이 광주
경안에 묻혔으며 생부인 윤유심은 여주 단주리에 묻혔다. 윤선도집안의 서울
거주는 18세기 윤두서 대까지도 지속되는데 이는 지방 사족인 윤선도집안이
서울 중앙과의 지역적 관계망을 지속적으로 구축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윤
선도집안 주요 인물들의 묘소 위치를 보면 다음의 <표 7>과 같다.
∎ <표 7> 윤선도집안 주요 인물의 묘소 위치38)
35) 정윤섭, 해남윤씨가의 간척과 도서島嶼 경영, 민속원, 2012.
36) 실록에서는 “윤의중이 해남 사람으로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으나 일생 産業을 영위하여 자신
만을 살찌웠으므로 富가 호남에서 제일이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탐욕스럽고 비루하다고 지목하였
다”고 적고 있다. 宣祖修正實錄 권15 선조 14년 5월 1일 癸亥 참조.
37) 김창원, 「李賢輔에서 尹善道로―族譜의 家系圖를 따라서―」, 고전과 해석 제2집, 고전문학한문
학연구학회, 2007.
대수 이름 묘소 위치
8대조 尹光琠강진 서면 파지대 한천동
7대조 尹丹鶴강진 서면 파지대 한천동
6대조 尹思甫강진 파산 덕정동
150 민족문화연구 제81호
윤선도도 서울 연화방에서 태어났으며 15세 이후 서울에서 생활하며 공부
하였다.39) 이후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할 때나 낙향해 있다 잠시 서
울에 올라갔을 때도 서울 집과 고산의40) 별서에서 머물렀다.
지역적 관계망은 윤선도가 사귄 친구들에게서도 잘 나타난다. <표 8>에서와
같이 그의 친구들은 대부분 서울에서 사귄 친구들이었으며 일부 고향 친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고향 친구인 장자호는 실질적으로는 윤선도가 서울 와서 알게
38) 묘소의 위치는 해남윤씨족보(임오보)에 기록된 그대로 적었다.
39) 기존 연구에서는 대부분 윤선도가 서울에서 태어나서 생활하다 25세 때인 1611년 처음 해남으
로 귀향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고향 친구에게 보내는 한 詩에서 본인이 15세 때 과거공부 하
러 서울에 올라왔다고 밝히고 있어 좀 더 세밀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尹善道, 「次韻酬張子浩 丁
未」, 孤山遺稿 권1 참조.
40) 孤山은 윤선도의 別墅가 있는 곳으로 서울 동쪽 30리 東胡에 위치하고 있는데 강에 임해 우뚝
솟아 한 구역을 이루어서 근기지역의 승지였다고 한다. 지금의 옥수동 근처로 추정된다. 윤선도는
1616년 이전부터 이 별서를 가지고 있었다. 尹善道, 「次韻謙甫叔丈詠懷 二首 丙辰」, 孤山遺稿 권1
; 「辛未三月與李子容張子浩泛舟由頭無浦泝流而上遊東湖三日乃還臨行自內殿賜送酒饌子容爲樂主時也因賦得」; 孤山先生年譜 권1 戊戌 四月 참조.
5대조 尹耕강진 덕정동
4대조 尹孝貞해남 백련동
3대조 尹衢강진 백도면 간두촌
2대조 尹弘中해남 남면 공손동
2대조 尹毅中廣州 경안
양부 尹唯幾해남 서 황원면 모계
친부 尹唯深여주 단주리
친모 順興 安氏廣州 경안
형 尹善言廣州 경안
본인 尹善道해남 남 문소동
자 尹仁美해남 남면 고담산
자 尹義美강진 백도면 간두촌
자 尹禮美해남 서면 적량원
손자 尹爾錫과천 동천천령
손자 尹爾厚해남 서면 적량원
손자 尹爾久강진 백도면 간두촌
호남남인 윤선도의 관계망 151
된 사이였으며41) 홍무적⋅홍무업 형제도 서울에서 같이 생활하였다. 이형(이
한)과 이성윤, 박홍도 등은 이웃에 살면서 骨肉보다 더 친하게 지냈다고 한
다.42) 이형과 홍무업은 윤선도가 병진소를 작성할 때 도와주기도 하였다.43)
∎ <표 8> 윤선도가 사귄 친구44)
윤선도는 모두 3번에 걸쳐 15년간의 유배생활을 하였다. 첫 번째는 1616
년 함경도 경원에 귀양 가 2년 뒤에 경상도 기장으로 移配되었다가 1623년
5년 만에 풀려났다. 두 번째는 1638년 경상도 영덕으로 귀양 가 다음해 풀
41) 尹善道, 「次韻酬張子浩 同年」, 孤山遺稿 권1.
42) 光海君日記 권111 광해군 9년 1월 7일 癸酉.
43) 尹善道, 「抵人書」, 孤山遺稿 권5上.
44) 윤선도의 친구와의 교류 내용은 고산유고를 중심으로 정리하였으며 실록과 족보 등을 참조
하였다. 뒤의 표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름 관계 관계 설명 교류 내용
張子浩 친구 고향 친구.
15세 때 서울 와서 과거공부 할 때 만남.
삼각산, 東湖(孤山) 같이 유람하며 시.
洪茂績친구 고향 친구(홍무업의 형). 귀양간 홍무적에게 준 시.
洪茂業친구 고향 친구.
홍무업이 형 유배지 가는 것을 전송하는 시.
丙辰疏 작성 때 도와줌.
李泂
(개명 澣)
친구
서울 친구(이웃에 삶).
종실 鶴林君 아들.
장자호와 함께 3명이 동호 유람하며 시.
병진소 작성 때 도와주고 본인도 윤선도 옹호
상소를 올림.
李睟친구 서울 친구. 종실 龜川君.
안부 시. 이이첨 비판, 윤선도 옹호 상소를 올
렸다가 귀양.
李誠胤친구
서울 친구(이웃에 삶).
錦山君.
墓碣銘. 이이첨 비판, 윤선도 옹호 상소를 올렸
다가 귀양.
朴弘道친구 서울 친구(이웃에 삶). 윤선도와 종실이 올린 상소의 배후로 지목받음.
李而遠孫婦의 외조부
서울 친구. 윤이후 처의 외
할아버지. 이준경의 증손.
墓碣銘.
張瀚친구 서울 친구. 江東 사람. 강동으로 돌아갈 때 전송시.
李庭芳친구의 아들 이성윤의 아들. 이정방 아들 挽詞.
李敏政친구의 손자 이성윤의 손자.
이민정이 부탁해 이성윤의 墓碣銘을 지음.
권세가 경계 서신.
152 민족문화연구 제81호
려났다. 세 번째는 1660년 함경도 삼수로 귀양 가 5년 뒤 전라도 광양으로
이배되었다가 1667년 2년 만에 풀려났다.
