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卿宰
李睟光 碑銘[李廷龜]
我聖上卽阼之初, 徵召耆喆, 以彰鼎新之政。 時則有若芝峯李公杜門畿村, 上首起之, 數年擢爲冢宰。 且將相矣, 一日公公退, 暴風疾, 殆不興。 公之季子大司成敏求上疏言: “臣兄聖求方任全羅監司, 乞遞職歸救父病。” 上愍然許之, 馳遣宣傳官, 諭令毋待代急歸, 且命御醫診治, 藥餌悉出內局。 踰月竟不起, 戊辰臘月二十六日也。 訃聞, 輟朝弔賻祭有加。 明年二月, 葬楊州西山先兆次。 太常議諡曰文簡, 以二子從勳追贈領議政, 兼帶具如式。
按狀, 公諱睟光, 字潤卿, 芝峯號也。 李完山, 國姓。 太宗大王子敬寧君、諡齊簡公諱裶, 公之五代祖也。 高祖諱稙, 牟陽君; 曾祖諱承孫, 仙槎君; 祖諱𥙿, 河東君, 世以宗籍受封。 考諱希儉, 始由科目顯, 其季父神堂君諱禎無子, 子之。 忠藎事兩朝, 歷揚中外, 卒官兵曹判書, 後以公之從勳, 贈領議政。 妣文化柳氏, 封貞敬夫人, 淑莊賢明有士行。 以嘉靖癸亥, 生公於長湍之衙舍。
生有秀質, 端愨異凡, 判書公鍾愛特甚。 不煩提誨, 吐口成章, 一日令作雪詩, 對曰: “庭前有月松無影, 檻外無風竹有聲。” 聞者
驚以爲神童。 十六, 中進士初試, 華聞彌大。 己卯, 判書公捐館, 哀毁逾制。 服闋, 又中初試。 時栗谷主文柄, 見公製, 奬詡不已, 許以狀頭。 壬午, 登進士。 乙酉, 捷別試, 選槐院。 戊子, 薦入史局, 自奉敎例陞典籍、殿中。 庚寅, 歷正言、戶・兵曹佐郞、知製敎, 差聖節書狀官。 還拜黃海都事、禮曹佐郞, 復自正言選入弘文館, 爲副修撰, 移司憲府持平, 用薦拜吏曹佐郞。 公不喜馳逐名途, 白沙李公深相敬服曰: “今世之士, 絶意榮進而得銓郞者, 李某而已。” 俄因事罷, 卽敍爲校理, 還吏曹。 壬辰, 倭寇至, 中外大震, 公適罷官居家。 慶尙防禦趙儆辟公爲從事, 旋念大夫人在堂, 謂公獨子當免從軍。 公以爲: “平日食君祿, 圖報之謂何? 卒有難, 乃欲規避耶?” 卽謝大夫人, 馳至嶺外, 隨防禦使, 前後交戰, 未嘗不在行陣。 朝廷敍公爲修撰, 久乃聞大駕西播, 大夫人避兵北地, 又防禦使與湖南官軍合陣敗績。 公獨立干戈中, 君親阻絶, 方寸已亂, 而裁以大義, 匹馬奔問龍灣行在, 卽拜副校理。 九月, 控疏乞訪老母存亡, 上敎曰: “變後北關聲問不通, 李某可充使號, 宣諭德意, 兼察本道事情。” 遂差宣諭御史, 踰嶺抵明川得拜大夫人。 是時北路被奸民煽詿, 爭先款賊, 殺長吏據城邑, 拘執兩王子, 道路阻梗, 變且不測。 公馳入軍中, 製檄文諭以逆順禍福, 聞者感動, 反側革心, 義旅益奮, 一路大定。
癸巳, 復命, 三拜持平、校理、獻納, 歷弼善、掌令、執義, 上箚條陳十弊。 隨駕還都, 庶事創攘, 辭令沓委, 到手急就者, 多資於公。 甲午, 參鞫逆賊宋儒眞, 錫廏馬。 承宣缺, 命竝擬資未准, 超拜同副承旨, 陞至左副, 常兼承文副提調。 乙未, 拜右承旨、兵曹參知。 丁外艱。 丁酉, 制除, 拜右承旨、大司成。 差分戶曹, 管餉湖南, 卽日辭朝, 上察其羸毁, 特命勿遣。 以進慰使朝京。 戊戌, 還朝, 五爲左、右承旨, 三爲禮、兵參議。 己亥, 拜吏曹參議。 時縉紳傾軋, 西厓柳相、完平李相相繼去位, 公陳病自免。 歷兵曹參議、大司成、大司諫, 群小百計撓公, 至投無名書, 公不爲動。 控辭有曰“賢相去朝, 國事日非”, 遂遞。 辛丑, 再爲副提學, 考校《古文周易》, 又與儒臣同校《周易諺解》, 連有錫馬之命。
