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셰너스와의 면담
이 세상은 하나의 차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무한대에 가까운 여러개의 차원이 덧씌워져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낸 그런 상태. 그것이 현재 우리가 숨을 쉬고 있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 차원들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낸다면? 그것이 레아디오스가 만들어내는 결계의 원리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원리를 생각해보자. 우리 눈에는 그저 자연스럽게 흐르는 영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여러장의 정지된 화면의 연속이다. 비슷한 원리로, 일정공간을 분리시키고 분리시키고 또 분리시키고 그렇게 벗기다 보면 시간은 점점 쪼개어지다 마침내 zero가 되어버린다. 각 분리된 차원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않는, 각각의 독립된 차원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만약 그 차원 중 하나를 뺀다고 해서 다른 분리된 차원들이 없어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결계능력자는 수없이 쪼개진 차원들 중 하나의 장면을 빼낸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된 차원은 다시 시술자의 시간을 따라 흐르게 된다. 사실 자연스럽게 연속되어야 할 여러 장면 중에 한개의 장면이 빠지니 실제적으로 현실에선 약간 위화감이 느껴지기는 하지. 그래서 신경이 예민한 사람들은 일순간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당신은 살면서 그런 느낌을 받은 적 없는가? 난 있어. 그런 면에서 역시 난 천재같아. 후훗.)
그 안에서 있었던 일이 결계가 풀린 후에도 유지되는 존재들은 다음과 같다. 결계를 시술한 사람을 포함한 결계능력자, 그런 결계능력자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 평범한 수준 이상의 사람들(자신을 유지하려는 응집력이 타인에 비해 월등하게 높은 사람들이란다. 예를들어 오랫동안 수행한 사람들이라거나 등등), 마지막으로 나같은 특수한 경우란다. (틸라이는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움직이는 사람은 자신만의 시간을 유지하기 때문에 안에서 있었던 일들이 결계밖으로 나가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말은 반대로 자신의 시간을 유지못한 존재는 결계가 풀려도 아무런 일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안에서 건물이 부서져도 결계가 풀리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아울러, 결계를 시술한 사람이 원하지 않는한(최악의 경우 죽지 않는한) 결계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마찬가지로 밖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게된다. 그래서 이런 결계를 치면 사회에 혼란을 주게 되므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쓰는 일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이 결계라는 것도 완벽한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결계능력자의 능력과 결계를 칠 때의 공들인 정도에 비례하기 때문에, 아주아주 강한 결계능력자가 있으면 타인이 쳐놓은 결계를 뚫고 자기 마음대로 바깥과 왔다갔다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아주아주 강한 결계가 쳐지면 아무리 다른 결계능력자라도 결계를 뚫고 나갈 수 없다고 한다.
다음으로,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법칙의 세계와 동시에 존재하면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세계인 이면지구라는 것이 있다. 이 이면지구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로지 결계능력자와, 결계능력자의 도움을 받은 사람과, 틸라이 뿐이다. 이면지구와 현실은 동시에 존재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문으로 인한 파괴현상이 있은 후 현실로 돌아올때는 마치 결계가 쳐졌다 사라진 것 처럼 느껴지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시간차는 없다. 말하자면, 사건 A -- 사건 B 까지 10분이 걸렸다고 한다면, 사건 A - (이면지구에서의 일) - 사건 B 역시 10분이 걸리는 셈이다. 그래서 실제로 현실에서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하지만 상호공존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면지구에서 어떠한 일이 있다면 나중에라도 현실에서 짜맞춰지듯이 그 어떠한 일에 대한 결과가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이면지구로의 영향은 대개 꿈이라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꿈이라고 해서 특별한 다른 어떤 것을 지칭하는 말은 아니다. 말 그대로 잠을 잘 때 꾸는 그 꿈을 말한다. 다만 그 꿈이라는 것이 한데 모이는 공간이 있는데, 편의상 그것을 모두의 꿈속이라고 한다. 보통 사람들도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 모두의 꿈을 통해 이면지구를 수없이 왕래한다. 기억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따라서 꿈은 일종의 통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꿈 속에 있는 것들이 이면지구에 영향을 주고 다시 이면지구에서의 일은 우리가 있는 현실세계에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생판 모르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어느 누군가라도 나와 서로 연결지어진, 영향을 주고 받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다.