윤선도는 오랜 시간 유배생활을 한 탓에 유배지에서 여러 인물들과 교유
했는데 다음의 <표 9>와 같다. 경원에서는 전라도사로서 鄕試를 주관하다 왕
의 실정을 풍자하는 試題를 출제했다고 해서 당시 종성에 유배 중이던 김시
양과, 영덕에서는 김상헌을 옹호하다 그곳에 귀양 온 이해창과 많은 시를 주
고받으며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또한 윤선도가 경원에 귀양
갔을 때 그곳의 수령이었던 정여린이 뒤에 죽자 挽詞를 지어 그의 의로운 삶
을 기리기도 하였다.45)
삼수에 있을 때는 그곳 교생들이 수령에게, 기존의 향교가 낡고 위치가 관
가에 가까워 문제가 많으니 장소를 옮겨 새로 중축하기를 청하는 글을 대신
써주고46) 삼수군 수령들의 명단과 시기 등을 기록한 三水郡先生案의 서문
을 써주기도 하였다.47)
한편 함경도지역에 두 번이나 귀양을 가다보니 처음 갈 때 인연을 맺어 詩
를 지어준 趙生이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45년 후 두 번째 갈 때는 그녀는 죽
고 대신 그녀의 두 딸을 만나 이전 시의 韻을 써서 다시 시를 지어주는 아주
드문 일이 생기기도 하였다.48)
∎ <표 9> 윤선도가 유배지에서 교류한 인물
45) 고영진,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윤선도의 삶」, 歷史學硏究 제68호, 호남사학회, 2017a.
46) 尹善道, 「三水校生等呈本郡書 同年十二月」, 孤山遺稿 권5上.
47) 尹善道, 「三水郡先生案序」, 孤山遺稿 권5下.
48) 尹善道, 「戱贈路傍人 丁巳」, 孤山遺稿 권1; 「復用前韻贈洪獻禮勝二郞」.
이름 유배지 관계 설명 교류 내용
金時讓경원 종성에 유배 중인 김시양과 교류. 귀양살이에 관한 여러 시를 주고받음.
鄭如麟경원 경원에 귀양 갔을 때 그 곳의 수령. 挽詞
李海昌영덕 영덕에 유배 중인 이해창과 교류. 임숙영 문인. 귀양부터 이후 15년간 시를 주고받음.
申退之영덕 유배 중에 방문. 술자리에서 이해창의 시에 次韻.
申履謙영덕 유배 중에 방문. 술자리에서 이해창의 시에 次韻.
崔炫영덕 유배 중에 방문. 술자리에서 이해창의 시에 次韻.
호남남인 윤선도의 관계망 153
윤선도집안은 처음 강진에 지역적 기반을 마련한 이후 해남 백련동으로
옮겨 정착하고 이어 처족으로부터의 재산과 간척사업 등을 통해 해남, 장흥,
강진과 진도, 완도 등 서남 해안지역에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함으로써
호남의 대표적인 사족가문으로 부상하였다.
또한 누대에 걸쳐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계기로 서울과 근기지역에 집과
별서를 마련하고 서울지역 사족들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서울 중앙과의
지역적 관계망을 구축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유배나
학문 교류 등도 지역적 관계망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18세기 후
반에 가면 윤선도집안은 서울 중앙과의 지역적 관계망이 끊어지면서 양반지
배 네트워크의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다.49) 윤선도와 그의 가문의 지역적 관
계망은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 걸친 지방 재지사족들의 생존 전략과 변천 과
정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4. 학문적 관계망
윤선도는 스승이 없이 학문을 배웠지만 그 학문⋅사상적 뿌리가 사림, 특
히 기묘사림에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고조인 윤효정은 김종직의 문
인이었던 최부에게서 수학하였다. 최부는 윤효정의 장인인 정귀영의 형 정귀
감의 사위로 처향인 해남에 이주하여 윤효정과 유계린,50) 임우리51) 등의 제
49) 백광렬, 앞의 글.
50) 柳桂隣은 柳希春의 부이다.
金光宇영덕 유배 중에 방문. 술자리에서 이해창의 시에 次韻.
任有後영덕 유배 중에 방문. 임숙영 문인. 이해창과 술자리에서 시.
趙君獻영덕 유배 중에 방문. 이해창과 술자리에서 시.
趙生경원 경원으로 귀양 가는 도중에 만남.
윤선도를 특별히 후대.
시 여러 수를 지어줌.
禮順경원 趙生의 딸. 삼수로 귀양 가는 도중에 만남. 시를 지어줌.
勝禮경원 趙生의 딸. 삼수로 귀양 가는 도중에 만남. 시를 지어줌.
校生삼수 삼수향교 교생. 향교 중축을 청하는 글을 대신 써줌.
154 민족문화연구 제81호
자를 길러내 호남 유학의 부흥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윤효정과는 4촌 동
서가 되는 셈이다. 또한 최부는 ‘소학동자’로 불리는 김굉필, 신영희 등과 情
志交孚契라는 계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52)
증조인 윤구는 기묘명현으로 당시 조정에서 성리대전을 강의할 26인에
들 정도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경연에서 조광조와 함께 왕도정치를 역
설하기도 하였다. 최산두, 유성춘과 함께 ‘湖南三傑’로 불리었으며 김정국, 박
상, 임억령, 신잠 등과 교유하였다.53)
윤선도는 평생 소학을 중시하였으며 후손들에게도 일생동안 실천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는 집안의 家學的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또한 1657년
(효종 8)에는 자산서원 철폐에 반대하는 「國是疏」를 올리면서, 정개청을 “동방의
진유로 이황에 버금간다”고 높이 평가하고 그의 문집인 愚得錄을 간행할 것을
청하였다. 정개청은 서경덕의 문인으로 학문적으로 북인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윤선도집안은 고조인 윤효정과 증조인 윤구 대에는 사림집안이었다가 조
부인 윤의중 대에는 동서분당이 되면서 동인에 가까웠으며 부인 윤유기 대에
는 오히려 북인에 가까웠다.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은 윤구의 孫壻였으며54)
기축옥사 때 윤선도집안은 윤의중이 이발의 외삼촌이라는 이유로 삭직되는
등 타격을 받았다.
따라서 윤선도 사상의 저변에 깔려 있는 尊君의식과 敬⋅義⋅禮의 강조,
下學의 중시와 박학적⋅실용적 성격 등은 북인과 정개청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음을 나타낸다. 이는 <표 10>에서 보듯이 그가 교유하고 정치적⋅학문
적으로 연관된 인물들의 상당수가 조경과 허목, 홍우원,55) 정세규, 이원진,
이무, 하홍도, 나위소 등 북인에 뿌리를 남인, 즉 근기남인과 호남남인이었다
는56) 데서도 잘 드러난다. 말하자면 윤선도의 학문⋅사상적 맥이 북인 또는
51) 林遇利는 林億齡의 숙부이다.
