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초기교단사 제2권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는다. (저자; 박용덕 교무)
(1997년 3월 6일 원광대학교 출판국 발행)
(2003년 2월 7일 원불교출판사 발행)
제2편 기성조합의 활동
Ⅴ. 창립 인연의 결속
1. 영광 제자들의 결속
2.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3. 모악산(母岳山)의 인연들
4. 만덕산(萬德山)의 숙연(宿緣)
가. 전주(全州) 교화(敎化)를 위하여
1) 전주는 돌아보지 마라
2) 전주를 돌아서 가는 길
실상동에서 줄포만 산 밖으로 나가는 지름길은 사자동 칠보대기에서 시작된다.
동네 앞에 바위가 일곱 덩어리가 있다하여 또는 앞으로 일곱 부자가 나온대서 칠보대기라고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줄포로 장 보러 가는 지름길은 바로 개울건너 묏골로 들어서 묏재를 넘어간다고 한다.
종전에 우리가 알기는 백천내로 둘러 노적미, 저석리 경유, 바디재를 넘어
우동 저수지로 내려가는 우회로였다.
지도상으로 보면 실상에서 묏재․굴바위․우동저수지는 거의 직선 코스의 지름길이 나 있다.
아무리 평길 일지라도 1시간 이상 더 소요되는 우회로를 쉽게 선택할 수 없는 노릇이다.
석두암에서 칠보대기까지는 10여분 남짓한 거리다.
칠보대기에서 묏골로 하여 등성이(묏재)에 올라서면
왼편 전면 산등성이에 거대한 바위 하나가 하늘을 찌르고 우뚝 솟아 그 위용을 자랑한다.
이것이 묏등바위다.
묏재에서 내러가면 불당골,
불당골을 빠져나와 와룡골의 절경을 완상하면서 회양골로 거슬러 오르면 우바위재다.
어째서 우바위잰고 하였더니 아닌게 아니라
큰 바위 하나가 생긴 모양이 꼭 암소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거 같다.
동네 사람들은 굴바위라고 부른다.
바위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다른 모양이어서,
어쩌면 코끼리 같기도 해 정작 바위 아래 가서 보니
그것은 시커먼 입을 법리고 있는 동굴이었다.
굴바위에서 조금 골짜기로 빠져나오면 우동 저수지. 물 건너 기망절벽이 눈길을 끈다.
이것이 성계폭포이다.
가물 때는 그냥 절벽에 불과하나 비 온 뒤의 떨어지는 그 폭포수는 절경을 이룬다.
저수지를 돌아가는 중간에서 왼쪽 굴바위로 들어서면 실상으로 가는 지름길이 나오고,
곧장 저수지 끝을 따라 돌아가면 바디재다
.(한국 전쟁 뒤 바디재로 비상도로가 가설되어 차편으로 실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시내버스 정류소가 있는 우동리 만화부락에서 실상까지 도보길로는 2시간이면 가나
바디재-노적미-백천으로 돌아가면 3시간이 걸린다.
가벼운 행장이거나 장정 걸음걸이라면 굴바위 쪽 일을 택하나,
줄포장을 보고 짐을 지거나 산길에 익숙치 않는 부녀자들은
비교적 평탄한 바디재 길로 우회하여 갔을 것이다.
저수지는 행정 구역상으로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에 속한다.
우동리 반계 마을에는 평생을 야인으로 지내며 학문에 전념한
유형원柳馨遠(1622:광해 14~1673, 현종 14)의 유적지가 있다.
유형원은 이 마을에서 20년에 걸쳐 농촌을 부하게하고
민생을 넉넉히 하는 주장을 편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저술하였다.
마을 앞을 20분 정도 지나면 부안-내소사간에 시외버스가 운행되는 만화부락이 나온다.
길 건너는 신복리 종곡 마을이 줄포만을 끼고 있다.
이춘풍李春風이 경상도에서 이주해 와 살던 동네다.
종곡에서 전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면 우선 고부쪽으로 코스를 잡아야 한다.
변산 자락을 벗어나 영전에 이르면 부안-줄포간의 국도 갈림길.
영전에서 곧장 옛길로만 지름길을 잡아 밭두덩 길을 걸으면,
전면 들판 건너 두승산의 산세가 시야를 막는다.
호남 삼신산의 하나라 일컫는 영주산 즉 두승산이다.
들판을 가로질러 율지부락에 이르니 연정에서 1시간이 걸렸다.
