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빅토리아
하늘 성 예를라냐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지나가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들을 쳐다보고 지나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아니라 그녀였다. 그도 그럴것이 이런 차림이라니. 셰너스는 눈도 뜨지 않고 좌선하는 자세 그대로 입만 움직여 말했다.
"지금 당신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계시는 것 아십니까, 빅토리아."
빅토리아는 그를 따라서 좌선하다가(혹은 좌선하는 척 하다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피해? 피해가 아니라 즐거움이겠죠. 전 저들에게 삶의 또다른 기쁨을 선사하고 있는 거에요."
그녀의 복장은 한마디로 요사스럽기 짝이없었다. 중요부분만 가린 차림이랄까. 마치 비키니에 얇은 천으로 된 옷을 각각 위 아래로만 살짝 가린 모습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비키니도 아니고 정말 속옷이라는 것이었다. 까만색 천으로 가슴을 꽁꽁 싸매고 그 위로는 하늘나라의 전통복을 걸쳐입었는데, 걸리적 거린다는 이유로 잘록한 허리가 드러나 보이도록 위로 올려 가슴에서 묶었으며, 마찬가지로 아래 역시 치마두르듯 훌훌 두르고는 한쪽을 잔뜩 올려 허리에서 묶어놓고 있었다. 더욱이 문제인 것은,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이 카너렛가 사병들의 훈련장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른 새벽 셰너스는 일어나 심신수양을 위해 이곳에 들려 한 켠에 자리잡았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녀가 그의 옆에 와 따라하기 시작한 것이다. 혹은 정말 수양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건 덕분에 아침식사전 훈련하러 왔던 사병들이 하나같이 당황스러운 모습으로 훈련장 저편으로 물러났다. 때문에 지금 훈련장은 한쪽만 북적거리고, 다른 한쪽은 한산한 기이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글쎄, 관점의 차이이겠습니다만, 적어도 지금 저 모습을 보면 당신이 저들의 훈련에 방해가 되고 있다는 생각은 안드십니까."
빅토리아는 손가락 하나를 입가에 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아하고 있는걸로 보이는데요."
"...당황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뭐, 이런 걸로 해두죠. 위급한 순간에 여자의 속살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는 훈련하기. 어때요?"
"...별로 좋은 취미가 아닙니다, 빅토리아."
그에 빅토리아는 작게 웃으며 그의 옆에 바싹 달라붙었다. 그리고는 두 팔로 그의 목을 주무르며 얼굴을 그의 귓가에 가져다 대었다.
"흐음. 나쁘지 않은 근육인데요."
"....."
그녀의 손가락이 사르르 움직이며, 그의 목덜미에서 어깨로, 다시 어깨에서 팔로 죽 훑으며 지나갔다. 그녀의 입에서 따뜻한 숨결이 차가운 아침공기에 맞아 하얀 입김이 되어 새어나왔다. 마침내 셰너스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몇 발자국 물러나 그녀와의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무슨 짓입니까, 빅토리아."
그녀는 손가락으로 붉은 입술을 가리며 요염하게 미소지었다.
"당신, 근래에 몸을 무리해서 사용했군요."
"...."
"이리와요. 내가 도와줄테니."
그녀는 좀전과는 다른 평범한 몸짓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강제로 그를 자리에 앉히더니 몸 이곳저곳을 툭툭 치듯이 만져대기 시작했다. 워낙 강경하고 절도있는 동작이라 셰너스는 감히 그를 거부하지 못했다.
"막힌 기를, 뚫어주는, 거에요. 그래야 회복이 좀더, 빠를테니."
마침내 그녀가 손길을 멈추었다. 셰너스는 놀란 몸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빅토리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어때요? 한결 가볍죠?"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지금은 자리가 불편해서 제대로 못해줬지만."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던 셰너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빅토리아는 그의 목에 두 팔을 두르며 귓가에 대고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서비스 해드릴 수 있어요.... 밤에."
순간 셰너스는 파드득 일어나 저 멀리 벽으로 비켜섰다. 목부터 머리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를 보며 빅토리아는 깔깔깔 웃었다.
"아하하, 하하하, 당신, 의외로 순진하네요?"
"...빅토리아... 당신 상당히 악취미입니다."
"아하하... 푸후후... 그래요? 푸후후후...."
그때 저편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긴 금발을 아래로 질끈 묶은 그는 빅토리아를 눈으로 살짝 훑고는 조금 민망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훈련 그만 방해하시고 안으로 들어가시오, Lady 빅토리아."
"우우. 나의 기사님 오셨군요."