52) 윤인숙, 조선전기의 사림과 <소학>, 역사비평사, 2015.
53) 이종범, 앞의 글.
54) 李潑의 부친인 李仲虎가 윤구의 사위였다.
55) 홍우원은 서경덕의 제자인 閔純의 문인인 洪可臣의 손자로 기해예송 때 윤선도를 옹호하는 상소
를 올렸으며 윤선도의 諡狀을 지었다. 그러나 윤선도와 직접 교유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顯宗
實錄 권6 현종 4년 4월 19일 丙辰 참조.
호남남인 윤선도의 관계망 155
북인계 남인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57)
∎ <표 10> 윤선도가 정치적⋅학문적으로 교류한 인물
기해예송으로 윤선도가 귀양을 가자 그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던 조경은
윤근수와 문위에게58) 수학하였으며 처음에는 당색이 강하지 않았지만 이후
뛰어난 문장과 강직한 언론활동을 바탕으로 대표적인 근기남인으로 자리 잡
았다.59) 윤선도는 귀양 가는 자신을 마중 나오기도 했던 조경과60) 여러 편
의 시와 서신을 주고받는데 학문뿐만 아니라 음악이론에 대해서까지 언급하
고 있다.61) 조경은 윤선도가 기생 조생과 그 딸들에게 써준 시를 보고 글을
56) ‘호남남인’의 개념과 범주에 대해서는 고영진, 「윤선도의 학문과 사상적 특징」, 奎章閣 제51집,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017b 참조.
57) 정호훈, 朝鮮後期 政治思想 硏究―17세기 北人系 南人을 중심으로―, 혜안, 2004.
58) 文緯는 鄭逑의 문인이다.
59) 신병주, 「17세기 政局의 전개와 趙絅의 정치적 활동」, 朝鮮時代史學報 제80호, 조선시대사학회,
2017.
60) 孤山先生年譜 권2 顯宗大王元年 庚子 四月.
61) 尹善道, 「答趙龍洲別幅 同年九月」, 孤山遺稿 권5上.
이름 학파⋅정파 관계 설명 교류 내용
趙絅근기남인 예송에서 윤선도 옹호하는 상소 올림.
학문, 음악 등에 관한 여러 편의 서
신을 주고받음.
鄭世規근기남인 친구. 윤의미의 장인. 정개청 관련 여러 서신을 주고받음.
李袤근기남인 윤직미(庶子)의 장인. 혼례 등 여러 서신 주고받음.
李元鎭근기남인
윤예미의 장인. 이익의 부친인 이하진과 4
촌 형제.
제주목사 때 서신.
河弘度조식학파 친구. 挽詞. 예설 등에 관한 서신.
李敬輿 서인
옛날 天元館에서 처음 만나 의기투합.
30년의 세월이 흐름.
강빈옥사에 반대해 진도로 유배오
자 서신을 주고받음.
李景奭서인 서로 만나 금세 친해짐. 여러 편의 시를 주고받음..
權諰서인 예송에서 윤선도 옹호하는 상소 올림. 정개청에 관한 서신.
羅緯素호남남인 증조가 羅晊, 조부가 羅士忱, 부가 羅德峻. 挽詞.
邊麟吉格物致知說에 대한 서신.
李必成국상 때 私家의 제사 문제. 예에 관한 서신.
白尙賓국상 때 私家의 제사 문제. 예에 관한 서신.
156 민족문화연구 제81호
지어 조생을 義妓로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62)
윤선도가 북인계 남인으로서의 학문적 정체성에 관해 많은 글을 주고받은
인물은 정세규였다. 정세규의 조부인 정언신은 선조 대 우의정으로 기축옥사
에 연루되어 갑산에 귀양 가 죽었으며 부친인 정율도 조부를 따라 굶어 죽었
다.63) 또한 정세규는 윤선도의 차남 윤의미의 장인이기도 하였다. 윤선도는
정세규에게 서신을 보내 정개청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고 우득록 교정 본
것을 보내니 이를 수정한 뒤 조경에게도 보내주기를 청하였으며64) 안방준이
五臣傳을 지어 정개청 등을 비판한 것을 다시 비판하였다.65)
이무는 선조 대 북인의 영수였던 이산해의 손자로, 측실의 딸이 윤선도의
아들(서자)인 윤직미와 결혼해서 서로 사돈 간이었다. 근기남인 중 淸南에 속
하였다. 윤선도는 이무와 아들의 혼사와 귀양살이 등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서신을 주고받았다. 윤선도가 죽고 나서 이무는 자산서원을 복원하고 윤선도
를 三公에 증직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66)
이원진은 근기남인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익의 부친인 이하진과 사촌
형제이다. 또한 동생 이숙진의 딸이 윤선도의 3남인 윤예미와 결혼하여 사돈
간이었다. 윤선도는 이원진과 서신으로 농담을 주고받는 가까운 사이였다.67)
조식학파인 하홍도는 조식 문인인 하수일에게 수학하였으며 예학에 조예
가 깊었다.68) 삼수에서 광양으로 이배된 윤선도는 그와 예설에 관한 서신을
주고받았다. 윤선도는 하홍도를 朋友라 칭하며 학문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
음을 시에서 밝히고 있으며69) 그가 죽자 만사를 짓기도 하였다.
윤선도집안과 함께 대표적인 호남남인 집안이 나사침집안인데, 윤선도가
62) 尹善道, 「題洪獻義妓趙生帖後」, 孤山遺稿 권1.
63) 宣祖修正實錄 권23 선조 22년 12월 1일 甲戌.
64) 尹善道, 「上鄭知事世規書 同年十一月」, 孤山遺稿 권4.
65) 安邦俊의 五臣傳에서의 五臣은 鄭介淸, 李潑, 李洁, 柳夢井, 曺大中을 가리킨다. 尹善道, 「上鄭知
事世規書別幅 同年正月」, 孤山遺稿 권4 참조.
66) 肅宗實錄 권5 숙종 2년 2월 28일 庚辰.
67) 尹善道, 「答耽羅伯李元鎭書 辛卯」, 孤山遺稿 권4.
68) 강대민⋅박병련, 「진주지역 향촌지배층의 형성과 변화」, 남명학파와 영남우도의 사림, 예문
서원, 2004.
69) 尹善道, 「敬和呈謙齋靜案 丙午」, 孤山遺稿 권1.
