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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서는 제후들 8
第 八 回
立新君華督行賂
송군을 새로이 세운 화독은 제후국에 뢰물을 바쳐 무마하고
敗戎兵鄭忽辭婚
정세자 홀(忽)은 융병을 파하고 제나라의 청혼을 사양했다.
송상공(宋殤公) 여이(與夷)는 즉위한 이후 누차에 걸쳐 군사를 일으켰다. 정나라를 정벌한다는 명목으로도 벌써 세 번째였다. 오로지 정나라에 망명 중인 공자풍(公子馮)을 두려워한 이유 때문이었다. 태재(太宰) 화독(華督)과 공자풍(公子馮)은 원래 교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화독은 상공이 군사를 일으켜 정나라에 여러 번 쳐들어가는 것을 보고, 중지하도록 간(諫)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감히 말하지 못하고, 그저 마음속으로만 매우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공보가(孔父嘉)가 원래 군사의 일을 주관하는 사마(司馬)의 벼슬을 하였기 때문에, 병사를 동원하는 것이 공보가의 책임도 있다하여, 화독이 그를 매우 싫어하였다. 화독은 공보가를 해칠 기회만을 호시탐탐(虎視耽耽)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공보가는 상공이 중용하고 있는 사람일 뿐 아니라 병권(兵權)까지 쥐고 있어 감히 손을 쓸 수 없었다. 또한 이번에 출정한 군사들도 귀환 길에 대(戴)나라를 통과하다가, 정 나라와의 한번 싸움에서 전군이 전멸하고 공보가 한 사람만이 살아 돌아오자, 송나라의 국인들은 다음과 같이 상공에 대해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
“ 송군(宋君)이 백성들을 생각하지 않고 싸움을 즐겨, 가볍게 군사를 움직인 끝에, 나라 안의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모두 과부와 고아들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호구(戶口)가 줄어들어 나라와 백성들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
화독(華督)도 심복을 시켜 성안에다 유언을 퍼뜨렸다.
“ 군사를 시도 때도 없이 여러 차례나 움직여 전쟁터로 내 보낸 것은 모두가 공보가(孔父嘉)가 주장한 것이다. ”
송나라의 국인들은 그 말을 믿고 사마(司馬)인 공보가를 원망하게 되었다. 화독은 이제야 일이 자기의 뜻대로 되어 간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화독은 공보가의 후실인 위씨(魏氏)의 용모가 매우 아름다워 세상에 비할 바 없다는 소문을 듣고, 그 얼굴을 한번 보지 못한 것을 평소에 한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위씨(魏氏)가 친정 부모님에게 인사를 하러 들렀다가, 친정집 사람들을 따라 성묘를 가기 위해 성문을 나서게 되었다. 때는 춘삼월(春三月)이라, 수양버들은 아지랑이처럼 자욱하고, 꽃은 피어 비단처럼 빛을 내는데, 짝을 지어 밖으로 나와 같이 봄놀이를 하고 있던 선남선녀들 틈에 끼어 위씨가 수레의 휘장을 걷고서 바깥 풍경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때 마침 화독도 성밖의 교외에 나와서 봄놀이를 즐기고 있다가, 위씨 일행과 만나게 되었다. 화독은 그 일행이 공보가의 집안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는 크게 놀라, 마음속으로 혼자 말했다.
“ 세간에서 뛰어난 미인이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다.”
화독(華督)이 집으로 돌아온 뒤로는 밤낮 없이 위씨(魏氏)만을 생각하다가 넋이 나가게 되었다.
“ 만약에 내가 그와 같은 미녀를 데려와 곁에 두고 같이 살 수만 있다면 남은 반생 동안 원이 없겠다! 공사마(孔司馬)를 죽여서 위씨를 빼앗아 내 첩으로 삼고 말리라! ”
화독은 이때부터 공보가(孔父嘉)를 해칠 마음을 더욱 굳게 먹게 되었다.
주나라 환왕 10년 기원전 711년 봄, 공보가는 사냥을 나가기 위해, 전차와 병사를 열병(閱兵)하면서 호령을 매우 엄하게 하였다. 화독이 다시 심복을 시켜 군중(軍中)에 유언을 퍼뜨렸다.
