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21.월요일
너클볼러
하이라이트 Highlight
1978년 9월 21일. 제15회 대통령기쟁탈장사씨름대회 8강 리그. 공설운동장엔 이미 1만 여명의 씨름 팬들이 운집해있었다. 8강 진출자의 이름 중 가장 익숙한 석자는 바로 '김성률'. 대통령기쟁탈장사씨름대회는 씨름판의 월드시리즈라 불리는 대회 중의 대회. 김성률은 이 대회 8연속 우승을 자랑하는 장사 오브 더 장사였다. 하지만 근래 홍현욱과 이준희의 등장으로 최고의 자리를 위협받고 있던 터, 최고의 타이틀인 '대통령기 장사'만큼은 넘겨 줄 수 없었다. 게다가 여전히 씨름 팬에게 모래판의 지배자는 김성률이었다. 그는 9연속 우승이라는 신기원을 달성하기 위해 조용히 샅바를 당겨 잡았다. 그의 맞은 편에는 고3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의 노안인 거구의 학생이 앉아 있었다. 바로 이봉걸이었다.
원조 슈퍼 씨르머 김성률(좌/흑)
키 2m3의 이봉걸은 같은 해 4월 17에 벌어진 제8회 전국장사씨름대회에서 이미 우승한 경험이 있었다. 고등부결승리그에서는 6전 전승. 장사부 리그에서는 7전 전승으로 우승한 것이다. 고등부에선 상대가 없었다. 8명의 최종 진출자가 리그를 벌여 우승자를 가리는 장사부 리그도 다르지 않았다. 이 어린 장사는 피지컬과 테크닉을 모두 겸비하고 있었다. 7명을 모두 모래판에 쓰러뜨리고 난 뒤 이봉걸은 두 손을 치켜 들었다. 역시나 경기장을 찾은 씨름 팬은 새로운 스타의 등장에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몇 달 뒤 최고의 대회인 대통령기쟁탈 장사씨름대회 결선리그에서 당대 최고의 선수인 김성률의 맞은 편에 앉아 샅바를 움켜잡았다.
상대선수의 팔랑개비화
1만여 명의 관객은 숨죽였다. 고3인 거구의 어린 선수가 서른 살, 실력과 경험을 모두 갖춘 최고의 선수와 다이다이를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판. 이봉걸은 자신의 신장과 힘을 이용한 돌림배지기를 걸었다. 최고의 신장과 힘을 가진 이봉걸이었지만 김성률도 182cm, 120kg로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유도, 레슬링, 축구 등의 다양한 종목의 경험으로 다져진 테크니션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봉걸은 그를 들어올렸고, 돌려 쓰러뜨렸다. 중 3때부터 시작한 씨름, 하지만 눈치가보여 선배들에게 져주기 일수였던 선수가 더 이상 선배가 없는 고3이 되자 신지를 만난 에바 초호기 마냥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고 권위의 대회에서 최고의 선수를 메다 꽂은 것이다. 최강 산왕을 이긴 북산이 이어지는 게임에서 내리 졌듯, 김성률과의 경기에서 모든 걸 태워버린 탓일까. 양기석과의 경기에서 패하고 만다. 하지만 '승자 승' 원칙에 따라 장사의 자리에 올랐고, 언론은 일제히 '김성률시대'의 종식을 고했다. 새로운 스타가 등장한 것이다.
매해 최고의 선수와 단체를 선정해 시상하는 '체육회 올해의 선수, 올해의 단체'의 78년 후보 중 씨름선수로서 유일하게 이름을 올린 이는 김성률, 이준희, 홍현욱 등이 아닌 이봉걸이었다. 최고의 인기스포츠인 씨름판의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임이 확인된 것이다.
