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혁 시인>>
<<기혁 시인>>
* 1979년, 경남 진주시 출생.
*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수료.
* 2010년 시인세계 '사춘기 아침' 등단
* 시집 : 『소피아 로렌의 시간』,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
* 2014. 제33회 김수영 문학상
<<기혁 시인>>
사춘기 아침/기혁
어떤 장르에는 대사가 없다
'얘기하는 사람1'과 '지나가는 사람 2'는 수군거림으로 명백해진다
주인공 B를 기다리는 플랫폼에서 비둘기 몇 마리가 방치되었다
대사와는 무관하지만 그들도 목적이 있었다
잡지를 접은 두 손이 비슷한 뉘앙스로 포켓에 들어간다
잠복한 형사들의 수만큼 일상에서 가족을 만난다
그런 날이면 이유없이 녹차가 썼고
두고 온 가방을 찾기 위해 지난 밤을 뒤졌다
스카치테이프로 개미를 잡는 엄마와
죽은 개미의 수마큼 악몽이 발견되곤 했다
개종한 다음날에도 신발에 껌이 붙는 이유를
젖꽃판에 털이 자라는 것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누나의 속옷이 청바지에 물들고
물 빠진 청바지에 핑크색 얼룩이 남아도
햇살은 처음부터 색깔만 말려 주었다
주인공 B가 떠나가는 플랫폼에
장르에 없던 도둑고양이가 들어온다
도둑고양이를 발로 차는 누군가
C에게 고함을 지른다
'아버지1'이 울렁거림으로 희미해진다
식탁에 올릴 생선대가리 속으로
독이 든 저녁을 넣고 싶었다
무심코 껴안은 사람들과
지하철마다 부딪치는 그들의 성기가
두 눈을 예외로 만든다 나는
안개, 안개 같았다
두 단어의 세계/기혁
에베레스트경이 초모랑마*를 발견한 뒤에도
늘어난 건 몇 방울의 잉크
핼리혜성이나 B612가 발견된 다음에도
몇 가지 수학공식이 늘어났을 뿐
노트 정리를 잘하면
곳곳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름 붙이지 못한 구십 퍼센트 바다생물도
약간의 여백이면 충분해
'모든'이라는 단어가 미래를 예언하고
조물주처럼 보살펴주고 있기에.
몇 번씩 전쟁을 치렀지만
지우개가루엔 흔적이 남지 않는다.
반듯하게 접으면 작고 가벼워
죽은 친구의 이름이나
낯선 전화번호 따위가 적혀 있는 지구
가끔씩 글자를 혼동한 사람들은
바람과 지하철의 공통점을 이야기한다.
이유 없이 울다가, 웃기도 한다.
'우리'라는 단어가 처음 발견되던 날,
외계인이 쓴 방명록 같았다는 아르디**의 소감
그녀의 노트엔 보탤 수 없는 유머가 있다.
