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재림 준비, 무엇을 기다리는가?
1. 재림은 예기치 않을 때 갑작스럽게 올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마지막 밤이 가까이 이르러 오고 있었다. 벌써 하나님의 심판의 구름이 이 운명적인 도시에 그늘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천사들이 저들을 멸망시킬 사명을 띠고 점점 가까이 오고 있는 그 사이에도 사람들은 번영과 향락만을 꿈꾸고 있었다. 소돔의 마지막 날도 그전의 다른 날들과 다름이 없었다.
사랑스럽고 평화스럽게 보이는 도시에 저녁이 왔다. 비할 데 없는 아름다운 풍경은 기울어지는 저녁노을 속에 잠기었다. 아침 해가 돋았다. 아침의 밝은 빛은 번영과 평화만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다. 활발한 삶의 약동이 거리거리에서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사업이나 그 날의 오락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돌연 예기치 않은 때 청천벽력 같이 마지막 시간이 왔다.
천사들의 다급한 움직임과 롯과 그의 가족들의 절박한 행동과는 달리 세상은 평안하기 그지없었다. 마지막 밤도, 멸망당할 아침도 아무런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앞날의 계획과 향락으로 여념이 없었다. 멸망은 청천벽력처럼 갑자기 찾아왔다. 롯의 가족 외에는 한 명도 피하지 못하였다.
이 세상 마지막 날 아나운서의 황급한 중계방송을 듣는 듯한 이 구절은, 소돔과 고모라의 마지막 밤과 아침을 묘사한 글이다.
2. 노아 홍수 때와 같으리라
노아 홍수 때의 상황도 정확히 똑같았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다”(마 24:38, 39)다. 기롱하는 자들이 기롱하듯이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었다(벧후 3:4). 자연에 어떤 뚜렷한 변화가 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때때로 저희 마음이 무서워서 떨리던 자들도 다시 안심하기 시작하였다. 저들은 악한 행위들을 계속하며 대담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함으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마치 현재 우리 삶의 한 부분을 묘사한 듯한 위의 두 장면은, 예수님께서 인자의 오심이 마치 그와 같으리라(마 24:39)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크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우주의 대격변이 일어난 다음에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이 일상의 삶을 살다가 재림을 맞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 24:40, 41)”.
밭에서 농사일을 하는 두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이거나 형제간이었을 것이고, 맷돌을 돌리는 두 여인은 어머니와 딸 혹은 자매였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재림의 영접은 각자의 몫이다.
두 이야기는 심판의 돌발성과 엄격성 그리고 차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또한 사람이 휴거하듯이 갑자기 공중으로 사라진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만큼 갑작스럽게 재림은 올 것이며, 깨어 있지 않은 사람은 인자의 임함(Parousia)을 맞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3. 깨어서 예비하라는 의미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고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며(마 24:36), 어떤 특별한 지구의 대격변이 없이 사람들이 일상의 삶을 영위하다가 갑자기 재림을 맞는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까? 언제 오실지도 모르는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다행히도 예수께서는 재림을 맞이하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을 말씀해 주셨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3).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 “예비하고 있으라”는 동사는 현재형으로서, 한순간으로서가 아닌 지속적으로 예비하고 있으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신다는 말”도 현재형 동사로 인자의 오심을 미래로만 고정하지 않고, 현재의 종말적 사건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예비하는 삶인가? 예수께서는 이것을 설명하시기 위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집을 떠난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지만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자기 직무에 충실하였다. 악한 종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 생각하고 제멋대로 살지만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주인이 이르러 오면 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주인이 오실 날을 계산하지 않는다.
그의 충성스러운 삶은 주인이 일찍 오시든지, 늦게 오시든지 흐트러짐이 없다. 그는 마치 주인이 오늘 돌아오실 것처럼 만사를 준비한다. 이런 종은 복을 받을 것이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은둔생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눅 19:13)”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이 오실 때 당신을 기다리는 무리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사업 거래에 종사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들에서 씨를 뿌릴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추수장에서 수확할 것이며, 또 다른 사람들은 맷돌을 갈고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의 택하신 백성들이 생활의 의무와 책임을 버리고 한가하게 명상하며, 종교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직업도 팽개치고, 농사도 짓지 말며, 하늘만 바라보고 살라는 말씀이 아니다.
4. 계속 깨어 있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정해진 시간이 없이 한없이 깨어 있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깨어 있는 것은 일단 시간이 정해지면 어려워진다. 한 시간 남았다 하더라도 5분이라도 더 이용하려는 것이 인간이요 더구나 50년 후 사건을 위해 미리 지금부터 깨어 있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말 정해진 시간이 없으면 계속해서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증언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 기다림과 깨어 있음을 매 순간과 하루 단위로 나누어 살아야만 깨어 있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마치 이 날이 우리에게 허용된 마지막 날인 것처럼 경계하고, 일하고, 기도하고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최근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무엇인가 막연히 기다리기는 하지만 그것이 종말적 삶과는 연결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한 삶의 현실을 발견하면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재림에 대한 기별과 우리의 실제 삶과의 사이에 괴리가 생긴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재림이 우리의 모든 소망의 결정체라면, 왜 우리들의 삶이 이렇게 세속적일까? 왜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지 못하고 갖가지 문제로 괴로워할까? 혹은 우리들이 게으르고 악한 종이기 때문일까? 우리가 정말로 재림 시에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그토록 기다리며 살았는데, 과연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고 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5. 무엇을 기다리는가?
