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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도그마라는 단어는 티 파티 소속의 강경 보수 혹은 극우 인사인 마이클 프렐의 저서(#)의 제목이었다. 언더독 효과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는 그 전부터 미국의 우익들에게서 나왔었으나, 언더도그마라는 말은 이 책의 제목이 시초이다. 사실 언더도그마라는 용어가 유행어로 사용된 적은 없다. 단지 언더도그마라는 책이 조금 관심을 받으면서 이 책의 제목이 거론되었을 뿐이다.
본래 마이클 프렐은 친이스라엘주의자이자 베냐민 네타냐후의 적극 지지자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하여 이슬람과 팔레스타인에 대해 우호적인 미국의 리버럴들을 비판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대체의 내용은 '퇴행적 좌파'를 비판하는 논지로 채워져 있다.
또한 언더독과 오버독의 위치는 상황과 시대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것도 요지인데, 일례로 한때는 홀로코스트 때문에 유대인이 언더독으로 응원받았지만, 이제는 정반대가 되어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이 언더독으로 응원받고 유대인이 되려 오버독으로 비난받는 위치가 되었다는 것이다.[18] 이런 논지를 따르는 사람들은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선악을 논하기 힘들만큼 서로에게 반인륜적 범죄가 행해지는 관계라고 주장한다.
언더도그마라는 신조어가 인종차별이 심했던 미국에서 생겨났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일종의 어퍼머티브 액션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강자들보다는 약자들이 훨씬 더 많으므로 민주주의에서는 언더도그마가 발생하기 쉽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마련이라 자신과 관련하여 좋으면 찬동하고 싫으면 꺼리는 경향이 있다. 입장이 변하면 태도가 달라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오프라인에서나 온라인에서나 밑바닥 출신에서 벗어난 자수성가자들이 밑바닥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혐오하는 발언을 하고 다니는 경우도 많이 찾을 수 있다. 그런 현실을 고려하면 약자의 입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언더도그마를 옹호하는 바탕에는 동정심이 아닌 자기보신과 이기심이 자리잡았을 수도 있다.
또한 대개 사회적 약자와 사회적 소수자들은 스스로 권리를 챙기기 어려운 상황이므로 도덕적 관점에서 약자를 옹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먹히기 쉽다. 물론 사회적 강자라고 하여 권리를 항상 잘 챙기리란 법은 없지만, 그래도 그런 이들의 경우 자신의 권력이 있으므로 목숨이 왔다갔다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까지 가기는 어렵다. 사회적 약자는 편견에 의해 처음부터 유죄로 추정되어 억울하게 피해를 받는 경우가 있고[19],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언더도그마가 생기는 것이다. 현대 미국의 리버럴 세력이 언더도그마 논리를 주장하는 것도 흑인이나 히스패닉 등 소수인종에 대한 경찰이나 사법 기관의 차별적인 법집행이 미국 사회 내에서 사회적으로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4. 문제점[편집]
언더도그마 상황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부분은 이성보다 감성이 더 중시되며 원칙과 절차가 유명무실해진다는 점이다. 흔히 약자는 배려와 구호의 대상이 되기 쉽고 대중들은 강자보다는 약자에게 동정과 공감을 보내게 되는데, 여기까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누구는 무고한 피해자이고, 누구는 억압적인 악당이다'는 식의 극단적인 판단으로 치닫게 된다면 사회 문제로 번지게 된다.
언더도그마가 일어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본질적으로 여론이란 휘발성이 강하고 비이성적이며, 감정적이고 쾌락주의적이며 즉흥성이 커 무계획적이고, 대두된 논제를 심력을 기울여 분석할 의욕이 저조하여 희생물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경제적 불황에 시달리고 있거나, 정신병 등 심신미약 상태이거나, 구성원 간 갈등이 심하고 분열된 사회일수록 이런 여론이 불같이 솟아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언더도그마로 이어진다. 언더도그마 현상이 비대화되고 사회적 영향력을 떨치기 시작하면 '포퓰리즘이나 파시즘같은 광기로 얼룩진 사상이 등장한다.[20] 이러한 사상들은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언뜻 민주주의의 정당한 실행으로 보이나, 실체를 들여다보면 대중의 감정에 따른 정책 남발로 국가의 안정성을 깨뜨리는 이른바 '떼법'으로 불리는 기존 제도의 개악, 악법의 입안, 사법기관의 독립성 훼손(이하 사법 문단) 같은 결과를 초래하는 수가 있다. 언더도그마의 마지막 단계로는 스스로를 피해자, 혹은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무리를 지어 죄 없는 자나 대상에게 사적제재를 가하고 이를 광장에 게시하여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것이다. 언더도그마에 심취한 시민들의 이런 광적인 행보는 사회를 퇴보시켜 결국 국가 전체를 파멸로 이끈다.
언더도그마가 사회에 끼치는 폐해는 크다. "너희 강자들은 가진 것도 많은데 1~2개 피해 좀 생겼다고 뭘 징징거리냐?"라든지 "가난하고 불쌍한 약자한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다니, 눈물도 없습니까?" 같은 호소가 당연시된다면 사회가 정해진 규칙대로 잘 굴러갈 리가 없다. 이는 양 극단인 유전무죄 무전유죄 현상에 대한 비판에서도 마찬가지로 둘 다 옳지 않다. 2010년대 들어서는 소위 '감성팔이'나 '무임승차'의 폐해를 겪어 염증이나 피로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정치 성향과는 별개로 언더도그마를 아예 극혐하는 수준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늘었다.
