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양자물리학으로 해석하기(2)
성경 전체의 내용을 3단어로 간락히 줄이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였듯이 신약은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 성경의 주 목적이라 할 많큼 소망 이라는 단어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랑과 소망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 하도록 하고 마지막 남은 믿음을 가지고 오늘 이야기 하고자 한다 .
믿음은 과학과 가장 상충하는 부분이다.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고 한다. 초창기 베드로의 로마교회때 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성경 내용을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하여 종교 지도자들은 부정적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학을 뛰어 넘는 고귀하고 유일한 신의 말씀으로 만들기 위함 때문이고 지도자들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였다.
맹목적 믿음으로 성경말씀을 따르게 하여 종교간의 갈등을 초래하게 하였으며 타협을 거부하고 독선적인 행동이
평화의 세계를 테러와 전쟁으로 몰고가는 씨앗이 된다-십계명의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과학과 성경말씀은 물과 기름 사이라 불신과 대립의 나날이었지만
양자물리학의 탄생으로 과학과 신은 같은 뿌리이고 양분할수 없는 영역임을 여러 학자들에 의해 재조명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니(히브리11장1절)
성경 말씀 중에 가장 의미 심장한 말이다.
의심하지 말고 자신이 바라던 것을 믿고 바라보면 실제로 현 세상에 나타나고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세상을 믿음만이 증명할수 있다는 뜻이다 (3)편에서 카리브해의 원주민의 이야기가 믿음에
관한 좋은 예가 되겠고 또한 일본의 마사루이모토 박사는 바라보는 자의 생각에 따라 물컵에 있는 물분자의
모양이 바뀜을 실험을 통해 밝혀 냈다.
생각 하나로 물을 변화 시킬수 있다는 것은 모든 세상의 형태는 생각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며 생각(마음)이
사라지면 세상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은 이러한 방식으로 세상이 바뀔 것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어리섞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결국 그 의지는 할수 없다고
믿어버린다.
무한히 퍼져있는 뇌의 신경선은 아주 작은 영역에서 멈추어 버리고 바라보는 세상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성경에는 예수가 물 위를 걷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가 물 위를 걸어 가까이 오자 베드로 자신도 물위로 걷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예수는 의심하지 말고 베드로에게 물위를 걸어오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물 중간에 바람이 무서워 빠지려는 순간에 예수가 손을 내밀어 구해 주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는가 '라고 꾸짓는 대목이다.
당신도 물위를 걸을수 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생각과 믿음은 항시 부정적인 생각의 얇은 막에 싸여있다 그래서 당신이 긍정적으로 생각
하는 것은 실재로 긍정적인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을 위장해 놓은 것일 뿐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것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동일한 현실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이 구체적이라면 분명히 나는 그다지 다른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어 실제의 현실을
바꿀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 나에게는 가능성 즉 의식자체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면 내가 어떻게 현실을 바꿀수 있는냐의
문제가 나온다.
내가 어떻게 더 나아질수 있고 무한한 능력의 우주를 체험할 수 있는냐는 스스로의 이미지를 확장하는 것이다.
낡은 사고관 즉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이미지로는 그 어떤 것도 바꿀수 없다.
왜냐하면 현실은 이미 존재하고 의식이 현실로 향해 있다면 자신은 더 이상 어떤 역활도 맡고 있지 않는다.
현실은 이미 존재하고 나름대로 움직이는 물질적인 것이다 결정적인 법칙에 의해서 말이다.
수학은 주어진 환경에서 사물이 움직이는 것을 결정한다.
경험자인 나는 우리 속에 갇혀버리면 어떤 역활도 할수 없게 된다.
새로운 관조자에게는 수학이 어떤 것을 알려줄 수도 있고 이러한 움직임들이 취하는 여러 가능성을 알려줄 수
있지만 내가 나의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인 경험은 알려줄 수는 없다 내가 그 경험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글자 그대로 내가 나의 현실을 선택한 것이다.
이말은 (1)편 부터 보지 않았거나 양자물리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선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글쓴이 자신도 더 쉽게 풀이할 어휘 구사능력이 없다.
물위를 걷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 주위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고 모든 현실이 시간선 위에서 동시에 존재한다 단 우리가 선택하기
전까지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의 무한한 사랑과 간절한 소망을 갖고 물위를 걸을수 있다고 믿는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이 말은 현실의 의식을 잠재의식 쪽으로 넓혀야 하고
나와 당신은 하나이다 라는 단일성이 전재되어야 한다 -사랑
개체인 자신을 바라볼수 있는 전체적인 관조자 진아로 거듭나기 위한 명상이 필요하다.