詔使顧、崔之來, 選差都司迎慰使, 道病遞還。 宣廟冊繼妃, 禮多簡省, 公上箚請行廟見一節。 癸卯, 拜諫長、兵議、副提學, 校正《史記纂》, 又賜廏馬。 拜吏曹參議, 時相欲以無賴子姪, 驟通顯路, 公持之不許, 群臣上請尊號, 公獨不肯。 積不安, 力丐外, 得安邊府使, 以病罷還。 丁未, 敍牧洪州, 逾年棄歸。 庚戌, 宣廟祔禮成, 以都承旨進加嘉善, 爲禮曹參判, 連拜諫、憲長, 皆卽辭遞。 光海世子服章未降, 差奏請副使, 使旋加階嘉義, 拜大司成、副提學。 光海用術士李懿信言, 欲遷都交河, 召宰臣雜議, 公率堂僚上箚, 斥其妖誕, 言雖不用, 事遂寢。 光海追崇所生, 遣使請冊命于中朝, 公上箚極論其非禮, 不報。 癸丑, 再除都憲, 皆不拜。 時爾瞻等嗾死囚起大獄, 殺永昌, 夷國舅, 囚繫先朝髦彦, 斥逐殆盡, 將謀廢西宮。 公義不染迹, 逍遙散秩, 以避禍機。 四年中, 一拜大司成、同知成均館事, 强起一謝而遞。 至丙辰, 出爲順天府使, 躬率以敎民, 悅而從化, 豎穹碑以頌淸德。 秩滿乃歸, 斂迹畿莊, 默坐蝸室, 盛暑不開戶, 家人唯聞警欬。 拜大司成、分兵曹參判、詔使迎慰使, 皆不就。 光海擧公及崔瓘、鄭曄名, 敎曰: “秩高宰臣, 當此主辱之日, 偃息郊畿, 無意陳力, 人臣之道, 果如是乎?” 公疏陳病憊不任狀。 壬戌, 又擧公及鄭曄名曰: “一切不仕, 未知其故。 竝令招集。” 備局請令代言懇諭招來。 觀察使申文勸駕, 勢甚敦迫, 禍且不測, 公不少撓, 暫至京卽還。
癸亥反正初, 拜都承旨、弘文提學、大司諫、吏・工曹參判。 甲子适變, 上南狩, 輿病扈駕, 還遷大司諫, 用其勞進階資憲。 製大妃玉冊文, 特加正憲。 四拜大司憲, 歷左・右參贊、同知經筵・春秋館事、工曹判書。 上箚陳懋實十二條, 縷縷萬餘言, 人以爲中興第一封事。 上優批, 略曰: “所陳無非至言格論, 嘉卿愛君憂國之誠, 敢不服膺力行?” 丁卯, 奴賊猝逼畿、黃, 三宮移駕江都, 世子受委南下, 上命老病朝臣任便隨往。 時公之長子以政官名在分朝, 次子爲養, 方任林川, 所親多勸公南往。 公毅然曰: “人臣一息尙存, 豈敢避危就安?” 遂赴大朝, 拜大司憲。 時賊退, 百度草創, 後進多務紛更。 公常言: “天下本無事, 遵先王而過者未之有也。 今屢經喪亂, 人心靡定, 當持寬恕, 傳以平法, 不可擾也。” 還都, 再授大司憲、知中樞府事、左・右參贊。
戊辰, 拜吏曹判書。 公素不喜權柄, 恒戒盛滿。 至是三辭不獲命, 則上章乞解者凡五, 而聖意益注。 公曰: “吾以職死矣。” 遂扶病就職。 恢賢路杜倖門, 疏鬱滯淸品流, 尤以考績爲重。 人不敢干私, 位著一新, 輿論翕然。 公兼局無多, 同僚瞯公不赴政, 循例除公爲惠民提調, 蓋以公多病, 幾以便醫藥。 公連箚懇辭, 得遞乃已, 卽此亦衰世罕見。 及疾革, 諄諄口中語, 恒以未卽釋重爲疚, 應受雇直, 戒家人無納, 持操之潔, 不變於死生之際又然也。
公天分自高, 不待師承, 淸明在躬, 志氣精詣, 莊重溫雅, 不露圭角。 少好觀書, 諸子百家無不領略其宗旨, 晩悉屛去, 專精聖學。 嘗著《學誡》以自歎曰“一落科臼, 遂爲文字所誤, 虛度平生。 思欲洗滌舊習, 以求向上工夫, 而日暯途遠, 難望有成。 是知進德修業, 須在早年”云。 戊辰元日, 著《自新箴》曰: “人苟得新, 雖老維新。 老何由新? 維學能新。” 遂以是年觀化, 人始知公平日省治之功, 至老不懈也。 常曰“簡以制煩, 靜以制動八字, 終身服膺”云。 論議正平, 不事交遊, 人不敢加以標榜, 雖世論乖張, 危機屢發, 而公自超然於文罔之
外。 一室圖書, 整襟端坐, 終日穆然, 未嘗見其惰容, 雖家人孺子, 亦未嘗加以褻語。 恒謂“人之處世, 遇多少逆境, 苟爲所動, 殆不勝其苦。 唯當物來順應, 不爲所役, 本源澄澈, 微瀾不起, 外慮不入, 夢境不煩”云。 性又明審, 裁鑑精到, 人邪正言是非, 事後當成敗, 瞭然如燭照, 無毫髮差。 世業本淸貧, 賢夫人又棄世, 家益旁落。 而性儉素, 泊然無所嗜好, 食無兼味, 坐無完席, 衣見故絮, 處之晏然。 人有服美者, 憮然不樂, 人亦自愧引去。 遇寡姊如事慈, 撫養諸姪, 備盡恩義, 親黨之窮無告者, 咸歸焉。
公一生沈潛, 翰墨自娛。 文出《六經》, 詩學盛唐, 沖澹雅麗, 自成一家言, 門路旣正, 深得作者之風。 十年閑廢, 著述甚富, 凡遇無聊不平, 必於詩發之。 三聘上國, 吟洒不倦, 嘗與安南、琉球使臣遇於帝京, 雖重譯不通, 同文相感。 見公之製, 無不稱頌, 珍藏歸國, 家誦戶詠。 詑謂日本被擄人曰: “爾知朝鮮有李芝峯乎?” 其詩之見賞於海外如此云。 所著詩文三十二卷, 《采薪雜錄》、《讀書錄解》、《警語雜編》各一卷, 《秉燭雜記》、《剩說餘編》、《昇平志》各二卷, 《纂錄群書》五部二十五卷, 《芝峯類說》二十卷藏于家。