언더도그마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유전무죄 무전유죄 혹은 "Might makes right"(힘이 곧 정의다)의 대척점에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동일한 범죄를 저지를 경우 생계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형량을 낮게 처벌해야 한다는 식으로, '가난한 사람들'(혹은 기타 '불쌍한' 사람)은 처벌을 약하게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실제 적용되는 논리이다. 이를 보편화할 경우 기업가와 노동자, 생산자와 소비자 등 경제 주체들을 집단별로 갈라서 탈세 등의 행정범죄에 대해 어느 한쪽에는 무거운 형량을 매기고 다른 쪽에는 적은 형량을 매겨야 한다는 식의 논리로 향하게 된다.
시민의 권한이 커지고 있는 근현대로 올수록 언더도그마 정서가 사회질서를 흔들어 놓기 쉬워지고 있다. 과거에는 물리적 폭력 즉, 파괴공작, 폭행, 지배계급원을 대상으로 한 집단린치, 저격 및 암살 등으로 이루어진 혁명만이 시민이 사회질서를 재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반면 법치주의와 민주주의가 확립되고 스마트폰 보급과 1인 미디어 시대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에는 시위, 연대발의, 개인 방송, 단톡방, 전자 민원만으로도 기존의 올바른 법제도와 규정을 뒤흔들고 죄 없는 인물을 망가뜨릴 수 있게 되었다. 언더도그마 현상이 심화되는 사회일수록 그 공동체는 존속의 명분과 가치를 잃게 되버리고 마는 것이다.
정치인들 역시 자신이 서민, 하층민 출신임을 강조하거나 자신이 서민의 애환을 잘 아는 것처럼 선거철에 일회성 쇼를 한다.[21]
그러나 이 사례가 언더도그마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선거철에 소위 '민생 탐방'을 하는 것은 언더도그마와 관련있기보다는 지지 유세 목적으로 자신을 찍어달라고 홍보하는 성격이 강하다. 정치인은 약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더군다나 뭘 해도 무근거하게 욕하는 사람은 욕할 것이라 정치인 입장에서 안 한다는 선택을 하면 끝이니 한다는 선택만 남아 과연 일회성 쇼기만 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이기적 욕망에 싸여있다.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혼란스럽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 혼란이 점점 더한 건 과거 사악한 집단으로 여겼던 자본가나 기득권층이 직접 만나보면 상당히 젠틀하고 착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낄 때다.
화가 나서 미치겠다. 문제는 지금 그들이 창업자나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아니라 2세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성장 과정에서) 꼬인 게 없는 자들이다. 그래서 착하다. 그러니까 더 화가 나는 거다. 예전엔 못 가지고 무식한 사람들이 착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렇지도 않다는 것.
빈부의 격차가 인격이나 인성마저도 그렇게 비틀고 있다. 어떻게 이 세상을 바라봐야 할지 참 답답하다. 『말』을 보면 운동권 내부에도 참 비리와 문제가 많은 것 같고……참으로 진실이 뭔지 혼란스럽다.영화감독 박찬욱, 2003년 2월 월간 말과의 인터뷰 중에서 진보 진영에 대한 쓴소리를 해달라는 기자의 물음에 길게 침묵하다 꺼낸 말.
프리모 레비의 수기 "이것이 인간인가"에 따르면, 홀로코스트 당시 유대인 강제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는 독일인이 유대인을 핍박한 사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감된 같은 유대인 사이에서도 핍박이 존재했다고 한다. 즉, 수감된 사람들 사이에서도 힘의 차이가 발생하였고 서로 착취하였다. 여러 일화 중에서 배급이 지체되지 않도록 손목에 새겨진 번호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먼저 온 수인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폭행을 받았다고 했다. 회색지대라는 그의 표현처럼 세상은 흑백 둘로만 나뉜 게 절대로 아니다.
약자라고 무작정 선하다는 것은 아니다[22]. 인간도 결국 자신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는 본능에 충실한 동물일 뿐이라서 약자라고 해서 갑자기 마음속에서 선함이 우러러 나올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하다고 더 악한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과거 노동운동을 하는 대학생들이 이러한 것을 겪었다. 당시 대학생들은 위장취업을 하는 일이 많았는데, 실제 노동자들의 모습에 환상이 와르르 깨지며 큰 충격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노동운동가 출신[23] 정치인 은수미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실 사례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24] 그런데 저 사례처럼 아예 실력까지 속이고 들어가는거는 화이트칼라에서도 대놓고 쌍욕박는다. 개씨부랄만 들은게 양반일 정도로
은수미(은): 그 동네가 원래 공장에 시다로 들어가면 절대 미싱사를 안 시켜줍니다. 그래서 메뚜기를 하게 되는데, 다른 공장에서 시다 하던 아이들이 미싱사로 바로 들어가는 거죠. 저도 나이도 속이고 미싱사로 들어갔는데, 처음에 미싱을 한번 시켜 보더니 바로 하는 욕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이런 개씨부랄년...”
공장에서는 바로 알아본 거죠. 나이도 어리고 생긴 것도 어리고 미싱도 시원찮으니까 다른 공장에서 시다 조금 하다가 미상사입네 하고 들어온 걸로 알아본 거예요. 다른 친구들은 초등학교 졸업하고 오거나 그런 친구들이 대부분인데 평생 그런 욕을 들어온 처지이지만 저는 평생에 처음 그런 욕을 들어봤어요. 눈물이 핑 돌더라구요.
물음(물): 원래 처음 들어본 욕은 기억에 남기 마련.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심한 욕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신 것 같다.