성경에 대해 이야기 했다면 오늘은 불경을 가지고 양자물리학 이야기 해 보려 한다.
불경은 팔만 사천 글자로 되어있다 팔만 사천 글자 전체를 단 8자로 줄인다면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 표현
된다.
색(물질)은 공(텅빔)과 같은 것이니 보인다고 해서 집착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공이라 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집중을 하게 되면 나타나게 되어있다 라는 뜻이다.
양자역학에서 에너지는 관찰자에 따라 입자(물질)로도 보이고 파동(공)으로도 보인다고 하였다 .
불경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과학이다 양자물리학의 실험결과 그대로이다.
좀더 깊이 들어가면
물질과 공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색공을 바라보는 자가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다.
물질로 되어 있던 허공으로 되어 있던 즉 죽고 살고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데 도대체 관조자가 누구냐를 밝혀
내는 것이 불교 깨달음의 핵심이다.
(1)편의 더블슬릿 동영상 실험을 통해서 관조자가 누구인지는 알수 있지만 그 관조자가 실제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설령 자신이 자신의 행동을 바라 볼수있는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바라보고 있는자를 또 바라보아야 한다.
마치 2개의 거울을 마주보고 자신의 얼굴을 비추면 무한대로 바라보아야 할 상이 나타 나듯이 끝이 없는 것이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도 끝은 나타 나지 않는다 정답도 없다.
우리 중생들은 돈을 모으고 또 모아도 욕심은 끝이 없다.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는 끝도 없는 길을 걸어간다.
끝도 없고 해답도 없는 것은 공(空)으로 취급 해 버리면 문제는 간단하다 .
이것이 양자역학이며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놓아버려라
허공이라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무한대로 펼쳐지는 세상이 그속에 담겨져 있다.
0보다 큰수는 없고 0보다 작은수도 없다 이것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금강경에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몸 모양으로 여래를 볼수 있겠는가
못 봅니다 세존이시여 몸 모양으로 여래를 보지 못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여래께서 이르신 바 몸 모양은
모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라는 대목이 있다.
불상은 부처가 아니다 불상이 진정한 부처의 진리를 가로막고 있다 불상을 깨트려야 진정한 부처의 진리가
나타난다.
부처의 진리를 보았다면 그 부처도 죽여야 한다 부처의 진리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
형상 있는 것과 진리 라는 것 모두를 깨트려 나가야 한다 형상은 환상이다 허상이다 착각이다.
형상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은 집착과 욕심이다.
집착과 욕심은 죄악을 낳는다 예수님은 아예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모두가 죄인이라 하였다 .
당신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세상은 악의 구렁텅이다 빠져 나와야 한다 물질세상은 우리가 가야할 진정한 본향이
아니다. 죄악은 중독성이다. 중독은 마음과 영혼을 굳어지게 만든다 .
마음과 영혼이 굳어지면 몸도 돌처럼 굳어진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고 돌에게도 아주 적은 양의 불성이 있다 . 가장 단단한 금강석(다이아몬드)에도 불성은
있다(불성이란 영원한 행복과 자유를 뜻한다)
물질로서는 금강석이 최고이다 바라보는자의 입장에서는 최고이다.
그러나 금강석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굳었기에 자유가 있는지 조차도 모른다.
마음이 굳어지기 전에 항시 깨트려야 한다.
양자역학의 원리에 의하면 돌이 흙이 되고 가루가 되고 최소의 미립자인 원자가 되면 양쪽에 전자가 붙어
에너지로 변한다고 하였다.
에너지는 영적인 파동도 되고 물질인 입자도 된다.
즉 금강석 상태로는 영혼(불성)을 가질수는 없다 하지만 깨트리면 영혼을 품을수 있다.
우리는 관찰자를 나 라고 생각한다 사실이 아니다 이것을 깨트려야한다.
아상,자아,개아,육체가 곧 나 라는 그릇된 생각이 불행의 원인이며 이 그릇된 생각이 사라지면 깨달음은 절로
드러날 뿐이다.
예수도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깨트린 자만이 나를 따르라고 한다.
신과 인간은 대립관계이다 신은 관조자이기에 물질을 만들어 놓고는 허허 하고 웃으며 좋았더라 한다(창세기)
신은 인간을 항상 보기좋은 금강석이 되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종교와 철학들은 신은 우리와 별개의 존재이며 우리는 신을 숭배 해야 하고 인생의 마지막 죽음을
대비해서 조그만한 보상이라도 받기 위해서 기도하고 따르라고 한다.
이것은 진정한 신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억압하고 많은 불행을 끼친 원흉이다.
