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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석 신부 선종 2주기
타큐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2010년 1월 14일,
48세를 일기로 불꽃 같은 삶을 마감하고
하늘나라로 돌아간 이태석 요한 신부(1962~2010)
그는 아프리카 수단 톤즈에서 8년간 인술(仁術)을 펼친
의사로서, 교육자로서, 음악인으로서,
가톨릭 사제인 선교사로서 아낌없는 사랑으로
투신한 하느님의 사랑이었다.
톤즈 사람들로부터 ‘쫄리(John Lee) 신부’라고 불린 이태석 신부.
그는 2008년 10월 본국 휴가 중에 대장암 말기인 것을 알게 되었다.
투병생활 중에도 그는 자신의 몸보다는
톤즈를 사랑하고 걱정했다.
톤즈의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서 투병 중인 2009년 봄에
아프리카 이야기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라는 책을 펴낸다.
이태석 신부의 병세가 깊어지자 지인들이 그의 마음을 헤아려,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2009년 12월 톤즈에서 창단한
'35인조 브라스 밴드'의 단원 중에 두 학생을 한국으로 데려온다.
톤즈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첫 번째 학생(존 마엔, 토마스 타반)
들을 보면서 이태석 신부는 고통스러운 중에도 무척 기뻐한다.
존 마엔은 그때의 쫄리 신부를...
“신부님은 이제 한국에 왔으니까 한국의 상황에 익숙해지고
신중하게 처신하라고 하시면서 항상 다른 사람을
존중하기 위해 노력하고 행복해지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은 톤즈 사람을 위해 태어나신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내려주신 선물입니다”라고 편지에 쓰기도 했던 토마스 타반.
이태석 신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한 때 아프리카 수단에서 선교사로 친밀하게 지냈던 친구 신부가 달려와서
“형! 존 마엔과 토마스를 끝까지 책임질 테니 걱정 마세요.”라고 약속한다.
그 순간 이 신부의 표정이 밝아지며 곧이어 의식을 잃고,
그 다음날 선종하였다.
<울지마 톤즈>란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한 KBS 책임프로듀서
구수환 감독이 쓴 <울지마 톤즈, 그 후 선물>이란 책에는
이태석 요한 신부로 인하여 피어나고 있는
새로운 희망들이 축복의 선물로 담겨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아프리카 수단 톤즈에서 또 한 명의 학생이
2010년 크리스마스 때에 한국에 왔다는 것.
그래서 이제 3명의 톤즈 학생들이 이 땅에서
제2의 이태석을 꿈꾸며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태석 신부는 부산직할시 남부민동에서
10남매 중 9번째로 태어났다.
9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어머니가 자갈치시장에서 삯바느질을 해서 아이들을 키웠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 성당에서 다미안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나로 하여금 소중한 많은 것들을 뒤로 한 채
이곳까지 오게 한 것도
후회 없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만드는
나환자(한센인)들의 신비스러운 힘 때문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게 된다.
– 이태석,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중 -
요한 신부는...
그는 부산의 ‘세발자전거를 타고 놀기도 힘든’
비탈진 산동네에서 자랐다.
10남매 중 9번째.
동네 성당이 유일한 놀이터였다.
아홉 살 때 부친은 작고했고, 모친이 자갈치 시장에서
삯바느질 해가며 자식들을 키웠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성당에서 다미안 신부(1840~1889)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벨기에 출신인 다미안은 하와이 몰로카이 섬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가톨릭 신부다.
그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49세로 선종했고, 성인 반열에 올랐다.
아들 태석이 공부를 잘해 인제의대에 진학했을 때
모친은
“대통령 된 것보다 더 기뻤다.”
그러나 의대 졸업 후 그는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광주가톨릭대에 진학한다.
이미 형(신부)과 누나(수녀)를 하느님에게 바친 모친이
눈물로 말렸지만, 이태석 역시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그리고 2001년 사제 서품을 받고서 아프리카 수단으로 떠난다.
남부 수단 톤즈 마을의 유일한 의사.
하루 300여 명의 환자가 몰렸고,
100㎞ 떨어진 곳에서 며칠씩 걸어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이슬람권 환자들도 반겼다.
“가난과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죽음의 늪에서 뛰쳐나온
아이들을 보니 가톨릭이니 개신교니 이슬람교니 하며
사람을 종교로 구분 짓는 것이 그들에겐 배부른 소리요
조금은 미안한 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태석,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이 신부는 손수 벽돌을 찍어 병원 건물을 세웠다.
학교를 지어 초·중·고교 과정을 개설했다.
그가 조직한 35인조 브라스밴드는 수단의 명물이 되었다.
톤즈 근처의 한센인 집단 거주지는
이 신부가 애착을 갖고 자주 들르던 곳이었다.
거리낌 없이 한센인들과 어울리는 이 신부는
130년 전 하와이에서 한센병 환자들과 동고동락하던
다미안 신부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2008년 11월 휴가차 입국한 그는 지인의 권유로
난생처음 건강검진을 받고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암 선고 1주일 후 밝은 표정으로 수단 어린이들을 위한
모금 음악회에 나와 통기타 치며 노래 부른다.
‘너의 마음 나를 주고 나의 그것 너 받으리.
우리의 세상을 둘이서 만들자…’.
“우물을 파다 왔는데”라며 톤즈 마을만 생각하던 그는
끝내 아프리카행 비행기를 다시 타지 못하고
2010년 1월 14일 오전 5시35분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
다미안 신부보다 한 해 이른 48세였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이사야서 60장 1절)
우리 지구촌에 제2, 제3의 이태석 신부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원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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