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꽂이 떨어지는 사월 11일 오후, 정민지 회원과 만났다.
좁고 시끄러울 수 있는 카페보다는 탁 트인 캠퍼스가 좋을 것 같아 한양대 캠퍼스를 인터뷰 장소로 제안하였다. 소리를 잘 담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예비 법조인 정민지 회원의 야망을 이야기하기에 맞춤이었다.
정민지 회원은 울림 회원인 김화숙, 정하덕의 세 남매 중 둘째이자 외동딸이다. 화숙이 진행하는 페미니즘 토론 모임에 하덕과 함께 참여하고 있으며 짱아도 2년차 회원이다.
그 모임의 구성원들은 화숙의 제안으로 평어로 토론하며 오프라인에서도 나이를 초월해 평어로 만나고 있다. 평어는 페미니스트 화숙이 세대와 성별을 뛰어넘는 민주적 화법으로 제안하여 시작되었다. 토론할 때 민지는 다른 회원들처럼 부모님을 '화숙과 '하덕'이라 부른다.
이 날, 민지와 평어로 인터뷰를 진행하였고, 그 분위기를 담아 그대로 정리하였으니, 울림 회원들도 짱아와 민지의 평어 대화를 즐겨주기 바란다.
솔직히 밝히자면 짱아는 이 날 민지에 대한 팬심을 안고 갔기 때문에 떨고 있었다. 평어로 대화하는 친구이지만, 재작년 울림의 '씨네페미니즘'에서 처음 만난 예비법조인 정민지가 넘사벽 같은 인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로스쿨 학생이자 페미니스트! 지성과 정의감을 다 갖춘 MZ여성이라니.(2년 전에는 93년생 민지가 이십대여서 더욱 놀라웠다.)
겸손하면서도 당차게 페미니즘 시각으로 영화를 본 소감을 말하는 민지를 모든 토론자들이 인상적으로 보았다.
특히 이제 막 발 페미니즘에 발을 들여놓은 짱아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장면들을 문제의 장면으로 콕콕 집어내는 민지가 인상적이었다.
그런 민지를 인터뷰한다니 얼마나 떨렸겠는가?
민지 안녕? 자기 소개 부탁해.
안녕? 나는 로스쿨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예비 법조인 민지라고 해. 하고 싶은 일이 아주 많은 페미니스트 청년이고, MBTI는 INFJ야. (짱아가 MBTI를 물어보았음)
나, 민지가 좀 무서워서 오기 전에 많이 떨렸어. 그래도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싶었어. 이렇게 기회를 줘서 고마워.
예전에 소심했는데 그 성격대로라면 아마 안 나왔을 거야.(웃음)
내가 떨고 있으니 민지도 긴장을 풀기 어려울 것 같아서 빠른 속도로 긴장감을 버리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친구다. 친구'를 되뇌며. 사진을 몇 씬 찍으며 분위기 전환 시도했다. 찍사인 심박이 함께한 덕분에 점점 편안해졌다.
함께크는여성울림에는 언제 가입했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2019년 전후였을 거야. 화숙이 울림 활동을 하고 있는 건 알았지만 나까지 바로 가입한 것은 아니었어. 그즈음 로스쿨 진학을 앞두고 후원회원이라도 되자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어.
민지는 굵고 낮으며 울림이 큰 목소리를 가졌다. 짱아는 민지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귀에 쏙쏙 박히고 발음이 정확해 법정의 변론에서 설득력을 실어줄 것 같다고 느꼈다.
민지는 목소리와 관련해서 어린 시절부터 꽤 많은 일을 겪었다고 한다. 어릴 때에는 남자 같다는 놀림을 받았고, 공무원 시절에는 화났느냐는 질문을 받았다는 것.
하지만 페미니스트가 된 후엔 자부심이 되었다고 한다. 여자 목소리, 남자 목소리로 구별짓는 통념에 굴하지 않으니까 자신의 목소리가 개성 있고 멋지더라는 것이다.
