떵리쥔(鄧麗君)에서 장후이메이(張惠妹)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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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안(兩岸) 대중음악 교류사에 대해서 -
양안(兩岸: 대륙과 대만) 대중음악 교류사를 살펴보면, 성공한 가수들과 일대를 풍미한 노래의 배경에는 모두 시대적인 갈망이 숨어 있다. 대만의 유행문화가 대륙의 문화를 개방시킨 선도자들이라 한다면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어떤 대륙문화인의 말대로, "홍콩과 대만의 TV, 영화, 유행가 등이 대륙의 문혁 후 대륙의 일반대중이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는 유일한 통로였다"는 사실은 과장이 아니다. 대만 문화인사인 南方朔은 말하기를, 유행가는 10여년이래로 일찌감치 양안을 통일시켰다고 했다.
70년대말 떵리쥔(鄧麗郡)이 대륙의 각지를 풍미했을 때부터, 작년(1999년)에 장후이메이(張惠妹) 열풍이 양안관계를 혼미에 빠지게 한 때에 이르기까지, 대륙각지에서 대만과 홍콩의 가수들은 지속적으로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대만의 유행가는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대륙에서 20년을 이어져 오는가? 그리고 이러한 극렬한 변화의 시대에 어떤 시대의 마음을 담고 있었던가?
2000년이 막 시작되면서, 북경이나 상해의 거리를 걷다 보면, 때로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고개를 들면 장후이메이가 콜라를 마시고 있고, 고개를 숙이면 판샤오시앤(范曉萱)이 전자수첩을 들고 있는 광고가 보인다. 식당에 들어설 때 '비틀즈'의 노래가 귓가에 울리기까지 한다면, 양안인들의 삶의 모습이 이 정도까지 닮아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작년은 '양국론'(대만독립론)이 양안에 달을 대로 달아올랐다가 그 불똥이 이제는 재가 되고 있던 때였다. 8월 29일 한 밤, 곤명(昆明)의 어느 체육관에서 장후이메이의 [妹力99 콘서트]가 끝나자, 사람들이 강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보슬비가 잠시 멎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여전히 노래의 열정 속에 출렁이고 있었다. 유행하는 옷을 입은 한 소녀가 말했다. "너무 좋아요, 아메이는 신비감이 있어요,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중국을 통틀어서 오직 그녀만이 이렇게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녀의 노래가 너무 좋아요." (장후이메이, [자매(姊妹)])
그것은 장후이메이가 작년 8월부터 대륙의 여섯 개 도시를 순회하며 콘서트를 갖던 중 마지막 장소였는데, 이 이전에 그녀는 북경과 상해, 광주, 등 도처에서 팬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지 않은 곳이 없었다. 북경의 한 매체는 장혜매의 제멋대로인 고음과 억누르지 못하는 듯한 외침이 이 시대의 거칠음과 솔직함, 그리고 두려움 없음을 표현하였다고 했다. 타고난 음색 외에도, 시대의 소리와 갈망에 대한 반향은 장후이메이가 성공한 관건이었는데, 사실 양안 대중음악 교류사를 뒤집어보면, 매 시대마다 성공한 가수, 일대를 풍미한 노래의 배후에는, 또한 그 시대의 갈망을 그렇게 쏟아내는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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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 전 떵리쥔(鄧麗郡)은 양안 대중의 정서적 교류에서 서막을 열었다. 1978년 대륙이 개혁개방의 길을 가고 있을 때, "그 때 유행가는 관방의 사람들에게 문화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사회의 도덕을 문란하게 하는 저급한 것으로만 취급되었다." 