이봉걸 Lee Bong Geol (1957~)
1979년 2월 3일. 현대그룹은 78년 1위인 이봉걸 외 7명의 선수를 영입해 씨름부를 창설했다. 이봉걸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닥치고 유망주였다. 두 달 뒤 열린 제9회 회장기쟁탈 전국장사씨름대회의 우승후보 역시 당연 이봉걸이었다. 하지만 준결승에서 만난 최욱진(진주상고)과의 경기에서 왼쪽 팔 관절 부상을 입고 만다. 모두들 크지 않은, 일시적 부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봉걸의 복귀를 기다리는 씨름 팬이 접한 소식은 상당히 뜬금없는 것이었다. 부상으로 인한 공백, 복귀에 대한 소식이 아닌 '농구'로의 전향소식을 알려온 것이다.
변덕… 아니 이봉걸
신장 2m 5cm에 120kg 탄탄하고 유연한 체구의 소유자였던 이봉걸은 배구, 프로레슬링으로부터 지속적인 러브콜을 받아왔다. 하지만 모래판에서 가장 주목 받는, 확실한 유망주이자 기대주가 되어 현대 씨름단에 입단한 그 해 7월 9일 예상치 못한 농구전향을 발표한다. 팬들은 의아해했고, 현대농구팀 감독이었던 방열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능성을 테스트 한 뒤 소질이 있으면 키워보겠다'며 빅맨 부재인 국내 농구로의 전향을 반겼다. 이유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봉걸은 '그동안 농구에 특별한 매력을 느껴왔는데 지난 6월 대구 종별 선수권 대회를 계기로 농구로의 전향 뜻을 굳혔다. 농구야말로 나 자신이 개척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스포츠다'라고 답했다. 사람들은 이봉걸의 새로운 도전쯤으로 받아들였다. 이봉걸은 몇 달 뒤인 11월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갔다.
이봉걸이 모래판이 아닌 농구코드에 선 1980년. 농구는 겨울스포츠로 확실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고려대의 이충희란 스타 플레이어가 이미 폭주모드에 돌입했고, 게임당 평균 30점을 때려 붓는 연세대 1학년 김현준의 등장으로 더욱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현대는 게임리더였던 신선우(훗날 현대 감독)의 군입대로 인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매우 공격적인 영입을 진행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봉걸이었다. 게다가 김성률을 잊는 차세대 장사였던 이봉걸의 영입은 단연 화재였다. 하지만 마이클 조던의 야구 외도처럼 이봉걸의 전향 역시 한때 외도에 그쳤다. 8개월간의 훈련 후 1980년 7월, 이봉걸은 현대 농구단 탈퇴, 이듬해인 81년 대학입학예비고사에 합격한 뒤 충남대 씨름부에 스카우트되어 다시 모래판에 들어갔다. 언론은 이봉걸이 고된 농구 훈련을 감당하지 못하고 떠났다고 했다. 기량이 만개한 씨르머의 뜨거운 1년이 통째로 사라진 것이다.
명색이 대학 씨름부에 들어왔지만 제대로 된 지원도, 체계적인 훈련도 보장받지 못한 그는 대회 하위권을 전전하는 골리앗이 되었다. 언론은 당시 1m71cm의 키로 몇 차례 우승을 경험한 최욱진(경상대)를 다윗으로, 이봉걸을 덩치만 큰 골리앗으로 비교하기 시작했다. 대회가 열렸다 하면 1만 명은 가볍게 운집하던 씨름의 시절에 그는 그렇게 실력과 무관하게 조연을 맡기 시작했다. 그는 모래판에서 몸이 크고 힘이 좋은 씨르머였을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하지만 그는 골리앗이 되었다.