은: 그러면서 하루 종일 내가 여기에서 뭐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즈음에 우리 집이 강남으로 이사를 갔는데, 삼층집이었어요. 아무리 집을 나왔어도 부모님께 미안하니까 두어 달에 한 번은 집에 가거든요. 그게 너무 생소한 거예요. 그 동네에서 길에 나서 다녀보면 사람들이 너무나 평온하고 행복해보이는 거죠.
왜 이 동네는 이렇게 다를까 하는 겁니다. 그런 생소함에 적응하는 것이 정말로 힘들었어요.
거기다가 학교에서는 항상 노동자는 정의롭고 항상 옳고 그런 것처럼 얘기들을 해요. 너무 모르는 얘기죠. 정의는 개뿔...
-이 부분, 운동권 학생들이 사회를 접하게 되면서 겪는 중요한 충격이다. 특히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은 노동자는 정의의 상징인 것처럼 묘사를 하지만 그걸 듣고 배운 사람들이 겪는 충격은 상상외로 크다. 노동자는 결코 정의의 화신 따위는 아니다. 다만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는 생활인들일 뿐이다. 그들의 생활환경과 그들의 용어는 거칠고 투박하다. 노동의 정의는 그들의 말투나 습관에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공장에서는 항상 싸움이 벌어집니다. 나오시라고 했던 것 같은데 불량을 내면 머리채 잡고 싸우고, 불량을 니가 냈냐, 내가 냈냐 하면서 싸웁니다. 그걸 또 회사가 이용을 해요. 누구는 급여를 더 주고, 누구는 급여를 덜 주고 하죠.
하루에 열두 시간 이상 일을 하면서도 급여를 서로 모르게 합니다. 그렇게 차별을 해요. 제 시다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온 아이인데 무슨 일인지 무단 결근을 했어요. 그러고 다음날 나오게 되면 그냥 마구 밟아버립니다."
물: 때린다는 얘기인가?
은: 그냥 때리는 정도가 아니에요. 실제로 구두발로 마구 밟아 버립니다. 그걸 나름대로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온 저도 그냥 옆에서 바라 볼 수밖에 없어요. 말릴 힘이 없죠. 그러고 나서 또 일을 해야 해요. 저도 해야 되고 맞은 아이도 퉁퉁 부어서 또 일을 해야 됩니다. 그저 빨간약이나 좀 발라주는 거죠. 그 장시간 노동을 그렇게 맞아가며 해야 되는 거죠.
물: 드디어 민중의 삶의 현장을 목격하시는 건가?
은: 미싱사 선배들은 얘길 합니다. A급 미싱사가 되려면 손톱이 세 번 빠져야 된다고. 저도 한 번 겪어 봤는데 기계식 미싱에 드르륵 하면서 바늘이 손톱을 관통한 거죠. 그 때 반장이 뛰어옵니다. 물론 그 친구가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게 당연한 거죠.
반장이 오더니 하는 말이...
“야, 이 멍청아, 옷감에 피 묻잖아..”
-매우 순화시킨 표현일 것이다.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그러면서도 그냥 손가락을 싸매고 빨간약 바르고 또 일을 하는 거예요. 폭력에 익숙해 진 사람들은 그걸 모릅니다. 참는 게 아니라 그냥 저항할 생각 자체를 못하는 거고, 좌절하고 포기하는 거고, 적응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회사는 그걸 너무 잘 알고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사람들은 참 무력하구나..."
고소득층 범죄자와 그를 심판하는 경찰을 묘사하는 것이 유행인 듯한 매체들[25]과는 달리 현실에서 고소득층의 범죄율은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범죄율에 비해서 상당히 낮은 편이다.[26] 심지어 프랑스에서 우파란 단어가 탄생한 이유도 약자인 민중이 강자인 귀족보다 미개해서 차라리 귀족과 타협하자는 부르주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27]
처벌의 측면에서 보면 같은 범죄에 대해서 고소득층은 상대적으로 알려지기는 잘 알려질지 몰라도 저소득층에 비해 훨씬 적게 처벌 받는다. 위에 나온 유전무죄 무전유죄도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주목은 더 받는데 처벌은 덜 받으니 결국 이것은 고소득층에 대한 인식 악화로 이어지고... 악순환이다. 대기업은 임금체불같은 그들 입장에서 사소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리스크 - 리워드 때문이다.
이런 사례들은 신데렐라 등의 고전부터 시작해서 막장 드라마까지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매체에서 드러나는 클리셰로 등장한다. 가령 가난한 주인공은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선한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으로 나오고[28] 부자들은 각종 부정이나 비리, 범죄 등으로 부를 축적하여 가난한 주인공을 구박하고 탄압하고 착취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아무데서나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창업을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세상은 흑백으로만 나눠지는 것이 아니다. 약자라 해도 자기보다 더 약한 사람 앞에서는 목소리가 커지게 마련이다.[29] 사회 최하층인 아Q도 자기보다 약한 여자나 어린이들을 패고 다녔다.
