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귀결되지 않는 나의 꿈
남은 생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때가 되었다.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한다 함은 곧 떠날 때를 염두에 두고 주위를 정리하겠다는 것인데, 막상 무엇부터 정리해야 할지 막막하다. 재산에 관해선 남길 유언이 없다. 만약 내게 재산이 있다면 법적 나눔은 남아있는 자들이 나보다 더 잘 알아서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당부하고 싶은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떠오를 때마다 한가지씩 메모해보기로 한다. 첫 메모가 ‘울지 말라’였다. 영화에서처럼 유체이탈이 일어나 자식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아서다.
그러나 '울지 말라'는 유언은실제처럼 곧바로 가슴에 와 닿았다. 죽으면 이생에서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나는 무로 돌아간다. 죽음만 떠올리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자근자근 올라오던 아픔들이 신기하게도 사라지면서 편안해진다. 갖고 싶고 누리고 싶었던 이승의 모든 미련과 욕망에서 자유로워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산 자의 비논리적인 이중성은 나도 설명하기가 힘들어진다. 불원간 닥칠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죽음에 귀결시키지 못하는 꿈 때문이다.
구십이 되신 할머니가 피아노를 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방송에서 보았다. 피아노 연주를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낡은 피아노를 새것으로 바꿔주는 딸의 효심도 감동이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인 것 같은데, 어린 자식을 위해서가 아닌 나이 많은 어머니를 위해 피아노를 새로 마련해 드린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중고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가 고등학교 선배를 데리고 피아노가 있는 학교를 찾아가 연습시키는 것을 보고 난 눈물이 나도록 서운했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피아노가 없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했던 딸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나중에 배워야지 하였는데 그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집에 피아노를 들여놓았을 때는 피아노 앞에 한가하게 앉아있을 새가 없었다. 이사를 자주 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피아노가 애물단지가 되어 아예 없애버리고 말았는데, 그때 배워놓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구십 넘은 할머니의 연주곡은 비록 찬송가였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도 쉬운 곡 정도는 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사실 악기는 짧은 기간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닌 터라 난 오래전에 포기했었다. 이 나이에 배워서 뭐하게? 라고 자신을 비웃었었는데, 요즘, 생각이 자꾸 달라지려고 한다.
사실 난 피아노보다 첼로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한동안 첼로의 음색에 빠져 지낸 적이 있었지만 배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 직전 근처 교회에서 운영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모집에 첼로를 수강 신청했었는데, 활도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채 폐강되었다.
첼로는 연습을 하기 전 조율이 힘들었다. 독학하려면 차라리 피아노가 낫겠다 싶어 피아노를 들여왔다. 식구들의 반응이 냉랭했다. 좁은 집에 웬 피아노냐고 불만을 표시한다. 집이 좁은 건 내 사정이기에 굳이 탓할 게 못 되었다. 아마도 그 나이에 무슨 악기냐고 항의하고 싶은 걸 내가 상처받을까 봐 차마 말 못 하고, 자리 차지가 만만찮은 집 탓으로 돌리는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다. 물론, 나도 같은 생각이긴 하다. 하지만 이승을 떠나기 전 꼭 도전해보고 싶은 나의 마지막 꿈이기에 내 딴에는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단이다. 코로나19 전만 해도 배우는 것에 자신만만했었는데, 코로나19 방역이 해지된 이후로 갑자기 체력이 저하되고 의욕도 감소 되었다.
어쨌거나 피아노는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고 싶었던 악기였고, 첼로는 성인이 된 후에 배우고 싶었던 악기였는데 여태껏 미련을 못 버리고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이제야 결심을 한 것이다. 누가 봐도 유치하고 허무한 결심인 것은 분명하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보이는 노인이 할 짓은 아닌 것 같아 적잖이 부끄럽다. 주위 사람들도 새로운 것에 도전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나이 든 사람이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시간을 쏟는 것보다는, 그 시간 동안 운동을 더 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충고한다. 이구동성으로 운동을 강조하는 터라 오래전부터 해온 탁구를 놓지 못하고 있다. 그 운동이라도 해야 가족이 안심할 것 같아서다. 오전에 탁구를 치고 돌아오면 예전 같지 않다. 운동한 시간보다 두 배 이상 누워서 쉬어야 한다. 피아노나 첼로를 연습할 기력이 남아있을지 의문이 들긴 한다.
난 한동안 죽음으로 사계의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분노했었다. 왠지 모르게 억울하기도 했었다. 죽음은 내 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래서 종교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종교인들은 죽음을 신의 뜻으로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그런 사람에게 죽음은 분하고 억울할 것이 없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어느덧, 밤사이 유명(幽明)을 달리해도 안타깝지 않을 나이가 되었다. 이생에서 누렸던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떠나야 할 때가 내게도 곧 온다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죽음을 어떻게 두려움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다. 종교에 의존하지 않고 내 의지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담담하게 떠날 수 있는, 죽음의 철학을 나름대로 정립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과연, 닥친 죽음에 의연할 수 있을지는 현재로선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죽기 싫다고 바둥거리는 추태나 보이지 않을지 모르겠다.
내가 죽음의 두려움을 조금씩 떨쳐내기 시작한 것은 사랑하는 부모와 형제, 또는 다정한 이웃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면서였다. 눈을 감고 계신 분들의 마지막 모습은 그지없이 평온해 보였다. 내 마지막 모습도 그분들처럼 평온할 수만 있다면, 죽음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죽는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없겠지만, 솔직히 난 지금도 죽고 싶지 않다. 죽지 않고 살아서 아름다운 자연과 숨 가쁘게 발전하고 있는 문명의 변화를 즐기고 싶다. 그러나 욕심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다 안다. 집 근처 종합병원이 새로 개원을 하자 순간 떠오른 것이 장례식장이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죽음 앞에서 무의미고 허무할지라도 꿈은 내게 오늘을 살게 하는 힘이 되어 주고 있다. 오늘을 사는 나를 기분 좋게 해주고 이따금 맛보게 되는 성취감은 그 어떤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지금의 이 꿈만큼은 죽음에 귀결지어 내려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난 최선을 다해 피아노와 첼로를 배워보려고 한다. 내 빈소에 피아노와 첼로의 서툰 연주곡이 깔릴 때 내 가족과 자식들은 눈물 대신 웃음을 터뜨릴지 모른다.
첫댓글 어릴 적 꿈을 여적 갖고 있다니요.유치하고 한심합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