북경의 음악평론가 왕샤오펑(王曉峰)에 의하건대, 그때는 영화 속에서 불량배를 나타내는 것이 유행가를 틀어놓은 채로 녹음기를 들고서 거리를 활보하며, 디스코를 추는 것 아니었냐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조류는 막기 어려웠다. 문화대혁명이 10여 년 동안 국민 개개인의 정서를 억압해온 상황에서, '정치에 봉사하는' 혁명 모범극(樣板戱)에나 등장하는 노래 따위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흥미가 상실되어 가던 차에, 일로 해외를 드나들던 사람들이 떵리쥔의 노래를 대륙으로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나오는 족족 정과 사랑과 향수, 감회 등을 담은 노래들은, 10억 인민으로 하여금 이미 오래 전에 잃어버린 자연스런 정감을 되찾게 만들었다. 카셋트 테이프를 가게에서 살 수 없었던, 더욱이 "연정을 노래한 간드러진" 노래가 근본적으로 정통 매체에 의해 방송될 수 없었던 시대에, 사람들은 구형 녹음기를 가지고, 여러 번 그녀의 노래를 녹음했고, 그것은 1∼2년 안에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떵리쥔의 '퇴폐적인 소리'는 진작에 관방의 반감을 샀으며, [님은 언제 오시나(何日君再來)] 이후, 마침내 금지곡 대접을 받아야 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마치 단조로운 '푸른 개미'군복에 신물이 나 있던 당시 젊은 층이 분분히 나팔바지를 입고 장발을 하자, 이를 기괴한 복장으로 여겨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더더욱 확산되어던 것처럼 인기가 높아만 갔다. 사람들은 바깥의 모임에서는 소리 높여 "중국이여 붉은 태양은 영원히 지지 않으리" "젊은 친구여 와서 집합하자" 따위의 노래를 하면서도, 집에 돌아오면 여전히 떵리쥔의 노래를 틀었다.
"1949년 공산당이 진주한 이후, 단칼에 모든 시민문화를 잘라버렸다"《북경일보》 문화부 부 주임이자 문화평론가 지에얼장(解璽璋)은 말하기를, 해방 후에 경극이나 설창(說昌: 한국의 판소리에 상당)은 금지 당했다. 인기소설작가, 예를 들면 주러우주(珠樓主),장헌수이(張恨水) 등은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고, 다시 문혁 10년을 거치면서, 대륙의 통속문화는 거의 완전히 말살되었다. "진정한 회복은 79년 홍콩과 대만문화가 들어온 이후이다". 그는 왜 홍콩과 대만문화의 친화성이 그렇게 강렬한지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것은 "시민들의 내면 깊은 곳에 축적된 문화적 경험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떵리쥔의 매력은 사슬처럼 확산되고 이어져, 대륙 음악 권의 전문인사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대륙은 한동안 서구의 고전음악을 주류로 여기고, 민족음악은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며, 음악인들도 30년대 이래 상해의 유행가에 대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소등(小鄧: 대륙에서 '大鄧(鄧小平)'과 상대적인 개념으로 떵리쥔에 붙여진 애칭)이 유행한 뒤, 문혁시기 혁명 모범극의 주제곡을 부르는 데에만 익숙해있던 예술 단체들도 "노래가 이렇게도 불려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79년 중앙가무단에서 호남 지방의 화고희(花鼓戱)를 부르던 유명한 가수 리꾸이(李谷一)는 처음으로 떵리쥔의 발성방식으로 [고향연정(鄕戀)]을 불러, 한동안 지속되어 왔던 민족적, 미성(美聲) 위주의 가창방식을 버렸는데, 이것은 상당한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그렇지만 대중들에게는 커다란 환영을 받았고, 이어서 주펑바오(朱逢博), 청린(程琳) 등 예술단체의 성원들이 이를 따르기 시작했다.
봄 강물에 파장을 일으킨 [포크 송(校園民歌)]
80년대 전반기, 대만의 캠퍼스 송이 속속 대륙으로 들어왔으며, 두 번째의 파장을 일으켰다. 떵리쥔 현상과 다른 점이 있다면, 뤄따여우(羅大佑)와 캠퍼스 송을 대표로 하는 이 파장의 주인공들은, 젊은 인텔리들의 정서에 더욱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점이다.