주의할 점은 언더도그마를 비판하면서 역 언더도그마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더도그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의 선과 악은 가난과 부유함과 상관이 없다는 점인데 언더도그마를 비판하면서 가난한 자는 악이고 부자는 선이라는 극단적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2010년대 이후 가난혐오와 맞물리면서 가난 = 악, 부자 = 선이라는 역 언더도그마도 구현되고 있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인간의 행동을 모습을 가지고 판단해야지 단순히 돈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언더도그마 문제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잘못된 염세주의와 허무주의에 근거한 극단주의가 근절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극단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뒤에서 주장해도 논란 및 사건사고들이 점차 커져 앞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감당하든 말든 꿋꿋이 극단주의를 고집한다. 극단주의자들은 세상이 쓰레기니까 세대, 성별, 정치 갈등에서 누구 편을 들면서 용서하기도 싫고 갈등이 커진다면 모순적인 인간들이 대가를 치르는 거니 이를 이용해 돈을 벌면서 어용질이나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불신 정도가 아닌 인간 혐오를 선호해 다른 것에 가치를 못 느껴 상식인과 거리감이 생기게 된다.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듯 상대방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거나 아직 극단주의에 빠지지 않은 외지인[30]에게 냉소를 보내는 불우한 네티즌들이 많은 것은 다 이 때문이다. 극단주의자들로만 이루어진 혹은 극단주의자가 불리하게 들어간 조직이 일시적으로 뭉쳐서 하하호호 웃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남탓 공방전을 벌이는 것은 불우한 자신과 그래도 조금이나마 나아질려는 남의 행동에 질투심을 품고 배알이 꼴려서 내부고발자를 폄하하고 집단괴롭힘을 옹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언더도그마의 원인 중 하나가 극단주의가 근절되지 못해 일어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극단주의 문서에 집중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5. 사회적 약자 사이에서 나타나는 언더도그마 비판 현상
반인륜 범죄 사건이 보도되었을 때, 가난하거나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 네티즌들이, "가난하다고 범죄자가 된다면 나도 살인자가 되었어야겠네", "나도 어렵게 살았지만, 저런 헛소리하는 인간들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더욱 더 비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의 언더도그마 혐오. 이들은 범죄가 많은 지역에 거주하면서 범죄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받기 때문에, 저소득층 중에서는 오히려 범죄자들에게 관용과 연민을 베풀지 말고 강경처벌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31] 고통받는 피해자 입장에서는 가해자가 가난하고 자시고 굳이 봐줘야 할 이유가 없으니 당연하다.
그럭저럭 여유있는 계층이 갖는 이상주의에 입각한 언더도그마를 오히려 서민, 빈곤계층에서 반감을 가지기도 한다. 너희는 안전한 곳에 있어서 현실을 모른다는 식의 반감.
6. 언더도그마의 악용과 오용
약자를 선의로 대하는 마음을 이용하여 사기를 치거나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즉 자신들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지만 스스로를 사회적 약자라 칭하면서 언더도그마에 기대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닫힌 사회에서 벌어지는 범죄의 경우 막상 따져보면 그 지역의 강력한 권력층이지만 자신들보다 더 높은 사람이나 부유한 지역과 비교하면서 자신들이 사회적 약자이므로 이러한 범죄를 봐줘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흑산도 집단 성폭행 사건, 섬노예가 그렇다. 앞서 말했듯이 가해자들 모두 상당수 큰 규모의 염전을 운영하는 부농이다. 그러므로 이는 언더도그마라고 볼 수 없다.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자랑하려는 지식인, 학자들에 의해 약자의 범죄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 사회 구조의 문제라는 식으로 마땅한 해결책 없이 무마되거나[32], 약자의 범죄 언급 자체가 금기시된다.[33] 또한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부도덕한 인간으로 몰려 매장된다.[34]
동화에서는 인간에 대한 선함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의 두면의 모습을 잘 말해주지 않아 어린아이들이 이러한 언더도그마에 쉽게 빠지기도 한다.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초기 충녕대군의 모습이 이러한 어린이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가난이 사람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 완전히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대표적으로 범려의 일화처럼 가난하거나 가난을 겪은 적이 있는 이들은 리스크를 감수하거나 투자를 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은 가난한 자들에게 국한된 용어가 아니라 살아가는 것의 어려움과 생존을 위해 침묵하는 것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은 부조리에 침묵하는데 쓰인다. 해당 문서에 적혀진 예시도 사장의 갑질과 범죄에 침묵하는 직원들을 다루고 있다.
참고로 소설 레 미제라블의 메시지는 생계형 범죄를 용인해야 한다는 입장이 아니다. 고위층의 범죄는 묵인되면서 가난하거나 힘없는 자들의 범죄는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과, 과거 범죄를 저질렀다고 편견을 가진 것을 비판한 것이다. 팡틴이 공장장의 부당한 성적 요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짤리고 이곳저곳에서 일을 구하지 못해 결국 성매매를 하게되고 그 죄로 감옥에 간다. 반면 공장장이나 팡틴의 친척은 오랫동안 아동학대와 폭력 등 수많은 범죄를 자행하지만 처벌받지도 않는다. 장발장은 감옥에서 나와 주교를 만난 후 회개하고 시장이 된 인물이다. 장발장이 도주한 이유는 자베르가 자신의 과거를 밝힐까봐 두려워서이며, 도주했음에도 숨겨둔 어음과 돈으로 파리에서 부자로 살았다. 참고로 마리우스가 코제트가 만난 곳은 장발장이 후원한 빈민구제소였다.
생계형 범죄는 그 기준을 세울 수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 용인된 적이 없다. 판례는 단 1,000원의 횡령도 횡령이라 판시하여 해고의 정당성을 용인했다. 흔히 알고있는 가난한 자들의 생계형 범죄를 봐주는 경우는 그 피해액이 적고 피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거나 사면을 청구하는 경우이지 가난하다고 해서 무조건 죄를 사면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면 이들의 범죄를 허용한다면 같은 환경에서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노력하는 이들조차 범죄로 유입시키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7. 주의할 점
청소년 범죄의 주된 배경 요인은 환경이 아니라 도덕성 결여라는 조사 결과도 영국에서 나왔다. 링크
24일 영국 데일리메일 인터넷판에 따르면 케임브리지 대학교 범죄학연구소가 피터스버러에 거주하는 약 700명의 청소년을 10년 동안 연구 관찰한 결과, 도시 환경이 일부 청소년들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게 하지만 가장 큰 요인은 도덕성인 것으로 드러났다.
