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장. 무당산(武當山)의 대 접전(接戰)
"어이! 저기 좀 보게! 저 놈들 아닌가?"
흑유부가 자리한 계곡이 잘 바라보이는 숲 속에서 근 한 달 동안 망을 보며 무료함에 지친 두 사내 중 한 명이 옆에 있던 동료를 깨웠다. 꾸벅 꾸벅 졸고 있던 다른 한 명의 사내가 잠이 들깬 얼굴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저 놈들 말인가?"
"그래 저 놈들이 나온 방향이 저쪽 계곡인 것 같아!"
한 사내가 긴장된 얼굴로 동료를 쳐다보았다.
"확실한 건가?"
"그런 것 같네!"
"그렇다면 지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야! 하주명 장주님 말대로라면 저놈들은 극악 무도한 놈들이니 행여 들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저승행이야!"
숲 속 깊이 숨어서 망을 보던 두 명의 사내가 더욱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정말 쏜살같군!"
말을 탄 무리들이 지나가고 나자 두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이어 전서구 두 마리가 날아 오르고 사내들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 * * *
"카아- 정말 일품이야!"
이가송과 함께 흑수채로 달려온 철도정이 술병을 들이키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둘은 녹림 십팔채를 순회하며 전력을 향상시키는데 전념하다 갑자기 날아온 임무열의 소식을 받고 급히 흑수채로 달려온 것이다.
"우와- 능소빈 넌 정점 더 예뻐지는구나! 그러니 한 병만 더 다오!"
철도정이 연방 입맛을 다시며 능소빈을 쳐다보았다.
"언니 예뻐진 것 하고 술 한 병 더 주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요? 그리고 언니 예뻐진 것만 눈에 들어온다면 앞으로 술 얻어먹을 생각은 아예 버리세요!"
진소혜가 샐쭉한 얼굴로 철도정을 째려보았다.
"아이쿠 무슨 그런 심한 말씀을! 진소저야 말로 꽃 중의 꽃이요 선녀 중의 선녀지요! 더 이상 예쁠 수 없이 예뻐서 내가 잠깐 간과한 것이지요."
철도정이 혀가 닳도록 진소혜를 칭찬했다.
"더 이상 예뻐 질 수 없다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예뻐지는 데도 한계가 있나요?"
"예?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겁니까....?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철도정이 점점 멀어져 가는 술병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푸후-"
소혜가 웃음을 터뜨리고는 등 뒤에 숨겨둔 술병을 한 병 더 내밀었다.
"하이고- 정말 진소저 뿐이라니까!"
철도정이 얼른 술병을 받아들고 이가송의 잔에 한 잔 따르고는 나머지 술을 병 채 나발을 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이가송이 약간 진장한 얼굴로 진소혜에게 질문을 던졌다.
철도정 조대경 등과 함께 산채를 돌며 녹림도들에게 강궁과 군진합공을 연마시키던 중 느닷없이 사형 정사청이 어디론가 급히 떠났고 이번에는 임무열의 서신이 날아와 자신들을 흑수채로 불렀다.
"지금 그 문제로 회의를 하고 있으니 왠 만큼 목을 축였으면 들어가 봐!"
능소빈이 안채로 고개를 향했고 이가송과 철도정이 걸음을 옮겼다.
화천옥으로부터 혈영의 간자들에 대한 설명을 들은 이가송의 표정이 망연자실해졌다. 한영과 함께 화천옥, 형일비가 흑유부로 숨어들기 전에 산채를 순회하러 떠난 이가송, 철도정은 단리웅천에게서 얻은 혈영 간자들의 정보는 모르고 있었다.
"확실한 거야?"
"아직 물증은 없지만 거의 확실하다고 판단 돼!"
신도기문이 침착한 음성으로 답했다.
"야 이 자식아! 니가 무슨 신이라도 되는 거냐? 어떻게 네놈 판단만 믿고 사숙을 의심할 수 있단 말이냐!"
이가송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가송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신도기문, 화천옥등은 잠시 말을 멈추고 이가송의 감정이 누그러지기를 기다렸다.
"남궁우현으로부터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다음 달 초에 각 파 명숙들이 무당산 자락 한 곳에서 비밀 회동을 갖는다. 아마 회동 내용은 백도무림이 연합하여 제왕성을 치자는 것일 테고! 그런데 그 회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의 사숙인 손자겸, 그리고 화산의 낙월봉, 공동의 등평부, 철가장의 국상진 등이다! 우연 치고는 너무 공교롭지 않나?"
신도기문의 설명에 이가송이 아무 말 없이 탁자 앞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미동도 않았다.