*초모랑마, 영국 측량기가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에베레스트를 부르던 이름.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라는 학명이 붙은 이 화석은 440만년 전 인류로 추정되고 있다
최고의 인류로 알려진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파렌시스<루시>'보다 120만 년 정도 앞선다. 미국<사이언스>지 선정'올해의 10대 과학적 성과'1위
비닐의 기원/기혁
검정비닐을 들어 올린 바람은 자신의 손가락만 사용하려 들었어요 어린 가축의 혓바닥이나 토막 난 고등어 따위가 담겨 있던 검정비닐이에요 가슴을 받치고 손잡이 없는 주둥이를 벌리면 제 것같은 핏물이 흘러요
온몸이 찢겨져도 담지 못할 내용은 없었죠 계단을 오르고 새떼를 오르고 자주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던 검정비닐이에요 시간이 지날수록 검정비닐이 묵직해졌어요 바람은 몰랐죠, 바스락거리는 목젖이 돋아날 줄은 사소한 시빗거릴 주워 담을 줄 말이에요 인류학자들의 논쟁거릴 삼켜버렸어요 언어를 통째로 씹어 침묵만 내뱉기도 했구요
검정비닐이 두려워요, 사람들은 호주머니 가득 목소릴 숨기거나 깊은 밤 고함을 지르고 도망 다녔어요 자신의 메아리에 놀라서 긍정도 부정도 아닌 신음을 낸 적도 많았죠 검정비닐을 들던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린 밤에는 사나운 풍문이 떼지어 몰려왔답니다 모국어와 전화기를 의심하다 눈짓과 몸짓이 뒤섞인 당신의 홍당무에도 바람이 들지 몰라요
저기 검정비닐을 든 엄마가 두 다리로 걸어오네요 비닐을 벗고 심호흡하고 있어요 유대인이나 말갈족의 표정도 지을 수 있군요 허공에 허파를 만들고 속을 드러낼 시간이에요
네 번째 사과/기혁
이곳에서 너는 사적인 공간이야. 나의 이빨과 혓바닥이 머물다 간 싸구려 호텔이야. 식욕과 성욕이 동시에 교차하는 혼숙을 허락하는 거실이야. 붉은색 하드커버를 가진 너는 포르노그래피를 떠올리게 하지.가장 은밀한 부위에는 신화를 숨기고 있어. 그곳으로부터 나는 고전적 성교양식을 학습해
이곳의 모든 이야기는 당신의 낯빛을 바꾸는데 일조했어요. 만유인력의 법칙은 당신에게 지구를 떠넘긴 최초의 사건이었죠. 그럼으로써 당신은 지구의 종말 따위에 절망하지 않았어요. 지독한 현실주의자의 입 속에서 '달다'의 반대말을 고민하지도 않았죠.'사과'의 '맛'에 대해 사유하는 당신은 당신의 사진으로부터 가장 먼 종족이에요.
그러나 신앙을 가질 수 없는 그는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고해성사는 오직 벌레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입니다. 아무도 그와 같은 사과를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를 모릅니다. 그는 식탁에 둘러앉은 동거인입니다. 그에게 사과를 받아먹은 그는 반으로 쪼개집니다. 그 속에 그의 사적인 공간이 열리고 있습니다.
턱선/기혁
서로 다른 골격을 가진 해안선
푸른 말들이 쏟아내는 거품 속에서
뒤틀린 혀의 관절을 기억해
허술한 두개골을 받치고 있던 두 손
썰물이 두고 간 파도소리에 기대고 있어
낯선 백사장을 따라 몇 바퀴
귓바퀴를 돌아보면
원점에 가깝게 중심이 멀어져 있지
구명조끼 같은 입술을 붙들고 표류하는
삐걱거리는
침묵은 아직 스스로 가라앉는 법을 몰라요,
너의 해안가, 허공의 난파선 한 척
커튼을 열고 흘러내린 그곳엔
가슴 밑바닥까지 이어진 물길이 열리죠
몸통 없는 지느러미만 파닥거리죠
붉은 방 갯벌이 깊어지는 계단
하얀 방파제로 버텨온 이빨 시려와
떨어진 면적의 먼지를 털며/기혁
생활이 바뀌면 피부가 아프다
환절기처럼 얇고 긴 겉옷 속에서
타인의 손을 탄 한 시절이
부풀어 오른다
열이 난다는 건
어딘가 높낮이가 생겼다는 증거
이별은
서로 다른 기후대를 만들고 각자 살아갈
짐승을 불러 모은다
꼬리를 치켜세우고 코를 킁킁거리며
한때는 인적이라 불리던 체온의
이동 경로를 상상하는 짐승
피부에도 마음이 있을까
무리에서 떨어진 마음은
어떤 야성을 키울까
그리운 사람을 만나면
기분과 날씨가 먼저 살에 맺힌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을 때마다
생활의 등고선을 따라 이어지던 울음도
소매를 걷고서 딴청을 피운다
핏줄과 인연의 가장자리에서 한평생
피부만 문지르던
생식의 지리
마음은 길을 잃은 적이 없다
마지막 순간까지
생애의 한 면적을 걸치려 한다
몽타주/기혁
-장면과 장면 사이에 섬이 있었다. 떠돌이 약장수들이 천막을 치고, 조잡한 공연이나 오래된 영화 따위를 보여주었다. 애들은 가, 애들은 가, 외쳤지만 천막 틈새로 상체만 집어넣은 아이들은 허공에 뜬 채 몸을 흔들었다.