(중략)
이 연구를 이끈 퍼-올로프 위크스트롬 교수는 "많은 젊은이가 '범죄혐오적'이며 범죄를 '할 수 있는 행동양식'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면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은 문제가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기회가 도둑을 만든다, 즉 젊은이들이 특정 환경에서 불가피하게 범죄를 저지른다는 생각은 우리 연구결과와는 배치된다"고 그는 단언했다.
이 연구결과대로라면,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절도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 평소 범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행동 양식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1년 영국 폭동의 경우는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한 차브족들이 일으켰다는 통념과는 달리 그저 재미로 가담한 중산층 가정의 자녀들도 상당수였다.
한편, 치안의 수준에 따라 집값이 크게 달라지는 걸 생각한다면, 가난한 동네에 범죄율이 높은 것을 단지 주민 수준 탓이라고만 볼 수도 없다. 즉, 범죄자들이 싫지만, 그 지역을 떠날 형편이 안 되어서 억지로 참고 사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러다 보면, 원래는 안 그랬던 청소년이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단지 돈이 없어서 그렇다고만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가난한 동네는 다양한 문화적 체험을 할 환경이 아니라서, 청소년기의 울분이나 호기심을 건전한 방법으로 해소할 기회가 부족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게 아니라, 금기시되는 행동을 했을 때 느끼는 스릴과 쾌감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을 수도 있다는 것.
또한, 다양한 문화적 체험은 자신의 진짜 재능을 발견하고 이를 올바른 방향으로 활용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주먹을 잘 쓰는 사람이 우범 지대에서 성장했다면, 자신이 복싱 천재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조폭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실제로, 섹스 피스톨즈의 기타리스트 스티브 존슨의 사례에서 보듯이, 비행 청소년이 우연히 훔친 악기를 계기로, 음악가의 길로 들어선 경우도 있는 것을 보면, 다양한 문화적 체험을 할 수 있느냐도 중요하다.[36]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문화적 환경과 도덕적인 분위기가 정착되지 않았다면, 이를 음주, 폭력, 절도, 마약 같은 데 탕진할 수 있고, 사고를 칠 때마다 돈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식으로 살아가기도 쉽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 중 사고를 치는 사람들만 언더도그마를 내세운다는 점도 무시 못할 요인이다. 왜냐하면, 현대사회는 과거와는 달리 차림새만으로는 빈부를 쉽게 알 수가 없으므로, 본인 입으로 가난하다고 말을 꺼내기 전에는 남의 가난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군다나 부자가 평상시에 검소하게 사는 경우도 많아서 몸에 지닌 물건만으로는 경제적 상황을 짐작하기가 어렵다.[37]
따라서 평소에 환경 탓을 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난은 겉으로 드러날 일이 없다. 이런 사람들은 분수에 맞게 돈을 쓰기 때문에 가난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빚을 만들지 않으려 하며, 빚이 있어도 성실하게 일해서 갚는다. 이렇다 보니 저소득층 중에 일부러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하소연하는 부류들만 눈에 띄고, 사고 안 치고 성실히 살아가는 부류들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게 된다.
저소득자의 범죄율이 중산층이나 고소득자보다 높다는 것이, 중산층, 고소득자가 평균 이상으로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는 견해도 있다. 단지 교양과 교육을 통해서 세련되어질 기회가 있었던 것이고, 순간의 화를 풀고 나서 잃을 게 더 많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이기도 하다. 히틀러도 평범한 사람들의 평생 수입을 그냥 받을 정도의 집안이라 그런지 의외로 상당히 예의를 차릴 줄 알았으며, 히로히토 덴노도 귀족적이라 다른 천민 출신 전범들과 다른 개념인으로도 보이지만 사이판 전투에서 일본의 민간인들에게도 직접 자살령을 내렸다.[38]
부유층 자제가 성격, 사교성이 훨씬 좋다는 내용 또한 굉장히 주관적인 논리이다. 물질적인 여유가 있어서 당장 타인을 공격하지 않을 뿐이다. 부유층들이 자신들의 특권이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타인을 배척하는 경우도 허다하며, 갑질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돈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월감을 가지고 자기보다 경제적으로 못한 이들을 다 아랫것 취급하며 무시하고 막 대하는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을 차별하는 경우라 볼 수 있다. 휴거라는 말이 괜히 생긴게 아니다. 부자병이라는 현상도 있고.
잠원동 묻지마 살인사건처럼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심지어 학창시절 모범생이었던 사람이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다. 흔히, 없는 사람들이 잃을 게 없어서 막나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사건의 경우처럼, 미국 유학을 했을 정도로 경제적 사정이 괜찮고, 학벌도 나름 괜찮음에도, 일이 잘 안 풀렸을 경우, 그 좌절감이 분노로 바뀌어 최악의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이 경우처럼, 학력과 경제적 수준이 높은 경우, 눈높이가 높기 때문에, 실패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차라리 못살고 공부를 못하면, 내가 능력이 안 되니 어쩔 수 없다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소확행에 집중한다. 이 사건의 범인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이 전과자 되지 않고 성실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게 그래서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사례는 고학력의 유복한 집안 사람들이 인성이 좋다는 인식에 대한 반박이 될 수 있다.