"그리고 얼마 전에 은하전장 장주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혈영의 무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더군! 정확한 건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지금까지의 그들의 방향은 무당산 쪽이다!"
화천옥이 설명을 덧 붙였다
"국상진 이 쳐 죽일 놈이!"
철도정이 당장이라도 달려가 처단할 듯 씩씩거렸다.
"그 자들은 우리가 맡을 테니 이공자는 무당으로 가서 한중광 사부를 살피시오! 정사청이 없는 지금에서는 혹시라도 모를 사부의 안전은 이공자 몫이오!"
임무열이 조용히 말하자 이가송이 임무열을 쳐다보았다.
"대체 사청 사형은 어디로 간 것이오?"
임무열 역시 사청의 일은 알 수 없는 지라 천호에게 눈길을 돌렸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알게 될 것이오! 지금으로선 자신이 진 빚을 갚으려 갔다고만 알고 있으시오!"
천호가 이가송에게 정사청의 행적을 암시만 해 주었다.
"알겠습니다!"
이가송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빚을 지고는 한시도 살지 못하는 사형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는 쉬었다가 내일 아침 일찍 떠나도록 하시오! 뒷일은 걱정 말고!"
"지금 당장 떠나겠소!"
이가송이 성큼 일어서서 방문을 나섰다
"하여간 저놈의 성질하고는!"
모진성이 혀를 차며 멍하니 방문 쪽을 쳐다보았다. 어째 저놈 머릿속에는 자기 사부와 사형밖에 없는 것 같다!
"모진성 공자는 이가송, 철도정 공자가 빠진 자리를 메워 조대경 공자와 함께 산채를 순회하시오! 그들의 전력증강은 한시도 늦출 수 없는 일이오!"
"잘 알겠습니다. 부 두목!"
모진성이 외치듯 대답했고 임무열이 끙 하고 신음성을 흘렸다.
"빌어먹을! 다 죽은 송장이 다시 일어난 형국이로군!"
종이 호랑이가 된 제왕성을 쳐서 빼앗긴 자존심을 되찾자며 불같이 일어서던 백도무림의 외침은 단리웅천의 출현과 영웅탑의 붕괴로 인하여 급격히 사그러 들고 대신 신중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내분으로 인하여 제왕성의 힘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축소되었지만 수신오위의 건재와 남은 수호단 만으로도 일방적인 우위를 점칠 수 없었다. 그런데 추측할 수 없는 무공을 소유한 채 모습을 드러낸 단리웅천의 존재는 모든 상황을 원점으로 돌려놓고 말았다.
한때 천고의 기재로 만인의 관심을 집중시키다 언제부터인가 서서히 세인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간 제왕성 소성주의 갑작스런 등장은 많은 모사꾼들의 머리를 싸매게 하고 그들이 애써 세워 놓았던 구상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영웅탑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던가!
온 무림이 뜻을 모아 천년 세월이 흘러도 변함 없이 서 있도록 견고하기 짝이 없는 청옥석(靑玉石)으로 일 년에 걸쳐 깎아 만든 것이었다. 폭풍이 몰아치고 벼락이 때린다고 하여도 지금처럼 일시에 무너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영웅탑의 붕괴가 단 한 사람이 펼친 무공에 의한 것이라고 아무도 믿지 않았다. 모두들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왕성이 꾸민 일이라 추측했다. 그러나 여러 경로와 많은 목격자들을 통해서 확인된 정보는 그것이 사실로 판명되었다. 그리고 무림은 경악에 빠져들었다.
현 무림에 또 누가 있어 저런 무공을 펼칠 수 있을 것인가. 각 파의 명숙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정확히 같은 순간에 가격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런 일은 실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끓어오르는 원한만으로 서둘러 제왕성을 친다는 것은 일방적인 승리를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정말 기적같이 모든 정파무림이 하나같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며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인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면에 있어서는 백도라는 것이 흑도보다 훨씬 가소로웠다.
어찌어찌 해서 하나의 뜻으로 모이더라도 시시때때로 수십 수 백 가지의 이해 득실을 따지고 자신의 문파에 조금이라도 이로운 패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온갖 치졸한 수단을 부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그 때문에 손자겸 등은 무당산 자락의 한 사찰에서 열린 무림 명숙들의 비밀회동에서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흥분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장부가 뽑았던 칼을 슬그머니 집어넣고 꽁무니를 뺀다면 그것이 말이나 되는 일이오?"
"그렇소! 그 동안 제왕성에 굴복하여 치욕의 세월을 지낸 것이 만천하에 알려졌고 그 때문에 얼굴을 들고 대로를 활보하는 것조차 부끄러운 현실이오. 그런데 또 한 번 꼬리를 내린다면 내 어찌 강호인이라 할 수 있겠소! 그럴 바엔 차라리 강호를 떠나는 것이 나을 듯 싶소!"
