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이상국후집 서
●동국이상국후집 서
맏아들 함(涵)은 삼가 말씀드립니다. 대인(大人)께서 평생에 저술하신 글이 퍽 많았으나 본래부터
글을 모아 두지 않으셨고, 또 타인의 손에 넘어갔다가 돌아오지 않았거나 혹은 불에 태워 버리신
것들도 있어서 전집(前集)에 ‘원고를 태운다’는 시가 있다. 현존하는 것은 오직 열에 두셋 밖에
되지 않으므로 이들을 편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대저 대인께서 몸소 찾으셨던 유자(儒者)의 집이나 사찰, 또는 평소에 교유하셨던 사대부(士大夫)
들을 두루 찾아 수집한 약간의 시문(詩文)을 41권으로 나누어 전집(前集)으로 만들고 시랑(侍郞)
이수(李需)가 서(序)를 지었습니다.
전집이 이루어진 후 다시 빠졌던 것과 최근에 지으신 고율시(古律詩) 8백 7수와 잡문(雜文) 50편
으로 후집(後集) 12권을 만들었습니다.
아, 혹시 불행하게 세상에 전해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집안의 자손들이 대대로 전할 가보는
됩니다.
대인께서 처음 과거에 급제하시고 일찍이 네댓 명의 동년(同年 동방 급제를 말한다)들과 함께
통제원(通濟院)에 노시면서 말안장을 나란히 하고 서로 화창하셨는데, 그때에 읊으신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습니다.
절름대는 당나귀 그림자 속에 푸른 산은 저물고 / 蹇驢影裏碧山晩
외기러기 소리에 단풍 지는 가을일레 / 斷鴈聲中紅樹秋
사운(四韻)에서 세 구는 잊어 버렸다.
듣건대, 이 시구가 송 나라로 전해지자 그곳의 재상이 크게 칭찬을 했다고 합니다.
이 시는 대인께서 젊은 시절에 지으신 것이요, 또 겨우 한 시구에 불과하건만 이렇듯 높이 평가
되었는데, 하물며 그들이 전집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높이 평했겠습니까?
또 ‘금 학사(琴學士)를 대신하여 지은 양관표(讓官表)’에서는,
“전에 두 학사를 겸임하였을 적에도 분수에 넘친다고 비난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오늘에는 세
대부(大夫)를 겸했으니, 장차 어진이를 어디에 두려고 하십니까?”
하였는데, 이 글도 사람들에게 애송되었으나 여기 전부를 수록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깁니다.
이렇게 볼 때에 잃어버리고 빠뜨림으로써 우리가 보지 못하게 된 주옥 같은 글들이 이것들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신축년 12월 지홍주사부사 겸 권농사 관구학사 장사랑 상식봉어(知洪州事副使兼勸農使管句學事將
仕郞尙食奉御) 함(涵)은 삼가 서합니다.
東國李相國後集序[李涵]
嗣子涵謹言。大人平生所著多矣。然本不收蓄。又爲人取去不還。或焚棄之。前集有焚蒿詩。僅存十之
二三。故難於編綴。凡大人所嘗遊踐儒家釋院及交游士大夫間。無不搜覓。得詩文凡若干首。分爲四十
一卷。編成前集。侍郞李需序之。集成之後。又得遺逸及近所著古律詩八百四十七首雜文五十首。成後
集十二卷。噫。脫不幸不傳于世。亦足爲一門子姓傳家之寶矣。大人初登第時。嘗與四五同年。將遊通
濟院。聯鞍唱和。公詩一句云。蹇驢影裏碧山晚。斷鴈聲中紅樹秋。四韻失三句。聞此詩流入于宋。大
爲其宰相所賞。此少年時所賦特一首耳。其賞如此。况得見全集乎。又代琴學士讓官表云。昔也帶雙學
士。有譏越分者幾人。今則兼三大夫。將復置賢於何地。此亦人所愛誦。而皆不得全篇以附于此。是一
恨也。由此觀之。其遺珠漏玉之不見者。非止此而已矣。時辛丑十二月日。知洪州事副使兼勸農使管句
學事將仕郞尙食奉御涵。謹序。
동국이상국후집 제1권
●고율시(古律詩) 1백 5수
목차
醉西施芍藥
松花
江南逢故人
竹笋
寓天磨山有作
山夕詠井中月
尋觀靜寺
送之上人還山乞詩
違心詩戱作
贈希禪師
代農夫吟
花酒
路傍二詠
折花吟
七月十三日。與全,朴兩君夜飮甥壻鄭柔家。翫月聯句。
是日。次韻全君有作。兼贈朴君。
論詩
借名勤酒
謙上人觀虛軒
詩樂
酒樂
慰高生下第
謝友人携榼見訪
嚴子陵
林秀才求金錢花移栽
酒旆
暮春病起
二誡詩贈友人
路上棄兒
江上月夜。望客舟。
聞批職僧犯戒被刑。以詩戱之。
嘲李道士
與友人飮。有僧乞詩。
代別美人
頒赦日偶吟
訪嚴師
元日朝會。退來有感。
雪中訪金大年留飮
苦寒
元日戱作
過故奇相國林泉
病後飮席贈妓
次韻全履之遊安和寺
示諸子
續夢中作
初帶犀作
七月三日詠風
詠菊
再遊興聖寺書壁
走筆謝大王寺文師送炭
冬夜山寺小酌
飮席示小妓
乙酉年監試考閱次有作
聞國令禁農餉淸酒白飯
後數日有作
奴逋
寓河陰客舍西廊有作
蟬
癸巳六月日喜兒子涵拜翰林
草堂卽事
老憶舊友
次韻崔學士 和舊詩見訪
左耳稍聾
憶舊京三詠
李大司成百順兩年門生等。設筵慰座主致政。幷邀公之舍弟學士百全。予亦參赴。醉後走筆。
示座上云。
夢與燈明裕首座論懷。適有來人。以詩寄之。
省酒
睡次疾蠅
新穀行
聞汁酒聲
漫成
詩癖
兒子涵編予詩文。因題其上。
病中
又病中疾蠅
又齒痛
有乞退心有作
老妓
老將
鼠狂
諭犬
九月二十七日。夢削靑竹作筆管。不知其數。是何祥耶。以詩記之。
次韻田祭酒
詠雪
○취한 서시(西施) 같은 작약(芍藥)
어여쁘다 무르익은 교태로 온갖 아양 떠는 모습 / 好箇嬌饒百媚姿
사람들은 취기 어린 서시라 하네 / 人言此是醉西施
이슬에 쓰러진 꽃봉오리 바람 타고 치솟는 품이 / 露葩欹倒風擡擧
오궁의 취한 서시 춤을 추는 듯 / 恰似吳宮起舞時
[주C-001]서시(西施) : 춘추 시대 월(越) 나라의 미녀였는데, 월왕 구천(越王句踐)이 적이었던
오왕 부차(吳王夫差)를 고혹시키기 위하여 오 나라로 보냈다. 《吳越春秋 句踐陰謀外傳》
○송화(松花)
소나무도 봄빛은 저버리지 않으려고 / 松公猶不負春芳
억지로 담황색의 꽃을 피웠네 / 强自敷花色淡黃
우습다 곧은 마음도 때로는 흔들려서 / 堪笑貞心時或撓
황금 가루로 사람 위해 단장하는가 / 却將金粉爲人粧
○강남(江南)에서 옛 친구를 만나
가는 곳마다 새 벗을 만나기는 쉬우나 / 到處得逢新進易
타향에서 옛 친구 만나기는 어렵네 / 異鄕相見故人難
헤어진 후 백발이 얼마나 성성했는가 / 別來多少添華皓
서로 흰 수염을 자세히 들여다보네 / 各將霜鬚仔細看
○죽순(竹筍)
네 분명 하늘을 치솟을 뜻 있을 텐데 / 問渠端有干霄意
어째서 담 틈바구니 가로질러 돋아났나 / 何事橫穿壁罅生
한시 바삐 백 척 높이 대나무로 자라서 / 速削琅玕高百尺
삶아 먹으려는 탐욕에서 벗어나려 함이리 / 免敎饞客日求烹
○천마산(天磨山)에 우거하면서 짓다. 나는 신해년(1191)에 천마산에 오래 우거하여 스스로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칭했는데 이때 이 시를 지었다.(予辛亥年。久寄此山。至自稱白雲居士。
時有此作。)
사람들은 다만 산이 높고 가파른 것으로 / 世人但取山崔嵬
천마산이라 이름 지었네 / 迺以天磨而號之
네 비록 높고 높아 천만 길인들 / 爾雖高高千萬仞
하늘을 만질 수 있으랴 의가 마땅치 않네 / 天可磨耶義不宜
옛날에 여와씨(女媧氏)가 오색 돌을 빚어 / 媧皇五色石
무너진 하늘을 보수했으니 / 鍊之補天虧
무너진 하늘을 보수할 수는 있으나 / 天虧尙可補
어찌 산과 하늘이 맞닿을 수 있으랴 / 豈肯相磨爲
하늘 아래 산 있음을 왜 은둔의 상이라 했을까 / 天下有山豈遁象
둔암이라 고친들 무슨 잘못이랴 했네 / 改曰遁嵓何所疑
내 이제 은둔함이 이 또한 늦었으니 / 我今來遁是亦晩
두 음효(陰爻) 자라남을 이제야 알겠노라 / 二陰寢長今方知
[주D-001]여와씨(女媧氏)가……보수했으니 : 여와씨는 상고 시대 제왕의 이름.
그는 일찍이 공공씨(共工氏)가 축융(祝融)과 싸우다가 부러뜨린 천주(天柱)를 오색돌로
보수했다 한다. 《補史記 三皇本紀》
[주D-002]하늘 아래……은둔의 상 : 둔(遁)은 돈(遯)과 통하는데 《주역》의 돈괘(遯卦)는 천상
(天象)인 건괘(乾卦)가 위에 있고 산상(山象)인 간괘(艮卦)가 아래에 있으니, 이는 소인
의 상징인 음효(陰爻) 두 효가 밑에서 자라고 있어 세상이 어지러울 징조이므로 군자는
이 괘를 만나면 은둔하여야 한다 하였으므로 산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처지를 말한
것이다.
