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16일 숲속작은책방에서 있었던 이수지 작가 강연 내용을 간추려 정리한 것 제 2편.
나는 언제나 책을 만들 때 책이라는 판형과 재질, 구조를 함께 생각하며 새로운 실험을 고민한다. 그게 바로 종이책이 갖는, 종이책을 만드는 이의 특권이 아닐까.
"이 작은 책을 펼쳐 봐" - 꿈이 꿈을 부르는 세계
이 책에 삽화를 의뢰하면서 편집자는 내게 "당신이 딱 좋아할 책"이라고 말했다. 책을 열면 또 책이 나오고 또 책이 나오고, 종이와 책에 대한 나의 상상력을 실험해볼 수 있는 책. 그러나 작업 과정은 쉽지 않아서 글 작가의 처음 기획과 달리 내용도 완전히 달라졌고 무엇보다 책 속에 사람이 등장하는 게 좋지 않아 등장인물을 모두 동물로 바꾸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책이라는 게 펼치면 꿈꾸는 세계가 열리고, 책을 닫으면 현실로 되돌아오는 무대와 같은 장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환상 속 꿈의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꿈속으로 또 다시 꿈속으로, 계속해서 빠져드는 공간이다. 앨리스가 토끼굴로 들어간 것 자체가 꿈이지만, 그 꿈 속에서 앨리스는 또 꿈을 꾸는 것이다. 마치 영화 <인셉션>처럼 꿈이 꿈을 부르고 더 깊은 꿈으로 들어가는 그런 세상을 이 책 속에서 구현하려고 했다.
내 모든 책에서 반복적으로 구현되는 세상이기도 하다.
<여름이 온다>를 보면 책의 가장 마지막 장면, 모든 연주가 끝나고 무대 위에 책속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올라가 함께 인사를 한다. 자세히 보면 객석에 올라가지 않은 한 사람이 있다. 그게 바로 감독이자, 작가이자 바로 나다. 나는 무대 위에 올라가지 않는다. 무대 뒤에서 혹은 책 바깥에서 나의 인물들을 조종하고 감독하고 연출한다.
"우리 다시 언젠가 꼭" "선" - 고정관념과 문화 다양성
이 책은 코로나 이전에 작업 의뢰를 받았다. 일정이 비면 작업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코로나 시기에 이 책을 작업하게 되었다. 그래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코로나와 관련된 책이 되어버렸다. 코로나 시기 때 우리들은 가족도 친구도 만나지 못하고 고립되어 살았다. 영상통화라든가 줌이라든가 하는 신기술의 도움을 받아 그리움을 달래는 시기였다.
이 책에서 나는 종이에 구멍을 뚫었다. 앞에서 판형을 이용해보기도 하고, 제본선을 활용하기도 하고, 병풍책도 만들어보았으니 이번엔 구멍을 한 번 뚫어보았다. 할머니와 손주는 멀리 두 세계에 떨어져 있다. 그것을 들여다보게 하는 장치로 구멍을 뚫어 모니터 효과도 내보았다.
나는 책에서 굳이 성별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런데 책이 나오고 "할머니와 손녀의 애틋한 그리움"이라고 홍보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떤 독자는 이 아이를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읽는 이에 따라 소년도 소녀도 공감할 수 있는 무성적 존재를 생각했다. 책을 만들면서 최근엔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여름이 온다>에서도 어린이들의 피부색이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것 역시 굳이 인종이나 성별을 의식해서라기 보다는 어린이들의 세계는 그만큼 다채롭고 다양하다고 생각했고 그걸 표현하고 싶었다. 어른들은 가면을 쓰고 살기 때문에 자기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솔직하게 자기를 드러내고, 그 솔직한 내면의 다채로움을 색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책에 뚱뚱한 아이도 등장시켜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런데 오히려 그 뚱뚱하게 그려진 표현이 더 그 아이를 두드러지거나 차별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시도를 해보진 못했다. 이런 식으로 문화 다양성에 대해 많이 의식하고 있다.
<선>을 작업할 때 일이다. 흔히 겨울에는 빨강 털모자를 쓰는 게 일반적이어서 내 주인공에게 특징을 주고 싶어 모자를 핑크로 그려보았다. 그랬더니 미국 편집자가 단호하게 빨강으로 바꾸라고 했다. 핑크 모자를 씌우는 순간 이 책은 여자아이들의 책이 되고, 그런 순간 남자 아이들은 이 책을 손에 집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파랑과 빨강, 남자색 여자색이라는 편견을 깨야 하고 그런 노력을 해야 하지만 이미 사회에 보편화되어있는 고정관념은, 나의 핑크 모자를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보기보다는 소녀의 이야기로 볼 것이라는 견해였다. 빨강 모자는 소년과 소녀 모두의 것이기에 중성적 표현이 된다. 편집자 의견에 동의했고 빨강모자 아이로 책이 나오게 되었다.
"브루노 무나리"
내 그림책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이탈리아 작가 브루노 무나리다.
