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 나타난 마음을 고찰할 때에는
마음을 마음자리→마음결→마음씀→마음씨의 구조에서 화살표를 거꾸로 놓아 마음자리←마음결←마음씀←마음씨의 구조를 주목한다.
이 구조는 마음을 근원적인 마음자리로 되돌리는 구조다.
마음자리는 선과 악이나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넘어선 담담하고 고요한 그 어떤 경지이다.
마음은 외물에 감응되어 선하고 아름답고 깨끗하게도 되지만 악하고 추악하고 더러움에 물든 것이 되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망심(妄心)이라 표현한다.
그러기에 마음결과 마음씀에서 생겨나는 망심을 끊어버리고 마음자리로 되돌아가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벗어 던져버리고, 이른바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불교나 유교에서 어렵게 설명하고 있는 수심론(修心論)은 마음결과 마음씀에서 생겨난 망심을 끊어버리고 본질적인 마음자리를 찾아 나서는 방법이다.
불교의 심론(心論)은 마음의 본체에 대한 설명과 그 본체를 가리는 심식(心識)과 연기가 일어나는 까닭을 밝히고 그것을 씻고 본체에 이르는 방법으로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를 타이르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심론의 과정을 불교경전 속에서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음의 본체에는 상(相)이 없다. “지난날의 마음을 잡을 수가 없고, 현재의 마음도 잡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잡을 수 없다.”(般若經 반야경),
“마음은 안에도 있지 않고 중간에도 있지 않다.” (維摩經 유마경),
“마음의 자성(自性)은 공적(空寂: 空은 그 어느 것도 형상이 없음을 이르고, 寂은 일어나거나 스러짐이 없음을 이른다.)하여 대립도 없고 소멸한 일도 없다.
그것은 처음인 것도 아니요, 가운데나 뒤인 것도 아니며, 삼세(三世)를 초월하여 그 모습이 허공과 같다.” (華嚴經 화엄경),
“마음이란 본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번뇌에 더럽혀질 여지가 없으니, 어찌 마음이 탐(貪)·진(瞋)·치(痴)에 의해서 더럽혀지며, 삼세에 속하는 온갖 것에 무엇을 마음이라 하랴.” (心地觀經 심지관경) 등이 있다.
둘째, 다음으로 마음의 본체는 평등하다. “모든 중생은 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어서 차별이 없다.” (涅槃經 열반경),
“마음의 본성은 청정하여 더러움에 물드는 일이 없다. 마치 하늘에 연기와 먼지나 구름 그리고 안개 따위가 뒤덮여 맑고 깨끗하지 못하다 하더라도 하늘의 본성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는 것과 같다.” (勝思惟梵天所問經 승사유범천소문경),
“심성의 청정함은 물속의 달과 같다” (大寶積經 대보적경) 등이다.
마음의 본성은 모든 사람이 누구나 가지고 있다. 또 그것은 상(相)이 없으니 더럽혀 질 까닭도 없다.
마음은 오염과는 관계없이 청정하기만 한 하늘이나 물속에 비친 달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마음의 본성이요 불성(佛性)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이 무엇 때문에 더럽혀지는가?
그것은 마음에는 심식(心識)과 연기(緣起)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다음의 구절들은 마음의 심식과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마치 달 속에 여러 가지 물체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아서, 세상이 무실(無實)하지만 분별함을 따라서 그것이 일어난다. 분별하는 까닭에 분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大乘破有論 대승파유론),
“중생이 경계를 망령되이 인정하므로 마음의 차별이 생긴다.” (起信論 기신론),
“마음은 본래부터 생긴 일도 일어난 일도 없어서 그 본성이 언제나 청정할 뿐이다. 그러나 바깥에서 들어온 티끌과 번뇌(客塵煩惱 객진번뇌)에 의해서 더럽혀진 까닭에 분별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 것이다.” (持世經 지세경),
“대해의 물결이 사나운 바람으로 인해 일어나면 큰 파도가 바다에 물결쳐서 끊일 새가 없게 된다. 알라야식(阿賴耶識 아뢰야식)도 그래서 경계의 바람이 불어와 흔들면 여러 가지 식(識)의 물결이 치솟아 날뛰고 자꾸 생겨나기 마련이다.” (入楞伽經 입능가경)
심식과 연기는 마음결이나 마음씨(씀)를 의미한다. 원래 마음의 본성, 곧 마음자리는 바다처럼 고요하고 청렴한 것이지만 외계의 사물에 부딪게 되면 마음자리의 경계를 깨뜨리고 곧장 동요하게 된다. 마치 바다에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는 이치와 같다. 그것을 ‘식(識)’이라 하였다.
‘식’은 여덟 가지로 팔식(八識)이다. 사람에게는 감각과 의식의 기능이 있다.
그것이 안식(眼識)·설식(舌識)·후식(臭識)· 이식(耳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육식(六識)이다. 이 중에서 앞의 오식(五識)까지는 감각기능이고 제 육식(第六識)인 의식은 사고(思考)에서 나타난 정신적인 인식이다.
이외에 말나식(末那識)이라는 제 칠식(第七識)은 자아의식(自我意識)에 해당한다.
또한 불교 특유의 제 팔식(第八識)을 ‘알라야식’이라 한다. ‘장식(藏識)’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알라야식’은 의식을 초월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잠재의식에 해당한 일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체의 근거이기도 하고 동시에 초개체적 진여(眞如)에 뿌리 박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양면성을 가지므로 ‘알라야식’은 진여로 돌아가려는 성향도 있지만 무명으로 돌아가려는 성향도 함께 가지고 있는 셈이 된다.