로스쿨에 들어가기 전 대학에서 무얼 전공했고 꿈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만 해도 육사에 들어가 군인이 되거나 경찰이 되는 거였어. 남자들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내 능력을 펼치고 싶다고 생각했어. 체력을 닦아야 하는데 시간이 충분치 않으니까 학교까지 뛰어서 등교하는 식으로 노력했지.
체력 조건 중 청력 장애가 문제가 되어서 그런 꿈들 대신 교육학과에 들어갔어. 어릴 때부터 동생 돌봄이나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적성에 맞다고도 생각했고. 마침 고3 올라가 성적이 잘 나와서 이화여대 교육학과를 지원했어.
여대에 들어가 활개 치며 살아보기로 한 거야. 남녀공학을 다녔던 화숙이 남학생들에 치여 자유롭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딸만큼은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하기를 바란다고 했던 것도 자극이 되었어.
아, 왜 여대를 갔을까 궁금했는데, 일리가 있네. 화숙과 하덕이 세 남매를 어떻게 키웠을지 궁금했어. 어떻게 그렇게 셋 다 잘 자랄 수가 있어? 지난번에 막내랑 세월호 영화 시사회 때 만났는데 처음 보는 우리 둘이 악수하며 평어로 인사를 나누었어. 인상이 참 좋더라. 중학교 체육 샘이 됐다 들었어.
하하. 막내는 누구하고도 쉽게 친해지는 성향이긴 해. (민지는 동생에게 용돈을 제법 주었다는 누나다.)
엄마 아빠 둘 다 공부하는 게 몸에 밴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느 정도 유전된 것 같아. 집에서 늘 공부하는 모습이었어. 우리도 자연스레 독서하고 공부하는 분위기에 젖어들었어. 공부 강요를 받은 적은 없었어.
우리집이 부유하진 않아서 다양한 뭔가를 경험하게 해 주진 못했지만 독서하고 탐구하는 환경을 조성해 준 것은 큰 자산이라 생각해.
언어에 재능이 있는 엄마가 영어를 가르쳐 주어서 어릴 때부터 어려움이 없었어. 엄마는 학교 문법 위주의 영어보다 말로 할 줄 아는 영어로 접근하도록 우리를 안내했어. 부모님이 폴란드에선 살았던 6년의 경험에서 외국어는 말로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대.
화숙 부부가 작년에 집 공사 기간에 우리집에서 이틀 동안 자고 간 적이 있었어. 우린 얼마 전엔 함께 여행도 다녀왔고. 느낀 대로 보자면 성적 보고 야단 치는 하덕이 상상이 안돼. 무조건 자식들 믿어주는 아버지일 것 같은데 말야. 어느 정도의 고정관념이란 예컨대 어떤 것이었어?
장녀라는 무게를 얹어주었다든가 하는 거야.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책임감과 부담을 느꼈어. 동생을 맡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물론 내가 말 잘 듣는 딸이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을 거야.
화숙이 페미니즘 아니면 이혼하겠다 선언했을 때 나야말로 딸로서 힘들었다고 고백했지. 화숙이 적잖이 충격을 받았어. 적어도 나쁜 엄마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자신에게 협조적이던 딸이 그런 말을 했으니 놀랐던 거지.
그때 일은 딸, 장녀의 무게를 처음으로 내려놓은 계기가 되었고, 나한테도 큰 전환점이라 할 만해.
화숙의 의식 각성이 집안 전체에 엄청난 태풍을 일으켰구나. 가족이 화숙을 따라 채식을 하고 페미니즘을 받아들이게 된 과정 듣고 싶어. 체육교사인 막내도 채식을 한다 들었어.
엄마는 목회자의 현숙한 사모이자 자녀들에게 다정하고 똑똑한 엄마였어. 큰며느리라는 짐도 잘 짊어져온 여성. 그런데 간암 진단 후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지나온 인생이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 깨달았고, 뒤집지 않으면 모두가 망한다고 생각한 거지. 완치된다 해도 생활을 바꾸지 않으면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게 절망처럼 느껴진 것 같아.