○산에서 밤을 보내며 우물 속의 달을 읊다 2수
이끼 덮인 암벽 모퉁이 맑은 우물 속에 / 漣漪碧井碧嵓隈
방금 뜬 어여쁜 달이 바로 비추네 / 新月娟娟正印來
길어 담은 물병 속에 반쪽 달이 반짝이니 / 汲去甁中猶半影
둥근 달을 반쪽만 가지고 돌아올까 두렵고야 / 恐將金鏡半分廻
산사(山寺)의 중이 맑은 달빛 탐내어 / 山僧貪月色
물과 함께 한 항아리 담뿍 떠갔으나 / 幷汲一甁中
절에 가면 의당 알게 되리라 / 到寺方應覺
항아리 물을 쏟고 나면 달빛 또한 비게 됨을 / 甁傾月亦空
○관정사(觀靜寺)를 찾아
나는 새의 그림자 맑은 못 속에 떨어지고 / 飛禽影落澄潭底
돌아가는 말 울음소리 숲 사이에 시끄럽네 / 歸馬聲喧綠樹間
앞산만 넘어서면 절이려니 했더니 / 過却前山疑有寺
앞산을 넘어서자 또 앞산일세 / 前山過了又前山
○지상인(之上人)이 산으로 돌아가며 시를 청하기에
빼어난 강산은 그대를 불러 가고 / 江山淸勝招君去
고요한 넓은 천지 내멋대로 놀게 하네 / 天地寬閑放我嬉
그대는 진공(眞空)을 관조(觀照)하느라 좌선하고 있을 텐데 / 想爾觀空方黙坐
이때 나는 술 취하여 곤드레 만드레 되었으리 / 是予顚倒醉狂時
○뜻과 어긋남을 농삼아 읊다
인간의 세사는 고르지 못하기에 / 人間細事亦參差
모든 일 뜻과 어긋나 맞지 않는다 / 動輒違心莫適宜
젊어서는 가난하여 처에게도 멸시 받고 / 盛歲家貧妻尙侮
노경에는 녹 많으니 기생까지 따르네 / 殘年祿厚妓將追
외출할 때는 끝없이 비가 오고 / 雨霪多是出遊日
한가로이 있을 땐 날씨도 맑더라 / 天霽皆吾閑坐時
배 불러 그만 먹으려 하면 양고기 나오고 / 腹飽輟飧逢羔肉
목 아파 못 마실 땐 술 많이 생기더라 / 喉瘡忌飮遇深巵
보물을 싸게 팔자 시세 오르고 / 儲珍賤售市高價
묵은 병 고치니 명의(名醫)가 이웃에 나타나네 / 宿疾方痊隣有醫
사소한 것조차 어긋남이 이렇거늘 / 碎小不諧猶類此
양주에 학 타기를 어찌 바라랴 / 揚州駕鶴況堪期
[주D-001]양주(揚州)에 학 타기 : 모든 욕망이 골고루 이뤄짐을 말한다. 소식(蘇軾)의 녹균헌시
(綠筠軒詩)에 “세상에 어찌 양주 학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 주(註)에 옛날 객들이
각각 자기 욕망을 말하는데 혹은 양주 자사(揚州刺史)가 되기를 원하고 혹은 재물이
많기를 원했으며 혹은 학을 타고 하늘에 오를 것을 원하였다. 이때 한 사람은 “허리에
10만 관의 황금을 차고서 학을 타고 양주 상공을 날았으면 한다.” 하였다.
○희 선사(希禪師)에게 주다
서로 만나 미처 문안 인사 하기도 전에 / 相逢未及問寒溫
미치광이 옛 버릇이 그대로라 껄껄대네 / 笑道狂奴舊態存
내가 전에 선사의 처소인 천수방장(天壽方丈)에서 노상 취하고 광태를 부렸으므로 이제 다시 나를
보고 농을 하였다.(予於天壽方丈。常醉狂。師今戱之。)
작별한 후 오 년간 스님을 무척 그리워했으니 / 一別五年無限思
흰 눈같이 무성한 살쩍을 보아 주시요 / 請看雙鬢雪初繁
○농부를 대신하여 2수
비 맞으며 논바닥에 엎드려 김매니 / 帶雨鋤禾伏畝中
흙투성이 험한 꼴이 어찌 사람 모습이랴만 / 形容醜黑豈人容
왕손 공자들아 나를 멸시 말라 / 王孫公子休輕侮
그대들의 부귀영화 농부로부터 나오나니 / 富貴豪奢出自儂
햇곡식은 푸릇푸릇 논밭에서 자라는데 / 新穀靑靑猶在畝
아전들 벌써부터 조세 거둔다고 성화네 / 縣胥官吏已徵租
힘써 농사지어 부국케함 우리들 농부거늘 / 力耕富國關吾輩
어째서 이리도 극성스레 침탈하는가 / 何苦相侵剝及膚
○꽃술[花酒]
술은 시흥을 돋우는 날개이고 / 酒爲詩羽翼
꽃은 아름다운 기녀의 정신인데 / 花是妓精神
오늘 다행히 두 가지 모두 만났으니 / 今日幸雙値
귀인처럼 하늘에 오르리라 / 升天同貴人
○길가에서 두 수를 읊다
큰 나무(大樹)
무더위에는 휴식하기 좋으며 / 好是炎天憩
소낙비 피하기에도 좋네 / 宜於急雨遮
시원한 그늘 한 일산만하니 / 淸陰一傘許
혜택이 또한 많구나 / 爲貺亦云多
시원한 샘물(寒泉)
오가는 행인들 더위에 허덕일 제 / 南北行人暍
시원한 샘물 길가에 있네 / 寒漿當路傍
조그만 샘물이 온 나라를 윤택하게 하니 / 勺泉能潤國
두 번 절한 다음에야 마실 만하네 / 再拜迺堪嘗
○절화음(折花吟)
꽃가지 꺾어 술잔을 헤었더니 / 折得花枝作酒籌
꽃가지는 남았는데 사람은 이미 취했네 / 花枝未盡人先醉
그대여 꽃송이 많은 가지 그냥 남겨 두게나 / 請君留却最繁叢
주객들 내일 다시 오면 그 어찌 안 되겠는가 / 客惡何妨明日至
그때는 기필코 꽃가지 가득히 꽂고 마냥 즐기리니 / 必須滿揷窮歡遊
그래야 봄을 보냄에 서운함이 없으리라 / 然後送春無歉意
꽃에게 묻노니 그대 또한 즐길진대 / 爲問花心亦肯無
기약을 저버리고 경솔히 떨어지지 말지어다 / 愼勿負期輕墮地
그대는 귀인들 동산의 봄꽃 몹시 아끼는 것 보지 못했는가 / 君不見貴人園苑惜花深
모진 비바람에 뒹구는 것 차마 보지 못하겠네 / 雨惡風顚那忍視
○칠월 십삼일 전군(全君)ㆍ박군(朴君)과 함께 생질서(甥姪壻) 정유(鄭柔)의 집에서 밤에 술을
마시고 달구경하면서 연구(聯句)를 짓다
뜻밖에 이밤에 만났으니 / 不期逢此夕
굳이 중추월을 기다릴 것 있겠나 전군 / 何必待中秋
오늘밤의 저 달이 둥글지는 못해도 / 未滿今宵鏡
간밤의 굽었던 탈 벗었다오 이규보 / 全伸昨夜鉤
혜성도 놀라 이미 자취 감추었고 / 慧星驚已滅
엷은 안개도 기꺼운 듯 걷혔네 박군 / 纖靄喜初收
까치는 소스라쳐 나무에서 날고 / 驚起鵲飛樹
시인은 누각에 몸을 기대네 정유 / 朗吟人倚樓
창문 있으니 대낮처럼 환하고 / 有窓渾似晝
틈 없으니 그윽함을 이루더라 이 / 無隙得成幽
구름이 지날 때엔 달도 함께 달리는 듯 / 雲駛疑同騖
하늘이 맑을 적엔 달도 함께 흐르는 듯 이 / 天澄似共流
둥근 달은 보노라면 붙들고 싶고 / 素輪看欲挽
맑은 그림자 잡으려다 중지하네 박 / 淸景掬還休
오랫동안 구경하니 술잔 자주 기울이고 / 賞久盃頻倒
읊조리는 소리 높아 자주 붓을 드네 전 / 哦高筆屢抽
모퉁이에서 맞으니 달빛이 가리우고 / 逢陬輝易碎
한가운데 서니 그림자 오래 머무네 정 / 當午影應留
오작교(烏鵲橋) 빌려 월궁으로 들어가서 / 想借銀橋入
옥도끼로 계수나무 다듬고 싶지만 이 / 期將玉斧修
저 높은 계수나무 그 누가 꺾으며 / 桂高誰可折
항아(姮娥)가 감춘 약 훔치기 어려우리 이 / 藥秘不容偸
달 읊는 시인 흥취 천고가 동일하며 / 賦詠同千古
아름다운 빛 온 천하 함께하네 정 / 嬋姸共九州
한유(韓愈)의 농적 금하기 어려우며 / 難禁韓隴笛
섬계에 배 띄울 만하네전 / 堪棹剡溪舟
반딧불은 찾아볼 수 없는데 / 螢焰無由見
귀뚜라미소리 못내 시름겹네 박 / 蛩聲不耐愁
술 마시는 규칙 따라 부지런히 마실 뿐 / 但勤行酒令
몇 잔째인지 물을 것 없네 이 / 不用問更籌
팔월 대보름 밤에 / 八月三五夜
다시 만나 마실 수 없겠나 이 / 重來肯許否
[주D-001]한유(韓愈)의 농적(隴笛) : 농적은 농서 지방의 젓대 소리를 말한다. 한유의 화최사인영
월시(和崔舍人詠月詩)에 “고을의 누대 어느 곳을 바라볼까 농서의 젓대 소리 이때에
듣네[郡樓何處望 隴笛此時聽]” 하였다.
[주D-002]섬계(剡溪)에……만하네 : 섬계는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물이름인데 진(晉) 나라
왕 휘지(王徽之)는 눈 내리는 밤 친구인 대규(戴逵)를 찾아 섬계에 배를 띄우고 노를
저었었다.
○이날 전군의 시에 차운하여 읊고 박군에게 주다
굳고 강한 금이나 쇠는 녹을 때 있지만 / 堅金硬鐵有時融
그대들과 우정은 언제나 한결같으리 / 君我交情萬古同
세 사람은 이미 머리와 배와 꼬리를 이뤘으니 / 三友已成頭腹尾
생사고락을 한몸처럼 하리라 / 死生憂樂一身中
○시를 논하다
시 짓기가 무엇보다 어려우니 / 作詩尤所難
말과 뜻이 함께 아름다워야 하네 / 語意得雙美
함축된 뜻이 참으로 깊어야 / 含蓄意苟深
음미할수록 더욱 맛이 참되네 / 咀嚼味愈粹
뜻은 있으나 말이 원숙하지 못하면 / 意立語不圓
난삽하여 바른 뜻을 펴지 못한다오 / 澁莫行其意
이 중에 중요하지 아니한 것은 / 就中所可後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일세 / 雕刻華艶耳
아름다운 문장을 굳이 배제하랴 / 華艶豈必排
이것 또한 많은 정신 써야 한다네 / 頗亦費精思
꽃만을 잡고 열매를 버리니 / 攬華遺其實
이 때문에 시의 본지 잃게 되느니 / 所以失詩旨
근래의 시 짓는 무리들은 / 邇來作者輩
풍아의 깊은 뜻을 저버리고 / 不思風雅義
외식으로 단청만을 빌려 / 外飾假丹靑
한때의 기호에 맞추고자 하네 / 求中一時嗜
뜻은 본래 자연에서 나오는 것 / 意本得於天
쉽게 이뤄지기 어렵네 / 難可率爾致
스스로 어려운 줄 알고는 / 自揣得之難
인하여 겉만을 꾸며 / 因之事綺靡
이것으로 여러 사람의 눈을 현혹시켜 / 以此眩諸人
깊은 뜻이 없음을 엄폐하려 하네 / 欲掩意所匱
이러한 풍속이 점점 이루어져 / 此俗寖已成
사문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네 / 斯文垂墮地
이백(李白)과 두보(杜甫)가 다시 나오지 않으니 / 李杜不復生
누구와 함께 진위를 분별하리 / 誰與辨眞僞
나는 허물어진 터를 다시 쌓으려 하는데 / 我欲築頹基
누구 하나 조그만 힘도 도와주지 않네 / 無人助一簣
시경 삼백 편을 왼들 / 誦詩三百篇
어느 곳에 풍자하여 보익(補益)하리 / 何處補諷刺
나만이 하는 것은 가하겠지만 / 自行亦云可
남들은 반드시 비웃으리 / 孤唱人必戲
○이름을 빌려 술을 권하다
시천자를 끌어들이기 위하여 / 爲引詩天子
바야흐로 주성인을 잔질한다오 / 方斟酒聖人
화왕은 웃으며 술을 권하고 / 花王含笑勸
앵우는 요란하게 노래 부르네 / 鸎友唱歌頻
전형이 있으니 술값 갚아 주겠고 / 還値錢兄在
등비 있으니 늦도록 불 밝혀 주리 / 留歡燈婢親
돌아가는 길에는 죽군이 부축하고 / 竹君扶路返
월아는 환하게 길 비춰 주리 / 秉燭月娥新
[주C-001]이름을……권하다 : 이 시는 사람의 칭호를 빌려, 시를 시천자(詩天子), 술을 주성인
(酒聖人), 모란꽃을 화왕(花王), 꾀꼬리를 앵우(鶯友), 돈을 전형(錢兄), 등불을 등비
(燈婢), 대 지팡이를 죽군(竹君), 달을 월아(月娥)라 하였다.