夫人安東金氏, 都事大涉之女, 淑哲端莊, 配君子無違德。 生於丁卯, 卒於乙卯, 得年四十九。 公悼其早歿, 摭嘉言懿行, 自爲誌而藏之墓。 墓在西山, 與公同塋。 擧二男一女: 男長聖求, 吏曹參判; 次敏求, 右承旨, 俱以文行爲世名臣。 女適承文正字權儆。 參判娶舍人權昕女, 生五男二女: 男尙揆, 女適承文正字李一相, 餘幼。 承旨娶同知尹暉女, 生二男一女: 男元揆、重揆。 女適申昪。 權儆生三男躋、蹟、趾。旣葬, 公之二孤以狀屬余曰: “凡與我先子交而有文者, 惟子在。 敢徼惠一言, 以不朽吾先子。” 噫! 余之交公將五十年, 自布衣至卿相, 初持一心, 白首莫逆。 恒務晦斂, 恥於近名, 用若不欲盡其有, 言若不能出諸口。 而及觀其發施於事者, 其才有不可及, 其義有不可犯, 其守有不可奪者。 斯固天得, 而得之學力者尤多。 九原難作, 吾誰與歸? 遂爲之銘曰:
惟氣之灝, 惟質之美。 公稟其全, 粹然不滓。 養之以恬, 積其和平。 如春之溫, 如玉之貞。 發爲文章, 煥乎風猷。 試之經濟, 學與才優。 色擧危朝, 超然機穽。 蔚際昌期, 終始自靖。 槪公平生, 稽古之力。 鼎席詞壇, 朝望咸屬。 盛名之下, 能全者難。 存順歿寧, 益見其完。 惟不大施, 施之於辭。 曷云不施? 雙璧在玆。
이수광李睟光의 비명(碑銘) 이정귀(李廷龜)
시호 : 문간(文簡)
우리 성상(聖上, 인조를 말함)이 즉위한 초기에 나이 많고 명철한 사람들을 불러들여 새로 기반을 마련하는 정사를 창현(彰顯)하였으니, 이때에 지봉(芝峰) 이공(李公, 이수광을 말함)이라는 사람이 있어 경기(京畿)의 시골에서 문을 닫아걸고 지냈는데 임금이 맨 먼저 그를 기용(起用)하였고 몇 해 만에 발탁하여 총재(冢宰, 이조 판서를 말함)를 삼았다. 장차 그를 재상(宰相)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어느 날 공이 공무를 마치고 물러 나오다가 갑자기 풍병(風病)에 걸려 병세가 매우 위독해지자 공의 작은 아들인 대사성(大司成) 이민구(李敏求)가 임금에게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의 형 이성구(李聖求)가 지금 전라 감사(全羅監司)를 맡고 있습니다. 청컨대 형의 벼슬을 체직해 집에 돌아와서 아비의 병을 구호(救護)하게 해주소서.” 하니, 임금이 안타깝게 여겨 허락하고 급히 선전관(宣傳官)을 내보내어 그 대임자를 기다릴 것 없이 즉시 서둘러 돌아오도록 하라고 유시(諭示)하게 하였다. 또 어의(御醫)에게 명하여 가서 진료하게 하면서 약이(藥餌)를 모두 내국(內局, 내의원(內醫院)을 말함)에서 내주도록 하였으나 한 달을 넘기더니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때가 무진년(戊辰年, 1628년 인조 6년) 섣달 26일이었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조회(朝會)를 중지하고 조문하는 부의(賻儀)와 치제(致祭)를 예법에 정해진 규정보다 후하게 내려주었으며, 그 이듬해 2월에 양주(楊州) 서산(西山)에 있는 선영(先塋) 자리에 장사지냈다.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諡號)를 논의하여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두 아들이 공신(功臣)에 봉해진 까닭에 영의정(領議政)을 추증(追贈)하고 겸대(兼帶)하는 직위는 모두 정해진 규정과 같게 해주었다.