"80년대 이전 5년의 사회변화는 아주 재미있다". 대륙의 음악평론가 진자오쥔(金兆鈞)은 말하기를, [문혁]과 [반우(反右派運動)]라는 회의적인 사조가 스쳐간 뒤, 인텔리들은 중국의 문제가 단지 공산당에 있는 것이거나, 국한적(단계적)인 것이 아니며, 마땅히 민족 내지는 역사문화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거시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때문에 이러한 문화열이 삽시간에 전국을 뒤덮게 되고, 서구미학이나 철학사조를 소개하는 것이 하나의 시대적 유행처럼 되었다. 문학에서는 이런 생각이 [상흔문학(傷痕文學)]이나 [5.7문학], [개혁문학]등으로 발전되었고, 미학에서는 [星星畵展]과 같은 전람회를 열거나 혹은, 라쁘에서 현대예술까지 제 사조가 온통 들끓도록 하였다.
"그 시절에 우리는 이상이 매우 강했다. 비록 성숙되지는 않았지만, 늘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곤 하였다" 왕샤오펑(王曉鋒)은 말한다. 뤄따여우의 가사 속에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었는데, 중국민족의 보편적인 정서로 만들어진 그의 노래들은, 자연히 젊은 층에 상당한 충격과 공명을 불러일으켰다. 대륙의 30세 이상의 사람들은 뤄따여우에 대해서 엄지손가락을 꼽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지금 북경의 시양양(喜洋洋) 문화공사의 사장인 陳천신츄(陳梓秋)는 스스로, "경박함을 거부하는 세대"라고 자칭하고, 대학 시기에 뤄따여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그의 진지함과 생명력은 존경심을 갖도록 만든다"라면서. 또 다른 한 편에서,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메시지를 담은 [교원민가]의 해맑은 풍격과 순수한 멜로디는 문혁 속에서 성장한 세대에게 상실된 자아, 상실된 자연을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다." 진자오쥔은 말하기를 [감람나무(橄欖樹)],[외할머니의 팽호만(外婆的澎湖灣)], [시골 오솔길(鄕間小路)] 등은 사람들이 마음 속에서 꿈꾸는 새로운 샹그릴라(원래는 티벳의 이상향이다.)를 그리며, 그 시절의 젊은 학생들에게 풍미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주류 담론 속에서 '유행음악'이 아직 쟁점화되고 있던 80년대 초기에, 대만의 [교원민가]의 수입은, 초등학교 때부터 고전음악과 민족음악을 배운 음악 애호 청년들에게 또 다른 창구를 열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결국 유행음악의 형식은 다만 하나의 체재에 불과할 뿐이며, 이 형식 자체가 결코 '퇴폐적인 음악' 또는 '몰락과 부패'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자오쥔은 1996년에 발표한 《가요계 10년 이야기(歌壇10年故事)》에서 말한다. 최건(崔健),왕옌쥔(王彦軍),우하이깡(吳海崗),리하이잉(李海鷹) 등 훗날 대륙 음악계를 주름잡은 이들이 "당시의 홍콩과 대만음악 가운데, 특히 [교원민가]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유행음악이 하나의 광활한 분야이며, 여기에서 그들도 무엇인가를 크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만의 음반 산업 역사에서, 처음에는 음반 산업 대부분을 영어권의 음반이 대종을 이루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륙에서도 초기에는 자기 것이 거의 없었다. 다만 번안의 대상이 영어권에서 대만의 노래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이것은 곧 80년대 초기에 일어난 '판 찍기' 열풍을 의미했다. "음반업이 신속히 팽창함에 따라, 태평양음영공사(太平洋影音公司)는 1년에 무려 800만장의 카셋트 테이프를 팔았다. 80년대 초기의 생활수준으로 볼 때, 한 장에 5.5원하는 고가의 판은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고 진자오쥔은 술회한다.