신에 대한 의문을 품거나 신을 풍자한다면 그를 불가지론자 혹은 무신론자,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로 매도
된다.
양자물리학은 신에 대한 의문을 푸는 획기적인 과학이다 증명이다. 숭배신에 대한 도전이다.
신에 대한 낡은 개념은 버려야 한다.
신은 나약한 인간의 위대함보다 틀림없이 위대하다 인류의 위대한 과학기술보다 틀림없이 위대하다.
어떻게 지구상의 탄소조합인 하찮은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을 배신한다 말인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신의 태두리에서 벗어나 신인합일을 이루어야 한다.
즉 스스로가 관조자가 되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깨달음
일반적으로 12월25일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연말연시라고 한다.
지나가는 2010년의 한해를 보내고 새로운 2011년을 맞이하기 위하여 마음들이 분주하다.
어렸을 적에는 12월 한달 내내 케롤송,크리스마스카드,크리스마스트리 등으로 거리를 장식하곤 하였다.
요즈음은 어린이들은 물론 기독교인들 조차 시큰둥한 반응이다.
올해는 더욱 그러하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성탄축하 메시지에서 크리스마스란 단어를 쓰지 않고 단순히 holiday(즉 쉬는날)로
언급하였다고 뉴스에도 나온다.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심지어 기독국가인 미국 최고의 번화가 거리에 '예수의 탄생은 단지 신화이다 " 라는 큰 광고가 등장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은 어떤 의미인가
시간 즉 세월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마음의 깨달음과 연계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시간-어떤 시점에서 어떤 시점까지의 사이를 숫자로 표시하여 놓은것 을 시간이라고 한다.
숫자로 표시되는 시계가 없었을 당시는 단지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라는 단어들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로
명명하고 하였다.
시적인 표현은 세월이라고도 표현한다 .
세월은 흘러가는 시간이다.
즉 시간이 가고 온다는 것이다.
가버린 시간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 과거가 되어 버리고 오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시간은 미래이다.
과연 세월이란 흘러 가버리고 흘러 오는 것인가?
결론부터 내려놓자.
무심아의 표현으로는 세월이 흘러 가고 흘러 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단지 공간이 묻혀가고 잊혀져 버리는 것을 과거라 하고 공간이 뿌엿게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을 미래라고 한다.
현재를 기점으로 지나가 버린 과거의 시간은 영원히 없어지는 것인가?
현재를 기점으로 보이지 않는 미래는 결코 알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지금 함께 공존하고 있다.
현재를 기점으로 공간(물질)이 묻혀가는 것을 돌아오지 않는 과거라고 착각하고 보이지 않고 알지 못하는
공간을 미래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현재의 공간(물질)이 기억(정보)에서 사라지고 묻혀버리는 것을 과거라고 하고 현재의 공간(물질)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미래라고 한다는 것이다.
과거,현재,미래는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 흘러가고 흘러오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오감으로 느끼는 공간은 한계가 있다. 그것도 사람의 능력에 따라 더욱 차별화 된다.
육신보다 마음으로 느끼는 공간은 훨씬 더 넓다 그것도 마음 다스림의 능력에 따라 더욱 차별화 된다.
마음에도 2차원 3차원 4차원...이 있다.
현재 느낄수 있는 공간의 크기가 좁으면 느낄수 없는 공간은 더욱 많아져서 과거와 미래는 더욱 많아지는
것이고 현재 느끼고 볼수있는 공간의 크기가 넓으면 느끼고 이해하지 못하는 공간은 없어지고 모든것이 확연
하게 지금의 공간에 나타나는 것이다.
즉 마음이 넓으면 아쉬워 하는 과거와 두려운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묻혀져 있는 과거를 닦으면 현재로 만드는 것이다 .
유리창 너머에 미래는 이미 와 있다 창문의 습기로 뿌엿게 가려져 있을 뿐 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닦아서 보지
않고 있을 뿐, 닦아보자 가려져 있던 미래가 지금 찬란한 빛으로 다가온다.
마음을 닦아보자 마음을 비워보자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없는 영원한 영생의 길로 걸어가는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신화일 뿐 실재하지 않은 사건이다 라고 공공연히 이야기 된다.
어떤 이유에서 지금 현재에 이슈화 되고 있는가
예수님의 탄생과 아주 오래된 고대 이집트의 신화는 연계되어 있다.
아주 오래된 과거의 신화가 지금 우리 주위에서 맴돌고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오고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이집트신화와 지금
이슈화 되고있는 예수의 탄생 실화를 가지고 먼저 이야기 해 보자.