... ... 여기까지가 셰너스의 설명 요약판이다. 이해한 사람? 설마 없겠지. 난 이해 못했거든?
어쨌거나 그래서 결계안에서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때리고 부숴도 결계가 풀린후에는 아무 이상 없지만, 이면지구와 꿈속에서 문이 열렸을 때 나타난 괴물의 파괴행각은 직간접적으로 현실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영향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 (꿈속에서의 법칙이 현실의 법칙과 동일하다고 할 수 없겠지. 그런 원리란다.)
또한 꿈속과 이면지구를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는 건 결계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자들 뿐이란다. 그래서 이면지구에서 있었던 일들을 사람들은 기억 못하는 것이고. 아, 나는 틸라이니까 제외. 참고로 셰너스는 결계능력자는 아니지만 왕자의 도움으로 다닐 수 있다고 한다. 아울러 꿈 속에서는 특성상 공간을 초월하며(예를들어 모두의 꿈 속에서는 내가 한국에 있어도 지구 반대편 미국으로도 후딱 갈 수 있다는 것이지) 언어의 장벽도 사라진다고 한다.
어... 어... 아무튼 그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지금 최민영님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모드 중에 있습니다. 쿨럭쿨럭) 틸라이가 뭔지 자세히 알려달라고 일단 부탁하기는 했는데 말야, 그의 친절한 설명이 내 이해능력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틸라이는 예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우주의 상관관계로 인해 태어난 일종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원하지 않아도 다른 세계로의 문을 열수도 있고 다른 세계로 왕래할수도 있습니다. 저, 민영님..?"
"....네? 아, 네. 듣고 있어요."
"네.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사항을 도출할 수 있겠지요.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그럴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세계의 문을 열 수도 있다. 하면 그 반대도 가능하겠지요..?"
"네? 아, 네..."
"그것이 당신께서 물어보신 틸라이의 각성입니다."
"네... 틸라이의 각.... 네? 각 뭐라구요?"
"....각성. 말입니다."
그렇구나... 그게 틸라이의 각성. 에, 그러니까, 모든 설명을 다 뛰어넘어서 결론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른 세계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다는 말이야? 열고 닫을...아..! 그렇구나. 원치 않아도 열렸다면, 내 의지대로 그것을 열리지 않게 닫아 놓을 수 있어.
"하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쉬이 가능했다면 지금껏 우리가 고생하지 않았겠지요. 지금까지 드린 설명은 어디까지나 저희 종족들의 미약한 지식으로 추측해온 사실들일 뿐입니다. 애초에 틸라이라는 전 우주에 관련한 심오한 현상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니까요. 때문에 틸라이의 각성이란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 존재하는 이야기이고, 실제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 하는것은 현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전대미문의 일입니다."
...잠시 기분이 좋아졌다 말았다. 셰너스는 그런 날 향해 부드럽게 미소지어 보였다.
"하지만 당신이 그곳에서의 일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는것은, 그리고 그곳에서 자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희망적인 일입니다. 그건 꿈밖에서 꿈 안으로 들어가는 때 외에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에에... 그러니까 그 말은, 레아디오스가 결계의 힘을 사용해서, 그러니까 강제적으로 모두의 꿈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때 외에는 불가능하다는 말인거에요?"
"네, 맞습니다. 원래대로라면 꿈속의 일은 깨어나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그곳 안에서도 분명한 자아를 유지시키지 못합니다."
그 외에도 셰너스는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다. 자신들이 이곳에 오게 된 일들하며 평소의 레아디오스의 모습이라던가 바다의 종족에 관한 이야기들. 옛날부터 인간들 사이에 인어공주와 같은 이야기로 내려온 전설이 바로 자신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나. 전 바다를 다스리는 포세이돈은 실제로 존재하며 (허나 인간들의 신화속 그런 모습은 아니란다) 그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고, 각 아들들은 일정한 지역을 통찰한다고 한다. 여기서 각 아들, 즉 왕자들이 맡은 지역이란 우리 세계의 국가와 비슷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같은 건 아니란다. 일종의 부족의 개념이라나 뭐라나. 따라서 각 왕자는 각 지역을 다스리는게 아니고 어디까지나 의견을 모으고 조언을 하는 장로와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거기서 한가지 놀랬던 사실. 레아디오스가 적어도 150살은 넘었다는 사실이다! 후와, 후와. 그럼 할아버지도 보통 할아버지가 아니네. 거기에 셰너스는 레아디오스보다도 나이가 어리단다. 하는거나 생긴걸로 봐서는 아무리 봐도 셰너스가 형 같은데 말야. 여하튼 바다의 종족들은 틸라이에 관한 여러가지 연구 끝에 어느정도 틸라이가 있을 만한 곳을 특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와 같은 결과로 올 초부터 이 둘이 우리 동네에 주둔하게 된 것이란다. 허나 틸라이가 있을 만한 지역을 어느정도 범위만 좁혀서 알 수 있을 뿐이라서, 누가 정확히 틸라이인 지는 알 수 없고, 때문에 생활비도 벌겸 붕어빵 장사를 하게 된 것이라는데...