떠돌이 약장수가 부리는 차력사들이
프레임을 부순다
초당 스물네 장의 부적을 팔면서
가짜 영지버섯을 주워 먹은 아이는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유대인이나 말갈족의 표정을 짓는다
오늘의 상영작은 「산송장」
나도 지나간 날에는 배우를 꿈꾸고 살던 때가 있었단다⁕
수프를 보고 기뻐하는 연기와
태양을 보고 기뻐하는 연기 사이에서
스스로 목젖이 돋아버린 네거티브 필름 한 롤
어째서 사랑조차 내게 오면 일용할 양식이 되고 마는가
아이의 눈동자 속 살아 있는
송장을 찾으러 온 차력사가 분주하다
아버지의 두 눈을 뒤집는다
노루잠/기혁
초식동물을 쫓는 포수의 간절함으로
핏자국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치명상에도 아랑곳없이
몸을 일으킨 짐승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모든 걸 잊어버리고
맹렬히 떠나는 일을 생명으로 여기는 짐승
마지막 총알을 장전한 포수의 눈에
시뻘건 핏자국으로 갈겨쓴 고통의 문자가 보인다
고통을 끝낼 총알이 급소를 향하는 순간
문득 자리에 멈춰선 사랑
가슴에 초원을 들이고서야 알았다
사람이 머물던 자리마다 풀이 돋는다는 것을
밟아도 죽지 않는 고독이 주검을 거름 삼고
제 키보다 큰 뿌리를 키울 때
스치는 새벽바람에도 눈물이 난다
초원 깊은 곳까지 들어간 포수가
매일 밤 자신을 닮은 덫을 만들고 있다
술래잡기/기혁
바다에 숨어있던 파도가 고독을 알아차렸네
사랑인척 웅크렸던 설렘이 발자국만 남기고 떠나버렸네
파라솔 그늘 아래 술래를 잊은 낮잠이 모래를 터네
꿈속에서 만난 인연도 슬픔인척 기다리다 바람에 흩날리네
멀리멀리 바닷가 건너 소녀의 눈 속으로 티끌처럼 들어갔네
감긴 눈꺼풀 안에서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네
실눈을 뜰 때마다 거센 풍랑이 몰아쳤네
아프고 시린 일상 속으로 더듬더듬 손을 뻗었네
술래만 남은 가슴께 물이 차오르고 있었네 아무도 모르게
난파선 같은 한 사람 밀려와 그 손 잡아주었네
층계참에 선 유다/기혁
반대편에 서야
떠오르는 말이 있다
계단을 내려온 물이
흙탕이 되어 흘러넘칠 때처럼
외롭지 않았더라면
불순물에 불과한 감정도
각자의 몫으로 불리길 바랐을 것이다
직각의 기억으로
가책을 이야기하던 예배당 첨탑은
지면 낮은 곳까지
청소를 끝낸 인부의 얼굴을 떠오르게 한다
신의 거처를 씻어낸
노동과 임금 사이에서
순수한 것들은 중력에 취약했으므로
나는 첨탑을 보는 자의 기도를
첨단의 협업이라 부른다
죽음도
부활도
수직의 배신을 염두에 두지 않았지만
새하얀 관이 들어오면
계단은 물을 더 계산적으로 흘려보낸다
잘 분배된 운구 행렬처럼
누구나
뒤돌아선 모습을 낭비 없이 움직인다
켓 티(Khet Thi)/기혁
끝이라는 말은 늘
허공에 떠있다
5월의 햇살과 바람
총구 끝에 머물던 함성과
쓰러진 동료의 마지막 빈자리
피로 물든 거리에서
군인의 발끝은 무언가 짓밟는 듯 했지만
끝과 끝 사이
잠시간 숨을 멈추면
격렬하게 뛰고 있는 심장 하나가
허공 높은 곳까지
솟구치는 게 보인다
폭력과 억압, 무수한 두려움들이
민주주의의 사지를 붙들고
함께 떠오를 때
혁명은 심장이 있던 자리마다
무지개를 그려넣는다
타인의 심장 가장 먼 쪽부터
슬픔이 용기와 양심의 물방울을 껴안고 서로를
빛내주려 한다
광주에서도
양곤에서도
어둠은 머리에 총을 쏘았지만, 혁명이 심장에 있다는 걸 모른다
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색색의 역사처럼
시인의 가슴에 깃발이 펄럭이리라
가장 높은 끝에서 승리를 시작하는 것이다
서양식 의자 위의 저녁 시간/기혁
네 발이 달려도 슬프지 않았던 것은 네가
짐승이 아니었기 때문.