차도를 따라 고부를 향하면 길다란 들판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정읍군 고부면 지역에 들어간다.
들판으로 난 직선 신작로를 속도로 20분을 걸으면 관청리다.
예전에 바닷물이 드나들어, 쇠정이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쇠정이 마을을 관청리라 부르게 된 것은
일제가 조선의 토지를 강점하면서 간척사업을 전개함에 따라
수리조합, 농장, 창고 등 관청이 들어서면서 번화한 마을이 되면서부터다.
쇠정에서 고부면 소재지까지는 30분 거리.
조병갑이 농민들을 탐학하여 마침내 전봉준을 중심으로 민중이 봉기하였던 동학혁명의 진원지이다.
노인정에 가 촌로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봉준은 태인 사람이라
고부에는 별로 자랑할 것이 없다며, 손을 들어 가리키는 쪽을 보니
수백년 되었음직한 고목나무 세 그루가 산기슭에 버티고 있다.
세 아름이나 됨직한 이 고목나무는 뿌리가 지면으로 기어나와 서로 얽혀 있다.
고부에서 천치재를 넘어 황토마루까지 1시간 40분이 걸렸다.
야트막한 붉은 황토배기 동산에 전주 감영군을 물리치고
동학 농민군의 전승을 기념한 전적비(사적 295호)가 서 있다.
비(碑) 앞면에 이렇게 새겼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파랑새’란 전봉준의 성씨 全씨의 파자跛者로 ‘팔왕八王새’이다.
비(碑) 뒷면엔
‘가보[甲午]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丙申되면 못 가리’라는 동학의 참요가 새겨져 있다.
황토재에서 30분 남짓 태인쪽을 향해 가는 길에
얕은 등을 넘어서면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 손바래기 마을이 나온다.
증산 강일순의 탄생지이며 성장지이다.
40여호 남짓한 촌락으로 지금도 강씨가 7,8호가 살고 있다.
마을 뒷산이 시루봉인데 두승산에 연한 봉우리다.
강일순의 호가 증산이라는 것은 이 봉우리에서 유래되었다.
동네 사람들은 증산교에 대해 별로 알지 못하고 있다.
증산의 양자가 된다는 강경형이 이 옛집에 살며 정읍 북면 연산국민학교장을 지냈다.
소태산을 만나기 전,
정산은 신월리新月里 손바래기[客望里]에서 증산의 생가에서 얼마간 머문 적이 있는데,
증산의 무남독녀 강순임으로부터 ≪정심요결≫이라는 비서를 입수하였다.
이 비서를 간직하고 정산은 모악산 대원사에서 한철 수양을 났다.
이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원불교 교단은
반백년사업의 일환으로 교당 불리기 운동을 전개
1970년 7월에 신월리 399번지에 덕천교당을 설립하였다.
묘한 것은, 손바래기 마을에 소재한 덕천교당을 중심으로 십리 사방에
고부, 이평, 초강, 장학, 화해, 승부, 정주, 소성 등의 원불교 교당이 에워 싸고 있다는 점이다.
손바래기 앞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그 덕천들 한복판에 서면 아득히 북쪽으로 모악산이 보이고,
동쪽으로 칠보산과 내장산이, 남쪽으로는 고창 방장산이 그 위세를 자랑한다.
덕천들은 1시간 내처 걸어 정읍천을 건며면 호남선을 만난다.
초강역이다. 초강교당이 바로 여기 있다.
이른 아침 변산을 나서 초강을 지나니
해가 뉘엿뉘엿 땅거미가 사위를 둘러싸고 좁혀 온다.
초강에서 등멀을 넘어 곧장 구릉지대 밭 사이로 난 우마차 길을 걸으면
호남고속도로를 만난다. 고속도로를 건너면 덕천 마을,
지경터 앞들을 가로질러 동진강 다리를 건너면 태인, 주위는 완전히 어둠 속에 잠겨버렸다.
초강에서 태인까지 시간 반 거리다.
태인에서 신작로를 타고 한나절을 곧장 웃녁을 향해 가면
모악산 동구 밖에 구월리, 계룡리, 성계리, 원평리, 쌍룡리 동네가 나온다.
이들 동네에는 당시 각처에서 증산 출세를 믿고 모여든 신자들이 살았다.
원평부터 김제군의 경계에 속한다.
원평을 지나 금산사를 향하여 가면 금평 저수지가 나온다.