세월이 오고 가는 것으로 느끼는 것은 착각이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 동시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jordan maxwell 이라는 천문신학연구가는 '과거와 미래를 자신이 조작하여 만들어 내고 있다' 고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현재의 삶에 대하여 충족을 느끼지 못하거나 현재의 사회가 불만인 사람 그리고 실재
경험하고 있는 현재의 삶이 너무 무겁고 강력하여 현재가 두려운 사람들,
모두 현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이 과거로 묻어 버리려 하고 과거로 도망가려고 하며 현재의 삶에 충족을
느끼지 못하여 미래에서 새로운 것을 가져 오려고 한다.
과거도 미래도 현재로 인식하는 지적인 능력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현재에 있다 바로 이 순간 신비스러울 것도 없이 지금은 매우 간단하고 정확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이집트의 신화가 지금 현재 미국의 최고 번화가에서 맴돌고있다고 (1)편에서 지적하였다.
신화란 믿기지 않는 신들의 이야기이다.
예수의 행적과 서구의 역사를 기록한 성경은 고대 이집트 그리스 신화에서 언급되었던 내용과 동일하다고
몇몇의 책들은 이미 지적하였다.
그중에서 최근에 2007년도에 쓰여진 '시대정신'이란 책과 다큐멘터리 영화가 미국에서 주목을 받고있다.
'시대정신'의 내용은 종교의 허구성, 돈의실체, 권력자들과 부의 유착관계, 9.11테러에 대하여 적나라게 해부
하고있다.
지금까지 굳게 믿어왔던 성경의 말씀과 돈 그리고 권력이 허구였다는 것에 미국인들은 허탈해 하고 있었기에
급기야는 오바마대통령의 성탄축하 메시지에서 크리스마스란 단어가 빠지고 단순히 hoily day (휴일)란
단어를 사용하였고 예수의 탄생은 신화이다 라는 광고판이 등장하였을 것이다.
시대정신의 많은 내용중에서 시간이란는 부분에 초점을 마추어 재구성해 보자.
고대 이집트에서는 태양이 없다면 삶도 없다고 하여 태양을 숭배하며 살았다.
태양이 신이었다 태양을 따라서 도는 밤의 주요한 12별자리도 그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된다.
여러 태양신의 신화가 상형문양으로 기록되 전해온다.
그 기록들이 신화이다. 신화들의 내용이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성경의 내용과 일치한다.
먼저 호루스 라는 태양신은 기원전 3000년경에 12월25일 출생,처녀수태,동방의 별이 출생을 지켜보았고 ,
탄생후 3명의 왕에 의해 숭배되어지며 13살에 신성한 지도자가 되었으며 30살에 아누프라는 성직자에게 세례를
받고 성직 생활을 시작 12명의 추종자와 함께 방랑하며 병자를 치료하고 물위를 걷는 기적을 행하였고
타이폰의 배신으로 십자가에 못박힌 후 3일 후에 부활하여 승천하였다는 신화가 기록으로 전해 오기있다.
이 호루스신의 기록이 원초적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세월이 흘러가도 많은 신들의 기록들은 같은 구조의 내용
으로 전하여지고있다.
아티스-그리스,기원전 1200년경 12월25일 출생,십자가에 못박힌후 3일후에 부활.
크리슈나-인도,기원전 900년경 12월25일 출생,처녀수태,동방의 별,제자들과 기적을 행함,죽음후 부활.
디오니소스-그리스,기원전500년 처녀수태,12월25일 출생,가르침을 행하며 방랑,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함,왕들의 왕,신의 독생자,알파와 오메가 등으로 불리움.
메트라-페르시아,처녀수태,기원전1200년경 12월25일 출생,12제자와 기적을 행함,죽은지 3일후 부활,빛,진리로
불리움.
'
'
<천궁도-12별자리>
중요한점은 각기 다른시대 다른장소의 여러 구세주들의 내용이 일치하는 점이 많다는 것이다.
왜 12월25일이 출생일 일까 ?
왜12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을까? 왜 3일후 부활을 하였을까?
태양을 중심으로 달과 별의 회전주기를 이용하여 시간의 단위가 정해진다.
7일,12일,30일,365일,윤년(4년),60년...등
고대에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보다 더 긴 시간의 주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2별자리와 태양이 통과하는 지점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age라는 주기이다.
춘분날에 해가 뜨는 위치가 2150년을 주기로 틀리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지구가 자전시 약간의 기울기와
상관이 있다고 한다.
이때 12별자리는 1년의 정상적인 주기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뒤로 이동하는데 이것을 세차라고 하였다.
세차가 12별자리를 모두 통과하는데 시간은 2150x12=25765년이 걸리며 이 주기를 great year라고도 한다.