은수미 의원 사연을 위시한 노동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나타내는 부분도 주의해서 봐야 한다. 노동운동 또는 인권운동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 전체를 더 이롭게 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개개인들의 인성이 정의롭거나 도덕적으로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용되었던 부의 격차가 범죄를 유발하는 점만 봐도, 경제적 격차의 해소는 각종 범죄지표의 하락을 가져올 거라는 기대를 할 수 있다.
계층간 격차가 심각하게 벌어지면 그 정치구조는 약해지기 쉽다. 부의 독점은 항상 소수가 하기 되고, 나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은 부를 독점한 집단에 비해 상대적인 약자이다. 이런 경제구조가 건강할 수 없는 것은 역사적으로 많은 사례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공산국가. 들고 일어난 가치는 평등이지만 현실은 그 어떤 자본주의 국가보다 부패가 심각하고 경제적인 격차가 크다. 그 결과 공산주의는 패망했다. 2020년 기준 중국이 강력한 국력의 공산주의 국가이긴 하지만 자본주의를 일부 받아들이기 전엔 어림없는 일이었다. 노동운동의 필요성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이득을 보는 집단에 대한 감정적인 혐오감이 그 필요성을 반감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언더도그마에 너무 심취해서 약자는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도와주기 싫다는 식의 감정에 지배당하는 것도 언더도그마 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이성적이지 못할 수 있다.
7.1.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핍박과 언더도그마의 악순환[편집]
언더도그마는 앞서 말했듯이, 맹종(dogma)을 말한다. 즉 전후사정과 세부사항을 파악하지 않고 오로지 약자니까 가난하니까 면책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는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범죄자로 만드는 꼴이 된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동물이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범죄면책권이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사용할 것이다. 물론 몇몇은 도덕률에 따라 범죄를 행하지 않겠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이익을 좇아 움직이기에 범죄를 마음대로 저지르게 될 것이다.
결국 언더도그마가 사회적 약자의 범죄를 양산하고, 이러한 범죄는 결국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로 이어이며 다시 이는 이들에 대한 핍박으로 그리고 다시 언더도그마가 심화되는 그야말로 악순환의 반복이 된다.
문제는 이러한 악순환이 지금 시작되고 있다.
2010년대 중반부터 사회적 약자들의 막장 행각을 비난하는 글들이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널리 퍼지고 있다. 물론 이 글들의 대부분은 확인할 수 없으며, 검증되지 않았고, 주관적인 개인적 경험으로 왜곡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의 막장행각이 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글이 널리 공감을 얻는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가난혐오, 약자혐오가 팽배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이러한 혐오로 인해서 가난한 자들이 더 많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인식과 고아는 범죄를 많이 일으킨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물론 이러한 인식이 과거부터 존재했기에 최근 만들어진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이전판만 하더라도 불편한 진실 문단에서 가난한 자가 더 범죄를 많이 일으키며 고아들이 범죄자가 많다는 주장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는 그저 감정에 호소하거나 단순관찰 결과, 추론을 근거로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고아 중에는 범죄자가 많다는 주장이 그러했다.[39] 고아이므로 사랑을 못 받기에 스토킹의 범죄를 저지르고, 그에 대한 예시로 김유정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는 하나의 예시이지 모든 고아가 사랑을 받지 못해 애정결핍에 빠져 범죄를 저지른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람은 너무나도 다양해서 부모라는 존재가 있든 없든 아무런 생각이 없는 아이가 있는 반면, 부모라는 존재에 크게 기대하는 아이도 있기 때문이다. [40]
사실, 2011년 영국 폭동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남 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했어도 어차피 사고 칠 사람은 일을 저지른다. 다만, 이러한 경우는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이 뭐하러 그런 짓을 했느냐고 비판하기 때문에 애초에 언더도그마를 악용하기는 어렵다.
즉, 진짜 문제는 문제 행동을 저지를 가능성이 아니라, 그런 사람으로 인해 피해를 봤을 경우에, 사태 수습이 어렵다는 것이다.
불우한 사람 중에 언더도그마를 악용하는 사람과 엮이게 될 경우,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기가 어렵고, 특히, 그런 사람이 겪은 불우함의 정도가 일반적이지 않을 경우에는 그만큼 피해의식도 심해지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으면 넌 네가 싫냐라고 가스라이팅을 하기도 한다. 다만 이는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만 드러내는 본색이며, 그 이외 사람들에게는 소심하고 착한 이미지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네가 좋은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오만해서 불쌍한 사람을 품어주지 못한다고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할 수도 있다.[41] 특히, 스토킹처럼 과거엔 범죄시되지 않았던 일탈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한때 여초 커뮤에서 자주 언급됐던 김유정의 스토킹 일화도, 김유정의 친구가 피해자인 박녹주 명창을 너 때문에 친구가 죽었다고 비난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자주 입에 오르내린 것이다.
지금도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이 스토킹을 할 경우, 가해자의 동성친구가 가해자를 두둔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저 일화가 꾸준히 언급되어 온 것이다.[42]
그래서 가난한 집 아이나 한부모 가정 아이와 놀지 못하게 하는 부모의 경우에는 본인이 과거에 그런 사람들에게 당했다든지, 경찰과 사회복지 종사자들이 일을 하면서 언더도그마가 거짓이며 가난한 자가 더 악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식의 서술이 많았다.
