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차이점에 대한 비판적 논평
김영환 교수의 글
김영환 교수님의 글은 장로교를 비판하는 전형적인 회중주의적 독립파적 입장의 글이니 주의해야 합니다. 물론 현재의 장로교회는 원래의 역사적 장로교회에서 많이 멀어져 있기 때문에 이 상태를 비판하는 것이라면 일부 맞는 표현도 있지만 현재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장로교 자체도 교권주의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판은 독립파를 추구하는 김홍전 목사나 뉴잉글랜드를 계승하는 회중파 목사들이 정통 장로교를 비판할 때 늘 했던 주장들입니다. 김 교수님의 잘못된 분석에 대해서 몇 가지만 소개해 봅니다.
1.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역사에 대한 오해
개혁교회는 칼빈의 제자들로서 3폼(벨직, 도르트, 하이델)을 고백하며 주로 유럽 계열의 개혁주의 교회들입니다. 반면 장로교회는 동일한 칼빈의 제자들로서 스코틀랜드와 영국을 거처 미국으로 이어지며 웨스트민스터를 표준문서로 고백하는 개혁주의 교회를 말합니다. 둘 다 동일한 개혁주의 교회를 표방합니다. 즉 7대 교리와 장로정치를 표방하는 개혁주의 교회들입니다. 후기 3대 칼빈주의라고 할 때도 개혁교회의 카이퍼와 바빙크, 장로교회의 워필드를 언급합니다.
다만 19세기 이후에 유럽이 급격히 자유주의화 되는 과정에서 유럽개혁교회들도 자유주의 신학, 신비주의, 회중주의 신학이 스며들었습니다. 따라서 20세기에 유럽에서 유학한 분들은 주로 이런 혼합적인 신학에 영향을 받은 분들이 대다수입니다. 결국 허순길(장로교 비판), 김영환 교수님들은 20세기 후반에 유학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역사적 개혁주의(장로교를 표방)에서 변형된 개혁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그 결과 자신들만이 가장 순수한 개혁교회인 것처럼 말하며 선조들(카이퍼, 바빙크, 워필드)이 서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를 같은 뿌리로 존중했던 것을 분리시켰습니다.
따라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다른 신학을 추구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평가입니다. 독립개혁교회를 추구하는 분들만이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를 다른 것으로 주장하며 자신들이 개혁교회를 계승한 것처럼 말할 뿐입니다.
2. 장로교의 구원론를 비판하는 오해
김 교수님의 구원론은 칼빈, 카이퍼, 바빙크 워필드가 제시한 구원론과 차이가 많이 납니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은혜 언약을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택자들과 맺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 선택은 언약과 동일하지 않다. 언약은 선택보다 그 범위가 넓다.”]라는 은혜언약 개념은 전통적인 개혁주의 언약개념이 아니라 알미니안주의나 회중주의 언약개념이나 최근에 문제가 되는 패더럴비전이에 가깝습니다. 이들은 예정(선택)과 은혜언약을 분리해서 적용합니다. 특히 도르트 총회에서 알미니안주의가 칼빈주의자들의 ‘예정중심’(예정=언약) 개념을 공격하면서 ‘언약 중심’(택자와 불택자 모두 포함)으로 구원론을 보기를 강조했기 때문에 이런 분리 개념은 주의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둘을 같은 것으로 봅니다. “문 31. 은혜언약은 누구와 맺은 것인가? 답: 은혜언약은 두 번째 아담인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 안에서, 또한 그의 후손인 모든 택한 자들과도 맺은 것이다.”
이 외에도 [“반면에, 장로교회 안에는 바로 이 언약의 복음이 선포되지 않는다. 영원한 죽음과 지옥의 고통은 단지 불신자들의 몫일 뿐,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만이 있을 것임을 보장하는 설교만 한다. 그들에게 언약적 저주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회개의 설교는 없다. 즉 장로교회는 언약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다 자동적으로 선택된 것으로 설교한다.”]라는 주장도 장로교의 예정론 강조하는 구원론을 매우 혐오적으로 비판하는 글입니다. 장로교 구원론이 마치 ‘구원파’ 구원론인 것처럼 비판합니다. 장로교는 이렇게 예정과 구원을 극단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장로교가 예정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르게 신앙고백하고 세례 받은 신자에게 구원의 위로와 확신을 주기 위함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직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엄중한 회개를 강조하며, 또한 신자들에게 성화적인 책망도 많이 합니다.