화숙 앞에 하덕이 무릎 꿇었다고 들었어. 남성 목사가 아내를 따라 페미니스트가 되겠다고 결단하고 행동을 바꾸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덕은 사랑하는 이 사람을 놓치면 안된다고 생각했대. 페미니즘 아니면 자신이 살지 못한다거 울부짖는 화숙에게 하덕은 자기 손을 놓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대.
만약 화숙에 대한 신뢰가 쌓이지 않았다면 하덕이 그렇게까지 자신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무조건 아내를 따르겠다고 하진 않았을 거야. 두 사람이 서로를 믿는 마음이 깔려 있었기에 그 난관을 뚫고 함께 올 수 있지 않았을까. 십 년 동안 변해 온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저런 사랑도 있구나, 내가 가진 사랑의 의미를 더 확장하게 됐어. 일방이 희생하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사랑에 대해.
너무 뭉클하다. 민지는 그 시점에서 페미니스트가 된 거야? 여대에 들어간 것도 자극이 되었을 것 같긴 해.
가족의 변화도 큰 자극점이 되었지. 그 전에 대학에 들어가니 과 친구들이 너무 뛰어난 거야. 주눅이 들어서 1, 2학년 때는 소심이의 흑역사였지. 아마도 그때의 나를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야. 동아리 가입도 한 적이 없어. 내 얼굴, 내 목소리가 자신이 없었거든. 그런데 3학년에 올라가 아주 우연히 학생회장이 됐어. 그때부터 내 안의 적극적인 에너지가 튀어나오기 시작했어.
2016년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이 잠자던 나를 깨웠어. 나를 포함한 모든 여성이 묻지마살해의 표적이 된다는 공포를 느꼈고, 문제의식을 자각했어. 그즈음이 화숙과 하덕이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부부가 되느냐의 기로에 섰던 때였고.
각자 삶의 조건에서 우리 자신을 살게 만들고, 서로를 보듬을 수 있게 하는 길이 페미니즘이라고 보았던 거지.
나도 그때부터 화숙이 진행하는 <이프> 등 페미니즘 토론 모임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어.
교육학을 전공했잖아. 교사가 아닌 공무원이 되고 로스쿨에 들어간 경로가 특이한데 어떤 심리적 변화들이 있었던 거야?
어릴 때부터 교육에도 관심 있다고 생각해서 교육학과에 들어갔어. 전공 자체가 재미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공부하다 보니 그 분야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 교육학과는 석박사 학위를 받고 연구 분야로 나가든지, 교사로 나가든지, 다른 분야로 취업을 하든지 해야 했는데. 집안의 장려로서 가장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게 무얼까 고민해 보니 공무원이었어.
성실하고 꾸준한 게 내 장기이니까 공무원을 잘할 것 같았거든.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까 능력 발휘할 기회가 별로 없고 보상도 능력에 따라주지 못하니까 여기 있을 자리가 아니구나 싶더라고. 내 그릇이 생각보다 컸던 거야.
입사 첫해부터 퇴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이직을 고려해 보기도 했지만, 공기업에서 사기업으로 바뀌는 것뿐이지 내가 하나의 부품일 뿐이고 내가 하는 일에 전문성을 발휘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어. 장기적으로 생각했을 때 여성으로서 내 경력이 중단되지 않고 전문인으로서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니 전문가가 되어야겠다. 이과생처럼 기술이 있는 것도 아냐, 예술적으로 탁월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야, 내가 어디에 속해 있든 내 전문성과 기술을 가지고 살려면 어떡해야 할까?