호남남인 윤선도의 관계망 157
교유했던 나위소는 나사침의 손자이다. 그의 부친 나덕준과 형제들은 정개청
의 문인으로 기축옥사 때 5명이 귀양 갔다 왔으며 이후에도 스승의 신원 운
동에 앞장서고 자산서원 치폐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70) 윤선도
는 나위소가 죽자 만사를 지어 슬픔을 토로하였다.71)
그렇다고 윤선도의 학문과 사상이 북인 또는 북인계 남인의 磁場 속에 있
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의 종증조부인 윤복이 안동도호부사 재직 시 윤강중,
윤흠중, 윤단중 세 아들을 이황 문하에 보내어 수학하게 한 데서 알 수 있듯
이 이황과도 학문적 맥이 닿아 있다.72) 윤선도는 이황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
였으며 格物物格說에서 이황의 理到說을 따르는 등 문집의 여러 곳에서 이황
의 설을 인용하고 있다.73)
한편 윤선도는 예송 때 자신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던 권시와, 정개청을
옹호하며 송준길이 자산서원을 철폐한 것을 비판하는 내용의 서신을 주고받
았으며74) 이경여⋅이경석75) 등과도 여러 편의 시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이
들은 서인에 가까웠지만 대체로 당색이 옅은 인물들이었다.
이렇듯 윤선도의 학문적 관계망은 서경덕⋅조식학파의 북인 또는 북인계 남
인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이황학파와 당색이 옅은 서인계 인물에까지 연결되
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호남남인의 학문적 특징이기도 하였다.
윤선도는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 등 빼어난 문학작품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젊었을 때부터 文名을 떨쳤다. 1612년 26세 때 진사시에 합격할 때는
임숙영이 매번 윤선도가 지은 글을 보고 감탄하여 칭찬하며 당대의 제일로 추
대하였으며,76) 1628년 별시 초시에 장원했을 때는 장유가 윤선도의 策을 얻
70) 金東洙, 「16-17世紀 湖南士林의 存在形態에 대한 一考察―특히 鄭介淸의 門人集團과 紫山書院의 置
廢事件을 중심으로 하여―」, 歷史學硏究 Ⅶ, 전남대 사학회, 1977.
71) 尹善道, 「挽羅慶州緯素 同年」, 孤山遺稿 권1.
72) 고영진, 「이황학맥의 호남 전파와 유학사적 의의」, 退溪學과 韓國文化 제32호, 경북대 퇴계연
구소, 2003.
73) 고영진, 앞의 글, 2017b.
74) 尹善道, 「答權贊善諰抵他人小紙 同年七月」, 孤山遺稿 권4.
75) 李景奭은, 부친인 李惟侃이 서경덕 문인이었던 민순에게 수학하는 등 서경덕학파와도 연이 닿고
있다. 전다혜, 「17세기 관료학자 李景奭의 현실인식과 정치활동」, 건국대 석사학위논문, 2014 참조.
76) 孤山先生年譜 권1 壬子.
158 민족문화연구 제81호
어서 보고 동국 제일의 책이라고 감탄하고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77)
때문에 나름대로 文名이 있는 인물들이 윤선도와 함께 시를 주고받고 그와
시를 짓기를 원하였다. 윤선도의 문학친구로는 <표 11>에서 보듯이 영덕에
유배 갔을 때 만나 오랜 기간 동안 시를 통해 우정을 나눈 이해창을 비롯해
채이후, 정두경, 박이후와 승려 허백당 등이 있다. 채유후는 대제학으로 있을
때 윤선도를 찾아와 함께 聯句를 짓자고 청해 문학친구가 되었다.78)
또한 윤선도는 자신의 집안과 사이가 안 좋았던 정철의 2남 정종명의 사
위인 최유연과 시를 주고받았으며79) 3남 정진명의 시에 차운하여 해남의 풍
경을 노래하기도 하였다.80) 문학적 교류가 집안간의 좋지 않은 인연도 넘어
선 것이다.
윤선도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예학⋅의학⋅풍수⋅지리 등 다양한 분야에
조예가 깊었는데 음악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거문고 등
악기를 몸소 연주하고 음악을 즐겼으며 음악이론에 대해서도 남다른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81) 윤선도는 여러 琴客들과 음악적 교유를 했는데 권해는 그
가운데 제일 친한 친구였다. 권해의 호는 伴琴인데 거문고를 잘 타서 그렇게
붙였다고 한다.82)
∎ <표 11> 윤선도가 문학⋅음악적으로 교류한 인물
77) 孤山先生年譜 권1 丁卯.
78) 尹善道, 「聯句 同年」, 孤山遺稿 권1.
79) 尹善道, 「戱次方丈山人芙蓉釣叟歌 同年」, 孤山遺稿 권1.
80) 尹善道, 「次鄭子羽韻詠黃閣老松棚八景」, 孤山遺稿 권1.
81) 고영진, 앞의 글, 2017b.
82) 尹善道, 「贈別權伴琴 同年」, 孤山遺稿 권1.
이름 관계 관계 설명 교류 내용
鄭斗卿문학친구 정유악과 7촌 간. 시 次韻.
蔡裕後문학친구
尹端中(윤복의 셋째 아들)의 딸(壻 李
曙)의 사위.
聯句.
朴而厚문학친구 윤선도 집을 자주 방문.
近體詩와 挽詞.
수령에게 학교 선생으로 추천.
虛白堂문학친구 승려. 승병. 시.
호남남인 윤선도의 관계망 159
윤선도의 제자는 그리 많지 않다. 인조 대 세자사부로 봉림대군과 인평대
군을 가르쳤으며 정유악과 심단, 이보만, 안서익 등이 보길도에서 수학하였
다.83) 정유학, 심단 등은 <표 12>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모두 윤선도와 인척
관계이다. 윤선도는 이들에게 학문에 끊임없이 힘쓸 것을 당부하였다. 특히
정유악에 대해서는 기대를 많이 하였으며84) 1658년부터 1662년까지 대학
의 格物致知說을 비롯하여 성리학 이론에 대해 집중적으로 의견을 주고받기도
하였다.85) 윤선도집안의 학문적 특징 중의 하나로 가학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 이 제자 관계에서도 잘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 <표 12> 윤선도의 제자
83) 정유악 등이 보길도에서 수학한 기록은 尹愇가 쓴 甫吉島識에 나온다. 윤위는 尹斗緖의 손자
로 윤선도의 5대손이 되는데 1748년(영조 24) 보길도를 답사하고 보길도지를 남겼다. 당시 보
길도는 윤선도의 庶子인 尹直美의 사위 李東淑이 지키고 있었다. 尹愇, 甫吉島識 참조.
84) 尹善道, 「答鄭進士吉甫書 同年二月」, 孤山遺稿 권4.
85) 고영진, 앞의 글, 2017b.
李海昌문학친구 윤선도가 영덕에 유배 가서 만남. 15년간 가장 많은 시를 주고받음.
任叔英윤선도가 진사시에 합격할 때 시관. 임숙영 시에 次韻하여 다른 사람에게 보냄.
鄭振溟정철의 셋째 아들. 정진명 시에 次韻하여 풍경을 노래함.
崔有淵정철의 둘째 아들 정종명의 사위. 시 次韻.