꺼지지 않는 씨름의 인기에 힘입어 1983년 4월 14일 체급불문 최고의 장사를 꼽는 제 1회 천하장사씨름대회가 열리게 된다. 85kg이하인 금강, 95kg이하인 한라, 95.1kg이상인 백두, 이렇게 세 체급의 체급별 장사, 그리고 각 체급의 상위권자들이 풀 리그로 천하장사를 꼽는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1회 대회 천하장사 최종 결선에 오른 36명의 선수들에게 프로의 자격이 주어졌고, 백두급의 명단엔 이준희와 홍현욱 비롯, 이봉걸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천하장사는 이준희와 홍현욱의 2파전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게다가 이준희는 다부진 체구(1m94cm, 114kg로 이봉걸 다음)와 준수한 외모를 갖춰 '누님들의 로망'이란 닉으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주인공은 엄한데 있었다. 한라급에 이름을 올린 '이만기'였다.
내가 바로 모래판의 쩍벌남
20회 대통령배대회 3위였던 이만기가 천하장사가 될 거라 예상했던 이는 거의 없었다. 이만기가 단신인 최욱진과의 경기에서 승리해 한라장사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천하장사 결승전은 한라장사 결승전의 재방송이었다. 예선에서 골리앗 이봉걸을 이기고 올라온 다윗 최욱진과, 준결승에서 이준희를 누르고 올라온 이만기가 결승에서 다시 붙은 것이다. 이만기는 최욱진과의 5판 접전 끝에 3-2로 누르고 영광스런 초대 천하장사 자리에 올랐다.
이후 주요대회의 상위권에 이만기, 이준희, 이봉걸의 이름이 단골로 오르기 시작하면서 3이李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유독 이봉걸을 보는 시선만 달랐다. 1984년 시름협회연구위원 임성수가 내놓은 '주요장사 36명의 힘의 원천 분석자료'의 내용은 그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만기 : 210kg를 들어올리는 허리 힘 덕에 벼락치는 듯한 배지기 가능 좌악력(왼손 쥐는 힘)이 70kg로 최고. 왼손잡이인 그가 왼쪽 공격을 하는데 매우 적합함
이준희 : 팔이나 어깨로 끌어당기는 힘이 각각 215kg/68kg 최고. 밧다리 시전에 능함.
홍현욱 : 팔과 어깨로 당기는 미는 힘이 같음. 공격밸런스가 좋아 장기전에 능함
이봉걸 : 복근력이 180kg로 다른 선수보다 10kg정도 우위인 것 빼고는 없음. 그러리 늘 불끈불끈 들어올리기만하고 마는 것임.
이렇게 3이(李)의 시대는 밝았으나 이봉걸의 역할은 철저하게 다윗을 빛나게 하는 골리앗에 그쳤다. 다윗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이만기였다. 83년에 시작해 84년 말까지 치러진 4번의 천하장사대회에서 3번은 이만기의 차지였고, 이준희는 꾸준히 상위권에 랭크 되며 자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불과 3년 전만해도 김성률을 잊는 최고 장사였던 이봉걸은 그렇게 패배에 익숙한 골리앗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럭키금성이 그의 가능성을 보고 그에게 계약금 1천 만원, 1백 만원의 월급이라는 29명의 졸업생 중 최고 계약을 제시해 영입하면서 이봉걸은 전환점을 맞게 된다.(아마 이봉걸은 '농구전향해프닝' 때문에라도 라이벌은 현대 씨름단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럭키금성은 이봉걸의 부진이 제대로 된 지도와 훈련을 받지 못한 것이라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은 때론 빗나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 이듬해인 1986년 3월 6회 천하장사 겸 제14회 장사씨름대회의 결과를 접한 언론에선 이런 제목의 기사를 뽑아낸다.
'모래판에도 보통 선수들의 시대가 열릴 것인가'
금강장사 '양상식'. 한라장사 '이승삼'. 백두장사 '이봉걸' 이 세 명의 등장에 빗댄 제목이었던 것이다.
