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내가 지금-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자아 보아라. 당신도, 당신도, 당신도, 당신도, 나도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가 없다.
2.그는 언제나 시의 현 시점을 이탈하고 사는 사람이고 또 이탈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다.
3.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 배반을 배반하는 배반자······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다.
4.좀 더 가혹하게 말하자면 시인의 양심이 엿보이는 작품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좋은 국민가요가 나오는 사회는 진정한 기골있는 야당과 노동조합다운 노동조합이 있는 사회이며 청년들이 살아 있는 사회이다.
6.민중의 생활이 바뀌면 자연히 언어가 바뀐다.
7.나는 수첩을 갖고 다니기가 싫어서 담뱃갑 뚜껑에 메모를 해 두는 버릇을 지키고 있은 지가 벌써 오래된다. 어떤 때는 그런 담뱃갑이 양복 호주머니 속에나 책상 위의 꽃바구니 속에 수두룩하게 고일 때도 있다. 어쩌다 몇 달 전의 그런 메모가 속호주머니 같은 데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발견되고, 찢어 버리기 전에 또 혹시나 하고 다시 한번 훑어보는 수도 있는데, 남의 비밀같이 정이 안 가는 이런 메모의 암호로 그 당시의 생활이 홀연히 눈앞에 떠오르고는 한다. 잡지사의 원고료의 액수와 날짜, 사야 할 책 이름, 아이들의 학비 낼 날짜와 액수, 전화번호, 약 이름과 약방 이름, 외상 술값······이런 자질구레한 숫자와 암호 속에 우리들의 생활의 전부가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대체로 시의 경험이 낮은 시기에는, 우리들은 시를 ‘찾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수가 많으나, 시의 어느 정도의 훈련과 지혜를 갖게 되면, 시를 ‘기다리는’ 자세로 성숙해 간다는 나의 체험이 건방진 것이 되지 않기를 조심하면서, 나는 이런 일종의 수동적 태세를 의식적으로 시험해 보고 있다.
9.나는 4·19 전에 어느 날 조지훈 형하고 술을 마시면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시인이 되기 전에는 이 나라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휘트먼인가의 말을 차용해 가면서 기염을 토한 일이 있었는데, 요 일전에 런던에 있는 박태진 형한테서 온 4·26 해방을 축하하는 편지 속에 “새로운 정부가 선들 시를 모르는 녀석들이 거만하게 구는 한은 구제가 없겠지요”라는 같은 말이 또 있어서 요즈음은 만나는 사람마다 중이 염불하듯이 이 말을 전파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는 시인이란 반드시 시 작품을 신문이나 잡지에 주기적으로 발표하는 사람만을 말하고 있는것도 물론 아니다. 소위 시를 쓰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이번 4·19나 4·26을 냉담하게 보고 있는 친구들이 적지 않은 것을 나는 알고 있는데(어울ㄹ리지 않게 날뛰는 친구도 보기 싫지만 그 이상으로)나는 이런 위인들을 보면 분이 터져서 따귀라도 붙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다.
나는 극언(極言)하건대 이번 4·26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통찰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시인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 소위 시인들 속에 상당히 많이 있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 나의 친척에 모 국민학교 교감이 있는데 이 작자가 4·19 날의 데모를 보고 집에 와서 여편네한테 “학생들도 이제 볼 장 다 봤어. 그런 폭도들이 어디 있어······.”하며 밤새도록 부부 싸움을 했다나. 그런 시인이나 이런 교감은 모두 다 모름지기 이승만의 뒤나 따라가 살든지 죽든지 양자택일하여라.
4·26 후 나의 성품이 사뭇 고약해져 가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너무 흥분한 탓이려니 해서 도봉산 밑에 있는 아우 집에 가서 한 이틀 동안을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왔는데 서울에 와 보니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이 정 고약해져서 시를 쓰지 못할 만큼 거칠어진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시대의 윤리의 명령은 시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거센 혁명의 마멸(磨滅)속에서 나는 나의 시를 다시 한번 책형대(磔刑臺 ) 위에 걸어 놓았다.
10.독자의 불신임
필자도 시를 쓰는 사람의 한 사람으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 뱉기가 될까 보아 대단히 마음 괴로운 일이지만, 우리나라의 시(비록 시 작품뿐만이 아니지만)는 과거에 있어서 매월 빠지지 않고 줄기차게 나오는 문학지나 기타 월간지에 게재된 작품 중의 거의 90프로(상당히 돋보아서)가 시가 아닌 작품들이었다.
우리나라분만이 아니라 이런 현상은 일본은 물론 구라파 서진 문화 국가에도 예사로 있는 일이라고 보면 그뿐이겠지만 시를 사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큰 술픈 이야기가 없고 이보다도 더 분격할 이야기가 없고 이보다도 더 중대한 범죄가 없다.
