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서 걸어가라 (요한복음 5:1-10)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빕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건 성경대로 사는 것인데 성경대로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청년이 성경을 읽다가 마태복음 5장 39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하는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하고 기도한 후에 그 말씀을 실천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장 믿음이 좋고 설교도 잘 듣고, 성경도 많이 아는 장로님에게 다가가서 아무 말도 안하고 뺨을 한 대 후려쳤습니다.
그랬더니 기대와 달리 그 장로님이 노발대발 고함을 지르며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이 장로님에게 마태복음 5장 39절을 읽어 주며 장로님, 이 말씀을 믿습니까? 그랬더니 ‘내가 화 안내게 생겼냐? 여기 보면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을 돌려대라 했는데 넌 왼뺨을 쳤잖아...성경 좀 제대로 읽어라..’ 그러자 청년이 ‘죄송합니다. 제가 뭘 몰랐군요. 그러면 다시 하겠습니다.’ 하고 왼뺨을 때렸습니다.
어쨌던, 말씀대로 살기를 바랍니다. 누가 여러분의 왼뺨을 때리지 않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예수를 제대로 믿으려고 하면 뺨을 맞듯이 모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때, 같이 뺨을 때리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편도 돌려대라 하는 말씀은 제 말이 아니고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베데스다 못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베데스다는 우리말로 자비의 집이라는 말입니다. 그곳에 38년간 머무르며 자신의 병을 고치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시고 자리를 걷어서 일어나 걸어가라 하셨고, 그는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그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자비의 집, 베데스다에 있는 이 환자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합니다. 자비가 무엇일까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도의 갠지스 강가에서 어떤 수도자가 명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강가에서 수도사가 명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갈 한 마리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수행자는 손을 뻗어 전갈을 건져주었습니다. 하지만 곧 전갈의 독침에 쏘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수도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전갈을 놓아주고 다시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또다시 물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전갈이 또 강물에 빠진 것입니다. 수행자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전갈을 구해줬고, 또 독침에 쏘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별말 없이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똑같은 일이 또 벌어졌습니다. 곁에서 그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구려. 아니, 전갈이 사람을 쏜다는 사실을 모르오?"
수도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압니다. 벌써 세 번이나 쏘였는걸요." "그런데 왜 자꾸 구해주는 거요?" "독을 쏘는 것이 전갈의 본성이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나의 본성입니다. 전갈의 본성 때문에 나의 본성이 바뀌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자비가 충만한 분입니다. 전갈같이 독을 품고 쏘는 사람을 구하시려고 한없는 자비심으로 우리에게 손 내미시는 주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물에 떠내려가고 죽음으로 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모르는 전갈과 같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첫째, 본문에 나오는 이 병자는 38년간 아팠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 병이 오랜 줄 아시고... 깊은 병입니다. 낫지 않는 병, 그렇다고 죽지도 않는 병입니다. 고질병이라 합니다.
이 연못에는 종종 천사가 와서 물을 용솟음치게 하는데, 그때 맨 먼저 연못에 들어가면 병이 나았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그 연못에 모여 있었습니다. 여기 38년 된 사람도 물이 움직일 때 부지런히 못으로 갔습니다만 연못에 1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38년을 앓으면서 거동이 불편하여 거의 기다시피 가면 이 미 다른 사람이 연못에 가 있었습니다.
그는 수없이 실패와 좌절을 겪었습니다. 베데스다, 그 자비의 집에서 자비를 얻지 못했습니다.
38년간 이 병에 시달리니 돈도 떨어지고, 사람들, 가족들도 친구들도 포기하고 떠나고.. 그는 거지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가 가진 건 더럽고 낡아빠진 침상 하나뿐입니다. 시간을 잃어버리고, 가족을 잃어버리고, 명에를 잃어버리고, 재산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는 힘이 없고 무기력합니다. 자신감도 잃어버리고 심한 좌절과 실패감,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요5:14) 죄란 인생의 바른 길, 목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탈선, 궤도이탈, 항로이탈과 같습니다. 항로를 이달하면 아주 위험해 집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던 대한항공, 비행기가 있었습니다. 이 비행기에는 269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비행기가 항로를 이탈했습니다. 소련 전투기가 나타나서 항로를 이탈했다고 경고 비행을 했습니다. 그래도 경로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경고 사격을 했습니다. 그래도 경로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소련 전투기가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비행기는 추락했고 승객들은 다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길입니다. 예수라는 길을 가야 살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길만이 생명의 길이요, 기쁨의 길이요, 행복의 길입니다. 내 마음에 예수를 주로 삼고 가는 길입니다.