이 대회에서 이봉걸은 백두급 우승까지 단 한번도 지지 않았다. 하지만 천하장사의 몫은 이만기의 것이었다. 이만기는 이미 1,2,4대 천하장사의 자리에 오른 미스터 천하장사. 천하장사 오브 더 천하장사였다. 하지만 이봉걸도 예전의 이봉걸이 아니었다. 이만기는 경기직후 인터뷰에서 '앞으로 이준희보다 이봉걸이 더 힘든 상대가 될 것 같다'고 말했고, 언론은 또다시 정상 직전에서 무너진 이봉걸이었지만 표정은 예전처럼 씁쓸하지 않았다고 전하면서 이전과는 뭔가 다름을 암시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한달 뒤 열린 제15회 체급별 장사씨름대회에서 이봉걸은 백두장사 2연패를 달성한다. 그것도 지난해 한라에서 백두로 체급을 올린 이만기를 꺾고 말이다.
이봉걸은 더 이상 '그냥 거인'이 아니었다. 소속팀 이중근 감독은 체급이 높은 이봉걸에게 맞춤형 트레이닝을 제공했다. 라이벌 이만기는 슈퍼 씨르머에 요구되는 순발력을 기르기 위해 구보와 배드민턴에 집중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나 이봉걸은 체중과 부상이력으로 무리한 구보와 배드민턴이 불가능했다. 그에 착안한 것이 바로 테니스였다. 하루 1시간의 테니스를 훈련을 통해 무게중심이동에 대한 감각과 순발력을 높여 나갔고, 꾸준한 훈련 결과는 시합에 반영되었다. 이봉걸은 이렇게 큰 체구에서 오는 힘에 순발력을 장착하면서 슈퍼 씨르머에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었다. 일부 씨름팬은 이만기와 이봉걸의 대결을 '배드민턴과 테니스의 싸움'이라 부르기도 했다.
귀요미 포핸드
하지만 언론은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프로스포츠 사상 최대금액으로 계약한 이만기가 화재였다. 이만기가 현대와 계약한 계약금 2억 원은 해태타이거즈(야구)의 선동열(1억)과 럭키금성(축구)의 조영중(1억)을 뛰어넘은 최대였고, 연봉 5천 만원 역시 롯데 자이언츠(야구)의 최동원(3천 7백)을 뛰어넘는 최대 금액이었다. 사람들은 엄청난 계약에 환호하면서 동시에 다른 씨름 선수간의 형평성문제를 제기했다. 그래서였을까 이만기의 계약직후 열린 제7회 천하장사 대회를 앞두고 이봉걸은 연습 중 부상을 입고 불참. 이만기가 천하장사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잦은 대회와 주요선수들의 부상이라는 고질적인 씨름판의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씨름관중은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이봉걸이 수술, 재활 후 다시 모래판으로 돌아오는 데는 5개월이 걸렸다. 그의 복귀 전은 LA 올림픽 오디토리엄에서 열린 미주지역동포 위문을 위한 미주지역장사씨름대회. 미식축구선수, 레슬링 선수들과의 이벤트경기도 포함된 이 대회에서 이봉걸은 5천 여명의 미주동포 앞에서 보란 듯 우승을 선보였다. 이만기는 '시차 탓에 새벽4시까지 잠들지 못해 재기량을 선보이지 못했다'며 항변했고, 성공적인 복귀 전을 치른 이봉걸은 다음해 계약금 5천 만원, 연봉 2천5백 만원이라는 판타스틱 계약에 성공한다. 하지만 최고의 1인자, 여전한 넘사벽은 이만기였다.
86년의 첫 천하장사 타이틀은 역시 이만기의 것이었다. 9회 대회 중 6번 천하장사 자리에 오른 것이다. 대회장 앞엔 늘 그의 전용세단인 스텔라가 대기 중이었고, 당시 쌀 2백여 가마니 값인 상금 1천 5백만원(천하장사 상금) 역시 그의 계좌에 꽂히기 일수였다. 언론은 이만기의 독주에 관중들이 실증을 내기 시작했다며, 이봉걸에게 관중이 박수를 보내는 이유 역시 그 탓이라 했다. 하지만 결국 거구 이봉걸을 쓰러뜨린 이만기에게 박수를 되돌린다며 이봉걸을 깔끔하게 2인자 처리하곤 했다. 그의 포지션은 그렇게 늘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이봉걸이 씨름에 발을 들인지 9년. 이때부터 그의 진짜 전성기가 시작된다.
