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업적은 아내와 후손의 수에 비례한다
김기덕(건국대 강사)
왕의 후손은 많을수록 좋다?
남편 한명에 부인 한명(일부일처제)이 원칙인 오늘날 입장에서 본다면, 예전의 왕들은 많은 아내를 두었다는 점에서 우선 특이한 존재다. 물론 전근대에는 왕뿐만이 아니라 일반인 특히 귀족들도 다처가 가능했다. 그러나 귀족의 다처는 본부인(처)외에 첩 한명을 두는 정도가 일반적이었으나, 왕은 여러 명 심지어는 10명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왕은 왜 일부다처였을까? 왕은 절대 권력자이므로 그만큼 많은 여자를 아내로 두는 것은 당연하다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왕의 경우 대가 끊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 때문이었다. 아들이 없어서 대가 끊겼을 경우 다음 왕이 누가 되느냐 하는 점은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는 커다란 문제였다.
신라시대에는 여자 쪽으로 왕위가 이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부터 왕위는 항상 남자 쪽으로만 계승되었다. 이 경우 왕위가 단절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아들이 하나만 있으면 되었다. 사실상 장남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은 일종의 ‘스페어타이어’격이었다. 본 타이어가 펑크 나지 않는다면 스페어타이어는 없어도 된다. 마찬가지로 장남이 제대로만 자라서 오래 산다면 나머지 아들이 없다고 해도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장남이 일찍 죽거나, 능력이 현저하게 모자라거나 혹은 그에게서 다시 대를 이을 아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국가의 보존이 위태로워진다. 따라서 왕의 후손이 많음에 따라 불필요한 왕위 경쟁이나, 혹은 왕족파워의 형성 등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는 있었으나 그것은 차후의 문제였다. 일반 신하들의 입장에서도 일단 왕실은 번성하여 후계가 안정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신라 말 진골왕족의 극심한 왕위쟁탈전으로 인한 폐해를 경험한 고려왕조는 처음부터 왕족들의 직접적인 정치참여를 제한하였다. 왕족들에게는 공작, 후작, 백작 등 명예로운 작위를 수여하고 그에 따른 충분한 경제적 대우를 해 주는 대신, 관직을 갖고 실제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금지하였다. 고려 초부터 시행되었던 왕족들의 사환(벼슬살이)금지는 이처럼 신라 말 역사적 교훈의 소산이었고, 이는 원칙적으로 다음 왕조인 조선시대 끝까지 관철되었다.
다음의 표는 고려시대 왕의 부인과 자녀의 수를 제시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부인과 자녀의 수가 단연 많은 왕으로는 제1대 태조, 제8대 현종, 제11대 문종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 왕의 가족관계는 몇 가지 점에서 조선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 먼저 왕의 부인의 경우 조선은 정비와 후궁으로 명확히 구분하였다. 정비는 한 명이며, 죽거나 폐비되었을 경우 다시 간택되었다. 정비와 후궁의 차별은 그 소생자녀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정비와 후궁의 구별이 원 간섭기 이전까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원 간섭기 때에는 원나라 출신 왕비가 정비였고, 나머지 고려인 왕비는 후궁이었다. 그 이전에는 왕비의 호칭이 왕후, 비, 궁주, 부인, 궁인 등으로 다양하였다. 이 중 명칭상으로는 왕후가 정비였을 것이다.
그러나 왕후가 한 명이 아닌 경우도 있었으며, 천인 출신의 궁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왕비들 사이에는 별다른 차별이 없었다.
물론 어느 왕 때나 제1왕비 즉 정비로 인정되는 왕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뒤에 왕의 무덤 옆에 나란히 안장되는 왕비나 종묘에 왕과 같이 모셔지는 왕비는 원칙적으로 1명뿐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다른 왕비들 사이에는 조선시대처럼 큰 차이가 없었다.
또한 여러 왕비들의 소생자녀들도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조선시대에는 저이 소생의 아들을 군, 딸을 옹주라 하여 명칭에서도 구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대우도 달랐다. 또한 그들의 배우자나 후손들도 다 차별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고려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이처럼 고려시대 왕비의 경우 정비와 후궁의 구별이 크지 않았던 것이나 그들의 소생자녀들 또한 차별이 없었던 점은, 고려시대가 처첩의 구분이나 적서의 구분에 있어 조선시대와는 매우 달랐음을 말해준다.
태조 아내 스물아홉의 다양한 삶, 갖가지 사연들
왕실의 후손이 많을수록 좋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태조의 아내는 29명이나 되었을까? 태조 왕건은 본래 궁예의 밑에서 수상을 맡고 있었으나,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이전의 부인은 신혜왕후 유씨와 장화왕후 오씨 두 명뿐이었다.