“ 공사마가 다시 기병(起兵)하여 정나라를 정벌하려고 어제 태재(太宰)와 상의하고, 이미 그 뜻을 정했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열병식을 거행하는 것이다.”
군사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삼삼오오 떼를 지어 태재인 화독의 집 문 앞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화독의 접견을 청하며, 전쟁에 나가는 고충을 호소하고 군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정벌하는 것을 중지하게끔, 송군(宋君)에게 건의하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화독이 일부러 자기 집 문을 단단히 잠그게 하고는,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집의 문지기를 덧문으로 나가게 하여 좋은 말로 군사들을 위무(慰撫)하게 하였다. 군사들은 더욱 간절한 마음이 되어 화독의 집 앞으로 몰려들어 점점 그 수효가 불어났다. 날이 저물어 어두지기 시작하자, 많은 군사들이 무기를 송에 들고 화독의 상견을 청하기 위해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집안에 있던 화독이 혼자 말했다.
“ 사람이 모이는 것은 어렵지만 흩어지는 것은 쉬운 일이다.”
화독은 군심(軍心)이 이미 변한 것을 알고, 갑옷을 꺼내 입고, 허리에 찬 칼을 뽑아 손에 들고는, 문지기에게 대문을 열게 하여 대문 밖으로 나왔다. 이어서 장수들과 병사들을 향하여 명령을 전하여, 대오를 갖추고 시끄럽게 소리치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 화독은 대문 앞에 서서 먼저 거짓으로 자비로운 말로 일장 훈시를 하여 군중들의 마음을 가라 앉혔다. 화독이 군사들에게 말했다.
“ 공사마(孔司馬)가 군사를 일으킬 것을 주장하여 백성들에게 재앙을 가져다주고, 여러 사람들에게 해를 입혔다. 그러나 주공께서 한쪽으로만 신임하여 내가 간하는 것을 듣지 않았다. 삼일 후에 또다시 대군을 일으켜 정나라를 정벌한다고 하였다. 송나라 백성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고생을 시킨단 말인가?”
여러 군사들이 격앙되어 소리를 질렀다.
“ 공보가 놈을 죽여라 ”
화독이 짐짓 속마음을 숨기고 군사들을 만류하는 척 하였다.
“ 너희들이 이렇게 난동을 부리는 것을 만약 공사마가 알게 된다면, 공사마는 주공에게 아뢰어 너희들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으리라!”
군사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불만을 말했다.
“ 우리들 부자(父子), 친척들은 매년마다 번갈아 전쟁터에 끌려나가 지금까지 절반이 넘게 죽었습니다. 오늘 또한 대군을 일으켜 출전하려고 하는데, 정나라의 장수들은 용기가 있고 병사들은 강합니다. 어찌 저희가 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앞에나 뒤에나 모두 죽음뿐이니 공보가 놈을 차라리 죽여서 백성들을 해치는 도적을 없앨 수만 있다면, 비록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화독 “ 쥐를 때려잡으려고 하는 자는 마땅히 장독을 깨지 않도록 조심해야 될 것이다 投鼠者當忌其器
. 사마가 비록 악독하다 하나 실은 주공이 사랑하는 신하이다. 이 일은 결코 행할 수 없다!”
군사들이 말했다.
“ 만약 태재(太宰)가 이끄신다면 그 무도혼군(無道昏君)을 저희가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
한 무리의 군사들은 화독을 설득하고 또 다른 무리의 군사들은 화독의 소매를 붙잡고 놔주지 않으면서 한 목소리로 말했다.
“ 원컨대 태재를 쫓아 백성들을 해치는 원수를 죽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
군사들이 곧바로 수레를 끌고 와서는 화독을 들어서 수레에 태웠다. 수레를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화독의 심복이 이미 섞여 있었다. 군사들이 휘파람 소리를 내며 곧바로 달려가, 공보가의 집 앞에 당도하여 그 집을 겹겹이 에워쌌다. 화독이 군사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 큰 소리를 낼 필요가 없다. 내가 대문을 두드리면 그가 나올 테니 그때 죽이면 될 것이다. ”
때는 이미 해가 넘어가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였다. 공보가가 집안의 내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대문 밖에서 문을 급하게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사람을 보내 알아 오게 하였다. 종자가 돌아와서 고했다.