權海음악친구 거문고를 잘 연주함. 세연정 관련 서신과 시들.
이름 관계 관계 설명 교류 내용
鳳林大君
(孝宗)
세자사부 1628-1632년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사부.
詩論에 관한 서신. 효종의 명으로 조정
출사.
麟坪大君세자사부 1628-1632년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사부. 시 증정. 挽詞.
鄭維岳제자
부 鄭雷卿이 윤선도의 고모의 孫壻.
鄭彦信이 조부.
보길도에서 수학. 대학 格物說에 대
해 여러 차례 서신을 주고받음.
李保晩제자 윤선도의 둘째 사위.
보길도에서 수학. 과거 공부에 더 정진
하라는 서신.
安瑞翼제자 윤선도 둘째 아들인 윤의미의 사위.
보길도에서 수학. 현안에 대해 여러 편
의 서신을 주고받음.
沈檀제자 윤선도 사위 심광면의 아들.
보길도에서 수학. 사마시 합격 축하하
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서신.
160 민족문화연구 제81호
5. 관료적 관계망
윤선도는 5년간의 대군사부 시절을 포함해 총 10년에 못 미치는 관직생활
을 하였다. 따라서 그가 관료로서 재직하거나 조정의 부름으로 잠시 나아갈
때 교류했던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사실 「병진소」로 일약 중앙 정계의 스
타가 되고 세자의 사부가 되어 왕실과 친분을 쌓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견제를 불러일으켰다.
윤선도는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33년(인조 11) 문과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과거 동기들과 교류는 <표 13>처
럼 별로 보이지 않는다. 진사시 동기인 유시정은 만사를 써서 죽음을 아쉬워
했으며86) 또 다른 진사시 동기인 이원진은 사돈 관계를 맺어 서신을 주고받
았다.87) 문과 동기의 경우는 김화준밖에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윤선도는 그
가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 해남현감에게 학교 교관으로 추천하기도 했으며88)
그가 죽자 만사를 지어 기렸다.89)
∎ <표 13> 윤선도의 과거 동기
과거 동기와의 교류와 마찬가지로 윤선도는 중앙의 관료와의 교류도 그리
많지 않았다. <표 14>에서 볼 수 있듯이 주로 조정의 관리가 의학과 풍수지
리에 능한 윤선도에게, 왕실에서 그와 관련한 일이 있어났을 때 자문을 구하
는 경우가 많았다.
일찍이 윤선도는 병자호란 때 자신을 병량소모사로 삼은 박동량에게 서신
86) 尹善道, 「挽柳南原時定 戊戌」, 孤山遺稿 권1.
87) 尹善道, 「答耽羅伯李元鎭書 辛卯」, 孤山遺稿 권4.
88) 尹善道, 「上本縣城主書」, 孤山遺稿 권3下.
89) 尹善道, 「挽金士元 同年」, 孤山遺稿 권1.
이름 관계 관계 설명 교류 내용
柳時定(초명 時英) 진사시 동기 마음 속의 친구. 挽詞.
李元鎭진사시 동기 셋째 아들 윤예미 장인의 형. 제주목사 때 서신.
金華俊문과 동기 金式南의 아들. 字가 士元. 수령에게 학교 교관으로 추천. 挽詞.
호남남인 윤선도의 관계망 161
을 보내 부족한 것은 양식과 군대가 아니라 인재와 장수라는 것을 강조하였
으며,90) 최명길이 자신을 藥廳의 의관으로 천거하자 정중히 거절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하였다.91) 또한 왕과 왕비 등 왕실 구성원의 몸이 편찮을 때 수시
로 자문에 응하였으며92) 효종이 죽었을 때는 山陵을 정하는 데 참여하여 여
러 사람과 의견을 주고받았다.93)
또한 효종의 산릉 택지 문제로 推考를 받는 상황에서도 윤선도가 상경하여
몸이 편지 않은 현종의 약 처방 논의에 참여하자 이경석은 “나는 이 사람을
약방에서 처음 보았다. 重論의 탄핵을 입고도 전혀 개의치 않으니 天稟이 온
통 나라를 위한 지극정성뿐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94) 이후 두 사람은 친해
져서 지속적으로 교류하였다.95)
∎ <표 14> 윤선도와 교류한 중앙관료
윤선도와 지방관과의 교류는 중앙관료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았는데 주로
윤선도집안의 근거지인 해남 등 호남지역과, 그가 두 번이나 귀양을 갔던 함
경도지역의 지방관들로 다음의 <표 15>와 같다.
90) 尹善道, 「上錦溪君朴東亮書 丁卯」, 孤山遺稿 권3下.
91) 尹善道, 「上禮曹判書書 同年」, 孤山遺稿 권4.
92) 안상우, 「海南尹氏 孤山 尹善道의 醫藥事跡」, 島嶼文化 제46집,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2015.
93) 金柄憲, 「孝宗大王 寧陵의 擇山論爭」, 朝鮮時代史學報 제69호, 조선시대사학회, 2014.
94) 孤山先生年譜 권2 庚子 二月.
95) 이경석은 예송으로 삼수에 귀양 가있던 윤선도를 광양으로 이배하는 일과 석방하는 일 모두 힘
쓰기도 하였다. 顯宗實錄 권10 현종 6년 2월 25일 壬午; 권14 현종 8년 7월 21일 癸亥 참조.
이름 직책 관계 설명 교류 내용
朴東亮병량소모사 정묘호란 때 윤선도를 종사관으로 임명. 兵糧에 관한 의견을 밝힌 서신.
崔鳴吉예조판서 최명길이 藥廳의 醫官으로 천거. 최명길의 천거를 거절하는 서신.
沈之源摠護使효종 산릉 정하는 문제. 효종 산릉에 대한 의견 서신.
沈光洙승지 효종 산릉 정하는 문제. 효종 산릉에 관한 서신.
鄭良弼참판 효종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윤선도에게 시. 시 次韻.
宋時吉좌윤 약에 대해 물음. 약에 관한 서신.
姜錫圭正字윤이후의 과거 합격 잔치를 도와줌. 감사 서신.
162 민족문화연구 제81호
함경도지역에서 교류했던 지방관은 수성찰방 김상윤,96) 산수만호 안진두,
산수태수 이공망, 갑산부사 조부, 함경도 남병사 이여발과 구문치 등 윤선도
가 유배생활 하는 동안 음식과 책 등 물질적으로 도움을 준 사람들이 많았
다. 물론 윤선도는 도움만 받은 것은 아니며 충고도 하고 인재를 추천하기도
하고97) 병사의 부탁을 받아 「삼수군선생안」의 서문을 써주기도 하였다.98)
∎ <표 15> 윤선도가 교류한 지방관
윤선도집안은 호남의 대표적인 부자가문으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
96) 光海君日記 권124 광해 10년 2월 6일 丙申.