두 발이 모자란 나를 업고 먹이고
어느 날엔가는
절뚝거리는 다리 한 짝을 흔들며
취기를 올려 보내기도 했기에.
얘기 좀 하자는,
식구들의 주제는 늘 테이블보다 넓게 펼쳐진다.
떨어진 부스러기들이 나의 발끝을 톡톡
건드릴 때의 느낌처럼.
대화가 길어질수록
잘못 전달된 문장들은 대답 대신
서로를 옮겨놓기도 하지.
술이 아니라,
술잔의 배치를 고민하는 하녀를 부르듯이.
우리가 차려놓은 ‘만약’의 무게가
네게도 믿음의 이면을 기댈 등받이를 갖게 했다면
그 모든 책임은 그리스도에게 있을지 몰라.
오랫동안 그는
최후의 만찬을 즐기고 있으므로.
주기도문을 마친 식구들이 너의 힘을 빌려
서로를 일으켜 세운 다음까지.
그러나 너는 여전히 궁금한 것이 많을 뿐.
만유인력의 무심함에 대하여,
엉덩이로 지탱해온 인류의 낙관주의에 관하여.
때로는 우리의 물음표가, 짐승보다
사물에 더 어울리는 까닭을.
나르키소스와 물고기/기혁
흐르는 물결 위에 글씨를 쓴다
또박또박
백지를 떠올리며 쓴 문장들이
손끝을 밀고 떠날 때
나는 그것이
허구를 향해 번져나가는
물고기 떼인줄 알았다
서로의 아가미를 들락거리는
투명한 굴곡에 몸을 내맡기고서
타인의 속내로 직진해 온
햇살의 화창에 비늘을 반짝거렸다
물고기들은 사랑을 모르고 있으므로
촘촘한 이별의 은유로도 연민
가득한 비문으로도
그물을 만들 수 없었다
하구를 지나
까마득한 적도의 바다 한복판에서 문득
하다 만 말들이
지느러미를 붙들 때
비로소 글씨와 함께 번져버린 한여름과
그 풍경 위로 떨어진 몇 방울
눈물을 기억한다 고백은
물고기를 모신 자들의 눈거풀 같은 것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면
별빛의 고요에도 비린내가 난다
회귀하는 문장을 본 적이 있는가
망망대해의 어둠 속에서 보았던 폐허가
시냇가까지 따라온다
쓴다는 본능을 좇던 물결에 얼굴을 디밀고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상처들과
구겨진 삶의 필름을 어루만진다
사랑을 모르는 자의 표정으로
거울 속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다
미세먼지/기혁
누명을 쓴다는 것은 무중력의 감옥에 갇히는 일
나에겐 더 이상 감당할 무게가 없다
퇴화한 날갯죽지와 어감을 대신하던 바람
그들도 이곳에 오면 한 무리 비약으로 몰려다녀야 한다
혈안이 된 간수들이 몇 줄 문장을 훑어 눈물을 감시할 때
나의 절규는
기표가 없는 슬픔보다 이물에 가깝다
낡은 서가에 가면 타인의 혀로 눈을 씻을 수 있을까
누군가 나의 얼굴에 비닐로 씌우고 불을 붙인다 그렇다면 이제
폴리염화비닐호도 글을 쓸 수 있다
매 순간 햇살에도 매복이 가능한 폭등
부재한 신의 기도(企圖)가 1044㎍/㎥의 농도로 폐부에 분다
나비잠/기혁
뭐라고 불러야 하지?