○겸상인(謙上人)의 관허헌(觀虛軒)
물체가 있으면 보이지만 / 礙則有所見
텅 비면 다시 무엇을 보랴 / 虛則復何觀
내 이 관헌의 명을 처음 보고는 / 我初觀軒銘
뜻에 조금 잘못되었다 했네 / 於意謂未安
대사에게 명명한 이유 물었더니 / 詰師所以名
이 명칭 바꿀 수 없다 하네 / 此名不可刪
산하도 본래는 형상이 없으니 / 山河本無形
시초의 근원은 알 수 없네 / 未識初造端
진실로 근본을 따른다면 / 苟能循其本
다시 공으로 돌아오리 / 復於空可還
공은 본래 천지를 합한 것인데 / 空本合天地
나누어져 천지가 되었다오 / 剖判迺爲間
이제 다시 실상을 볼진대 / 還以實相觀
천지는 곧 하나이니 / 天地卽一般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본다면 / 心觀不以目
넓고 좁음을 따질 것 없네 / 何廓亦何關
오묘한 이치 홀로만이 아니 / 妙一所獨知
범안(凡眼)으로는 알 수 없네 / 凡觀安可干
○시악(詩樂) 樂은 음악(音樂)의 악(樂)으로 읽는다.
시 짓는 자리에서 서로 창하며 패옥소리 울리니 / 詩筵賡唱玉交鳴
음악 연주보다 훨씬 낫구나 / 大勝金絲迭奏聲
세속 사람들은 참 낙을 모르고 / 世俗不知眞樂在
한갓 달을 읊는 서생들이라 칭하겠지 / 徒稱嘯月冷書生
○주악(酒樂)
손뼉을 치고 어깨를 흔들며 넓적다리를 두들기니 / 手拍肩搖拊髀多
뛰면 춤이 되고 소리치면 노래 되네 / 跳成舞節叫成歌
이 몸에는 천연(天然)의 즐거움이 있으니 / 此身自有天生樂
남에게 생황이나 퉁소를 청할 것 없네 / 不用笙簫更倩他
○낙방한 고생(高生)을 위로하다
시험장에서의 득실은 바둑과 같으니 / 文場得失正如碁
한 번 실패한들 대승할 날 어이 없으랴 / 一敗寧無大勝時
월아가 계수나무 다 주었다고 걱정 말게나 / 莫訝月娥分桂盡
자네에게 줄 가지 명년엔 없겠나 / 明年那欠贈君枝
[주D-001]월아(月娥)가……걱정 말게나 : 월아는 월궁(月宮)의 선녀 상아(嫦娥). 계수나무는 달
속에 있는 계수나무를 말한다. 옛날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절계(折桂)라 하고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명부를 계적(桂籍)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금년에는 과거에 떨어졌지만
명년에는 월아가 계지(桂枝)를 꺾어서 그대를 줄 것이므로 과거에 급제하겠다는 말.
○벗이 술통을 들고 찾아와 감사하여
펴고 찡그리는 이맛살 전부가 술에 달렸고 / 眉展眉嚬全係酒
반기고 냉대하는 눈초리 모두 사람에 달렸네 / 眼靑眼白摠由人
이제 자네가 술통 들고 나를 찾아 오니 / 蒙君挈榼來相訪
나의 눈초리 반가워하고 이맛살도 펴졌다오 / 眼已廻靑眉破嚬
○엄자릉(嚴子陵)
옛 친구 높은 하늘에 올라 / 故人飛上九霄重
옛 친구 하늘에서 용이 되었네 한 것도 있다.(一作故人天上化爲龍。)
불러다가 금중(禁中)에서 함께 잠잤다오 / 喚與同眠禁密中
하나의 미치광이 옛 버릇 그대로라 / 一箇狂奴猶舊態
어찌하여 현묘한 성상(星象)이 하늘을 움직였는가 / 如何玄象動蒼穹
[주C-001]엄자릉(嚴子陵) : 자릉(子陵)은 동한(東漢)의 고사(高士)였던 엄광(嚴光)의 자(字).
그는 일찍이 광무황제(光武皇帝)인 유수(劉秀)와 함께 유학(遊學)했었는데, 광무가 황제
가 되자 그는 변성명을 하고 나타나지 않았다. 광무는 백방으로 찾아서 데려다가 대우를
잘하였으나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말을 함부로 하니, 광무는 웃으면서 “미치광이 옛
버릇 그대로구나." 하였다. 한 번은 궁중에서 함께 잠을 자는데 광무의 배에 다리를
올려놓았다. 아침에 태사(太史)가 “어젯밤 천상(天象)을 관찰해보니 객성(客星)이 어좌
(御座)를 범했습니다.” 하니 광무는 웃으며 “내가 옛 친구 엄자릉과 함께 잤다.”
하였다. 그는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둔하였다.
《後漢書 卷83 嚴光傳》
○임수재(林秀才)가 금전화(金錢花) 옮겨 심기를 바람
황금으로 둥근 돈 만들어 이 꽃을 피웠으니 / 金剪圓錢發此花
하늘의 조화 어이 이리 훌륭한가 / 天工用意一何多
네 이름 가난한 내 집에 맞지 않으니 / 爾名未合生吾宅
어서 부귀한 집으로 가거라 / 好去人間富貴家
○주막의 깃발 2수
봄바람이 주막의 푸른 깃발 날리니 / 春風斜拂酒旗靑
멀리서 한번 보매 컬컬한 목 축여지는 듯 / 一望猶寬渴飮情
무뢰한 수양버들 요란히 흔들리어 / 無賴垂楊搖眩綠
시흥 어린 눈으로 뚜렷이 보지 못하게 하네 / 不敎詩眼見分明
오직 백만 전을 가지고 술을 마실 뿐 / 但將百萬錢相擲
술집의 푸른 깃발 보이든 말든 물을 것 없네 / 豈問靑帘得見不
하늘의 주기성(酒旗星)도 유성(柳星) 곁에 있으니 / 天上酒旗猶傍柳
푸른 버들과 서로 어울림 또한 풍류라오 / 綠楊相映亦風流
○늦은 봄에 앓다가 일어나다 2수
숲에 처음 나타난 꾀꼬리는 신부인 듯 / 林鸎初至如新婦
제집으로 돌아온 제비는 흡사 옛 친구 같네 / 巢燕重來似故人
풍경이 점점 아름다워 보기 좋은데 / 景物漸佳堪翫惜
병중에 꽃핀 봄철 헛되이 보냈노라 / 病中虛度百花春
병들어 백화 난만했던 봄을 헛되이 보내고 / 病中虛度百花紅
일어나 보니 꿈 깬 듯 허전하네 / 病起方驚一夢空
아직도 장미꽃 몇 송이 피어 있어 / 堆有薔薇餘數萼
귀여운 미소로 노쇠한 나를 달래누나 / 尙能嬌笑慰衰翁
○두 가지 경계로 시를 지어 벗에게 주다
연 나라가 연 나라를 쳤듯이 / 予以燕伐燕
벗에게 술과 색을 삼가라 하네 / 酒色誡親友
사람을 고혹하는 것은 색보다 더한 것 없으며 / 蠱人莫若色
사람에게 해독을 끼치는 것 술보다 더한 것이 없다오 / 毒人莫如酒
장부는 몸 아끼기를 귀히 여기나니 / 丈夫貴嗇身
자네는 주색을 끊을 수 없겠는가 하였더니 / 子可割斷不
그는 답하기를 자네의 말은 / 答云君之言
하나도 내 마음에 맞지 않네 / 百不中吾意
재미없이 사느니 보다는 / 與其薄味生
차라리 즐겁게 살다가 죽으려네 / 孰若快意死
인생은 반드시 죽고 마는 법 / 人生要有死
오직 선후의 차가 있을 뿐이네 / 但存先後耳
삶만이 즐겁다고 말하지 마오 / 毋謂生可娛
죽음 또한 그런지 누가 알겠나 / 焉知死亦如
참으로 고생스럽게 산다면 / 苟謂生甚勞
죽어서 편하기를 도모할 걸세 / 死逸迺良圖
어찌 사는 것을 중히 여겨서 / 何必要其生
쓸쓸하게 몸 하나만을 지키겠는가 하네 / 枯槁守一軀
그대의 말은 내 생각과 다르니 / 子言與吾左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 孰得孰失歟
주색은 누구나 좋아하는 것 / 酒色人所嗜
반드시 내 말을 오활하다 하리 / 必以我言迂
[주D-001]연(燕) 나라가……쳤듯이 : 똑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상대방을 나무라는 것을 말한다.
전국 시대 연 나라가 혼란해지자 이 틈을 타서 제(齊) 나라는 연 나라를 공격하였다.
맹자(孟子)는 “이것은 연 나라가 연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다.”고 비웃었다.