"그런데요, 왜 하고 많은 것중에 붕어빵 장사에요..? 에, 그리고, 왕자라면서 돈도 없어요?"
라고 내가 묻자 셰너스가 당황스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뭐, 그분의 뜻이니 말입니다. 노력없이 얻는 것은 무가치하다는 것이지요. 물론 저희에게도 진주와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통용될만한 화폐들이 있기는 하지만, 왕자님께서는 그것을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을만큼만 사용하시고 더이상 쓰기를 금지하셨죠. 그리고 인플레이션이라는... 저로선 조금 생소한 단어를 쓰시면서 인간들에게 경제적 혼란을 줄 수 없다고도 하셨죠."
그가 인플레라는 단어를 쓸 때 나는 매우 잘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지음으로써 그에게 내가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지만, 학구적으로 보이는 그가 내게 그 단어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할까봐 황급히 아는체하기를 그만뒀다. 대신 그의 질문이 나오기 전에 재빨리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왜 다른 것도 아니고 붕어빵 장사를 고른 거에요?"
"역시나... 친숙한 모습 때문일까요."
- 붕어모양을 한 곡물 속에 붕어는 들어있지 않다니! 게다가 곡식으로만 이러한 맛을 낼 수 있다는 있다는 것이 심오하지 않아, 셰너스? 인간들은 참으로 특이하군. 어쩌면 이것은 생선에 대한 또다른 경이의 표시인지도 몰라.
"....정말 그랬다구요?"
"네, 그렇습니다만."
셰너스의 말 속의 레아디오스는 참으로 생소하다. 어찌보면 순진한 어린아이 같기도 할 정도로, 평소 내게 보여주는 모습과 매우 다르다. 그래서 레아디오스가 들뜬 모습으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에.... 그럼 매점일은 어떻게 된 거에요?"
"매점말씀이십니까?"
"네. 아, 그리고 당신은 또 어떻게 학교에 취직한건데요?"
셰너스는 둘째 손가락으로 머리를 살짝 긁으며 대답했다.
"그게, 제가 다른 능력은 보잘것 없습니다만, 정신계쪽으로는 조금 자신이 있어서..."
지금 내숭떠는거야 뭐야. 그렇게 펄쩍펄쩍 날며 두 칼을 휘두르는 그런 능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거야? 뭐, 그건 그렇고, 정신계쪽이라. 그럼 기억을 조작하는건가..?
"비슷합니다. 타인의 정신세계에 들어가 기억을 재배치 하는 거지요. 그렇다고 아예 없는 기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그 사람이 지금껏 보고 들은 수많은 기억들과 경험들의 조각을 재배열하는 겁니다. 따라서 기억을 바꾼다 해도 그 사람 고유의 본래 성격까지 바꿀 수 있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요."
"좀... 쉽게쉽게 설명해줄래요?"
"음, 그러니까... 본래 민영님 학교에 새로운 원어민 강사가 오기로 했던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원래 오기로 되어있던 제임스는 지난번 공원에서의 사건으로 실종되고 말았죠."
"...아..!"
"그가 있어야 할 위치에 저를 끼워넣은 것입니다. 관련된 몇몇 인물들을 찾아가 살짝 기억을 조작했습니다."
"그럼 레아디오스는?"
"그 분의 경우, 운좋게도 마침 학교 매점에서 사람을 구하더군요. 본래 왕자님보다 먼저 취직하기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만... 형편상 죄송하지만 역시 아주머니의 기억과 감정을 조작해서 그 분대신 왕자님을 기용하도록 한 것이지요."