둘째, 주님께서 이 사람을 찾아 가셨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을 만나 ‘네가 낫고 싶으냐?’ 물으셨습니다. 자신을 고치고 싶은가? 이 환경을 개선하고 싶은가 하고 물으셨습니다. 자신을 바꿀 마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언젠가 종묘 앞에서 노숙자들과 같이 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지낼 만 한지, 밥은 어떻게 먹고 사는지, 옷은, 잠은,.... 그 사람은 자신이 편하다고 했습니다. 노숙자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더러운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손을 내 밀면 누가 돈을 준다고 합니다. 그 돈으로 소주를 사서 마시고 빈둥거리며 노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바꿀 생각이 없는 사람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네가 낫고 싶으냐? 하는 이 말씀은 네 자신을 바꾸고 싶으냐? 생각을 바꾸고 싶으냐? 마음을 바꾸고 싶으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꾸어야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어야 살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사람, 38년 동안 수백 번 용솟음치는 연못으로 기어갔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낫지 못했습니다.
‘네가 낫고 싶으냐?’ 하는 말씀은 다시 한번 낫고 싶다는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예 나는 낫고 싶습니다. 저 치유의 샘물(the healing waters)에서 고침을 받고 싶습니다. 저 힐링 워러에서 고침을 받고 싶습니다. 저는 38년 동안 그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치유되기를 원해야, 자신이 고치기를 원해야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인즈 워드’라는 미식축구 선수가 있습니다. 한국계 선수입니다. 그의 연봉은 미식축구 선수중에 가장 높습니다. 그는 전설적인 선수입니다. 그가 2006년 6월호 ‘가이드 포스트’에 ‘어머니와의 약속’ 이란 신앙 간증문을 실었습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내가 자란 곳은 조지아 주이다. 그러나 내 고향은 어머니의 고향 대한민국이다. 1975년 가난한 가수 지망생이었던 어머니(김영희)는 5살 연하의 흑인 병사 하인즈 워드 시니어와 사랑에 빠졌고 결혼하여 내가 태어났다. 그리고 어머니는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미국으로 왔다.
미국으로 온지 얼마 안 돼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했다. 경제력도 영어도 모르는 어머니가 양육권을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가끔씩 찾아와 “내가 네 엄마란다” 라고 말하는 어머니는 이상한 존재였다. 언젠가 학부모 모임이 있을 때 식당에서 일해야 할 어머니가 학교에 왔다. 나는 고개도 못 들고 바닥만 봤다. 그 일로 내가 동양계 혼혈이라는 것이 알려졌고 아이들이 놀려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낡은 차로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면 나는 아이들의 눈을 피해 아이들 속으로 얼른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차에서 내리려는데 하필 아는 아이들이 많이 지나가고 있었다. “오, 이런!” 나는 얼른 차창 밑으로 몸을 숨겼다가 그 애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차에서 내렸다. 몇 걸음 가다가 우연히 뒤를 돌아봤을 때, 어머니는 고개를 묻고 흐느끼고 계셨다. 그날 저녁 어머니가 나에게 “내가 부끄러우면 아버지에게 돌아가거라.” 어머니는 너무나 슬프게 울고 계셨다. 그 슬픔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바로 그 순간 나의 생각이 바뀌었다. 나의 태생도 어머니도 바꿀 수 없는거야. 반은 흑인 반은 한국인 그게 바로 나야.
호텔 청소와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어머니는 내가 모든 것을 누리며 살게 했다. 그런 어머니가 소리 없이 울고 있으면 나는 말도 통하지 않는 어머니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함께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머니의 눈물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당신의 아들을 위해서였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는 나를 버티는 버팀목이 되었다. ...... 나의 삶에 작은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어느 하나도 내 것이 아닌 어머니의 것이요, 어머니의 눈물어린 기도의 응답이다. .....’
어머니의 마음,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그대는 낫고 싶은가? 하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 주님은 우리에게도 너는 낫고 싶으냐? 물으십니다. 너 자신을 고치고 싶으냐? 물으십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을 병마에 시달리던 사람을 찾아오신 주님은 ‘일어나라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기어 다니던 그가 일어났습니다. 다리도 쓰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허리도 못쓰던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그의 침상을 정리하고 그것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순간 그는 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가진 것은 침상이 전부입니다. 하루 종일 그 더럽고 초라한 침상에 누워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침상을 정리해라 거기에 누워있으면 안 된다. 이곳은 네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다’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애지중지 합니다. 초라하지만 누리는 것을 포기하기를 싫어합니다. 부자집의 사랑받는 아들로 자라난 요셉이 애굽의 노예가 되어 종살이를 했습니다. 주인의 인정을 받아 종들의 대장, 총무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감옥에 갔을 때, 요셉은 자신이 누렸던 그 자리를 아쉬워했을 것입니다. 비록 노예였지만 주인의 인정을 받고 모든 노예를 부릴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요셉은 노예장의 자리에서 벗어나면 죽는 줄 알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이 병자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리를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친하게 지내는 사모님이 눈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사물이 두 개로 보이고 겹쳐서 보였습니다. 눈이 아프고 안구가 튀어 나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사모님이 세브란스 병원 안과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았습니다. 안구 뒤의 혈관이 확장되어 눈에 압박을 가해 생긴 병이었습니다. 안구 뒤의 혈관을 묶어 어쩌고... 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마취를 하지 못하는 수술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그런 아픈 수술은 없다고 합니다. 그 수술을 받고 눈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의사의 말을 듣고 따르면 살길이 열립니다. 역시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살길이 열립니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