[서북풍]의 반격
8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홍콩과 대만의 다양한 장르의 유행가들과 방대한 대중음악 시장은 마침내 대륙 자체의 최초 유행음악에 밀리기 시작한다. 1987년을 전후하여 정통음악의 배경을 가진 작곡가 링쥔(領軍)이 대만과 홍콩의 음악풍과는 사뭇 다른, 호방하고 웅장하며 북방민가의 선율과 록캔롤이 융합되어 있으며, 비판정신으로 충만한 많은 노래들을 발표하였는데, 그것들 중 [신천유(新天游)],[황토고원] 등은 단박에 양자강을 중심으로한 남북 지역에 고루 퍼져, 곧 '서북의 바람(西北風)'이라고 일컬어지게 된다. 동시기에 최건(崔健)은 더욱이 절규에 가까운 록 음악으로, "세계로 하여금 사랑으로 가득하게 하라"라는 제하의 콘서트에서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그의 [일무소유(一無所有)]는 이로부터 이 시대의 경전이 되었다. 《북경청년보》의 기자가 당시에 널리 퍼진 유명한 말을 했다. "최건의 [일무소유]가 나온 이후로 , 중국의 유행음악은 더 이상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一無所有)".(* 최건의 노래 붉은 천 한장(一塊紅布) 들어보기)
진자오쥔은 말한다. [신천유]의 무력함이건 [일무소유]의 외침이건, [내가 열애하는 고향]의 비판정신이건, 공통적으로 무거운 우국우민(憂國憂民)의 기조가 들어 있어서, 80년대 이래 활발했던, 역사와 문화에 대한 반성이라는 시대적 정서가 반영되어 있다. 지식계가 빚어낸 [강의 죽음(河 )](86년에 방영된 비판적 내용의 다큐멘타리)이 그랬듯이, 일반대중들은 '서북풍'의 노래 속에서 억눌린 감정을 풀곤 하였던 것이다. 87년에서 89년은 대륙본토에서의 창작과 콘서트가 성행함에 따라, 홍콩이나 대만과의 경계를 긋는 해로 각인되었다.
쑤뤠이(蘇芮)와 치친(齊秦)
'서북풍'이 성행하는 기간에도, 대만의 유행음악은 결코 완전히 무대를 내려간 적이 없다. 1987년 말 대만은 대륙으로의 친척방문을 허용했는데, 대륙 정부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인파와 함께 정식으로 음반수입을 허용했고, 쑤뤠이와 치친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쑤뤠이의 노래는 87년 영화 [잘못 탄 차(搭錯車)]와 함께 대륙으로 들어 왔는데, [똑같은 달빛(一樣的月光)],[술이 떨어졌는데 팔지 않는다면?(酒干倘賣無?)] 등의 인문적인 체취는 우선 사상적 아방가르드를 추구했던 젊은 학생들을 감동시켰고, 나아가서 대중들에게 환영받았으며 그 인기는 수년간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쑤뤠이의 호방하고 폭발적인 창법이 수년간 떵리쥔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룩해 놓은 '통일천하'의 국면을 뒤엎어버리면서, 발성 방식의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했다는 점이다. "많은 잠재적 소질의 여가수들, 예컨대 나잉(那英),항티엔치(杭天琪),판린린(范琳琳) 등은 모두 그녀를 모방목표로 삼았다"라고 왕샤오펑은 말한다.
치친은 바로 1987년 [늑대(狼)] 시리즈의 독집으로 대륙에 들어온 후, 짧은 수개월만에 파죽시세로 화남과 화북을 모두 석권하였는데, 그것은 마치 10년 전의 떵리쥔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대만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가수는 3대로 나뉘는데, 떵리쥔(鄧麗郡),리우원정(劉文正)이 1대이고, 뤄따여우가 2대이며, 그다음이 치친이다" 《중국백로회(中國百老匯)》잡지의 부 주간인 띵닝(丁寧)은 자기처럼 23세에서 28세까지의 세대에서는 치친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고 말한다. "그가 우리 세대에게 준 영향은 다만 음악듣기의 즐거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관 자체이다". 노랫말처럼 "나 혼자 바람 속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느끼는 고독과 자신감은 젊은 그녀가 매우 해보고 싶어했던 것이다. 비전문직 여성으로서 창작에 종사하는 띵닝은 항상 치친으로 인해 목표에 접근하고자 노력하게 된다는 것이다.