따라서 ‘알라야식’을 진여의 방향으로 나타내 보려 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그 개별성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가르침은 그 ‘알라야식’까지 아주 깨뜨려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의 심(마음)론은 ‘식’을 완전히 깨뜨려버리고 마음의 본성, 곧 일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려는 고행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도 오랜 불교의 역사를 가졌다. 불경의 주석서와 『수심결(修心訣)』·『심요(心要)』·『심성론(心性論)』 등의 저술도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심론에 일관된 논지는 결국 마음의 본체에 대한 설명과, 그것을 깨닫는 방법과, 그것을 지키는 수양론이다.
마음에 대해서 최초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은 원효이다.
그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다가 해골의 물을 마신 것이 기연이 되어 크게 깨달았다.
그 때에 남긴 말이 유명하다. “마음이 없으면 감분(龕墳:불상을 모신 감실과 시신을 묻은 무덤)도 다를 것이 없음을 알았다. 그러기에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萬法)이 오직 식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거니 어찌 다른 데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원효는 드디어 유학을 포기하고 마음이라는 문제에 주목하게 되었다.
많은 원효의 주석은 일심(一心)의 근원에 대한 설명과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일심은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의 대의에도 잘 나타나 있다. “무릇 일심의 근원은 유와 무를 떠나서 홀로 청정하며, 삼공(三空)의 바다는 진(眞)과 속(俗)을 융화하여 담담하다.
담담하므로 둘을 융화하였으나 하나가 아니요, 홀로 청정하므로 양극을 여의었으나 중간도 아니로다.
중간도 아니나 양극을 여의었으므로 있지 않은 법(法)이라 곧 무에 머물지 않으며, 없지 않은 모양이다.”라고 하였다.
“유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하나가 아니요 둘을 융화하였으니 진(眞) 아닌 사(事)가 아직 속(俗)이 된 것이 아니다.,
속 아닌 이(理)가 아직 진이 된 것도 아니요, 둘을 융합하였으나 하나가 아니니 진과 속의 성(性)이 수립하지 않음이 없고, 더러움과 깨끗함의 형상을 갖추지 아니함이 없도다.
양극을 여의었으나 중간이 아니므로 유와 무란 법이 되지 않음이 없고, 옳거나 그릇됨의 뜻이 미치지 않음이 없도다.
그러므로 파(破)함이 없되 파하지 않음이 없고, 옳거나 그릇됨의 뜻이 미치지 않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파함이 없되 파하지 않음이 없고, 입(立)함이 없되 입하지 않음이 없다.
가히 이치가 없는 지극한 이치(無理之至理 무리지지이)요, 그렇지 않은 크게 그러함(不然之大然 불연지대연)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원효가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의 심오한 내용을 200여 자로 대의를 밝힌 것이다.
일심의 원천과 삼공의 바다가 핵을 이루고 있다.
일심의 원천이란 일체의 ‘식(識)’을 깨뜨려버린 다음에 남아 있는 담연한 마음자리를 말함이다.
삼공(三空)의 바다도 일심의 원천과 같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공(我空)·법공(法空), 더 나아가서는 아공과 법공도 모두 공이라는 구공(俱空)을 말함이다.
철저하게 비워 버리고, 또 비웠다는 사실마저 비워 버리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유(有)니 무(無)니 하는 상대적인 개념도 없게 된다.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비웠으니 모든 것을 다 포괄할 수 있고, 포괄한 것을 다시 초월할 수도 있는, 이른바 포월(包越)의 원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지 않지만 크게 그러하고’, ‘이치가 아니지만 지극한 이치’라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원효는 『무량수경소(無量壽經疏)』에서도 마음의 설명을 하고 있다.
“심성(心性)이란 융통하여 걸림이 없어서(融通無礙 융통무애) 크기가 허공 같고, 담담하기가 큰 바다와 같다.
그 본체는 평등하고 그 성질은 윤활해서 상(相)에 관계없이 만상을 다 포섭할 수 있고, 연(緣)을 따라도 거슬림이 없다.”
본성의 크기는 하늘과 바다와 같다. 그리고 그 본성은 평등하고 윤활한 것이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과 연에 관계없이 모든 것을 다 포섭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마음에 무명(無明)이 왜 생기는가에 대해,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대승법은 이 일심 이외에 또 다른 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무명이 그 자신의 일심에 미혹되어 물결을 일으키고 육도(六道 : 중생이 선악의 원인에 의하여 윤회하는 여섯 가지의 세계)에 유전한다.
비록 육도의 파도를 일으킨다 하여도 일심의 바다에서 벗어나지 않고, 일심이 움직여 육도를 만들어놓는다.”
일심의 깊숙한 밑바닥에는 알라야식이 감춰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알라야식은 진여로 돌아가려는 일면도 있지만 물결을 일으키게 되면 무명으로 번져가려는 성향도 있다고 한다.
그것은 마침내 육도에까지 유전하게 된다고도 하였다.
이것을 더 부연하면 중생들의 감각적·심리적 기관은 일심에서 생기지만, 그것은 도리어 스스로의 근원을 배반하고 뿔뿔이 흩어져서 번뇌의 먼지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수행은 목숨을 들어 이러한 감각적 심리적 작용을 거두어 잡아 그 본래의 원천인 일심의 마음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이 그러한 것처럼 원효의 사상도 실상은 일심을 확인하고 일심으로 되돌아가려는 수행이 핵을 이루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서 마음을 찾아 해결할 구원의 완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출처 : 벤 아담 성서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