요즈음 문학계의 문제(기타 예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는,정치적인 분란이 위주가 되는 바람에 제3,제4의 문제가 되고 있고, 앞으로도 정치적 경제적 문제 같은 것보다 더 현실적인 난제의 처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니만큼 좀처럼 이 방면에 대한 고려를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쉽사리 올 것 같지 않지만, 그만큼 걱정스러움이 더 간절한 것도 사실이다.
일전에 4월 이후의 새로운 현상에 대한 잡담이 나온 자리에서 어느 문학지 기자가 하는 말이, 요즈음 통 잡지가 팔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것이 ‘나츠가레’(여름철 불경기를 뜻하는 일본 말)가 원인이 되고 있기도 하지만 학생들이 정치에 몰두하여 문학잡지 같은 것은 보지 않게 된 바람에 그런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이 말을 듣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말이 만약에 사실이라면 우리나라의 문학지는 오늘날과 같은 비상시에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말이 되고, 따라서 그들이 문학을 애호하는 것은(적어도 문학지를 구매한다는 것은)평화 시절에만 국한될 한사(閑事)에 불과하다는 말도 된다. 그러나 진정한 문학의 본질은 결코 한시(漢詩)에만 받아들일 수 있는 애완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오늘날과 같은 개혁적인 시기에 처해 있을수록 그 가치가 더한층 발효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와 같은 현상은 (그것이 만약에 사실이라면)우리나라 문학계 전반에 대한 기막힌 모욕이요 경멸이라고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혁명이란 이념에 있는 것이요, 민족이나 인류의 이념을 앞장서서 지향하는 것이 문학인일진대, 오늘날처럼 이념이나 영혼이 필요한 시기에 젊은 독자들에게 버림을 받는 문학인이 문학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그 기자의 말을 듣고 내심으로는 오히려 통쾌한 감이 들었고, 우리나라 문학계도 이제야 비로소 응당 받아야 할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하고 쾌재를 부르짖었다.
젊은 층의 전면적인 불신임을 받아야 할 것은 정치계에만 한한 일이 아니라 문학계도 마찬가지이고, 이러한 각성의 시기는 빨리 오면 빨리 올수록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복지 사회란 경제적인 조건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탐구가 상식이 되는 사회이어야만 하는데, 이러한 영혼의 탐구는 경제적 조건이 해결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마치 소학생들이 숙제 시간표 만드는 식으로 시간적 절차를 둘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영혼의 개발은 호흡이나 마찬가지다. 호흡이 계속되는 한 영혼의 개발은 계속되어야 하고, 호흡이 빨라지거나 거세지거나 하게 되면 영혼의 개발도 그만큼 더 빨라지고 거세져야만 할 일이지 중단되어서는 안 될 것이고 중단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시는 필자가 보기에는 벅찬 호흡이 요구하는 벅찬 영혼의 호소에 호응함에 있어서 완전히 낙제점을 받고 보기 좋게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허다한 혁명시가 나오지 않았느냐고. 필자는 여기에 대해서 너무 창피해서 대답하지 못하겠다.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는 영혼이란, 유심주의자(唯心主義者)들이 고집하는 협소한 영혼이 아니라 좀 더 폭이 넓은 영혼-다시 말하자면 현대시가 취급할 수 있는 변이하는 20세기 사회의 제 현상을 포함 내지 망총(網總)할 수 있는 영혼이다. 나는 유심주의자들의 협소한 영혼이라고 말했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의 문학계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이 유심주의자라는 말은 합당하지 않고, 그것은 오히려 ‘도피자’라거나 혹은 ‘기만적인 유심주의자’라고 부르는 편이 옳을 게다. 이러한 도피자나 기만적인 범죄자(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를 혁명을 수행하는 학생들이 누구보다도 잘 간파하고 있는 것같이 생각되기 때문에(혹은 간파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필자는 여기에 대해서 구체적인 언급은 보류하기로 한다. 또한 이 밖에 4월 이후의 혁명시가 어째서 진심으로부터 독자들의 환영을 못 받고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도 여기에서는 보류하겠다.
다만 필자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4월 이후의 우리나라 시 작품에 대해서 젊은 층들이 영혼의 교류를 느끼지 못하고 이를 거부하였다면 그것은 사실에 있어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또한 때늦은 감은 있지만 진정으로 반가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학계는 이러한 철저한 불신임 속에서 다시 백지로 환원됨으로써만 새로운 시대의 작품으 생산을 기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견실한 독자가 없이는 견실한 작품이 나올 수 없는 것이 문학 현상의 철칙이기 때문이다.
젊은 독자들일수록 아무리 거센 호흡 속에서도 영혼의 개발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이런 뜻에서 문학인들은 젊은 독자들의 다급한 영혼의 돌진 속에서 호흡을 꺾이거나 휴식하지 말아야 하겠다. 문학 혁명은, 독자의 입장에서도 필자의 입장에서도 먼 장래의 태평사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