마침 2019년 3월에 화숙이랑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봤어. 로스쿨을 결정한 계기가 됐어. 그때 화숙*이 말했어."이것이 네가 가야 할 길이다." 로스쿨로 방향을 잡고 공부하자고 다짐했지.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무기는 법이다. 그래, 법조인이 되자.
https://youtu.be/xRdCeF6oB7M?si=8hTW7aS-OYt4V-bX
메인 예고편만 봐도 엄청난 여성인 것을 알 수 있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일명 RBG라 불리는 그녀의 삶을 다룬 영화를 꼭 보시길.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변화를 일으켰는지. 타협하지 않는 한 여성이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법조인이 되면 어떤 일을 하고 싶어?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싶어. 역차별 운운하지만 여성은 아직도 사회적 약자라고 생각해. 여성, 인권, 노동에 관심이 있는데, 돈이 안 되는 분야라고 하지만, 난 돈 벌 거야. 어떤 사안이냐,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수임료를 많이 받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변호사로 5년 임기를 마치면 판사가 될 수 있어. 여성 판사로서도 일하고 싶어.
나는 법을 보수적이고 딱딱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민지는 법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꼈어?
법은 세상을 보는 아주 특별한 렌즈야. 법을 공부하니까 뉴스에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어. 법은 사회 구성원을 통제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를 확장하기 위해서 필요하거든. 차별금지법 등 새로이 생기는 법 조항들은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사회가 될까 모색한 결과거든. 그 과정에서 법을 어떻게 바라보고 적용하느냐가 무척 중요한데 여성의 언어로 해석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사실 로스쿨에서는 교수들의 강의를 듣고 공부하는 곳이라 변론 연습을 하지 않거든. 그래서 페미니즘 토론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어. 그리고 로스쿨 안에서 뜻을 같이할 사람을 찾고 있지만 쉽지 않네.
나도 요새 페미니즘으로 두 발짝 뗀 자칭 '페미린이(페미니스트 어린이, 짱아가 직접 지은 말)'이야. (웃음) 민지에게는 페미니즘이 뭐야? 가족 전체를 살렸으며 민지가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서게 하고 성격도 적극적으로 바뀌게 한 페미니즘은 민지네 가족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어? 주변에선 '82년생 김지영'에는 동감하고 울면서 봤어도 '페미니즘'은 거부감이 든다고 하는 여성들이 제법 많거든.
페미니즘은 나의 삶과 연결된 모든 영역을 보는 방식이 확장되게 해 주었어. 화숙과 함께 채식을 하다 보니 가스레인지를 사용하지 않는 채식 조리법이 얼마나 심플한지 느껴. 하덕도 밥 차리는 게 간편해지니까 좋다고 해.
할머니가 5월부터 3개월 동안 하덕과 나와 지내거든. 지난번 3개월 동안에도 할머니가 채식에 적응하셨지. 채식을 하니 생태와 환경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어. 또한 나를 믿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좀 더 주체적으로 찾아갈 수 있게 되었어. 어른과 남성 눈치 보고 맞춰주려면 나를 자꾸 눌러야 하는데 이젠 내 결정에 따른 내 행동을 할 수 있게 됐어.
페미니스트 화숙 덕에 친할머니 모시는 일을 아들인 하덕이 맡았고, 우리 모녀는 돌봄에서 훨씬 자유로워져서 각자의 일에 충실할 수 있어. 화숙은 글쓰고 페미니스트, 세월호 연대 활동가로서의 삶을. 나는 로스쿨 공부에 전념하는 삶을.
4월 11일에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내용을 정리하다 보니 더뎌졌다.
날짜가 흘렀고 메모한 내용이 기억에서 흐려져 29일에 서울 대학로에서 민지를 두 번째 만났다. (실은 더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그 사이에 민지의 로스쿨 시험 결과가 나왔고, 민지는 1년 더 시험공부를 하게 되었단다.
로스쿨은 5회까지만 시험을 제한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준비가 덜 된 경우 이번 시험을 아예 치르지 않은 학생도 있다고 한다.
그동안 정말 애썼을 텐데 몇 달 더 수고해야겠네. 꽤 비싼 로스쿨 학비는 어떻게 준비했는지 물어봐도 될까?
2021년 2월에 로스쿨에 합격해서 3년 동안 공부했어. 공무원 생활 3년 동안 번 돈과 장학금으로 해결했어. 올 1년까지는 가능할 것 같아. (와~대단대단)
3년 동안 공부하느라 애썼는데 쉬는 동안엔 무얼 하며 시간을 보냈어?