《孟子 公孫丑下》
○길에 버린 어린아이 2수
호랑이 사납다지만 제 새끼는 다치지 않는데 / 虎狼雖虐不傷雛
어느 아낙이 아이를 길에다 버렸을까 / 何嫗將兒棄道途
금년에는 풍년이라 궁핍하지 않으니 / 今歲稍穰非乏食
이는 개가한 여자가 남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리 / 也應新嫁媚於夫
금년에 흉년 들어 굶주린다 한들 / 若曰今年稍歉飢
어린 자식이 먹으면 몇 술이나 먹으랴 / 提孩能喫幾多匙
하루아침에 모자가 원수가 되었으니 / 母兒一旦成讐敵
각박한 인심 알 만하네 / 世薄民漓已可知
○달밤에 강가에서 객선(客船)을 바라보며
벼슬아치 한가롭게 피리를 비껴 불며 / 官人閑捻笛橫吹
포석에 바람부니 나는 듯 빠르네 / 蒲蓆淩風走似飛
하늘의 둥근 달은 온 세상이 함께 하는데 / 天上月輪天下共
혼자만이 독차지하여 배에 싣고 가는가 / 自疑私載一船歸
○승첩(僧帖)을 받았던 중이 파계하여 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시를 지어 희롱하다
머리 기른 속인이나 삭발한 중이나 / 勿論髮在與頭鬜
색 좋아하는 마음은 모두 같다네 / 好色人心摠一般
만약에 석가여래 신통한 주술(呪術) 없었다면 / 不有如來神呪力
아난도 하마터면 마등의 유혹에 빠졌으리 / 摩登幾已誤阿難
이 중이 옹졸한 짓 꾀하다가 잡혔으니 / 此髡謀拙被人擒
어찌 그자들을 일일이 국법으로 다스리려 하는가 / 國令何曾一一尋
아이들을 낳게 내버려 두었다가 모두 장대하거든 / 任遣生雛皆壯大
모두 논밭으로 내몰아 농사짓게 할지어다 / 盡驅南畝力耕深
[주D-001]아난(阿難)도……유혹 : 아난은 석가의 종제(從弟)이며 10대 제자의 하나, 마등(摩登)은
종족(種族)의 이름으로 음탕한 여자 발길제(鉢吉帝)를 가리킨다. 그는 주술을 가지고
아난을 유혹하려 했으나 아난은 석가의 힘으로 그를 물리쳤다 한다.
○이 도사(李道士)를 비웃다
도의 근기(根機)가 미숙해서 아직도 몸에 누린내 나니 / 道根未熟骨猶膻
부랑하게 우리 따라 술 마시며 방탕하네 / 浪逐吾儕放酒顚
단사(丹砂)를 가지고 나에게 자랑말게 / 莫把鼎丹誇向我
자고로 시인들은 모두 신선이라오 / 詩人自古盡神仙
○친구와 술을 마시는데 중이 와서 시를 청하다
만사를 잊으려고 천 잔의 술을 주거니 받거니 / 破除萬事千盃酒
등잔 아래서 정담을 나누네 / 話盡交情一點燈
술 마시며 얘기하기 겨를 없는데 / 飮劇言酣無小暇
스님이 갑자기 와 시를 청하네 / 咄哉還有乞詩僧
○미인을 이별하는 시를 대작하다
떠나는 나에게 돌아오는 날 묻지도 못하고 / 不問儂歸幾日廻
부질없이 옷소매를 잡으며 서성이네 / 謾牽衫袖重徘徊
천 줄기 구슬 같은 눈물을 쏟지 말았다가 / 千行玉淚休多費
빗방울 되어 때때로 꿈속에 찾아주오 / 作雨時時入夢來
○반사일(頒赦日)에 우연히 읊다
무슨 일로 공평하게 한다면서 도리어 공평치 못한가 / 何事平人反不平
계간 세우고 사령 내렸는데 내 이름 빠졌네 / 鷄竿赦下欠吾名
만약 은혜가 글 쓰는 나에게 미친다면 / 若敎恩及含毫士
면전에서 문장을 시험하고는 술 한 잔 내려주시리 / 面試歌詞賜一觥
[주D-001]계간(鷄竿) : 황금으로 닭 모양을 만들어 깃대 끝에 단 것인데 사령(赦令)이 내릴 때
꽂는다.
○엄 선사(嚴禪師)를 찾다
선사는 여간해서는 술을 내놓지 않았으나 나에게만은 반드시 술을 대접하였다.
그러나 시를 지어 사양하였다.(此師稀置酒。見我必置。故以詩止之。)
내가 지금 산방을 찾아온 것은 / 我今訪山家
술을 마시려고 해서가 아닌데 / 飮酒本非意
올 때마다 술자리 베푸니 / 每來設飮筵
얼굴이 두꺼운들 어찌 땀이 안 나겠소 / 顔厚得無泚
스님의 격조 높은 것은 / 僧格所自高
오직 향기로운 차를 마시기 때문 / 唯是茗飮耳
몽정의 새싹을 따서 / 好將蒙頂芽
혜산의 물로 달인 것이 제일일세 / 煎却惠山水
차 한 잔 마시고 한 마디씩 나누어 / 一甌輒一話
점점 심오한 경지에 들어가네 / 漸入玄玄旨
이 즐거움 참으로 청담하니 / 此樂信淸淡
굳이 술에 취할 필요가 있겠나 / 何必昏昏醉
[주D-001]몽정(蒙頂) : 차[茶] 이름으로 석예(石蕊)라고도 하는데 중국 사천성(四川省) 몽산(蒙山)
의 정상(頂上)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매우 진귀하다 한다. 《本草 石蕊》
[주D-002]혜산(惠山) : 혜산천(惠山泉)을 가리킨다. 혜산은 혜산(慧山)으로 쓰기도 한다.
이 샘은 중국 강소성(江蘇省) 무석현(無錫縣) 서쪽인 혜산에 있는데,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설날 조회에서 물러나와 소감을 읊다. 이때에 천우참군(千牛參軍)이 되었다. (時爲千牛參軍。)
오랫동안 명리를 탐하고 꿈에 취해서 / 久貪名利夢方酣
전원으로 가지 못하니 스스로 부끄럽구나 / 未去田園面自慙
늙은 몸이 아직도 백관들 뒤에 있으면서 / 自首猶居百寮尾
청삼(靑衫)과 목홀(木笏)로 조례에 참석하네 / 藍衫木板趁朝參
써늘한 안장에 등자를 밟고 급히 채찍질하니 / 冷鞍敲鐙着鞭忙
쌍 대궐 바라보매 아직도 묘연하구나 / 雙闕相望尙杳茫
길게 휘파람 불고 전원으로 돌아가도 굶지는 않으리니 / 長嘯歸田應不餒
한 해 농사 지으면 한 해 양식 거두리라 / 一年耕得一年糧
○눈 속에 김대년(金大年)을 찾아가 묵으면서 마시다
늙고 혼동하여 전혀 분별이 없어 / 耄老渾無辨
날씨가 갤지 흐릴지 점치지 못했네 / 陰晴不復占
문 밖에 나섰다가 눈보라를 만나 / 出門逢雪作
엄동 설한 새벽길 걷게 되었네 / 行路犯晨嚴
거센 바람 세차게 귓가 스치고 / 箭激風過耳
펑펑 내리는 함박눈은 수염에 얼어 붙네 / 花繁凍合髥
푸른 방한모 어디로 날아갔는지 모르니 / 不知飄翠帽
어느 겨를에 술집의 푸른 깃대 찾아보겠는가 / 何暇望靑帘
다행히 그대의 집이 가까이 있는데 / 賴有君家在
도무지 손을 싫어하는 빛이 없네 / 都無惡客嫌
말은 바야흐로 정다워지고 / 語方成款款
술은 점점 즐겁게 마시네 / 飮漸至猒猒
전에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는데 / 才迫寒飢逼
이제는 취하고 배부르게 되었네 / 俄遭醉飽兼
삭발하지 않은 속인인들 어찌 감격하지 않으리 / 留髡能不感
미끄러운 빙판에 발 붙이지 못하듯 송구하노라 / 氷滑足難黏
○추위에 시달리다
빙판 위에 바람이 차서 적이 하나 더했는데 / 氷上寒風生一敵
눈 속의 따끈한 술은 천금과 같네 / 雪中暖酒直千金
명년 삼복 더위 쇠도 녹일 듯할 제 / 明年三伏流金暑
이날 이 심정을 잊지 말아야지 / 愼勿輕忘此日心
○설날 희롱삼아 짓다
이 몸은 평생 동안 숱한 해를 보냈는데 / 身上平生閱過年
어느 곳에 이 많은 해를 쌓아 놓았는지 / 不知堆積在何邊
만약 주머니에 넣어 헤일 수 있다면 / 假如貯作囊中算
하나하나 꺼내서 하늘에게 되돌리고 싶네 / 一一窮探反却天
○고 기 상국(奇相國)의 별장을 지나면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今爲他有。)
상공이 일찍이 이곳에서 날마다 주연을 베풀며 / 相公曾此日開筵
한 번 잔치에 많은 돈 기꺼이 던졌네 / 一擲靑錢僅百千
묻노니 저 화려한 집 누가 만들어 냈느냐 / 爲問華堂誰幻出
옛날 모정(茅亭)의 천연스러움만 못하구나 / 不如茅榭舊天然
공이 연못가에 모정을 짓고는 이곳에 둘러 앉아 술을 마시니 매우 좋았는데, 지금은 집으로 바뀌어졌다.(公架茅亭於池上。環坐飮酒可愛。今以華屋換之。)
훌륭했던 관복(官服) 모두 영락하고 어디로 갔느냐 / 金釵零落歸何處
아름다운 문객(門客)들 벌여 있던 옛날이 기억나누나 / 珠履參羅記昔年
나도 또한 초대받아 배석했더니 / 我亦當時陪飮客
백발되어 다시 들리니 눈물이 샘솟듯 하누나 / 白頭重過淚如泉
○병이 나은 후 술자리에서 기생에게 주다
술 기운에 춤추며 흥겹게 읊으며 / 酒能鼓舞狂吟興
약 기운에 앓던 몸 날 듯 하여라 / 藥解飛騰久病身
누가 다시 화사한 봄을 늙은이 앞에 펼쳐주나 / 誰更將春供老眼
아름답게 미소 짓는 옥안의 기녀들이로세 / 似花含笑玉顔人
○전이지(全履之)가 안화사(安和寺) 유람을 읊은 시에 차운하다
절경은 무궁한데 재주는 끝이 있으니 / 絶景無窮才有限
아름다운 산천 내 부지런히 읊노라 / 山川入我苦吟中
경각에 천태 만상을 그려내는 그대 부러우니 / 羡君頃刻摹千狀
그대가 어찌 시인이랴 바로 화가로세 / 豈是詩翁迺畫翁
○여러 아들에게 보이다
아들이 부모에게 효도해도 하늘이 모른다면 / 子若篤親天不知
어찌하여 예천이나 지초가 땅에서 나겠는가 / 醴泉芝草何生地
백가와 천사를 모두 궁구해야 하지만 / 百家千史行自窮
효경을 먼저 읽어 깊은 뜻 터득하여라 / 先誦孝經深得旨
○꿈속의 시를 잇다 병서(幷序)
을해년 삼월 어느 날 꿈에,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어느 동굴 안에 있는 누대에 이르
렀는데, 그 누대의 치장이 빛나고 화려하여 예사롭지 않았다. 그래서 옆 사람에게 ‘이곳이 어디
요?’ 하고 묻자 ‘선녀대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예닐곱 명의 미녀들이 문을 열고
나와서 나를 맞아들이고는 간곡히 시를 청하였다. 이에 나는 읊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옥대에 들어오니 푸른 하늘 궁전인데 / 路入玉臺呀碧戶
푸른 눈썹의 선녀들이 서로 반기어 맞이하네 / 翠娥仙女出相迎
그러나 여인들은 나의 시를 몹시 불만스럽게 여겼다. 나는 까닭을 몰랐으나 즉시 시를 고쳐
읊기를,
밝은 눈 흰 이의 미녀들이 웃으면서 맞이하니 / 明眸皓齒笑相迎
선녀들도 인간과 정이 통함을 알겠노라 / 始識仙娥亦世情
하였더니 여인들은 다음 구(句)를 청하였다. 나는 여인에게 양보하자 한 여인이 뒤를 이어 읊기를,
인간의 정이 우리에게 통해서가 아니라 / 不是世情能到我
그대가 뛰어난 재사이기 때문이라오 / 爲憐才子異於常
하였다. 나는 ‘신선도 운이 틀리십니까?’ 하고는 마침내 손뼉을 치며 크게 웃다가 깼다.