루벤은 팔짱을 끼고 서서 말했다.
"손님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주시길 바라오."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두 눈을 꿈벅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저를 쫓아내실 건가요?"
"...더 나은 곳으로 모실 거요. 차가운 아침 공기는 미인의 건강에 해가 될 수 있으니."
그에 빅토리아는 살짝 미소를 떠올리며 그에게로 걸어왔다.
"뭐, 됐어요. 곧 있으면 아침식사 할테고. 나도 맞춰서 옷을 입으려니까."
그리고는 그의 등에 다가가 한 손으로 살며시 훑어내렸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니깐. 당신은 정말 멋진 남자야."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그가 온 길을 따라 저편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엉덩이와 허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춤을추듯 움직였다. 마침내 그녀가 사라지자 셰너스가 아직도 조금은 붉은 얼굴로 말했다.
"위험한 여자입니다."
그에 루벤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러 면에서 그렇지. 그녀는 자신의 내면과 외면의 무기를 모두 사용할 줄 아는 여자야."
* * * * *
D-24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방. 뿌연 연기가 온 사방을 메우고 있다. 붉은 색과 노란 색의 조명은 이 연기로 가득한 어두운 방안을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방 안의 벽은 3면이 푹신한 소파로 둘러싸여 있으며, 가운데 테이블에는 풍성한 안주와 함께 벌써 몇 병째의 빈 술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곳에 두 남녀가 앉아있다. 한 사람은 소파에, 다른 한 사람, 요염한 자태를 한 여자는 그 남자의 무릎 위에. 진한 술냄새가 남자에게서 풍겨져 나온다. 기다란 백금발의 여자는 그의 무릎 위에 옆으로 엉덩이를 걸치고 그 입술 위에 자신의 붉은 입술을 가져다 댄다.
"...매력적인 사람... 나에게 당신의 향취를 느끼게 해줘요..."
남자의 손이 여자의 다리를 더듬으며 올라간다. 무릎까지 와닿는 짧은 차이나 드레스 풍 옷 아래로 얇은 망사스타킹이 느껴진다. 여자는 가만히 한 손으로 남자의 손을 잡고 끌어올려 자신의 가슴에 댄다. 젖가슴 부분이 파인 까만색 옷 아래로 볼록한 젖무덤이 보인다.
"조금만 천천히... 당신 아직 취하지도 않았잖아...?"
여자는 자신의 젖무덤사이를 만지다가 테이블의 술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녀가 그에게 술을 건네자 남자는 거부없이 그를 받아들인다. 그 안에 무엇이 녹아들어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여자가 그를 소파위에 눕힌다. 그녀의 손길이 그의 얼굴에서 아래로 천천히 흘러내려간다. 까맣게 칠한 그녀의 손톱이 부드럽고 어둡게 반짝인다. 거칠어 지는 숨소리. 그러나... 곧 잠잠해지는 목소리. 여자는 남자의 볼을 쓰다듬으며 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한다. 이윽고 그의 눈동자를 살펴보다 부드러이 미소지으며 말한다.
"바보같은 사람. 이제부터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해요."
남자의 흐린 눈동자. 여자의 말에 답하는 그의 모습. 허나 그 말에 아무런 어조도 없어, 마치 여자 혼자 묻고 저 혼자 대답하는 양 보인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마치 조종 당하는 인형의 모습. 이후로도 그는 그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것이었다. 마침내 여자는 유유히 방에서 나왔다. 그런 그녀를 제지하는 검은 양복의 남자들. 그러나 유수와도 같은 그녀의 말과 행동에 그의 제지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낱 길거리의 여자에게 무엇이 있다고 그러하시나요...? 지나친 사생활 간섭은 저분도 좋아하지 않으실텐데. 이대로 쉬게 놓아두시는게 좋을거에요."
검은 양복 중 하나가 방안으로 들어가 소파 위의 남자를 확인하고는 밖의 다른 남자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를 확인한 여자는 두말없이 미소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그녀의 뒷 자태가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며 흘러갔다. 어두운 골목길에 퍼지는 하이힐의 굽 소리. 여자는 긴 외투를 걸친 채 그 골목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먼 곳에서 자동차의 경적소리와 시끄러운 저녁거리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윽고 주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여자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니, 뛰어오른 것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날렵한 움직임. 몇 군데의 외부 계단과 창턱, 문틀을 밟고 난간을 붙잡으며, 순식간에 그녀는 건물의 옥상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곧장 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검은 색의 외투와 검은 색의 머리. 간간히 외투 아래로 드러나는 엷은 색의 매끄러운 망사 스타킹이 기다란 다리의 곡선을 따라 드러난다. 마치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듯한 움직임. 가볍게 건물 사이를 구르고 뛰어오르며 착지한다. 워낙 빠르고 소리없는 그녀의 몸짓에 길거리의 사람들은 미처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마침내 그녀는 어느 호텔 옥상 위에 도착했다. 조금은 낡고 허름한, 후미진 곳에 자리 잡은 작은 호텔. 다시 한번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여자는 유유히 자신의 방을 찾아갔다.