“ 태재(太宰) 화독(華督)께서 몸소 대문 밖에 당도하시어 긴밀히 상론(相論)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공보가가 황망 중에 의관을 정제하고 화독을 영접하기 위하여 내당(內堂)으로 나가 대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대문 밖의 한쪽에서 함성이 일어나며, 군사들이 벌떼처럼 문 쪽을 향하여 달려왔다. 공보가는 마음이 매우 황당해져 발걸음을 돌려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화독이 안채의 마루에 올라가 서있었다. 화독이 공보가를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 백성을 해치는 도적놈이 여기 있는데 어찌하여 손을 쓰지 않느냐?”
공보가가 미쳐 말도 꺼내기 전에 그의 머리는 이미 군사들이 휘두르는 칼에 땅에 떨어 졌다. 화독(華督)이 심복을 데리고 공보가 집의 내실로 들어가, 위씨(魏氏)를 강제로 납치하여 수레에 태우고 공보가의 집에서 나왔다. 위씨가 수레 안에서 어찌할 방도가 없음을 알고 허리띠를 풀어서 목에 걸고 두 손으로 잡아 당겼다. 수레가 화독의 집 앞에 이르자 위씨의 숨은 이미 넘어 간 뒤였다. 화독이 탄식해 마지않았다. 위씨의 시신을 짚으로 싸서 성문 밖에다 버리라고 종자들에게 분부하고, 그를 따랐던 심복들에게 그 일을 발설하면 안 된다고 엄히 당부하였다. 화독에게는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하룻밤의 즐거움도 못 누리고 공연히 여자의 원한만 샀으니 후회막급(後悔莫及)이었다. 한편 공보가를 죽인 군사들은 공씨의 집안을 노략질하여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공보가에는 외동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이름을 목금보(木金父)라 했다. 그때는 나이가 아직 어려 그 가신 중 한 사람이 품에 안고 노나라로 도망쳤다. 후에 자(字)로써 성(姓)을 삼아 공씨(孔)씨라고 했다. 즉 성인(聖人) 공자(孔子)는 목금보(木金父) 육세 손이다.
한편 송상공(宋殤公)은 공사마(孔司馬)가 피살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또한 주모자가 화독이라는 것을 듣고 대노하여, 그에게 죄를 묻고자 즉시 사람을 시켜 입궐하라고 했다. 화독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상공이 어가를 대령케 하고, 공보가의 상을 치르는 곳에 친히 방문하려고 하였다. 화독이 소식을 듣고 군정(軍正) 군정(軍正)/ 사마(司馬) 밑에서 군사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군리(軍吏)들의 장(長)을 불러 말했다.
“ 주공은 공사마만을 신임하고 있다는 것을 너희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멋대로 사마를 죽였는데 어떻게 죄가 없다고 하겠느냐? 선군(先君) 목공(穆公)이 그의 아들 풍(馮)을 버리고 현재의 주공에게 군위(君位)를 넘겨주셨다. 주공은 은혜를 원수로 갚고 사마를 임용하여 정나라에 대한 정벌을 쉬지 않고 하였다. 지금 공사마(孔司馬)가 너희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하늘이 이치를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하겠다. 만약에 대사를 병행하여 선군 목공의 아들을 추대하여 세우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것이며, 그것은 모두에게 어찌 아름다운 일이 될 것이다.”
