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에 만든 ‘해송 유아원’이 4년 만에 ‘새마을 유아원’으로 편입된 과정은 유아교육의 발전이라고 보기 어렵다. 국가에서 유아교육 틀을 넓히기는 했지만 운영이나 교육 내용이 문제였다. 지배 권력이 유아한테까지 잘못된 교육과 문화를 반복시키는 가능성을 넓혀 준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터전에서 이뤄지는 운영이다. 그 공간을 운영하면서 교육과 생활 문화를 계속 가꿀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해송 유아원을 만든 해송 회원들은 해송 유아원을 계속 운영하는 데 실패한 까닭을 그럴 듯한 건물과 더 많은 유아들을 교육할 수 있다는 집착 때문이라고 보았다. 해송 회원들은 실패를 딛고 ‘어린이 걱정모임’을 다시 만들고, 1984년에 서울 도성 낙산 성벽 밑 무허가 주택 밀집 지역인 창신동에 ‘해송 아기둥지’를 만들었다.
지역 사람들이 낯설어할까 봐 터전은 가난한 아이들이 사는 집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또다시 새마을 유아원에 흡수되지 않도록 어린 아기들을 대상으로 했고, 이름도 유아원이 아니라 ‘아기둥지’라는 말을 새로 만들었다. 정부는 1982년 ‘유아교육진흥법’을 만들었는데 탁아 시설을 모두 통합하여 새마을 유아원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하였다. 그래서 그 규제를 피하기 위해 오랜 고민 끝에 ‘아기둥지’란 말을 만든 것이다.
또 생계를 위해 하루 종일 바깥에서 일해야 하는 주민들한테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종일보육을 하였다. 선생님과 아이들은 바깥나들이를 하면서 골목과 놀이터, 서울 도성 성벽 밑에서 놀면서 지역 사람들과 더욱 어우러지는 활동을 하였다. 놀이 재료는 선생님과 아이들이 함께 손으로 만들었다. 볼품없더라도 놀이 재료를 함께 만들고 부수는 과정이 바로 교육이고 생활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원리를 알 수 없는 복잡한 장난감을 움직이게 하며 경탄하는 것은 이미 만들어진 물건을 소유할 뿐이다. 이는 만족을 얻는 소비자로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소비자로 길들여지면 자기 삶을 창조하는 창조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해송 아기둥지는 생활과 자연과 일을 강조하는 교육관에서 출발하였다. 선생님은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어른’이고자 했다. 아기둥지에서 교사를 ‘이모’나 ‘삼촌’으로 부르도록 한 까닭도 함께 놀고, 만들고, 낮잠도 함께 자는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였다.
메마른 대도시 환경에서 가장 어려운 생존 조건 속에 있는 달동네에서 아이들이 자연과 만나는 일은 중요한 활동이자 과제였다. 맑은 물이 흐르는 숲속 같은 아름다운 자연 환경은 물론 없었다. 그러나 흙과 물, 나무와 풀, 햇볕과 바람 속에서 지내려는 노력을 꾸준히 했다.
자연을 터전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은 한 뼘의 텃밭을 귀중하게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날마다 밖으로 나들이를 나가 흙장난을 하도록 했다. 바깥나들이를 하지 않아도 안에서 물장난과 흙장난은 언제든지 할 수 있게 했다.
해송 회원들은 익숙한 생활 문화에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내지 말고 의문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면, 작은 사회에서부터 새로운 삶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1980년대 도시 빈민 지역은 결혼한 여성이 생계를 위해 취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지역에서 공동체 연대 의식은 약해졌다. 농촌 사회처럼 아이를 돌봐 줄 이웃이 줄어든 것이다. 그러자 1980년대 후반부터 지역 탁아소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해송 아기둥지는 지역 탁아소의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틀을 만드는 데만 생각을 나눌 뿐 아이와 함께하는 생활이나 교육 내용을 나누지는 못했다.
해송 활동에 앞장섰던 정병호가 창신동에 해송 아기둥지를 세우고 3년만 공부를 하고 오겠다고 유학을 떠났다가 그 두 배의 세월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정병호는 문화인류학을 공부했는데 계급, 성, 민족, 종교에서 나타나는 불평등과 차별의 연관성과 원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사회 육아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사회 육아에 대한 필요성이 특정한 때에 어떤 계급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하더라도, 결국은 그때의 사회 문화 환경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사회 환경을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 육아 운동도 나이, 계층, 학력, 성, 장애의 정도, 민족과 지역에 따른 차별을 없애야 하는 일을 함께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우리 사회에서 ‘영유아보육법’을 만들자던 논의가 한창이던 1990년 여름에 해송은 ‘또 하나의 문화’ 모임과 만났다. 두 모임은 만난 지 한 달 만에 ‘탁아제도와 미래의 어린이 양육을 걱정하는 모임’이라는 이름을 가진 단체를 만들었다. 이 모임에서는 ‘영유아보육법’과 관련하여 바람직한 탁아 제도를 위한 토론회를 열고, 《우리 아이들의 육아 현실과 미래》 같은 책을 펴냈다.
그리고 더 이상 걱정만 하고 있을 수 없다는 뜻에서 모임 이름을 ‘공동육아연구회’로 바꾸었다. 공동육아연구회는 1992년 사당역 근처에 작은 사무실을 마련하고 문을 열었다. 더 이상 법, 정책, 제도가 바뀌기만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공동육아연구회는 곧 공동육아를 실제로 해 나갈 어린이집을 만드는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 뜻에 함께하는 부모들 힘으로 경제 토대를 만든다면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이 아이들을 위한 육아 환경 기준을 높여, 새로운 교육과 생활 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면 사회 변화에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이 사회의 굳어 버린 법과 제도와 관행을 바꿔 나갈 수 있는 힘이 되리라 믿었다.
공동육아연구회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협동조합으로 운영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1980년대 독서문화를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새로운 개념의 ‘양서협동조합’이 생긴 뒤로 육아와 교육이 함께한다는 또 다른 개념의 협동조합이 우리 사회에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1992년부터 공동육아 협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모았다. 협동조합으로 가려면 조합원이 4, 50명은 되어야 하는데, 낯선 개념이라 사람들이 쉽게 모이지 않았다. 뜻이 있어 모인다 해도 사는 곳이 다르니 지역에 어린이집을 만든다는 게 쉽지 않았다. 나는 독일 루르 지역에서 민간인들이 모여서 만든 발도르프 학교를 예로 들면서 <한겨레신문>에 조합원을 모집하는 광고를 내자고 했다.
어린이도서연구회 지역 모임인 동화읽는어른모임을 공개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하면서 공개 모집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또 한겨레신문 독자라면 생각을 나누기가 쉬울 것 같았다.
한겨레신문에 조합원을 공개로 모집한 방법이 성공했고, 1994년에 첫 공동육아 협동조합이 신촌 연남동에 ‘우리 어린이집’ 이름으로 문을 열게 되었다. 공동육아라는 새로운 교육과 생활 문화를 향한 첫걸음을 떼게 된 것이다. 어른들한테는 어려운 길로, 아이들에게는 행복한 길로 가는 첫걸음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