"....왔군."
방안에 앉아있는 근육질의 남자가 짧게 인사했다. 빅토리아는 살짝 미소지으며 입고 있던 긴 외투를 벗었다. 쫙 달라붙는 검은색의 차이나 드레스가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모습을 보던 또다른 남자는 짐짓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어때, 뭐 좋은 소식좀 있소, 빅토리아?"
"말을 할 땐 상대를 똑바로 보고 하는 거에요, Mr.김."
빅토리아는 흔들거리듯 다가와 그들이 앉아있는 테이블 곁 비어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여진 카드를 심드렁하니 보다가 그중 하나를 들어 눈앞으로 가져갔다.
"생각했던 대로 그가 움직이고 있더군요."
"...그런가."
그녀는 카드를 손가락으로 돌리며 말했다.
"느낌이 조금 좋지 않아요. Mr.김?"
그는 가만히 카드를 바라보다 한 장을 뽑아 내리고는 한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표정을 살펴보던 빅토리아는 보일 듯 말듯한 짧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만두는게 좋겠어요."
"무엇을 말이오...?"
"알면서 모른 척 하지 말아요."
빅토리아는 살짝 입술을 내밀었다. 그녀의 촉촉한 붉은 입술이 반짝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두 남자는 말없이 계속해서 카드놀이를 계속했고, 마침내 빅토리아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들었던 카드를 내려놓았다.
"좋아요. 이번 일까지만 하고 그만두겠어요."
"허허.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능구렁이 같으니."
그는 소탈한 웃음을 터뜨렸고 빅토리아는 입술만을 비죽였다. 이후 그들은 그녀가 알아낸 것들과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잠시간의 의견 교환 후, 빅토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으로 옮겨갔다. 크레아는 침대에 앉아 TV를 보다가 그녀가 들어오자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에 빅토리아는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답답하다는 듯 먼저 가발을 벗고는 살짝 손사레를 쳤다. TV에서는 시베리아 벌판 한가운데서 일어난 거대한 지진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FOH에 관련한 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내일 저녁이야.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이야."
크레아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옷가지를 보았다. 그리고는 차곡차곡 개기 시작했다. 허나 그녀의 그런 행동에 개의치 않고 빅토리아는 나머지 옷들도 벗어 제꼈다.
"기분 나쁜 느낌이 들어. 꼭..."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고, 그에 크레아는 옷을 들고서 그녀를 가만히 올려보았다. 빅토리아는 무언가를 말할 듯 입을 벌렸다가 이내 닫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의아해하는 크레아를 두고 빅토리아는 샤워실로 직행했다. 잠시 서서 물의 온도를 먼저 맞추고, 타올에 거품을 내고, 머리를 감고... 일련의 과정들 속에, 문득 물을 잠그고는 샤워부스 밖으로 살짝 몸을 내밀었다.
"불렀어?"