몇 해 전 이봉걸이 평탄한 씨름의 길을 놔두고 농구부 스카웃을 받아들였던 이유는 무엇보다 바로 돈이었다. 그는 벌이가 없는 7가족의 생계를 떠 맡고 있었고, 늘 가난과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었다. 현대는 그에게 농구전향을 대가로 2천 만원을 더 주기로 했지만 3백 만원만 주고 쌩 깠던 것이다. 이에 그는 팀을 뛰쳐나왔고, 순식간에 연고 없는 듣보 선수 처지가 되고 말았다. 충남대에 들어갔지만 씨름부는 거의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가난이 해결 될 리도 없었다. 등록금이 없어 20여 일간 라면으로 때우기도 했다. 최장신을 뽐내는 거구의 씨름선수가 말이다. 그는 당대 씨름선수 중 가장 가난했다. 관중들이 상대방을 들고도 팽개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미련하다며 손가락질 할 때 가장 괴로워 했다. 먹지 못해 힘이 없었던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소속팀 럭키금성의 감독인 이중근은 '봉걸이는 지금도 고기를 잘 못 먹는다. 시래깃국이나 라면만 찾아 체력보강에 힘이 든다'며 이봉걸의 몸에 베어있는 가난에 마음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드디어 백두장사급에서도, 천하장사에서도(제10회 천하장사 대회 겸 제22회 장사씨름대회) 모두 이만기를 잡고 상금 1천 8백 만원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만기보다 오히려 이준희가 더 어렵다'고…
이젠 나도 쩍벌남
하지만 경남대를 다니던 이만기는 이봉걸이 속한 럭키금성과 사이가 차~암 좋았다. 그 관계가 이봉걸에겐 좋지 않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럭키금성은 검증된 대학생 유망주 이만기에게 훈련비 1천 2백 만원을 지급하고 광고출연을 통해 3천 5백 만원을 지급하는 등 이미 사전계약을 성사한 단계였다. 하지만 이만기는 럭키금성이 아닌 현대와 계약했다. 럭키금성은 훈련비 지급 시 작성한 입단 계약서가 있다며 훈련비를 돌려달라 내용증명을 보냈고, 이만기 측에선 요구조건을 제시(이만기는 럭키금성측에 2억 5천을 제시했다고 한다)하자 무시하더니 이제 와서 그런다며 훈련비를 당장 돌려주겠다는 이른바 '훈련비 해프닝'이 발생했다.(1986년 10월 2일 매일경제) 이봉걸이 럭키금성에 입단하면서 체계적인 지도와 훈련을 받은 건 사실이나, 럭키금성의 눈길을 언제나 이만기에 향해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이봉걸은 1986년 자신의 입지를 존나 단단하게 하고야 말았다. 상금 4천 7백 5십만 원으로 이만기(6천 6백 5십)보다는 적고, 이준희(2천 9백만 원)보다 많은 2위에 랭크 되었다. 하지만 전에 없던 주목을 받는다고 그의 이미지가 바뀌진 않았다. 우연히 출연한 코미디 프로에선 놀림감이 되기 일수였고, 협회는 그런 그로 인해 씨름의 위신이 실추되었다며 매스컴 출연을 제한하겠다고 나섰다. 그를 희화화하는 언론의 태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인기 있는 스포츠 스타들의 영화 진출은 당시 트렌드였다. 이준희는 모래판의 신사답게 60년대 어촌을 배경으로 한 청년과 여인의 사랑을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다룬 대종상을 겨냥한 '폐촌'의 과묵하고 듬직한 주인공 역으로, 박철순은 그의 일대기를 다룬 야구영화 '묵상의 땅' 주인공으로, 이봉걸은 서윤모 감독의 '색남색녀'에서 김진아 상대역으로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다. 영화제목만으로 이봉걸에게 씌어진 사회적 이미지는 늘 이런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찌됐든 씨르머 이봉걸은 1987년은 지난해의 영광을 재현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연거푸 승리하기 시작한다. 87년 첫 대회인 통일전하장사대회에서 임용제를 결승에서 누르고 우승하더니 27회 장사씨름대회에서는 결승에서 이만기에게 패배해 백두장사 자리는 내주었으나 곧이어 열린 천하장사씨름대회에서 이만기를 결승에서 꺾고 2회 연속 천하장사의 자리에 올랐다. 게다가 준결승에서는 이준희를 이기고 올라온 것 역시 큰 의미가 있었다. 3이李는 종종 모래판의 '가위바위보'로도 불리기도 했다. 서로 물리고 물리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봉걸은 이만기에겐 강한 면모를, 이준희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이 대회 전까지 이봉걸은 이준희에게 무려 8연패 중이었다. 연패를 끊고 결승에 올라 천하장사가 된 것이다. 우승 직후 이봉걸의 자신에 차 이렇게 말했다..