고대인들은 이것을 매우 잘 알고있었다. 별자리 하나를 통과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2150년이므로
이것을 age (시대)라고 불렀다.
.
12별자리중에서 현재 우리와 밀접한 별자리는 4가지다.
BC 4300~BC 2150년은 토러스 age 즉 황소별자리이다.
BC 2150~AD1년은 에리스시대 즉 양의 별자리.
AD 1년~AD 2150년은 파이시스시대 물고기자리이며 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우리가 현재 살고있는 시대이다.
AD2150~AD 4300년은 아쿠아리스 시대이다 물병자리이다.
성경에도 이 네가지 별자리에 대하여 언급이 되어있다.
모세의 시대에 황금황소를 만들어 우상으로 숭배하다 모세에게 저주의 말을 듣는장면이 있다 새로운 시대로
이끌어 가야 하는 모세는 황소자리의 시대를 버리고 새로운 양의 시대를 맞아야 하는 찰나의 시대 사람이었다.
모세이후의 유대인들에서 전해오는 양의 자리 사람들이 사용하는 양뿔로 만든 피리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는 파이시스 즉 물고기자리이다 예수의 탄생이 시작점이다.
물고기자리의 예수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영향을 줄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예수는 물고기 두마리로 기적을 행하였으며 두명의 어부가 그의 제자가 되었고 주로 바닷가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이 많았다.
기독교인들이 자동차 뒷쪽에 부착되어진 물고기 문양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물고기 자리를 뜻하기도
한다.
성경에는 아쿠아리스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고하는 대목도 나온다.
누가복음22장10절에 제자들이 마지막 유월절이 어디에서 행하여 지냐고 묻자 예수는 '보라 너희들이 저 도시에
들어가면 물병을 든 한 남자를 만나게 될것이다 그를 따라 가라' 고 하였다.
성경과 고대의 별자리 그리고 고대신화 들은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에서 떼어놓을수 없이 함께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과거란 지나버리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의 천채의 관측기술은 현재보다 훨씬 더 발달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고대 이집트인들이 미래의
시간대에 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시간에는 최초도 없고 종말도 없다 우리주위를 돌고도는 것이다.
신화를 우습게 보지마라 우리자신들의 모습이다.
<양의 자리-구약시대이며 유대인들은 아직도 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분다>
고대인들 그들은 신이였으며 그들의 생활을 신화는 담고있다
12월25일 탄생 그리고 죽은지 3일 후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양력으로 12월22은 동지이다 낮의 길이가 가장 짧고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이다 12월22을 기점으로 태양의
낮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는 시점이다.
이때 태양은 되돌아가기 위하여 터닝을 하게된다 잠시 멈춤 상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22,23,24일 사흘을
태양은 남쪽의 십자 별자리(crux)에서 잠시 멈춘다.
이후 12월 25일에서야 완전히 다시 출발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날이 길어지고 봄을 이야기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12월25일은 태양의 부활이요 새로운 출발이요 탄생이다.
예수의 탄생일이 우연히 12월 25일이 되었을까 다른 정황으로 보아도 우연은 아니고 고대신화의 내용이다.
예수탄생은 신화이다.
<물고기 자리-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
예수는 고대에도 이미 존재하였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역으로 고대의 신들이 예수시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속에 예수와 신들과 태양은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태양을 신이라고 하였다 예수의 상징도 태양이다.
예수가 AD1년에 실존하였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성경이 신화를 되풀이 한것에 불과하다 하여도 좋다.
중요한것은 지금 자신의 위치가 전지전능한 신인가 아니면 하루의 걱정거리를 짊어지고 있는 인간인가
예수는 인간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신으로 지칭되었다.
고대인의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이다 인간은 신으로 부터 탄생 되었다.
인간은 신이다 인간은 태양이다 .
고대의 시간들이 돌고 돌아 지금에도 우리주위를 맴돌고 있다.
과거란 흘러 가 버리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인가 아니다.
고대인들은 이미 미래를 보고있었는데 과연 우리는 미래를 볼수 없는 것인가 우리도 볼수있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에 존재하고있다 우리주위를 맴돌고있다.
개체인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마라 전체인 신의 입장에서 모든 사물을 바라보라.
신의 관점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영원하다.
<물병자리-돌아오는 시대>
벌써 연말이다 12월31일이다. 한것도 없이 지나버린 세월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고 할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흘러간다 따라서 과학자에게 시간이 흐르는 속도에 대해 물어 본다면 1초 동안에
1초의 속도로 흘러간다고 답할 것이다.
우리도 주관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속도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는 연,월,시,분,초로 표시되는 절대불변의
시간이 존재하며 그것은 인위적으로 바꿀수 없다고 믿는다.