"치친의 반역은 뤄따여우가 역사 상에 세우고자 했던 반역은 질적으로 다르다". 왕샤오펑은 말한다. 치친은 확실한 개인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당시 젊은 사람들에게 과감히 자아를 내보일 수 있는 힘을 제공하였기 때문에, 광범위한 호응을 얻었던 것이다. 띵닝은 치친이 처음으로 북경에서 콘서트를 가졌을 때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북경에는 길다란 흰색 목도리를 두르는 것이 유행했었는데, 콘서트가 끝나고 치친이 떠나려 할 때, 무대를 바라보던 여학생들은 거의 제 정신이 아니어서, 어떤 한 줄 전체 아이들이 모두 목도리를 던져서, 치친이 집어가기를 바랬다." (치친이 리메이크한 [月亮代表我的心])
우상숭배와 대중분화 시대
1989년, 대중음악계는 새로운 전변의 시기로 접어든다. 카라오케가 1989년 대륙에 들어온 뒤, 신속히 확산되어, 그 해 연말에는 북경에서 70여개 업소가 문을 열었는데, 당시에 북경과 상해, 광주는 비슷한 수준으로 서구화되어 있어서, 이같이 개성과 유행을 강조하는 오락을 매우 필요로 하고 있었다. 6.4 사건으로 대륙의 음악종사자들은 그들이 노력이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렇다면 차라리 "홍콩과 대만의 방법을 따라가자"는 생각이 지배적이게 되었다. 대륙의 순수 창작품은 줄어들고 부단히 밀려드는 홍콩과 대만이 노래가 카라오케의 대량적 수요를 충족시켰다. "가장 직접적인 영향은 바로 홍콩과 대만이 대륙을 휩쓰는 첨병으로서 노래를 내세웠다는 점" 때문이다. 진자오쥔은 말한다.
이러한 현상이 나온 배경과정에서 "매체의 개혁은 또한 중요한 일환이다"라고 진자오쥔은 말한다. 89년 이래의 3,4 년 간 전국의 방송국, 신문, 잡지는 연이어 시장을 이끄는 경제,음악방송국과 생활란,오락란 등의 전문란이 창설되었다. '가요의 소화량'은 경탄할 만한 것이었고, 대중 전파매체의 발달은 더욱 대만 유행음악의 인기를 가속화시켰다.
"이 시기는 대만과 홍콩에서 현재 유행하는 것이라면, 바로 대륙에서도 유행하는" 단계이다. 치친이 지속적으로 인기를 끈 외에도, 대만의 통안거(童安格),자오촨(趙傳),리틀 타이거(小虎隊),장위성(張雨生),왕지에(王杰),판메이전(潘美辰) 등과 홍콩의 '4대천왕'이 모두 90년대에 지극히 환영을 받았던 가수들이다. 카세트 테이프의 판매량은 수십만에서 백만을 넘어섰고, 각 도시의 콘서트는 홍콩과 대만의 가수가 없으면 유지되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왕지에. [忘了你, 忘了我](1988).
"스타를 좇는 시대가 왔다" 왕샤오밍은 말한다. 뤄따여우나 쑤뤠이,치친의 시기처럼 노래가 대중의 정서에 깊이 영향을 주는 일은 이제 점차 희미해졌고, 팬들은 좋아하는 우상을 각기 소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청중의 구미 변화는 진정 커다란 상황의 변화와 궤를 같이 했다.