군정 “ 태재의 말씀은 정히 우리들 여러 사람들의 뜻과 같습니다. ”
군정(軍正)은 군사들을 다시 불러모아 일제히 공보가 집 문 앞에 잠복하게 하였다. 송군(宋君)이 공보가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하여 그 집 앞에 당도하자 군사들이 북을 한번 울리니, 잠복하고 있던 군사들이 일어났다. 송군을 호위하던 군사들은 놀라서 모두 도망가 버리고, 송군(宋君)은 난군들 손에 죽었다. 송군(宋君)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화독(華督)은 상복으로 갈아입고 현장에 당도하여 장례를 치렀다. 이어서 곧바로 북을 울려, 여러 신하들을 모이게 하고, 란을 일으킨 장수 중 두 명을 지목하여, 상공(殤公)을 살해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참수형에 처했다. 화독은 그것으로 중인(衆人)들의 이목을 가렸다고 생각하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 선군의 아들 풍이 현재 정나라에 살아 있고 백성들은 선군의 덕을 잊지 못하고 있으니 마땅히 모셔와서 군위를 잇게 하여야 할 것이오.”
여러 신하들은 다만 “예, 예” 라고 대답할 수 있을 뿐이었다. 화독이 즉시 사자를 정나라에 보내어 송공(宋公)이 죽었음을 알리고 동시에 공자풍을 데려와 송군(宋君)으로 세웠다. 한편으로는 송나라의 창고에 있는 금은 보화를 꺼내어 각국에 뇌물로 보내면서 공자풍이 즉위한 연유를 밝혀 통지하였다.
정장공은 송나라 사절을 접견하고 국서를 받아 읽어보니 송나라의 사신이 온 까닭을 알게 되었다. 정장공이 즉시 어가를 손보게 하여 공자풍을 귀국시켜 송군의 자리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공자풍은 출발준비가 끝나자 장공을 뵙고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며 말했다.
“ 저의 쇠잔한 목숨이 아직까지 붙어 있는 것은 모두가 군주께서 보살펴 주신 덕분입니다. 다행히 저희 나라로 돌아가게 되어 선군의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대대로 정나라를 신하의 예로 모시고 절대로 두 마음을 갖지 않겠습니다. ”
장공도 역시 눈물을 흘렸다. 공자풍이 송나라에 당도하자 화독이 받들어 송군으로 세웠다. 이가 송장공(宋庄公)이다. 화독은 옛날 관직을 그대로 따라 태재가 되었다. 화독은 자기가 저지른 시군(弑君)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중원의 여러 나라에 뇌물을 바쳤다. 중원의 제후국들은 화독이 보낸 뇌물을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 송나라의 일을 문제삼지 않았다. 제(齊), 노(魯), 정(鄭) 세 나라 군주들은 직(稷)[지금의 하남성 신양시(信陽市) 서 약 30키로 되는 곳의 동백현(桐柏縣) 경내]이라는 곳에서 만나 회맹하고 새로 등극한 장공을 송군(宋君)으로 인정하였다. 송장공은 화독(華督)을 송나라의 상국(相國)으로 삼았다. 상(相)으로 삼았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일을 한탄하였다.
春秋簒弑嘆紛然(춘추찬시탄분연)
춘추 연간에는 찬탈과 시역이 다반사로 일어나 어지럽기가 그지없었는데
宋魯奇聞只隔年(송노기문지격년)
송과 노나라에서 일년을 사이에 두고 기이한 소식이 전해졌다.
列國若能辭賄賂(열국약능사회뢰)
열국이 만약 송과 노의 뇌물을 물리쳐 찬시(簒弑)의 죄를 용납하지 않았다면
亂臣賊子豈安眠(란신적자개안면) 란신적자(亂臣賊子)들이 어찌 두 다리를 펴고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겠는가?
또한 송상공(宋殤公)이 의(義)를 버리고 풍(馮)을 시기하여 결국은 시해(弑害) 되었는데, 그것은 하늘의 뜻이었다고 노래한 시가 있다.
穆公讓國乃公心(목공양국내공심)
송목공이 나라를 동생에게 넘긴 것은 공명한 마음에서였는데
可恨殤公反忌馮(가한상공반기풍)
상공은 오히려 목공의 아들을 시기한 것은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今日殤亡馮卽位(금일상망풍즉위)
금일 상공이 시해 당하고 풍이 즉위하였으니
九泉羞見父和兄(구천수견부화형)
구천에 간 상공은 그 부친과 백부를 무슨 면목으로 볼 수 있었겠는가?