행장(行狀)을 살펴보건대, 공은 휘(諱)가 수광(睟光)이요, 자(字)는 윤경(潤卿)이며, 지봉(芝峰)은 호(號)이다.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국성(國姓)이며, 태종 대왕(太宗大王)의 아들로서 경녕군(敬寧君)에 봉해지고 시호(諡號)가 제간공(齊簡公)인 이비(李裶)가 공의 5대조(代祖)이다. 공의 고조(高祖)는 이직(李稙)으로 모양군(牟陽君)이고, 증조(曾祖)는 이승손(李承孫)으로 선사군(仙槎君)이며, 조(祖)는 이유(李裕)로 하동군(河東君)이다. 대대로 왕실의 종친(宗親) 관적(貫籍)으로서 군(君)을 수봉(受封)하다가 공의 선고(先考)인 이희검(李希儉)에 이르러 비로소 과목(科目)을 통하여 현달하게 되었으며, 그 계부(季父)인 신당군(神堂君) 이정(李禎)이 아들이 없어서 공을 아들로 삼았는데 계부는 충성과 신의로써 양조(兩朝)를 섬기면서 중외(中外)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마지막으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내다가 졸(卒)하였으며 뒤에 공이 공신에 봉해진 까닭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공의 선비(先妣)는 문화 유씨(文化柳氏)로 정경 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고 현숙하고 얌전하여 사대부 같은 행실이 있었으며 가정(嘉靖) 계해년(癸亥年, 1563년 명종 18년)에 장단(長湍)의 관사(官舍)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어 단정하고 의젓한 태도가 범인(凡人)과는 달랐으므로 판서공(判書公, 이정(李禎)을 말함)이 각별히 공에게 사랑을 쏟았다. 일일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입만 열면 문장이 되었는데 어느 날 눈[雪]을 소재로 시를 지어보라고 하자 즉시 대답하기를, “뜰 앞에 달은 있으나 소나무는 그림자가 없고, 난간 너머에는 바람이 없어도 대나무는 소리가 나네.”라고 하였으므로, 그 시를 들은 자들이 깜짝 놀라면서 공을 신동(神童)이라고 하였다. 16세 때에 진사 초시(進士初試)에 합격하여 영예로운 소문이 더욱 성대하였고, 기묘년(己卯年, 1579년 선조 12년)에 판서공이 세상을 떠나자 예제(禮制)보다 한결 몹시 슬퍼하였으며, 상기(喪期)가 끝난 뒤에 또다시 초시에 합격하였다. 당시 율곡(栗谷, 이이(李珥))이 문병(文柄)을 주관하였는데 공이 지은 글을 보더니 매우 장려하고 칭찬하면서 나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할 사람이라고 허여(許與)하였다.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 15년)에 진사시(進士試)에 올랐고 을유년(乙酉年, 1585년 선조 18년)의 별시(別試)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었으며, 무자년(戊子年, 1588년 선조 21년)에 천거를 받아 사국(史局)에 들어갔다. 이어 봉교(奉敎)로부터 전례에 따라 전적(典籍)ㆍ전중(殿中)으로 승진하였고 경인년(庚寅年, 1590년 선조 23년)에 정언(正言),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의 좌랑(佐郞),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하였으며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차임(差任)되었다. 돌아와서는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와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임명되었고, 다시 정언(正言)으로 있다가 홍문관(弘文館)에 뽑혀 들어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으며,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옮겼다가 천거를 받아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임명되었다.
공은 이름난 벼슬에 달려들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백사(白沙) 이공(李公, 이항복(李恒福)을 말함)이 공과 깊이 서로 경복(敬服)하여 말하기를, “오늘날의 선비 중에 영예로운 진출에 마음을 끊었는데도 전랑(銓郞)이 된 자는 이모(李某, 이수광을 말함) 한 사람 뿐이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가 즉시 서용(敍用)되어 교리(校理)를 지냈고 이어 이조(吏曹)로 옮겼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왜구(倭寇)가 침입하여 중외(中外)가 크게 진동(震動)하였다. 공은 이때 관직이 파면되어 집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경상 방어사(慶尙防禦使) 조경(趙儆)이 공을 자벽(自辟)하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고 이어 공의 대부인(大夫人)이 집에 계신 점을 염려하여 공에게 말하기를, “공은 독자(獨子)이니 마땅히 종군(從軍)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하였다. 공은 생각하기를, “평소에 임금의 녹(祿)을 받아먹었으니 갚을 일을 도모해야 하거늘, 어찌 갑자기 국난이 일어났는데도 도리어 회피하려고 하겠는가?” 하고는, 즉시 대부인을 하직하고서 급히 말을 몰아 영외(嶺外)에 가서 방어사(防禦使)를 뒤따랐는데 전후(前後)로 왜구와 교전(交戰)할 때에 한번도 행진(行陣)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자 조정에서 공을 서용(敍用)하여 수찬(修撰)에 임명하였는데 한참 뒤에서야 임금의 대가(大駕)가 관서(關西)로 파천(播遷)하였고 대부인이 북쪽 땅으로 병란을 피하였다는 소식을 들었고 또 방어사가 호남(湖南)의 관군(官軍)과 더불어 합진(合陣)하였다가 크게 패전하였는데도 공은 오히려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 서있었다. 임금과 어버이는 길이 막히고 소식조차 끊겨 마음속이 이미 산란하였는데도 대의(大義)로써 판단하여 필마(匹馬)로 용만(龍灣)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임금에게 문후(問候)를 하니, 즉시 부교리(副校理)에 임명하였다. 그해 9월에 상소를 올려 노모(老母)를 찾아 생사(生死) 여부를 알아보고 싶다고 하자 임금께서 하교하기를, “왜변(倭變)이 일어난 뒤로 북관(北關) 지역에 성문(聲聞, 소식을 말함)이 통하지 않으니, 이모(李某, 이수광을 말함)를 사신(使臣)의 명호(名號)에 충원하여 나의 덕의(德義)를 선유(宣諭)하고 겸하여 본도(本道)의 사정(事情)을 살피도록 하라.” 하고는, 마침내 공을 선유 어사(宣諭御史)로 차임(差任)하였다. 이에 철령(鐵嶺)을 넘어 명천(明川)에 가서 대부인을 찾아뵐 수 있었다. 