'현재로서는 내 적수가 없다. 88년까지 타이틀을 방어하겠다.'
하지만 적수가 없는 이봉걸을 언론과 팬들은 더욱 불편해하기 시작했다. 다음 경기에서도 이봉걸이 이준희를 준결승에서, 이만기를 결승에서 꺾고 백두장사의 자리에 오르자 언론에선 이봉걸을 기술 없는 오로지 힘에만 의존하는 씨르머로만 규정하고 기술이 거세된 그의 씨름으로 인해 씨름의 인기가 점차 줄어든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만기의 영원한 멘토인 황경수 감독은 이만기가 이봉걸과의 시합직후 입은 부상과 트라우마가 섞인 일종의 '거인컴플렉스'로 인해 자꾸 피한다고 진단했고 팬들과 언론은 기술씨름과 씨름 인기의 부활을 위해 이만기의 분발을 촉구하기 시작했다. 이제 막 오른 최고의 씨르머의 자리에서 씨름의 인기를 저해하는 힘만 쎈 씨르머로 전락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결국 이만기가 이후 대회에서 이봉걸을 꺾고 백두장사, 이봉걸을 꺾고 올라온 고경철을 제압하고 천하장사에 오르면서 다시 이만기에, 이만기에 의한, 이만기를 위한 모래판이 완성되었다.
이봉걸은 그대로 주저 않진 않았다. 10월 24일 벌어진 장사씨름대회에서 백두장사에 등극(이만기 초반탈락)해 다시금 천하장사의 복귀를 꿈꿨으나 그 자리는 이만기, 이봉걸도 아닌 86년 6월 이후 한번도 우승하지 못해 선수로서는 끝났다는 선고를 받은 이준희의 것이었다. 이준희는 결승에서 이봉걸에게 3-0으로 승리했다. 8강에서 이만기에게 승리한 이봉걸은 '이만기에만 대비한 연습만 하다 보니 조땠다'는 나름의 분석을 내놓았고 꿈에 그리던 세 번째 천하장사의 자리에 오른 이준희는 최고의 자리에서 떠나겠다며 은퇴를 발표, 공식적인 3이(李)시대의 종식을 선고했다. 곧이어 언론과 팬들은 이준희와 동갑내기인 이봉걸의 은퇴를 논하기 시작했다.