나는 다음과 같이 이었다.
밝은 눈 흰 이의 미녀들이 웃으면서 맞이하니 / 明眸皓齒笑相迎
선녀들도 인간과 정이 통함을 알겠노라 / 始識仙娥亦世情
한 구절을 읊자 꿈에서 깨어나니 / 一句才成驚破夢
아쉬움 남겼다가 다시 만나기 위해서일세 / 故留餘債約尋盟
續夢中作 幷序
乙亥三月日。夢遊深山。迷路至一洞。樓臺明麗頗異。問傍人云。是何處也。曰。仙女臺也。俄有美女六
七人開戶出迎。入座苦請詩。予卽唱云。路入玉臺呀碧戶。翠娥仙女出相迎。女等頗不肯之。予雖未知其
故。遽改曰。明眸皓齒笑相迎。始識仙娥亦世情。女等請續下句。予讓於女等。有一女續之云。不是世情
能到我。爲憐才子異於常。予曰。神仙亦誤押韻耶。遂拍手大笑。因破夢追續之。
明眸皓齒笑相迎。始識仙娥亦世情。一句才成驚破夢。故留餘債約尋盟。
○처음으로 서대(犀帶)를 띠고
얼마나 오랫동안 너를 부러워했던가 / 望汝知幾日
드디어 때를 만나 이내 몸에 띠었노라 / 乘時到此身
앞에서 보기에는 별로 다른 모양 없으나 / 瞻前無別樣
뒤에서는 눈부시니 딴 사람 위함일레 / 耀後爲他人
얼룩무늬 등에 있어 안 보이니 / 眼惜斑文背
허리에 걸친 가죽 띠를 자주 돌려매노라 / 腰旋皁革頻
말에서 내리는 사람 연이어 만나니 / 連逢下馬客
비로소 위엄이 뛰어남을 알겠노라 / 始覺異常倫
○칠월 삼일에 바람을 읊다
유월의 염천(炎天)에는 만나기 어렵더니 / 間闊難逢六月天
가을에 접어든 지 사흘 만에 한결 쌀쌀해졌네 / 入秋三日斗凄然
이웃 아이들 모여서 부산하게 떠들며 / 隣家童子渾多事
좋아라 높은 하늘에 지연을 날리네 / 喜向長空送紙鳶
○국화를 읊다
춘삼월이라 봄바람에 곱게 핀 온갖 꽃이 / 春風三月百花紅
가을 한 떨기 국화만 못하구나 / 不及秋天菊一叢
향기롭고 고우면서 추위를 견디니 더욱 사랑스럽고 / 芳艶耐寒猶可愛
더더욱 말없이 술잔 속에 들어오니 정다웁네 / 殷勤更入酒盃中
서리를 견디니 더욱 봄꽃보다 뛰어나 / 耐霜猶足勝春紅
삼추를 지나고도 가지에서 떠날 줄 모르네 / 閱過三秋不去叢
꽃 중에서 오직 너만이 굳은 절개 지키니 / 獨爾花中剛把節
함부로 꺾어서 술자리에 보내지 마오 / 未宜輕折向筵中
○다시 흥성사(興聖寺)에서 놀다가 벽에 글을 쓰다 2수
전에 왔을 적엔 한가한 야인이었는데 / 我昔閑遊一散人
전집(前集)에 흥성사에 유람한 시가 있다.(前集有遊興聖寺詩。)
이번에는 기마 행렬에 벽제(辟除)소리 요란하네 / 今來擁騎喝聲頻
나는 이때 아경(亞卿)인 대제(待制)였다.(予時爲亞卿待制。)
안면 있던 옛 중은 모두 다 바뀌었으니 / 寺僧摠換曾知面
누가 단갈을 걸쳤던 옛날의 나인 줄 알리 / 誰識當時短褐身
그 옛날 시 한 수를 벽에 써놓았더니 / 疇昔曾題一首詩
이제는 시도 없어지고 주인도 바뀌었네 / 詩今漫滅主人非
벽이 헐려 시가 없어졌다.(壁破無詩。)
다시 벽에 시를 쓰지만 어느 중이 알아주리 / 再來涴壁僧誰認
그윽한 새들만 난간 곁을 나네 / 唯有幽禽傍檻飛
○주필(走筆)로 대왕사(大王寺)의 문사(文師)가 숯을 보내 준 데에 감사하면서
섣달 추위에 숯값이 크게 올랐거늘 / 臘天銖炭價超翔
천리 밖에서 다정하게 초막으로 보내주었네 / 千里殷勤寄草堂
손발만 포근하게 쬘 뿐 아니라 / 不獨炙炎柔手足
따끈하게 술을 데워 먹으니 더욱 고맙구나 / 感他熏酒暖於湯
요즘은 혹한의 지옥 속에서 / 邇來方墮寒氷獄
벌벌 떨면서 참고 견디었는데 / 吒吒波波忍可堪
홀연히 덕 높으신 스님께서 따뜻한 숯 보내시니 / 忽荷德人恩煦物
온 집안이 따뜻한 봄철인 양 훈훈하다오 / 滿家和暖似春酣
해마다 검은 숯을 보내주시니 / 年年貺炭色如䃜
추위에 떨던 처자식 기뻐하네 / 喜及寒兒與凍妻
산처럼 높은 은덕을 생각하며 / 算得重恩如嶽峻
하늘같이 장수하시기 비옵니다 / 賽期遐壽與天齊
○겨울밤 산사(山寺)에서 간소한 주연을 베풀다
화려한 집 따뜻한 방 안에서 밤마다 주연 베풀지만 / 華堂燠室宴連宵
부귀의 맛은 없어지기 쉬우니 / 富貴中間味易銷
어찌 백설이 쌓인 한밤의 산재에서 / 何似山齋深夜雪
한가로이 등걸 태우며 막걸리 데우는 흥취에 비기랴 / 閑燒柮榾暖寒醪
○술자리에서 어린 기생에게 보이다
열다섯 어린 소녀의 피어나는 그 얼굴 / 十五女兒顔稍姸
불러도 모르는 체 곁눈질도 하지 않네 / 呼之使前佯不睞
백발의 늙은이 무엇을 하랴 / 白首衰翁何所爲
굳이 수줍어하는 교태 부리지 말렸다 / 不須多作嬌羞態
이 이상은 정리되는 대로 적어서 날짜와 선후의 순서가 없다.(此已上。收拾所得。無日月先後。 )
○을유년 국자감시(國子監試)를 고열하며 짓다
대낮에도 굳게 문이 닫힌 시험장에 / 白晝關門作銷闈
마의를 입은 거자(擧子)들 벽 사이를 엿보누나 / 麻衣猶向壁間窺
우연히 좋은 시구를 만나면 한동안 음미하며 / 偶逢佳句沈吟久
사소한 잘못으로 낙방하는 것 애석해 하네 / 自惜微疵落下遲
곧은 줄로 잘잘못 분별하려 하지만 / 欲把直弦分枉正
늙고 어리석어 우열을 못가리겠네 / 可堪昏鏡混姸媸
하지만 제군들은 재분을 헤아려 / 諸君亦各量才分
방이 나온 다음 시끄럽게 주사를 헐뜯지 마오 / 牓出休喧謗主司
유사(有司)라고 한 데도 있다. (一作有司。)
[주D-001]주사(主司) : 장시관(掌試官)을 가리킨다.
○국령(國令)으로 농민들에게 청주와 쌀밥을 먹지 못하게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장안의 부호한 집에는 / 長安豪俠家
구슬과 패물이 산같이 쌓였는데 / 珠貝堆如阜
절구로 찧어낸 구슬 같은 쌀밥을 / 舂粒瑩如珠
말이나 개에게도 먹이며 / 或飼馬與狗
기름처럼 맑은 청주를 / 碧醪湛若油
종들도 마음껏 마시네 / 霑洽童僕咮
이 모두 농부에게서 나온 것 / 是皆出於農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로세 / 非乃本所受
남들의 손힘을 빌고는 / 假他手上勞
망녕되이 스스로 부자가 되었노라 하네 / 妄謂能自富
힘들여 농사지어 군자를 봉양하니 / 力穡奉君子
그들을 일컬어 농부라 하네 / 是之謂田父
알몸을 단갈로 가리고는 / 赤身掩短褐
매일같이 얼마만큼 땅을 갈았던가 / 一日耕幾畝
벼 싹이 겨우 파릇파릇 돋아나면 / 才及稻芽靑
고생스럽게 호미로 김을 매지 / 辛苦鋤稂莠
풍년 들어 천종의 곡식 거두어도 / 假饒得千鍾
한갓 관청 것밖에 되지 않는다오 / 徒爲官家守
어쩌지 못하고 모조리 빼앗겨 / 無何遭奪歸
하나도 소유하지 못하고 / 一介非所有
땅을 파 부자를 캐 먹다가 / 乃反掘鳧茈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다오 / 飢仆不自救
노동할 때 아니라면 / 除却作勞時
어느 누가 이들에게 좋은 음식 먹여줄까 / 何人餉汝厚
목적은 힘을 취하기 위해서이지 / 所要賭其力
이들의 입을 아껴서가 아니라오 / 非必愛爾口
희디흰 쌀밥이나 / 粲粲白玉飯
맑디맑은 청주는 / 澄澄綠波酒
모두가 이들의 힘으로 생산한 것이니 / 是汝力所生
하늘도 이들이 먹고 마심을 허물치 않으리 / 天亦不之咎
권농사에게 말하노니 / 爲報勸農使
국령이 혹 잘못된 것 아니오 / 國令容或謬
높은 벼슬아치들은 / 可矣卿與相
주식에 물려 썩히고 / 酒食厭腐朽
야인들도 나누어 갖고는 / 野人亦有之
언제나 청주를 마신다오 / 每飮必醇酎
노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데 / 游手尙如此
농부들을 어찌 못 먹게 하는가 / 農餉安可後
[주D-001]부자(鳧茈) : 오우(烏芋), 즉 올방개로 오리가 잘 캐먹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며칠 뒤에 다시 짓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산에 올라가 / 昔人有登山
가을 열매 따먹는 원숭이를 꾸짖었네 / 嗔猿耗秋果
산에 사니 산열매를 먹음은 / 處山食山實
이치에 크게 어긋나지 않으나 / 於理不甚左
돌이켜 생각하면 열매가 열리는 것은 / 飜思果之成
본래 원숭이가 노력한 것이 아니니 / 本非猿力借
꾸짖거나 꾸짖지 않는 것이나 / 嗔之與不嗔
뜻대로 생각하기 달렸지만 / 意在可不可
곡식은 이와 달라 / 穀則異於是
농부들이 이루어 내는 것으로 / 農夫所自化
모두가 이들의 힘씀에 달려 있으니 / 摠係力慢勤
힘쓰지 않는다면 어쩔 방법이 없느니라 / 不勤無可奈
청주를 마시고 쌀밥을 먹는 것이 / 淸醪與白飯
농사를 권장하는 바탕이니 / 所以勸其稼
이들의 입이나 배에 맡길 것이지 / 口腹任爾爲
무엇 때문에 국금을 내리는가 / 國禁何由下
의론이 비록 조정에서 나왔다 하여도 / 議雖出朝廷
망극하신 성은 마땅히 용서하시리 / 聖恩宜可赦
반복해서 사리를 생각해보니 / 反覆思其理
놀고 먹는 자보다 만 배나 먹어야 하네 / 萬倍坐食者
○종이 도망가다 강화(江華)로 천도한 후에 지었다.