97) 尹善道, 「與南兵使李汝發書別幅 同年十一月」, 孤山遺稿 권5上.
98) 尹善道, 「三水郡先生案序」, 孤山遺稿 권5下.
이름 직책 관계 설명 교류 내용
金相潤찰방 경성 수성. 윤선도와 친하게 됨. 贈詩.
安震杜만호 산수 인차외. 물고기와 시를 보낸 것에 대해 사례하는 시.
李公望태수 산수.
태수를 생각하며 시.
부탁으로 「三水郡先生案序를 씀.
黃道宏도사
함경도. 황도명의 동생.
윤선도 동서의 아들.
推刷에 관한 서신.
趙裒 부사 갑산. 양식을 청하는 서신.
李汝發남병사 함경도. 李尙仁, 姜渭老 추천하는 서신.
具文治남병사 함경도. 양식을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 서신.
金體乾남병사 함경도. 「三水郡先生案」의 서문을 윤선도에게 부탁함.
奇順格현감 해남. 윤선도 산의 벌목 관련 서신.
尹衡彦어사 호남지역(장흥). 윤선도 장인의 조카. 再從 林晶의 노비 사건 부탁하는 서신. 稱念.
李太芳군수 강진. 노비가 役으로 차출된 것에 대한 서신.
李遇臣현감 해남. 문중 내 다툼 사건을 자체 처리해달라는 서신.
〇〇〇현감 해남.
학교 교관으로 金式南, 金練之, 尹善繼, 金華
俊, 金華伯, 尹績, 朴而厚, 尹縡, 金俅 추천.
趙啓遠감사 전라도.
鄕所 인사, 禁松 벌목, 효도, 죄수 석방 등 향
촌 일에 관한 서신.
朴尙質현감 해남. 향소 인사에 관한 서신.
호남남인 윤선도의 관계망 163
고 있었으며 윤선도 대에 와서도 550여 구의 노비와 1,000여 두락의 토지
를 가지고 있었다.99) 윤선도는 이 재산을 유지하고 경영하는 데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조부 대부터 해오던 토지 매입과 간
척사업을 계속 추진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노비 관리와 身貢의 효율적 수
취에 힘썼다.
노비 경영에 대한 관심은 장남 윤인미에게 준 「忠憲公家訓」의 9개 조목 가
운데 5개가 노비에 관한 내용인 데서도 잘 드러난다.100) 실제로 윤선도는 推
奴客에게 빼앗긴 노비를 되찾기 위해 소송을 제기하여 일부를 되찾아 왔으
며,101) 고부림집안으로102) 상속된 70여 구의 노비가 잘못 상속되었다고 이
의를 제기해 소송을 당했으나 승소하여 모두 되찾기도 하였다.103)
또한 어사 윤형언에게,104) 再從 임정이 서울에 자신의 노비를 찾아 왔다가
다시 그쪽 무리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빼앗긴 일을 해결해 줄 것을 부탁하면
서 이것이 세간에서 말하는 稱念과 비할 바가 아니라는 말도 하고 있다.105)
칭념은 膳物경제의 하나로 16세기부터 성행했는데 17세기 윤선도 대에도 여
전히 행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106)
그뿐만 아니라 윤선도는 증조부 묘지를 관리하고 있는 노비가 수군으로
차출되자 강진군수에게 빼줄 것을 청하였으며107) 해남관가에서 성문을 만들
기 위해 고조부부터 조부의 장사를 지낸 先塋의 나무들을 벌목해 가자 이를
중지해줄 것을 해남군수에게 요청하였다.108) 자기 집안의 재산을 지키기 위
99) 安承俊, 앞의 글.
100) 문숙자, 「조선후기 兩班家系와 地域民의 관계 및 그 변화양상―해남윤씨 고문서를 중심으로― 」, 古文書硏究 제48집, 한국고문서학회, 2016.
101) 한효정, 「소송을 통해 본 17세기 노비횡탈 양상―해남윤씨가(海南尹氏家) ‘안심(安心)’자녀 소송
문서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제87호, 한국역사연구회, 2013.
102) 高傅霖은 高敬命의 손자이자 高因厚의 장남이다.
103) 한상권, 「17세기 중엽 해남 윤씨가의 노비소송」, 古文書硏究 제39집, 한국고문서학회, 2011.
104) 尹衡彦은 윤선도의 장인 尹暾의 형 尹曄의 아들이다.
105) 尹善道, 「答尹御史衡彦書」, 孤山遺稿 권3下.
106) 稱念은 신임 지방관이 중앙에 있는 현직관료의 부탁을 받아 부임지의 친인척⋅동료에게 물자
를 전달하는 행위인데 윤선도는 물자가 아닌 노비문제의 해결을 부탁하고 있다. 李成妊, 「16세기
양반사회의 “膳物經濟”」, 韓國史硏究 제130호, 한국사연구회, 2005 참조.
107) 尹善道, 「呈康津城主書」, 孤山遺稿 권4.
164 민족문화연구 제81호
해 지방관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려 했던 것이다.
윤선도는 지방 재지사족으로서 향촌의 자율적인 운영에도 관심이 많았다.
해남현감 박상질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는, 백성의 行不幸은 전적으로 수령에
게 달려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鄕所의 손에 달려 있으므로 향소의 적임자
를 잘 뽑을 것을 강조하였다.109) 전남감사 조계원에게도 향소의 중요성을 강
조하고 향촌에서 일어나는 현안들에 대해 조언과 부탁을 하는 서신을 여러
번 보냈다.110) 나아가 문중 구성원 간에 다투고 관가에 고발하는 사건이 일
어나자 윤선도는 해남현감에게 사건을 문중 내에서 자체적으로 처리하게 해
줄 것을 청하는 단자를 올리기도 하였다.111)
윤선도는 한편으로 호남의 지방관들에게 향촌의 자율성과 향소의 중요성
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직접 향소의 운영에 참여하기도 했
다. 그는 「鄕社堂條約」을 짓고 이를 즉시 현판에 새겨서 향소의 대청에 걸어
놓고 길이 鑑戒로 삼을 것을 강조하였다.112) 또한 해남현감에게 김식남, 김
연지, 윤선계, 김화준 등 학식이 있는 인물들을 학교 교관으로 추천하여 문
풍을 일으켜줄 것을 기대하였다.113)
이렇듯 윤선도는 집안과 문중의 막대한 재산을 유지⋅경영하고 지방 재지
사족으로서의 기반을 다져나가는 데 지방관들과의 관계망을 적극적으로 활용
하였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에 걸친 윤선도의 관료적 관계망은 조선 중기 향
촌에 기반 한 재지사족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지배적 위치를 유지
⋅발전시켜 나가려고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08) 尹善道, 「呈海南城主書」, 孤山遺稿 권3下.