물론, 어린이들 중에 악질 범죄자가 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므로, 어린이용 매체에서 친구끼리 편견 없이 사이 좋게 어울려야 해요라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순수한 동심을 이용하여, 불우한 환경의 어린이를 나쁜 어른들이 범죄에 이용하는 경우다. 성인인 마이클 잭슨도 그런 사람에게 걸려 들어 평생을 고통에 시달렸으니,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이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 때문에 사람들을 쉽게 특정 카테고리에 우겨넣고 이런 사람들을 무조건 피하라는 무식한 방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기가 쉬운 것이다.
사실,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복지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애들이 어린 동생들을 키우는 소년소녀가장이 많았다. 물론 대다수는 그럼에도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기성세대들은 자식이 탈선할 때 이런 분들의 사례를 들면서 자식을 꾸짖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세대들은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과 사돈을 맺는 것을 꺼리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많다.[43]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본인이 아무리 떳떳해도 가족 중에 문제를 일으키는 구성원이 한 명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소년소녀가장 본인은 인격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일지라도 동생들 중 한 명이 사고를 친 적이 있을 경우, 이게 혼사에서 장애물이 된다는 것이며, 그래서 불우한 환경으로 인한 집안의 결혼 반대는 우리나라의 소위 막장 드라마에서 갈등 장치로 즐겨 사용하는 소재이다.
물론 멀쩡한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이 더 악질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많지만, 오히려 그러한 점 때문에 좋은 환경이었어도 저리 되진 않았을 것이라며 가해자를 동정하는 사람이 절대다수라 피해자가 제대로 목소리를 못 내고, 결국 이를 계기로 피해자는 되도록이면 불우한 사람과는 마주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피해자 입장에서는 저럴 확률이 그렇게 높지 않다는 통계적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일단 일이 터진 후 피해자가 도리어 비난받을 가능성이 어느 정도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도 과거 공동체 문화가 발달했던 시절에는 반상회 등으로 이웃과 활발히 교류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 눈이 무서워서라도 탈선을 하기 어려웠고, 만약 엇나가는 사람이 동네에 있을 경우 때려서라도 바로잡았다.[44] 하지만 신도시가 늘어나면서 지역 구성원들이 외지인들인 사례가 일반화되자, 이웃끼리도 잘 모르고 지내는 일이 많아져, 이마저도 어렵게 되었다. 다만 통계적으로는 요즘이 오히려 더 탈선을 안 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뭉쳐서 집단범죄를 행하거나 집단의 힘을 이용하여 가해자들 마음대로 자신들을 용서하는 경우가 많았다.[45] 옛날에는 공동체 정신 같은 것들을 강요하던 선생들부터가 이상한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학교에서도 지금보다도 더 어메이징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래서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의 일탈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오히려 끌려다니기가 쉬워졌다.
이 때문에 오히려 2010년대 후반에 와서는 가난 혐오가 커뮤니티를 통해 번지고 있다. 특히 기혼자가 많은 주부 커뮤에서 저런 이야기가 많다. 가난한 사람들은 고생하며 살다가 인성이 나빠질 확률도 많고, 아이에게까지 불행을 물려주니 가난한 사람은 아예 애를 갖지 말라거나, 심지어는 원룸에 살면 애를 낳지 말라는 글까지 올라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201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언더도그마라는 용어 자체의 오남용 사례도 많아졌는데, 언더도그마라는 용어의 사용 사례가 증가하면서 그에 수반하여 오남용 사례도 함께 늘어난 것이다. 사회과학 용어인 언더독 효과와는 달리 학술적 용어에서 출발한 것도 아닌지라 이념적 혹은 정치적인 프레임에 근거하여 특정한 메시지를 담기 좋은 용어였기 때문에 오남용이 늘어난 면이 있다.
중요한 것은 언더도그마이든, 이에 반발하여 약자를 혐오하는 역 언더도그마이든 간에 양쪽 모두 환경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환경결정론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언더도그마에 심취할 경우 초반에 바로잡아야 할 유년기, 청소년기의 일탈도 바로잡지 못해서 더 큰 문제를 낳고, 앞서 언급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핍박을 더욱 강화한다.
하지만, 단순히 사회적 약자를 배제한다고 해서 원인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앞서 언급되었다시피, 환경과 상관없이 어차피 문제를 저지를 사람은 일정 비율로 존재한다. 오죽하면 직장인들 사이에서, 좋은 회사로 이직을 해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마주치는 것은 못 피한다는 얘기가 왜 회자되겠는가?
게다가 사회적 약자를 애초에 배제하는 것도 현실적으론 불가능하다. 대표적인 예로 탈북자를 들 수 있는데, 인터넷 커뮤니티를 보면 약자에 대한 혐오감에 빠진 사람들이 이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보고 배척하는 혐오 발언을 쏟아내지만,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하는 이들을 무슨 수로 막을 것이며, 만약 탈북자 혐오를 내세우는 정치인이 등장했다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9. 반대 양상: 수평폭력
수평폭력이란 현실에 대한 분노를 자신보다 약한 자 또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푸는 현상을 말한다. 언더도그마와 그 기제는 다르나, 반대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9.1. 오버도그마와 탑도그마 같은 대응적 용어의 문제
일각에서는 언더도그마를 비판하기 위해 '수평폭력' 대신 오버도그마(Overdogma), 탑도그마(Topdogma) 같은 조어를 만들기도 했는데, 이는 논리적 오류이다. 언더도그마는 그 자체로 맹종(dogma)[46]으로서, 사회학에서 '약자'에게 비이성적인 동정심을 갖게 되는 '언더독 스토리 효과의 문제점'이 언더도그마로 나타나는 원리. 따라서 '오버도그마'도 성립하려면 '강자 또는 기득권이 전선(全善)하다고 믿는 현상'이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의 동정 심리가 일반적으로 기득권과 강자를 향할 수는 없다.