태조는 왕위에 오른 후에 전국의 유력 호족의 딸과 지속적으로 혼인하였다. 이는 당시 정치적 상황에 따른 태조의 지방호족 포섭책이었다. 태조 즉위년(918)직후의 고려 정치상황은 상당히 불안하여, 태조를 반대하는 반란이 6개월여 동안 수차에 걸쳐 일어났다. 이 같은 상황에서 태조는 자신의 지원세력을 광범하게 확대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의 호족의 딸을 자신의 왕비로 맞아들이는 이른바 ‘혼인정책’을 추진하였다. 태조는 이와 같은 지방 세력가와의 혼인을 통하여 왕권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으며 후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조의 아내 29명중 거의 대부분인 25명의 혼인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그들의 출신지는 황해도와 경기도가 12명으로 양도에 집중되어 있고, 다음이 경상도 그리고 기타 충청. 강원. 전라도 지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태조의 혼인이 일종의 혼인정책의 일환으로 성립된 것이므로, 태조의 아내들의 삶은 각각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그 자녀들이 모두 수도인 개경에서 살았던 것도 아니다. 태조의 제1왕비였던 신혜왕후 유씨는 호족의 딸답게 대단히 뱃심이 세었던 것 같다. 궁예 말년에 신하들이 태조의 집에 와서 쿠데타를 권유하자 태조는 자꾸 거절했다. 이에 몰래 엿듣고 있던 왕후는 뛰쳐나오며 ‘궁예의 폭정은 저도 의분을 참을 수 없는데 하물며 대장부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손수 갑옷을 가져다 남편에게 입혀 주었고, 여러 장군들이 왕건을 앞세우고 나감으로써 쿠데타에 성공할 수 있었다.
918년 42세의 나이에 즉위한 태조는 신혜왕후 유씨와 장화왕후 오씨 2명의 부인이 있었으나, 당시 아들로는 장화왕후 소생의 무(뒤의 혜종)가 유일하였다. 태조는 즉위한 뒤 곧 일곱 살 난 무를 후계자로 정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후계자 책봉을 서두른 이유는 무엇보다 왕조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결국 태조의 뜻을 헤아린 박술희의 주청으로 921년(태조 4) 무는 열 살의 나이에 후계자로 책봉되었다. 태조가 뜻을 세운지 3년 뒤에나 책봉이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혜종의 외가가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태조는 처음에 왕후의 가문이 한미한 탓에 임신시키지 않으려고 피임방법을 취하여 정액을 자리에 배설하였는데, 왕후는 그것을 흡입하여 드디어 임신해서 혜종을 낳을 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탓으로 혜종의 얼굴에는 돗자리무늬가 있었으며 세상에서는 혜종을 ‘주름살임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장화왕후 오씨의 출신지인 나주지역은 사실상 왕건보다는 견훤의 거점이었던 곳이다. 후삼국 정립기에 서남해안 일대 전라도의 호족세력들은 왕건과 연결되었던 것이다. 태조 왕건이 유언으로 남겼다는 <훈요십조>에 보면 차령이남 지역은 반역의 땅이니 그 곳 인물을 등용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오늘날 지역갈등의 근원으로까지 얘기되고 있는데, 정작 태조는 차령 이남의 인물도 많이 기용하였고 나주 여인이 낳은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고 있다. 이 때문에 <훈요십조>가 위작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후 나주는 고려정부와 항상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거란족의 침입으로 제8대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할 때 전주절도사가 마중 나와 전주로 가기를 청했으나 굳이 나주를 피난처로 정한 점, 뒤에 담양 일대를 기반으로 무신정권 말기에 전라도지역에서 백제부흥운동(1236-1237년)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평정하고자 파견된 김경손이 나주는 어향(왕의 고향)이므로 반란군에 동조하지 말 것을 강조한 점, 또한 삼별초 항쟁기에 전라도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나주의 호장세력은 끝까지 삼별초에 대항한 점 등은 고려를 개창한 태조의 처향이자 뒤를 이은 혜종의 탄생지로서 나주의 친고려적인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태조의 혼인은 다분히 정략적인 것이었으므로 하룻밤의 인연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어 대서원부인 김씨와 소서원부인 김씨는 다 황해도 서흥지역 호족 김행파의 딸인데, 태조가 평양에 가는 길에 그의 집에 머물면서 그들 자매와 하룻밤씩 잤다. 그리고 그 후로 다시는 행차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모두 집을 떠나 여승이 되었다. 제1왕비인 신혜왕후도 태조를 모신 뒤 한참 동안 소식이 끊어져 여승이 되었다가 뒤에 태조가 다시 데려왔던 것이다. 그 성씨나 가계도 알 수 없는 서전원부인이나, 성씨를 알 수 없다고 되어 있는 숙목부인, 월화원부인, 소광주원부인 등도 하룻밤의 정략인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들 29명의 왕비들의 아들이 대부분 태자 칭호를 띠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총 25명의 아들 중 왕이 되었거나 승려가 된 자 7명을 제외한 18명중 11명이 태자를 칭하고 있으며 나머지 7명은 군을 칭하고 있다. 태자는 왕위계승권자를 의미한다. 이미 신라시기에 태자제조가 운용되었으므로 고려 태조가 태자의 의미를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태조의 아들들은 저마다 자신이 왕위계승권자였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한 현상은 지방호족과의 혼인정책이 추진되던 고려 초의 상황에서 나올 수 있었다. 즉 각 지역 출신 왕비들은 자신의 아들도 왕위계승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그렇게 불렀다. 그 결과 이때부터 태자는 단지 왕자칭호의 하나로 일반화되었고, 왕의 정식 후계자는 따로 ‘정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뒤에 왕권강화가 이루어진 제4대 광종 16년(965)에 아들 주(뒤의 경종)를 ‘태자’로 책봉한 이후 일반왕자들의 태자칭호가 사라졌다. 이때부터는 ‘태자’의 호칭이 명실상부한 왕위계승권자를 뜻하게 되었다.
