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의 매력은 은퇴해 있던 선수들에게 다시 공과 배트를 쥐게 만들었다. 1980년에 이미 포항제철의 플레잉코치로 전향, 사실상 현역에서 은퇴한 상태였던 윤동균이 1981년 12월 26일로 마감한 프로선수 공개모집에 응모, OB 선수로 유니폼을 갈아 입은 것을 비롯해서 한국화장품 출신 김유동, 롯데(아마추어)팀에서 은퇴 후 호텔롯데 판촉과 직원으로 근무하던 천보성(千普成)이 '솔잎을 그리워 하는 송충이’가 됐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프로원년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스타가 됐다.
이 가운데 윤동균은 프로원년의 타격왕 백인천이 4할대의 타율을 기록하는 엄청난 성적을 올리는 바람에 빛이 바래긴 했지만 국내선수로는 가장 높은 0.342의 타율로 타격 2위에 올랐다. 또 한국시리즈에서는 정규시즌과 달리 1번타자로 나서 27타수 11안타(타율 0.407)에 9득점을 올려 우승의 밑거름이 됐다. 그리고 김유동은 프로선수 생명은 길지 않았으나 당장 이 해의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우승을 확정짓는 장쾌한 만루홈런을 터뜨려 시리즈MVP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천보성은 일단 접었던 야구의 꿈을 되살려 마침내 1996년 LG 사령탑에 오르는 성공적인 야구인생을 개척한다.
이들은 은퇴 후 다시 현역으로 복귀한 선수인 반면 해태 이상윤과 방수원은 각각 한양대와 영남대 4학년 때 중퇴하고 1년 먼저 프로무대에 발을 들여놓았다. 1978년 베네수엘라 세계청소년야구대회에서 강속구를 자랑했던 이상윤은 어깨 부상 탓에 7승5패로 미미한 성적에 그쳤으나 원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듬해 일약 20승을 올리며 해태를 우승으로 이끄는 에이스로 성장했다. 1982년에 6승7패1세이브에 머무른 방수원도 1984년 5월 5일 삼미를 상대로 한국 프로야구사상 최초의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투수가 된다.
박철순과 백인천이라는 '해외파’ 슈퍼스타들을 뒤따르는 원년 스타들은 김봉연, 김성한, 김일권 등 해태에서 쏟아져 나왔다. 아마추어 시절 대표적인 홈런타자로 각광을 받았던 김봉연은 22개의 홈런을 터뜨려 백인천 김준환(이상 19개)를 제치고 원년 홈런왕에 올랐다. 이는 실업야구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1979년 이래 4년연속 한국의 홈런왕으로 자리매김하는 셈이었다.
인기면에서는 김봉연이 해태선수 중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만 실질적인 팀공헌도에서는 김성한이 김봉연을 앞섰다. 한국프로야구는 엄연히 지명타자제도를 채택하고 있었지만 김성한은 마운드에 올라가 던지면서도 직접 타석에 들어서기도 했고 투수로 뛰지 않는 날에는 지명타자나 3루수를 맡으며 전게임(80)에 출장했다. 이런 1인2역을 하면서 김성한은 타석에서 타율 0.305, 홈런 13개, 타점 69개를 올려 타점왕 타이틀을 잡았고 투수로서는 10승5패1세이브로 다승 7위(팀내 1위), 방어율 2.89로 6위(팀내 1위)를 마크했다.
특히 5월 15일 삼성과의 광주경기에서는 5회까지 20으로 뒤지고 있던 게임에 6회부터 구원등판, 삼성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으면서 7회말 동점홈런을 터뜨리고 연장 11회말에는 끝내기 우전적시타를 터뜨려 32 승리를 낚는 1인2역을 해냈다. 김성한이 타점왕에 오른 데에는 발빠르고 출루율이 높은 김일권이 앞에서 많은 득점기회를 열어준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천부적인 야구센스와 스틸의 재능을 가진 김일권은 대표팀을 자퇴하는 우여곡절 끝에 해태 유니폼을 입은 후 65게임에 출장, 53개의 도루를 뽑아 초대 도루왕에 올랐다.
아마추어 시절 투·타 양면에서 일본의 하라(原)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았던 김용희는 롯데 입단 후 허리부상으로 고전하며 63게임에 출전, 타율 0.284에 11홈런에 그쳐 이름에 비해 뒤처지는 활약을 보였으나 7월 4일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올스타전 3차전에서 행운의 7회말 신경식윤동균김우열 등 OB의 세 주자로 베이스를 채우고 유종겸의 초구를 통타, 만루홈런을 터뜨림으로써 미스터 올스타로 뽑히는 기쁨을 누렸다. 팀메이트 김용철도 3차례의 올스타전을 통해 3개의 홈런을 때려냈으나 김용희는 1차전에서 동군 3루수로서 미기상을 탄 데 이어 2차전에서는 1, 8회초 솔로홈런을 터뜨렸던 것이 MVP 수상의 밑바탕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