절대불변의 시간이 과연 존재할까?
현대 물리학자들은 절대불변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시간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이론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이다.
그리고 양자물리학도 시공간에 대한 이론이다.
아래 예문이 아인슈타인의 시간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 가장 많이 쓰이는 예문이다.
당신이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우주선을 타고 4년간 은하계 주위를 돌고 난 뒤에 지구로 돌아온다면 당신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타고있는 우주선의 시간달력이 2011년1월1일에 지구를 떠나 2014년 1월1일에 돌아온 셈이지만 지구의 시간
달력은 분명히 2044년1월1일을 가리키고 있다. 40년의 시간차가 생긴다.
이유는 우주선이 빛처름 빠른 속도로 돌아다는 사이에 발생하는 시간 때문이다.
지구에 남아서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백발과 주름이 져 있는데 여행하고 돌아오는 당신은 젊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우주선 안에서 시간이 느려진다는 것은 여러 차례의 실험을 통하여 실제로 확인되었다.
고도의 정확성을 가지고 있는 원자시계 하나는 제트기에 또다른 하나는 지구에 놓고 실험을 하였더니 불과
시속 1000키로미터(빛의 속도는 그것의 108만배)의 제트기 속도에서도 작은 차이지만 차이가 났다고 한다
이것은 빠른속도는 물질을 축소시킨다 와 물질의 중력은 주위의 공간을 휘게 만든다는 아인슈타인의 불랙홀
이론 등과는 다른 설명이다.
그래서 40년의 차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차원이 다른 공간이동을 해야한다(관찰자에 따라서 다르므로)
지구에 발을 디디고 있는 차원의 공간에 있는 사람과 은하계를 여행하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다 .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한쪽은 미래로의 여행이 될 것이고, 다른 한쪽은 과거로의 여행이 된다 .
관찰자가 있다는 것은 관찰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시간은 공간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가능한 단어이다.
여기서 마흐의 원리라는 것이 있다 "공간과 혹은 시간의 개념인 위치 거리는 어떠한 물질을 포함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도 그의 상대성 이론에서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 역시 상대적인 개념임을 보여 주었다.
이 이야기를 동양철학적으로 해석하면 당신이 존재하기에 나가 존재하는 것이지 상대(대상)가 존재하지 않으면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에서 쓰이는 대상과 관찰자란 단어는 철학적,종교적으로도 가장 의미 있는 단어이다.
단지 다른 어휘들로 설명하고 있기에 같은 의미인지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르므로 시간을 알기 위해서는 공간을 알아야한다.
공간의 차원은 선,면,입체 즉 선은 1차원 .면은 2차원 .입체(공간)는 3차원으로 정의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3차원의 공간이다.
1차원인 선은 직선으로만 움직일수 있고 2차원인 면은 상하좌우로만 움직일수 있으며 3차원의 입체부피는
틀 안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일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3차원의 세상이다 틀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좌우 직선운동만 하는 1차원의 기계(즉 왔다갔다만 할수있는 기계)와 마분지와 같은 평면 위에서 운동하는
2차원의 기계(즉 컴의 마우스같은 운동)의 쓰임새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리고 3차원은 공간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자유롭다. 단 틀속에 갇힌 공간이다.
과학자들이 아무리 3차원 틀 밖의 무한한 우주를 연구하고 있어도 그들의 학문과 이론은 틀속에 갇혀있는
3차원의 이론에 불과하다.
4차원으로 틀을 깨고 나와야 증명이 된다.
영혼의 세계는 이론일 뿐 3차원의 세계에서는 영원히 증명을 하지 못한다.
지구의 틀이라는 차원에서 은하계 틀이라는 차원이라는 공간이동을 할시는 시간의 편차가 있다고 하였다.
즉 1차원의 선에서 사는 사람은 2차원에만 있는 아래 위를 올려다 보지도 못한다.
즉 1차원은 아래 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2차원은 1차원을 볼수도 있고 콘트롤 할수있다 반대로 2차원은 3차원의 세계는 모르고 있다.
즉 낮은 차원은 높은 차원에게 지배를 받는다.
(차원의 지배법칙-차원이 높은 지식적인 사람은 차원이 낮은 육체적인 사람을 지배한다)
낮은 차원의 공간을 높은 차원의 공간에서는 시간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로 우리동네의 지도를 만들기 위해 하루종일 발로 뛰어 다니며 (컴 마우스가 움직이는 2차원운동) 확인하고
반복작업을 해야만 동네의 지도평면을 완성할수 있다.