화산의 낙월봉, 공동의 등평부 등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열변을 토했다.
"말씀이 지나치오. 꼬리를 내리다니! 우리가 무슨 강아지 새끼나 된단 말이오? 그리고 지금 모든 것을 백지로 돌리고 각기 자기 문파로 돌아가지는 얘기가 아니지 않소? 객관적으로 보아도 상황이 너무나 급변했고 그에 따라 계획을 수정하자는 것이오.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지요!"
곤륜의 장로중 한 사람이 침착하게 자신의 뜻을 폈다
"상황의 급변이라!"
손자겸이 나직히 읊조렸다
"크윽-"
"으흑-"
같이 모인 자리에서 비교적 공력이 낮은 각파 명숙의 호위 무사들이 귀를 막으며 쓰러졌다. 그리고 공력이 높은 명숙들은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음파에 급히 공력을 돋우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손 장문인?"
소림의 방장 주해대사가 노성을 터뜨렸다.
"실수였소! 여러 도우님들.... 내가 너무 답답한 마음에 잠시 탄식한 것이 이런 상태를 만들 줄 몰랐구료!"
손자겸이 무심한 얼굴로 쓰러진 사람들을 바라보며 실수라 말했지만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음파만으로 사람을 상할 수 있게 하려면 혼신의 공력을 불어넣어야 하고 그것은 실수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뜻을 피력하고 그것이 안 되면 또 다시 이런 식으로 살상도 마다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손자겸이 언제 저 정도의 공력을 쌓았던가?'
진탕된 기혈을 겨우 진정시키고 마음을 가다듬은 사람들의 뇌리를 스친 공통된 생각이었다. 자신의 사형 한중광에게 언제나 한 발짝 뒤떨어졌고 무당의 장문인 자리도 사형의 광인 행각으로 인해 어부지리로 얻게 된 것이 아니던가! 그런 그가 저런 가공할 공력을 내 비친 것에 대해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자질로 보나 사람됨으로 보나 손자겸은 저런 경지에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모두들 할 말을 잊고 손자겸만을 바라보았다.
손자겸 역시 그런 좌중의 심중을 헤아린 듯 눈을 부라리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으흑!'
그의 눈빛 역시 감당 할 수 없는 칼날이 되어 같이 모인 사람들의 망막을 파고들었다.
내심 비명을 지른 사람들이 다시 공력을 돋우며 손자겸의 안광에 대항해 갔지만 칼날은 여지없이 방패를 뚫었고 자신도 모르게 눈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후후후 정말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효과로군!'
득의에 찬 손자겸이 속으로 흉소를 터뜨렸다.
방금 전에 그가 시전한 무공은 최근에 율자춘이 보낸 책자 속에 있는 것이었다.
목소리나 눈빛 등에 순간적으로 기파를 증폭시키는 수법으로 실상은 공력이 약하더라도 순간적으로 격발시킨 기파로 인하여 가공할 효력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법에 당한 사람으로 하여금 상대가 엄청난 공력의 소유자로 단정하게 하는 것이다.
정종무학에서 웅후한 공력으로 시전하는 그런 종류의 무학이 아닌 악마의 잔재주 같은 눈속임의 무학으로 지금처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큰 움직임이 없는 상대에게 먹혀들 뿐 조금 떨어진 곳에서나 상대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면 아무 효력도 없는 무학이었다.
그것은 잠재능력이 격발된 잠마혈경을 만든 사람들이 펼친다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가공할 효력을 발휘할 무공이었지만 율자춘의 방식대로 풀이되고 손자겸 정도의 인물이 펼침으로써 좀 전과 같은 정도의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급격한 상황 변화라 하셨던가요?"
손자겸이 천천히 곤륜의 장로를 돌아보았다.
다시 한 번 칼날 같은 눈빛이 망막을 찔러올까 움찔한 곤륜의 장로가 눈길을 회피했다.
"그렇소. 그 누가 있어 일거에 영웅탑을 무너뜨릴 정도의 무학을 지닌 사람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이오?"
곤륜의 장로는 눈길을 회피하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인간은 석상이 아니지요!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날 죽여주시오 하고 석상처럼 서 있겠소? 그리고 제 아무리 무공수위가 높다 하더라도 한 명이 만인을 상대 할 수는 없는 일이오!"
