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값이 이상해 / 양선례
태풍이 지나자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역대급 태풍이라는 힌남노의 거친 바람을 저 연약한 벼들이 어찌 이겨 냈는지 들녘은 풍년을 예고하듯 온통 노란 물결이다.
지난 추석에 차례상에 올리려고 햅쌀을 샀다. 영수증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철보다 이른 시기이건만 5kg의 쌀 한 포대가 12,000원이었다. 자장면은 두 그릇, 내가 즐겨 먹는 파스타 한 그릇 값도 안 되는 가격이다. 차례를 지내면서 어른 열 명이 먹고도 남을 양의 밥을 했는데도 쌀은 5분의 4가량이 남았다.
쌀 산업이 벼랑 끝이다. 2021년 산 벼가 창고마다 가득 쌓여 있는데 올해도 풍년이 예상되어 남은 쌀을 어떻게 할 것인지 걱정하는 뉴스를 보았다. 급기야 농민들은 거리로 나왔다. 일부 지역에서는 수확을 1개월여 앞두고 볏논을 농기계로 갈아엎었다. 삭발을 강행하고, 농기계를 앞세우고 시위를 이어 간다. 그도 그럴 것이 물가는 폭등하는데 쌀값은 어찌된 일인지 전년보다 무려 24%가 내렸다. 인건비, 기름값, 비료와 농약 값까지 농자재 값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밥상 물가도 뛰었다. 나 역시 마트에 가서 물건을 들었다 놓은 적이 있다. 천 원 남짓이면 살 수 있던 애호박 하나가 3천원이 되었다. 배추 한 포기가 만 원으로 금배추가 되었다. 그러나 쌀값은 45년 만에 최대치로 폭락했다.
나는 농촌에 살지만 농민의 자식은 아니다. 우리 집도 한때는 땅이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초등학교 4학년 이전에는 농사를 지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물을 대기 쉬웠던 위쪽은 큰아버지가, 천수답이라 수확이 넉넉잖던 아래쪽 논은 아버지가 물려받았다. 그런데 어느 해 태풍에 집 한쪽이 무너져서 집을 새로 지어야 했고, 유일한 재산인 논을 팔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농촌에 살지만 땅 한 뙈기 없는 빈민이 되었다.
늦가을이면 옆집 조샌집 처마에는 80kg 벼 가마가 쌓여 천장까지 닿았다. 앞집 백 선생 집도 그랬다. 엄마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몸이 부서져라 일했지만 우리 형제 넷을 배불리 먹이지 못했다. 엄마 월급의 반 이상이 쌀값으로 나갔다. 엄마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인데도 주인에게 늘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한 번도 월급 전부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수시로 가불을 했기에 때로는 3분의 2, 어떤 달에는 반만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쌀값은 너무 비쌌고, 별다른 군것질거리가 없어 삼시 세끼에 먹는 밥이 전부였던 우리는 항상 배고팠다.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일 년치 쌀을 한꺼번에 들였다. 벌레 생긴다고, 좁은 방이 더 좁아진다고 우리는 질색했지만 그래야 행복하다는 엄마 말에 토를 달지 못했다. 아버지 대신 살림을 챙기느라 늘 고단했던 엄마. 쌀독에 남은 쌀을 가늠할 때마다 엄마 속은 얼마나 타 들어갔을까. 작은외삼촌은 가을걷이가 끝나면 경운기에 쌀 80kg을 싣고 왔다. 그 은혜를 우리 형제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기억하고 찾아뵈었다.
직원 중 한 명이 농사를 짓는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남에게 임대해 주었다가 올해부터 본인들이 짓는 거다. 몇 년 동안 묵힌 땅이라서 새로 흙을 채우고, 농협에서 모판과 우렁이를 사서 친환경 인증을 받았다. 검사비 63만 원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모두 2백만 원이 들었다. 수확기에 콤바인을 빌리려면 또 돈이 든단다. 과연 세 마지기에서 수익이 날까. 힘들게 일하고 오히려 빚만 지게 생긴 판에 어느 젊은이가 농사를 짓겠는가.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은 30%에도 미치지 못한다. 유일하게 자급자족하는 것이 바로 쌀이다. 그런데도 농촌의 상황은 날로 어렵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이 어느 한쪽이 문제가 생기면 그 파급 효과는 지구촌 전체에 미친다. 식량이 무기화되는 것도 한순간이다. 저 어른들이 떠나면 이 농촌은 누가 지킬 것인가. 정부는 또 물가 관리의 희생양을 쌀로 삼을 모양이다. 창고마다 작년 쌀이 그득그득 쌓여 있다는데 또 수입한단다. 이래저래 농부의 한숨 소리만 늘어 간다.
공기 밥 한 그릇의 원가가 220원이란다. 우리는 하루에 쌀에는 460원, 커피를 사 마시는 데는 600원을 쓴다. 지난 40년 동안 국립대 등록금은 19배, 서울 지하철 기본요금은 17배 올랐는데 비해 쌀은 겨우 세 배가 뛰었을 뿐이다. 식생활의 변화로 쌀 소비량이 예전 같지 않다지만 그래도 이상하다. 그처럼 귀했던 쌀이, 배부르게 먹어보는 게 소원이던 그때로부터 몇십 년이나 지났는데 여전히 그 가격인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