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보(恒步) #김성순 선생(1929〜)은 김천에서 평생 포도 농사를 지어온 농사꾼이다. 서른 살 되던 1960년 김천 북쪽의 직지천 하천부지에 포도를 심기 시작하여 온갖 고생을 다 하며 오늘날의 #덕천포도원 을 일구어낸 포도 농사의 선구자이다.
그렇지만 그가 처음부터 농사꾼이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교사였던 부친의 뒤를 이어 교사로서 순탄한 삶을 살아가려 했지만, 시대의 거센 풍파는 그의 행로를 교사에서 농사꾼으로 바꾸어 놓았다.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20세의 청년 김성순은 1949년 김구 선생의 노선에 따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내용의 삐라를 돌리다가 검거되었다. 처음에는 벌금이나 구류 정도를 받고 풀려날 줄 알았지만, 이승만 정권이 1948년에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본떠 만든 #국가보안법 의 올가미에 걸려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미결수로 재판을 기다리던 그는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좁은 감방에 콩나물처럼 빽빽하게 수용돼 있던 동료들이 불려 나갈 때도 좀 넓은 곳으로 옮겨가는 줄 알고 부러워했다.
그러나 이송된 줄 알았던 그들은 모두 대구 인근의 가창골이나 경산의 코발트 광산에 끌려가 학살되었다는 사실을 얼마 후 아는 간수를 통해 전해들었다.
미결수였기 때문에 요행히 목숨을 건진 그는 한약방을 하던 할아버지가 재산을 털어 구명운동을 한 결과 1951년 재심을 통해 석방되었다.
#대구사범 은사의 주선으로 공군 기술하사관으로 근무하던 그는 얼마 후 특무대의 신원조회에서 국보법 전과자라는 사실이 드러나 불명예제대를 당한다. 그러다가 다시 육군에 징집되어 포항을 거쳐 제주도의 모슬포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다음 전방에 배치되어 4년 3개월을 복무하고 1958년 제대한다.
20대의 청춘을 감옥과 군대에서 보낸 서른 살의 노총각은 뒤늦게 결혼하였으나 전과자라는 낙인 때문에 변변한 직장을 얻을 수 없었다. 고심 끝에 그는 부인을 설득하여 낯선 타향인 #김천 의 개천 가에 포도 묘목을 심기 시작한다.
“무인도에 표류한 크루소처럼 한 5년 농사지어 봅시다” 입덧이 대단한 아내를 밤새 설득하여 결혼반지 팔아 리어카 사서 똥장군을 끌면서 나의 영농생활은 시작되었다 하천부지 모래땅 겨우내 구덩이 파서 ‘켐벨’ 포도 묘목 400여 주 심은 것은 1960년 3월 12일, 하루 종일 몹시도 바람 불던 봄날이었다 닷새만 가물어도 시드는 땅 물지게로 수없이 냇물을 져나르고 별빛 아직도 차가운 이른 새벽 4킬로 시내까지 인분을 퍼날랐다 처음으로 똥통을 끌고 나서던 날 모든 사람이 쳐다보며 비웃는 듯 슬프고 부끄럽고… 죄인인 양 땅만 보고 걸었다 2년생 어린나무에 7~8송이 탐스런 검은 포도 익어갈 때 기쁘고 대견하고 그 모든 괴로움도 잊었다 4년생 수입이 쌀로 치면 100가마 될 때 마을 사람 하는 말 ‘산꼭대기 가도 살 사람’
―「고난의 민족사 속에 걸어온 길. 백범 김구 선생을 생각하며」 부분
이렇게 해서 “허공을 헤매던 두 발이/ 대지를 딛게 된”(「한 그루 큰 나무. 거북이의 꿈」) 다음, 그는 힘차게 농사꾼의 길을 걸어간다.
이때 그의 마음을 다잡아준 것은 유달영 선생의 책 『유토피아의 원시림』을 읽다가 부딪힌 “나는 나대로 나에게 주신 걸로 생각하고…”라는 한마디였다. 그는 이 말이 바로 하늘이 그에게 정해주신 농사꾼의 길을 걸어가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유달영 선생(1911〜2004)은 덴마크의 농민운동에 자극을 받아 평생 열정적으로 농업과 농촌살리기 운동을 전개한 분이다. 5•16 후에 잠시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맡았으나 1964년 박정희가 재건국민운동을 관 주도의 새마을운동으로 변질시키자 이를 비판하고 사임했다.
