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곡 이달 (蓀谷 李達) 과의 만남 >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 중기(1539∼1612)의 시인. 이달.
얼핏 근대의 명리학자 야산 이달과 혼돈되었던 인물과의 만남이다.
더구나 그가 임란 후 공주 목사로 부임했던 허균의 스승이었다는 사실과 서얼출신의 신분제도 속에서 뜻을 펴보지 못하고 대신 민초들의 고통과 애환을 농익은 당나라 시픙으로 감정을 풀수 밖에 없었던 시대의 불운아였다. 후손도 없어 그저 제자 허균이 애써 남겨 놓은 손곡집으로 해서 더욱 유명해진 삼당시인의 한 사람이다.
우연찮게 생긴 계기로 그의 시의 세계를 들어가 보게 된다.
- 손곡(蓀谷)의 지명은 순 우리말로는 '손위실'이란다.
충청도 홍주(현재의 홍성)에서 태어난 신평이씨(*안내판에는 홍주 이씨로 표기) 집안의 이달은 이곳에서 숨어 살면서, 갖게 된 호: 손곡蓀谷)(의 손(蓀)은 꽃창포의 일종인 풀 이름이란다. 한자식 지명은 별 의미가 없을 듯.
-이곳은 이달 시인 말고도 임경업 장군 탄생지로도 유명한 곳, 마을 안내도를 들여다 본다.-
-이달 시비를 찾아 가본다.-
( 도중에 '이달의 꿈'이란 이름이 붙은 창고식 극장도 보이고, 조금 더 내려가니 '이달 쉼터'가 나타난다. )
-이달의 시비 : 손곡 시비 -
(보릿고개를 떠올리게 하는 '예맥요'를 새겨놓은 시비이다.)
이와 같은 시비가 그의 출생지인 충남 홍성에도 있단다.
<시비의 내용을 옮겨본다>
田家少婦無夜食 * (전가소부 무야식)
雨中刈麥林中歸 (우중예맥 임중귀)
生薪帶濕烟不起 (생신대습 연불기)
入門兒子啼牽衣 (입문아자 제견의)
시골 밭집 젊은 아낙네
저녁 거리 떨어저서
비 맞으며 보리 베어
숲속으로 돌아오네
생나무에 습기 짙어
불길마저 꺼지도다
문에 올라 어린아이들
옷자락 잡아다리며 울부짖네.
리가원 *(李家源 ) 번역하고 쓰다
(*표시 부분은 자부리가 임의로 덧붙인 것임)
- 손곡 이달 안내판-
(마침 동행한 지기님이 제공한 원주시 발행 손곡책자들이다. )
-'예맥요' 부분이 나오는 부분을 영인판 사진으로 읽어본다-
옛날의 필사본이나 인쇄본을 실물사진으로 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아서 소개한다.
(띄어쓰기가 없고, 판본에 따라서 글자가 다른 경우도 있고, 옛날 고문자나 속자, 동자, 통자 등의 한자 들로 낯선 글자를 만나기도 한다.)
-예맥요 시비가 충남 홍성 읍성 서쪽에 있단다. 퍼온 자료 사진에서 -
- 내가 좋아하게 된 시 : ' 불일암 증인운석 ' -
寺在白雲中 白雲僧不掃 *(사재백운중 백운승불소)
客來門始開 萬壑松花老 (객래문시개 만학송화로)
절은 흰 구름 속에 있는데
중은 그 흰 구름을 쓸지 않는다
손님이 와서야 비로소 문을 여는데
왼 골짜기에 송화가 늙어 있네
(*『손곡 이달 연구』 65쪽의 김성기 교수 글에서 인용)
(*손곡집 권1 에는 ‘寺’ 대신 ‘山’으로 기록되어 있슴.
: 『大東詩選』 卷之三에는 「山寺」라는 시제로 되어 있고 기구(起句)가 ‘寺在白雲中’으로 되 어 있는 바, 손곡집의 ‘山在 --’로 시 작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다는 사람들 편에서.)
-(계룡산) 삼불봉에서 자연성능을 지나 관음봉으로 가는 길에
천산만학의 산을 내려다 보면서 이달의 시를 한 번 음미해본다.-
(이달은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의 스승이다.,
허균은 스승의 신분을 무시하지 않고, 사후 그의 시집을 발행하는 등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세한도의 추사와 이상적처럼.
스승의 손곡집 간행을 마치고 얼마 안 있어 능지처참 당하는 비운을 맞는 제자 허균.
임란 후 공주 목사로 부임하게되자 그는 서얼 출신의 친구 이재영에게 자신의 급료 절반을 줄터이니 어머님 모시고 오라는 편지를 쓸 정도로 호방한 인물이었다.)
-교산 허균의 초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