"그것은 진정 하나의 경제 대변혁의 시대이다. 만약 80년대 전반 5년의 조류가 이상주의였다면, 90년대 전반 5년은 바로 실리주의(務實主義)의 시대이다" 진자오쥔은 말한다. 떵샤오핑(鄧小平)의 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 경제 개방을 촉진하기 위해 떵샤오핑이 심천을 비롯한 남방 개방도시를 순시하면서 행한 연설)'가 보여준 경제 방침을 따라서, 대륙은 개혁 후의 재 개혁 단계로 접어들었으며, 가정용 컴퓨터가 등장하고 2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벌서 너무나 보편적으로 인터넷이 발전하고 있으며, 자가용이 점차 보급되고, 부동산 시세가 오르고, 의료 체계는 점차 보험체계로 나아가고 있다……, 갖가지 사회상의 신속한 변화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뒤바꿔버렸다.
"90년대의 좋다는 기준은 가벼움, 유모어, 생활이다." 문화평론가 하이솨이장 역시 그렇게 말한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대만노래는 부드럽고, 일상생활화 되어 있으며, 대륙의 공허한 가사보다 자연스레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진자오쥔은 예를 든다.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과 사랑에 빠졌네]는 북경의 경찰 또는 경찰 부인들이 모두 부르기 좋아한다. 리종성(李宗盛)의 [십칠세의 소녀가 바로 그녀였네]는, 바로 북경 젊은층의 오렌지족 문화의 구미에 맞는다. 2년 전에 ◁런시엔치(任賢齊)는 [마음이 너무 약해서(心太軟)]라는 곡으로 온 대륙을 풍미하였다. 현실은 음악과 무관한 듯 하지만, 이 곡은 최근 대륙사회의 신속한 변천을 정확히 예견하고 있다. "십억의 사람들이 마음이 연약해져 어찌 할 바 모르고 있는" 세태를.
또 다른 측면으로, 홍콩의 노래와 비교할 때, 대륙인의 마음 속에서, 대만은 식민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은, 그래서 대륙문화와 토대를 같이 한다고 인식되는데, 그래서 그것은 "특히 잘 통할 수 있는 것"이다. "90년대 이후의 중국 사회에서 크게 유행한 두 가지 화두가 있는데, 하나가 왕수어(王朔)란 화두라면, 또 다른 화두는 다름 아닌 대만 유행음악의 가사이다". 진자오쥔은 말한다. 《북경청년보》,《북경만보》의 편집인들이 암암리에 누가 더 적절하게 이를 사용하는가를 경쟁하기까지 할 정도였는데, 정통 문화인들의 격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유행은 수년간 결코 중단된 적이 없다.
시장의 논리를 배우다
시장경제풍조 속에서, 대륙음악인들 역시 '시장'의 관념을 배우기 시작했다. "음반회사들은 정규적 방식으로 음반을 내놓기 시작했다" 왕샤오펑은 말한다. 이전 대륙의 음반계는 "판을 복사하"거나, 아니면 여러 가수가 함께 "혼합판"을 내놓은 것이 고작이었다. 93년에는 음반회사가 "가수와 계약"을 맺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고, 각지의 음반회사들이 분분히 기획, 포장, 제작인, 프로덕션 제도 등을 만들어 가수를 위해 상업화 작업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북경의 일류 음악가들을 모아 제작한 아이징(艾敬)의 [나의 1997(我的1997)]앨범은, 게다가 폭탄같은 선전 문구까지 곁들여져, "여자 최건"으로써 광고된 애경은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아이징은 이후에 또한 대만에서 두 장의 앨범을 발행했는데, 근년에는 일본의 新力 음반과 계약을 맺기도 했다. 가수 마오닝(毛寧)과, 95년 대만에서 [누이의 북(阿姐鼓)]을 발행하여 대단한 인기를 얻은 주저친(朱哲琴)은 모두 이시기 음반회사가 배출한 가수들이다. 진자오쥔은 분석하기를, 이 시기의 유행음악은 비록 '서북풍'과 같은 협소한 민족적 색채에서 벗어났지만, 지나치게 가수의 포장을 강조하고 작품 내용을 소홀히 함으로써 , 대륙 본토의 유행음악 발전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홍콩과 대만의 음반은 여전히 대륙 음반 시장의 선두를 달리고 있다. "총규모 10억 인민폐의 시장에서, 대중음악은 80%를 차지하며, 그 중에도 홍콩과 대만산이 대중 음악류의 8할을 차지한다. 10여 년 동안 이러한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 북경 시양양문화발전공사 사장인 천짜이츄는 말한다. 그는 또한 추측하기를, 홍콩과 비교할 때, 대만은 언어의 우세(홍콩처럼 지방어가 아닌 같은 표준어를 쓰므로)를 바탕으로, 음반이 더욱 안정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것이다. "대만음반 프로덕션 체계는 이미 대단히 성숙한 단계에 와 있으며, 내지(대륙)는 아직 준비된 것이 없다"라고 그는 시인한다.