연세 지긋하신 목사님들께서 하시는 재림에 대한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단골로 등장하는 예화가 하나 있다. 집 떠나 소식을 모르는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내의 이야기다. 전쟁 많고, 어렵고, 가난하게 살았던 우리나라에는 그런 비련의 여인들이 유난히도 많았다. 지금까지도 6.25 전쟁때 행방불명된 남편을 기다리며 홀로 살아온 여인들, 기다림에 가슴이 멍든 이 땅의 여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기다림의 이야기는 연로하신 목사님들의 케케묵은 예화가 아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핵심을 갈파한 이야기다. 우리가 재림을 기다린다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단순히 이 죄악 세상의 멸망만을 소원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무엇인가 바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진주로 만들어진 열두 문의 도성일 수도 있고, 휘황찬란한 금 거리일 수도 있고, 예비하신 처소일 수도 있고, 눈물과 고통이 없는 평화스러운 낙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현재 불충분한 것들이 채워지는 것이 재림의 목적이라면 그 바라는 것들을 이미 이 세상에서 성취할 수 있게 될 때는 재림에 대한 기대는 약해지고 소망은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풍요롭게 잘 살게 될수록 재림에 대한 기대감이 약해지는 것이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물질적인 욕구를 가지고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 욕구가 이 세상에서 채워지면 더 이상 재림을 기다리지 않게 된다. 주께서 예비하실 맨션 주택을 고대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내 집을 장만할 수 있을 때, 그 기대는 사라져 버린다.
병 고침 때문에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건강하게 되면 그 기다림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하나 둘 우리는 그 기다림의 끈들을 놓게 되고, 마침내는 무엇을 기다리는 지도 모르는, 사실은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자신을 어느 날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가 남편이 사가지고 올 어떤 물건이나 혹은 어떤 보상을 크게 생각한다면 그 기다림은 남편이 오기 전에도 채워질 수 있다.
그러나 아내의 기다림은 그런 물질적인 보상을 바라는 기다림이 아니다. 그것은 빨리 만나고 싶고, 다시 보고 싶은 인격적인 기다림이다.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만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소망이자 그리움이다. 이러한 기다림의 삶의 초점이 돌아올 남편에게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우리의 기다림의 초점도 신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맞춰져야 한다.
6. 기다림과 사귐
기다림은 사귐(요일 1:3)에서 생긴다. 매일 매일의 사귐에서 인격적인 교류가 생기고 정이 생긴다. 정이 깊어지면 만나기를 고대하게 된다. 만남을 원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이제는 순간순간의 모든 삶이 그 만남을 위하여 존재하게 되고, 그 만남을 위하여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재림을 기다리는 삶이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도 그 인격적 만남과 만남에 대한 절실한 소망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어떤 인격적 깊은 관계없이 그분이 가져올 부수적인 상급에 더 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기다림의 강도가 약해진다. 반면에 매일 매순간 그리스도와 인격적 사귐의 시간들을 가지면서 기도로 깊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 그분을 만나기를 소원하게 되고 그 만남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 삶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예비하고 있으라,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비와 깨어 있음은 강제적인 명령이 아니라 그것은 그렇게 밖에 될 수 없는 인격적 교제의 필연적 결과이다. 사귐에는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 관계를 ‘사귐’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적어도 그 사귐을 위하여 시간을 투자하는 것을 아끼지 말아야 된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부분들이 그 사귐을 위해 투자되어야 하고 넉넉한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질 때 깊은 사귐이 생겨난다. 사귐이 깊어지면 사랑이 생겨나고 마침내는 만나서 같이 있게 되기를 고대하게 된다. 그 “만나서 같이 있음”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희생되어도 좋을 때 우리는 그것을 “기다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귐(koinonia)에는 꾸준함이 필요하다. 한때의 열광을 우리는 사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참된 사귐은 지속적이고 변함이 없는 관계이다. 일시적인 이익이나 이기심에서 나온 교제는 사귐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언제라도 사라지고 시들어지는 일시적 관계일 뿐이다. 그리스도와의 사귐은 마침내 참된 사랑(Agape)의 관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 사귐은 우리로 하여금 “오래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게 한다”(고전 13:4~7).
이런 그리스도와의 사귐(요일 1:3)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빛 가운데 거하게 되고, 그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요일 1:8). 그리고 그 사귐의 대상을 “이미(aleady)” 만났으면서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날을 “아직도(not yet)” 기다리는 간절함 속에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종말적 긴장의 삶이다.
7. 사귐의 방법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런 긴밀하고도 지속적인 사귐의 관계 속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즉 종말적 삶은 두 국면으로 구성되는데, 생각하고 행동하는 생활이다. 생각하는 삶이란 성경 말씀에 깊이 젖어드는 것과 기도하는 생활을 말한다. 성경의 진리로 그 마음을 견고히 한 자들 밖에는 최후의 심판을 견딜 수 없다.
아무도 기도가 없이는 하루 혹은 한 시간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행동하는 생활이란 그 말씀과 기도를 우리들의 삶 속에 구체화하는 활동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가 한가한 명상으로 보내기를 원치 않으시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보여주기를 원하신다. 매일 아침 그 날을 위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여러 달 혹은 여러 해를 기약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단지 짧은 한 날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을 뿐이다. 오늘이 마치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이런 종말적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떤 물질적 기대의 충족이 아닌 참된 인격적 기다림과 그리움이 생겨나고 순간순간을 충만케하는 종말적 긴장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