고려 전기 국왕 혼인의 추이
태조의 혼인정책은 자신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호족세력의 힘이 상존하는 한 비록 태조만큼 다수를 대상으로 혼인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방식은 계승되었다. 고력 제2대 혜종은 4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그중 궁인 신분인 제4비는 별개로 하더라도 나머지 3명 전부가 군사력을 지닌 지방호족 출신의 딸이었다.
역시 태조의 아들로 제3대 왕인 정종은 3명의 부인이 있었다. 2명은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로 후백제 지역의 호족세력을 무마할 필요성에서 혼인관계가 이루어졌으며, 1명은 청주호족 김긍률의 딸로 역시 정략혼인의 일환이었다.
태조의 아들인 제4대 광종은 2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이복여동생과 조카(혜종의 딸)였다. 이러한 근친혼은 고려 이전 신라 왕실에서 지속적으로 행해진 혼인형태였는데, 고려 초창기의 일시적인 과도기를 거쳐 광종의 혼인에서 다시 나타난 것이다. 국왕의 근친혼은 광종 이후 원 간섭기 이전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특히 제4대 광종에서 제7대 목종까지는 총 11명의 왕비 중 8명이 왕실 내의 근친혼이었다. 그런데 다음 제8대 현종은 총 13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이 중 3명의 궁인은 별개로 하더라도 10명 중 3명이 왕실 내의 근친혼이고 7명이 이성혼이었다. 근친혼이 계속되기는 하였지만, 당대 유력가문 및 공신들의 딸과 폭넓은 이성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 전기 국왕혼인의 양상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호족의 협조 하에 국가를 이끌어가야 할 시기에는 호족과의 혼인정책을 추진하였다(1대 태조 ~ 3대 정종). 다음으로 왕실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근친혼을 중점적으로 시행하였다(4대 광종 ~ 7대 목종). 이후에는 오히려 왕실의 번영을 위하여 왕실혼인을 개방하였다. 이는 왕실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반영이기도 하였다(8대 현종 이후).
한편 근친혼을 하였던 왕비들은 그 성을 칭함에 있어 독특하였다. 그들은 실제 왕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왕과 근친혼 하였을 경우에는 어머니 성 즉 외성을 칭했던 것이다(대목왕후 황보씨의 사례). 그것은 근친혼을 은폐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으나 실제 외가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고려의 사회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중첩된 근친혼으로 인해 때로는 부모 모두 왕씨인 왕비도 있었다. 이때는 어머니의 외성을 따르지 않고 아버지의 외성, 즉 친할머니의 성을 따르고 있다(대명궁부인 유씨의 사례).
태조의 아내는 29명이었고 그 자손이 많았으나, 4대 광종 때 왕권강화 과정과 7대 목종 때 정변 등을 거치면서 거의 도태되었다. 따라서 고려 왕실은 실제 현종 때에서 새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11대 문종은 5명의 부인에게서 13명의 왕자와 7명의 공주를 두어 왕실을 확실하게 번성시켰다. 이후 왕실의 주된 가닥은 전부 문종의 후손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태조의 아내가 29명에 자녀가 35명, 현종의 아내가 13명에 자녀가 13명, 문종의 아내가 5명에 자녀가 20명인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겠다. 그만큼 할 일이 많았던 것이다. 대체로 전근대사회 국왕의 경우, 할 일 많고 실제 뛰어난 업적을 수행한 임금들은 아내도 많았고 자식도 많았다. 국왕의 업적은 대체로 아내와 자식의 수와 비례한다고 말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