"현재 내지의 조류는 다만 대만 유행문화의 개념을 따라 갈 뿐이다". 평론가 따이팡(戴方)은 말한다. 음반업은 여전히 모색 중이라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음악의 애호가들은 그에 앞서 벌써 세대를 바꾸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시대의 새 목소리
최근, 북경에서 간 소년그룹 [꽃소년(花兒)]이 대만 대중음악 팬들에게 열띤 화두가 되고 있다. 귀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사이 앨범도 상당량 팔렸다. 이들은 바로 1998년 북경이 새로 탄생시킨, 예컨대 [淸醒],[新庫子] 등을 포함한 신생대 록그룹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그룹이다.
"이 세대의 젊은 그룹의 음악에서 인식과 삶의 태도는 모두가 개인적 체험으로만 기울고 있다" 따이팡은 말한다. 최건(崔健)이나 탕차오(唐朝)의 세대와 비교할 때, 그들은 가볍지만, 그럼에도 진실하다.
[꽃소년]은 세 명의 16, 17세의 고등학생으로 구성되었으며, [Green day]의 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에 유행하는 펑크 멜로디를 택했다. 내용은 부모와 어떻게 의견이 맞지 않는가 따위의 고등학생 다운 갖가지 삶의 고민들을 담았으며, 모든 곡이 2분을 넘지 않는다.([학교 끝났다!(放學啦)]) 방송에서 그들에게 묻는다. "최건(崔健)이 여러분의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그들이 답한다. "불가능하지요. 우리는 그의 노래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분이 어떻게 우리 걸 좋아하지요?"
[꽃소년]의 풍격은 대만의 쉬화이위(徐懷鈺)의 [괴수(怪獸)]와 장전위에(張震岳)의 [아빠 돈 좀 주세요!(baba, 我要錢! 我要錢!)]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대만의 음반계에서 최근에 한바탕 북경풍을 일으킨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인기 가수 뭐원웨이(莫文蔚)와 양나이원(楊乃文)이 서로 [꽃소년]의 작품을 리메이킹 하였으며, 쑤후이룬(蘇慧倫)도 [新庫子]의 작품을 활용하였다.
"왜 장전위에의 음반은 대륙에서 잘 팔리는가? 반면에 대륙에서 제작된, 도시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영화 [사랑의 신선로(愛情麻辣tang)]는 대만 상영에서 좌절했는가?" 대륙의 마암(魔岩)음반의 사장인 뤄이(羅異)가 말한다. "지금은 동경,대북,북경의 아이들이 생각하는 것이 모두 같다! 젊은이들의 문화가 변하고 있는 것은,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유행음악이 이 시대의 흐름와 다르게 자라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대만의 음악평론가 천러룽(陳樂融)은 일찍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쨌든 시대에는 자기 시대의 이야기가 있는 법, 대륙과 대만 양안의 대중음악이 점차 가까워지는 이 희망찬 새 천년의 길목에서, 우리는 노랫소리를 통해 무엇을 들을 수 있을까?
90년대이래 중국대륙에서 홍콩 대중음악은 이미 너무나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일찍이 떵리쥔(鄧麗郡)이 혼자서 고군분투한 이래, 이제 그것은 어느새 만인이 즐겨 부르는 성황(盛況)을 맞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아메이"에게서 다시 재현되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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