109) 尹善道, 「上城主書朴尙質 同年」, 孤山遺稿 권4.
110) 尹善道, 「呈全南方伯趙啓遠書 丙申」, 孤山遺稿 권4; 「呈全南方伯趙啓遠單 同年」; 「答全南巡相趙啓
遠書 同年十月」; 「與全南巡相趙啓遠別幅 同年十一月」.
111) 尹善道, 「呈海南城主單子」, 孤山遺稿 권4.
112) 尹善道, 「鄕社堂條約 丙申」, 孤山遺稿 권5下.
113) 尹善道, 「上本縣城主書」, 孤山遺稿 권5下.
호남남인 윤선도의 관계망 165
6. 맺음말
지금까지 17세기 대표적인 호남남인(남인계 호남사림)이었던 윤선도의 관
계망을 살펴보았다. 윤선도의 관계망은 다양하지만 크게 혈연적, 지역적, 학
문적, 관료적 관계망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윤선도집안은 고조인 윤효정이 해남의 토호였던 정귀영의 사위가 되어 막
대한 재산을 물려받음으로써 해남에 사회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윤
효정이 김종직 문인인 최부에게 학문을 배우고 생원시에 합격하면서 사림집
안으로서의 틀도 갖추어 나갔다. 이어 윤구⋅윤행⋅윤복 등 아들 3형제가
과거에 합격한 이후 윤선도의 손자인 윤이후까지 6대가 내리 문과에 합격함
으로써 호남의 대표적인 사족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가문의 번성을 기반으로 해남윤씨는 윤선도 대에 와서 4대 봉사를
확립하고 12촌 범위의 문중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 1702년
최초로 족보가 편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족보에 자녀를 남녀 구분 없이 나이순
으로 기록하고 내외손은 물론 외손의 외손까지 수록하고, 비록 嫡庶는 구별하여
서자녀는 ‘첩자’, ‘첩녀’로 표기하고 서자녀보다 적자녀를 먼저 기재하고 있으나,
서자녀의 자손도 적자녀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기록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아직
친가⋅적자⋅장자 중심의 부계친족 중심으로 완전히 변화하지는 않았음을 보여
준다.
이는 윤선도의 혈연적 관계망을 살펴봐도 잘 드러난다. 그가 일상적으로
교류했던 친족들은 주로 8촌 이내의 부계친족이었으며 모계와 처계는 매우
적었다. 이는 부계뿐만 아니라 모계와 처계 친족과도 관계가 많았던 이전 시
기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부계 안에서 동성친족뿐만 아니라 혼맥 등
으로 연결된 다양한 이성친족과도 관계를 맺고 있어 동성친족 중심의 후대와
는 다른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윤선도의 혈연관계망은 중
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조선사회의 과도기적 모습을 친족관계의 측면에서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해남윤씨는 중시조 8세손 윤광전 대부터 강진 한천동에 터를 잡고 살다가
166 민족문화연구 제81호
10세손 윤사보 대에 강진 덕정동으로 이주하였으며 윤선도의 고조인 12세손
윤효정 대에 처향인 해남 백련동에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 16세
기 조부 윤의중 대부터 18세기까지 몇 세기에 걸쳐 토지 매입과 대규모 간
척사업을 통해 해남, 진도, 장흥, 강진 등 해안지역에 전장을 소유하고 보길
도, 노화도, 맹골도 등 여러 섬을 경영하였다.
또한 윤선도집안은 윤홍중과 윤의중 대부터 서울에 집을 마련하고 경기도
광주 등지에 별서를 두면서 지역적 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아울러 윤의중 대
까지는 호남의 유력 사족가문과 혼인관계를 가지다가 그 아들 대부터 서울지
역의 사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묘소도 대부분 해남과 강진지역
에 있다가 윤의중 대부터 근기지역에 생기기 시작하였다. 윤선도집안의 서울
거주는 18세기 윤두서 때까지도 지속되었다. 윤선도 자신도 서울에서 태어났
으며 그가 사귄 친구들도 대부분 서울에서 사귄 친구들이었다. 한편 윤선도는
모두 3번에 걸쳐 15년간의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에 유배지에서 여러 인물들
과 교류하였다.
윤선도집안은 호남의 서남해안지역에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하였으며
누대에 걸쳐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계기로 서울과 근기지역에 집과 별서를
마련하고 서울지역 사족들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서울 중앙과의 지역 관
계망을 구축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유배나 학문 교류
등도 지역적 관계망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가면 윤선도집안은 서울 중앙과의 지역적 관계망이
끊어지면서 양반지배 네트워크의 주변부로 밀려나게 된다. 윤선도와 그의 가
문의 지역적 관계망은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 걸친 지방 재지사족들의 생존
전략과 변천 과정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윤선도는 스승이 없이 학문을 배웠지만 그 학문⋅사상적 뿌리는 사림, 특
히 기묘사림에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조 윤효정은 김종직의 문인인 최
부에게 수학하였고 최산두, 유성춘과 함께 ‘호남삼걸’로 불리었던 증조 윤구
는 경연에서 조광조와 함께 활동하였으며 김정국, 박상 등과 교유하였다.
윤선도는 가학적 전통을 이어받아 소학을 중시하였으며 후손들에게도
호남남인 윤선도의 관계망 167
일생동안 실천할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윤선도는 자산서원 철폐에 반대하고
정개청을 높이 평가하며 그의 문집인 우득록을 간행할 것을 조정에 청하
였다. 그의 사상의 저변에 깔려 있는 존군의식과 敬⋅義⋅禮의 강조, 하학의
중시와 박학적⋅실용적 성격 등은 북인과 정개청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
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윤선도의 학문⋅사상적 맥은 북인 또는 북인계 남인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그가 교유하고 정치적⋅학문적으로 연관된 인물들의 상당
수가 조경과 허목, 홍우원, 정세규, 이원진, 이무, 하홍도, 나위소 등 북인에
뿌리를 남인, 즉 근기남인과 호남남인이었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그의 학문⋅사상이 북인 또는 북인계 남인의 자장 속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
었으며 이황과도 학문적 맥이 닿아 있었고 권시와 이경석 등 서인계 인물들
과도 교류하였다.
제자는 많지 않았는데 모두 윤선도와 인척관계였다. 이는 윤선도집안의 학
문적 특징 중의 하나인 가학적 성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윤선도의 학
문적 관계망은 서경덕⋅조식학파의 북인 또는 북인계 남인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이황학파와 당색이 옅은 서인계 인물에까지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이
호남남인의 학문적 특징이기도 하였다.
윤선도는 5년 동안의 대군사부 시절을 포함해 총 10년에 못 미치는 관직
생활을 하였다. 따라서 그가 관료로서 재직하거나 조정의 부름으로 나아가서
교류했던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과거 동기로서 교류한 인물은 거의 없었으
며 중앙관료도 많지 않았다. 반면 지방관과의 교류는 상대적으로 많았다.
