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레지오 마리애
한국에서 레지오 마리애가 시작된 것은 1953년 5월 31일 현 하롤드 대주교(광주대교구장)의 지도로 목포시 산정동 본당에 ‘치명자의 모후’ 쁘레시디움과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 그리고 경동 본당에 ‘죄인의 의탁’ 쁘레시디움이 설립되었다.
이후 전국 각지로 쁘레시디움 단위로 하여 레지오가 번성하게 된다.
1955년 10월 9일에는 한국 최초의 꾸리아가 창단되었는데 산정동 3개 쁘레시디움과 경동 2개 쁘레시디움 등 5개의 쁘레시디움으로 '목포 매괴의 모후’꾸리아가 탄생되었다.
1956년 8월 7일에는 광주시 북동 본당 산하 8개 쁘레시디움으로 ‘중재자이신 마리아’ 꾸리아(CURIADIATRICS)가 설립되었으며 1956년 12월 6일에는 ‘중재자이신 마리아’ 꼬미씨움(COMITIUMMEDIATRICS)으로 승격되었다.
1957년 3월 3일 한국 최초의 소년 꾸리아인 '목포 천지의 모후 꾸리아'가 창설되었다. 이어서 1957년 6월 10일에는 ‘광주 바다의 별 꾸리아’가 설립되었다.
레지오 사도직의 소개가 잘 되어감으로 인하여 교구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모든 본당마다 앞을 다투어 쁘레시디움 설립이 가속화 되었다. 사제와 수도자의 손과 발의 역할을 하며 정성을 다하여 봉사하고 자신들의 성화에 소홀함이 없이 모범적인 신심생활을 하였다. 특히 광주대교구는 한국 본산지답게 레지오 사도직에 참여도가 높았으며 교본 규칙에 따라 전국을 지도하며 착실히 성장해 나감으로써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1957년 5월 7일에는 세계 본부인 꼰칠리움으로부터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지도적 역할을 광주 중재자이신 마리아 꼬미씨움에 의뢰한다는 승인서를 받게 되었다.
이듬해 1958년 7월에는 세계 본부인 꼰칠리움에서 한국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SENATUS MEDIATRICS․국가평의회)를 승인하였다.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가 도입된 지 5년 만에 전국적인 조직을 완료하여 국가평의회를 운영하게 된 것이다.
평신도의 특수 사도직은 레지오 마리애 신심단체가 전국의 모든 교회에 소개되자 사제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선행되는 가운데 서로 앞다투어 평신도들에게 권장하면서 쁘레시디움을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일들이 그러하듯이 레지오 마리애의 도입 과정도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다.
그 예를 들어본다면
첫째, 교본의 내용이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교본 규칙을 무시하고 적절한 편법으로 운영하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둘째, 지도자의 편리에 의해 조직되고 운영되다 보니 결코 바람직스런 방법이 아님을 늦게나마 발견하게 된 것이다.
어떤 평의회에서는 심지어 묵주기도를 5단이 아닌 1단만 바치자고 했던 경우가 있는가 하면 또한 교본에 조직, 운영에 따른 규칙이 자세히 나열되고 있지만 번역이 어렵게 되어 이해하는 데 곤란했던 일 등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있었으니,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기도하며 연구해서 원만히 운영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대군단의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이다.
본 신심단체의 고유한 특성은 첫째 자기자신의 성화요, 둘째는 하느님 말씀의 전파이다. 신심단체이기 때문에 두터운 신심으로 영성생활이 앞서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단원들이 증가됨에 따라 약간의 혼선이 있었으나, 지도자들이 정성어린 지도로 이제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 세나뚜스는 아일랜드 출신의 지도사제를 맞아 바로 더블린에서 하고 있는 그대로 정통성 있는 레지오를 전수받아 전국의 레지오 지도에 임함으로써 레지오 운영의 본보기가 되었다. 어느 지역에서나 레지오 지도가 잘못 되어가면 광주 세나뚜스에서 직접 방문하고 지도하며 서신으로 질문에 응답하는 것은 물론 매월 월보를 통하여 운영과 관리에 대하여 교육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전국 어느 곳에서나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광주 세나뚜스에 질의해 오고 있다.
서울 지역의 레지오는 1955년 8월 19일 광주대교구 하롤드 대주교의 주선으로 당시 서울 성의 중고등학교장으로 활동하였던 김성환 신부의 지도를 받아 명수대 본당에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이 설립된 후로 모든 본당에 확산되었다.
1956년 9월 25일 혜화동 본당에 치명자의 모후 뿌레시디움이 설립되었고, 1957년 1월 29일 혜화동 본당에 상지의 좌 꾸리아가 설립되었고, 1958년 6월 8일에는 꼬미씨움으로 승격되었으며, 이후 상지의 좌 꼬미씨움은 서울 꼬미씨움으로 지칭되었다. 1959년에는 명수대 본당에 평화의 모후 꾸리아가 설립되었다.
초대교회, 조상들의 강한 신심이 우리들의 심금을 울려주듯 초창기의 선배 단원들은 매우 열심히 레지오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매달 단원들은 매우 열심히 레지오의 대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매달 증설되는 쁘레시디움과 평의회는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거대한 군단을 형성할 수 있었다.
1960년 3월 30일에는 명동 대성당에 본부를 둔 무염시태 꼬미씨움이 설립되었고 같은 해 5월 8일에는 무염시태 꼬미씨움으로 승격시켜 수도권 레지오를 관리 운영해 오다가 날로 확장되는 레지오 조직의 관리를 위해 1974년 9월 25일 무염시태 꼬미씨움을 레지아로 승격시켰다.
한국 세나뚜스는 전국을 관리 운영하면서 이제까지 큰 고충은 없었으나 계속 레지오 조직이 확산됨에 따라 지역적인 관계 때문에 불편을 느끼게 되었다. 즉, 매월 세나뚜스 월례회를 개최하는데 각 교구 평의회에서는 광주까지 와서 종합보고를 해야하고 방문도 가야 하며 합동회의 때도 광주까지 와야하는 등 지리적인 여건관계로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고 레지오의 효율적인 관리 운영을 위해 서울 지역에 세나뚜스 설립을 서두르게 되어 마침내 세나뚜스로 승격시켜 줄 것을 꼰칠리움에 상신하여 1978년 12월 23일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로 인준을 받았다.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는 서울 지역의 인천, 수원, 춘천, 원주, 대전, 청주 교구의 레지오 조직의 관리 운영을 담당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어서 대구대교구의 대구의 의덕의거울레지아가 2003년 12월24일 세나뚜스로 승격이되어서 안동의 사도들의모후 레지아를 산하에 두고 있다 한국세나뚜스는 광주세나뚜스로 명칭이 변경이 되었다
이로써 광주 세나뚜스(구 한국세나뚜스)는 광주, 부산, 전주, 마산, 제주, 안동 교구의 레지오 관리와 운영만을 전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