명당자리로 유명한 오리알터이다.
이 오리알터 저수지 주변에 구릿골 약방,
증산의 초분이 있었던 구릿골 장텟날, 그의 성골을 봉안하였다는 증산법 종교 본부 등등
모모한 증산 교파들이 터를 잡고 있다.
한때 불법연구회 금산요양원도 이 저수지 제방쯤에 있었고 상당한 과수원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물속에 잠겨버렸다.
그뒤 저수지 훨씬 아래쪽으로 교당을 옮겼다.
금산사는 훨씬 골짜기 안쪽에 넓은 터를 잡았다.
금산사 뒤 논과 계곡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깊숙이 들어 가면
상봉 중계탑까지 가설된 운송용 케이블을 만난다.
숨이 차게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상봉 고지 801m 주변에서 철조망에 가로 막힌다.
철조망을 돌아 동쪽으로 난 하산 길을 타고 등성이를 넘어서면 절 수왕사가 나오고
아래쪽으로 20분을 내려가면 대원사에 닿는다.
진묵과 증산이 도통을 하고 정산이 석달간 정성을 들였던 곳이다.
이곳에서 정산은 김해운을 만나고 달덩이처럼 만국에 없는 양반으로 떠받들어져
정읍 북면 화해리로 가게 된다.
화해리는 손바래기 마을과 덕천들 하나를 사이에 둔 마을로서
여기에서 소태산과 정산의 감격적인 만남이 있게 되었다.
구이면 저수지에 도착하니 금산사에서 출발한 지 3시간 걸렸다.
전주에서 노상 시내 버스가 운행되고 있으니
이곳은 행정 구역상으로는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에 속한다.
생각건대, 정산이 스승의 명에 따라 자력으로 가고 싶은 대로 왔다면,
아마도 예전에 다녔던 그 길로, 면식(인연) 있는 사람들이 사고 있는 그곳으로
또 사람들이 많이 다닌는 길, 수고를 줄여 가는 지름 길로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가 더듬어 온 코스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당시에는 저수지가 없었던 구이면 원기리 이 지점에
정산이 걸음을 멈추고 섰더라면 어디로 행선지를 잡았을까.
물론 시내 버스가 안개처럼 먼지를 피우는 전주쪽으로는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주에 들리지 않고 가는 길은 명약관화하게 드러난다.
노루목 원광곡으로 가지 않았을까.
하필 어쩌면 영광 길룡리의 소태산이 깨치신 곳 지명처럼 노루목이며
그 깨친 내용처럼 원광일까.
일부러 마을 이장을 찾아가서 물었더니 원공곡은 본디 너부실이라 부르는데
한자로 쓰면 ‘元廣谷’이라 한다.
노루목 너부실에서, 임진란 때 왜병들의 목을 무수히 짤라 통쾌히 이겼다는 왜목재를 넘어
신리까지 1시간 40분 거리를 걸었다.
이 신리에서 전주-남원간 포장도로와 전라선 철로를 만난다.
신리에서 전주 가는 길을 외면하고 발길을 돌리면
물이 바짝 마른 내를 건너 만덕산 자락에 접어든다.
전주 시민의 수원지인 상관 저수지를 경유 정수사(淨水寺)까지는 1시간이 걸린다.
[*정수사(淨水寺)는 완주군 상관면에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라 진성여왕 2년(서기 889)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 뒤 고려시대에 중건되었다가
다시 조선조 들어와 선조 때 진묵대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
정수사(淨水寺1)는 신라 때 도선국사가 창전하고 후에 진묵대사가 중창한 작은 절이다.
여기서 미륵사로 갈려면 오른쪽 골짜기 안창(강삼마을)으로 해서 급경사진 산길을 타야 한다.
762.8m의 만덕산 주봉을 넘어서면 미륵사彌勒寺에 이르게 되니
이곳에서도 진묵이 머물렀던 절로 정수사에서 1시간 거리다.
이렇게 정산은 전주를 우회하여
진묵이 머물렀던 월명암, 대원사, 정수사를 경유하여 미륵사에 이른다.
부안 변산 실상동에서 완주, 진안 군계에 있는 만덕산의 미륵사까지는
연 80km, 도보로 20시간 걸리는 노정이다.
오다가 하루 밤 쉬 참을 잡더라도 꼬박 이틀내 걸어야 완주할 수 있는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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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에서 만덕산까지 정산이 걸어간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