다만, 사회적 약자,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기존의 편견 및 고정관념이 더욱 강해지고 굳어버리는 경우는 발생할 수 있다. 또한 "강자"가 아닌 "다수자"인 경우에는 "다수결의 원칙"을 곡해하거나 과대적용/해석해 "다수자가 항상 선하고 옳다"는 주장을 펼치는 경우가 꽤나 판치고 다니고 있기는 하다. 이 정서는 언더도그마와 마찬가지로 맞는지 틀린지 논리적으로 판단받지 않은 체 다수의 의견에 빌붙어서 대세에 함께 하는 것이 옳다고 착각되고 있다.
따라서 약자에 대한 혐오 문제는 수평폭력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
관련 문서: 이 녀석도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어
불쌍한 사연이나, 기구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동정하는 것. 이를 악용하여 싸구려 동정심을 얻으려고 사람들을 자극하는 예로 언론플레이가 있다.
연민에 의거한 논증을 유발한다. 결론은 약하다고 해서 선하지는 않다는 것. 그렇다고 무조건 사회적으로 생리적 쓰레기니까 색안경을 끼는게 옳다는 말이 아니다. 분명 가난해도 착하고 바르게 노력하는 사람들 역시 많으니[47] 이는 '약자=악인'이란 논리가 옳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48] 그리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범죄자가 불쌍하다고 해서 무조건 용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는 근거로 곧잘 활용된다.
또한, 막장 드라마의 악녀들 중 왔다 장보리의 연민정, 뻐꾸기 둥지의 이화영, 이브의 사랑의 강세나, 내딸 금사월의 오혜상 네 사람 모두 태생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출신[49]인데 그들이 프롤레타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언더도그마적 시점으로 볼 경우 그들의 '정상참작이 불가능한 악행'까지 미화되고 심지어 그들에 의한 피해자에 대한 비하가 나올 위험성이 있다.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흔히 나온다. 공격측이 악이고 방어측은 선이라고 생각 하는 경향인 것
역사를 소재로 한 창작물 중에서 천민 출신 친일파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들이 이러한 논란에 휘말린다. 대표적인 사례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인데, 아무리 조선 말기까지 양반들이 천민들에게 가혹하게 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수성가한 천민들 중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역으로 자신들을 괴롭혔던 양반들을 괴롭히는 것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게 시청자들의 시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어권에서는 Underdogma라는 단어가 잘 쓰이지는 않는다. 2010년대에나 등장한 단어이기도 하고, 원본 서적에 정치적인 내용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자체가 동정에 호소하는 논리적 오류이니 만큼 딱히 신조어를 만들지 않아도 충분히 비판할수 있고 말이다.
10.1. 클리셰의 변화
하지만 2010년대 국내 창작물들이 극단적인 사이다만을 바라는 레파토리가 심화되면서 액션이나 스릴러의 주인공들의 상당수가 정의감이라고는 던져버린 이기적인 성향을 보여주고 있고, 스스로 갑질을 하거나 악행을 하기까지 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러한 클리셰는 완전히 반대로 뒤바뀐 추세이다.[50][51]
특히 드라마나 영화에 비해 감시를 거의 받지 않는 웹소설이나 웹툰에서 이런 경향이 강하다. 영화조차도 범죄도시의 흥행에서 보듯이, 윤리성에 구애받지 않는 통쾌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보통 일본 창작물의 정의 지향과 비교되곤 하나, 사실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이든 유럽이든 전 세계 대다수의 창작물들에 비해 최근의 국내 창작물들은 주인공의 욕망이 굉장히 이기적인 편이다.[52] 주인공이 조금이라도 폭력 사용에 주저하거나 약자를 위해 희생을 하려고 하거나 악인을 용서하거나 하면 바로 작가에 대한 엄청난 비난과 함께 호구, 감성팔이 등의 수사가 달리곤 한다. 이렇게 호구에 대해서 과도하게 알레르기를 보이고 정의의 사도를 혐오하는 반응은 그 자체로 대중의 욕망을 반영한다.[53]
'언더도그마 비판론'이 한국에서 유행하게 된 것도 결국 이렇게 웹소설이나 웹툰에 대중들의 욕망이 새롭게 반영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보아야 한다. 기성 세대에서 유행하던 창작물과, 2030 세대 남녀 세대에서 유행하는 것들이 변화하는 것 역시 사회적 환경 변화와 내적 가치관과 욕망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즉, '언더도그마'는 커녕 오히려 약자에 대한 멸시와 강자, 승자에 대한 찬양, 이기심의 정당화가 창작물의 클리셰에 파고든 상태인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언더도그마/사례 문서
를
참고하십시오.
12. 관련 어록
이 사람은 부모님을 잃은 슬픔을 잊으려고 마약을 복용한 것입니다. 재판장님께서도 부모님을 잃은 슬픔을 잘 아시잖습니까? 저는 이 사람이 비록 마약을 복용하기는 했지만, 용서해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54]
출처: 위기철의 논리 3부작
너희는 또한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고 해서 치우쳐서 두둔해서도 안 된다
출애굽기 23장 3절 (공동번역)
"약자는 과연 선량한가?"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란 말이오.
"내가 버마에서 얻은 신념은 모든 피억압자는 선하고 모든 억압자는 악이라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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