크레아는 TV를 보다말고 고개를 돌려 짧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에 빅토리아는 살짝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하늘성에서 떠나온지 5일째. 그동안 그들은 두 군데의 기지를 부쉈고, 지금은 다음 목적지인 남아메리카의 어느 작은 소도시에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세계에서 유명한 인사들이 자그만치 12명이 한꺼번에 사라졌는데도, 그 어디에서도 그에 관련한 기사는 지금껏 나오지 않았다. 또한 FOH그룹도 정상운영되고 있었다. 그 뒷배경에는 빅토리아가 처음에 짐작했던 대로, 그 남자가 있었다. 백색에 가까운 짧은 금발. 상당히 지적인 얼굴에 깔끔한 외모. 동시에 차가운 느낌. 언젠가 빅토리아는 다른 일로 그 자를 잠깐 본 일이 있었다. 도무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는 척 하면서 오히려 그녀를 이용하려 한... 그녀는 지금껏 이 세계에 살아오면서 불같은 성질의 사람보다 오히려 그러한 사람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한 번 만난 이후 다시는 그와 접촉하지 않았다. 그런데 제일 위의 수장들이 사라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자가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도무지 그 자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디를 가나 그 자의 흔적이 있었지만 동시에 그 흔적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 자는 얼굴없이 이 모든 일을 뒤에서 조종하면서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지금까지 그들은 2군데의 연구시설들을 파괴했다. 녀석들의 입장에선 갑작스런 공격이기에 그들은 미처 대비하지 못했고, 때문에 시설들을 파괴하는 데에는 지금껏 큰 어려움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첫번째 기지의 파괴 이후에 준호라는 능력자는 돌아갓으며, 이제 클론들을 대량생산하는, 남은 연구소는 이 근처와 호주의 사막 한가운데, 각각 하나씩 남아있었다. 이제 이쯤되면 둘 모두 경비가 강화되어 있을 터였다. 물론 예상한대로 그렇게 되긴 했지만, 빅토리아는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는 샤워하다말고 몸을 돌렸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천장을, 다시 샤워부스 밖을 내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나치게 예민해진걸까. 다시 쏟아지는 물 속으로 들어온 빅토리아는 가만히 눈을 감고 따뜻한 물을 몸에 받아들였다. 마음에 걸리는 것... 지금껏 대규모의 시설이 두 군데나 부서졌는데도 언론 어디에서도 그에 관한 기사는 나오지 않았다. 그토록 치밀한 그 자가 대비한 것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빅토리아로서는 의아했다. 자신들의 정체를 알지 못해서일까? 빅토리아는 자신들의 정체가 발각될 수 있을만한 여지들을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그리 쉽게 발각되었으리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Mr.김은 신용이 높은 모 은행으로부터의 비밀계좌에서 자신들의 여행경비를 대주었고, 그들 스스로도 움직일 때 꼬리가 잡히지 않도록 줄곧 신경써왔다. 하지만 무얼까. 계속해서 걸리는 이 기분은...
그래, 능력자. 능력자들이 없다. 12장로 밑에 있었던 각각의 능력자들. 최고 능력자들은 지난번 기지에서의 사건으로 목숨을 잃었다지만, 그 외 몇몇의 능력자들이 각 장로들 밑에 더 남아있었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자가 다시 거둬들였을 것인가? 능력자라는 자체가 세상에 드물 뿐더러, 그들 각자가 워낙 개성들이 강한 사람들이라 그 모두를 그가 그러모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껏 한 사람도 그러한 사람이 보이지 않은 것은 이상했다. 물론 그녀가 모든 사람들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자들이 나 여기있다고 대놓고 드러날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이 있다면 적어도 사소하면서도 특이한 일들이 소문이 되어 나돌았을 것이다. 뒷골목이란 그런 곳이다. 어떤 자그마한 일들까지 말이 되어 떠돌아다니는 곳. 하지만 그녀는 지금껏 그들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했다. 알지 못한다면 대비할 수도 없다. 그러한 부분이 그녀에게 불안감을 가져다주고 있었던 것이다.
물을 잡그고 밖으로 나왔다. 수건 하나는 머리에 두르고 더 큰 타올은 몸에 걸쳤다. 그 순간,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빅토리아는 급히 몸을 돌려 화장실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그저 따뜻한 물에서 나온 수증기만 있을 뿐. 그녀는 방에 들어와 의자를 끌고와서는 화장실 천장을 구석구석 살펴보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환풍구까지 열어 확인한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도로 밖으로 나왔다. 빅토리아의 이상한 행동에 크레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에 빅토리아는 입술을 살짝 올렸다 말았다.
"아니야. 역시 내가 너무 예민한가봐."
"...좀 쉬어."
"괜찮아. 신경쓸 것 없어."
화장대 앞에 앉은 그녀는 머리를 만지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뭐지. 아까부터 느껴지는 이 이상한 느낌은... 살기는 아닌데 꼭 누군가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크레아가 보는 TV소리에 섞여, 도시 소음 사이로, 저 먼 곳 어디선가 낮고 작게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빅토리아는 드라이기를 켜고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말리고, 화장을 하고, 입술을 바르고...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 순간, 빅토리아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거울 너머로 언뜻 보였던 그림자... 희뿌연하고 투명한, 어떤 느낌...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면서 과거의 기억들을 들추었다. 똑. 똑. 똑.
"룸서비스입니다."
크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일어나 문가까이로 다가갔다. 기억 속에 빠져있던 빅토리아는 뒤늦게 일어나 문으로 달려갔다.
"안돼! 열지마!"
하지만 이미 문이 열린 상황. 누군가의 손이 문 안으로 들어왔다.
"흐윽...!"
내팽개쳐진 크레아는 한 쪽 벽에 기대 놀란 눈으로 주저앉듯 섰다. 그 사이 남자의 손에서 날카로운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창문으로!!"