바람을 시련이라 배운 아이들이 커서,
연애를 하면
그 연애 때문에 보아야 할
바람의 핏줄이며
푸른 목젖의 울렁거림을
배를 미는 일이나 풍차를 돌리는 일,
낡은 선풍기마다 널어 둔 속옷을
말리는 소일까지도
누군가에겐 허공을 떠미는 시련
생애의 근대를 한 사람에게 내어 주는 일에는
또 어떤 풍문이 필요한 거지?
토네이도가 지나간 자리에
꼭 껴안은 인형의 주검이 보였어
빌딩과 자동차를 날려 버린 자연보다 더
지독한 풍문이
인형과 인형 사이에 버티고 있었어
바람을 배운 뒤에도
바람과 입 맞출 수 있었던
추운 플라스틱의 꿈결들아,
너희가 나비든 나비가 너희든
노란 리본을 잊지는 말아 줘
허공이 혀끝에 닿으면,
누구라도 외인(外人)을 흘리는 법이니까
인상파/기혁
세상의 빛을 모두 섞으면
환해진다.
빨강은 파랑에게 파랑은 초록에게
서로를 양보하고
원점으로 되돌아가기 때문.
무수한 빛깔들,
이를테면 아이를 잃은 여인의 눈물은
보랏빛을 더욱 연하게 만들고
배신당한 악공의 기타는
초록을 연둣빛으로 바꿔놓는다.
보이는 것보다
들려온 빛깔들이 점점 많아지면,
자신에게서 가장 먼 것들의 이름부터
차례로
속을 내비칠 수 있었을 텐데.
맹인의 검은 동자가
미래를 예언하던 시절에도
우리의 구원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선 매번
어두운 주변이 필요하고,
손전등을 비추다 맞닥뜨린 진실은
노상강도를 닮아가는 법.
모든 것을 빼앗긴 끝에
목숨만을 부지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만
희미해진다.
주황이 남색을 양보하듯이
남색이 노랑을 양보하듯이
색약의 윤리는 모조리,
캔버스 위 사인 속에 감춰 두고서.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기혁
누구였을까, 빗방울에 처음 목숨을 가져다 준 사람은 시선의 생애를
부딪치다 점점 더 묽어지던 여인은 작은 소용돌이 밑으로 강물을
디디고 있던 소년은…
누구였을까, 우산에 맺힌 연애를 접으며 당신을 태양이라 부르던 꽃은
휘어진 마디마디 서로 다른 피를 흘리던 무지개는 비가 오는 날이면
아무것도 아닌 봄날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무작정 하늘로 솟아오르던 눅눅한 것들은 눅눅함을 펼쳐
하얗게 떠가는 뒷모습은,
공중파/기혁
애인을 들어 올린 마술사가 무대 위 장막을 걷는다
어떤 속임수도 없었으므로 여자의 몸은 공중을 공중으로 인정한다
조금 전 숟가락을 휘었던 관객들은 저마다
자신의 애인을 솟구치게 할 수 없을까, 궁리 중이다
몸이 뜬다는 사건 앞에서, 영감(靈感)보다 나은 구석을 찾던 눈은 플래시를 터트리고
그림자를 지닌 모든 인과들이 프롤로그를 만든다
오버코트에서 떨어진 푸른 먼지, 화면 밖 붐맨*의 잘린 팔뚝, 미녀의 가슴께에 붙은 나방 한 마리
무엇보다 관객의 손뼉보다 더 많은 박수소리들
가장 완벽한 알리바이는 편견이었지만, 편견으로 내린 결론엔 오답이 없었다
고대 그리스 신들의 들뜬 일상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권태’와 ‘자연’ 사이를 오고갔을 뿐
천사를 보기 위해선, 기도보다 침묵이 필요하다는 오랜 논쟁으로부터
우리의 결론은 매번 천사가 받은 중력이 아니라 그녀가 날아든 이유를 향했으므로
반라의 애인을 받치고 있는 마술사의 사랑도 스캔들을 걷고 나면 천박한
밀회(密會)에 불과했으리라, 생각했다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는 편견을 바라보다 장막이 걷히지 않는 우주를 떠올릴 때
