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 너희가 소유한 땅에서는 어디서나 땅을 되사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너희 형제가 가난해져 자기 소유지를 팔 경우, 그에게 가장 가까운 구원자가 나서서 그 판 것을 되사야 한다.
(레위기 25장 23~25절) |
개인은 자신의 노동생산물을 사적으로 소유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사람이 창조하지 않은 자연 (협의의 땅부터 광의의 환경까지)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귀속되어야 한다.
- 헨리 조지의 <진보와 보수> 중에서
<헨리 조지> |
로마 교황청은 헨리 조지(1839-1897)의 사상이 불순하다고 판단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전 세계에 막대한 토지를 가지고 있는 교황청으로서는 그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 교황 레오 13세는 그의 사상이 급진적이라며 극약처방으로 헨리 조지의 최측근인 에드워드 맥글린 신부를 파면한다. (그 후 교황청은 맥그린 신부를 복권시키는데, 이는 헨리 조지에 대한 오해가 풀렸음을 의미한다.)
40여년 가까이 그리스도교 신자인 나는 ‘희년이니 안식년’이 하는 것을 구약 시대의 유물(遺物)로만 알고 있었다. 부끄럽게도 헨리 조지도 최근에 알았다. 물론 대천덕 신부(성공회)도, 강원도 태백에 있는 예수원도 그렇다. 나만 그런가? 주위 가톨릭 신자들에게 물었다. ‘헨리 조지, 대천덕 신부나 예수원를 아는가?’ 내 주위에는 별로 없었다. 왜? 혹시? 아직도 교황청은 조지스트(헨리 조지의 이론을 따른 사람들)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까?
오래 전 그리스도교 권력자(?)들은 ‘희년’의 의미를 희석(방해)시키기 위해 ‘주님의 해’라는 말로 에둘러 표현했다. 게다가 ‘정의’를 ‘Justice’라 말하지 않고 ‘Righteousness’로 대치했다. 헨리 조지가 일찍이 규정한 ‘정의’와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은 교회를 짓거나 병원을 기증하거나 대학과 도서관을 설립하는 사람보다 더 위대하고 고상한 일을 하고 있은 셈이다. ...]
헨리 조지의 영향을 받은 중국의 쑨원(孫文)은 토지 소유를 평균화해야 한다는 ‘평균지권론’을 주창했고,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부활>에서 토지 소유자들의 오만함을 비판하면서 자신을 조지스트라고 밝히기도 했다.
혹자는 헨리 조지를 공산주의자로 알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마르크스는 토지와 자본을 구분하지 않고 양자를 모두 공유화 할 것을 주장했다. 반면, 헨리 조지는 토지와 자본을 분리하여 그 중 토지만을 공유상태에 근접하게 만든 제도(지대 조세제)를 주장했다. 그는 마르크스와는 달리 <시장의경제와 가격의 기능과 사유재산>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토지에서 발생하는 지대는 개인의 것이 될 수 없고 사회전체가 함께 해야 된다고 했다. 그는 <진보와 빈곤>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다.
“우리는 토지를 공공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대천덕 신부> |
헨리 조지가 상대적으로 개신교보다 천주교 쪽에 덜 알려진 이유는 상기(上記)한 것과 교황청과 그렇고 그런 이유일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천덕 신부는? 미국출생이면서 1957년부터 2012년 별세할 때 까지 55년간 그가 이 땅에 뿌린 씨는 결코 적지 않다. 게다가 대천덕 신부가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는 외침은 성경에 나오는 광야의 세례자 요한을 연상케 한다.
-그의 저서 <토지와 경제정의> 중에서-
<90쪽>
“그리스도교는 토지를 개혁을 마음이 없었고...그러자 북아프리카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항하여 이슬람교도가 되었다.”
<103쪽>
“많은 선교사들은 더 잘 입고, 먹으면서 제국의 고용인과 구별되지 않았다.”
<98쪽>
“교회가 사회에 대해 전혀 가르치지 않고 있으며 오로지 내세에 대해서만 가르칠 뿐... 그림의 떡(pie-in-the-sky)으로 토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92쪽>
“가난과 기아의 원인은 ‘과잉인구’가 아니라 불평등한 토지 분배의 산물‘이다.”
<105쪽>
“많은 신생독립국가들이 오랜 기간 동안 자신들을 착취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분노로 이슬람 쪽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99쪽>
“교회가 이 시대의 혁명적인 역할을 담당하길 원한다면 토지 소유권을 확보해서 토지의 권력을 하느님을 위해 사용할 모종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117쪽>
“조지스트들이여, 전진하라. 비록 작지만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들을 물리치기 위해 계속 노력하라.”
<213쪽>
“영생은 사람이 획득한 것이 아니며,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영생은 구원자가 우리에게 되찾아 주는 우리의 잃어버린 상속이자 몫이다. 자기 몸으로 우리 대신 값을 지불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다.”
P.S.
톨스토이 자신의 저서 <부활>에 헨리 조지를 소설에 실명으로 등장 시켜 그의 사상을 독자들에게 알리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도서출판 오늘/ 1997년/ 301~302쪽에서 발췌
그래서 그는 헨리 조지의 단일세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토지는 누구의 것도 아니고 하느님의 것이오.” 네흘류도프가 말했다.
“그야 그렇죠. 확실히 그렇죠.” 몇 사람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토지라는 것은 모든 사람의 공유물이오. 누구나 토지에 대해 평등한 권리가 있소. 그러나 토지의 질은 똑같지 않아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소. 그리고 누구든지 좋은 토지를 갖고 싶어 하지. 어떻게 해야 공평한 것이 되겠소? 그것은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즉 좋은 땅을 갖는 사람이 그 땅에 해당되는 만큼 토지를 갖지 못한 사람에게 지대를 주는 것이오.” 네흘류도프는 스스로 묻고 대답했다.
“그러나 누가 누구에게 지불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고, 또 공공의 필요를 위해 돈을 모아야 하기 때문에 토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지대를 여러 가지 공공의 필요에 충당하기 위해 조합에 지불하게 되는 것이오. 그렇게 하면 모두가 평등하게 되지요. 토지를 갖고 싶은 사람은 좋은 토지라면 비싼 지대를, 나쁜 토지라면 싼 지대를 지불하면 그만이지. 갖고 싶지 않다면 한 푼도 내지 않아도 좋소. 그리고 공공의 필요에 대한 경비는 그 사람 대신 토지를 가진 사람이 지불하게 되는 것이오.”
“좋은 말씀입니다.” 난로를 놓는 직공이 눈썹을 찡긋거리면서 말했다. “좋은 토지를 가진 사람이 더 내면 된다 이거지.”
“대단한 사람인데, 그 조지라는 사람.” 수염이 곱슬 거리는 대표 같은 노인이 말했다. |
참고도서> *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 대천덕 신부가 말하는 <토지와 경제정의> * 전강수 교수의 <부동산공화국 경제사> |
<헨리 조지>
<대천덕 신부>
첫댓글 학창시절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읽다가 지쳐서(?) 포기한 기억이 있습니다. <부활>은 분명 읽었습니다. 귀족청년 네흘류도프의 불장난 그리고 매춘부가 되어버린 캬튜사... 수년이 지난 후, 우연히 재회한 두 사람. 그리고 순수한 그녀로 인해... 영혼의 부활을 그린 소설. 재미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소설에 헨리 조지가 나온다고요? 나는 분명 그 소설을 읽었는데... 내 가난한 기억을 확인하기 위해 책을 뒤져 보았더니 헨리 조지가 나오더 군요. <아는 만큼 보인다>다라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습니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