이때에 북로(北路) 지역이 간민(奸民)의 선동(煽動)과 속임수에 넘어가 앞다투어 적(賊)의 편을 들어 장리(長吏, 고을 수령을 말함)를 살해하고 성읍(城邑)을 점거하여 두 왕자(王子)를 인질로 붙잡아서 도로를 가로막았으므로 변고(變故)를 장차 예측할 수 없었는데, 공은 말을 달려 군중(軍中)에 들어가서 격문(檄文)을 지어 “나라에 순종하는 자는 복을 받게 되고 나라에 거역하는 자는 앙화(殃禍)를 입게 된다.”는 말로 타이르자, 그 말을 들은 자들이 감동하여 태도를 바꾸어 마음을 고쳐먹었고 의병(義兵)들이 더욱 분기(奮起)하여 일로(一路)가 크게 안정되었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 사행(使行)에서 돌아와 복명(復命)하자 지평(持平)ㆍ교리(校理)ㆍ헌납(獻納)에 세 번이나 임명하였고 필선(弼善)ㆍ장령(掌令)ㆍ집의(執義)를 역임하였으며 차자(箚子)를 올려 열 가지 폐단에 대하여 조목조목 진달하였다. 어가(御駕)를 따라 서울에 돌아오자 여러 가지 일들이 엉성하고 갈팡질팡하여 사령(辭令)이 밀려 쌓여 일이 지체되기 일쑤였는데 급한 판국에 이르러 신속하게 지어낸 것들은 대부분 공에게 힘입었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역적(逆賊) 송유진(宋儒眞)을 신문하는 국청(鞫廳)에 참여하여 내구마(內廐馬)를 하사받았으며, 승선(承宣, 승지(承旨)를 말함)에 결원이 나자 공도 함께 의망(擬望)하였으나 자급(資級)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등급이 뛰어올라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고, 승진하여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이르렀으며 항상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대하였다.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에는 우승지(右承旨)와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임명되었고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으며,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에 상기(喪期)가 끝나자 우승지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고 분호조(分戶曹)에 차임(差任)되어 호남(湖南)의 군량미를 관리하게 되었는데 그날 즉시 조정을 하직하자 임금께서 공이 병들고 허약해진 모습을 살피고서 특별히 명하여 내보내지 말라고 하였다. 이어 진위사(進慰使)로서 중국에 갔다가 무술년(戊戌年, 1598년 선조 31년)에 조정에 돌아와서 다섯 번이나 좌우 승지(左右承旨)를 지내고 세 번이나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참의(參議)를 지냈다.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에는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벼슬아치들이 서애(西涯) 유상(柳相, 유성룡(柳成龍))과 완평(完平) 이상(李相, 이원익(李元翼))을 비난하고 모함하여 서로 잇달아 자리에서 떠났으나 공은 병(病)을 진달하여 스스로 면직되었다. 이어 병조 참의(兵曹參議)ㆍ대사성(大司成)ㆍ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는데 뭇 소인배들이 온갖 계책을 부려 공을 뒤흔들면서 심지어 무명서(無名書)를 투서(投書)하기까지 하였으나 공은 그 일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 당시에 올린 상소에 “어진 재상이 조정을 떠나자 나라 일이 날로 잘못되어간다.”는 말이 있어서 마침내 체직되었다가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에 다시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고문주역(古文周易)≫을 고증하여 판각(板刻)하였고 또 유신(儒臣)과 더불어 ≪주역언해(周易諺解)≫를 함께 교정(校正)하였으므로 연이어 말을 하사하라는 어명이 있었다.
중국의 조사(詔使) 고천준(顧天峻)과 최정건(崔廷健)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공은 찬차 도사(撰差都司)의 영위사(迎慰使)에 뽑혔는데 도중에 병이 들어서 갈려 돌아왔고, 선조[宣廟]께서 계비(繼妃)를 책봉(冊封)할 때 예법을 간소하게 하여 생략한 것들이 많자 공이 차자(箚子)를 올려 묘현(廟見)할 때의 의절(儀節)을 시행하도록 요청하였다. 계묘년(癸卯年, 1603년 선조 36년)에 간장(諫長, 대사간(大司諫))ㆍ병조 참의(兵曹參議)ㆍ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어 ≪사기(史記)≫를 교정하여 찬집(纂輯)하였으며 또 내구마(內廐馬)를 하사받고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현임 재상이 무뢰(無賴)한 자질(子姪)을 갑자기 현로(顯路)에 통망(通望)하려고 하였으나 공이 줏대를 지키고 허락하지 않았으며, 여러 신하들이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하였으나 공만은 유독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불안한 마음이 쌓여 힘껏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원하여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었다가 병 때문에 파직되어 돌아왔고, 정미년(丁未年, 1607년 선조 40년)에 다시 서용(敍用)되어 홍주 목사(洪州牧使)가 되었다가 1년을 넘기고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경술년(庚戌年, 1610년 광해군 2년)에 선조를 부묘(祔廟)하는 예(禮)가 끝나자 도승지(都承旨)로서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승진하여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되었고, 연이어 대사간과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즉시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광해 세자(光海世子)의 복장(服章)이 내려오지 않아서 주청 부사(奏請副使)에 차임되었고 사행(使行)에서 돌아오자 품계가 가의 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여 대사성(大司成)ㆍ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 광해(光海)가 술사(術士) 이의신(李懿信)의 말을 채용하여 교하(交河)로 천도(遷都)하고자 재신(宰臣)들을 불러들여 잡다(雜多)하게 논의하도록 하니, 공은 당료(堂僚)들을 이끌고서 차자를 올려 그의 요망하고 허탄함을 논척(論斥)하였는데, 말은 비록 채용하지 않았으나 그 일은 마침내 중지되었다. 