운동을 좋아해서 등산이나 걷기 등 다양한 운동을 기회 닿는 대로 하고 있어. 또 영화를 좋아해서 화숙과도 몇 편 봤고. 짬짬이 독서를 하고 있어. 4월인 만큼 세월호 참사 관련한 연극 공연도 봤고, 화숙과 기억교실에도 다녀왔어.
민지가 치마 입은 모습을 보지 못했어. 화장도 거의 하지 않는 것 같고.
둘 다에 거부감이 들어. 학교 때 운동을 좋아해서 틈만 나면 운동장으로 달려나갔는데, 치마를 입으면 제대로 놀 수가 없잖아. 구기종목 웬만한 건 다 좋아하거든. 마음껏 놀려면 바지가 편했어. 참고로 난 색깔도 분홍색을 좋아하지 않아. 사회에서 만난 이들이 오빠라고 불러달라 요구하는 것도 질색이고. 그렇다고 화장하는 이들을 이해 못하는 건 아냐. 꾸밈노동은 개인 의사에 맞게 히면 된다고 보는데, 난 별로 취미가 없고 거기에 시간을 할애하기도 싫어서 안 하는 거야.
하덕이 화숙을 사랑하고 신뢰하여 페미니즘의 길을 걷겠다고 했다는 부분에서 나는 울고 말았다.
두 사람이 자신들과 가족을 지키고 오히려 더 나은 길로 걸어가게 된 진짜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화숙이 '페미니즘이라는 거친 길'을 찾아낸 것도 놀라웠고, 30년 간 쌓아온 부부의 신뢰가 그들의 새로운 사랑 방식을 받아들일 만큼 단단했다는 것도 부러웠다.
전부터 숙과 덕 부부를 진작에 알았더라면, 하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지켜내지 못한 우리의 사랑이 안타깝고, 남편에게 믿음과 기운을 주지 못한 나의 가루 같은 작은 사랑이 미안해서였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이유가 있죠. - 걱정말아요 그대 중
앞으로 새 사람을 만나든, 홀로 살아가든, 나의 삶에도 페미니즘이 깊숙이 들어왔고, 내 의식과 행동을 바꾸고 있다.
적어도 '페미니즘은 (잘 알지 못하지만) 별로'라는 식의 선입견은 벗어버렸으니 얼마나 진일보인가.
민지는 맥줏잔 앞에서 울고 있는 나를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스물세 살 더 많은 아줌마의 민낯을 보고도 다정하게 기다려 준 민지 너의 마음은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이냐.
인터뷰에서 글로 옮겨지기까지 한 달 가까이 흐를 만큼 산고를 겪었다. 단편소설 한 편 쓴 기분이 들 정도이다.ㅎㅎ
기나긴 글을 읽어준 회원들께 감사 인사 전하며, 인터뷰라는 기회를 준 울림에도 고맙다.
인터뷰는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내가 달라지는 소중한 시간이다.
별책부록 : 자녀 양육에 관한 이야기
- 여기서부턴 읽고 싶은 분만^^ (너무 길어서 따로 뺐어요)
학창 시절에 어떻게 공부했는지 들려줄래? 울림 회원들의 자녀 교육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부모님은 과외 없이 스스로 해 나가라는주의여서 우리 남매는 각자 알아서 공부했어.
오빠는 머리가 비상해서 쉽게 잘했고, 나는 성실파 스타일로 중학교 때까지 문제가 없었지.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에 올라가 첫 난관에 봉착했어. 시험에서 처음으로 수학 성적이 끔찍하게 나왔어. 생애 첫 점수를 보고 경악했지. 겨울 방학에 수학을 잡아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물고 늘어졌어. 노력했으니 2학년에 올라가 첫 시험에서 기대했는데 노력을 배신하며 최악의 점수를 받았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수학에 매달렸어. 5월부터 수학 성적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3학년 올라가서는 영어, 수학 성적이 안정권에 접어들자 다른 과목을 공부하는 데 여유가 생기더라고.