율자춘이 만든 속임수를 펼쳐 기선을 제압한 손자겸이 계속해서 자신의 뜻을 펴 나갔다. 손자겸의 의견에 일말의 찬동도 않지만 그 앞에서 눈을 마주하고 당당히 맞설 수 없는 입장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어 손자겸의 의견에 끌려가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당치않소!"
누군가의 창노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한 사람을 상대하고자 만인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것이 아니오. 무당이 앞장서서 그를 상대 하고자 모든 문도를 동원하겠소? 그러면 우리도 뒤를 따르지요."
그 소리와 함께 손자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바로 이런 상황이 그가 바라는 상황이었다.
일사천리로 중론을 모았다가도 마지막 실행 단계에 가서는 언제나 서로에게 선두를 미루며 몸을 사리다 비 맞은 개똥처럼 풀어지는 게 백도의 작태였다.
지금도 똑 같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가장 많은 피를 흘려야 하는 곳에 네가 제일 먼저 가겠느냐? 그럴 수 없다면 나서서 큰 소리 치지 말고 중론에 따라라! 그런 말이었다.
"좋소! 우리 무당이 선두를 맡겠소!"
쿵-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인해 장내에는 벼락이 떨어진 듯한 소란이 일었다. 그 놀람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또 한 개의 벼락이 떨어졌다.
"무당에 선두에 선다면 우리 화산이 그 뒤를 맡겠소!"
낙월봉이 거침없이 말했다.
"그 다음은 우리 공동이 맡지요!"
공동의 대표로 나온 등평부도 가세했고 이어 철가장의 집사 국상진도 결전을 벌이자는 데 한 표를 던졌다.
상황을 결전 쪽으로 이끌고 가는 사람들 중 손자겸을 제외한 나머지 등평부, 낙월봉 등은 자신들 문파의 장문인이나 가주가 아니었다. 그들이 이 회동에 참가할 때는 어찌하던 결전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표하기로 하고 반대표를 던지고 무색해질 장문인들의 체면을 생각해서 자신들이 대표의 임무를 맡고 대신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계략이었고 오히려 자신들이 더 설치며 결전을 부추켰다. 그리고 일단 의견이 결정되면 그때는 각파의 장문인도, 가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평평하던 의견이 한쪽으로 힘의 균형이 무너지자 다른 문파들도 수수방관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과거의 치욕을 씻어내고자 무당이 선두로 나선다는데 소림과 곤륜, 아미가 꽁무니를 뺄 수가 없었고 화산이 동참하는 자리에 점창과 형산이 물러설 입장이 아니었다. 사대세가 역시 철가장의 동참으로 인해 자신들만 체면을 구길 수가 없었다.
"아미타불"
소림의 방장 주해대사가 불호를 읊조렸다.
과거 척마대전에서의 혈풍이 다시 불어오는 듯 했다.
그때도 백도 무림은 완벽한 준비 없이 이런 식으로 휩쓸려 제왕성의 뒤를 따르다 크나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 제왕성에게 치욕을 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런 부화뇌동은 막아야 하지만 한 번 무너진 둑은 가속도를 붙이며 급격히 무너져 내렸다.
"여러분들께서 그렇게 까지 나온다면 우리 곤륜도 빠질 수는 없는 일이지요!"
곤륜이 찬성하고 아미, 점창, 종남이 차례로 동참했다.
"하하 정말 잘 생각 하셨소 그럼 의견일치가 되었으니 거사일자를 잡는 것이 어떻겠소?"
손자겸이 희열에 찬 얼굴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래야 하겠지요!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소만!"
나직한 한 목소리에 손자겸이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혁이었다.
'역시 뭔가 있군!'
손자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남궁혁의 참석은 처음부터 의외였다. 제왕성과 백도무림의 치욕스런 비사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전 장문인들이나 가주들은 비록 그 일이 불가항력이었고 자기문파와 문도를 위해 홀로 치욕의 세월을 감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파의 비전을 제왕성에 넘겼다는 사실은 평생을 두고 근신해야하는 금제에 묶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궁혁 역시 그 계략의 그물에 걸려 근 십 년 동안 폐인처럼 지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천만 뜻밖으로 무림명숙들의 비밀 회동에 자신이 직접 모습을 나타냈다. 그것 외에도 남궁세가는 얼마 전에 혈영의 침략을 실패로 돌린 비밀스런 힘과 연관된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시종 남궁혁의 행동에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남궁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 한 마디 않고 눈만 지그시 감고 있었다.
언제쯤 그의 의중이 드러날까 궁금했는데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말씀 해 보시지요 남궁대협!"