광해가 생모(生母)를 추숭(追崇)하려고 사신을 보내어 중국 조정에 책명(冊命)을 요청하였는데 공은 이에 차자를 올려 그것이 올바른 예법이 아니라고 극론(極論)하였으나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에는 두 번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배명(拜命)하지 않았다. 이 무렵에 이이첨(李爾瞻) 등이 사수(死囚)를 사주(使嗾)하여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을 말함)를 멸문(滅門)하고 선조(先朝) 때의 나이 많은 신하들을 옥에 가두는 등 거의 모조리 배척하여 몰아내었으며 장차 국모(國母,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말함)까지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려고 하였는데, 공은 의롭게 처신하여 그들에게 자취를 오염시키지 않고 산질(散秩)에 소요(逍遙)함으로써 4년 동안 화기(禍機)를 피하였다. 그 사이에 한번 대사성(大司成)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에 임명되었는데 억지로 일어나 한번 사은(謝恩)하고서 즉시 체직되었다. 병진년(丙辰年, 1616년 광해군 8년)에 이르러서야 외직으로 나가 순천 부사(順天府使)가 되었는데 몸소 솔선하여 가르치니 백성들도 기뻐하며 공의 교화를 따랐고 높다란 비(碑)를 세워 공의 선정(善政)을 송축(頌祝)하였다. 임기를 채우고 즉시 돌아와 경기(京畿)에 있는 촌장(村庄)에서 자취를 숨기고 지내면서 작은 방에 말없이 들어앉아 무더운 여름에도 문을 열지 않았으므로 집안사람들은 오직 공이 이따금 기침하는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이어 대사성과 분병조(分兵曹)의 참판(參判)과 조사(詔使)의 영위사(迎慰使)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광해가 공 및 최관(崔瓘), 정엽(鄭曄)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말하기를, “직질(職秩)이 높은 재신(宰臣)들이 지금 이렇게 임금이 욕(辱)을 겪는 날을 당하여 근기(近畿)에서 한가히 지내면서 신하로서의 도리에 힘을 바치려는 뜻이 없으니, 과연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공은 이에 상소를 올려 병이 들고 몸이 고달파서 임무를 감당할 수 없는 실정을 진달하였는데 임술년(壬戌年, 1622년 광해군 14년)에 광해가 또 공과 정엽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말하기를, “일절 출사(出仕)하지 않고 있으니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하고는, 모두 불러모으라고 영을 내리니 비국(備局)에서 계청(啓請)하여 대언(代言)으로 하여금 간절한 유시로 불러오도록 청원하고 관찰사(觀察使)에게도 글을 보내 어서 길을 떠나도록 권유하게 하였으므로 형세가 매우 돈박(敦迫)하여 화(禍)를 장차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였는데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서 잠시 서울에 갔다가 즉시 돌아왔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의 반정(反正) 초기에 도승지(都承旨)ㆍ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ㆍ대사간(大司諫), 이조(吏曹)와 공조(工曹)의 참판(參判)에 임명되었고,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에 이괄(李适)의 변란(變亂)이 일어나 임금께서 남쪽으로 피난을 가자 공은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였고 돌아와서는 대사간(大司諫)으로 옮겼으며 그 노고(勞苦)로 자헌 대부(資憲大夫)의 품계에 승진하였다. 이어 대비(大妃)의 옥책문(玉冊文)을 지은 공로로 특별히 정헌 대부(正憲大夫)에 승진하였고 네 번이나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좌우(左右) 참찬(參贊), 동지 경연 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이 무렵에 차자를 올려 실제에 힘쓰라는 12가지 조목을 진달하였는데 누누이 1만여 언(言)이나 되는 장문(長文)이었으므로 사람들이 중흥(中興)의 첫째로 꼽히는 봉사(封事)라고 하였고, 임금께서도 우대하는 비답을 내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진달한 말이 지언(至言)과 격론(格論)이 아닌 게 없으니 경의 애군(愛君) 우국(憂國)하는 충성을 가상히 여기며 감히 가슴에 새겨두고 잊지 않으며 힘써 실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는 노적(虜賊)이 갑자기 경기(京畿)와 황해도(黃海道)에 들이닥쳐 삼궁(三宮)이 강도(江都, 강화도를 말함)로 피난을 하였는데 세자(世子)가 남쪽 지방을 맡아 다스리라는 명을 받았고 임금께서 늙고 병든 조신(朝臣)들에게 명하여 편리한 대로 따라가라고 하였다. 이때 공의 큰아들이 정관(政官)으로서 이름이 분조(分朝)에 소속되어 있었고 둘째 아들이 부모 봉양을 위하여 바야흐로 임천(林川)을 맡아 다스리고 있었는데, 평소에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 대부분 공에게 남쪽으로 가라고 권하였으나 공은 의연(毅然)히 말하기를, “신하로서 목숨이 조금이라도 붙어 살아있으면 나라가 이러한 때에 어찌 감히 위험을 피하고 안전한 곳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대조(大朝)에 나아가니 공을 대사헌(大司憲)에 임명하였다. 이때 적이 물러가고 온갖 제도가 엉성하게 창시되었는데 후진(後進)들은 대부분 어지럽게 변경(變更)하려고만 하였으므로 공이 항상 말하기를, “천하는 본래 아무 일이 없는 법이다. 선왕(先王)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여 잘못된 것은 아직껏 한번도 없었다. 지금 누차 상란(喪亂)을 겪어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으니 마땅히 너그럽게 용서하는 태도를 견지하여 공평한 법으로 전승(傳承)해야 되지, 마구 흔들어 변개(變改)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환도(還都)한 뒤에 재차 대사헌(大司憲)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및 좌우(左右) 참찬(參贊)에 임명되었고, 무진년(戊辰年, 1628년 인조 6년)에는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었다.