서강을 건너자 종은 이미 도망했으니 / 西江已渡僕逋亡
강화로 천도하면 굶주릴까 해서겠지 / 應恐新京餒爾膓
닭으로 점치고 종풀을 꺾어도 찾지 못하니 / 取鷄折葼猶未覓
너는 어느 곳에 그리 깊이 숨었느냐 / 問渠何處固深藏
소씨의 집 종은 모진 매질 괴로워도 / 蕭家僕有厭嚴笞
문장을 사랑하여 차마 떠나지 못했는데 / 猶解憐文莫敢離
네 주인은 재주 없어 떠날 만도 하다마는 / 爾主才麤宜且去
어찌하여 나의 자비심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느냐 / 胡爲略不德吾慈
[주D-001]닭으로……찾지 못하니 : 아무리 점을 쳐봐도 종을 찾을 수 없다는 말. 닭으로 점치는
것은 뼈나 계란으로 하는데 여러 방법이 있다. 종풀은 남색 염료로 쓰는 풀이다. 당(唐)
나라 두생(杜生)은 점을 잘 쳤는데 한번은 종을 잃은 자가 와서 묻자 “이 길로 가다가
사자(使者)를 만날 것이니 그에게 채찍을 달라고 하면 찾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 사람은 가다가 과연 사자를 만나 사실을 말하고 채찍을 청하자 사자는 “나는 채찍이
없으면 말을 몰 수 없으니 대신 종풀을 꺾어 오라.” 하였다. 그는 종풀을 꺾기 위해
종풀이 있는 곳을 가 보니 그곳에 도망한 종이 숨어 있었다. 《新唐書 卷204 杜生傳》
[주D-002]소씨(蕭氏)의……못했는데 : 소씨는 당 나라의 문인 소영사(蕭穎士)를 가리킨다.
10년 동안 그를 섬긴 종이 있었는데 모진 매를 자주 맞았다. 어떤 사람이 종에게 떠날
것을 권하자, 종은 “내가 떠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훌륭한 재주를 사랑해서이다.”
하고는 끝내 떠나지 않았다. 《新唐書 卷202 蕭穎士傳》
○하음(河陰) 객사(客舍)의 서쪽 행랑에 우거하다. 강화로 천도한 뒤에 나만은 집을 짓지 않고,
온 가족과 함께 하음 객사의 서쪽 행랑을 빌어 여러 달을 지내다가 떠났다.
(移都後。予獨於新京未構屋。擧家借河陰客館西廊居之。累月乃去。)
천도한 새 서울에 날로 더욱 집을 지으니 / 新京構屋日滋多
수천의 누에가 다투어 고치를 짓는 듯 / 猶似千蠶競作窠
내 어찌 외로운 노루처럼 들에서 살랴 / 我豈孤獐堪野處
하음의 관사 빌어 내 집을 삼았네 / 河陰官舍借爲家
텅빈 객관 서쪽 행랑에 우거하니 / 數間虛館借西偏
푸른 숲 우거진 산 언저리일레 / 榛莽深深碧峀邊
한 그릇 물 마시며 가난을 참아가니 / 瓢飮自寬聊勉耳
이때 받는 녹이 충분치 못하여 여러 번 양식이 떨어졌다.(時受祿未周。屢在陳。)
이제 다시 가짜 안연이 나왔네 / 從今始有僞顔淵
[주D-001]안연(顔淵) : 공자(孔子)의 가장 훌륭한 제자로 이름은 회(回). 그는 일찍이 가난하여
끼니를 잇지 못하였으나 도를 즐거워하고 근심하지 않았다. 《論語 雍也》
○매미[蟬]
우거진 숲 시원한 그늘 즐겨 찾는 매미야 / 喜擇深深美蔭淸
몸은 작은데 소리는 어이 그리 우렁찬가 / 質何微小韻何宏
우렁차다는 굉(宏)은 갱(鏗)으로 된 것도 있다.(宏一作鏗。)
외로운 나그네 수심스레 듣는 줄 모르고 / 不知孤客偏愁聽
여러 숲 옮겨가며 진종일 울고 있네 / 移遍千林盡日鳴
○계사년 유월 어느 날 아들 함(涵)이 한림(翰林)에 임명된 게 기뻐서
내가 사십이 넘어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 我踰强仕入花甎
이제 아상과 동등한 추밀원 부사가 되었으니 / 今到黃樞亞相聯
나는 아들이 임명되던 날 추밀원에 들어갔다.(予於兒拜日。入樞密。)
헤어보니 너는 나보다 일곱 해나 빠르구나 / 計爾得除先七歲
긴 날개로 붕새처럼 하늘 높이 올라라 / 好將長翮上鵬天
○초당(草堂)의 즉경
귀여운 계집아이 나비 뒤좇으니 나비는 너울너울 / 嬌娘撲蝶翩翩落
어린 아들 매미 잡으니 짹짹 소리 요란하네 / 稚子黏蟬軋軋鳴
읽다 둔 책 졸면서 읽으니 / 一卷殘書和睡讀
흐릿한 잠꼬대로 변해가네 / 依俙漸作寢中聲
○늙어서 옛 친구를 생각하며
백설 같은 흰수염의 외로운 늙은이 생각에 잠겼노라 / 雲髯孤叟暗思量
옛날의 벗들 몇 명이나 살았을까 / 未識故人誰得在
소년들은 늙은이 싫어하여 가까이 아니하니 / 少年忌老憚相親
홀로 앉아 말 없이 옛 친구 생각하네 / 獨坐無言思舊輩
후생들이 다시 너희들 싫어할 날 돌아오리니 / 還有後生憎見汝
그때가 되어서야 너희들은 뉘우치리 / 少年到此方始悔
○최 학사(崔學士) 종수(宗粹) 가 먼저 시에 화답하고 찾아옴을 차운하다.
이 시는 내원당(內願堂)의 확운 대선사(廓雲大禪師)가 맨 처음 창(唱)하였으며 공이 두 수를
화답하였다. 나는 선사의 방장(方丈)에서 이 시를 보고는 한 수를 화답하여 공에게 주었다.
이 때문에 공은 세 수를 화답하여 나를 찾아왔기에 나는 다시 세 수를 차운하였으니 때는
오월이다.
(此詩乃內願堂大禪師廓雲首唱也。公和二首。予於禪師方丈見之。和一首屬公。故公和三首來訪。
予復次韻云。五月也。)
그대가 말 머리를 돌리어 / 感君廻鈿勒
나를 찾아 초당문 두드리는 것 감사하네 / 訪我款茅堂
자리에는 아름다운 아가씨도 없고 / 坐欠梅粧艶
술잔에는 향기로운 술도 없으니 / 盃無桂醑香
서로 만나도 즐겁지 못하련만 / 相逢歡未洽
보고 또 보아도 대화만은 끝이 없으리 / 重見話應長
빈번한 내왕 싫어하지 마오 / 莫厭頻來往
피차가 산 하나 떨어져 사니 / 家才隔一岡
재상의 임무 맡을 줄 알았는데 / 會見調金鉉
어찌하여 옥당에만 머무르나 / 何嗟滯玉堂
공이 오랫동안 한림학사로 있었다.(公久爲翰林學士。)
살구꽃 매화꽃은 늦기도 이르기도 / 杏梅遲早發
난초와 국화는 피는 때가 다르나 향기는 일반 / 蘭菊後先香
훌륭한 그대 나라 다스릴 것이니 / 經世子難免
현자에게 양보함이 나의 장점이네 / 讓賢吾所長
그대는 와서 나를 대신하여다오 / 煩公來見代
나는 소나무 우거진 산으로 돌아가리라 / 歸老萬松岡
그 옛날 꾀꼬리 울고 시냇물 흐르는 마을 / 伊昔鸎溪巷
초당에서 처음 만나 알게 된 후로 / 相知自草堂
처음에 나의 처형인 진군(晉君)의 별장에서 알게 되었다.(初自予妻兄晉君別墅受知。)
다시 머나먼 천리 길을 유람하여 / 更遊千里遠
함께 화류(花柳)를 구경하였네 / 同翫一花香
금구(金溝) 한산(漢山)에서 화류를 구경한 일(金溝漢山花柳事。)
아득한 전생의 인연이 두터웠고 / 曠劫舊緣厚
평생의 교분이 끝없이 길었으니 / 平生交分長
내가 죽은 다음에도 잊지 말고 / 莫忘吾沒後
먼 산에 술 부어 제사해 주게나 / 噀酒酹遙岡
○왼쪽 귀가 약간 어두워지다
근년 들어 완연히 살쩍이 희었는데 / 年來已分鬢霜盈
귀마저 어두워져 분명히 듣지 못하네 / 耳復將聾聽未明
무한히 서러운 중에도 기쁨 있으니 / 無限愁中還有喜
인간의 시비하는 소리 들리지 않아서네 / 不聞人世是非聲
○옛 서울을 생각하며 세 수를 읊다
천수사(天壽寺) 문전(門前)
춘삼월도 머지않아 지나려는데 / 春天三月送將歸
천수사 문전의 봄 경치 얼마나 좋으랴 / 天壽門前景特奇
늘어진 버들 가지 지금도 남았는지 / 柳色依依今在不
언제 다시 위성 삼첩곡을 들으려나 / 渭城三疊聽何時
귀법사(歸法寺)의 냇가
매년 학자들이 여름 공부를 익히던 곳이다.
황량한 옛 서울 차마 생각하기도 괴로운데 / 故國荒凉忍可思
차라리 잊어 바보 되는 것만 못하네 / 不如忘却故憨癡
오직 한 가지 마음이 끌리는 것은 / 唯餘一段關情處
귀법사 냇가에 앉아 술잔 나누던 일이라오 / 歸法川邊踞送巵
여러 유생들이 자주 냇가에 모여 물에 발을 담그고 술을 마셨다.