한편 제나라 희공(僖公)은 직(稷)에서 귀국하던 중에, 본국에서 보내온 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 현재 북융주(北戎主)가 대량(大良)과 소량(小良) 두 원수에게 군사 만 명을 주어 제나라 변경을 침략해 왔습니다. 축가(祝柯)[현 산동성 제남시(濟南市) 서쪽 25km 지점의 고을]를 이미 함락시키고 역하(歷下) 역하(歷下)/현 산동성(山東省) 제남시(濟南市) 동쪽 근교를 공격 중에 있습니다. 그곳을 지키던 장수들이 당해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구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는 속히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희공 “ 북융(北戎)이 지금까지 누차에 걸쳐 침략을 해와 변경
을 어지럽혔으나, 그것은 쥐새끼가 곡식을 훔쳐먹는 정도였고 또한 개가 나라를 엿보는 정도에 불과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대거 침범하여 왔으니 만약에 노략질을 하여 물러가게 한다면 장차 우리나라의 북변(北邊)은 편안한 날이 없게 될 것이다. ”
제희공은 곧바로 사람들을 나누어 정(鄭), 노(魯), 위(衛) 세 나라에 보내어 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공자원(公子元)과 공손대중(公孫戴仲) 등을 먼저 역하(歷下)로 보내 북융(北戎)의 군사들을 막는데 돕도록 했다.
정장공(鄭庄公)은 제나라가 융병의 침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듣고 곧바로 세자홀(世子忽)을 불러 분부하였다.
“ 제(齊)와 정(鄭)은 동맹을 맺었다. 정나라가 군사를 일으킬 때마다 제나라는 반드시 군사를 보내 도움을 주었다. 오늘 제나라가 군사를 요청하니 마땅히 빨리 가서 돕도록 해야 할 것이다. ”
곧이어 전차 삼백 승을 선발하여, 세자홀(世子忽)을 대장으로, 고거미(高渠弥)를 부장(副將)으로, 축담(祝聃)을 선봉(先鋒)으로 각각 삼고, 제나라를 향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군하게 하였다. 정나라의 구원군은 행군 중에 제희공(齊喜公)이 역하성(歷下城)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그곳으로 직행하여 제희공을 만났다. 그때는 노(魯)와 위(衛) 두 나라의 군사는 미처 당도하지 않았다. 희공이 정나라의 구원군이 신속하게 당도한 것에 감격하여, 친히 성밖으로 나와 마중하고 군사들을 접대하여 배불리 먹였다. 연후에 세자홀과 융병을 물리칠 계책을 상의하였다. 세자홀이 말했다.
“ 융병은 모두 보군(步軍)이라 앞으로 나아가기는 쉽게 하지만 쉽사리 패하기도 잘합니다. 우리는 모두 전차병(戰車兵)이라 나아가기는 어려우나 또한 쉽사리 패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융병의 성격은 경솔하고 그 지휘계통이 엄정하지도 않아, 탐욕스럽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지도 않습니다. 또한 승리를 하여도 서로 양보하지도 않고, 싸움에 패하여도 서로 돕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유인책을 써서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항차 현재 그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우리가 유인책을 쓰면 반드시 우리 뒤를 경솔하게 따라 올 것입니다. 예비부대를 동원하여 싸움을 걸어 거짓으로 못이기는 체하고 도망치게 한다면, 융병은 필히 추격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미리 군사를 매복시켜 기다리게 하였다가 융병을 공격하면, 추격하고 있던 융병은 크게 놀라 뒤로 달아날 것입니다. 달아나는 융병을 추격하여 쫓으면 필히 승리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희공 “ 세자의 계책은 참으로 훌륭하오. 제군(齊軍)은 동쪽에 매복하고 있다가 적군의 앞을 가로막고 정병(鄭兵)은 북쪽에 매복하여 융병의 후위를 공격하기로 합시다. 앞과 뒤에서 공격하면 승리에 만전을 기할 수 있을 것이오”
세자홀이 명을 받고 북쪽 방면으로 출동하여 군사를 두 대로 나누어 양쪽에 매복시켰다. 희공은 공자원(公子元)을 불러 계책을 일러주었다.