옆방에 들리도록 크게 소리치며 곧장 창문으로 달려나갔다.
"빙의 능력자다. 시내를 벗어나야해!"
그러자 제이크는 곧장 한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골목길을 벗어난, 도로 한복판. 갑자기 도로 한가운데에 나타난 남자를 보고 차들은 경적을 울리며 이리저리로 피했다. 그러나 뒤따라오던 다른 몇몇차는 그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급히 핸들을 꺽다 근처 건물 또는 가로등에 부딪쳤다.
"내려."
운전자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내렸다. 그 사이 달려온 일행들이 각자 차에 올라탔다.
"능력도 좋아, 내사랑."
제이크는 피식 웃으며 한쪽입술을 올리고는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그 사이,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서서히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제각기 구경나온 사람들, 차에서 내린 운전자들이, 촛점을 잃은 눈으로 마치 좀비처럼 그들이 탄 차로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빙의 능력자라면, 저들 모두 평범한 사람들 아닌가."
"일단 우리부터 살고 봐야지요."
빅토리아가 앞좌석으로 고개를 내밀며 대답했다. 밤거리를 밝히는 가로등 불빛이 뒤로 빠르게 지나갔다.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통에 주변차들이 서로 뒤엉키며 크게 사고났다. 조수석에 타 이리저리 몸을 부딪치던 Mr.김이 한마디 했다.
"허허. 이거 총알택시가 따로 없구만."
그러나 여전히 과격하게 차를 모는 제이크였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들어서 알고는 있어요. 자신의 영혼을 육체로부터 분리시킨다음 조각난 영혼 각각이 타인의 육체에 들어간다더군요. 하지만 범위가 어느정도까지 적용되는지는 모르겠어요."
어느정도 시내를 벗어났다고 느낄 때쯤 이었다. 직선으로 뚫린 한산한 도로. 좌우의 키 작은 관록들. 저 도로 끝으로 보이는 우거진 숲. 어두운 밤하늘을 도중도중 밝히는 번개의 번쩍임.
"엎드려!!"
빅토리아는 크레아를 안고 몸을 숙였다. 크레아와 제이크의 사이로 무언가가 퍽,하니 뚫고 들어왔다. 팔길이보다 조금 짧은 단도. 마치 깡통캔을 따듯 그것은 제이크의 앞으로 우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움직였다.
탕탕탕. 제이크가 다시 한번 핸들을 틀었다. 이번엔 고의적인 것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의문의 남자는 칼을 뽑으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칫."
빅토리아는 창문을 열고 상체를 내밀었다. 거칠고 습한 바람이 그녀의 온 몸을 때려댔다. 그런 아슬아슬한 자세로 양손의 것을 연달아 쏘았다.
"아야야... 이거 멍좀 들겠는데."
그녀를 향해 앞좌석에 앉아있던 Mr.김이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그에 그녀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때였다. 도로 한가운데에 무언가 익숙지 않은 커다란 것이 올라와 있는 것이 보였다. 자동차인가...? 아니, 자동차라면 저런 크기일 수 없었다. 게다가 저렇게 움직일 수도 없었다. 뿔달리고 덩치큰 네 발의... 소??
"꺄아아악!!!"
텅, 소리와 함께 옆이 푹 파이며 일순간 차가 떠올랐다. 달려온 속도에 차는 그대로 공중에서 뒤집혀 버렸다. 땅에 부딪쳐 한 번 더 구른 자동차는 도로 옆 도랑을 넘어 맨땅에 내려앉았다.
"윽...."
빅토리아는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신음을 흘렸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리를 붙잡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
소는 무거운 무언가에 짓눌린듯 낑낑대더니 무릎을 꿇었다. 그런 소의 머리를 총으로 날린 후 빅토리아는 재빨리 상황을 살펴보았다.
"BB탄...?"
장난감을 휘두르는 능력자라. 하지만 그렇다해도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게다가 상대의 위치또한 파악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자칫하다간 차 안의 크레아나 Mr.김이 당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는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어깨의 통증에 짧은 비명을 토해낸 그녀는 뒤늦게 자신의 앞을 막아선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 저쪽에서 또다른 적과 싸우고 있는 금발의 남자가 보였다. 그녀의 눈이 놀라 휘둥그레졌다.
"당신들이 어떻게 여길...?"
"그건 저희야 말로 묻고싶은 말이군요."
그는 칼 하나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어쨌든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빅토리아."
셰너스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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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사정으로 11월까지 쉽니다.
첫댓글 기다릴게요
감사합니다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