정말... 가지가지한다, 이 사람들.
"그런데... 제 불찰로 왕자님께 많은 고초를 끼쳐드리고 말았습니다."
"에...?"
"미처 몰랐습니다... 한국 여학생들이 그렇게 무서울 줄은...."
푸훕. 나도 모르게 그의 심각한 얼굴 앞에서 대놓고 웃을뻔 했다. 원래 점심시간 같은 때 매점 앞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지. 그런데다 그렇게 잘생긴 얼굴이라니, 뭐, 솔직히 외모는 다른 어느나라 가서도 먹힐 거라는 거 인정해. 그러니 더더욱 매점앞이 붐빌수밖에.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말야. 학교 앞에서 붕어빵 팔때는 그렇게 무서운 줄 미처 몰랐나보지? 아니면 학교안에서는 애들이 얌전할줄 알았나. 저런, 저런... 쯧쯧...
"속히 다른 방법을 모색해봐야겠습니다. 더이상 그분께 폐를 끼칠 순 없으니..."
"그럴거면 당신이 매점에 취직하고 레아디오스가 선생님 했으면 됐잖아요."
"그게... 그분 성격상 선생님이란 직종은 도저히 하실 수 없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매점은 아무래도 붕어빵장사 경험도 있고 해서..."
나는 레아디오스가 영어 선생님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흠... 흠.... 하긴 그것도 그렇군. 확실히 그 인간 성격에 어울리지는 않지. 학생 구타죄로 당장 학교에서 해고 당할... 지도 모르고. 에이, 설마 그럴까. 여하간 어울리지 않는건 사실이다.
"그런데 매점일이면 매점일이지 왜 또 학교에서 붕어빵을 판대요? 그리고, 매점 아줌마가 그걸 허락해준거에요?"
"뭐, 붕어빵 기계를 그대로 버리기도 아까운 노릇이고... 매점 아주머니께는 간곡히 부탁드려서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렇게까지 붕어빵 팔 필요는 없잖아요."
그에 셰너스는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갑작스런 다음말에 난 일순간 깜짝 놀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다. (셰너스도 참, 말할 때는 주어와 목적어를 분명히 하라구! 괜히 오해할 뻔 했잖아. 투덜투덜...)
"좋아합니다..."
"...네?"
"왕자님께서는 좋아합니다.... 붕어빵을 아주아주 많이..."
- 셰너스. 이것은 보통 붕어빵이 아니다. - 네? - 이것은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 된 붕어빵이다. 이것이야 말로...
"찹쌀 붕어빵??!"
"그렇습니다."
그의 말에 황당함하다못해 넋이 나가버릴뻔 했다.
- 더욱 고소해! 더욱 달콤해! 게다가 살짝 투명하기까지 해! 이것이야말로 붕어에 대한 깊은 찬사가 아니겠는가!!
"뭐... 그리고 대략 만드는 붕어빵 중에 3분의 1쯤은 왕자님께서 드시니 말입니다... 전에는 사람들에게 파느라고 제대로 먹어보지도 못했는데, 그래도 요 며칠 학교에서 장사하시면서 원없이 드신 모양이십니다."
"....질리지도 않는데요?"
"뭐... 우리 세계에서는 흔히 맛볼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니깐 말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인간 세상에 맛있는게 얼마나 많은데! 양념치킨, 후라이드 치킨, 닭도리탕, 전기통닭구이, 삼계탕, 초계탕, 닭꼬치, 닭강정.... 에, 또.... 그래... 뭐... 개인 취향이란 게 있을 수 있는 거지...
"조만간에 팥 앙꼬가 아닌 크림맛 붕어빵과 고구마 붕어빵도 생각중에 있다고 하시더군요. 뭐, 매점에서 계속 일하실 여건이 된다면 말입니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붕어빵 매니아에 대형 포크를 휘두르는 바다의 왕자라니.
"그래도, 조금 엉뚱한 구석이 있으시기는 하지만, 왕자님께서는 저희 종족들 중에서도 우수하신 분입니다."
"에... 그런가요."
"네. 저같은 존재는 감히 발치에도 못미칠 정도로...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도시에도, 현재 여전히 결계가 쳐져 있습니다."
"에...?"
전혀 몰랐다. 아무런 느낌도 없었는데...