"1907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화가 겸 조각가로 출발하여 산업 디자이너, 그래픽 디자이너, 그림책 작가, 조형작가, 영상작가, 조각가, 시인, 미술교육가로 활동했다. 후기 미래파에 참가하여 회화나 조각을 제작했으며 1956년 다네제와 협업을 시작하면서 디자이너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62년엔 황금 컴퍼스 심사위원단으로 활약했으며 1967년 하버드 대학 카펜터예술센터에서 시각 커뮤니케이션 강좌를 담당했다. 1977년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워크숍을 기획하고 개최했다. 그의 디자인과 저술 활동, 교육 업적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1989년 제노바 대학에서 건축학 명예학위를 수여했으며, 뉴욕의 과학아카데미로부터 명예상을, 일본 디자인진흥재단으로부터 공로상을 받았다. 1974년에는 아동도서 작가에게 주는 최고 권위의 상인 안데르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 『예술로서의 디자인』(1966), 『알기 쉬운 코드』(1971), 『삼각형의 발견』(1976), 『사각형의 발견』(1978) 등이 있다. 피카소가 ‘현대판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칭했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긴 브루노 무나리는 1998년 9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인터넷 서점 작가 소개 인용)
그의 책 <안개 속의 서커스>를 보고 너무 놀랐다. 종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책이라는 평면적인 매체를 만드는데 이토록 다양하고 창의적인 작업을 할 수 있다니 커다란 감동이었고 나도 이렇게 머릿 속 상상을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 책으로 구현해보고 싶었다. 이 책처럼 트레싱지를 사용한다든가 하는....그러나 제작환경은 여전히 어렵고 아직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
"바캉스 프로젝트"
나는 '흰토끼프레스'라는 출판등록을 갖고 있다. 몇 해 전부터 동료 작가들과 프로젝트 팀을 꾸려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게 '바캉스'다. 이름을 바캉스라고 지은 건, 복잡한 상업 출판의 세계에서 벗어나 좀 쉬면서 휴식같고 놀이같고 내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나만의 작업들을 제멋대로 한 번 해보자는 뜻이었다.
일반 상업출판보다 출판의 질은 좀 떨어질 수 있지만, 자유롭게 상상을 풀어내고 독립출판처럼 엮어서 우리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선보일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다. 매년 여름이면 전시도 열고 판매도 하고 있다. 올해로 시즌4까지 왔는데 올해 바캉스 프로젝트의 주제는 "호러"였다. 자기가 알고 있는 가장 무서운 이야기를 한 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열녀전>을 소재로 작품을 했다. 열녀가 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아니 죽음을 강요당한 여인들의 잔혹한 이야기만큼 공포스러운 게 또 있을까.
두 시간 반에 걸친 강연을 옮기려니 분량이 길었다. 이수지 작가가 한겨레신문 칼럼에 썼던 글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이미지는 환영인가? 무대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인가? 책은 그저 글을 담는 그릇인가? 그림책은 그림+책인가? 책은 왜 네모난가? 책을 펼쳤을 때 움푹 패는 한가운데 제본선의 존재를 독자는 왜 모른 척하는가? 책의 형식이 서사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 글이 그림이 될 수 있는가? 그림만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글 없는 그림책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런 그림책도 출판이 될까? 이런 그림책을 만들며 작가로 먹고살 수 있을까? 나는, 창작자로 살아갈 수 있을까? 첫 책은 모든 질문으로 터져나갈 듯하다. 날것의 질문과 거친 대답. 하지만 가능한 모든 대답도 역시 첫 책에 들어 있다. 답해보려고 애쓰지 않으면 다음 질문도 생겨나지 않는다."(한겨레 칼럼 중에서)
올해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출간 20주년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지난 20년은 바로 위에서 질문했던 그의 첫번째 물음들에 대한 답으로 가득차있다. 이 책은 그의 창작의 원천이며 그가 하고 싶었던 모든 것들의 총합이다. 20년 동안의 수많은 작업들이 탯줄처럼 이 책에 연결되어 있다.
첫 책을 출간하고 20년 만에 그는 아동문학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안데르센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의 책은 세계 수 십 개 국가에서 판매되고 있으며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결코 '한국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업은 현대 그림책과 아동문학의 태생지라고 할 수 있는 영국문학, 그리고 서양미술의 토대 위에 서 있다. 가장 보편적인 정서와 감성으로, 그림책이라는 장르가 갖고 있는 원형의 특질들로 그는 세계 시장에 인정받았다. 이것이 이수지 작가의 독특함이며 한국 그림책의 세계관을 확장해낸 커다란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서사보다는 종이책이 갖고 있는 특질과 물성에 주목하고 책의 경계를 확장하고 디지털 시대 종이책의 의미를 섬세하게 구현해내는 그의 작업은 지금 2022년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었는지 모른다. 20년 동안 줄기차게 이어온 그의 실험은 곧 '이수지의 작가정신'이 되었고 그 작업의 노력과 성과는 이 상을 받기에 매우 충분한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해본다.
우리나라에 얼른 "이수지 뮤지엄"이 생기길 기대해본다.
그 어떤 작가보다 풍부하고 창의적이며 화려한 그림책 미술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