하지만 하늘 공간의 어디에도 이동이 가능한 비행기에서(3차원) 내려다 보면서 지도를 만든다면 1시간 정도면
가능하다. 하루 24간을 1시간으로 시간이동한 것이다.
또다른 예를 만들어 보자.
걸어서 100년이 걸리는 지구 여행자가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생명이 다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빠른속도의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지구를 여행한다면 1년이면 족하다 .
비행기의 여행자의 관점에서는 이미 미래를 본 것이나 다름없다 죽음이라는 미래를..
이것이 아주 간단한 시간여행의 기본 이론이라고 지칭할수 있다.
1차원 2차원 3차원이 있는데 4차원 5차원...은 없을까? 있기는 하는데 모르고 있을 뿐이다.
가장 최근의 이론인 M이론과 초끈이론에서는 실제로 우주는 시간을 포함해서 ..10차원 11차원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모르는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영적인 세계이다.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보지 않더라도 더 높은 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만도 큰 깨달음이다.
4차원의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매우 놀라운 방법을 통해 4차원의 시공간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했다.
지금으로서는 단순한 방법으로 이해하는 수 밖에 없다.
위치를 나타내기 위해 세개의 숫자를 필요로 했던 잠수함의 예로 들어보자 정지된 잠수함은 (x,y,z) 이라는
3개의 숫자만 필요하다. 그러나 움직이는 잠수함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함께 표시하지 않으면
나머지 숫자의 공간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여기서 공간이란 시간과는 땔래야 땔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공간은 영원한 것은 없다 항상 변하고 변하는 것이다 라는 것과 시공간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
이것을 석가는 고정된 상은 없다고 금강경에서 설파되어 있다 즉 인생은 무상이다.
철수라고 부르는 고정된 육신은 없다. 시간에 따라 변하고 변하기 때문에 철수라는 고정된 형상은 존재하지
않는 무상이다.
무상을 만드는 것은 시간이 공간에서 하는 역활이다.
또다른 시간에 대한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면, 과학은 시간은 앞으로만 흐른다는 전재하에 모든것이 정의된다 .
과학이란 자체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스스로 일어나는 학문이기에 앞쪽만 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양자이론은 뒷쪽도 볼수있는 이론이기에 이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보다 더 호평을 받고 있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마음을 아는 동양에서는..)
즉 인간은 욕심에 의해서 물질을 자꾸만 키우고 싶고 확장을 선호한다. 짧은 시간에 많은 공간을 보고 싶어하고
확보하려고 하는 것이다(지금은 스마트 폰으로 먼 세계를 짧은 시간안에 볼수 있다)
반면 반대로의 시간은 공간을 아주 작게 축소를 시키는 것이다
양자역학이론에서 아주 작은 알갱이가 결국은 형태가 없는 파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다.
형상이 없는 무상이다.
여기서의 설명은 인용되어야 할 과학의 이론은 많이 있다.
형상의 모두가 희미하게 보인다는 호킹 박사의 M이론에서 부터 최근의 초끈이론,양자역학,상대성 이론,뉴턴의
운동법칙은 알고 보면 모두가 똑 같은 이론이다.
즉 마음이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않을 만큼의 고요함과 집중력이 있다면 공간은 아주 좁아져 바늘 끝과 같아서
아주 뚜렸하게 멀리 날아 갈수있는 반면 마음이 시간을 촉박하게 만들면 일시적으로 많은 정보와 공간을 볼수
있는 것이다.
마음은 세상을 만들기도 하고 부수기도 한다.
마음 다스림이 답이 아닐까?
무심아는 가끔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본다.
영화 터미네이터는 이야기 줄거리가 뒤죽박죽인 졸작 영화로 취급 하는 사람들도 있다.
잠시만 생각해 보면 형편없는 졸작은 아니었다 특수 효과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미래의 세계에서 과거로 파견되어온 인조인간 터미네이터가 활약하는 영화이다.
존 코너는 미래의 세계에서 로봇과 맞서 싸우는 반란군 지도자로 등장하며 터미네이터는 존을 낳기전에 그의
어머니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는다.
존이 태어나면 반란군 진압이 어려워 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터미네이터는 존의 어머니를 죽이는데 실패한다 .
그리고 존의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하여 과거로 보내진 젊은 인간전사 (카일리스)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그녀는 그의 아이를 낳게 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존 코너이다 그리고 미래에서 존 코너와 동갑인 카일리스
는 현재에서 존의 아버지가 된다.
그는 존 코너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기 위하여 과거로 보내지며 결국 자신의 역활을 다 하고 생을 마친다
대충보면 이 영화의 줄거리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견실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
영화이다.
시간의 역설에 관하여 관심을 가졌다면..