공은 평소에 권병(權柄)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항상 성만(盛滿)함을 경계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세 번이나 사양을 해도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즉시 글을 올려 관직에서 영영 물러나 여생을 보내게 해달라고 청원한 것이 모두 다섯 번이나 되었는데 임금의 뜻은 더욱 공에게 쏠렸으므로 “나는 관직에 있다가 죽을 것이다.”고 말하고는, 마침내 병든 몸을 부축하여 맡은 직무에 취임하였다. 어진 사람들이 진출할 길을 열어주고 요행수를 바라는 자들의 문을 막았으며 재주를 지니고도 적체된 사람들을 소통시켜주고 사람을 평가할 때에는 특히 고적(考績)을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 공에게 청탁을 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조정의 벼슬자리가 일신(一新)되었고 여론(輿論)이 흡족하게 여겼다. 공은 겸대한 국(局)이 많지 않았으므로 동료들이 공이 정사(政事)에 나오지 않는 때를 엿보았다가 전례를 따라 공을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에 제수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공이 병이 많기 때문에 의약(醫藥) 치료에 편하게 해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은 연이어 차자를 올려 간절히 사양하여 체직되어서야 그만두었으니, 이것도 쇠락한 세상에서는 보기가 드문 일이었다. 병이 위독해진 때에도 자상한 말로 타이르기를, “중국말을 항상 곧장 해석하지 못하고 거듭 통역해서 말해줘야 알아들은 것이 아쉬웠다.”고 하였으며, 마땅히 받아야 되는 고직(雇直)도 집안사람들에게 받아내지 말라고 타일렀으며, 깨끗한 지조가 죽느냐 사느냐하는 위태로운 판국에서도 변하지 않은 것이 또 이러하였다.
공은 천분(天分)이 본디 뛰어나서 스승의 전승(傳承)을 기다리지 않고도 청명(淸明)함이 몸에 있었고 지기(志氣)가 정예(精詣)하여 장중(莊重)하고 온아(溫雅)하였으며 규각(圭角)을 드러내어 모나게 행동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책 보기를 좋아하여 제자 백가(諸子百家)에 대해서 그 종지(宗旨)를 환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으며 만년에는 모두 물리쳐 없애고 오로지 성학(聖學)만을 정밀히 연구하였다. 일찍이 학계(學誡)를 지어 스스로 탄식하기를, “한번 과거 공부에 잘못 떨어져서 마침내 문자(文字) 때문에 그릇되어 평생동안 헛되이 보냈다. 예전의 버릇을 씻어내어 공부를 향상시켜 보려고 생각하였으나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어서 성취를 기대하기가 어렵다.”고 하였으니, 이는 진덕 수업(進德修業)하는 일은 모름지기 이른 나이에 시작해야 된다는 점을 안 것이다. 무진년(戊辰年, 1628년 인조 6년) 원일(元日)에는 ‘자신잠(自新箴)’을 지어 말하기를, “사람이 진실로 새로움을 얻으면 비록 나이가 늙었어도 새로운 것이다. 늙은이가 어떻게 새로워지느냐 하면 배움으로써 능히 새로워지는 것이다.”고 하였는데, 마침내 이 해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사람들이 비로소 공이 평소에 자신을 성찰(省察)하는 공부를 늙었을 때까지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또 항상 말하기를, “간소함으로써 번거로움을 제어하고 고요함으로써 움직임을 제어한다[簡以制煩 靜以制動]는 여덟 글자를 종신토록 가슴에 품고 살아라.”고 하였다.
공은 논의가 올바르고 공평하여 남들과의 교유(交遊)를 일삼지 않았는데도 남들이 감히 공에게 표방(標榜)으로써 가하지 못하였다. 비록 세론(世論)이 사리에 어긋나게 전개되고 위기가 누차 일어나도 공은 스스로 문망(文罔, 법망(法網)을 말함) 너머에 초연하였으며, 방안에 책들을 쌓아두고 단정한 차림새로 꼿꼿하게 앉아서 종일토록 점잖게 지냈고 한번도 게으른 자세를 보인 적이 없었다. 비록 집안사람이나 어린 아이에게도 한번도 외설스러운 말을 한 적이 없었고 항상 말하기를, “사람이 세상을 살다보면 많고 적은 역경을 만나는 법인데 진실로 그에 흔들려버리면 거의 그 고통을 견뎌내기 어려우니, 오직 사물이 오는 대로 순응해야 되고 사물에 사역(使役)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본원(本源)이 맑아지고 작은 물결조차 일어나지 않으므로 외려(外慮)가 들어오지 않고 몽경(夢境)도 번거롭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공은 성품이 명철하고 치밀하여 재감(裁鑑)하는 능력이 정밀하고 주도하였으므로 사람의 사정(邪正)과 말의 시비(是非)와 사후(事後)의 성패(成敗) 등에 대하여 마치 촛불로 비추듯이 환하게 알아차리고 털끝만큼도 어긋나는 바가 없었다. 세업(世業)이 본래부터 청빈(淸貧)하였는데 현대부(賢大夫, 이수광의 부친을 말함)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 살림이 더욱 쇠락하였으나, 성품이 검소(儉素)하여 담담하게 무엇을 즐겨 먹거나 좋아하는 것이 없어서 밥을 먹을 때에는 두 가지의 고기를 겸하여 먹은 적이 없고 앉는 자리에는 제대로 쓸 만한 돗자리가 없었으며 옷은 못쓰게 된 솜이 드러나 보일 정도였는데도 공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지냈다. 의복을 아름답게 차려입은 사람이 있으면 무연(憮然)히 즐거워하지 않았으므로 그 사람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서 먼저 일어나 가버렸다. 홀로 된 누님을 마치 모친을 모시듯이 대하였고, 여러 조카들을 보살피고 양육함에 있어 은의(恩義)를 극진하게 갖추었으며, 친척이나 마을 사람으로서 곤궁하여 어디에 하소연할 곳이 없는 자들은 모두 공에게 찾아가 의지하였다.