윤선도집안은 호남의 대표적인 부자가문으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
고 있었으며 윤선도는 이 재산을 유지하고 경영하는 데 적지 않은 노력을 기
울였다. 그는 노비 관련 소송도 여러 건 진행하였으며 집안과 문중의 재산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 지방관들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하였다. 또한 윤선도
는 지방 재지사족으로서 향촌의 자율적인 운영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지
방관들에게 수시로 향소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학식 있는 인물들을 학교 교관
으로 추천하기도 하였다.
168 민족문화연구 제81호
윤선도는 집안과 문중의 막대한 재산을 유지⋅경영하고 지방 재지사족으
로서의 기반을 다져나가는 데 지방관들과의 관계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
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에 걸친 윤선도의 관료적 관계망은 조선 중기 향촌에
기반 한 재지사족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지배적 위치를 유지⋅발전
시켜 나가려고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기 혈연적, 지역적, 학문적, 관료적 관계망 등 이 4개의 관계망은 서
로 중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다양한 관계망들은 윤선도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윤선도는 학문적 관계망을 통해 호남남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혈연적 관계망을 통해 해남윤씨집안의 결집을 도모하였고
지역적 관계망을 통해 서울 중앙과의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관료적 관계망을
통해 집안의 재산을 유지하고 지방 재지사족으로서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또한 윤선도와 그 집안의 관계망을 통해 우리는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
는 조선사회의 과도기적인 모습을 여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향촌에
기반 한 지방의 재지사족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지배적 위치를 유지
⋅발전시켜 나가려고 했는지, 그 생존전략과 변천과정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호남남인 윤선도의 관계망 169
∎ <그림 1> 윤선도집안의 가계도
1세 尹存富
2세 光奕
3세 衡
4세 孝正
5세 川楫
6세 桓
7세 祿和
8세 光琠
9세 丹鳳丹鶴
10세 思甫思瑞
11세 種耕畝
12세 孝仁孝義孝禮孝智孝常孝元孝貞
13세 衢衖行復後(庶) 從(庶)
14세 弘中義中恭中(庶)
15세 唯幾(繼) 唯深唯幾(出) 唯順
16세 善道(繼) 善養(庶) 善言善道(出) 善下(庶)
17세 仁美義美(出) 禮美循美(庶) 直美(庶) 義美(繼)
18세 爾錫 爾服(庶) 爾成(庶) 爾厚(繼) 爾久爾厚(出)
19세 斗緖(繼) 昌緖興緖宗緖(出) 斗緖(出) 光緖宗緖(繼)
170 민족문화연구 제81호
∎ <그림 2> 윤항집안의 가계도114)
尹衖
寬中夢麟(庶) 志謙(庶) 支訥(庶) 志誠(庶)
唯昌(庶,承嫡) 唯慶(庶)
尹善好尹善後
∎ <그림 3> 윤행집안의 가계도115)
尹行
和中審中明中安中勉中擇中
光啓光沃思賢繬縡續績
逈(繼) 機燦(庶) 機衡機玄機斐機成機文機章
再遇次遇重遇士遇
114) 윤선도와 교류가 보이지 않는 尹夢麟, 尹志謙, 尹支訥, 尹志誠 집안의 가계는 생략하였다.
115) 윤선도와 교류가 보이지 않는 尹安中, 尹勉中, 尹擇中 집안의 가계는 생략하였다.
호남남인 윤선도의 관계망 171
∎ <그림 4> 윤복집안의 가계도116)
尹復
剛中欽中端中敏中(庶) 時中(庶) 宏中(庶) 愼中(庶)
唯謙唯益 唯誠唯敬唯直唯方 唯大
善覺善三 善五 善履 善任 善昌善繼善殷善述 善老(出) 善老(繼)
116) 윤선도와 교류가 보이지 않는 尹敏中, 尹時中, 尹宏中, 尹愼中 집안의 가계는 생략하였다.
172 민족문화연구 제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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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민족문화연구 제81호
【Abstract】
Honam namin Yun Seon-do’s Networks
117)
Koh, Young-Jin*
This study looks into the Yun Seon-do’s networks who is the typical Honam namin
in 17th century. Yun Seon-do’s networks are various and we can study his networks
in terms of kinship, regional, academic and bureaucratic networks.
Yun Seon-do’s family established a socio-economic foundation by succeeding the
great property from the wife’s father, Jeong Gui-young who was a landed proprietor
in Haenam region. Hereafter from his three sons as Yun Gu and Yun Haeng, Yun Bok
until Yun I-hoo who was Yun Seon-do’s grand son passed the state examination. Yun’s
family became a typical noble family in Honam province.
Based on this Haenam Yun’s family made an effort to form a clan and compiled the
genealogy in 1702. The kinship network of Yun Seon-do showed the transitional figures
of Joseon society from mid Joseon to late Joseon period.
Yun’s family builded a strong regional base and prepared the houses in Seoul and
Gyeonggi province. Futhermore Yun’s family made a regional network and tried to
maintain by marrying noble families of Seoul area. But Yun’s family was expelled from
Yangban domination network in late 18th century becausing of cutting the regional
network with Seoul. The regional network of Yun’s family showed a surviving strategy
and a process of change of local noble family from mid Joseon to late Joseon period.
Yun Seon-do studied without a teather but his learning and thoughts was rooted in
Gimyo sarim. He rated Jeong Gae-cheong high. So his academic line was related with
Bukin or Namin affiliated with Bukin. This fact was identified by that most persons to
whom Yun Seon-do was related politically and academically were Geungi namin or
Honam namin who were rooted in Bukin. But his academic network was related with
Yi Hwang school and Seoin of few partisan coloring. This is the academic characteristic
of Honam namin.
Yun Seon-do had a few persons to associate with during his incumbency because
* Professor, Dept. of Tourism, Gwangju University.
호남남인 윤선도의 관계망 175
he had filled a government post for ten years. But keeping company with local governors
was more than central bureaucrats. Yun seon-do used bureaucratic network positively
to manage his family’s great fortune. Yun’s bureaucratic network from central
to local area showed how local noble families maintained their dominant power.
Four networks as kinship network and regional network, academic network, bureaucratic
network had multi-level characteristics. And these various networks had much
effect on Yun Seon-do. Yun established his identity as Honam sarim affiliated with
Namin (Honam namin) through the academic network. He made an effort to unite
Yun’s family and maintained the relation between Seoul and local area through the regional
network. And he maintained his family’s property and established the foundation
as local noble family through the bureaucratic network. We look into transitional
figures of Joseon society in many ways through networks of Yun Seon-do and Yun’s
family. And we also look into the surviving strategy and a process of change how local
noble families maintain and develop their dominant power.
Keywords: Honam namin, Yun Seon-do, Kinship network, Regional network, Academ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