“ 그대는 군사를 끌고 동문에 매복하고 있다가 융병들이 뒤쫓아오면 즉시 나아가 공격하라 ”
공손대중(公孫戴仲)에게는 한 떼의 군사를 이끌고 성문 밖으로 나가게 하여 적군을 유인하도록 했다.
“ 너는 싸워서 지기만 하고 절대 이겨서는 안된다. 융병을 우리 군사들이 매복하고 있는 동문으로 유인하기만 하면 공을 세운 것으로 해 주겠다.”
희공이 서로에게 임무를 나눠 배치를 끝내자, 공손대중(公孫戴仲)이 일단의 군사를 이끌고 성문 밖으로 나가 싸움을 걸었다. 북융(北戎)의 장수 소량(小良)이 칼을 들고 말에 올라 융병 삼천 명을 끌고 제군(齊軍)을 맞이하여 싸우기 위해 앞으로 돌진하였다. 두 사람이 교전하기를 이십 여 합에 이르자 대중(戴仲)이 더 이상 당해내지 못하고 전차의 방향을 돌려 도망가기 시작하였는데, 후방에 있던 북문 쪽으로 가지 않고 성을 한바퀴 돌아 동문을 향해 달아났다. 소량이 놓치지 않고 힘을 다하여 뒤쫓아 왔다. 북융군(北戎軍)의 영채(營寨)에 남아있던 대량(大良)은 소량(小良)이 이끄는 융군(戎軍)이 싸움에서 이기는 것을 보고 진채에 남아있던 군사들을 전부 동원하여 소량의 뒤를 따랐다. 소량(小良)의 전대(前隊)가 동문에 가까이 이르자 갑자기 포성과 함성이 크게 진동하더니 이어서 북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덤불과 갈대 숲 속에 숨어 있던 제나라 군사들이 마치 벌떼처럼 일어나 공격을 해왔다. 소량이 급하게 소리쳤다.
“ 적의 계략에 빠졌다. ”
소량이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려고 할 때 뒤따라오던 대량의 군사들과 마주치게 되어 서로 대화를 나눌 새도 없이 방향을 같이하여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공손대중(公孫戴仲)과 공자원(公子元)이 군사를 합하여 융병의 뒤를 쫓았다. 대량이 소량에게 앞의 길을 열라고 분부하고 자기는 후위를 맡아 추격해 오는 제나라 군사를 막으면서 한편으로는 싸우다가 한편으로는 달아나곤 했다. 융병의 대열에서 낙오된 적병들은 모두 제나라의 군사들의 포로가 되었거나 죽임을 당했다. 융병이 작산(鵲山) 근처에 이르러 뒤를 바라보니 제나라의 추격군이 멀리 떨어져 보이지 않게 되자, 휴식을 취하면서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융병들이 숨을 돌리고 밥을 짓기 위해 솥을 걸고 불을 피우려고 하는 순간에, 갑자기 진지 앞의 산등성이에서 함성이 크게 일어났다. 이어서 한 떼의 군마가 뛰어 나오면서 맨 앞에 선 대장이 융병들을 보고 외쳤다.
“ 정나라의 상장 고거미가 여기 있다 ”
대량과 소량이 황급히 말에 올라타, 싸우려고 하지도 않고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고거미가 뒤를 쫓아 엄살(掩殺)해 들어갔다. 대량과 소량이 도망치면서 앞으로 몇 리쯤 달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전면에 함성이 또다시 일더니, 세자홀이 군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향해 돌진해 왔다. 뒤쪽에서는 공자원(公子元)이 제나라 군사를 이끌고 추격해오고 있는 중이었다. 앞뒤에서 포위된 융병들은 십에 칠팔은 목숨을 구해 흩어져 도망쳐 버렸다. 소량은 축담(祝聃)이 쏜 화살에 뒤통수를 막고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대량은 말을 타고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다가 세자홀을 만나자 미처 손을 쓰지도 못하고 세자홀이 휘두른 칼에 맞고 목이 떨어져 죽었다. 사로잡은 융국의 갑병은 삼백 명에 불과 했으나, 싸움 중에 죽인 융병들의 숫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세자홀이 대량과 소량의 수급과 생포한 갑병들을 모두 제후 앞에 바쳤다. 희공이 기뻐하며 말했다.