손자겸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궁혁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런 자리를 만들어 일사천리로 제왕성과의 결전을 획책하는 것은 양패구상으로 백도무림의 힘을 꺾자는 것이 주 의도이지만 아울러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비밀의 힘을 끌어내는 목적도 있었다. 어쩌면 남궁혁 저자로 인해 그 보이지 않는 세력의 정체를 좀더 빨리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손자겸의 가슴이 고동쳤다.
"아무리 우리가 한 뜻으로 제왕성을 친다고 해도 일방적으로 승리할 수는 없는 게 아니겠소?"
남궁혁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손자겸을 바라보았다.
"새삼스럽게 그건 왜 묻는 것이오?"
손자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손 장문인 께서는 제왕성과의 결전 후 우리 정파무림의 피해는 어느 정도로 예상하시오?"
"정말 답답하시구려! 지금 우리가 피해정도를 따지자고 모인 것이 아니지 않소? 모두 하나가 되어 어떤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치욕을 씻자고 이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니오?"
손자겸이 언성을 높였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남궁혁이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얘기했고 그와 반대로 손자겸의 코에서는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뭐가 어떻다는 거요?"
"우리 백도무림이 아무리 혼연일체로 싸워 제왕성을 꺾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힘 역시 칠할 이상을 잃고 말 것이...."
쾅-
남궁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낙월봉이 탁자를 두드리며 고함을 쳤다.
"치욕의 사실을 몰랐으면 모르되 만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 된 이상 어떤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싸워야지요. 그래서 잃어버린 백도의 혼을 되살려야지요!"
낙월봉의 기세가 하도 거세고 원칙적으로는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기에 아무도 대꾸하지 못하고 묵묵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럼 묻겠소! 정파무림의 힘이 채 삼 할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혈영이 뒤통수를 친다면 어떻게 하겠소?"
남궁혁의 눈빛이 비수처럼 손자겸을 쏘아갔고 손자겸, 낙월봉, 등평부 등은 놀란 눈으로 벌떡 일어섰다.
"혀. 혈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남궁대협!"
결코 이곳에서 거론되어서는 안 될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혈영...?"
"무슨 말씀이시오?"
잠시 후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실내에 가득 찼다.
반면 손자겸등은 속으로는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지만 얼른 표정을 지우고 서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조금 더 두고 보아야 알겠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처음의 계획대로 밀고 나가자는 무언의 신호였다. 그 신호를 교환한 혈영의 간자들은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남궁혁을 바라보았다,
'저자는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혈영이란 이름은 자신들 조직에서도 수뇌급 소수만이 부르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 보다 더 하위의 인원들은 자신이 몸담은 조직이 혈영이란 것조차 알지 못한다.
'때로는 필요 없이 많이 아는 것이 명을 재촉할 수도 있는 법이지!'
손자겸의 눈빛에 서서히 살기가 어렸다.
"혈영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지 않았소?"
"무슨 얘긴지는 손 장문인이 더 잘 알지 않소!"
남궁혁의 반문에 손자겸의 눈빛이 번뜩였지만 다시 평정을 되찾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남궁대협! 무슨 농담을 그리 심하게 하시오! 그 동안 너무 댁에서만 계셔서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 아닌지요?"
"후후 그랬지요. 당신들이 천하 대란의 음모를 꾸미는 동안 날 그 음모에 희생되어 폐인이 되어 갔지."
낭궁혁의 얼굴에 비통함이 어렸다.
"남궁대협! 도대체 무슨 말씀이시오? 차분히 설명해 보시오! 혈영은 무엇이고 또 천하대란의 음모는 무엇이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던 사람들의 관심이 대번에 남궁혁에게로 모여졌다.
남궁혁의 표정이 비분으로 얼룩졌고 손자겸 등의 표정이 칼날처럼 차가워졌다.
"후후후!"
손자겸이 흉소를 터뜨렸다.
"이렇게 된 이상 살인멸구 할 수밖에!"
쨍-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손자겸이 칼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신호로 등평부, 국상진, 낙월봉 등도 칼을 뽑았다.
"대체 이게 무슨 짓들이오?"
계속된 돌발 상황에 완전히 얼이 빠진 사람들이 몸을 일으켰다.
각 파를 대신하여 나온 자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칼부림이 일어난다는 일은 있을 수도 없는 것이고 그런 일은 곧 무림 대란으로 이어지고 말 것이다
경악한 시선으로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등평부가 기합과 함께 남궁혁을 찔러갔다,
"죽엇-"
누구도 예상치 못한 신속하고 독랄한 칼이 남궁혁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허억-"
놀람의 비명성이 여러 사람들에게서 터져 나왔고 낙월봉의 칼이 남궁혁의 가슴을 뚫으려는 찰나 바닥을 걷어찬 남궁혁이 앉아있던 의자와 함께 주르륵 뒤로 물러났다. 실로 눈 깜짝할 새 벌어진 공격이었고 신속한 대응이었다.