누님들을 사로잡는 치명적인 매력
하지만 이준희가 빠진 후 이봉걸과 이만기와의 2강 구도는 더욱 흥미로워졌다. 87년 11월 민속씨름위원회는 선수 별 승률을 조사해 발표했다. 1위는 86%라는 경이적인 승률의 이만기가, 2위는 은퇴를 발표한 76%의 이준희, 3위는 68%의 이봉걸이었다. 재미있는 건 이만기의 선수 별 승률이었다. 이만기는 모든 선수들을 상대로 80%이상의 승률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유독 이봉걸에게만 66%(14승 7패)였다. 이준희 은퇴 뒤 벌어진 제32회 체급별 장사씨름대회에서의 가장 흥미로운 한판은 이만기와 이봉걸이 맞붙은 8강이었고, 이봉걸에게 2-0으로 승리한 이만기는 오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둘의 승부는 여전히 뜨거웠고 그 둘의 승부를 다룬 씨름 다큐 '승부'가 구정특집프로로 제작, 방영되었다.
1988년. 이봉걸은 이만기와 같은 연봉 5천을 요구했으나 3천 5백에서 5백이 오른 4천에 싸인 했다. 시작이 좋지 않았다. 2월에 열린 88통일천하장사씨름대회 결승에서 이만기와 붙은 이봉걸은 샅바싸움에서의 신경전 탓에 3-1로 진 뒤 악수도 않고 모래판을 떠나 구설수에 오르기 시작했고, 철저한 두뇌플레이를 선보였다며 언론의 찬사의 주인공이 된 이만기는 이 경기에서의 승리로 10번째 천하장사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두 달 뒤 이봉걸은 연습 중 오른쪽 무릎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입게 된다.
이준희도 이봉걸도 없이 치러진 제33회장사씨름대회(4월18일)서는 승부조작설이 등장한다. 이만기와 같은 팀 동료 고경철이 붙은 백두급 준결승에서 이만기가 첫째 판과, 셋째 판을 모두 10초 이내 무기력하게 내주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과가 고경철의 실력 때문이었는지, 이만기의 컨디션 난조 때문이었는지, 고의였는지, 아님 이준희도, 이봉걸도 없는 무기력 때문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 게임 이전의 이만기와 고경철의 전적은 12-1로 이만기의 절대우세였다.
이봉걸의 복귀가 늦어지자 이봉걸의 선수생활이 끝났다는 언론의 보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많고(31세), 훈련부족으로 인한 체중 증가, 팀 동료 김성우와의 연습경기에서 얻은 오른쪽 무릎 부상이 상당히 심각하다는 이유에서였다. 11월이 돼서야 연습을 시작한 이봉걸은 89년 1월 통일천하장사씨름대회에서 준결승에 올라 이만기에게 2-0으로 패했으나 나름의 성공적인 복귀 전을 치렀다.
하지만 서서히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이어지는 대회에서 32강전에서 이승삼에게, 8강전에서 임용제에게, 준결승에서 이만기에게 패배함으로써 연이어 이봉걸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대부분 이쯤에서 이봉걸의 선수생활을 끝난 것으로 확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이라 생각하지 않은 유일한 이, 바로 이봉걸 자신이었다. 동시에 이봉걸의 공백을 틈타 이제 막 업글을 마친 새로운 고급 비호감유닛이 모래판 출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준결승에서 이봉걸이 이만기에 패배한 두 달 뒤 이만기의 마산상고 직속 8년 후배 강호동이 모래판에 등장한 것이다.
행님아~ 준비됐데이~
1989년 7월 10일 강호동은 제44회전국장사씨름대회에 4강전에서 이만기를 꺾고, 결승에선 임용제를 이겨 최연소(18세) 백두장사에 등극했다. 두 손을 번쩍 치켜든 강호동의 등뒤로 멀찌감치 보이는 코치는 바로 1년 전 모래판을 떠난 나이 많은 누님들의 로망 이준희였다. 언론은 일제히 겁 없고 맹랑한 10대의 등장을 타전했다. 다음 대회인 제45회장사씨름대회를 알리는 헤드라인은 '이만기 수성(守城)이냐 강호동 입성(入城)이냐'였다. 하지만 승리의 깃발을 꽂은 이는 다름아닌 이봉걸이었다. 이봉걸은 8강에서 이만기를 2-0으로 제압, 결승에선 모래판의 개구쟁이 강호동에게 기권 승(샅바를 놓았다는 이유로 2차례 경고, 이에 불만을 보이고 퇴장. 주심의 판정실수로 경고를 주의로 완화했으나 강호동이 들어오지 않음)을 거둬 백두장사 타이틀을 획득한다.