“ 세자의 이와 같은 영웅적인 분투가 있었는데 융병이 어찌 도망갈 수 있었겠는가 ? 금일 사직이 안정된 것은 모두가 세자의 덕분이오. ”
세자홀 “ 어쩌다가 세운 조그만 공로인데 과분한 상을 받아 전하를 번거롭게 한 것 같습니다. ”
또한 제희공(齊僖公)이 사자를 노(魯)와 위(衛) 두 나라에 보내 원군을 보내는 것을 중지시켜 먼길을 행군하는 수고를 덜게 했다. 제희공(齊僖公)은 명을 내려 잔치를 크게 열게 하여 정나라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자기는 친히 세자홀을 접대하였다. 희공은 세자홀(世子忽)과 같이 앉아서 담소하다가 혼사문제를 다시 꺼내어 이야기하였다.
“ 내가 어린 딸이 있는데 그대와 짝을 맺어 주고 싶은데 세자의 생각은 어떠하오?”
세자홀이 재삼 사양하였다. 연회가 끝나고 희공이 이중년(夷仲年)을 시켜 고거미(高渠弥)로 하여금 다시 혼사문제를 세자홀에게 청해 보라고 부탁했다.
이중년 “ 과군(寡君)이 세자의 영웅의 풍모를 사모하여 혼인을
맺고자 이전에도 사자를 보냈으나 허락을 얻어내지 못하였습니다. 금일 저희 군주께서 친히 세자에게 말을 하여 혼인을 맺고자 하였으나, 다시 세자가 고집을 부려 말을 따르지 않고 있는데, 세자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대부께서는 나서 주신다면 능히 혼인이 이루어지게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백옥 두 쌍과 황금 백 냥을 바치니 거두 어 주시기 바랍니다.”
고거미가 이중년의 청을 받아들여 세자를 만나 제후가 세자를 앙모하여 혼인의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는 뜻을 전했다.
“ 만약 혼사가 이루어져 제나라와 우호관계를 맺게 되면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 경우 대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
세자홀 “ 옛날에 아무런 일이 없었을 때도 제후가 혼사를 청했으나, 나는 감히 나보다 권세가 큰 사람에게 빌붙어 공을 이룩하고픈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아 거절하였습니다. 오늘 부왕의 명을 받들어 다행히 제나라를 구하고 공을 이루게 되어 부인을 얻어 귀국하게 되면 바깥 사람들이 필히 나를 공을 앞세워 부인을 얻었다고 비난할 것임은 자명한 일일 것이오.”
고거미가 재삼 간청했으나 세자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날 제희공이 이중년을 시켜 혼사문제를 세자홀에게 보내 다시 상의하게 하였다. 세자홀이 말했다.
“ 아직 부친에게 아뢰지도 않고 사사로이 혼사를 정하면 죄를 짓게 되는 것일 것입니다. ”
세자홀은 그날로 인사를 드리고 정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제희공이 노하여 말했다.
“ 내 여식의 미색이 빠지지 않는데 어찌 신랑감이 없을 것이라고 걱정하겠는가 ”
세자홀이 정나라로 돌아와서 제후(齊侯)가 청한 혼사를 거절한 것을 장공에게 아뢰었다. 장공이 말했다.
“ 내 아들이 스스로 공업을 이룩하고자 하니 어찌 좋은 혼처가 없을 것을 걱정하겠는가 ?”
제족이 은밀히 고거미를 찾아와 말했다.