이러한 시간의 역설적인 영화들은 많이 있다.
메멘토,프리퀀시,나비효과,데쟈뷰,이프온리,아이덴티티,임포스트,더 재킷,식스센스,..등등 (영화의 줄거리는
생락)
이러한 영화들을 이해 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시공간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 불가능하다.
과거 현재 미래란 순서에 입각하여 가고 오는 것으로 이해가 틀에 박혀 버리면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은 불가능
하다. 영화는 또 하나의 시간여행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시간의 본 모습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터미네이터> <식스센스>
태양은 제자리에 있는데 지구가 움직이면서 돌아가니깐 태양이 매일 뜨고 지고를 반복하는 것 처럼 보인다.
만물의 척도인 시간이라는 것도 가고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오고 가는 변덕스러움에 세월이 오고 가는 것
처럼 착각하며 살아 가고있다.
호수가에서 우리는 물결이 일렁임을 본다.
잔잔한 물결이 밀려갔다 밀려오는 것 처럼 보일것이다.
물결위에 배를 띄어보자 물결파는 오고 가는데 종이배는 재자리에 멈추어 있다 세월이 오고가는 것은 아니다
착각이다. 근원에 머물어라.
개체인 나 라는 입장에서 보지마라 온전히 전체인 입장에서 바라 보아야한다.
우주는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려 있다 무한한 것이다 공간이 영원하면 시간도 영원하다 .
무한대에서 알파와 오메가가 적용이 될까? 즉 시작점이 있고 끝점이 존재하는냐는 것이다.
의미상으로 숫자는 0에서부터 출발을 한다 하지만 무한한 공간에 0이라는 숫자를 어디에 놓고 출발을 할까.
당신의 태어남이 출발인가? 당신의 죽음이 출발인가?
당신의 태어남은 불행의 출발이요 당신의 죽음은 행복의 시작점이 된다고 해도 무방하다.
시간과 공간은 무한하다고 하는 것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증명이 되었다.
무한이라는 뜻을 숫자로 본다면 1에서 시작하여 1.2.3.4.5.6.7.8....끝없는 자연수의 무한대이다.
그렇다고 1과 2사이는 유한한 공간일까? 아니다 0,1.0,2.0,3.0,4....끝없이 이어지는 소수의 무한대이다.
0,1과 0,2 사이는 유한한 공간인가 0,01. 0,02 .0,03 ....무수하다.
시간과 공간은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음은 측정할수없는 무한한 것이다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은 끝이 없다 상상의 밀도는 존재할지 몰라도
창조란 처음이 있다는 뜻이다 처음도 끝도 없는데 어떻게 인간이 창조되고 천지가 창조되었다는 것인가?
어린이도 웃을 일이다 아주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지금 까지 논쟁의 거리로 삼고있다
창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시공간이 닫혀있다는 것을 증명할수 있다면 천지가 창조되었다는 것을 인정할수
있다.
즉 시공간의 무한을 인정하는 것은 만물이 평등하다는 것이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무한대에서 알파와 오메가를 어디에 위치를 할까 숫자의 시작점 0을 어디에서 출발을 시킬까
없다 그래서 모든것은 평등하다.
모든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물질도 정보도 아인슈타인도 이순신도 로켓트도 물레방아도
양자물리학도 에디슨의 전기도 이미 그기에 있었다.
다만 우리가 발견을 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에디슨은 전기를 발명한 것이 아니다 발견한 것이다.
창조는 없다
태어남도 죽음도 없다 잠시 묻혀가는 것일 뿐
<메멘토>
지금까지 시간에 대해 몇가지의 예문과 신화 과학을 가지고 나름대로 설명을 해 보았다
천지만물 시공간이란 아무리 잘 설명하는 사람도 정확히 설명할수 없는 것이요
아무리 휼륭한 문장가라도 천지만물 시공간을 제대로 표현해 낼수가 없는 것이다.
천지만물과 시공간에는 오직 이 하나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한 물건이 가장 고고하고 가장 높다 더 이상 높은 것은 없다.
넓고 넓어서 그 끝이 어딘지도 모른다 하늘과 땅도 그 한 물건 안에 있고 해도 달도 별도 모두가 그 한 물건
속에 있다.
시간적으로도 이 한 물건이 우주보다 먼저 있었고 이 우주의 끝날보다 더 뒤에 있다.
이 한 물건이란.
마음이다.
깨달음이다.
깨달음이라는 것도 사실은 마른 똥막대기 이다(운문스님)
똥막대기라도 젖은 것인지 마른 것인지 만져 보아야 하지 않는가
똥막대기 만져보는 것이 삶이요 인생이다.
(무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