우리는 문득 지구인이 설계한 UFO에 올라탈 수 있다 휘어진 숟가락에 비친 얼굴로 사랑한다 말하던
외계인의 의인법(擬人法)을 이해할 수 있다 부유하는 의미를 붙들기 위해
지상에 없는 추문(醜聞)을 견뎌야 했던 별들은
수명을 다한 인공위성 대신 공중과 공중을 연결하기도 했지만,
뜬구름을 겨냥한 사소한 대화에도 태양계의 사연들을 덧씌울 수 있었던 용기를 펼치면
우리의 조물주가 여전히 창조를 끝마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기도 했다
일요일 아침 9시, 기적 같은 프로그램들을 시청해온 가족의 예배시간
우리는 편성표에 적힌 글귀처럼 모두를 위한 기도를 올린다 TV에 손을 얹은 나와 내 이웃에게
우리의 자초지종은 모두 감추어둔 채
언제나 그렇듯이, 공중의 문제로 녹화를 중단해야 했던 그런 사정만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안테나를 세우고 서로의 간증을 시작한다
주사위/기혁
아주 가까운 곳으로 갔다.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더 비좁았다.
골목에서 마주친 우연과 행운은 언제나
본전을 위해서 미래를 말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듯이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듯이
과거를 찾아 어슬렁거리던 혁명이 정육면체의
마음으로 손목을 걸 때
율리우스 시저의 말랑말랑한 속내가
역사를 의심한다.
주사위를 던진 후 반작용은
어디로 가는가?
사라진 손목은 무엇을 쥐는가?
도박판에 끼어든 신에게도
중력의 일관성은 견딜 만했다.
로마인에게도
로마인이 아닌 사람에게도.
그러나 로마는 너무 쉽게 5번과 3번을 인정한다.
무수한 장치를 매달아 둔
타짜를 모른 척
시간의 신념이 되어 버린
허공을 두둔하면서.
노련한 강물과 오늘의 슬픔/기혁
마음이 아플 땐 돌멩이를 던진다
광물에 남겨진 시간을 떠서
허공의 정점에 풀어놓고 싶은 것이다
서로 다른 지층에 묻힌 응어리가 옹기종기
조약돌로 평화로운 정오에도
물수제비뜨는 연인의 돌멩이는
수면 가장 높은 곳까지 떠오른다
지상에서 처음 타인의 마음에 가닿았던 흔적들
돌멩이를 집어들던 무수한 감정은
강물 위에서도 깊고 거대한 속내를 지닌다
이별의 방향으로 벼름하는 생활을 거슬러 올라,
매 순간 허공을 쥐는 손아귀를 본다
더 큰 사랑을 바라보고
더 큰 빈곳에 휘청거리던
저녁의 저글링
돌멩이에겐 곡예사의 어투를 물려받은 조상이 있다
분장이 다 번진 얼굴로
거들어줄 손 하나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개나리 벽지/기혁
잉크 대신 피를 넣은 만년필을 내려놓는다
말라붙은 여름만 남은 오탈자 노트
모기와 파리, 권태와 배달쿠폰
까닭 모를 증오와 천사도 시들어 있었다
겨울이 가면 절필이다 사방의 냉기를 찢어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싶다
사람을 사랑했던 들짐승처럼
손인사에 무너지던 아지랑이처럼
개나리를 독자로 모시고 제 것을 핥아보고 싶다
불면이 기거하던 좁고 네모난 가슴 밖까지
입에서 입으로
봄날을 도배하면서
상온의 원고뭉치를 부려 놓고
모음으로 번질 꽃잎들을 실언(失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