"모두 밖으로 피하시오! 저들은 혈영의 간자들이오!"
밀려나던 자세 그대로 철판교(鐵板橋)의 수법으로 상체를 눕혀 낙월봉의 칼을 뒤로 흘린 남궁혁이 반탄력으로 튀어 오르며 좌중을 향해 소리쳤다. 그 소리를 신호로 낙월봉, 국상진 등이 모인 사람 모두를 죽이겠다는 무차별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크윽-"
누군가가 답답한 음성을 터뜨렸고 그와 동시에 사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밖으로 급히 몸을 날렸다.
"그래봤자 독 안에 든 쥐지!"
손자겸이 느긋이 중얼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게 무슨 짓이오! 손장문인?"
사찰 밖으로 뛰어나온 사람들이 주변 숲 속을 가득 메운 포위망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신형을 돌려 천천히 걸어 나오는 손자겸 일행을 보고 소리쳤다.
언제 그렇게 많은 인원들이 다가들었는지 사찰 주변 사방팔방으로 물샐 틈 없는 포위망이 쳐져 있었다. 그 포위망을 본 사람들은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그들의 신위에 음 하고 무거운 신음을 토했다.
어림잡아 수 십 명이 넘는 인원이었다.
그 많은 인원들이 무림의 절정 고수들의 모임인 무림명숙 비밀회동장소를 아무런 기색 없이 둘러쌌다. 그리고 숲의 일부인양 숲에 동화되어 서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남궁혁과 등평부 등의 느닷없는 행동에 뭔가 엄청난 음모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온통 흉중에 가득한 채 몸을 날린 곳에 또 다시 맞닥뜨린 이런 상황은 아무리 각 문파를 대표하는 명숙들이라 할지라도 큰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결국 정체를 드러냈군! 혈영의 간자!"
남궁혁이 독기 오른 표정으로 손자겸을 바라보았다.
이곳으로 오기 전 아들 낭궁우현을 통해 혈영의 간자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너무도 엄청나고 놀라운 사실들에 한참동안 말을 잃었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번 회동에서 어떻게든 혼란을 야기할 것이고 자신은 그것을 방해함과 동시에 혈영의 간자들을 밖으로 드러나게 할 심산이었다. 자신의 뜻대로 혈영의 간자들을 스스로 드러나게 했지만 저들이 자신들 모두를 죽일 암계까지 꾸미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대체 인간의 욕심은 어디가 그 끝이란 말인가!'
남궁혁이 내심 치를 떨었다
무당의 장문인인 손자겸, 공동의 호법 등평부, 화산의 장로인 낙월봉, 철가장의 집사 국상진.... 모두들 오를 만큼 오른 사람들이었고 이룰 만큼 이룬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현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배반할 만큼 탐욕을 느끼게 하는 것이 또 있단 말인가!
천하제일인의 자리!
그것이 도대체 어디에 소용되는 것이기에 저렇게 광분하는 것일까?
남궁혁이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손자겸 등을 쳐다보던 눈길을 허공으로 돌렸다.
"어떻게 혈영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한날 한시에 제삿밥을 얻어먹게 생겼군! 웬만하면 곱게 보내 줄 수도 있었는데...."
등평부가 포위망에 갇혀 당황해 하고 있는 사람들을 시체를 쳐다보듯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제왕성과의 전쟁을 획책하고 그것이 무위로 돌아갔을 때는 계곡 속에 숨겨둔 혈영의 척살대를 불러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살해하고 그것을 제왕성의 소행으로 온 무림에 소문을 퍼뜨려 천하대란을 일으키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되도록 이면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고 회동에서 의견일치를 이루고 마무리하려는 순간 남궁혁이 모든 것을 뒤집어 엎어 버렸다. 저자가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젠 단 한 사람도 살려 보낼 수 없다!
"잘 가시오!"
등평부가 서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와 함께 석상처럼 서 있던 포위망이 서서히 좁혀졌다.
"차앗-!"
한소리 외침과 함께 포위망을 좁혀오던 사내 중 하나가 풀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바위라도 부술 듯 점창의 장로인 태성목(台星目)의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감히!"
태성목이 수염을 부르르 떨며 들고 있던 검을 마주해 갔다.
떨어져 내리던 사내의 칼과 태성목의 칼이 마주하는 순간 사내의 칼이 어지럽게 변화를 일으켰다.