카이퍼의 ‘가정적 중생론’은 장로교에서도 비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개혁주의 주류적 입장이 아닙니다. 이 문제도 19세기 네덜란드 개혁교회 안에서 논쟁이 될 때 최후에 바빙크가 중재하여 유아세례는 은혜언약에 기초하여 말하는 것이 바른 것으로 총회에 보고하여 가정적 중생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다만 카이퍼의 주장이 조금 지나친 것이지 그의 신학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유아세례의 근거를 중생에 근거하지 않고 은혜언약에 기초한다고 말할 때도 장로교는 구원받은 신자의 표시로 해석하는데 독립파나 회중파는 ‘유아세례=불신자’로 해석하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3. 회중파, 독립파적 교회론 주장
김 교수님은 애초에 장로교 자체를 비성경적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대요리문답 역시 “보이지 않는 교회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이며 장차 모일 택한 자의 총수”로 설명한다(64문답). 반면에 개혁교회는 이러한 두 교회론을 반대한다.....성경이 ‘교회’를 말할 때, 그것은 택자와 관련되지 않고, 언약의 백성들과 관련을 맺고 있다. 교회는 택자들의 총수가 아니라 언약 백성들 전체이다.””]라는 주장은 20세기 후반 독립파, 회중파로 변형된 유럽개혁교회 목사들의 입장입니다. 카이퍼와 바빙크, 벌콥은 모두 회중파, 독립파를 비판하고 모두 장로교회를 성경적인 교회정치로 제시합니다. 또한 장로교회는 두 교회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한 교회의 두 면으로 해석합니다. 벨직 신조와 웨민 신조가 다른 교회론을 주장하는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전형적인 독립파 주장입니다. 독립파 분들은 벨직을 마치 자신들의 신학적 기초로 주장하며 벨직이 프랑스 신조, 스코틀랜드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조와 다른 것처럼 항상 주장합니다. 회중파 분들이 웨스트민스터 교회론을 비판하면서 사보이 신조를 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두 장로교회를 교권주의, 감독주의로 비판합니다.
이 외에도 [교회론에서 두 번째 문제점은 “순수한 - 덜 순수한 혹은 순수하지 않는 교회의 구별”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장 4절). 이 표현을 100보 양보하여 개혁교회가 사용하는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의 구별과 같은 용어로 본다 할지라도, ...교회의 다원성 이론에 문을 열어 줄 위험성이 크다. 다시 말해서, 하늘에 있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이 세상에서 다양한 형태의 교회들 곧 교파들로 나타난다는 카이퍼의 이론에 동조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 지상에 나타난 모든 교파들을 그리스도의 보편교회의 한 모습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로마교회, 성공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침례교회, 오순절 교회 등 모든 교회들과 실제로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그렇지 않는 교회는 좀 덜 순수한 교회가 아니라 거짓 교회일 뿐이다(벨직29항).]라는 주장도 문제가 있는 표현입니다.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의 구별은 벨직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신조 18조, 칼빈의 기독교강요 등에서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벨직과 종교개혁신조들은 모두 장로교회를 성경적인 정치원리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벨직을 작성했던 귀오드 브레나 이것을 인준했던 네덜란드 도르트 총회 분들도 모두 칼빈의 제자들이며 서로 상호 교제했던 분들입니다. 도르트총회도 유럽 대륙과 영국 모두 초청하여 개혁주의의 공통된 목소리를 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신조들의 교회론이 서로 다른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매우 편파적이 잘못된 주장입니다.
더구나 벨직 만을 편애하면서 다른 교파와 교단의 존재를 부정하며 자신들만이 가장 순수한 교회처럼 말합니다. 만약 이런 주장이라면 위 글에도 있는 것처럼 성공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침례교회, 오순절 교회 등을 모두 이단취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교회들은 장로교회나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리와 규례가 없기 때문입니다. 매우 독선적인 판단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접근입니다. 종교개혁 초기에는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로 구별해 왔던 것이 교파가 더 많아지면서 웨민시대에 와서는 ‘더와 덜’로 좀 더 세밀하게 표현한 것이지 교회론 정의는 모든 신조가 동일합니다.
4. 독립파와 회중파를 추구하는 김 교수님의 교회론 문제
김 교수님은 독립파와 회중파가 가장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며 장로교를 교권주의로 비판합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개 교회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이다. 장로교회는 개 교회를 보편 교회에 속한 지체로 보는 반면(신앙고백서25:4), 개혁교회는 개 교회를 완전한 보편 교회로 본다(신앙고백서27항). 이 때문에 장로교회는 당회뿐만 아니라 노회와 대회 그리고 총회까지 치리회로 본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오직 당회만을 치리회로 본다..... 그러므로 각 교회 위에 있는 권세로서의 어떤 개인이나 교회나 교회들은 없다.....장로교회는 “노회”를 감독교회의 관구로 해당한다고 찰스 핫지가 말했다. 이것은 분명히 개혁교회의 장로회 정치가 아니라 감독 정치이다. ....여기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목사는 결코 개 교회의 회원이 아니며, 하나님이 특별히 개 교회에 보내시는 파송하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상이 그것이다.]