이봉걸은 다음 대회 결승에서 김칠규에게 패하지만 준결승에선 강호동에게 2-1로 승리해 강호동의 천적임을 만천하에 확인시켰다. 하지만 이만기는 유독 강호동에게 약했다. 이번 대회에서도 이만기는 강호동에게 예선에서 패배했다. 오죽하면 이만기가 속한 현대는 전 대회에서의 강호동의 퇴장을 이유 삼아 강호동의 참가를 막기 위해 팀이 한때 철수하는 오합지졸틱한 강수를 두기도 했다. 그만큼 강호동은 이만기에게 유독 레알 강했다.
하지만 언론은 예선 탈락한 이만기에 대해 몰락을 제기하면서도 동시에 이봉걸의 승리를 단순한 체력적 우위로만 치부했다. 이만기는 강호동에게 당한 연이은 패배와 처음 맞닥뜨린 몰락, 은퇴설에 대한 심경변화로 10일간 훈련에 불참했다. 서서히 비호감 악동 캐릭터를 갖춰나가던 강호동은 기상 후, 취침 전 1시간씩 명상과 반성의 시간을 갖는 감독(김용학)의 스페셜 매너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가기 시작했고, 늘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와 시선에 길들여져 있던 이봉걸은 끊임없이 제기되는 은퇴설을 무시하고 32세가 되는 다음해에도 선수생활을 하기로 결정한다.
1990년 첫 대회인 통일천하장사씨름대회 준결승. 이봉걸은 이만기와 맞붙어 2-0으로 패하긴 했으나 여전함을 보여주었고, 강호동은 16강에서 탈락, 차세대 스타라는 닉 뒤에 살짝 의문부호가 붙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대회에서 강호동이 이만기에게 3-1로 승리하고 백두장사에 오르면서 의문부호를 스스로 삭제했다. 이렇게 슬슬 2이(李) 1강姜 시대에 뽐뿌를 받을 때쯤인 4월 14일. 이봉걸은 급작스럽게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지난해 입은 부상이 재발해 수술을 한 터였고, 더 이상 자신의 스타일을 존중해주지 않은 코칭스탭과의 불화가 수면위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의 은퇴를 만류하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만기의 스토리에 이봉걸이 필요했듯, 강호동의 스토리에도 이봉걸(강호동에게 4전 전승)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봉걸은 돌아오지 않았고, 이봉걸이 없는 강호동은 다음 대회인 49회장사씨름대회에서도 황대웅을 꺾고 우승한다.
'한(恨)을 풀지 못하고 모래판을 떠납니다.'
265전 187승 78패, 1억 4천8백50만원의 상금, 천하장사 2회, 백두장사 4회에 빛나는 장사중의 장사였던 그의 은퇴 소감은 슈퍼 씨르머답지 않게 처절했다. 은퇴식 내내 어두운 표정이었다. 게다가 부친이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하나도 즐겁지 않다.
1990년 8월 17일 천하장사대회에서 한 맺힌, 길기 않은 소감을 끝으로 이봉걸은 선수로서 모래판을 떠났다. 그가 떠나고 없는 그 모래판에서는 강호동이 남동하는 3-1로 누르고 천하장사자리에 오른다. 이만기는 16강에서 탈락했고, 최종 8강에 오른 선수는 감호동, 남동하, 김칠규, 심인섭, 임종구등 2세대 선수 뿐이었다. 본격적인 세대교체의 시작이었다.
이봉걸의 은퇴 후, 그리고 근황. 그의 삶은 계속된다. 끝나지 않은 이봉걸의 이야기를 무규칙 이종매거진 [더 딴지] 3호에서 확인하시라 |
너클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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