"어헉-"
태성목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저렇게 허공으로 도약하여 수직으로 내리찍는 칼은 중검(重劍)일 수밖에 없었다. 떨어져 내리는 힘과 자신의 내력을 고스란히 칼에 모아 단번에 상대를 제압하려는 무지막지한 검격이었다.
그런 칼에는 변초나 기교가 섞일 수 없었다. 허공에 뜬 상태로 변초를 구사하다가는 자칫 중심을 잃고 나뒹굴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결과를 맞이한다.
그러기에 태성목은 떨어져 내리는 칼을 무겁게 쳐 올리며 내력으로 부딪혀 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온 힘을 집중하는 찰나 사내의 칼은 거짓말처럼 방향을 바꾸고 가슴을 향해 찔러 들었다.
가까스로 상체를 틀어 몸을 피했으나 가슴에서 옆구리까지의 옷이 길게 잘려져 있었다.
"이럴 수가!"
태성목의 입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울렸다.
육십 평생을 칼로 살아온 자신이 이름한번 듣지 못한 젊은이의 단 한칼에 이런 낭패를 당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비록 내공이야 어떠하던 방금 마주한 젊은이의 칼은 검초만으로 따진다면 경악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칼을 휘두를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무서운 일이다!'
방금 전 칼을 나눈 저 젊은이만이 저런 칼을 휘두른다면 큰 문제가 아니겠지만 같이 서 있는 무리들 전원이 저런 수준이라면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다. 당장은 자신이나 여기 모인 사람들이 살아 나갈 수 없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무림의 안위가 심히 걱정되는 것이다.
"하앗-"
태성목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즈음 뒤쪽 한 곳에서 큰 기합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수평으로 누인 칼을 바람을 가르듯이 휘둘러왔다.
"타-"
곤륜의 대표로 온 장로중 한 사람인 종사림(宗司林)이 긴 지팡이를 휘둘렀다. 비록 밋밋하고 별 특징 없어 보이는 검은색 지팡이였지만 그것은 종사림의 독문병기인 묵철장(墨鐵杖)이었고 그 묵철장으로 뿌려대는 곤륜의 용봉대구식(龍鳳大九式)은 가히 일백 마두를 호령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저런 애송이의 검 따위는 묵철장에 마주친다면 손아귀가 찢겨지며 튕겨 나갈 것이다.
종사림이 오연한 표정으로 달려드는 사내의 칼을 쳐 올리고 허리를 쓸어버리려는 순간 사내의 칼은 마치 자석이라도 된 듯 종사림의 묵철장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용봉대구식의 투로를 간파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하여 찌르면 그 투로를 미리 알고 끌어당기고 당기면 같이 밀어 마치 자석에 붙은 것처럼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당황한 종사림의 묵철장이 투로를 벗어나는 순간 사내의 칼이 순식간에 종사림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고 종사림이 크게 뒤로 물러나는 치욕을 감수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종사림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포위한 사내들을 둘러보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파의 비전절기들이 모두 제왕성에 넘어 갔다는 사실을 알고는 언젠가 제왕성의 무리들 손에 낭패를 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염려를 품고 있었지만 어찌 이 자들에게서 그 염려가 현실로 나타났단 말인가!
"하앗!"
길게 놀랄 여유도 없이 사내의 공격이 다시 이어졌고 종사림의 묵철장이 바쁘게 움직였지만 용봉대구식의 투로를 간파당한 묵철장의 공격은 그물에 갇힌 물고기의 안타까운 몸부림과 같았다.
"네 이놈들!"
소림의 주해대사가 노성을 지르며 장력을 뻗어냈다.
쿠우웅 하는 장중한 울림과 함께 금강대력장이 무섭게 뻗어 나갔고 종사림과 대적하던 사내가 잠시 멈칫하다 교묘한 신법으로 몸을 빼냈다. 그와 동시에 측면에 있던 사내가 주해 대사를 공격해 들어갔다.
쌍장을 거두어들인 주해 대사가 소림권의 백미인 달마십팔수로 마주해갔다. 바위라도 부술 것 같은 달마십팔수가 무섭게 사내를 공격하여 갔지만 사내의 괴이한 보법은 주해대사의 권격을 번번이 무위로 돌렸다.
"어떻게 이런....!"
주해대사 역시 앞서 대결한 태성목, 종사림들과 같은 절망감을 맛보고 있었다.
절망과 경악으로 넋이 나간 주해대사의 머릿속에 사숙이었던 전 장문인의 절망 가득 담긴 눈빛이 떠올랐다.
죽는 순간까지 결코 입을 열지 않았지만 자신을 바라보던 그 절망적이고 한스런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는지 이제야 뇌리를 쳐왔다.
"이. 이놈들!"