"옅은 결계입니다. 틸라이의 존재의 기척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지요. 이 결계는 저희들이 처음 이 도시에 올 때부터 펼쳐둔 것입니다. 이렇게 오랜 기간동안, 광범위하게 특정 부분만을 분리시킬수 있는 결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저희 종족 중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죠."
오오... 알고보니 대단한 능력자였구나, 붕어빵 왕자는.(이제부터는 이렇게 부를테다. 붕, 어, 빵, 왕자. 흠... 마음에 든다.)
"그리고 지금도..."
"네?"
"아. 아닙니다."
"...??"
"그나저나 지금은 어디간거래요, 왕자님은?"
지금은 해가 완전히 저문 저녁시간, 우리집 옥상. 학교에서 쪽지를 통해 궁금한 점이 있으니 그에게 시간좀 내달라고 부탁해서 이렇게 남들몰래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번 바바리맨 사건때 이후로 이들에 대한 인기는 더욱 치솟아서 이들과 만나려면 이렇게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 그리고 그 바바리맨 사건. 조만간에 시에서 레아디오스에게 감사패를 전하기로 했단다. 알고보니 그 바바리맨, 몇몇건의 미해결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라고 하더라. 와, 그런 무서운 사람이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니, 다들 새삼 놀랬다.
"보통 둘이는 같이 다니지 않아요?"
"대개는 그렇습니다만, 개인시간이라는 것도 있는 거지요."
그의 미소를 보며 나는 왕자님이 아마 신종 붕어빵 재료들을 사러 가지 않았나 생각했다.
"그래두... 요즘 통 바쁜가 보네요."
"무슨 전할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아니, 뭐... 학교 내에서 말고는 보이질 않으니까요. 그래도 절 지켜주시는 거잖아요, 두분다."
나는 조금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셰너스는 약간 의아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갸우뚱 했다.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네, 네. 걱정이요. 인간세상에 와서 어디 사기라도 당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아, 그런 문제라면 괜찮습니다. 왕자님께서는 인간세상에 대한 경험이 많으시니까요."
"에, 뭐, 그래도 말이에요. 누군가 당신들 의심한다거나 그러면요."
내가 계속 볼을 부풀리며 심퉁맞은 표정을 짓자 셰너스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렇게 두 분다 신경써주는거 고마워요.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고... 답답해요. 내 자신이."
두 팔을 옥상 난간에 올린 후 축 늘어졌다. 어둔 밤 공간을 색색깔로 채우는 불빛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야경이 꼭 며칠 전 꿈 속 우주 같았다. 그러고보니 그 뒤로도 한번 더 꿈속에서 만났더랬지... 레아디오스랑 셰너스는 여전히 그 괴물과 싸웠고. 순간 머리 속이 번쩍 했다. 그제서야 왜 복잡한 기분이 드는지,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고 온갖 생각들로 복잡한 건지 조금 감이 잡혔다.
"절 만나기 전에도 모두의 꿈인가 거기서 몇 번 문이 열렸다고 했죠, 이곳에서?"
"...그렇습니다."
"제가 그걸 기억 못하는 것 뿐이구요. 그런데 이제는 그 문이 열리는 것도 보이고, 꿈 속에서도 제정신 차리고 있고."
"...."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수많은 생각들 중에서 하나의 끄트머리를 잡아 다시 말문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봐요. 위험한거죠, 이거?"
"...그들이 당신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크게 문제될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들어왔잖아요! 여기 온 이후로 옅은 결계인가 하는거 계속 쳐놓고 있다면서요."
"...저희들 추측으로는 결계를 쳐놓기 이미 이전에 그 사람이 이곳에 와있었던게 아닐까 합니다."
"그 말은 결국 결계이전에 들어온 사람에 대해서는 대책이 없다는 거잖아요."
"....."
셰너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역시... 제가 잠들어야 하는건가요."
"속단할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이 지금까지 가만히 있을리가 없으니까요."
"그 여자가 그들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잖아요."
"만약 그들이라면 무턱대고 당신을 파괴하려고 들지 않을 겁니다."
"그럼 그 여자는 대체 뭔데요!!"
셰너스가 슬픈 표정이 되어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다가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미안해요. 당신한테 화내는게 아닌데."
"괜찮습니다. 당신의 기분, 조금은 이해합니다."