공은 일생동안 한묵(翰墨)을 깊이 연구하여 스스로 즐겼는데, 문(文)은 육경(六經)에서 나오고 시(詩)는 성당(盛唐)을 배워 공이 지은 글은 충담(沖澹)하고 아려(雅麗)하여 스스로 일가(一家)의 말을 이루었다. 문로(門路)가 이미 정당하여 작자(作者)로서의 기풍을 깊이 터득하였으며 10년 동안 한직(閑職)에 밀려나 있을 때에 저술한 것이 매우 풍부하였다. 무릇 무료(無聊)하거나 불평한 경우를 당할 때이면 반드시 시를 지어 발현(發現)하였고, 세 번이나 중국에 사행(使行)하였는데 시를 읊고 쓰는 일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찍이 안남(安南)과 유구(琉球)의 사신들과 더불어 중국의 서울에서 만났는데 비록 거듭 통역(通譯)을 해도 서로의 의사가 통하지 못하였으나 같은 문자를 써서 서로 감정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공이 지은 것을 보고서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보물처럼 귀하게 간직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집집마다 외우고 읊었으며, 일본 사람으로서 포로가 된 사람에게 으쓱거리며 자랑하기를, “네가 조선에 이 지봉(李芝峰)이 있는 줄을 아느냐?” 하였으니, 공의 시가 해외(海外)에까지 찬상(讚賞)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공이 저술한 시문(詩文)은 32권(卷)이고 ≪채신잡록(采薪雜錄)≫ㆍ≪독서록해(讀書錄解)≫ㆍ≪경어잡편(警語雜編)≫이 각 1권이고, ≪병촉잡기(秉燭雜記)≫ㆍ≪잉설여편(剩說餘編)≫ㆍ≪승평지(昇平志)≫가 각 2권이고, ≪찬록군서(纂錄群書)≫가 5부(部) 25권이며, ≪지봉유설(芝峰類說)≫이 20권인데 집에 소장하고 있다.
공의 부인(夫人)은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도사(都事) 김대섭(金大涉)의 딸인데 현숙하고 얌전하여 남편을 모심에 있어 아내로서 어긋난 덕이 없었다. 부인은 정묘년(丁卯年, 1567년 명종 22년)에 태어나서 을묘년(乙卯年, 1615년 광해군 7년)에 졸(卒)하여 49세를 살았는데 공은 부인이 일찍 죽은 것을 애도하여 부인의 아름다운 언행(言行)을 추려 모아 스스로 묘지(墓誌)를 지어 묘소에 묻었으며 묘소는 서산(西山)에 있는데 공과 더불어 같은 언덕이다.
공은 2남 1녀를 길렀는데 장남인 이성구(李聖求)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이고 차남인 이민구(李敏求)는 우승지(右承旨)인데 모두 문장과 행실로써 세상의 명신(名臣)이 되었으며, 딸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권경(權儆)에게 시집갔다. 참판(參判, 이성구를 말함)은 사인(舍人) 권흔(權昕)의 딸을 아내로 맞아 5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이상규(李尙揆)이고 장녀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이일상(李一相)에게 시집갔으며 그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승지(承旨, 이민구를 말함)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윤휘(尹暉)의 딸을 아내로 맞아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이원규(李元揆)와 이중규(李重揆)이고 딸은 신승(申昇)에게 시집갔다. 권경(權儆)은 3남을 낳았는데 권제(權躋)ㆍ권적(權蹟)ㆍ권지(權趾)이다.
공을 장사지낸 뒤에 공의 두 아들이 공의 행장(行狀)을 갖고서 나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무릇 저희 선친과 더불어 교유한 분 중에 글을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입니다. 감히 한 마디 해주셔서 우리 선친을 불후(不朽)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아! 내가 공과 교제한 것이 장차 50년이나 되어 가는데 포의(布衣)로부터 경상(卿相)에 이르기까지 애당초 한결같은 마음을 견지하여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막역(莫逆)하게 사귀었으며, 항상 재주를 숨기고 드러내지 않으려고 힘써 명성을 가까이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재주를 쓸 때에도 마치 자기가 가진 것을 모조리 쏟아내려고 하지 않을 것처럼 하였고, 말을 할 때에도 마치 말을 입에서 낼 줄 모르는 것처럼 하였다. 공이 일을 할 때에 발현(發現)하고 시행하는 것을 보게 되어서는 그 재주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고 그 의(義)를 범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그 지조를 지킴은 빼앗지 못할 것이 있었다. 이는 진실로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이었는데 배움의 힘을 통하여 얻은 것이 특히 많았다. 죽어서 구원(九原)에 묻힌 사람은 다시 살아나기가 어려우니 나는 이제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까?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생각건대 기개는 깨끗하고 자질은 아름다우리. 공은 그 온전됨을 타고나서 순수하게 때가 묻지 않았네. (거기다 품성을) 안정으로 기르고 화평으로 쌓았으니 봄날같이 따뜻하고 옥(玉)처럼 정개(貞介)하여 발현(發現)하면 문장이 되어 풍교와 덕화를 빛내었고 경제(經濟)로 시험을 해보니 학문과 재주가 우월하였네. 위태로운 조정에서 낌새를 미리 알아채고 떠남으로써 화기(禍機)와 함정(陷穽)을 멀리 벗어났네. 훌륭하게 창성(昌盛)하는 시기를 만나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정(自靖)하였네. 공의 평생을 간추려 말하자면 옛일을 상고하는 역량이었네. 사단(詞壇)에 올라가 석권(席卷)하니, 조정의 인망이 모두 공에게 쏠리었네. 성명(盛名) 아래에 능히 온전한 자를 찾아보기 어려운데, 공은 살아서는 순종하고 죽어서는 편안해졌으니 그 완전함을 더욱 알 수가 있네. 크게 쓰이지는 못하였으나 사령(辭令)에 시행(施行)을 하였으니 어찌 쓰이지 않았다고 하겠는가? 쌍벽(雙璧, 두 아들을 말함)이 여기에 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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