안화사 연의정(安和寺漣漪亭)
연의정 아랫물은 지금도 잔물결 치고 있겠지 / 漣漪亭下水漣漪
노는 사람 없다 해서 어찌 휴손 있을까만 / 豈爲無人有損虧
물소리 전과 같다 말하지 마오 / 莫道泠泠依舊響
문근이 있지 않으니 ‘있지 않으니’의 부재(不在)를 이단(已斷)으로 한 것도 있다.
소리를 아는 이 누구인가 《능엄경(楞嚴經)》에 ‘소리를 아는 것은 문근으로 말미암는다.’
하였다. / 聞根不在許聲誰
[주D-001]위성 삼첩곡(渭城三疊曲) : 악곡의 이름으로 위성곡(渭城曲)을 반복해서 연주하기
때문에 이름하였는데 양관 삼첩곡(陽關三疊曲)이라고도 한다.
[주D-002]문근(聞根) : 불가에서 말하는 육근(六根)의 하나로 육신의 청각을 가리킨다.
憶舊京三詠
天壽寺門前
春天三月送將歸。天壽門前景特奇。柳色依依今在不。渭城三疊聽何時。
歸法寺川邊 年年學子等夏課處也。
故國荒凉忍可思。不如忘却故憨癡。唯餘一段關情處。歸法川邊踞送巵。諸儒多會川上。垂足水中飮酒。
安和寺漣漪亭
漣漪亭下水漣漪。豈爲無人有損虧。莫道泠泠依舊響。聞根不在 不在一作已斷。許聲誰。楞嚴經云。
許聲因聞。
○대사성(大司成) 이백순(李百順)의 두 해의 문하생들이 잔치를 베풀어 좌주(座主)의 치사(致仕)
를 위로하였는데, 공의 아우 이백전(李百全) 학사도 초청하고 나도 참석하여 술이 취하자 주필
(走筆)로 써서 좌상에게 보였다
이공 형제분은 구슬을 연이은 듯 / 李公兄弟似珠聯
번갈아 대사성이 되어 현재들을 뽑았네 / 迭作司成迭試賢
형이 대사성으로 시험을 맡았는데 아우도 그러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형제의 문생들이 공의 두 문생을 말한 것이다. 형제를 두 분 형제를 말한 것이다.
모시니 / 棣萼門生邀棣萼
후세의 사가들이 미담으로 전하리라 / 史家應作美談傳
李大司成百順兩年門生等。設筵慰座主致政。幷邀公之舍弟學士百全。予亦參赴。醉後走筆。示座上云。
李公兄弟似珠聯。迭作司成迭試賢。兄以大司成掌試。弟亦爾故云。棣萼門生 謂公之兩門生。邀棣萼。
謂兩公兄弟。史家應作美談傳。
○꿈에 등명사(燈明寺)의 유 수좌(裕首座)와 회포를 풀었는데 마침 사람을 보내왔기에 그에게
시를 적어 주다
꿈은 허망한 것 같지만 인증할 만하니 / 夢似空虛亦可援
고인과 서로 만나 인사를 나누었네 / 故人相見問寒暄
꿈이 아니라면 만수 천산 머나먼 곳에 / 不然萬水千山外
한 번 보기도 어려운데 어찌 말을 할쏜가 / 一覿猶難矧一言
○술을 덜 마시다
주정꾼이라고 나무라는 소리 듣기 싫어 / 厭聽人間誚酒狂
요사이 덜 마시니 탈은 없지만 / 邇來省飮亦無傷
다만 붓을 잡고 시를 읊을 때에는 / 唯於放筆高吟處
날개가 꺾어진 듯 높이 날지 못하겠네 / 一翮微摧莫欻張
○졸릴 때에 파리를 미워하다
쫓고 쫓아도 되돌아오니 힘 또한 지쳐 / 驅去還來力亦疲
이불을 덮고 잠 청하지만 꿈속에 들기 어렵네 / 掩衾謀睡夢成遲
사람의 몸을 괴롭히는 것이야 탓하여 무엇하리 / 干人身分何須責
날다가 술잔에 빠져 죽는 것도 모르는데 / 飛墮盃觴自不知
너희들 말고 누가 그렇게 누린내를 탐하느냐 / 貪逐腥膻捨汝誰
검은 점 흰 점 멋대로 얼룩을 만드네 / 點成緇白任渠爲
쓸쓸한 금침에 무엇이 있다고 / 蕭然衾枕看何物
하필이면 잠들려 할 때 떼지어 윙윙대는가 / 侶集喧喧必睡時
○햅쌀을 노래하다
한알 한알을 어찌 가볍게 여기겠나 / 一粒一粒安可輕
사람의 생사와 빈부가 달렸으니 / 係人生死與富貧
나는 농부를 부처처럼 존경하건만 / 我敬農夫如敬佛
부처도 굶주린 사람은 살리기 어려우리 / 佛猶難活已飢人
기쁠손 흰머리 늙은이가 / 可喜白首翁
금년의 벼 다시 보게 되었네 / 又見今年稻穀新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으니 / 雖死無所歉
봄 농사의 혜택이 이 몸에 미치리 / 東作餘膏及此身
○술 거르는 소리를 들으며
항아리 속의 전주 날마다 거르기 싫어 / 甕裏醲醅厭日篘
아이를 불러 눌러짜니 푸른 향기 떠오르네 / 呼兒壓得碧香浮
비로소 근심을 잊게 하는 물건임을 알겠으니 / 始知眞箇忘憂物
통 속에 있는데도 방울소리에 시름 잊혀지네 / 已在槽中滴破愁
[주D-001]근심을 잊게 하는 물건 : 술을 가리킨다. 술을 마시게 되면 마음이 흥겨워지므로 한
말이다.
○장난삼아 짓다 정유년 8월(丁酉八月)
서리 같은 흰 수염의 늙은이 / 霜鬚一老漢
키는 육 척도 못되는데 / 身不盈六尺
받은 녹 그 얼마인가 / 食祿凡幾何
아마도 삼백 오십 석도 넘으리라 / 三百五十碩
배만은 밖으로 볼록 나왔으나 / 有腹外膰然
속은 실로 좁고도 좁네 / 內實狹且窄
언제나 병자처럼 / 尋常如病人
두어 수저밖에 먹지 못하며 / 不過數匙食
매일 서너 잔의 술을 마시고는 / 日飮三四盃
이것으로 조석을 지내노라 / 以此度朝夕
친척이나 친지들 / 親戚與故舊
자식이나 종들까지도 / 僮僕及兒息
늙은 나만을 의지하고 / 所仰唯老夫
취하고 배부르면서도 모르고 있네 / 醉飽不自識
모두가 위에서 내린 녹의 여택으로 / 是皆天祿餘
온 식구가 은덕에 젖어 있으니 / 衆口房霑液
부귀는 결국 남을 위한 것이라는 / 富貴爲他人
옛사람의 말 틀리지 않네 / 古人言不忒
오늘 아침 거울을 들여다보니 / 今朝炤淸鏡
안색이 어제만도 못하네 / 顔色不如昨
만약 내가 죽는 날에는 / 迨我一就木
이 식구들 모두 어디로 갈는지 / 此屬皆安適
○시벽(詩癖) 스스로 점점 고질화된 줄은 알았지만 그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시를 지어 자탄한
것이다.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으며 / 年已涉縱心
지위 또한 삼공에 올랐으니 / 位亦登台司
이제는 문장을 버릴 만도 하건만 / 始可放雕篆
어찌하여 아직도 그만두지 못하는가 / 胡爲不能辭
아침에는 귀뚜라미처럼 노래하고 / 朝吟類蜻蛚
밤에는 솔개처럼 읊노라 / 暮嘯如鳶鴟
떼어버릴 수 없는 시마(詩魔)가 있어 / 無奈有魔者
아침 저녁으로 남몰래 따르고는 / 夙夜潛相隨
한번 몸에 붙자 잠시도 놓아주지 않아 / 一着不暫捨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네 / 使我至於斯
나날이 심간을 깎아서 / 日日剝心肝
몇 편의 시를 짜내니 / 汁出幾篇詩
기름기와 진액이 / 滋膏與脂液
다시는 몸에 남아있지 않네 / 不復留膚肌
앙상한 뼈에 괴롭게 읊조리는 / 骨立苦吟哦
내 이 모습 참으로 우습구나 / 此狀良可嗤
남을 놀라게 할 문장으로 / 亦無驚人語
천년 뒤에 물려 줄 만한 시 못 지었으니 / 足爲千載貽
스스로 손뼉치며 크게 웃다가 / 撫掌自大笑
문득 웃음을 멈추고는 다시 읊는다 / 笑罷復吟之
살거나 죽거나 오직 시를 짓는 / 生死必由是
내 이 병 의원도 고치기 어려우리 / 此病醫難醫
○아들 함(涵)이 나의 시문을 편집하였기에, 그 위에 쓰다
심간을 기울여 일가를 이루니 / 雕刻心肝作一家
그 노력 한유(韓愈)나 두보(杜甫)보다 더하리 / 於韓於杜可堪過
만약 백세 후에 나의 시가 성행한다 하여도 / 假敎百世行之盛
죽은 다음의 뜬 이름이야 내게 무엇하리 / 身後浮名奈我何
초목과 함께 시드는 우리이니 / 草木同枯是我徒
하찮은 시권이야 없느니만 못하리라 / 區區詩卷不如無
아득한 천년 후에 그 누가 알아주리 / 茫然千載能知不
이씨 성 가진 사람이 동해 한 구석에 살았음을 / 姓李人生東海隅
○병중에서 정유년 9월
조물주는 그윽하여 보이지 않으니 / 造物在冥冥
무엇으로도 형상할 수 없네 / 形狀復何似
반드시 스스로 생긴 것뿐이니 / 必爾生自身
나를 병들게 한 자 그 누구겠나 / 病我者誰是
성인은 능히 물건을 물건으로 대하여 / 聖人能物物
한 번도 물건의 부림이 되지 않는데 / 未始爲物使
나는 물건의 사로잡힘이 되어 / 我爲物所物
행동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 行止不由己
네 조화의 손에 걸려 / 遭爾造化手
이렇듯이 곤하다오 / 折困致如此
사대는 본래 없는 것인데 / 四大本非有
이들이 어디에서 왔는가 / 適從何處至
뜬구름 나타났다가 다시 스러지는 듯 / 浮雲起復滅
끝내 근원을 알 수 없네 / 了莫知所自
그윽히 관조하면 모두가 공이니 / 冥觀則皆空
그 누가 태어나고 늙고 죽는가 / 孰爲生老死
나는 자연으로 뭉쳐진 몸 / 我皆堆自然
본성대로 순리에 따를 뿐이니 / 因性循理耳
저놈의 조물주야 / 咄彼造物兒
어찌 여기에 관계하랴 / 何與於此矣
[주D-001]사대(四大) : 불가에서 만물의 기본이라는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네 요소.