“ 주공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이 많이 있소. 공자돌(公子突), 공자의(公子儀), 공자미(公子亹) 등 삼공자(三公子)는 모두 군위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습니다. 세자가 만약 혼사를 받아들여 제나라를 후견으로 한다면 나중에 그 도움을 받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제나라가 혼사를 거론하지 않았더라도 우리 쪽에서 오히려 청해야 할 일인데, 어찌하여 스스로 자기의 날개를 자르는 행동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대는 세자를 모시고 제나라에 간 신하인데 어찌하여 간하여 혼사를 받아 드리도록 설득하지 않았습니까?”
고거미 “ 저도 역시 간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아 어찌 할 수가 없었습니다. ”
제족이 탄식하여 물러갔다. 염옹이 시를 지어 세자홀의 혼사문제를 논하였다.
丈夫作事有剛柔(장부작사유강유)
장부가 일을 도모할 때는 강유(剛柔)를 겸해야 하는데
未必辭婚便失謀(미필사혼편실모)
끝가지 혼사를 거절한 것은 한편으로는 지혜가 없는 짓이었다
詩咏載軀幷敝笱(시영재구병폐구)
시경에 나와있는 재구(載軀) 재구(載軀)/ <시경(詩經)> 국풍(國風) 중 제풍(齊風)에 실려있는 시가. 전문(全文)은 본서 14회에 나와있음.
와 폐구 (敝笱) 폐구(敝笱)/<시경(詩經)> 국풍(國風) 중 제풍(齊風)에 실려 있는 시로써 전문은 본서 14회에 실려 있음. 문강(文姜)이 제양공(齊襄公)을 만나러 가는 것을 노장공(魯庄公)이 막지 못한 것을 노래한 시다.
이를 읽어 보라
魯桓可是得長籌(노환가시득장수)
노환공은 그렇게 비명에 죽지 않았으리라.
고거미는 원래 공자미(公子亹)와 서로 교분이 두터웠다. 제족이 한 말을 전해들은 이후부터는 더욱 관계를 긴밀히 가졌다. 세자홀이 장공에게 고했다.
“ 고거미(高渠弥)라는 자는 공자미(公子亹)와 사사로이 교분을 쌓아 남몰래 왕래를 자주하고 있어 그 마음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장공이 세자홀의 말을 듣고 고거미를 불러 심하게 나무랐다. 고거미(高渠弥)가 묵묵히 장공 앞에서 물러 나와, 공자미를 찾아가 장공에게서 나무람을 받은 이야기를 했다. 공자미가 말했다.
“ 부왕께서 상경(上卿)으로 있던 공자려(公子呂)가 죽자 그 후임으로 그대를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세자가 간(諫)하여 제족(祭足)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소. 이번에도 우리 두 사람이 왕래를 못하게 하려고 세자가 부왕에게 일러바친 것이오. 부왕이 살아 계실 때는 걱정할 것이 없겠으나 만약 부왕께서 돌아가시게 되면 어찌 세자가 우리를 용납하겠오?”
고거미 “ 세자는 우유부단하여 사람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공자께서는 너무 심려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
공자미와 고거미는 이때부터 세자홀과 틈이 생기게 되었다. 후에 고거미가 홀(忽)을 죽이고 공자미를 옹립하게 된 것은 이때의 일로 인한 것이다. 한편 제족(祭足)이 세자홀을 위해 진(陳)나라에서 그 배필을 구하고 위(衛)나라와는 우호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하면서 말했다.
“ 진(陳)과 위(衛) 두 나라는 서로 우호관계를 맺고 있는데 만약에 정나라도 두 나라와 같이 수호를 맺고 혼인을 하게 되면 ‘솥발 같은 세(鼎足之勢정족지세)’를 이루어 스스로 세자의 위치를 굳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세자홀이 동의하자 제족이 장공에게 아뢰었다. 장공이 허락하였다. 이어서 곧바로 진(陳)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혼인을 청하자, 진후(陳侯)가 받아들였다. 세자홀이 진나라에 당도하여 친히 규(嬀)씨를 맞이하여 정나라로 데리고 같이 돌아왔다. 한편 노환공(魯桓公)도 제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청혼을 하였다. 문강(文姜)을 세자홀과 혼인을 시키려다 거절당한 제후는 노후의 청혼을 허락하였다. 이것은 또한 수많은 사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 제 9 회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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