항보 선생은 책을 통해 일본의 포도 재배 기술을 배우고 익혀 1970년에는 직지사 입구의 덕천리로 이사하여 덕천포도원을 세웠다.
포도 농사를 지으면서 유달영 선생과 함석헌 선생을 사숙하며 『씨ᄋᆞᆯ의 소리』를 열심히 읽고 농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항보 선생은 대부분의 농민들이 동토(凍土) 속의 개구리처럼 몸을 움츠리고 있던 유신시대에도 저항운동을 계속했다. 이 시절의 얘기를 그의 육성으로 들어보자.
1970년초, 하천부지 농장을 떠나 봉산면 덕천포도원으로 옮겼는데 그간 10년간 푼푼이 모은 돈으로 충당하였다. 아내가 처녀시절 염소를 키우며 늘린 돈, 부부간에도 차용증을 쓰고 활용한 것이었다. 유신체제 아래서도 『씨ᄋᆞᆯ의소리』 읽으며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을 거쳐 가톨릭농민회 회원이 되어 함평 고구마 사건, 영양 오원춘 사건에 참여하면서 단식싸움과 20일간의 구류를 당하기도 하였다. ―「한 그루 큰 나무. 거북이의 꿈」 부분
이 시기에 쓴 것으로 보이는 「우리는 간다」와 「아아, 우리 농민회」 같은 시에는 젊은 농민의 꿋꿋한 기상과 열정이 넘친다. 특히 다음과 같은 짤막한 시에는 불의한 시대에 농민운동을 통해 단련된 강철같은 저항의식이 응축돼 있다.
니체가 묻는다. 독사가 네 혀를 물었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는가? 답은 두 가지 —아이쿠 이제 나는 죽겠구나 독이 퍼지기 전에 지레 죽는 자 —어차피 죽을 몸 마지막 힘을 다하여 독사를 깨물어 피 흘리며 싸우는 자 너는 어느 편을 택하겠는가?
―「니체와 독사」 전문
1995년 우리나라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여 쌀을 제외한 농산물 수입을 개방하고 1997년의 IMF 사태 이후 세계화의 거센 물결 속에 농업이 벼랑 끝으로 몰린 데 이어 2003년 새만금사업에 반대하여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 김경일 교무, 이희운 목사 등이 부안에서 청와대까지 삼보일배를 하며 항의 시위를 했을 때, 농민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항보 선생은 2005년 도법 스님이 김천을 찾았을 때 생명평화 운동에 눈을 뜨고, “지금까지의 권익옹호나 제도개선 차원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은 영적인 문제가 코앞에 닥친 느낌”(「한 그루 큰 나무. 거북이의 꿈」)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생명과 평화라는 영적인 문제로 암중모색하던 시골교회 장로가 동학과 운명적으로 만난 것은 2007년 6월 2일이다.
이날 그는 주일인데도 교회에 가는 대신 “서울 종로3가 단성사 앞/ 해월선생 추모식에 참석했다.”(「한 그루 큰 나무. 거북이의 꿈」).
그리고 “2009년 2월 어느 날,/ 경주 용담정과 수운선생 묘소를 찾았는데/ 이상하게 내 마음이 편안하고/ 큰 품에 안긴 듯하여/ 주변의 소나무와 건너편 산줄기를/ 유심히 바라보았”(「한 그루 큰 나무. 거북이의 꿈」)다.
내친김에 그는 일제강점기에 졸업했던 인근의 현곡초등학교를 찾아 옛날 학적부를 뒤져 잘못 적힌 이름을 바로잡았다. 의성 출신인 항보 선생이 경주시 현곡면의 현곡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은 교사인 부친의 근무지를 따라 전학을 했기 때문인데, 아마도 당시에는 인근에 수운의 탄생지와 묘소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을 것이다.
항보 선생이 수운의 체취가 남아있는 용담정과 수운 선생 묘소에서 고향에 돌아온 듯 편안한 느낌을 받고, 66년만에 모교를 찾아 틀린 이름을 바로잡았다는 것은 일종의 신비스러운 종교체험처럼 들린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독실한 기독교 장로였던 항보 선생은 동학에 입도하여 ‘진리를 멀리서 찾지 않고 나를 닦는 공부’에 매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