화숙에게 듣기로는 하덕이 퍽 자상한 아빠였다던데. 화숙과 하덕의 양육과 교육 분담은 어떻게 이루어졌어?
화숙은 유창한 말과 참신한 아이디어로 우리의 공부를 도왔다면, 하덕은 양육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가장이었어. 예민한 나를 재우는 데 하덕의 공이 컸어. 오빠는 동구밭 과수원길 1절 부르기도 전에 잠들 만큼 순둥이였는데, 나는 완창을 해도 잠이 들지 않았대. 하덕이 저녁 먹고 나서 나를 안고 업고 하면서 재웠대.
한국에 돌아와 막내가 태어난 후에 하덕은 우리 삼남매를 잠자리에 모아놓고 날마다 '우주선 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주면서 잠나라로 가게 해 주었어. 우리는 그 시간이 너무 신나서 정작 자는 시간이 미뤄지기도 했지. 나중엔 우리의 상상력이 가미되면서 공동으로 창작했던 것 같아. (이때를 추억하는 민지의 표정에 웃음이 가득하다.)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퍽 열린 자세였을 것 같아. 충돌이나 갈등이 거의 없었지?
음...(잠시, 웃음) 다른 집과 비교하자면 정말 괜찮은 부모였지만, 어느 정도의 고정관념은 있었어. 하덕은 고1 때의 내 성적표를 보고 야단을 친 적이 있었어. 나는 엄청 울면서 억울함을 표현했어. 대들지는 않았지만.
하덕은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합창부 활동에 너무 열심이어서 성적이 떨어졌다고 봤어. 내가 주말까지 연습에 진심이었거든. 게다가 고 1때 성적이 안 나오니까 책상에 앉으면 자꾸 졸리기만 해서 그렇게 봤을 수 있는데, 성적이 안 나오는 건 본인이 더 힘든 문제잖아. 그 마음을 몰라주는 아빠가 야속했지.
게다가 같은 학교 다니던 오빠랑 자연스레 비교가 되었어. 성적표를 집으로 가져가면 나 스스로 비참해졌어. 중학교 때 공부 잘하던 딸이 고등학교에서 헤매니까 부모님도 이상하게 여겼는데 내가 성실하고 진득하게 궁둥이 붙이고 오래오래 공부해야 하는 스타일이란 걸 점점 알게 됐고, 나중에 공무원 시험과 로스쿨 3년 공부하면서도 확실히 알게 됐지.
그렇다면 민지가 생각하는 공부 비결은 진득함이라 해야 할까?
스스로를 믿고 책상에 붙어 있어야 한다. 당장 뭐가 안 보이더라도, 늘 제자리인 것 같아도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이 퍼즐이 맞춰지면서 확 올라갈 때가 있거든. 그날이 올 거라는 걸 믿으면서 그냥 버티는 수밖에 없어.
그런 믿음이 어디서 오는 거야. 토론할 때도 당당한 자기 표현을 하는 민지가 멋졌어. 나는 믿음이 약한 자로서, 신앙도 없고 나 자신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거든.
자잘한 성공경험들이 쌓이면서 자신을 믿게 되는 것 같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성공을 해 보지 못했다면 의심했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해 왔으니까. 꼭 공부 성취가 아니더라도 작은 경험들에서 내가 웬만한 것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 실은 중 3때도 한 번 성적이 삐끗한 적이 있었는데, 그 경험이 고등학교 때 난관을 거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고, 공무원 시험 공부할 때도 도움이 크게 되었어.
<화숙의 브런치 글 참고>
1. 여성신문을 읽게 되고, 페미니즘으로 한 걸음
https://brunch.co.kr/@dream40k/334
2. 분노하라! 내 삶을 바꾸고 싶다면
https://brunch.co.kr/@dream40k/153
3. 문제 없는 부부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https://brunch.co.kr/@dream40k/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