위 주장은 16세기에 분리주의자였던 R. 브라운이나 재세례파, 침례교, 회중파(사보이선언, 뉴잉글랜드) 등이 항상 장로교를 비판하면서 했던 동일한 주장입니다. 이들은 만인제사장 원리를 극단적으로 교회론에까지 주장하며 개별 교회의 자유만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에 반대하여 칼빈과 베자, 낙스, 귀오드브레, 도르트 총회 등 개혁주의자들은 장로교회제도를 주장했습니다. 20세기에 유럽에서 유학한 분들의 경향이 독립파적 교회관이 강해서 비슷한 주장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장로교인들은 주의해야 합니다. 개별 교회로 교회가 존재할 때 목사를 견제할 수 없는 문제와 개교회가 이단에 빠질 위험, 교회 안에 파벌과 무질서 발생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직분간의 계급이 있다. 반면에 개혁교회는 모든 직분이 개교회에 소속되어 있으며, 직분상의 어떠한 계급의식이 없다. ....이 모든 것은 성경과 그 개혁의 원리를 벗어나 감독교회체제로의 회귀임과 동시에 시대의 조류를 따름이다.]
이 주장이 만약 현대에 많이 변질된 장로교회를 비판하는 말이라면 일부 맞습니다. 하지만 김 교수님은 정통 장로교제도와 현대 장로교회를 다 포함해서 모두 교권주의로 비판합니다. 반대로 오늘날 독립개혁교회를 추구하는 교회나 회중파 교회들은 계급적 모습이 없을까요? 제가 30면 목회하면서 만났던 독립파 계열의 성도나 목사님들 중 독립파 교회의 지나친 위계질서에 상처를 받은 분들을 많이 만나봤습니다. 오히려 독립파 계열은 견제 장치가 없기 때문에 특별한 위치의 목사나 신학자의 영향력은 현재의 장로교 보다 더 위계적입니다.
5. 성만찬에 대한 지나친 우월의식
[그러나 양교회의 차이점은 “합당하게 참여하는 것”에 있다..... 소위 울타리를 친다....이에 반해 장로교회는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개인의 의사에 맡겨버린다. 한국장로교회의 경우, 일년에 한 두 차례 시행하는 주의 만찬은 전혀 울타리를 치지 않기 때문에, 언약적인 저주가 가득 한 만찬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위 지적 중 현재 한국장로교회가 성찬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정통 장로교회를 추구하는 많은 바른 장로교회들은 성찬을 자주 시행하고 있으며 관리감독도 당회의 권징질서가 있기 때문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비판도 마치 역사적 정통 장로교회도 성찬을 매우 등한시하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오류가 있습니다.
장로교회는 성도가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거나 공적으로 명백히 드러나기 전까지는 가능한 한 성찬에 성도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이런 배려를 김 교수님은 성찬관리부재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장로교가 이렇게 배려하는 이유는 성찬은 ‘가로막기’(울타리)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성도들을 돌보기 위한 ‘은혜의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칼빈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71문: 그러면 거짓 위선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 목사들은 이들을 성찬 받기에 합당치 않은 자로 여겨서 성찬 시에 금지 시킬 수가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이들의 사악함을 외적으로 드러내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372문: 그러면 목사가 성찬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을 친히 알고 있다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발을 받았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 이 경우에도 충분한 증거나 교회의 공적 재판을 통해서 판결이 없을 때는 이들을 성찬에 금지 시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독립파나 회중파는 성찬을 너무 엄격하게 제한하여 가능한 한 성도들이 참여하지 못하는 폐쇄성을 갖고 있습니다. 장로교는 성도가 연약하기에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라고 격려하는데 저들은 연약하기에 참여하지 말라고 문을 닫습니다. 장로교의 성찬모습을 “언약적인 저주가 가득 한 만찬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라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독선적인 주장입니다. 독립파와 회중파의 너무 엄격한 기준 때문에 웬만해서는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폐쇄성은 왜 보지 못하는 것인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독립파나 회중파는 넓게는 개혁주의를 추구하는 분들인데 왜 이렇게 장로교에 대해서 적대적 입장을 취하는지 안타깝습니다. 논평을 부탁해서 중요 부분만 살펴봤습니다.
출처 : 위스트민스터 신학회 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