그가 도시의 야경 속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그분을 생각나게 합니다."
"....네..?"
그의 눈이 깊은 상념에 잠겨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래서 왕자님께서 더더욱 망설였던 건지도 모릅니다."
"무슨...?"
"아. 아닙니다. 그냥 혼잣말입니다."
갑자기 레아디오스의 눈 속에서 언뜻 보았던 푸른 머리의 여인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이들은 아직도 내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셰너스... 지금까지 당신이 한 말 중에 거짓말은 없죠?"
"....없습니다."
그가 내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맹세해봐요."
"왕자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에 나는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럼 다시 한번 물을게요. 고의적으로 말하지 않은 부분도 거짓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건가요."
"......."
"맹세하라고 하지는 않을게요. 그럼... 그럼 적어도 날 지켜줄 수는 있죠..?"
"....최선을 다 하고 있습니다."
나는 슬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기 어려운 문제라면 굳이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나란 애, 머리도 나쁘니까 말해도 이해못할지도 몰라. 이게 얼마나 난해한 문제인지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제 조금씩... 조금씩 최악의 상황까지 마음에 준비를 하고있어. 가족들에게는 역시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 아니면 셰너스더러 기억을 바꿔달라고 부탁해볼까. 어차피 나라는 아이, 존재감도 별로 없으니 그리 힘들것도 없을거야...
"시간이 되었군요."
"네..?"
그가 먼 곳을 지긋이 응시하더니 말했다.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민영님께서는 이곳에서 벗어나지 마세요."
"아, 네..."
그는 내게 짧게 목례하더니 건물과 건물사이를 뛰어넘어 휙휙 사라졌다. 다시 한번 보는 거지만 정말 볼때마다 경이롭다. 헐리웃 영화의 실사판이라니. 집으로 들어가니 엄마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시며 코를 킁킁댔다. 그 불쾌한 시선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엄마는 더욱 오만상을 찌푸려 보이심으로써 내 항의를 무시하셨다.
"무슨 애가 밤늦게 오래도록 나가있니?"
"학교에서 좀 늦게 끝난다고 그랬잖아요."
"요즘 학교는 옥상으로 출퇴근하냐?"
헉. 어떻게 아셨지. 어디까지 보신거야.
"위에서 내려오는 소리 다 들리더라. 난 또 가서 담배라도 피우는 줄 알았네."
"...엄마. 사춘기 소녀는 가끔씩 감상에 젖고 싶은 법이라구요."
"그럼 니 방에 가서 젖어라. 요즘 실종된 사람도 있고 흉흉한데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어."
칫, 애초에 그렇게 걱정되면 아예 학교로 마중올것이지 말야. 아, 그건 셰너스가 선생으로서 맡아준다고 공식적으로 그랬었지.
"너 만약에 진짜로 담배피거나 그런거면 니 애비한테 뒤질줄 알아라."
"네, 네, 그런 걱정 제발 하덜덜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제멋대로 지껄이며 화장실로 가려는데, 피융피융, 타다닥. 하는 요란한 게임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왠일로 오빠도 있네. 아니, 예쁜 여동생이 왔는데 쳐다도 안보냐. 흐음... 말 나온 김에 오빠의 비밀을 콱 말해버려?
"엄마! 사실 오빠가아..."
"어, 동생님 오셨냐. 뭐해줄까?"
훗. 나는 오빠의 잠바 주머니에서 이것과 이것 더하기와 말보러 더닐 등을 보았다고는 말 못하지. 우리 아빠는 여느 아저씨들하고는 다르게 일절 담배를 손에 대지 않으신다. 그런 면에서는 좀 훌륭하신 것 같아. 아, 수정수정. 그런 면만 좀 본받을 점 같아. 크흥. 화장실 문밖에서 오빠가 뭐라고 투덜투덜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쩌면 이 모습도 그리 오래 못 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거울 속에 비치는 내 모습이 보기 싫었다. 한참을 물을 틀어놓고 계속해서 세수만 해댔다. 하지만 아무리 세수해도 얼굴이 닦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물을 뿌려도 흐르는 눈물은 닦일 줄 몰랐다. 바보같다, 나도 참.... 이런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마음의 준비 따위. 애초에 될리가 없잖아. 한숨을 내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그렇게 한참을 천장만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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