○다시 병중에 파리를 미워하여 짓다
평생토록 너희들이 사람 쫓아다니는 것을 미워하지만 / 平生厭汝逐人偏
특히 귓가에서 싸우는 것이 밉노라 / 第一深憎鬪耳邊
앓는 중에 더욱 심한 병을 만나니 / 病裏逢來重値病
이 미물을 번식시킨 하늘이 원망스럽구나 / 滋繁此物怨皇天
○다시 이가 아파서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으며 / 人以食而生
먹을 때에는 반드시 이로 씹는데 / 食必以其齒
이가 몹시 아파 먹지를 못하니 / 齒痛莫加飧
하늘이 나를 죽이려는가보네 / 天殆使我死
강하면 꺾이는 것은 정한 이치지만 / 剛折亦云經
늙고 이 빠지니 더욱 부끄럽네 / 老豁更堪恥
아직도 몇 개가 남아 있지만 / 餘有幾箇存
뿌리가 흔들려서 붙을 데 없더니 / 浮動根無寄
이제 다시 쑤시고 아파서 / 今者又復痛
두통까지 일어나네 / 延及頭亦爾
찬물도 마실 수 없고 / 水寒不可飮
뜨거운 물도 입에 댈 수 없네 / 湯亦不可試
죽도 식기를 기다려 / 糜粥候冷熱
겨우 핥아 먹노라 / 然後僅能舐
하물며 고기를 씹을 수 있으랴 / 矧可齕肉爲
고기가 있어도 한갓 도마에 있을 뿐이네 / 有肉空在杫
이 모두가 늙은 때문이니 / 是實老所然
죽어야 비로소 끝나리 / 無身始迺已
○사직할 생각이 있어서 짓다
쇠잔한 이내 몸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 我欲乞殘身
허리에 찬 인수(印綬)를 풀고자 하네 / 得解腰間綬
한가히 집으로 물러가 / 退閑一室中
무엇으로 나날을 보낼까 하니 / 日用宜何取
때로는 가야금을 타며 / 時弄伽倻琴
우리나라 거문고 이름으로 진(秦) 나라의 쟁(箏)과 같이 생겼는데 나는 즐겨 탔다.
(我國琴名。肖秦箏。予好弄之。)
연달아 두강주를 마시리 / 連斟杜康酒
무엇으로 때묻은 흉금 씻어낼까 / 何以祛塵襟
백낙천의 시를 펴보리 / 樂天詩在手
무엇으로 수양을 할까 / 何以修淨業
능엄경을 외리라 / 楞嚴經在口
이러한 즐거움이 이루어진다면 / 此樂若果成
임금이 되는 것에 뒤지지 않으리 / 不落南面後
옛 친구들 몇 명이나 남았는지 / 耆舊餘幾人
맞이하여 노경의 벗으로 삼으리라 / 邀爲老境友
[주D-001]두강주(杜康酒) : 술 이름인데 옛날 술을 잘 만들었던 두 강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늙은 기생
고운 얼굴 어느덧 꽃 떨어진 가지로 변했으니 / 紅顔換作落花枝
그 누가 아리땁던 너인 줄 알아보랴 / 誰見嬌饒十五時
가무는 아직도 예와 같이 아름다우니 / 歌舞餘姸猶似舊
재기가 쇠하지 않음 사랑할 만하네 / 可憐才技未全衰
○늙은 장수. 위 편의 시와 함께 모두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此與前篇皆自况 )
당년에는 송골매처럼 몸을 날려 / 當年身似鶻飛揚
동북 지방의 여러 싸움터를 누볐었는데 / 東北曾馳百戰場
눈 개면 화살이 날아오는가 착각하고 / 雪霽錯應看箭影
날 흐리면 이따금 칼 맞은 상처 쑤신다오 / 天陰時復發金瘡
조각한 활은 뱀이 숨은 듯 방안에 걸어두고 / 彫弓蛇蟄堂中掛
시퍼런 칼은 용이 서린 듯 칼집에 넣어두네 / 白刃龍蟠匣裏藏
국가에 보답하려는 장한 마음 길이 늠름하여 / 報國壯心長凜凜
꿈에서도 활을 쏘아 오랑캐의 두목 맞추노라 / 夢中鳴鏑射戎王
○쥐의 광란을 읊다 장단구
고양이 기르는 것은 너희들을 잡으려는 게 아니라 / 畜猫非苟屠爾曺
네가 고양이를 보고 스스로 겁내어 숨기를 바라서인데 / 欲爾見猫深自竄
너희들은 왜 숨지 않고 / 胡爲不遁藏
도리어 벽과 담을 뚫고 들락날락 하느냐 / 穴壁穿墉來往慣
나와서 노는 것도 완악한데 / 出遊已云頑
하물며 광란을 부린단 말인가 / 矧復狂且亂
시끄럽게 싸워 잠을 방해하고 / 鬪喧妨我眠
약삭빠르게 사람의 음식을 훔치누나 / 竊巧奪人饌
고양이가 있는데도 너희들이 날뛰는 건 / 猫在汝敢爾
실은 고양이의 재주가 없어서이다 / 實自猫才緩
고양이가 제 구실 다 못했다 하여도 / 猫職雖不供
너희들의 죄는 역시 많으니라 / 汝罪亦盈貫
고양이는 매질로 쫓아낼 수 있지만 / 猫可鞭而逐
너희들은 잡아 묶기 어려우니 / 汝難擒以絆
쥐야 쥐야 그 버릇 고치지 않는다면 / 鼠乎鼠乎若不悛
다시 사나운 고양이로 너희들을 다스리겠다 / 更索猛猫懲爾慢
○개를 타이르다
우리집이 본래 가난은 해도 / 我家雖素貧
나라에서 받는 녹이 허다하니 / 食祿許多斛
네가 더러운 오물을 먹을까 하여 / 恐爾舐穢物
날마다 밥을 먹였거늘 / 亦許日飡穀
어찌하여 스스로 만족할 줄 모르고 / 胡奈不知足
넣어 두었던 고기를 훔쳤느냐 / 盜我所藏肉
주인 따르는 네 정은 가상하지만 / 戀主雖可尊
교묘하게 도둑질한 소행은 참으로 나쁘다 / 巧偸良不淑
나는 수중에 지팡이 있으니 / 我有手中杖
너를 때려 혼내줄 수 있다마는 / 鞭之足令服
집을 지켜주는 임무가 막중하기에 / 守門任莫重
차마 참혹하게 너를 때리지 못하노라 / 未忍加慘酷
○구월 스무이렛날 꿈에 청죽을 깎아 붓자루를 만들었으니, 이 꿈이 무슨 징조인지 알 수 없어
시를 지어 적는다
꿈에서 스스로 푸른 대나무를 깎아서 / 夢中自削碧琅玕
수천 개의 붓자루를 만들어 만지작거렸네 / 作管千千提復弄
강엄의 오색필을 되돌려 줄 만한데 / 江淹五色筆可還
도리어 기군의 청루몽을 꾸었네 / 反見紀君靑鏤夢
조정의 문자에는 이미 생각 없으니 / 朝廷制作已無心
다시 문장을 일삼아 어느 곳에 쓰려는가 / 更事文章老安用
내가 사직하고자 하였으므로 한 말이다.(予欲乞退。故云。)
[주D-001]강엄(江淹)의……되돌려 줄 만한데 : 글 짓는 것을 그만두겠다는 뜻. 육조(六朝) 때
강엄은 문장을 잘하였는데 한번은 꿈에 곽박(郭璞)이라는 자가 “내 붓을 자네가 가지고
있은 지 여러 해였으니 이제 돌려다오.” 하므로, 품에서 오색필을 내어 돌려주었다.
그 뒤로는 아무리 노력하여도 아름다운 시를 짓지 못하였다. 《南史 卷59 江淹傳》
[주D-002]기군(紀君)의 청루몽(靑鏤夢) : 기군은 남조 때 문장이었던 기소유(紀少瑜)를 가리키며
청루는 붓대를 청색으로 아로새긴 붓을 말한다. 소유는 일찍이 꿈에 문장 육수(陸倕)가
청루 붓 한 묶음을 주며 “자네는 이 중에서 좋은 것을 골라 쓰라.” 하였는데 그 뒤로
문장이 크게 진보되었다. 《南史 卷72 紀少瑜傳》
○전 좨주(田祭酒) 보룡(甫龍) 의 시에 차운하다 병서
나는 지난해 봄 과거의 방을 발표하고 축하연을 베풀었었는데 그 자리에서 이군 수(李君需)는
축하시를 지었었다. 이튿날 학사가 한 수를 화답하여 나에게 보내왔으나 나는 오랜 병으로 즉시
화답하지 못했다가 이제야 운을 따라 시를 지어 보냈다.
대궐 뜰에서 창방하여 나라의 인재들 모였을 때 / 彤墀唱牓萃朝英
제일 먼저 옥 같은 공의 음성 들었네 / 第一聞公玉振聲
공이 맨 먼저 창방하였다.
이 몸이 네 번이나 좌주가 되어 / 算我身更四座主
나는 네 번이나 장시(掌試)하였다.
군들이 문생이라 자칭함 영광이로다 / 榮君口放一門生
봄도 큰 잔치 알아 아름다운 꽃을 남기고 / 春知敞宴留花艶
하늘도 손님 맞으라고 맑은 날씨 주셨네 / 天爲迎賓賜日晴
이날 아침 큰 비가 왔는데 손을 맞을 때는 갰다.
훌륭한 시로 나를 칭찬해주니 고맙긴 하지만 / 華袞見褒雖可感
인재 뽑는데 내가 어찌 저울대처럼 했겠는가 / 掄才吾豈較衡平
보내준 시에 ‘저울과 거울로 인재를 뽑아 임금께 아뢰었네.’ 하였다.
次韻田祭酒 甫龍幷序
予於去歲春場放牓後。開賀筵。李君需於座上作賀詩。明日學士和一首來贈。予以久病未和。今方依韻
奉寄。彤墀唱牓萃朝英。第一聞公玉振聲。公首唱牓。算我身更四座主。予掌試凡四度。榮君口放一門生。
春知敞宴留花艶。天爲迎賓賜日晴。是日朝大雨。至迎賓時晴。華衮見褒雖可感。掄才吾豈較衡平。來詩。
衡鏡掄才奏邇英。
○눈을 읊다
겨울 신령이 온갖 꽃 부러워하여 / 北皇應羡百花叢
동군의 조각하는 솜씨 배워가지고 / 故學東君剪刻工
곧바로 봄의 조화 이기려 하여 / 直欲凌他春造化
여섯 모난 꽃을 만들어 새 재주를 보이네 / 剩裁六出示新工
하늘을 휩쓸며 싸라기눈 먼저 내려 / 飄空尙作先來霰
두께가 거의 서리의 높이만 하네 / 撲地粗同厚着霜
이날 싸락눈이 내렸다.(是日微雪。)
어찌 은택이 작다 하여 덜 기뻐하랴 / 豈爲澤微輕負喜
대궐에 새해를 축하하는 상서인 줄 알겠노라 / 亦知金闕賀新祥
[주D-001]동군(東君) : 봄을 맡은 신(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