꽉 움켜진 주해대사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꽉 다문 입 속에서는 뿌드득 뿌드득 이빨을 가는 소리가 쉼 없이 흘러 나왔다.
"고정하십시오. 대사님!"
종남파의 장문인인 강문옥(康文玉)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주해대사를 바라보았지만 이성을 잃은 듯한 주해대사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툭-
소림 장문인인 주해대사의 그런 낭패한 모습을 더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무림명숙들 누군가의 호위무사로 동행한 젊은 사내 하나가 쓰고 있던 방갓을 천천히 벗어 던졌다. 그리고 도갑(刀甲)에서 도를 빼내려는 순간 남궁혁이 슬쩍 손을 들어 그 젊은 사내를 제지했다.
<아직은... 아직은 아니구나! 조금만 더 기다리거라>
남궁혁이 호위무사로 가장하고 같이 온 남궁우현에게 전음을 보냈다. 남궁혁 자신 역시 새파란 애송이들에게 치욕을 당하고 있는 명숙들을 더 두고 보기 힘들어 지금 당장이라도 아들 우현과 함께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아직은 좀더 저들의 무서움을 명숙들이 체험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허울만 좋은 정파의 오만함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똑똑히 느낄 것이다.
그것이 앞으로 백도무림을 살리는 길이고 다행히 여기서 살아 나간다면 악마의 무공을 익힌 아들 우현에게 혹시라도 닥칠지도 모르는 정파의 무조건적 척마당위론을 미연에 막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무리 아들 남궁우현의 검이 무섭다 할지라도 수 십 명이 넘는 저놈들을 모두 상대하기란 역부족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무지막지한 검을 휘둘러 저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것보다는 우선 명숙들의 힘으로 최대한 버티다가 서로의 전열이 흐트러지고 혼전을 벌일 때 남궁우현이 뛰어 든다면 조금이라도 생의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스륵-
남궁우현이 빼내던 칼을 집어넣고는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포위망을 좁혀오던 사내들이 일제히 도약하며 회동에 참석한 백도무림의 명숙들을 향해 칼을 휘둘러왔다.
쨍- 쨍강. 펑-
순식간에 아수라장의 격전이 펼쳐졌고 제일 먼저 명숙들과 대동한 호위무사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휘청거렸다.
"크윽-"
다시 어디에선가 답답한 음성이 터졌고 그와 함께 서로 뒤엉켜 격렬한 혼전이 이루어졌다.
쌔애액-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한 사내의 검을 막기에 급급한 종남파 강문옥의 심장을 향해 다른 한 명의 칼이 섬뜩한 빛을 뿌리며 쑤셔드는 순간 남궁우현의 무지막지한 도가 귀곡성을 울렸다.
"크아아악-"
강문옥의 심장으로 검을 쑤셔 넣던 사내의 팔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 올랐고 같이 공격하는 사내의 목도 함께 떨어졌다. 저승문턱 일보 직전에서 생의 영역으로 되돌아온 강문옥이 놀란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목숨을 구한 젊은이를 바라보는 찰나 젊은이는 온통 피를 뒤집어쓴 채 야수처럼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크악-"
다시 처절한 비명이 울리며 점창의 장문인 태성목의 어깨에 상처를 입힌 사내의 허리가 양단되며 무너져 내렸다.
휘이익-
또 한번의 귀곡성이 울리며 허리가 양단되어 무너져 내리던 사내의 목이 다시 허공으로 떠오르며 순식간에 세 토막의 처참한 인육이 동시에 바닥을 굴렀다.
"허억-"
너무나도 극악한 칼부림에 각파 명숙들을 공격하던 사내들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어허! 저, 저런"
손자겸등이 고함을 질렀고 거의 비슷한 경악성이 정파 명숙들 사이에서도 터져 나왔다.
자신들을 포위하고 목숨을 노리던 혈영의 무리라던 젊은이들의 칼이 이제껏 보지 못했던 괴이하고 사악한 것이라면 자신들 속에서 뛰쳐나와 목숨을 구한 저 젊은이의 칼은 극악하다 할 만큼 잔인했다.
한 번의 칼부림으로 좀남의 강문옥을 공격하던 사내의 한 팔과 다른 사내의 목을 동시에 날리고 또 한 번의 칼부림으로 점창의 태성목을 공격하던 사내의 허리와 목을 처참하게 잘라버렸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잔혹한 광경에 잠시 넋이 나간 사람들이 이 상황을 만든 장본인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온통 피보라를 뒤집어 쓴 사내의 진면목을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다만 피 철갑을 한 얼굴에서 번쩍하고 뿜어져 나오는 안광이 악마의 그것인양 이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